“모든 사람들이 인정했어. 다들 내가 잃어버린 오빠 여동생이라고 했다고!”율은 소리를 질렀다.신무열이 말했다.“그래, 오랫동안 잃어버렸으니 누군가 내 동생 신분을 사칭하고 돌아온 것일 수도 있지. 만약 고생하면서 살고 싶지 않은 거라면 더 이상 내 사생활에 관여하지 마!”율은 주먹을 꽉 쥐었다.돌아온 지 오래되었지만 신무열이 이렇듯 화를 내는 목소리는 처음 들어보았다.그는 지금 그녀를 의심하고 있다.그랬기에 그녀는 긴장해졌다.신무열은 그런 그녀를 신경 쓰지 않았고 자신의 사생활에도 간섭하는 걸 원치 않았다.특별히 마을로 돌아가는 횟수를 줄이며 온지유와의 만남도 자제했다. 괜히 자주 만나면 율의 눈에 거슬리게 될까 봐 말이다.그런데 율은 그런 그의 마음마저 몰랐다.신무열은 떠나 버렸다.덩그러니 남겨진 율은 얼굴을 한껏 찌푸리고 있었고 손톱이 손바닥에 박힐 정도로 주먹을 꽉 쥐었다.“아가씨, 도련님이 하신 말씀을 너무 마음에 담아두지 마...”“입 닥쳐요!”온지유는 김명무를 보며 바로 욕설을 내뱉었다.“전부 그쪽 때문에 일어난 일이잖아요. 그쪽이 내가 시킨 대로 온지유를 죽였으면 이런 일이 있었겠어요? 시킨 일도 제대로 못 해내고 나만 오빠한테 혼나고 말이에요! 정말 쓸모없는 사람이네요!”김명무는 고개를 푹 숙이며 그녀의 욕설을 듣는 수밖에 없었다.“온지유!”율은 이를 빠득 갈며 온지유의 이름을 불렀다.“왜 자꾸 내 앞에 나타나 내 일을 방해하는 건데!”“이번엔 내가 시키는 대로 해요!”그녀는 순간 좋은 방법이 떠올랐다. 이번엔 직접 온지유를 죽일 생각이다.괜히 뒤탈이 생기지 않게 말이다.김명무는 눈빛이 음험해진 그녀를 보며 입을 열었다.“도련님께서 만약 아시게 된다면 분명 아가씨를 가만두지 않으실 겁니다...”“내가 하라면 하라는 대로 해요!”율은 목소리에 힘을 주며 말했다.“흥, 오빠가 아무리 날 가만두지 않는다고 해도 아빠 말씀까지 거역할 수 있겠어요?”결국 김명무는 하는 수 없이 움직여야 했다....온
온지유는 조금 더 기다리다가 책상 옆으로 갔다. 위에는 붓으로 쓴 글씨와 외국어책이 있었다.책을 들고 펼쳐보니 안에서 책갈피가 떨어져 나왔다. 특별히 이상한 점은 없지만 왠지 익숙한 패턴의 책갈피였다. 어딘가에서 봤던 것 같았다.온지유는 곰곰이 생각해 봤다. 그러다가 그녀와 홍혜주를 쫓던 사람들의 옷에 똑같은 패턴이 있던 것을 떠올렸다. 그녀는 충격에 잠겼다.‘어떻게 이런 우연이... 무열 씨랑 법로가 정말 연관이 있는 건가?’“다 됐어요. 얼른 먹으러 와요.”신무열은 국수 두 그릇 들고 왔다. 온지유는 고개를 돌리는 동시에 책갈피를 소매에 숨겼다.“네.”그녀는 신무열과 마주 앉았다. 국수는 가장 간단한 육수에 계란을 넣은 것이었다. 아주 담백해 보였다.“제가 할 줄 아는 게 별로 없어서요. 지유 씨 입맛에 맞았으면 좋겠네요.”온지유는 젓가락을 들고 면을 휘휘 저었다. 시선은 신무열에게 멈춰 있었다. 그러자 열심히 먹고 있던 신무열이 젓기락을 내려놓으며 물었다.“뭐라도 찾아냈어요?”그는 당연히 온지유가 뒤져봤다는 걸 알았다. 온지유가 찾아온 목적도 알았다. 그저 말하지 않았을 뿐이다.온지유도 더 이상 숨기지 않고 책갈피를 꺼내 놓았다.“저 이 패턴 본 적 있어요. 지난번 사람들한테 쫓길 때요. 그 사람들 옷에 이 패턴이 있었어요. 무열 씨 역시 법로랑 연관이 있는 거죠?”“그냥 패턴일 뿐이에요.”“저는 우연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제가 책상을 뒤져볼 걸 알았다면, 이 책갈피도 일부러 넣어둔 거겠네요. 왜 그랬어요? 무열 씨 목적은 도대체 뭐예요?”온지유의 마음속에는 불확실성으로 가득했다. 신무열처럼 부드러운 사람이 도무지 나쁜 사람으로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온지유가 자신을 경계하는 걸 보고 신무열은 입꼬리를 씩 올렸다.“그건 제가 물어야 할 것 같은데요.”“제가 먼저 물었어요. 오늘 아침 저를 죽이려고 했던 사람이랑 만났던 거죠?”“네.”신무열은 숨김없이 말했다.“그 사람 제 여동생이에요.”“여동생이 있었어요? 무열
온지유는 다시 한번 충격받았다. 그녀는 손을 뻗어 줄곧 하고 있던 팔찌를 바라봤다.“이게 무열 씨 어머니 유품이라고요?”“네.”신무열이 대답했다.“말도 안 돼요. 이게 무열 씨 어머니 유품이라고 어떻게 확신하죠? 그냥 팔찌일 뿐이에요. 비슷한 디자인이 분명히 있을 거예요”“아뇨, 이건 단 하나밖에 없어요.”온지유는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지유 씨는 옥에 관해 잘 모르죠? 이 주변에는 천연 옥이 잘 나와요. 그리고 천연 옥은 절대 똑같지 않아요. 지유 씨 팔찌는 제 어머니의 유품이 확실해요. 그래서 제가 의심한 거기도 하고요. 지유 씨 혹시 다른 이름 없어요?”온지유는 주먹을 꼭 쥐며 팔찌를 벗었다.“원래도 제 것이 아니었어요. 친구한테서 선물 받은 거라...”이건 인명진이 준 것이다. 왜 주는지 알려주지도 않고 말이다. 그녀도 이상하게 생각하던 참이었다.인명진은 이 팔찌를 아주 소중히 여겼다. 그녀에게 선물 주면서도 부적 같은 것이라고 말했다. 그런 물건을 다른 말 없이 그녀에게 준 것이다.신무열은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 않았다. 이런 일로 거짓말할 사람도 아니었다.그녀는 전부터 신무열이 팔찌를 뚫어져라 보던 것을 발견했다. 이것저것 묻는 것만 봐도 연관이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녀와는 상관없는 일일 것이다.“전에도 남자한테서 받은 거라고 했죠. 얘기를 나눠도 그 사람이랑 나눠야 할 것 같네요. 그 사람한테 엄청 중요한 팔찌라고 했거든요.”“그 중요한 걸 왜 지유 씨한테 줬대요?”“저도 몰라요.”“지유 씨가 팔찌의 주인이어서겠죠.”온지유는 곧장 부정했다.“절대 아니에요. 저는 부모님이 있어요. 형제자매도 없어요. 오해하지 마세요. 여동생이 상상과 다르다고 해서 저를 끌어들이는 건 사절이에요.”그녀는 몸을 일으키며 떠나려고 했다. 그러나 팔찌가 책상에 놓여 있는 것을 보고는 다시 돌아왔다.“이 팔찌의 주인이 누구인지를 떠나서, 제 친구한테 중요한 물건이니 일단 가져갈게요.”“네. 지유 씨한테 있다는 자체가 인연이니
여이현의 눈빛은 살짝 어두워졌다. 그는 어젯밤 발작한 탓에 온지유의 곁에 있을 수 없었던 것이다.“미안해.”“제가 원하는 건 사과가 아니에요.”온지유가 밀어내려고 하자 그는 더욱 힘을 주며 말했다.“어제는 싸우기 싫어서 피했던 거야. 이쯤 돼야 네 화가 풀릴 것 같아서 다시 돌아왔어.”온지유는 그의 품에 안겨 그를 바라봤다. 거짓말하는 눈빛은 아니었다.그들은 서로 알아가는 시간이 필요했다. 여이현은 그녀가 진짜 원하는 게 무엇인지 모르고 있을 뿐이다.“다음에 같은 일이 생기면 무조건 바로 달래줘요. 물론 그렇다고 해서 용서하는 건 아니지만, 그냥 휙 가버리면 진짜 기분 나쁘다고요. 무시당하는 느낌이에요. 우리 사이를 의심하게 하지 말아요.”“...그랬어?”온지유는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그걸 이제야 알았어요? 여자 마음을 그렇게 몰라서야 되겠어요?”“그래서 배우고 있잖아. 난 경험이 없어서 그래. 잘못한 게 있으면 바로 말해줘. 네가 말한 대로 할게.”그의 진지한 태도에 온지유는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그의 가슴을 손가락으로 콕콕 찌르며 물었다.“그러고 보니 노승아 씨 실종됐다고 하지 않았어요? 지금 어디 있는지 알아요?”“나한테 있는 거 아니야. 난 잘 몰라.”“정말이에요? 또 몰래 도와준 건 아니고요?”“하아... 난 한 번도 노승아를 사랑해본 적 없어.”“못 믿겠어요.”여이현은 바로 설명을 보탰다.“네가 의심하는 것도 당연해. 하지만 노승아는 여씨 집안사람이야. 난 노승아의 인생을 대신 사는 입장이니 이것저것 챙겨주는 것도 당연하지. 일이 이렇게 귀찮아질 줄은 몰랐지만.”온지유는 턱을 괴고 그의 설명을 들어줬다. 둘 사이에 많은 오해가 있는 것 같았다. 더군다나 두 사람은 한 번도 설명한 적 없었다. 정확히는 회피하고 있었다.그때는 여이현도 온지유를 사랑하지 않을 때이니 설명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다 보니 오해는 점점 깊어져 갔다.온지유는 여이현의 어깨에 기대며 말했다.“믿어요.”이 말을 들은 여이현의 눈
“사라져? 아린이가 갑자기?”케빈은 흐느끼며 말했다.“몰라요. 저도 몰라요. 산에 가서 멧돼지를 잡아준다고 했는데, 그 뒤로 쭉 안 돌아왔어요. 사라졌어요...”“멧돼지는 왜 잡아?”“먹어야 한다고요. 집에 고기가 없대요. 그래서 멧돼지라도 잡아 와야 저한테 뭘 먹일 수 있다고 했어요. 선생님, 이제 어떡해요? 어디 가서 누나를 찾죠?”케빈은 눈물을 줄줄 흘리고 있었다.반대로 온지유는 이성적으로 생각했다. 어딘가 이상한 것 같았기 때문이다.“네 부모님은?”“누나를 찾으러 갔다가 아직 안 돌아왔어요.”“우리도 찾으러 가자. 잠깐, 사람이 많을수록 좋을 테니까 몇 명 더 부를게.”“선생님. 대장님은 아까 사람들 데리고 나가던데, 지금 다시 불러올 수 있을까요?”온지유는 밖으로 나가서 상황을 살폈다. 동네에 차가 절반 이상 줄었다.‘이현 씨는 무슨 일을 하러 간 거야. 하필 이럴 때.’그녀는 아린이 너무 걱정되었다. 아무리 이 지역에 대해 잘 아는 지주 집 딸이라고 해도 말이다.아린은 한 번도 이런 말썽을 피운 적 없었다. 산의 지형도 익숙해서 위험한 길에는 들어서지 않을 것이다. 보통은 실수로 떨어지는 일도 적었다.온지유는 더 이상 기다리지 못하고 말했다.“우리끼리 찾으러 가자. 이현 씨한테는 내가 소식을 전할게. 그 전에 우리가 찾을 수 있었으면 좋겠지만.”여이현이 급하게 나간 건 할 일이 있다는 뜻이다. 온지유는 그를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 더군다나 그는 여유 시간이 별로 없는 것 같았다. 연락이 닿는다고 해도 돌아올 수 있을지 문제였다.“네.”케빈은 눈물을 닦았다.두 사람은 손을 잡고 산에 들어갔다. 벌써 아린을 찾기 시작한 주민들이 있었다.대략 10여 명의 주민이 모인 모양인데, 이 큰 산을 다 뒤지려면 적어도 하루는 걸려야 했다.“저희 흩어져서 찾아보죠. 그리고 이곳에서 다시 모여요.”“네.”그들은 온지유의 지시에 따라 각 방향으로 흩어졌다.산길은 아주 가팔랐다. 독충이나 독사가 있을 수도 있어서 조심해야 했다
온지유의 안색이 빠르게 어두워졌다. 하지만 그녀는 전혀 두려워하지 않고 당당히 맞섰다. 앞으로 몇 발짝 걸어간 그녀는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나와, 거기 있는 거 다 아니까.”“읍! 읍읍읍!”커다란 나무 뒤에서 아린이 나왔다. 그녀는 두 손이 포박되어 있었고 안색이 창백했다. 버둥거리며 반항하는 그녀의 얼굴에는 눈물자국이 남아 있었다.겁먹은 아린의 뒤에는 한 남자가 있었다. 남자는 차갑게 입을 열었다.“한참 찾았잖아. 애를 죽이고 싶지 않으면 얌전히 다가와. 아무 소리도 내지 말고.”온지유는 씨익 웃으며 말했다.“날 잡으려고 머리 좀 쓴 모양이네요? 차라리 초대장이라도 보내지 그랬어요. 귀찮게 억울한 사람 끌어들이지 말고.”“여기서 널 잡는 게 쉬운 줄 알아? 이 정도 노력은 해야지.”김명무는 온지유를 죽이는 데 실패했다. 심지어 이 동네에서는 섣불리 움직였다가 되레 당할지도 몰랐다.그는 여이현이 떠날 시간을 노렸다. 그리고 아린이 온지유와 친하다는 것도 파악했다. 이 시간이라면 손쉽게 온지유를 데려갈 수 있다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온지유는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그쪽이 날 죽이려고 했던 거예요?”“시끄러워!”김명무는 미간을 찌푸렸다. 인내심이 바닥 난 그는 과일칼을 들고 아린의 목에 겨눴다.“빨리 와. 너랑 낭비할 시간 없으니까.”“알았어요! 알았으니까 칼 놔요!”온지유는 손을 들고 천천히 다가갔다.아린은 세차게 고개를 흔들었다. 온지유가 제 발로 함정에 걸어오는 것을 보고는 눈물을 주르륵 흘렸다.그녀가 하도 반항해서 김명무는 그녀의 입을 막고 있던 보자기를 빼냈다. 그녀는 울면서 외쳤다.“오지 마요! 선생님을 노리고 온 사람들이에요! 저는 괜찮으니까 오지 마요, 제발!”“내가 안 가면 네가 죽을 거야. 아린아, 난 괜찮아. 괜찮으니까 울지 마. 얼른 집에 돌아가야 네 부모님이 시름을 놓지.”온지유는 또 김명무에게 말했다.“이제 아린이 풀어줘요. 제가 왔으니까 애꿎은 사람 건드리지 말라고요.”아린은 후회하게 시작했
김명무는 안색이 변하면서 물었다.“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누가 알려줬어?”온지유는 눈살을 찌푸리며 말을 돌렸다.“나 아는 거 많아요. 안 그러면 그쪽 배후가 왜 나를 죽이려고 하겠어요.”“도련님이 알려준 거지? 참 역겨운 여자야. 우리 도련님한테서 떨어져.”이 말을 들은 김명무는 온지유에게 더욱 적개심을 품었다.“그쪽 아가씨가 극악무도한 건 아니고요?”“아가씨를 함부로 평가하지 마!”김명무는 그녀에게 칼을 겨눴다.“죽음을 코앞에 두고도 못하는 말이 없네. 내가 너를 못 죽일 것 같아?”온지유는 호흡을 참으며 아무 말도 못 했다. 그녀는 김명무를 따라 천천히 산에서 걸어 나갔다.김명무는 이 산에 대해 아주 잘 아는 것 같았다. 그래서 온지유는 호기심에 묻게 되었다.“되게 빨리 빠져나왔네요? 이 산에 대해 잘 아나 봐요.”“산에서 자랐으니 잘 알 수밖에. 이 동네에는 내가 모르는 곳이 없어.”“우리 얼마나 더 걸어야 해요?”“네가 물을 게 아닌 것 같은데? 입 다물어!”순순히 입을 다문 온지유는 주변이나 둘러봤다.맨발로 산길을 걷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들은 도구 하나 없이 걷지 않았는가? 얼마 지나지 않아 온지유는 땀을 흘리기 시작했다.그녀는 율이라는 여자가 왜 자신을 이토록 싫어하는지 의아했다. 단순히 신무열에게 소유욕이 있어서는 아닌 것 같았다.“그 여자 데려왔어?”율은 분노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정말 되는 일이 없네! 여자 하나 잡아 오는 것도 제대로 못 해?”율은 다짜고짜 짜증을 부리기 시작했다.“데려왔습니다! 명무 형님이 데려왔습니다!”이 말을 들은 율은 눈썹을 튕겼다.“명무 씨는 날 실망시키지 않았네요. 안 그러면 다들 고생 좀 했을 텐데.”그녀에게 사람 한두 명 죽이는 것은 아무 일도 아니었다. 하지만 이제는 살인으로도 속이 후련하지 않았다.그녀는 악독한 표정으로 입꼬리를 올리더니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김명무가 데러온 온지유를 바라봤다.수많은 사람이 이곳에 있었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여기
율의 안색이 순식간에 변했다.“그게 무슨 헛소리야?”그녀는 당황한 표정으로 주변 사람들을 바라봤다. 그러고는 또 고래고래 소리 지르기 시작했다.“당장 저년 입을 막지 못해?! 당장!”말을 마친 그녀는 더 좋은 방법이 생각난 듯 말을 바꿨다.“아니야, 그냥 혀를 뽑아버려야겠어. 영원히 말하지 못하게.”율은 그 뒤로도 한동안 온지유를 어떻게 괴롭힐지 종알댔다. 덕분에 온지유도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사람은 당황할수록 더 과장된 행동을 한다. 신무열의 말을 들어서인지 그녀는 괜히 더 도발하고 싶어졌다.“하.”온지유는 차가운 웃음소리를 냈다.“왜 그래? 무서워? 지금 당장 싹싹 빌면 시체 정도는 남겨줄게.”“내 질문 아직 대답하지 않았어요. 입을 막으려고 하는 걸 봐서 내가 맞는 말을 했다는 거죠? 날 죽인다고 해도 가짜가 진짜로 변하는 일은 없을 거예요.”“닥쳐! 그 입 다물어!”율은 온지유가 무릎 꿇고 비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사람이라면 죽음을 두려워하기 마련이기 때문이다.지금까지 그녀를 두려워하지 않은 사람은 없었다. 온지유를 제외하면 말이다. 온지유의 행동은 그녀의 자존심에 스크래치를 남겼다.“날 닥치게 하려면 그냥 죽여야 할 거예요.”단단히 빡친 율은 얼굴이 다 일그러졌다.“내가 못 할 줄 알아?”그녀는 경호원의 손에서 비수를 받아서 들었다. 그리고 바로 온지유의 얼굴에 댔다.“죽는 게 무섭지 않다면, 차라리 죽여달라고 빌게 해주겠어. 네 얼굴 껍질을 도려낼 거야! 그러면 더 이상 널 사랑할 사람이 없겠지. 네 힘줄도 전부 뽑아내서 평생 불구자로 살게 해줄게.”율은 말하는 것만으로도 흥분되었다.온지유는 꼼짝하지 않고 있었다. 차가운 칼은 그녀의 얼굴에 닿았다. 아픈 느낌이 있기는 했지만 그녀는 눈 한번 깜빡이지 않고 율을 바라봤다.“왜 이렇게 얼굴에 집착해요? 혹시 말 못 할 과거라도 있었어요? 지금 얼굴이 가짜인 건 아니죠? 성형의 흔적이 약간 있는 것 같기도...”“너...!”율은 황급히 얼굴을 가렸다. 그녀는
일주일 만에 권다솔은 많은 일을 해냈다.그녀의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업무 태도는 이미 팀장의 인정을 받았다.“내일 고객을 만나러 가는데 지연 씨도 같이 가죠.”“네? 제가 정말 가도 되나요?” 그녀는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이전에 그녀는 여이현의 비서로 일했던 경험이 있다 보니 혼자서도 충분히 고객을 만나러 갈 수 있었다.하지만 회사에 들어온 지 겨우 일주일 만에 아직 수습 기간도 지나지 않은 짧은 시간 안에 고객을 만날 기회를 준 걸 봐서는 팀장이 그녀를 얼마나 인정하는지 알 수 있었다.“물론이죠. 지연 씨의 업무 능력을 지켜본 결과 저보다 더 뛰어난 것 같은데요. 고객을 만나는 건 당연히 가능하죠.”팀장은 그녀를 전적으로 믿었다.고객을 만나기 전에는 많은 준비 작업이 필요했다. 팀장은 프로젝트 자료를 모두 그녀에게 메일로 보내 주었다.권다솔은 그렇게 오랜만에 메일을 열게 되었다.팀장이 보낸 파일 외에 배진호가 보낸 메일이 눈에 들어왔다. 바로 삭제하려 했지만 손이 미끄러지는 바람에 메일을 열어버렸다.이미 열린 김에 그가 무슨 말을 보냈는지 확인해 보기로 했다.그녀는 처음부터 끝까지 꼼꼼히 읽다가 마지막 부분을 보게 되었을 때 깜짝 놀라고 말았다.그날 밤 그녀와 함께 있었던 사람이 배진호란 말인가?그럼 남태건이 했던 말은 또 무슨 뜻이지?권다솔은 배진호를 차단 목록에서 해제하려는 순간 아빠가 전화를 걸어와 그녀를 사무실로 호출했다.문을 열자마자 화가 잔뜩 난 권용민의 얼굴이 보였다.“아빠, 무슨 일이길래 이렇게 화가 나셨어요?”권다솔은 그의 어깨를 주무르며 말했다.“진정하세요. 저녁에 제가 맛있는 음식을 해줄게요.”“나랑 네 엄마가 전에 정말 어리석었어. 어린애한테 속아서 완전 농락당했지 뭐니. 네가 그 녀석이랑 엮이지 않아서 정말 다행이지. 아니었으면 불구덩이에 뛰어드는 꼴이었을 거야.”남태건 얘기만 나오면 권용민은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그의 이름조차 부르고 싶지 않았다. 권다솔이 의아해하자 그는 두툼한 서류 뭉치를
그녀는 단순히 남태건을 비웃은 게 아니라 자신마저 비웃었다.정말로 몇 번이나 사람을 너무 쉽게 믿었다.“신뢰란 누가 주는 게 아니라 스스로 쟁취하는 거예요. 이제 그만 가세요. 부모님께 무릎을 꿇는 건 괜찮지만 저한테 이렇게까지 하는 건 정말 아니에요.”“권다솔!”남태건은 다시 손을 뻗어 그녀의 옷자락을 꼭 붙잡았다.그는 손에 힘을 가했다. 혹시라도 손을 놓는 순간 그녀를 영원히 잃게 될까 봐 두려웠다.“어서 돌아가요. 앞으로 태건 씨만의 인생을 사세요. 저도 제 인생을 살 거예요. 이미 말했잖아요. 우리 둘은 친구조차 될 수 없다고.”권다솔은 아예 외투를 벗어버렸다.남태건의 손에는 외투만 남아 있었고 아무것도 붙잡지 못했다.그는 그녀가 부모님과 함께 집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그저 멍하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김영은은 몇 번이나 뒤를 돌아봤지만 하려던 말을 애써 삼켜버린 채 그의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졌다.집에 돌아온 권다솔은 부모님께 아까 얘기는 하지 않고 곧바로 회사 얘기를 꺼냈다.“아빠, 엄마. 오늘 오후부터 바로 회사로 가서 일하고 싶어요. 직책은 정해 놓으셨어요?”“굳이 이렇게 서두를 필요 없어. 이틀 정도 푹 쉬어라.”비록 권용민은 모든 준비를 마쳤지만 막상 그녀가 출근하려 하니 마음이 약해졌다.아직 회사에 들어가지 않은 상태라면 자유롭게 놀 수 있었지만 정식으로 출근하게 되면 다른 직원들처럼 매일 출근 도장을 찍어야 했고 함부로 결근할 수 없는 생활이 될 터였다.“아빠 머리에도 이제 흰머리가 있네요.”그녀는 손을 뻗어 그의 흰머리를 뽑아주었다.권용민은 여전히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몇 가닥뿐이야. 나도 거울 보면서 봤어. 내 나이에 흰머리 있는 건 정상이지.”“관리를 잘하면 아빠 나이엔 여전히 까만 머리를 유지할 수 있어요. 제가 걱정되는 건 알겠지만 언제까지 아빠 엄마의 보호 아래서 살 수는 없잖아요. 이제는 제가 아빠 엄마를 돌볼 때예요.”그녀는 부드럽지만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권다솔의 강력한 요청에 권용민
“병이 있는 사람이 치료를 받는 건 생명을 연장하려는 거고 병이 없는 사람이 치료를 받는 건 장수하는 사람이 목을 매달겠다는 거나 다름없지. 그냥 속이려고 한 말이야.”정미진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자식은 결국 부모를 이기지 못하는 법이지.’그는 원래 배진호가 이미 의료비를 납부했다고 말하려 했지만 다시 생각해 보니 돈을 냈건 안 냈건 그녀가 병이 없는 이상 제대로 된 환자처럼 치료를 받을 리 없었다.그리고 배진호에게 의료비를 환불하면 명백히 어떤 속임수가 있다는 걸 드러내는 꼴이었다.고민 끝에 그는 묘안을 생각해 냈다.“이렇게 할까? 매일 약을 가져다줄 테니 먹지 말고 수액도 맞지 마. 그럼 혹시라도 네 아들이 물어보면 우리 둘 다 곤란하지 않을 거야.”“그래, 네 말대로 할게. 역시 의사라 그런지 머리가 참 좋네.”그녀는 자신에게 큰 재앙이 닥쳐오고 있다는 걸 전혀 눈치채지 못한 채 웃음을 멈추지 못했다....비행기에서 내린 뒤 권다솔은 바로 집으로 향했다. 남태건은 평소처럼 손에 크고 작은 선물을 들고 그녀의 부모님께 극진히 대하고 있었다.그녀의 부모님은 예전과 달리 그에게 예의를 갖췄지만 거리감을 유지하며 말했다.“태건아, 우리한테 이런 거 줄 필요 없어.”“마음만 고맙게 받을게. 돈이 꽤 들었을 텐데 우린 답례로 줄 것도 없으니 그냥 안 받는 게 낫단다.”남태건은 말에 숨긴 뜻을 이해할 수 있었다.그들은 지금 그를 전혀 반기지 않았고 자주 만나는 것도 원치 않았다. 결혼 얘기는 더더욱 바라지 않는 듯했다.그가 더 애써 만회하려 하면 할수록 김영은은 더욱 단호하게 말했다.“그만 돌아가.”“제가 뭐가 부족한지 말씀만 해주세요. 다 고치겠습니다. 제발 이렇게 단번에 거절하지 말아 주세요.”남태건은 무릎을 꿇으며 애원했다.너무 갑작스러운 나머지 둘은 깜짝 놀란 채 그를 일으키려 했다.하지만 남태건은 끝까지 무릎을 꿇고 꼼짝하지 않았다.“만약 아무 말씀도 안 하시고 저를 쫓아내신다면 계속 무릎 꿇고 있을 겁니다.”“태
정미진은 순간 당황했다.그동안 배진호가 모든 걸 양보했던 이유는 그녀가 병에 걸렸기 때문이었다.만약 그가 진실을 알게 된다면 분명 크게 소란을 피울 것이고 결국 권다솔과 다시 만날 가능성도 있었다.이런 가능성을 떠올리자 정미진은 두 눈이 깜깜해졌다.“진호야, 엄마 말 좀 들어봐.”“사실이 이렇게 뻔히 드러났는데 뭘 더 설명하시겠다는 거예요? 나이도 있으신 분이 어찌 이렇게 어린애처럼 구세요?”배진호는 고개를 저으며 한숨을 내쉬었다.“이런 걸로 농담하면 안 되죠.”의료 기록에는 명확히 병명이 적혀 있었고 게다가 이미 전문가와 상담한 후였다.더 이상 시간을 끌면 안 되는 병이었다.지금 수술을 받으면 완치 후 정상적인 생활이 가능하지만 조금만 더 늦추면 수술해도 병상에서 벗어나지 못할 수도 있었다.그는 정미진을 그대로 방치할 수 없었다.“내가 이러는 것도 다 너 잘되라고 그런 거야. 네가 내 속을 좀 덜 썩이면 이렇게까지 거짓말할 필요도 없잖니.”정미진은 더 이상 변명이 통하지 않자 모성애라는 명분을 내세워 배진호를 압박하려 했다.장황하게 이유를 늘어놓으며 말했지만 그는 예상과 달리 소리를 지르거나 격하게 화내지도 않았다. 그저 병상 앞에 서서 슬픈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엄마가 원하던 건 전부 이루셨잖아요. 이젠 제발 말 좀 들으세요. 의사 선생님 말씀대로 치료받으세요.”그제야 정미진은 깨달았다.그는 그녀가 수술을 받지 않았다는 사실은 알아냈지만 그녀가 병에 걸리지 않았다는 사실은 몰랐다.‘그거면 됐지!’그녀는 계속해서 이 핑계로 배진호에게 자신이 원하는 것을 강요할 수 있었다.정미진은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말했다.“그럼 권다솔과 이혼해. 네가 이혼 서류를 엄마 앞에 가져오는 날부터 엄만 치료받을게.”“이미 이혼 절차는 끝냈어요. 지금은 이혼 숙려 기간일 뿐이에요.”배진호는 차분히 설명했다.어쩔 수 없이 이렇게 말해야 했다. 혹시라도 그녀가 화를 내면 몸을 전혀 돌보지 않을 게 뻔했기 때문이다.“눈앞에 이혼 서류가
“도대체 누가 밖에서 헛소문을 퍼뜨린 거야! 진짜 사람을 이렇게 괴롭혀도 되는 거니?”김영은은 화를 참지 못하고 소리 질렀다. 그녀는 소문을 퍼뜨린 계정을 찾아내면 꼭 고소해서 법적 책임을 묻겠다고 단단히 결심했다.“불난 집에 부채질한 거겠죠. 전 누구 소행인지 알 것 같은데요.”권다솔은 이미 떠오르는 사람이 있었다.과연 그 사람 말고 누가 이런 일을 저지를 수 있을까?권용민은 다급하게 물었다.“누군데? 아빠한테 말해봐. 가만두지 않겠어.”“남태건이요.”권다솔은 덤덤하게 내뱉었다.순간 전화 너머로 정적이 흘렀다.둘은 서로 눈을 마주치더니 믿기 어렵다는 눈빛이었다.남태건은 평소 평판이 좋은 사람이었고 권다솔에게도 진심으로 대했으며 둘을 친부모처럼 공경했다. 그런 사람이 어떻게 이런 일을 뒤에서 꾸밀 수 있단 말인가?권다솔 역시 부모님이 쉽게 믿지 않을 걸 알았다. 그래서 한 마디 덧붙였다.“태건 씨는 늘 저와 결혼하고 싶어 했어요. 우리 집 문을 한참이나 두드리면서 이웃들까지 다 소란스럽게 만들었고 제가 거절하자 엄마, 아빠를 찾아갔잖아요. 지금은 엄마, 아빠까지 거절했으니 극단적인 행동을 벌이는 것도 이상하지 않죠.”“그런데, 다솔아, 우리한테 증거가 없잖아. 증거도 없이 태건이를 탓하는 건 너무 불공평한 것 같아.”그녀의 어머니는 망설이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마 남태건을 오해하고 싶지 않은 모양이었다.만약 정말로 남태건이 이런 일을 저질렀다면 지금까지 꾸며낸 이미지로 그들을 속여 왔다는 뜻이었다.그런 사람을 딸에게 소개하려 했다는 사실에 그녀는 큰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결국 권용민이 결정을 내렸다.“좋아. 다솔이 넌 밖에서 편히 놀다가 돌아와. 엄마랑 아빠가 조사해 볼게. 만약 정말로 태건이의 소행이라면 앞으로 우리 집 근처에도 못 오게 할 거야.”“아니에요. 저도 티켓 끊고 바로 돌아갈게요. 엄마, 아빠가 제 일 때문에 계속 신경 쓰시는 게 너무 죄송해요. 밖에서 논다고 해도 마음이 편치 않을 거예요.”그녀는
배진호는 이 시간에 잠들지 않았다.그는 이미 조사 자료를 손에 넣은 채 한 장 한 장 넘겨 보고 있었다.마지막까지 다 보고 난 그는 도대체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몰랐다.어머니의 수술은 가짜였지만 병은 진짜였다. 그의 어머니는 현재 폐암 초기 상태였고 심장 상태도 별로 좋지 않았다. 게다가 두 병이 함께 겹친 상황이라 치료하기 쉽지 않을 게 분명했다.이런 상황인데도 어머니는 수술을 생각하지 않고 오히려 그에게 계속해서 권다솔과 헤어지라고 압박하고 있었다.배진호는 내일 어머니와 진지하게 이야기해 봐야겠다고 생각하고 잠 자기 전 시간을 확인하려고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그렇게 남태건이 이 시간에 보낸 도발적인 메시지를 보게 되었다.그 순간, 배진호는 온몸의 혈액이 멈춘 듯한 느낌을 받았다.남태건과 권다솔이 결혼한다고?이미 실시간 검색어에 올랐다면 틀림없이 사실일 것이다.하지만 이게 권다솔 본인의 뜻인지 아니면 그녀의 부모님께서 결정한 건지는 알 수 없었다.아마도 전자일 가능성이 컸다. 권다솔의 부모님은 딸의 의견을 존중하는 분들이다. 만약 그녀가 원하지 않았다면 그들이 강제로 결혼 시킬 리 없었다.‘왜 이런 일은 항상 나한테만 일어나는 거지?’그는 권다솔을 포기할 수도 그렇다고 그녀의 결혼을 망칠 수도 없었다. 이제 두 사람은 정말 인연이 아닌 것 같았다. 그만 집착을 버리고 놓아주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생각했다.잠들기 전, 배진호는 권다솔에게 메일 한 통을 보냈다. 메일의 마지막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난 술집에서의 그날 밤을 잊을 수 없어. 네가 내 목에 팔을 두르고 내 이름을 부르던 그 순간을. 다솔아, 네가 정말 날 싫어한다면 이 메일을 삭제해 줘. 앞으론 더 이상 널 방해하지 않을게. 하지만 언제든 네가 날 찾고 싶다면 난 항상 그 자리에 있을 거야.”배진호는 권다솔이 메일을 확인하는 습관이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녀가 이 메일을 발견할 때쯤이면 아마 한참 시간이 흐른 뒤일 것이다.어쩌면 그녀는 이 메일을 평생 보지 않을
남태건은 그들이 참으로 안타깝게 느껴졌다. 사랑하는 사람과 끝까지 함께하지 못한 결말이란 결국 이런 것이었다.그는 절대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남태건은 자신이 권다솔을 얼마나 깊이 사랑하는지 알고 있었다. 결혼 후에는 매일 밤 집으로 돌아와 그녀와 오붓한 시간을 보낼 것이고 만약 아이를 가지게 된다면 셋이 함께 여행을 다니며 행복한 가정을 꾸릴 것이다.그는 자신의 결혼 생활이 부모님의 결혼 생활보다 훨씬 더 행복하리라 확신했다.“제 결혼 문제에 대해서는 간섭하지 마세요. 오늘 두 분을 부른 이유는 단지 이 소식을 알리기 위해서입니다. 며칠 안에 양가 부모님이 만나서 함께 식사할 테니 저의 체면을 깎지 말아 주세요.”말을 마친 남태건은 몸을 돌려 떠났다.그는 더 이상 부모와 할 이야기가 없었다.이후 그는 권용민에게 연락해 식사 날짜를 논의하려 했다. 그러나 권용민은 미안한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미안하네. 우리 다솔이가 여행을 떠나서 언제 돌아올지 모르겠네. 식사 약속은 다음에 다시 잡도록 하지.”그는 권용만의 말 속에서 거절의 의미를 느낄 수 있었다.다음에 다시 논의하자는 한마디는 구체적인 날짜를 말하지 않았기에 즉 식사 약속을 잡고 싶지 않다는 뜻이었다.“아버님, 다솔이가 돌아오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양가 부모님께서 먼저 만나도 되지 않겠습니까?”그러나 남태건은 쉽게 포기하지 않았다.이미 자신의 부모님께 이야기를 전했는데 이 약속이 무산된다면 그의 부모님께서 어떻게 생각하겠는가?그러나 권용만운 딸의 행복을 최우선으로 여겼다.“태건아, 양가의 만남은 중요한 일이라 서두를 필요 없어. 다솔이가 돌아오면 의견을 들어보고 결정하자. 이런 일은 신중하게 처리해야 하네.”남태건은 어떻게 전화를 끊었는지조차 기억나지 않았다.그가 유일하게 확신할 수 있는 건 권다솔이 그를 피하려고 멀리 떠났을 뿐만 아니라 그녀의 부모님마저 이전처럼 친절하게 대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그렇다면 이제 남은 방법은 하나뿐이었다.‘권다솔, 모든 건
그리고 엄마가 아프다는 시점도 너무 절묘했다. 설마 아픈 척하는 건가?이럴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에 배진호는 아무 말 없이 자리를 떴다. 반드시 철저히 조사해야 했다.그가 떠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배진호의 어머니는 잠에서 깨어났다.아들의 의심을 불러일으킨 것도 모른 채 여전히 의사와 대책을 논의하고 있었다.“내 아들 앞에서 꼭 내 병이 심각한 것처럼 말해줘야 해. 안 그러면 걔 마음이 여전히 그 여자한테 기울어 있을 거야.”“걱정 마. 동창끼리 네 계획을 망치기라도 하겠어?”의사는 가슴을 두드리며 장담했다.“내가 다 맡을 테니 신경 쓰지 마. 그런데 사실 나도 부탁이 하나 있는데 우리 아들이 유학을 가야 하는데 돈이 조금 모자라거든. 좀 도와줄 수 있어? 올해 보너스 나오면 바로 갚을게.”정미진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흔쾌히 승낙했다.어차피 그녀는 돈에 쪼들리지 않았으니.배진호가 비서로 일할 때부터 매달 월급 일부를 그녀에게 보내왔고 이후 그가 회사를 차려 독립하면서 더 많은 돈을 보내왔다.그녀는 사고 싶은 것을 마음껏 사면서 이제는 좋은 며느리를 얻는 데만 집착하고 있었다.“돈은 천천히 갚아도 돼. 여유가 생기면 갚아. 동창 사이인데 내가 너를 믿지 않겠어?”그녀의 말에 의사는 기쁘게 고개를 끄덕였다.병실을 나선 의사는 고개를 저으며 중얼거렸다.“사람이 참 복에 겨워 사는 줄 모르네. 배진호 같은 아들에, 그토록 훌륭한 며느리까지 얻었는데 뭐가 불만이야? 게다가 그 집안의 돈은 몇 대가 써도 부족함이 없는데 굳이 문제를 만들 필요가 있나? 나라면 절대 그러지 않았을 거야. 그냥 일도 때려치우고 집에서 술이나 한잔하면서 낚시도 하고 가끔은 카드놀이도 하면서 살겠지. 생각만 해도 얼마나 여유롭겠어?”하지만 그는 정미진이 아니었고 방관자로서 더 이상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다음 날 아침, 권다솔은 간단히 짐을 챙긴 후 캐리어를 끌고 여행사로 향했다.그곳에는 대형 버스가 대기하고 있었고 모든 인원이 모이자 운전기사는 공항으로
지금 그의 모습이 헌신짝이랑 다를 게 뭐가 있지?권다솔 때문에 이렇게까지 할 가치가 있을까?배진호는 전혀 그녀의 말을 듣지 않았다.그는 여전히 석규리를 등진 채 그녀를 무시했다.석규리는 자신이 무슨 말을 해도 소용없다는 것을 깨닫고 결국 다른 사람의 도움을 청하기로 했다.한 통의 메시지를 보낸 뒤 불과 30분도 채 되지 않아 배진호의 어머니가 직접 나타났다.정미진을 본 순간 배진호는 정말 미칠 것만 같았다.“엄마! 몸도 안 좋으신데, 게다가 이제 막 수술을 끝내셨잖아요. 퇴원하시면 어떡해요?”“내가 와서 다행이지! 아니면 네가 여기서 얼마나 더 멍청하게 서 있었을지 몰라. 진호야, 엄마가 곧 죽게 생겼는데 너 정말 엄마를 좀 편하게 보내줄 수 없는 거니?”정미진은 배진호의 이마를 꾹 눌러가며 안타까워했다.권다솔의 가정환경이 조금이라도 평범했다면 돈으로 해결했을 것이다.하지만 권다솔은 권씨 가문의 아가씨로서 정미진이 아무리 손을 뻗어도 권씨 가문까지 닿을 수 없었기에 결국 배진호에게만 압박을 넣을 수밖에 없었다.“엄마가 부탁할게. 죽기 전에 몇 날이라도 좀 조용히 지낼 수 있게 해줘. 더 이상 문제 일으키지 말고 권다솔과 깨끗이 끝내. 네가 꼭 여기에 남아 있겠다면 엄마도 너랑 같이 있을 거야.”정미진은 외투를 벗어 석규리의 손에 건넸다.그녀는 안에 얇은 옷만 입고 있었다.석규리가 옷을 다시 정미진의 어깨에 덮어주려고 했지만 정미진은 단호하게 거절했다.“엄마가 아들 교육을 제대로 못 시킨 탓에 내 아들이 한밤중에 여기서 바람 맞고 있잖아. 나만 병실에서 잘 먹고 편히 있을 수는 없지 않겠어?”“엄마, 정말 제가 무릎이라도 꿇어야 멈추시겠어요?”배진호의 눈에는 이미 생기가 없어진 채 허망한 표정으로 바라봤다.역시나 자신에게 가장 큰 상처를 주는 사람은 가장 가까운 사람이라는 사실을 다시금 깨달았다.“진호야, 엄마는 네가 무릎 꿇으라고 이러는 게 아니야. 엄마가 원하는 건 네가 권다솔과 완전히 끝내는 거야. 이게 엄마의 마지막 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