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혜성은 원래 조금 더 버텨보려고 했지만 인명진과 인명진의 친구들이 힘으로 밀어버린 덕에 문이 열려버렸다.분명 그와 만난 지 엊그제인 것 같았지만 눈앞에 이런 상황이 펼쳐지니 은서우는 감회가 남달랐다. 시끌벅적한 분위기와 손에 든 부케, 사람들에게 둘러싸인 인명진이 한 걸음씩 그녀에게 다가왔다...은서우의 심장이 쿵쾅쿵쾅 뛰었다. 이혜성은 먼저 인명진의 앞을 가로막으며 다가갈 수 없게 했다.“이렇게 쉽게 우리 서우를 데려가게 할 수는 없죠. 꿈 깨요!”이 말을 마친 이혜성은 손가락을 튕겼고 이내 들러리들과 함께 말했다.“앞으로 결혼 후 돈 관리는 누가 하죠?”인명진은 은서우를 힐끗 보았다.“당연히 아내한테 맡겨야죠!”그들은 이어서 물었다.“앞으로 누구 말만 들어야 하죠?”“당연히 아내 말만 들어야죠!”주위에 있던 사람들은 어느새 웃음을 터뜨려 버렸고 질문은 계속 이어졌다.“집안일은 누가 하죠?”“내가 해야죠.”...연거푸 10개가 넘는 질문을 하고 나서야 그들은 입을 다물었다. 이혜성은 눈웃음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축하해요. 남편감으로 합격이네요.”그녀는 뒤로 물러서며 인명진이 은서우에게 다가갈 수 있게 해주었다. 한 걸음만 움직였을 뿐인데 이혜성은 또 그의 앞을 가로막으며 눈을 깜빡였다.“설마 한 입으로 두말할 건 아니죠? 만약의 상황을 위해 저희가 이렇게 각서를 준비해왔어요. 말로 하겠다고 하는 것보다 종이에 증거를 남기는 게 더 좋잖아요.”이혜성이 손뼉을 치자 들러리들은 대체 어디서 가져왔는지 모를 의자와 테이블을 그의 앞에 대령했다. 테이블 위엔 종이와 인장이 있었다. 글씨로 빼곡한 종이엔 전부 그녀들이 방금 했던 질문과 그가 지켜야 할 서약이 적혀 있었다. 그리고 오른쪽 끝 모서리엔 인명진이 인장을 찍을 수 있는 빈 곳도 있었다. 들러리들은 인명진의 손을 잡더니 인장을 쥐여주며 종잇장에 꾹 찍게 했다. 한 장, 두 장... 꽤나 많은 종이가 휙휙 지나갔다. 인명진은 너무도 빨리 종이를 빼버리는 그들 때문에 뭐가 적
이혜성을 빤히 보던 은서우는 얼굴에 웃음을 띤 채 고개를 젓다가 손에 든 부케를 보았다. 무언가 좋은 생각이 떠오른 듯했다. 더는 부케를 누구에게 줘야 할지 고민하지 않아도 되었다.빠르게 시간이 흘러 어느새 부케를 던지는 순서가 되었다. 순백의 웨딩드레스를 입은 은서우는 부케를 어느 한 방향으로 높이 들어 올렸지만 꽃은 떨어지지 않았다. 던지려고 준비하는 그녀의 모습에 사람들은 긴장감이 조금 풀리게 되었다. 그 순간 은서우는 갑자기 방향을 틀더니 이혜성이 있는 곳으로 휙 던져버렸다.지금 이 순간 이혜성 옆에 있던 사람들은 뭔가라도 눈치챈 것처럼 전부 옆으로 비켜주었다. 부케는 이혜성이 있는 곳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이혜성은 부케를 받지 않으려고 본능적으로 뒤로 물러났지만 그녀의 주위엔 아무도 없었다.그녀가 받지 않는다면 부케는 잔디 바닥에 떨어지고 마는 것이었다. 부케가 바닥에 떨어지려고 하자 이혜성은 결국 앞으로 달려가 떨어지기 직전에 품으로 받아버렸다.그런데 행동이 너무도 컸는지 저도 모르게 치맛자락을 밟게 되었다. 중심을 잃은 그녀는 넘어질 것이 분명했지만 뜻밖에도 아무런 통증도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누군가의 따스한 품이 느껴졌고 머리 위로 듣기 좋은 중저음의 목소리가 들렸다.“괜찮아요?”이혜성은 황급히 몸을 일으켜 세우며 고개를 저었다.“네, 괜찮아요.”너무도 다급하게 움직였던 탓인지 아니면 남자의 품으로 넘어지면서 무언가가 남자의 옷에 걸렸던 탓인지 그녀가 몸을 일으켜 세우자 단추 하나가 잔디 위로 떨어졌다.민망해진 이혜성은 얼른 허리를 굽혀 줍고 그에게 건넸다.“이거 돌려드릴게요.”말을 마친 후 이상한 기분에 잠시 생각하다가 다시 그에게 단추를 건넸다.“전 바느질 할 줄 몰라요.”그러자 상대는 나직하게 웃으며 말했다.“괜찮아요.”정식적인 절차가 끝나고 다들 잔디 위에서 자유롭게 돌아다니며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야외에서 진행하는 결혼식이었던지라 그들은 사전에 함께 할 수 있는 게임도 준비했고 뷔페와 술도 가득했다.은서
이혜성을 언급하자 은서우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그래도 혜성이가 마지막에 마음 약해져서 부케를 받아서 다행이에요. 안 그랬으면 헛수고가 될 뻔했잖아요.”오늘 이혜성의 옆에 서 있던 사람들도 전부 미리 그녀의 말을 듣고 피한 것이었다. 다들 그녀가 이혜성에게 부케를 던질 것을 알고 있었기에 혼자 덩그러니 남은 이혜성이 부케를 받았다. 그런데 이혜성도 피할 줄은 몰랐다. 만약 정말로 피했다면 그녀의 계획은 실패로 넘어가게 된다.“그러고 보니.”은서우는 뭔가가 떠오른 듯 고개를 돌려 인명진을 보았다.“오늘 혜성이가 넘어질 뻔한 걸 잡아준 사람이 누구예요? 애인이 없겠죠? 겉보기엔 꽤 괜찮은 사람 같던데. 애인이 없다면 혜성이한테 소개해주고 싶네요.”그러자 인명진은 바로 미간을 구겼다.“오늘은 서우 씨와 나의 결혼식인데 다른 남자 볼 여유가 있나 봐요.”죄를 씌우려면 얼마든지 핑계가 있다고 은서우는 어처구니가 없어 인명진을 째려보았다. 곧 화를 낼 것 같은 그녀의 모습에 인명진은 그제야 장난기를 거두고 말했다.“내 친구예요. 인성은 문제없고 예전에는 바이오에 관한 기술을 연구했던 사람이기도 하죠. 개인적인 사정으로 그만뒀지만요. 소개하는 건 딱히 문제가 되진 않는데 혜성 씨가 흔쾌히 소개받을는지는 모르겠네요.”은서우는 곰곰이 생각하다가 이혜성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감정이라는 것은 노력한다고 해서 생기는 것이 아니었다. 가끔은 운명일 때도 있었다.“아무리 운명에 맡긴다고 해도 부케도 이미 받았고 이참에 소개까지 해주면 남은 건 혜성이가 알아서 하겠죠.”인명진은 화장을 고치는 은서우의 옆에 한참 머물렀다. 옷도 갈아입은 은서우가 문밖을 나서자 이미 그들이 술잔을 든 채 문 앞에서 인명진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그 술잔들은 인명진을 위해 준비한 것임이 분명했다. 인명진은 분위기를 깨지 않고 받아 들었다. 일전에 이미 숙취해소제와 위장약을 챙겨 먹었던지라 그들과 즐겁게 웃으며 술을 마셨다.주량을 조금 넘어버리자 은서우는 슬쩍 그의
은서우는 바로 다가가 이혜성을 방해하지 않았다. 그저 고개를 돌려 인명진과 서로 마주 보며 미소를 지었다. 결혼식이 끝나고 하객들도 돌아갔다. 하루 종일 바쁘게 움직였던 은서우는 그제야 한숨 돌릴 수 있을 것 같았다.집으로 돌아오니 집안 곳곳에 그녀의 손길이 닿은 흔적이 있어 은서우는 마음이 너무도 편안해졌다. 예전이었다면 볼 수 없는 집안 모습이었다.“수고했어요.”어깨에 커다란 두 손이 올려지고 적당한 압력으로 그녀의 어깨를 주물러 주었다. 은서우는 무의식적으로 미간을 찌푸리며 남자의 손을 잡았다. 인명진은 부드럽게 그녀의 손을 내리며 말했다.“괜찮으니까 긴장 풀어요.”은서우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그렇네. 깜빡 잊고 있었네. 지금과 예전은 다르잖아. 난 이젠 명진 씨 아내라고.'“고마워요.”인명진은 눈썹을 꿈틀거렸다.“대체 언제까지 거리감이 느껴지게 나한테 고맙다는 인사를 할 셈이에요? 이참에 우리 말도 놔요.”그녀는 입을 꾹 다물고 장난기 가득한 눈빛으로 보는 인명진을 보았다. 그녀의 얼굴이 점점 더 붉어졌다. 인명진은 민망해하는 그녀의 얼굴을 빤히 보더니 그윽한 모습으로 그녀의 귓가에 대고 작게 속삭였다.“욕실에 물 받아뒀는데 오늘은 같이 씻을까?”은서우는 하마터면 말하는 법을 잊을 뻔했다. 그녀는 대답하지 않았지만 본능적으로 인명진의 목으로 올라간 팔이 지금 그녀의 기분을 말해주는 것 같았다.인명진은 바로 그녀를 공주님 안기 자세로 들어 올렸다. 신혼 생활은 예전과 많이 달랐다. 혼자 살던 때와 달리 두 사람이 한 지붕 아래 함께 살아가야 했다. 처음에 은서우는 너무도 적응되지 않았다.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자신의 옆에 누군가 누웠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저도 모르게 멍한 얼굴로 보다가 어젯밤 보냈던 오붓한 시간들이 떠올라 얼굴이 한참 동안 붉어졌다.함께 사는 시간이 점점 더 길어지고 더는 낯설어하지도 않았고 부끄러워하지도 않았다. 두 사람은 점점 서로에게 적응되었고 화목하게 지냈다. 병원으로 오자 사람들은
“응, 내가 보육원도 이미 알아봤어. 그런데 왜 자꾸 존댓말이야?”인명진이 말하자 은서우는 의아한 목소리로 말했다.“반말은 아직 좀 어색해서요. 넌 나중에 천천히 할게요. 그런데 이미 알아봤다고요? 전에... 새로 지을 거라고 하지 않았어요?”인명진은 고개를 저었다.“곰곰이 생각해봤는데 새로 짓기엔 비용이 너무 많이 들고 사람들의 믿음을 얻기도 힘들잖아. 새로 지으면 사람들이 어떻게 믿고 아이들을 맡기겠어.”그들의 보육원에는 원장과 보육교사도 필요했다. 받는 월급이 적었던지라 보육원에서 일하려는 사람이 많지 않았고 대부분 시간을 낭비라면서 보육원에 일하려 하지 않았다.“마침 적당한 보육원이 하나 있더라고. 운영 부진으로 폐업되었는데 그곳엔 여전히 보육교사들과 갈 곳 없는 아이들이 살고 있어. 보육원이 파산당하긴 했지만 갈 곳도 없어서 계속 남아 있었나 봐. 게다가 보육교사들도 어떻게든 다시 보육원을 되살리려고 애를 쓰고 있더라고.”그의 말을 들은 은서우는 눈을 반짝였다.“그래서 새로 짓지 않고 그 사람들을 도와주려고 한 거예요?”그녀는 기쁜 얼굴로 인명진의 얼굴을 감싸더니 뽀뽀를 해주었다. 쪽 소리가 유난히도 크게 울려 퍼졌다.“완전 좋은 생각이잖아요!”그러나 은서우는 너무 기쁜 나머지 점점 어두워지는 인명진의 눈빛을 미처 발견하지 못했다. 그 순간 그녀는 인명진에게 확 끌어당겨 졌다. 반응하기도 전에 그녀는 그의 품에 꽉 끌어안겼다. 이내 그녀의 입술로 그의 입술이 닿더니 거친 키스가 이어졌다.점차 숨이 차는 은서우는 그의 옷깃을 꽉 잡았다.“잠깐만요... 여긴 병원이잖아요. 명진 씨 진정 좀 해요.”인명진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병원으로 돌아온 뒤로 고강도의 업무에 시달렸던지라 두 사람은 며칠 동안이나 부부 생활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그랬기에 인명진은 현재 불만이 가득 쌓인 상태였다. 겨우 이런 기회가 찾아왔으니 그는 당연히 놓칠 생각이 없었다.한참 지나서야 인명진은 그녀를 놓아주었다. 얼굴이 빨갛게 물든 은서우는 그를 밀어내더니
기획안은 빠르게 완성되었지만 제일 중요한 것은 그래도 직접 보육원으로 찾아가 살펴보는 것이었다. 그렇게 은서우는 시간을 내서 인명진과 함께 보육원으로 출발했다.보육원은 위치가 아주 좋았지만 그다지 환영받지 않았다. 마치 사람들에게 잊혀버린 곳처럼 보육원에 있는 모든 물건들이 전부 낡은 것이었고 건물도 몇십 년 전에 지어진 것처럼 대문마저 녹슬어 있었다.보육원으로 도착했을 때 은서우는 바로 페인트 떨어진 벽을 보게 되었다.“이런 집에 사람이 살고 있다고요? 확실해요? 이건 언제 무너져도 이상하지 않은 집이잖아요.”그녀가 묻자마자 모직 코트를 입은 여자가 안에서 나왔다. 그녀의 말을 들은 것인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맞아요. 여긴 보육원인데 올해 가을에 철거한다는 결정이 났어요. 보육원엔 아직 서른 명이 넘는 아이들과 보육교사, 그리고 저까지 전부 합쳐서 총 마흔 명이 있어요. 만약 이 보육원이 철거된다면 서른 명이 넘는 아이들은 어디로 가야 할까요. 전 아직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르겠어요. 그걸 지금까지 생각하다 보니 어느새 지금까지 여기서 버티게 되었네요. 그러니 저희를 좀 도와주세요.”은서우는 중년의 여자를 보았다. 여자는 온화하게 생겼지만 입고 있는 모직 코트는 낡아 색도 바랬다. 보아하니 아주 오래 입은 것 같았다. 여자의 옷차림에서도 보육원이 얼마나 가난한지 알 수 있었다.“죄송해요. 그런데 혹시 누구신지 알 수 있을까요?”은서우는 자신이 말실수했음을 알고 바로 사과했다. 중년의 여자는 이곳 보육원의 원장이라고 그들에게 소개했다. 그 말은 들은 은서우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눈앞에 있는 사람이 원장이라니 말이다.“아가씨, 뭘 그렇게 놀래요? 대부분 아가씨와 같은 반응이더라고요. 밖은 추우니까 일단 들어가서 계속 얘기해요.”원장은 그들을 안으로 초대했다. 안으로 들어간 은서우는 이곳 보육원이 얼마나 가난한지 더 깊이 알게 되었다. 이곳은 정말이지 가난해도 너무 가난했다. 원장이 그들에게 대접할 수 있는 음료수도 그저 따듯하게 끓인 물
은서우는 원장이 정말로 너무도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원장이 진정하길 기다린 후 그녀는 보육원의 아이들을 만나보고 싶다고 말했다. 그러자 원장은 흔쾌히 대답했다.“그래요. 제가 우리 아이들을 보여드릴게요. 다만 아이들 중에 조금 혼자 동떨어져 있는 특별한 아이가 보일 거예요. 그래도 너무 개의치 말아요.”원장은 말을 하다가 진지해졌다. 은서우는 그런 그녀의 모습에 조금 놀랐고 원장의 입에서 나온 특별한 아이가 궁금해졌다.빠르게 그들은 어느 한 교실로 도착했다. 이곳에서 보육교사들은 하나의 방을 쓰고 있었고 다른 곳은 학교 교실처럼 만들었다. 보육원에 아이들이 너무도 많았기 때문에 아이들의 학비를 대줄 여력이 되지 않았다. 이렇게 지원을 받는 것도 너무도 오랜만이었다.하지만 학교 다녀야 할 아이들이 아무런 지식도 없는 채 자라게 될까 봐 보육교사들은 서로 번갈아 가며 아이들을 가르쳐주었다. 그리고 지금 교실에선 한창 수업 중이었다.은서우는 갑자기 들어가면 아이들이 놀라게 될까 봐 들어가지 않고 문밖에서 창문으로 조용히 안을 들여다보았다. 빠르게 그녀는 아이들과 어울리지 못하는 남자아이를 발견했다.다른 아이들은 아주 활발하게 선생님의 질문에 대답도 하고 함께 게임도 했지만 유독 구석에 앉아 있는 남자아이만 혼자 블록 하나를 손에 꼭 쥐고 멍 때리고 있었다.“원장님이 말씀하신 특별한 아이가 혹시 저 아이인가요?”마음이 흔들린 은서우는 바로 물었다. 원장은 고개를 끄덕였고 아이를 보는 두 눈빛엔 근심과 자애로움이 가득했다.“네, 저 아이가 맞아요. 아이의 이름은 천유민이고 아이의 엄마가 아이의 아빠와 이혼한 후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어요. 원래라면 아이의 아빠가 아이를 키워야 하는데 아이의 아빠도 갑작스러운 심근경색으로 세상을 떠나버렸어요. 더는 남은 가족이 없어 우리 보육원으로 오게 되었는데 예전에는 아주 활발하고 잘 웃는 아이였다고 하더라고요. 그런데 그날 후로 단 한 번도 웃지 않았대요. 저와 선생님들이 아무리 말을 걸어봐도 계속 저 모습이에요.”
은서우는 고개를 끄덕였고 보육교사가 나가자마자 아이가 앉아 있는 책상 옆으로 다가갔다. 몸을 굽힌 그녀는 블록만 멍하니 보고 있는 남자아이를 보았다.“그거 어떻게 맞추는 건지 알고 있는데. 가르쳐줄까?”남자아이는 멈칫했다. 은서우는 그런 아이의 모습을 못 본 척했다.“블록 맞추는 거 어렵지? 그리고 네가 들고 있는 그 블록은 하나뿐인 것 같네. 혹시 블록 더 없어?”남자아이는 고개를 들어 그녀를 보았다. 은서우는 아이가 자신의 말에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뜻밖에도 아이는 입을 열었다.“네. 더 있어요. 방에 있어요.”간단하게 대답했지만 아이가 입을 열었던 사실에 은서우는 충분함을 느꼈다. 아이가 입을 열기만 한다면 희망이 있다는 것이었으니까. 그러고 난 후 은서우는 아이를 따라 방으로 가서 블록을 가져왔고 그렇게 오후 내내 블록을 맞췄다.도중에 보육교사가 아이의 식판을 들고 들어왔지만 아이는 음식에 흥미를 보이지 않았다. 설령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나도 먹지 않았고 자신의 몸이 어떻게 되든 신경 쓰지 않았다.은서우는 당연히 지켜만 보고 있을 수 없었다. 그녀는 열심히 블록을 맞추고 있는 아이의 곁으로 다가갔다.“내가 방법을 알려주긴 했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야. 더 알고 싶어? 그런 거라면 일단 밥부터 먹을까?”“배고프지 않아요.”아이가 말을 하자마자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 은서우는 못 들은 척하며 고개를 끄덕였다.“하지만 내가 배고픈걸. 우리 먼저 밥 먹으면 안 될까?”남자아이는 한참 생각했다. 기껏해야 다섯 살쯤 되는 아이가 어른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으니 은서우는 조금 의외라고 생각하긴 했지만 놀라지는 않았다.자폐증이 있는 아이들은 대부분 머리가 좋았다. 심지어 어느 한 분야에서 천재인 경우도 있었지만 대가는 평생 바깥세상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이었다. 아이가 침묵하고 있는 것도 생각에 빠진 것이 틀림없었다. 그녀의 말을 들을지 말지 곰곰이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이것은 좋은 현상이었기에 은서우는 인내심 있게
“왜? 마음이라도 아픈 거야?”“알았어요.”그녀는 이를 악물며 대답했다. 잠시 후, 집으로 돌아와 불을 켜던 그녀는 소파에 우두커니 앉아 있는 최지후의 모습에 깜짝 놀랐다.“왜 불도 안 켜고 있어요?”여울은 놀란 가슴을 어루만지며 물었다. “어두컴컴한 게 좋아서.”그가 그녀를 향해 손을 뻗었다.“이리 와봐.”여울은 얌전히 다가가 살짝 몸을 숙여 그의 관자놀이를 주물렀다.“왜요? 기분 안 좋아요?”“응.”무심하게 대답하던 그가 갑자기 그녀의 손목을 낚아챘다.“당신은 나 배신하지 않을 거지?”그 말에 여울은 손끝이 살짝 떨렸다.‘설마 최지후가 뭔가 눈치라도 챈 걸까?’그녀는 애써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갑자기 그게 무슨 말이에요?”“그냥 궁금해서.”그가 그윽한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당연히 그럴 일 없죠. 난 지후 씨 곁에 평생 있을 거예요.”그녀는 예쁜 말로 골라서 했고 원하는 답을 들은 최지후는 이내 환하게 웃었다.“그래. 당신이 날 배신한다면 내가 당신을 지옥으로 끌고 갈 거야.”농담처럼 들리지만 왠지 모르게 등골이 오싹해졌다. ...“윤슬 씨, 나 어떡하죠? 최근에 회사의 프로젝트들이 지석훈 때문에 다 엉망이 되어버렸어요.”엄우정이 다급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지금 이 순간, 그녀는 문지원을 건드린 것이 엄청 후회되었다.강윤슬은 그녀를 보며 언짢은 표정을 지었다. ‘그러게 바보같이 왜 일을 만들어서는... 일이 틀어지니까 날 찾아와?’“윤슬 씨, 말 좀 해봐요. 내가 누구 때문에 그런 건데요?”강윤슬이 말이 없자 엄우정은 더 초조해졌다.이번 일을 해결하지 못한다면 집에도 돌아갈 수 없을 것이다.강윤슬은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우정 씨, 석훈이는 이제 우정 씨가 알던 사람이 아니에요. 나도 우정 씨를 어떻게 도와줘야 할지 모르겠어요.”잠시 머뭇거리던 그녀가 다시 말을 이어갔다.“문지원 씨를 찾아간다면 어쩌면 되돌릴 수 있을지도 몰라요. 문지원 씨는 줄곧 우정 씨와 협력하고 싶어
최주하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역시 그럴 줄 알았어. 문지원 씨 때문이 아니라면 네가 나한테 보자고 할 일도 없겠지.”“말해 봐.”한참을 망설이던 지석훈은 끝내 입 밖으로 말을 꺼내지 못했다.“됐다. 술이나 먹으러 가자.”말하고 싶어 하지 않는 그의 모습에 최주하도 더 이상 캐묻지 않았다. 술잔을 들자마자 최주하의 핸드폰이 울렸고 확인해 보니 여울한테서 걸려 온 전화였다. “잠깐 전화 좀 받게 올게.”지석훈은 고개를 끄덕였고 최주하는 밖으로 나오며 통화버튼을 눌렀다. “무슨 일이야?”“볼 일이 있어서요...”전화를 끊고 최주하는 다시 지석훈에게로 다가갔다. “미안하다. 일이 있어서 가 봐야 할 것 같아. 나중에 시간 되면 내가 술 살게.”“됐어. 일 있으면 가.”최주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돌아섰다.혼자 술을 마시던 지석훈은 핸드폰을 꺼내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신한 그룹의 그 프로젝트, 나한테 넘겨.”전화를 끊은 후, 그는 눈앞의 술잔을 쳐다보며 깊은 생각에 빠져 버렸다. 자신이 왜 신한 그룹을 겨냥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저 모든 것이 본능에서 비롯된 것 같았다. 한편, 프라이빗한 호텔에 도착한 최주하는 흰 원피스를 입은 채 소파에 앉아 있는 꽃 같은 여인, 여울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의 눈빛은 아무런 파동이 없었다. “말해.”여울은 그를 쳐다보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주하 씨, 최지후 씨가 저한테 마음을 완전히 연 것 같아요.”그녀의 말대로 확실히 성공적이었다. 현재 최지후는 여울을 완전히 신임하고 있었고 무방비 상태라 그녀에게 많은 편의를 제공한 것도 사실이다.“알아. 하지만 난 더 가치가 있는 것이 필요해.”최주하는 차가운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왠지 모르게 갑자기 부담감이 확 밀려왔고 최주하가 만족할 만한 답을 내놓지 못한다면 자신의 처지가 곤란해질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저... 최지후 씨가 최근에 입찰을 진행 중인 프로젝트의 입찰 문서를 손에 넣었어요.”그녀는 급히 입을 열
문지원은 이미 정신이 혼미해진 상태였고 온몸이 뜨겁게 달아올라 고통스러웠다. 지석훈에게 붙어있으면 조금은 편안해지는 느낌이었다.손을 뻗어 그의 목을 감싸고는 필사적으로 그를 향해 더 가까이 다가갔다. 부드러운 입술이 닿자 흠칫 놀라던 그의 눈빛이 갑자기 어두워졌다.그가 앞에 앉아 있는 운전기사를 향해 입을 열었다.“출발해요. 가장 가까운 호텔로 갑시다.”이내 가림막이 내려졌고 문지원은 여전히 끙끙거리며 그의 몸을 더듬기 시작했다. 그녀의 손길에 그의 몸도 덩달아 뜨거워졌다. 얼마 후, 차가 호텔 앞에 멈춰 섰고 그가 그녀를 안아 들고 호텔 안으로 들어갔다.프런트 데스크에 다가가 블랙 카드를 꺼내며 한마디 했다.“스위트룸으로 잡아줘요.”프런트 데스크의 직원은 훤히 다 꿰뚫어 보고 있는 듯한 표정이었다. 룸에 들어온 후, 그는 문지원을 침대에 눕혔다. 막 일어나 자리를 뜨려고 하는데 그녀가 그의 목을 감싸며 다급하게 입을 열었다.“가지 마요.”그녀를 한참 동안 쳐다보고는 입을 열었다.“문지원, 이건 당신이 선택한 거야.”더 이상 그도 참지 않았고 들끓어 오른 욕정을 드러냈다. ...뜨거웠던 밤이 지나고 아침 햇살이 창문을 통해 들어왔다. 잠에서 깨어난 문지원이 몸을 움직이는데 갑자기 온몸이 쑤시는 것 같았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깨닫자마자 그녀는 바로 고개를 돌렸고 그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그가 천천히 눈을 뜨는데 눈빛은 평온하기만 했다.“깼어?”“저기... 우리...”그녀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지만 지석훈은 아주 자연스러웠다.“걱정하지 마. 책임질게.”“책임... 책임질 필요 없어요. 어젯밤 일은 사고였어요.”어젯밤의 일에 대해 기억이 남아있었고 자신이 약을 먹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이 일로 지석훈한테 뭔가를 요구하고 싶지 않았고 오히려 그한테 고마웠다. 그가 아니었다면 어젯밤에 무슨 일이 일어났을지도 모르니까.“왜? 그렇게 나랑 선 긋고 싶은 거야?”그녀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그는 차갑게 입
잠시 고민하던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그럼 부탁 좀 드릴게요.”종업원은 바로 환하게 웃으며 손을 저었다.“부탁이라니요. 제가 해야 할 일입니다. 다른 분이셨다면 아마 저한테 드레스값을 배상하라고 했을 거예요. 제 형편에 그건 턱도 없는 일이죠. 정말 감사드립니다.”문지원은 아무렇지 않은 표정을 지었다. “그냥 옷 한 벌일 뿐이에요. 그렇게 심각하게 생각할 필요 없어요. 그리고 그렇게 비싼 것도 아니에요.”두 사람은 이야기를 나누면서 탈의실로 향했다.“바로 여기입니다. 들어가시죠.”그녀는 별생각 없이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고 탈의실 안에는 아주 좋은 향이 났고 옷장에는 깨끗한 새 옷이 걸려 있었다. 화려하지는 않지만 세련미가 넘치는 옷들이었다. 손을 뻗어 옷들을 어루만지며 잠시 고민하던 그녀는 연한 파란색의 긴 드레스를 선택했다. 입고 있던 드레스의 지퍼를 여는데 손이 지퍼에 잘 닿지가 않았다. 사람한테 도움을 요청하고 싶었지만 이곳은 사람이 흔히 드나드는 곳이 아니었다. 지퍼를 열려고 애를 쓰는데 갑자기 뒤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내가 도와줄까?”한 남자의 목소리였다. 급히 고개를 돌리니 음흉한 얼굴의 남자가 눈앞에 서 있었다.딱 봐도 좋은 사람이 아닌 것 같았다.순식간에 그녀의 안색이 차가워졌다.“여긴 여자 탈의실이에요. 당장 나가시죠.”말을 마친 그녀가 밖으로 걸어 나가려는데 갑자기 머리가 어지러워졌고 몸이 나른해지면 바닥에 쓰러졌다. 온몸이 뜨겁게 달아오른 그녀를 남자가 번쩍 안아 올리며 사악한 미소를 지었다.“내가 많이 예뻐해 줄게.”아직 약간의 의식이 남아 있던 그녀는 몸부림치고 싶었지만 온몸에 힘이 하나도 없었다. 파티장 안, 엄우정은 일부러 무심코 한마디 했다.“방금 탈의실 쪽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리더라고요. 파티장에서 도대체 뭐 하는 짓인지.”다른 여자들도 그 소리를 듣고는 눈을 크게 뜨고 입을 막았다. “설마요. 혹시 방금 문...”순간 그 사람은 입을 다물었다.사람들은
지석훈은 밖으로 나온 뒤 그녀를 놓아주었고 문지원은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들었다.“뭐 하는 거예요? 이번 협력이 나한테 얼마나 중요한지 몰라요?”그가 어두운 눈빛으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뭐 대단한 프로젝트도 아니잖아. 당신은 자존심도 없어? 그렇게 모욕을 주는 데도 왜 가만히 있는 건데?”그의 말을 듣고 나니 왠지 모르게 억울한 느낌이 들어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순간 당황한 지석훈은 얼른 휴지를 꺼내 건네주었다.“왜 울어?”방금 엄우정한테 그런 모욕을 당하고도 그녀는 울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 지석훈의 말 몇 마디에 그녀는 억울한 감정이 북받쳐 올랐다.“나도 뭐 수모를 당하고 싶어서 이러는 줄 알아요? 하지만 방법이 없잖아요. 문정 그룹은 이번 협력이 필요하고 난 의지할 사람이 없어요.”“내가 다른 프로젝트를 찾아줄 테니까 나한테 의지해.”그가 갑자기 한마디 내뱉었다. 그 말에 문지원도 그도 모두 어리둥절해졌다. 잠시 머뭇거리던 그가 다시 말을 이어갔다.“엄우정과의 협력을 내가 망쳤으니 당연히 내가 보상해 줘야지.”“준비하고 있어. 저녁에 나랑 같이 파티에 참석해.”말을 마치고 그는 도망치듯 자리를 떠났다.그의 뒷모습을 쳐다보며 문지원은 웃음이 저절로 나왔고 마음속이 따뜻해졌다. ...그날 저녁, 문지원은 지석훈을 따라 파티 장소로 향했다. 서먹해하는 그녀의 모습에 그가 팔을 뻗으며 입을 열었다.“팔짱 껴.”망설이고 있는데 그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팔짱 안 끼고 나 혼자 들어가게 둘 거야? 사람들이 날 비웃을 텐데?”입술을 오므리던 그녀는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그의 팔을 잡았다. 그의 입꼬리가 저도 모르게 살짝 올라갔다.저도 모르게 본인이 웃었다는 사실조차 그는 자각하지 못한 것 같다. 파티장에 들어간 뒤, 지석훈은 그녀를 데리고 지인들과 인사를 나누었다.멀지 않은 곳, 강윤슬이 그 모습을 지켜보며 입술을 꽉 깨물었다. “문지원, 이 여우 같은 년.”“지석훈이 문지원한테 푹 빠진 모양이네요.”이
고개를 숙이고 자세를 낮추는 그녀의 모습에 엄우정은 엄청 통쾌했다.“이렇게까지 말하는데 기회를 줘야죠. 하지만...”잠시 말을 멈추던 엄우정은 끝내 뒷말을 계속하지 않았다. 반면, 그 어떠한 기회도 놓치기 싫었던 문지원은 이내 앞으로 다가서며 물었다.“하지만요?”엄우정은 악랄한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카톡의 모든 남자 친구에게 당신이 다른 여자의 남자 친구를 빼앗은 나쁜 여자라고 문자를 보내요.”그 순간, 문지원은 분노에 가득 찬 눈빛을 보이며 고개를 번쩍 들었다. 이건 그녀에 대한 모욕이었다.마음속으로 대충 짐작이 된 그녀는 분노가 섞인 말투로 입을 열었다. “엄 대표님, 협력에 대해 얘기하는 자리입니다. 대표님께서 무슨 얘기를 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렇게 장난을 치시면 안 되죠. 사적인 감정을 업무에 끌어들이면 되겠습니까?”“그래요? 그럼 더 이상 할 말이 없을 것 같네요.”문지원의 말에 엄우정의 얼굴이 순식간에 싸늘해졌다. ‘문지원, 네까짓 게 뭔데...’“문성 그룹에서 이번 기회를 놓친 건 오롯이 당신 문지원 때문이라는 것만 알아둬요.”자리에서 일어난 그녀는 말 한마디를 남긴 채 발걸음을 옮겼다.그 순간, 문지원이 그녀의 팔목을 덥석 잡았고 그녀는 고개를 돌렸다.팔목을 잡고 있는 문지원의 눈빛이 조금은 차분해졌다. 침을 꿀꺽 삼키더니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죄송해요. 방금은 제가 감정 조절이 잘 안됐습니다.”“그 뜻은 문자를 보내겠다는 말인가요?”그녀의 요구는 악랄했고 이번 협력에 대해 장난처럼 가볍게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방법이 없었던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억지로 이 굴욕을 삼켰다. 그녀한테는 지금 이런 상황에서 제멋대로 할 수 있는 자격이 없었기 때문이다. 문자를 보내는 것일 뿐, 어디가 덧나는 것도 아니고 그저 진실 게임을 한다고 생각하면 그만이다.피식 웃던 엄우정은 조롱이 가득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문지원 씨, 무슨 생각을 하는 거예요? 설마 달랑 문자 하나
최지후는 피식 웃었다. 눈앞의 여자가 순수하고 귀여웠다. “여울 씨 생각은?”여울은 그가 최주하와 생김새는 비슷하지만 최주하에 비하면 어리석고 오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쉽게 손에 잡히다니, 너무 시시한데...’잠깐 망설이던 그녀는 손을 떨며 치마 뒤에 있는 지퍼를 열었다. 지퍼를 반쯤 내리자 매끄럽고 하얀 등이 훤히 드러났고 그가 바로 손을 뻗어 그녀의 손을 잡았다.“여기서 말고.”모처럼 마음에 드는 여자를 만났으니 여기서 대충 관계를 가지고 싶지는 않았다.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던 그녀는 순순히 그를 따라 나갔다. 한편, 최주하는 핸드폰에 올라온 사진을 보고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최지후가 이렇게 쉽게 걸려들 것이라는 건 진작부터 예상하고 있던 일이라 전혀 놀라지 않았다. 남들 앞에서 고개를 들고 다닐 수 없는 사생아의 신분이니 좋은 여자를 만나봤을 리가 있겠는가?그는 최지후 자신보다 최지후에 대해 더 잘 알고 있었다. 잠시 후, 그가 핸드폰을 내려놓았다....캐슬 호텔.룸 안, 문지원은 두 손을 꼭 잡은 채 초조한 얼굴로 앉아 있었다. 그녀는 가끔 고개를 숙이고 손목시계를 확인했고 약속된 시간을 이미 훨씬 넘긴 시각이었다. 미팅을 하기로 했던 협력자가 나타나지 않자 그녀는 저도 모르게 얼굴을 심하게 찌푸렸다. 얼마 후, 문 앞에서 자물쇠가 비틀리는 소리가 들렸고 검은색 긴 드레스를 입은 차가운 여인이 안으로 들어왔다. “문 대표님, 죄송해요. 제가 좀 늦었네요.”문지원은 바로 고개를 들었고 마음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번 협력은 그녀에게 정말 중요한 것이었다. 오랜 기다림에 대한 분노는 온데간데없고 눈앞의 사람이 약속 장소에 나타난 것을 다행으로 여겼다. 문지원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저도 온 지 얼마 되지 않았어요.”말을 하면서 문지원은 손을 뻗어 의자를 끌어당겼다. 그러나 눈앞의 여자는 자리에 앉지 않고 그녀를 쳐다보며 차갑게 웃었다 .“문지원 씨, 저랑 협력하고 싶은 거예요?”
방 안에 들어온 여자들은 저마다 다른 모습과 옷차림을 하고 있었지만 모두 예외 없이 눈빛 속에 욕망이 가득했다.최지후는 여자들을 한번 스쳐본 후 흥미를 잃은 듯한 표정을 지었다. 이런 여자들은 흔히 보던 사람들이라 특별할 게 없었다.그는 차가운 태도로 매니저를 쳐다보며 물었다.“이게 네가 말한 새로 온 애들이야?”술집 매니저는 순간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최지후는 그의 중요한 고객이었기에 실수하면 큰일 날 수 있었다.“도련님 혹시 마음에 안 드시나요?” 술집 매니저는 어색하게 웃으며 말을 꺼냈다.최지후는 잠시 미소를 지으며 아무 말 없이 그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러더니 갑자기 테이블에 놓인 술잔을 들어 매니저의 얼굴에 확 뿌렸다.“너 지금 나 무시하는 거지? 감히 이런 것들로 대충 넘기려고?”술집 매니저는 잠시 멈칫하다가 곧바로 반응했다. 그는 얼굴을 닦으며 더욱 기를 쓰고 웃음을 지었다. “그럴 리가요. 절대 아니에요. 제가 어떻게 감히 그러겠어요. 도련님 마음에 안 드신다면 바로 다른 사람들로 교체해 드릴게요.”그때 문이 열리며 한 여자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여기 802호 맞나요?”최지후는 그 목소리에 곧바로 반응했다. 그는 목소리가 나는 쪽을 바라봤고 그곳에 눈길이 멈췄다.여자는 흰색 긴 원피스를 입고 있었고 검은 머리는 어깨 위로 흘러내려 있었다. 얼굴에는 화장기가 전혀 없었지만 자연스러우며 청순해 보였다. 무엇보다 그녀의 눈에는 불안하고 긴장된 기색이 가득했다.그녀는 신임임이 분명했다.최지후는 술집 매니저를 놓으며 말했다. “이런 사람이 있으면 진작에 데려왔어야지. 왜 이제야 데려왔어? 좀 더 일찍 데려왔으면 이런 일도 없었을 텐데.”술집 매니저는 최지후가 눈앞의 여자를 매우 만족스러워하는 것을 알아챘다. 그는 머릿속으로 그가 데려온 사람 중에 이 여자가 있었나 하고 잠시 생각해 보았다.그래도 그는 별로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어쨌든 최지후가 만족하면 그게 제일 중요했다.그는 재치 있게 말했다.“좋은 건 항
여자는 잠시 멈칫하다가 최주하가 너무 많은 금액에 당황했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급히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저도 알아요. 이 돈이 적은 금액은 아니라는 거... 하지만 저는...”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최주하가 말을 끊었다. 그는 다소 불쾌한 듯 여자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2억만 있으면 뭐든지 할 거야?”여자는 그 말에 희망의 불씨가 다시 피어났다. 그녀는 서둘러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저 뭐든지 할 수 있어요.”최주하는 입가에 미소를 띠며 말했다. “좋아. 도와줄 수는 있어. 그런데 너도 나를 위해 뭔가를 해야 해.”여자는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일이든지 할 수 있어요.”그러자 그녀는 부끄러운 듯 얼굴을 붉히며 일어나서 최주하의 옷을 풀려고 손을 뻗었다.최주하는 눈살을 찌푸리며 여자의 손목을 잡으며 제지했다.“뭐 하는 짓이야?”그의 눈에 드러난 혐오감에 여자는 순간 얼어붙었다. 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제가 필요하지 않으신가요?”이건 서로가 알고 있는 은유적인 표현이었다. 여자의 의도는 두 사람 모두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여자는 지금 자신이 가진 것 중에서 최주하가 관심을 가질 만한 것은 이 몸밖에 없다고 생각했다.“확실히 네 도움이 필요해. 하지만 그 대상은 내가 아니라 내 동생이야.”그렇게 말하며 최주하는 휴대전화에서 한 장의 사진을 보여주었다. 사진 속 남자는 최주하와 어느 정도 닮아 보였다.“내 동생이야. 내 동생을 유혹해서 그 옆에 남아있는 거야.”최주하는 간결하게 설명했다.여자는 혼란스러워하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조금은 꺼리는 눈치였다. 그녀의 목표는 분명 최주하였기 때문이다.최주하는 그녀의 태도를 보고 눈빛이 차갑게 변했다. “원하지 않는다면 그냥 나가. 강제로 시킬 생각은 없어.”“저 할게요. 하겠습니다.”여자는 곧장 마음을 다잡으며 간절히 말했다.최주하는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말했다. “실망하게 하지 마.”최주하의 말이 끝나자마자 여자의 휴대전화에는 1억이 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