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혜성을 언급하자 은서우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그래도 혜성이가 마지막에 마음 약해져서 부케를 받아서 다행이에요. 안 그랬으면 헛수고가 될 뻔했잖아요.”오늘 이혜성의 옆에 서 있던 사람들도 전부 미리 그녀의 말을 듣고 피한 것이었다. 다들 그녀가 이혜성에게 부케를 던질 것을 알고 있었기에 혼자 덩그러니 남은 이혜성이 부케를 받았다. 그런데 이혜성도 피할 줄은 몰랐다. 만약 정말로 피했다면 그녀의 계획은 실패로 넘어가게 된다.“그러고 보니.”은서우는 뭔가가 떠오른 듯 고개를 돌려 인명진을 보았다.“오늘 혜성이가 넘어질 뻔한 걸 잡아준 사람이 누구예요? 애인이 없겠죠? 겉보기엔 꽤 괜찮은 사람 같던데. 애인이 없다면 혜성이한테 소개해주고 싶네요.”그러자 인명진은 바로 미간을 구겼다.“오늘은 서우 씨와 나의 결혼식인데 다른 남자 볼 여유가 있나 봐요.”죄를 씌우려면 얼마든지 핑계가 있다고 은서우는 어처구니가 없어 인명진을 째려보았다. 곧 화를 낼 것 같은 그녀의 모습에 인명진은 그제야 장난기를 거두고 말했다.“내 친구예요. 인성은 문제없고 예전에는 바이오에 관한 기술을 연구했던 사람이기도 하죠. 개인적인 사정으로 그만뒀지만요. 소개하는 건 딱히 문제가 되진 않는데 혜성 씨가 흔쾌히 소개받을는지는 모르겠네요.”은서우는 곰곰이 생각하다가 이혜성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감정이라는 것은 노력한다고 해서 생기는 것이 아니었다. 가끔은 운명일 때도 있었다.“아무리 운명에 맡긴다고 해도 부케도 이미 받았고 이참에 소개까지 해주면 남은 건 혜성이가 알아서 하겠죠.”인명진은 화장을 고치는 은서우의 옆에 한참 머물렀다. 옷도 갈아입은 은서우가 문밖을 나서자 이미 그들이 술잔을 든 채 문 앞에서 인명진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그 술잔들은 인명진을 위해 준비한 것임이 분명했다. 인명진은 분위기를 깨지 않고 받아 들었다. 일전에 이미 숙취해소제와 위장약을 챙겨 먹었던지라 그들과 즐겁게 웃으며 술을 마셨다.주량을 조금 넘어버리자 은서우는 슬쩍 그의
은서우는 바로 다가가 이혜성을 방해하지 않았다. 그저 고개를 돌려 인명진과 서로 마주 보며 미소를 지었다. 결혼식이 끝나고 하객들도 돌아갔다. 하루 종일 바쁘게 움직였던 은서우는 그제야 한숨 돌릴 수 있을 것 같았다.집으로 돌아오니 집안 곳곳에 그녀의 손길이 닿은 흔적이 있어 은서우는 마음이 너무도 편안해졌다. 예전이었다면 볼 수 없는 집안 모습이었다.“수고했어요.”어깨에 커다란 두 손이 올려지고 적당한 압력으로 그녀의 어깨를 주물러 주었다. 은서우는 무의식적으로 미간을 찌푸리며 남자의 손을 잡았다. 인명진은 부드럽게 그녀의 손을 내리며 말했다.“괜찮으니까 긴장 풀어요.”은서우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그렇네. 깜빡 잊고 있었네. 지금과 예전은 다르잖아. 난 이젠 명진 씨 아내라고.'“고마워요.”인명진은 눈썹을 꿈틀거렸다.“대체 언제까지 거리감이 느껴지게 나한테 고맙다는 인사를 할 셈이에요? 이참에 우리 말도 놔요.”그녀는 입을 꾹 다물고 장난기 가득한 눈빛으로 보는 인명진을 보았다. 그녀의 얼굴이 점점 더 붉어졌다. 인명진은 민망해하는 그녀의 얼굴을 빤히 보더니 그윽한 모습으로 그녀의 귓가에 대고 작게 속삭였다.“욕실에 물 받아뒀는데 오늘은 같이 씻을까?”은서우는 하마터면 말하는 법을 잊을 뻔했다. 그녀는 대답하지 않았지만 본능적으로 인명진의 목으로 올라간 팔이 지금 그녀의 기분을 말해주는 것 같았다.인명진은 바로 그녀를 공주님 안기 자세로 들어 올렸다. 신혼 생활은 예전과 많이 달랐다. 혼자 살던 때와 달리 두 사람이 한 지붕 아래 함께 살아가야 했다. 처음에 은서우는 너무도 적응되지 않았다.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자신의 옆에 누군가 누웠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저도 모르게 멍한 얼굴로 보다가 어젯밤 보냈던 오붓한 시간들이 떠올라 얼굴이 한참 동안 붉어졌다.함께 사는 시간이 점점 더 길어지고 더는 낯설어하지도 않았고 부끄러워하지도 않았다. 두 사람은 점점 서로에게 적응되었고 화목하게 지냈다. 병원으로 오자 사람들은
“응, 내가 보육원도 이미 알아봤어. 그런데 왜 자꾸 존댓말이야?”인명진이 말하자 은서우는 의아한 목소리로 말했다.“반말은 아직 좀 어색해서요. 넌 나중에 천천히 할게요. 그런데 이미 알아봤다고요? 전에... 새로 지을 거라고 하지 않았어요?”인명진은 고개를 저었다.“곰곰이 생각해봤는데 새로 짓기엔 비용이 너무 많이 들고 사람들의 믿음을 얻기도 힘들잖아. 새로 지으면 사람들이 어떻게 믿고 아이들을 맡기겠어.”그들의 보육원에는 원장과 보육교사도 필요했다. 받는 월급이 적었던지라 보육원에서 일하려는 사람이 많지 않았고 대부분 시간을 낭비라면서 보육원에 일하려 하지 않았다.“마침 적당한 보육원이 하나 있더라고. 운영 부진으로 폐업되었는데 그곳엔 여전히 보육교사들과 갈 곳 없는 아이들이 살고 있어. 보육원이 파산당하긴 했지만 갈 곳도 없어서 계속 남아 있었나 봐. 게다가 보육교사들도 어떻게든 다시 보육원을 되살리려고 애를 쓰고 있더라고.”그의 말을 들은 은서우는 눈을 반짝였다.“그래서 새로 짓지 않고 그 사람들을 도와주려고 한 거예요?”그녀는 기쁜 얼굴로 인명진의 얼굴을 감싸더니 뽀뽀를 해주었다. 쪽 소리가 유난히도 크게 울려 퍼졌다.“완전 좋은 생각이잖아요!”그러나 은서우는 너무 기쁜 나머지 점점 어두워지는 인명진의 눈빛을 미처 발견하지 못했다. 그 순간 그녀는 인명진에게 확 끌어당겨 졌다. 반응하기도 전에 그녀는 그의 품에 꽉 끌어안겼다. 이내 그녀의 입술로 그의 입술이 닿더니 거친 키스가 이어졌다.점차 숨이 차는 은서우는 그의 옷깃을 꽉 잡았다.“잠깐만요... 여긴 병원이잖아요. 명진 씨 진정 좀 해요.”인명진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병원으로 돌아온 뒤로 고강도의 업무에 시달렸던지라 두 사람은 며칠 동안이나 부부 생활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그랬기에 인명진은 현재 불만이 가득 쌓인 상태였다. 겨우 이런 기회가 찾아왔으니 그는 당연히 놓칠 생각이 없었다.한참 지나서야 인명진은 그녀를 놓아주었다. 얼굴이 빨갛게 물든 은서우는 그를 밀어내더니
기획안은 빠르게 완성되었지만 제일 중요한 것은 그래도 직접 보육원으로 찾아가 살펴보는 것이었다. 그렇게 은서우는 시간을 내서 인명진과 함께 보육원으로 출발했다.보육원은 위치가 아주 좋았지만 그다지 환영받지 않았다. 마치 사람들에게 잊혀버린 곳처럼 보육원에 있는 모든 물건들이 전부 낡은 것이었고 건물도 몇십 년 전에 지어진 것처럼 대문마저 녹슬어 있었다.보육원으로 도착했을 때 은서우는 바로 페인트 떨어진 벽을 보게 되었다.“이런 집에 사람이 살고 있다고요? 확실해요? 이건 언제 무너져도 이상하지 않은 집이잖아요.”그녀가 묻자마자 모직 코트를 입은 여자가 안에서 나왔다. 그녀의 말을 들은 것인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맞아요. 여긴 보육원인데 올해 가을에 철거한다는 결정이 났어요. 보육원엔 아직 서른 명이 넘는 아이들과 보육교사, 그리고 저까지 전부 합쳐서 총 마흔 명이 있어요. 만약 이 보육원이 철거된다면 서른 명이 넘는 아이들은 어디로 가야 할까요. 전 아직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르겠어요. 그걸 지금까지 생각하다 보니 어느새 지금까지 여기서 버티게 되었네요. 그러니 저희를 좀 도와주세요.”은서우는 중년의 여자를 보았다. 여자는 온화하게 생겼지만 입고 있는 모직 코트는 낡아 색도 바랬다. 보아하니 아주 오래 입은 것 같았다. 여자의 옷차림에서도 보육원이 얼마나 가난한지 알 수 있었다.“죄송해요. 그런데 혹시 누구신지 알 수 있을까요?”은서우는 자신이 말실수했음을 알고 바로 사과했다. 중년의 여자는 이곳 보육원의 원장이라고 그들에게 소개했다. 그 말은 들은 은서우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눈앞에 있는 사람이 원장이라니 말이다.“아가씨, 뭘 그렇게 놀래요? 대부분 아가씨와 같은 반응이더라고요. 밖은 추우니까 일단 들어가서 계속 얘기해요.”원장은 그들을 안으로 초대했다. 안으로 들어간 은서우는 이곳 보육원이 얼마나 가난한지 더 깊이 알게 되었다. 이곳은 정말이지 가난해도 너무 가난했다. 원장이 그들에게 대접할 수 있는 음료수도 그저 따듯하게 끓인 물
은서우는 원장이 정말로 너무도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원장이 진정하길 기다린 후 그녀는 보육원의 아이들을 만나보고 싶다고 말했다. 그러자 원장은 흔쾌히 대답했다.“그래요. 제가 우리 아이들을 보여드릴게요. 다만 아이들 중에 조금 혼자 동떨어져 있는 특별한 아이가 보일 거예요. 그래도 너무 개의치 말아요.”원장은 말을 하다가 진지해졌다. 은서우는 그런 그녀의 모습에 조금 놀랐고 원장의 입에서 나온 특별한 아이가 궁금해졌다.빠르게 그들은 어느 한 교실로 도착했다. 이곳에서 보육교사들은 하나의 방을 쓰고 있었고 다른 곳은 학교 교실처럼 만들었다. 보육원에 아이들이 너무도 많았기 때문에 아이들의 학비를 대줄 여력이 되지 않았다. 이렇게 지원을 받는 것도 너무도 오랜만이었다.하지만 학교 다녀야 할 아이들이 아무런 지식도 없는 채 자라게 될까 봐 보육교사들은 서로 번갈아 가며 아이들을 가르쳐주었다. 그리고 지금 교실에선 한창 수업 중이었다.은서우는 갑자기 들어가면 아이들이 놀라게 될까 봐 들어가지 않고 문밖에서 창문으로 조용히 안을 들여다보았다. 빠르게 그녀는 아이들과 어울리지 못하는 남자아이를 발견했다.다른 아이들은 아주 활발하게 선생님의 질문에 대답도 하고 함께 게임도 했지만 유독 구석에 앉아 있는 남자아이만 혼자 블록 하나를 손에 꼭 쥐고 멍 때리고 있었다.“원장님이 말씀하신 특별한 아이가 혹시 저 아이인가요?”마음이 흔들린 은서우는 바로 물었다. 원장은 고개를 끄덕였고 아이를 보는 두 눈빛엔 근심과 자애로움이 가득했다.“네, 저 아이가 맞아요. 아이의 이름은 천유민이고 아이의 엄마가 아이의 아빠와 이혼한 후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어요. 원래라면 아이의 아빠가 아이를 키워야 하는데 아이의 아빠도 갑작스러운 심근경색으로 세상을 떠나버렸어요. 더는 남은 가족이 없어 우리 보육원으로 오게 되었는데 예전에는 아주 활발하고 잘 웃는 아이였다고 하더라고요. 그런데 그날 후로 단 한 번도 웃지 않았대요. 저와 선생님들이 아무리 말을 걸어봐도 계속 저 모습이에요.”
은서우는 고개를 끄덕였고 보육교사가 나가자마자 아이가 앉아 있는 책상 옆으로 다가갔다. 몸을 굽힌 그녀는 블록만 멍하니 보고 있는 남자아이를 보았다.“그거 어떻게 맞추는 건지 알고 있는데. 가르쳐줄까?”남자아이는 멈칫했다. 은서우는 그런 아이의 모습을 못 본 척했다.“블록 맞추는 거 어렵지? 그리고 네가 들고 있는 그 블록은 하나뿐인 것 같네. 혹시 블록 더 없어?”남자아이는 고개를 들어 그녀를 보았다. 은서우는 아이가 자신의 말에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뜻밖에도 아이는 입을 열었다.“네. 더 있어요. 방에 있어요.”간단하게 대답했지만 아이가 입을 열었던 사실에 은서우는 충분함을 느꼈다. 아이가 입을 열기만 한다면 희망이 있다는 것이었으니까. 그러고 난 후 은서우는 아이를 따라 방으로 가서 블록을 가져왔고 그렇게 오후 내내 블록을 맞췄다.도중에 보육교사가 아이의 식판을 들고 들어왔지만 아이는 음식에 흥미를 보이지 않았다. 설령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나도 먹지 않았고 자신의 몸이 어떻게 되든 신경 쓰지 않았다.은서우는 당연히 지켜만 보고 있을 수 없었다. 그녀는 열심히 블록을 맞추고 있는 아이의 곁으로 다가갔다.“내가 방법을 알려주긴 했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야. 더 알고 싶어? 그런 거라면 일단 밥부터 먹을까?”“배고프지 않아요.”아이가 말을 하자마자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 은서우는 못 들은 척하며 고개를 끄덕였다.“하지만 내가 배고픈걸. 우리 먼저 밥 먹으면 안 될까?”남자아이는 한참 생각했다. 기껏해야 다섯 살쯤 되는 아이가 어른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으니 은서우는 조금 의외라고 생각하긴 했지만 놀라지는 않았다.자폐증이 있는 아이들은 대부분 머리가 좋았다. 심지어 어느 한 분야에서 천재인 경우도 있었지만 대가는 평생 바깥세상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이었다. 아이가 침묵하고 있는 것도 생각에 빠진 것이 틀림없었다. 그녀의 말을 들을지 말지 곰곰이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이것은 좋은 현상이었기에 은서우는 인내심 있게
원장은 아주 기뻐했다.“전부 서우 씨 덕분이에요.”은서우는 겸손한 얼굴로 물 한 모금 마신 후 말을 하려고 했지만 그 순간 밖에서 흘러들어오는 고소한 밥 냄새를 맡게 되었다. 지금 이 시간은 확실히 아이들이 점심을 먹을 시간이었다. 그전에도 그녀는 자주 밥 냄새를 맡았다.하지만 왜인지 모르겠으나 이상하게도 지금은 너무도 메슥거렸다. 속에 있는 것이 역류하는 느낌에 은서우는 빠르게 쓰레기통이 있는 곳으로 뛰어가 헛구역질해댔다. 그런 그녀의 모습에 원장은 긴장한 얼굴로 보았다.“서우 씨, 왜 그래요. 괜찮아요? 속이 안 좋은 거예요?”은서우는 대답하려고 했지만 순간 머릿속에 자신의 생리가 늦어졌다는 것을 떠올랐다. 이 생각에 저도 모르게 긴장해진 그녀는 본능적으로 손을 올려 배를 만졌다. 그녀의 생리 주기는 절대 늦어지는 법이 없었다. 특수한 상황이 아니라면 말이다. 그런데 지금은...”“서우 씨, 속이 안 좋은 거라면 얼른 병원에 가서 검사받아봐요.”원장의 걱정이 담긴 목소리가 그녀를 정신 차리게 했다. 은서우는 고개를 저으며 괜찮다고 말했다. 하지만 울렁거리는 속을 무시할 수 없었던 그녀는 더는 보육원에서 머물지 않았고 원장과도 먼저 돌아가 보겠다고 말했다.병원으로 돌아온 그녀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인명진을 찾아가지 않고 산부인과로 가서 검사를 받았다. 그 의사는 마침 은서우와 아는 사람이었다. 검사 결과가 나오자 의사는 바로 웃으며 말했다.“축하해요. 은 선생님. 임신 3주 차네요.”엄청난 소식에 은서우는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조심스럽게 손을 배에 올리며 눈을 깜빡였다.“정말, 정말로 임신한 거예요?”검사 결과는 확실히 그녀가 임신했다고 알려주고 있었다. 하지만 결과를 본 은서우는 여전히 믿어지지 않았다. 인명진과 밤을 보낸 후 단 한 번도 피임을 한 적 없었다. 여하간에 두 사람은 나이가 꽤 있었고 게다가 은서우는 집안의 영향으로 항상 아이를 바랐다. 아이와 남편과 함께 오손도손 사는 것이 꿈이었지만 이렇게나 빨리 아이가 찾아올 줄은
은서우는 놀라 소리를 지르며 얼른 내려달라고 했다. 인명진은 그제야 진정할 수 있었다.“미안해. 내가 깜빡 잊고 있었어.”인명진은 조금 전 자신이 한 행동을 후회했다. 하지만 은서우는 아무렇지 않았다. 비록 임신 초기엔 조심해야 하는 건 맞지만 끌어안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기쁨을 만끽하고 있던 와중에 은서우는 보육원이 떠올라 잠깐 망설였다.“이 상태면 그럼 보육원은...”인명진은 시선을 들어 그녀를 보았다.“가고 싶어?”“당연하죠!”은서우는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보육원은 아직 공사도 시작하지 못했을뿐더러 자폐증을 앓고 있는 아이가 나아지는 모습도 계속 지켜보고 싶었다. 그렇게 노력해서 아이의 마음의 문을 열었는데 어떻게 도중에 그만둘 수 있겠는가.하지만 은서우는 인명진이 허락해주지 않을까 봐 걱정되었다. 그가 침묵하고 있던 때 그녀는 이미 그를 설득할 말을 머릿속에 생각해두었다. 입을 열려던 순간 인명진이 먼저 말했다.“그럼 가. 조심하기만 하면 괜찮을 거야.”은서우는 놀란 얼굴로 그를 보자 그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내가 하고 싶은 일을 내가 막아서 뭐해. 결혼은 자유를 속박하는 게 아니야. 난 네가 여전히 너로 살았으면 좋겠어. 하고 싶은 대로 자유롭게 말이야.”그의 말에 은서우는 감동하고 말았다. 그와의 결혼은 너무도 잘한 선택인 것 같았다. 다만 그녀는 기껏해야 한 달 정도 된 배 속의 아기를 위해서라도 무리하면 안 되었다. 그랬기에 그녀는 이틀에 한 번씩 찾아가던 보육원을 사나흘에 한 번씩 방문했다.평소에 감정 표현을 잘하지 않던 천유민은 사흘에 한 번씩 찾아오는 그녀에 먼저 그녀의 손을 잡으며 보육원 안으로 데리고 들어갔다.은서우는 놀라긴 했지만 기쁘기도 했기에 아이가 이끄는 대로 들어갔다. 빠르게 아이는 그녀를 책상 앞으로 데리고 왔다.이 책상은 천유민이 평소 수업을 들을 때 사용하는 책상이었다. 그리고 지금은 완성된 블록이 정갈하게 놓여 있었다. 이 블록은 그날 은서우가 빌려 갔었기에 절반만 맞출 수밖에 없었다
지석훈의 상처를 치료해줄 때 문지원은 아주 열심이었다. 지석훈은 저도 모르게 그런 그녀를 빤히 보게 되었고 은은한 조명 아래에 있는 그녀의 모습은 너무도 예뻤다. 연고가 상처에 닿은 순간 지석훈은 저도 모르게 찬 공기를 들이마셨다.“아, 미안해요. 혹시 방금 아프게 했어요?”문지원은 고개를 숙인 채 그의 상처에 대고 후후 바람을 불었다.“이러면 조금 나을 거예요. 최대한 살살 발라볼 테니까 조금만 참아줘요.”“문지원, 난 어린애가 아니야. 이런 통증쯤이야 얼마든지 참을 수 있어. 그러니까 애 취급하지 마.”지석훈은 그런 그녀의 행동에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문지원이 말했다.“석훈 씨가 아이가 아니라는 거 당연히 알고 있죠. 하지만 아이만 다치면 아픈 게 아니잖아요. 어른도 다치면 똑같이 아파요. 그리고 이런 통증은 줄일 수 있는 거예요. 제가 최대한 살살 바르면요.”최대한 살살 약 발라주겠다고 하면서 대체 왜 자꾸만 그에게 참으라고 하는 것일까.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지석훈은 더 말하지 않았다. 팔을 치료한 뒤 문지원은 그의 다리를 치료해주었다. 전부 치료해주고 나니 어느새 반 시간이 훌쩍 지났다.“시간도 늦었는데 얼른 씻고 쉬어. 내일 공장으로 갈 거면 내가 데려다줄게.”지석훈은 소파에서 일어나며 손님방이 있는 쪽을 가리켰다.“저 방에 새 이불도 있으니까 그냥 덮으면 돼.”“고마워요. 이 은혜를 어떻게 보답해야 할지를 모르겠네요.”문지원은 농담을 반쯤 담아 그에게 말했다. 그녀는 현재 제 코가 석 자인 상황이었다. 집안에 들이닥친 일을 처리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힘들었던지라 지석훈에게 보답할 여력은 없었기에 정말로 보답할 수 있을지 몰랐다.지석훈은 그런 그녀를 보며 고개를 저었다.“우린 친구잖아. 친구 사이에 그런 부담은 가질 필요 없으니까 얼른 들어가서 쉬어. 넌 피곤하지 않을지는 몰라도 내가 피곤해.”“그럼 쉬는 데 방해하지 않게 전 이만 먼저 방으로 들어가 볼게요.”문지원은 몸을 돌려 걸음을 옮겼다. 손님방으로 들어온 그녀는 먼
두 사람이 서로를 알게 된 후 지석훈은 이미 문지원에게 충분히 많은 것을 도와주었다. 그에게 진 빚도 갚지 못할 정도였던지라 만약 그가 그녀를 구해주다가 다치게 된다면 그녀는 정말로 어떻게 보답해야 할지 몰랐다.눈 앞에 펼쳐진 위험한 상황을 지석훈은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이대로 가버린다면 문지원 혼자서 그 위험을 감당해야 했기에 그는 그녀를 두고 절대 혼자 도망칠 수 없었다. 그렇게 그는 두 남자에게 달려들어 싸웠다.문지원이 초조해하고 있던 때 마침 그녀가 신고했던 경찰들이 도착했다. 경찰들은 차에서 내려 그들에게 총을 겨눴다.“움직이지 마! 두 손 들어!”두 남자는 빠르게 도망치려고 했지만 자신들의 차로 문지원의 차를 쳤던지라 더는 시동을 걸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도망칠 수 없었던 그들은 이내 경찰에게 제압당했다. 문지원과 지석훈도 경찰서로 따라가 진술서를 작성했다.진술서를 작성하고 나니 어느새 밤이 되었고 피로 물든 그의 셔츠를 보던 문지원은 눈가가 붉어졌다.“죄송해요. 괜히 저 때문에 이런 일에 휘말리게 했어요. 만약 제가 아니었다면 석훈 씨가 다칠 일도 없었을 텐데...”“크게 다친 것도 아닌데 뭘. 괜찮아.”지석훈은 애초에 자기 상처에 신경 쓰지 않았다.“오늘 밤은 우리 집에서 지내. 거기가 더 안전할 거야.”그러나 문지원은 고개를 저었다. 지금은 누구 집이 더 안전한가의 문제가 아니었다. 다친 사람이 있으니 당연히 병원부터 가야 한다.“다쳤잖아요. 그러면 병원 가서 치료부터 받아야죠. 온몸에 이상 없나 확인해야 저도 마음이 놓일 것 같아요.”지석훈도 그녀가 자신을 걱정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채고 있었고 입꼬리가 저도 모르게 자꾸만 올라갔다.“문지원, 내가 뭐 하는 사람인지 잊은 거야? 내가 의사야. 이 정도 상처는 별거 아니니까 병원까지 갈 필요 없어.”“아무리 별거 아닌 상처라고 해도 치료는 해야죠. 그렇게 내버려 두면 안 되는 거잖아요.”문지원은 여전히 그가 걱정되었다. 그러자 지석훈의 얼굴에 걸린 미소가 더 짙
그 순간 두 남자는 문지원을 향해 빠르게 달려왔다. 문지원은 급하게 차에 올라탄 뒤 사람이 많은 시내로 향했다. 시내엔 사람이 많았던지라 아무리 두 사람이 그녀에게 범죄를 저지르려고 해도 수많은 시선이 느껴지는 앞에서는 대놓고 하지 못할 것이었으니까.다행히 차가 옆에 있어 그녀는 바로 문을 열어 차에 올라탔다. 안전벨트를 할 새도 없이 시동을 걸었고 멈춰선 두 남자는 서로 마주 보았다.“도망치고 있어요!” “뭘 멍청하게 서 있어! 얼른 차 시동 걸어! 쫓아가야지!”옆에 있던 남자가 그의 머리를 내리치며 말했다. 지금이 어느 때인데 이런 쓸데없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인가. 두 사람은 애초에 돈을 받고 무엇이든 해주는 흥신소에서 일하는 사람들이었다. 만약 이대로 문지원을 놓친다면 의뢰인이 난리를 피우며 돈을 달라고 할 것이 뻔했다.두 사람의 차도 근처에 주차되어 있었던지라 남자는 빠르게 차를 몰고 다른 남자가 있는 곳으로 와서 태웠다. 차에 올라탄 남자는 이내 지휘했다.“속도 올려서 일부러 부딪쳐.”“네!”남자는 눈을 가늘게 접으며 속도를 꾹 울린 후 문지원의 차를 쫓아갔다. 엄청난 소리가 울려 퍼지고 두 차는 서로 부딪치게 되었다. 문지원의 몸이 그 충격에 앞으로 확 나갔고 다행히 제때 펴진 에어백 덕에 다치지 않을 수 있었다.그녀는 두 남자가 돈을 위해서 이렇게까지 할 줄은 몰랐다. 두 남자는 차에서 내린 후 그녀가 있는 운전석으로 달려와 끊임없이 창문을 두드렸다. 문지원은 당연히 열어줄 생각이 없었다. 두 남자도 그녀의 생각을 알고 있었던지라 한 사람은 계속 밖에서 그녀를 협박하고 다른 한 사람은 차로 돌아가 망치를 들고 왔다.“문지원 씨, 우린 문지원 씨랑 싸우려고 온 게 아니에요. 일단 내려서 평화롭게 잘 얘기를 나눈다면 우리도 조용히 물러갈 거예요. 굳이 이렇게까진 할 필요 없잖아요. 안 그래?”문지원은 당연히 남자의 말을 믿지 않았다. 흉흉한 두 남자의 얼굴만 봐도 신뢰도가 떨어졌다. 만약 남자의 말을 믿고 문을 열었다면 그들에게 어
마침 월말이었던지라 입원비를 낼 때가 되었고 약값도 내기 위해 특별히 통장 잔액에 얼마가 남아 있나 확인했다. 여이현이 준 2억으로 대부분 재료를 샀고 남은 돈은 밀린 직원들의 월급을 정산해 주었음에도 여전히 6000만 원 넘게 남아 있었다. 거기에다 그녀가 가지고 있던 돈까지 합하니 7000만 원 정도 되었다.잔액을 본 문지원은 다소 믿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어쩌면 여이현이 그녀가 무엇을 할지 미리 예상을 하고 2억을 준 것이 아닌가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하니 여진 그룹을 이끌어가고 있는 여이현이 대단하게 느껴졌다.대부분 사람들이 여이현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잔인한 사람이라고 말했지만 사실은 이렇게나 세심한 사람일 줄은 아무도 몰랐다. 한숨을 내쉰 그녀는 자신이 그에게 꽤나 많은 신세를 지고 있다고 생각했고 복잡한 머릿속을 정리한 채 병원으로 향했다.원무과에서 입원비와 약값을 계산한 후에야 그녀는 문용석을 보러 갔다. 병실에 누워있는 문용석은 여전히 예전 모습 그대로였다. 조용히 눈을 감은 채 침대에 누운 그의 모습은 꼭 바깥세상과 거리를 둔 듯한 모습이다.“아빠, 저 여진 그룹과 프로젝트를 하고 있는 중이에요. 우리 공장도 다시 가동되고 있고 전처럼 활력도 생겼으니까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입을 연 순간 그녀는 코끝이 시큰해졌다. 결국 밀려오는 감정에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수건을 적셔왔다. 문용석의 몸을 닦아주며 그녀는 계속 굳게 눈을 감은 문용석에게 말을 걸었다. 설령 문용석이 병으로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대답하지 못한다고 해도 말이다.그녀는 문용석의 곁에 오래 있어 주고 싶었지만 해야 할 일이 많아 결국 병실에서 한 시간만 머물다가 나올 수밖에 없었다. 병실 문을 열자마자 들어오려는 지석훈과 마주치게 되었다. 지석훈은 하얀 의사 가운을 입고 있었고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 있었다. 가슴팍 주머니엔 펜이 가지런히 꽂혀 있었고 마스크를 낀 채 눈만 내놓고 있었다.그의 뒤로 꽤나 많은 사람들이 있었고 대부분 의사와 간호사들
문지원은 시간을 내서 주현철을 만나 따져 물을 생각이었지만 그녀가 연락하기도 전에 주현철은 무슨 생각인지 먼저 그녀에게 연락했다.전화를 받은 문지원은 전화기 너머로 들리는 주현철의 목소리를 듣게 되었고 그는 훌쩍이며 그녀에게 사과했다.“지원아, 아저씨는 현 대표가 너한테 그런 짓을 할 줄은 몰랐단다. 다 내 탓이다. 내가, 내가 정말 네 아빠 볼 면목도 없구나!”전화기 너머로 철썩철썩 소리가 났다. 아마도 자기 뺨을 때리는 것 같았다. 문지원은 느껴지는 수상함에 일단 그의 말에 맞장구를 치며 그를 떠보기로 했다.‘그날 일을 아저씨가 정말로 몰랐다고?'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 말이 거짓이라고 단정 지었다. 애초에 그 자리는 주현철이 주선한 것인데 어떻게 모를 수가 있겠는가.“아저씨, 전 더 이상 어린아이가 아니에요. 그런 말로 절 속이실 필요 없으세요. 소용없으니까요.”문지원이 직설적으로 말하자 주현철은 역시나 조용해졌다. 한참 지나서 그가 입을 떼려고 하자 그녀는 빠르게 말을 자르며 논리적으로 말했다.“아저씨는 아저씨 체면을 지키기 위해 저한테 사업 파트너를 소개해주겠다고 하신 거겠죠. 저도 사실은 아저씨가 저희 아빠랑 친한 사이여서 아저씨 때문에 그 자리에 나간 거예요. 그런데 어떻게 저한테 그러실 수 있는 거예요? 정말로 아저씨가 몰랐다고 쳐도 마침 그 타이밍에 자리를 비운 건 너무도 이상하지 않아요? 전 앞뒤가 맞지 않는다고 생각하는데요. 그 짐승보다 못한 놈이 제 몸에 자꾸 손을 올릴 땐 왜 말리지 않으셨어요? 한 마디 정도는 하실 수 있으셨잖아요. 그때는 가만히 있다가 이제야 와서 저한테 전화로 몰랐다느니, 미안하다느니 억울한 척하시는 거예요?”가해자가 피해자인 척 연기를 하고 있는데 문지원은 하마터면 속아 넘어갈 뻔했다. 뒤늦게 정신이 번쩍 든 문지원은 어처구니가 없어 헛웃음만 나왔다. 주현철이 대체 무슨 낯짝으로 자신에게 먼저 연락한 것인지 알 수 없었다.전화기 너머로 긴 침묵이 이어졌다.“주현철 씨, 우리 아빠에게서 받은
간단히 말해 나이가 많은 아저씨들은 집안일을 할 줄 모른다는 것이다. 그 말을 들은 문지원은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이 문제는 확실히 그녀가 생각지 못한 문제였고 확실히 사소한 문제는 아니었다. 숙식 문제는 직원들에게 아주 중요한 문제였다. 그렇다고 해서 매번 숙식 제공한다고 말해놓고 정작 더러운 돼지우리를 보여줄 수는 없지 않겠는가.“일단은 그렇게 말씀해 주세요. 청소 문제는 제가 해결해 볼게요.”문지원은 빠르게 머리를 굴려 이 문제를 효과적으로 해결하려고 했다. 위생 문제는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그저 청소부 직원을 고용하면 되는 일이었지만 청소부 직원까지 고용하기엔 너무 수지에 맞지 않았다.청소부 직원은 하루에 몇만 원씩 번다. 그런 직원을 여럿을 고용한다면 하루에 몇십만 원 나갈 것이고 이 돈이면 차라리 그녀가 직접 하는 것이 더 나았다. 그녀가 직접 한다면 돈을 아낄 수 있을뿐더러 구석구석 깨끗하게 청소할 수 있으니까.“참, 그게 있었지! 왜 이제야 생각이 난 거지?”문지원은 뭔가 떠오른 듯 눈빛을 반짝이더니 바로 집으로 달려갔다. 도우미 아주머니 도은숙은 이미 휴가를 마치고 돌아온 상태였다. 다급하게 집으로 들어와 집안의 청소도구를 뒤지는 모습에 놀란 표정을 지었다.“지원 씨, 지금 뭘 찾는 거예요? 집 안의 청소는 제 담당이지 않아요?”도은숙은 그만 놀란 표정을 짓고 말았다. 문지원은 집안일이라곤 전혀 해본 적 없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문용석은 항상 딸은 귀하게 키워야 한다면서 집안일도 못 하게 했고 주방에 들어가 손에 물 묻히는 것조차 못하게 했다. 물론 문지원이 요리나 집안일에 흥미가 있다면 하게 해줄 것이었지만 문지원은 요리에 재능이 없었을 뿐 아니라 집안일에도 재능이 없었다.그랬기에 지금까지 그녀는 손에 물 한 방울 묻힌 적 없이 자랐다고 할 수 있다. 문지원은 빗자루를 찾아내면서 말했다.“공장의 숙소에 청소할 사람이 필요하거든요. 청소부 직원 고용해도 되긴 한데 비싸서 제가 직접 해보려고요. 그러면 돈을 아낄 수 있잖아요
현관으로 온 지석훈은 그제야 문지원이 떠올라 망설이다가 걸음을 멈추었다. 문지원은 일부러 핸드폰을 꺼내 보면서 괜찮은 척했지만 속에서는 이상하리만큼 씁쓸함이 밀려왔다.“전 괜찮으니까 얼른 가보세요. 그 사람들도 더 어떻게 찾아오진 못할 거예요. 여기서 더 찾아온다면 범죄가 될 테니 말이에요.”“그래. 무슨 일이 생기면 나한테 바로 연락해.”안색이 조금 풀린 지석훈은 바로 문을 열고 나가버렸다. 집 안에는 문지원 혼자 남게 되었다. 예전에도 집 안에 혼자 남은 적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이번엔 이상하리만큼 외롭고 쓸쓸했다. 창문이 굳게 닫혀 있음에도 자꾸만 어딘가 바람이 새어 나와 그녀의 손발을 차갑게 하는 것 같았다.그녀는 최대한 다른 생각은 하지 않으려고 했고 따듯한 물에 샤워한 후 일찍 쉬려고 했다. 다행히 이날 밤 그녀에게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다음 날이 되자 문지원은 청소 직원을 불러 문과 바닥을 도배한 붉은 페인트를 지워달라고 했다. 그러고 나서 그녀는 바로 공장으로 달려가 구인 상황을 살펴보았다. 결과는 놀랍게도 지원자가 14명이나 모였고 그녀는 보자마자 기뻐했다. 손기영과 같은 마을에 사는 마을 주민이라는 것을 들은 그녀는 바로 손기영에게 물었다.“공장장님 마을 사람들이 정말로 공장에서 일하고 싶다고 했어요?”“당연하지. 마다할 리가 있겠어? 내가 충분히 설명했는데도 일하고 싶다고 찾아온 사람들이야.”손기영은 원래 바쁘게 일하고 있었지만 그녀를 보자마자 하던 일을 멈추고는 걱정이 담긴 잔소리를 해댔다.“문 사장, 앞으로 공장으로는 가끔 찾아오는 것이 좋겠어. 여긴 평소에 작업하느라 공기가 좋지 않아. 우리 직원들도 모자며, 마스크며 꽁꽁 쓰고 일한다고.”문지원은 황급히 손을 올려 아무것도 없는 얼굴을 만졌다.“아, 죄송해요. 깜빡하고 있었어요. 지금 바로 가서 마스크와 작업복으로 갈아입고 올게요!”그녀는 얼른 마스크를 착용했다. 이내 손기영은 그녀를 데리고 막 공장으로 출근한 직원들을 소개해주었다. 남자도 있고 여자도
문지원은 지석훈이 자신에게 부담을 주지 않으려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현유한과 프로젝트를 위해 자신을 팔아버린 주현철, 그리고 현유한에게 당한 폭행과 욕설만 떠올리면 저도 모르게 몸이 덜덜 떨렸다. 현유한이 절대 자신이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을 그녀는 확신할 수 있다.지석훈은 그런 그녀의 모습을 눈치챘지만 그가 묻기도 전에 문지원이 먼저 고개를 들어 말했다.“네. 그럼 부탁드릴게요. 저 좀 데려다주세요.”“그래.”지석훈은 구겼던 미간을 폈다. 그녀가 괜찮다고 말하지 않아도 어차피 그는 며칠 동안 그녀를 돌봐줄 생각이었다. 그녀에게 더는 다른 나쁜 일이 생기길 바라지 않았으니까. 그러나 그녀의 집에 도착한 지석훈은 문 앞 바닥과 현관문에 빨간 페인트로 ‘X 녀'와 ‘쌍 X'라는 욕으로 가득 도배된 것을 보게 되었다. 절로 미간을 찌푸리게 하는 욕설들이었다.그는 더는 모른 척 넘어갈 수 없어 옆에 있던 문지원을 보았다.“요즘에 이상한 사람한테 걸리기라도 한 거야?”그녀가 입을 꾹 다물고 있자 그는 계속 물었다.“혹시 오늘 다친 것과 연관이 있는 거지?”비록 의문문이었지만 그의 어투엔 확신으로 가득했다. 더는 숨길 의미가 없을 정도였다. 더구나 현유한이 이렇듯 빨리 자신의 거처까지 찾아낼 줄은 몰랐다. 문지원은 자신이 절대 다른 사람과 맞설 수 없는 존재임을 알았다. 지금 상황에서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은 직접 믿을 만한 사람을 찾아가 도움을 요청하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은 더는 믿을 수가 없다.문지원이 현재 믿을 수 있는 사람은 지석훈 한 명뿐이었다. 괴로운 눈빛으로 빨간 글씨를 보던 문지원은 이내 시선을 돌려 키를 꺼냈다.“일단 들어가서 얘기해요. 오늘은 주말이고 은숙 아주머니도 쉬는 날이에요.”지석훈은 묵묵히 그녀를 따라 들어갔다. 집 안으로 들어온 문지원은 먼저 겉옷을 벗었다. 그리고는 한숨을 내쉬며 소파에 털썩 앉아 오늘에 있었던 일을 전부 지석훈에게 알려주었다.“전 현철 아저씨가 예전에 우리 아빠와 계속 협력을 이어
지석훈은 문지원이 말을 하지 않자 한숨을 내쉬었다.“일단 상처부터 치료해줄게.”이내 그는 소독약을 들고 돌아왔다. 문지원은 움찔하며 다소 민망해진 어투로 말했다.“크게 다친 것도 아닌데 제가 할게요.”그러나 지석훈은 그녀의 손을 꽉 잡으며 낮게 깔린 목소리로 말했다.“움직이지 마.”문지원은 저도 모르게 그의 말을 따랐다. 지석훈이 들고 있는 면봉이 그녀의 피부에 닿을 때마다 그녀는 어딘가 자극을 받은 것처럼 움찔거렸고 차가운 소독약에 찌릿찌릿한 기분이 들었다. 지석훈은 그런 그녀의 모습을 보더니 미간을 찌푸리며 자신이 약을 아프게 바른 것은 아닌지 생각했지만 문지원은 오히려 자신이 그의 심기를 건드렸다고 오해했다.“미안해요... 일부러 그러는 건 아니에요. 약이 상처에 닿으니까 따가워서 저도 모르게 움찔거린 거예요.”문지원은 원래부터 곱게 자란 부잣집 딸이었다. 문용석은 입원하기 전까지 행여나 자기 딸이 조금이라도 다치게 될까 봐 애지중지하며 길렀던지라 상처에 소독약을 발라보는 것은 태어나서 처음이었다.“그럼 살살 발라줄게.”이렇게 말한 지석훈은 천천히 움직였지만 문지원은 오히려 더 고역이었다. 소독약이 묻은 면봉이 상처에 닿을 때 원래는 그저 따갑기만 했지만 지석훈이 살살 바르고 있으니 깃털로 간질이는 것처럼 간지럽기도 했다.어떤 사람들은 고통을 잘 참을 수 있어도 간지러움은 참지 못했다. 문지원이 바로 이런 부류에 속했다. 결국 참지 못한 그녀는 손을 뻗어 지석훈의 손을 잡아버렸다. 지석훈도 멈추며 고개를 천천히 들었다. 시선이 맞닿은 순간 문지원은 그제야 자신이 바보 같은 짓을 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고 눈을 질끈 감으며 말했다.“그냥 아까처럼 발라주세요. 이건 너무 간지러워요.”그 말을 들은 지석훈은 굽혔던 몸을 일으켜 세우더니 헛기침 두어 번하며 어색한 목소리로 말했다.“미안해. 내가 거기까진 생각을 못 했네. 하지만 네 몸에 있는 상처들은 약 발라야 나을 수 있는 상처들이야. 어떤 부위엔 네 손도 닿지 않을 거고. 아니면 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