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서우는 바로 다가가 이혜성을 방해하지 않았다. 그저 고개를 돌려 인명진과 서로 마주 보며 미소를 지었다. 결혼식이 끝나고 하객들도 돌아갔다. 하루 종일 바쁘게 움직였던 은서우는 그제야 한숨 돌릴 수 있을 것 같았다.집으로 돌아오니 집안 곳곳에 그녀의 손길이 닿은 흔적이 있어 은서우는 마음이 너무도 편안해졌다. 예전이었다면 볼 수 없는 집안 모습이었다.“수고했어요.”어깨에 커다란 두 손이 올려지고 적당한 압력으로 그녀의 어깨를 주물러 주었다. 은서우는 무의식적으로 미간을 찌푸리며 남자의 손을 잡았다. 인명진은 부드럽게 그녀의 손을 내리며 말했다.“괜찮으니까 긴장 풀어요.”은서우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그렇네. 깜빡 잊고 있었네. 지금과 예전은 다르잖아. 난 이젠 명진 씨 아내라고.'“고마워요.”인명진은 눈썹을 꿈틀거렸다.“대체 언제까지 거리감이 느껴지게 나한테 고맙다는 인사를 할 셈이에요? 이참에 우리 말도 놔요.”그녀는 입을 꾹 다물고 장난기 가득한 눈빛으로 보는 인명진을 보았다. 그녀의 얼굴이 점점 더 붉어졌다. 인명진은 민망해하는 그녀의 얼굴을 빤히 보더니 그윽한 모습으로 그녀의 귓가에 대고 작게 속삭였다.“욕실에 물 받아뒀는데 오늘은 같이 씻을까?”은서우는 하마터면 말하는 법을 잊을 뻔했다. 그녀는 대답하지 않았지만 본능적으로 인명진의 목으로 올라간 팔이 지금 그녀의 기분을 말해주는 것 같았다.인명진은 바로 그녀를 공주님 안기 자세로 들어 올렸다. 신혼 생활은 예전과 많이 달랐다. 혼자 살던 때와 달리 두 사람이 한 지붕 아래 함께 살아가야 했다. 처음에 은서우는 너무도 적응되지 않았다.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자신의 옆에 누군가 누웠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저도 모르게 멍한 얼굴로 보다가 어젯밤 보냈던 오붓한 시간들이 떠올라 얼굴이 한참 동안 붉어졌다.함께 사는 시간이 점점 더 길어지고 더는 낯설어하지도 않았고 부끄러워하지도 않았다. 두 사람은 점점 서로에게 적응되었고 화목하게 지냈다. 병원으로 오자 사람들은
“응, 내가 보육원도 이미 알아봤어. 그런데 왜 자꾸 존댓말이야?”인명진이 말하자 은서우는 의아한 목소리로 말했다.“반말은 아직 좀 어색해서요. 넌 나중에 천천히 할게요. 그런데 이미 알아봤다고요? 전에... 새로 지을 거라고 하지 않았어요?”인명진은 고개를 저었다.“곰곰이 생각해봤는데 새로 짓기엔 비용이 너무 많이 들고 사람들의 믿음을 얻기도 힘들잖아. 새로 지으면 사람들이 어떻게 믿고 아이들을 맡기겠어.”그들의 보육원에는 원장과 보육교사도 필요했다. 받는 월급이 적었던지라 보육원에서 일하려는 사람이 많지 않았고 대부분 시간을 낭비라면서 보육원에 일하려 하지 않았다.“마침 적당한 보육원이 하나 있더라고. 운영 부진으로 폐업되었는데 그곳엔 여전히 보육교사들과 갈 곳 없는 아이들이 살고 있어. 보육원이 파산당하긴 했지만 갈 곳도 없어서 계속 남아 있었나 봐. 게다가 보육교사들도 어떻게든 다시 보육원을 되살리려고 애를 쓰고 있더라고.”그의 말을 들은 은서우는 눈을 반짝였다.“그래서 새로 짓지 않고 그 사람들을 도와주려고 한 거예요?”그녀는 기쁜 얼굴로 인명진의 얼굴을 감싸더니 뽀뽀를 해주었다. 쪽 소리가 유난히도 크게 울려 퍼졌다.“완전 좋은 생각이잖아요!”그러나 은서우는 너무 기쁜 나머지 점점 어두워지는 인명진의 눈빛을 미처 발견하지 못했다. 그 순간 그녀는 인명진에게 확 끌어당겨 졌다. 반응하기도 전에 그녀는 그의 품에 꽉 끌어안겼다. 이내 그녀의 입술로 그의 입술이 닿더니 거친 키스가 이어졌다.점차 숨이 차는 은서우는 그의 옷깃을 꽉 잡았다.“잠깐만요... 여긴 병원이잖아요. 명진 씨 진정 좀 해요.”인명진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병원으로 돌아온 뒤로 고강도의 업무에 시달렸던지라 두 사람은 며칠 동안이나 부부 생활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그랬기에 인명진은 현재 불만이 가득 쌓인 상태였다. 겨우 이런 기회가 찾아왔으니 그는 당연히 놓칠 생각이 없었다.한참 지나서야 인명진은 그녀를 놓아주었다. 얼굴이 빨갛게 물든 은서우는 그를 밀어내더니
기획안은 빠르게 완성되었지만 제일 중요한 것은 그래도 직접 보육원으로 찾아가 살펴보는 것이었다. 그렇게 은서우는 시간을 내서 인명진과 함께 보육원으로 출발했다.보육원은 위치가 아주 좋았지만 그다지 환영받지 않았다. 마치 사람들에게 잊혀버린 곳처럼 보육원에 있는 모든 물건들이 전부 낡은 것이었고 건물도 몇십 년 전에 지어진 것처럼 대문마저 녹슬어 있었다.보육원으로 도착했을 때 은서우는 바로 페인트 떨어진 벽을 보게 되었다.“이런 집에 사람이 살고 있다고요? 확실해요? 이건 언제 무너져도 이상하지 않은 집이잖아요.”그녀가 묻자마자 모직 코트를 입은 여자가 안에서 나왔다. 그녀의 말을 들은 것인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맞아요. 여긴 보육원인데 올해 가을에 철거한다는 결정이 났어요. 보육원엔 아직 서른 명이 넘는 아이들과 보육교사, 그리고 저까지 전부 합쳐서 총 마흔 명이 있어요. 만약 이 보육원이 철거된다면 서른 명이 넘는 아이들은 어디로 가야 할까요. 전 아직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르겠어요. 그걸 지금까지 생각하다 보니 어느새 지금까지 여기서 버티게 되었네요. 그러니 저희를 좀 도와주세요.”은서우는 중년의 여자를 보았다. 여자는 온화하게 생겼지만 입고 있는 모직 코트는 낡아 색도 바랬다. 보아하니 아주 오래 입은 것 같았다. 여자의 옷차림에서도 보육원이 얼마나 가난한지 알 수 있었다.“죄송해요. 그런데 혹시 누구신지 알 수 있을까요?”은서우는 자신이 말실수했음을 알고 바로 사과했다. 중년의 여자는 이곳 보육원의 원장이라고 그들에게 소개했다. 그 말은 들은 은서우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눈앞에 있는 사람이 원장이라니 말이다.“아가씨, 뭘 그렇게 놀래요? 대부분 아가씨와 같은 반응이더라고요. 밖은 추우니까 일단 들어가서 계속 얘기해요.”원장은 그들을 안으로 초대했다. 안으로 들어간 은서우는 이곳 보육원이 얼마나 가난한지 더 깊이 알게 되었다. 이곳은 정말이지 가난해도 너무 가난했다. 원장이 그들에게 대접할 수 있는 음료수도 그저 따듯하게 끓인 물
은서우는 원장이 정말로 너무도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원장이 진정하길 기다린 후 그녀는 보육원의 아이들을 만나보고 싶다고 말했다. 그러자 원장은 흔쾌히 대답했다.“그래요. 제가 우리 아이들을 보여드릴게요. 다만 아이들 중에 조금 혼자 동떨어져 있는 특별한 아이가 보일 거예요. 그래도 너무 개의치 말아요.”원장은 말을 하다가 진지해졌다. 은서우는 그런 그녀의 모습에 조금 놀랐고 원장의 입에서 나온 특별한 아이가 궁금해졌다.빠르게 그들은 어느 한 교실로 도착했다. 이곳에서 보육교사들은 하나의 방을 쓰고 있었고 다른 곳은 학교 교실처럼 만들었다. 보육원에 아이들이 너무도 많았기 때문에 아이들의 학비를 대줄 여력이 되지 않았다. 이렇게 지원을 받는 것도 너무도 오랜만이었다.하지만 학교 다녀야 할 아이들이 아무런 지식도 없는 채 자라게 될까 봐 보육교사들은 서로 번갈아 가며 아이들을 가르쳐주었다. 그리고 지금 교실에선 한창 수업 중이었다.은서우는 갑자기 들어가면 아이들이 놀라게 될까 봐 들어가지 않고 문밖에서 창문으로 조용히 안을 들여다보았다. 빠르게 그녀는 아이들과 어울리지 못하는 남자아이를 발견했다.다른 아이들은 아주 활발하게 선생님의 질문에 대답도 하고 함께 게임도 했지만 유독 구석에 앉아 있는 남자아이만 혼자 블록 하나를 손에 꼭 쥐고 멍 때리고 있었다.“원장님이 말씀하신 특별한 아이가 혹시 저 아이인가요?”마음이 흔들린 은서우는 바로 물었다. 원장은 고개를 끄덕였고 아이를 보는 두 눈빛엔 근심과 자애로움이 가득했다.“네, 저 아이가 맞아요. 아이의 이름은 천유민이고 아이의 엄마가 아이의 아빠와 이혼한 후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어요. 원래라면 아이의 아빠가 아이를 키워야 하는데 아이의 아빠도 갑작스러운 심근경색으로 세상을 떠나버렸어요. 더는 남은 가족이 없어 우리 보육원으로 오게 되었는데 예전에는 아주 활발하고 잘 웃는 아이였다고 하더라고요. 그런데 그날 후로 단 한 번도 웃지 않았대요. 저와 선생님들이 아무리 말을 걸어봐도 계속 저 모습이에요.”
은서우는 고개를 끄덕였고 보육교사가 나가자마자 아이가 앉아 있는 책상 옆으로 다가갔다. 몸을 굽힌 그녀는 블록만 멍하니 보고 있는 남자아이를 보았다.“그거 어떻게 맞추는 건지 알고 있는데. 가르쳐줄까?”남자아이는 멈칫했다. 은서우는 그런 아이의 모습을 못 본 척했다.“블록 맞추는 거 어렵지? 그리고 네가 들고 있는 그 블록은 하나뿐인 것 같네. 혹시 블록 더 없어?”남자아이는 고개를 들어 그녀를 보았다. 은서우는 아이가 자신의 말에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뜻밖에도 아이는 입을 열었다.“네. 더 있어요. 방에 있어요.”간단하게 대답했지만 아이가 입을 열었던 사실에 은서우는 충분함을 느꼈다. 아이가 입을 열기만 한다면 희망이 있다는 것이었으니까. 그러고 난 후 은서우는 아이를 따라 방으로 가서 블록을 가져왔고 그렇게 오후 내내 블록을 맞췄다.도중에 보육교사가 아이의 식판을 들고 들어왔지만 아이는 음식에 흥미를 보이지 않았다. 설령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나도 먹지 않았고 자신의 몸이 어떻게 되든 신경 쓰지 않았다.은서우는 당연히 지켜만 보고 있을 수 없었다. 그녀는 열심히 블록을 맞추고 있는 아이의 곁으로 다가갔다.“내가 방법을 알려주긴 했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야. 더 알고 싶어? 그런 거라면 일단 밥부터 먹을까?”“배고프지 않아요.”아이가 말을 하자마자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 은서우는 못 들은 척하며 고개를 끄덕였다.“하지만 내가 배고픈걸. 우리 먼저 밥 먹으면 안 될까?”남자아이는 한참 생각했다. 기껏해야 다섯 살쯤 되는 아이가 어른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으니 은서우는 조금 의외라고 생각하긴 했지만 놀라지는 않았다.자폐증이 있는 아이들은 대부분 머리가 좋았다. 심지어 어느 한 분야에서 천재인 경우도 있었지만 대가는 평생 바깥세상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이었다. 아이가 침묵하고 있는 것도 생각에 빠진 것이 틀림없었다. 그녀의 말을 들을지 말지 곰곰이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이것은 좋은 현상이었기에 은서우는 인내심 있게
원장은 아주 기뻐했다.“전부 서우 씨 덕분이에요.”은서우는 겸손한 얼굴로 물 한 모금 마신 후 말을 하려고 했지만 그 순간 밖에서 흘러들어오는 고소한 밥 냄새를 맡게 되었다. 지금 이 시간은 확실히 아이들이 점심을 먹을 시간이었다. 그전에도 그녀는 자주 밥 냄새를 맡았다.하지만 왜인지 모르겠으나 이상하게도 지금은 너무도 메슥거렸다. 속에 있는 것이 역류하는 느낌에 은서우는 빠르게 쓰레기통이 있는 곳으로 뛰어가 헛구역질해댔다. 그런 그녀의 모습에 원장은 긴장한 얼굴로 보았다.“서우 씨, 왜 그래요. 괜찮아요? 속이 안 좋은 거예요?”은서우는 대답하려고 했지만 순간 머릿속에 자신의 생리가 늦어졌다는 것을 떠올랐다. 이 생각에 저도 모르게 긴장해진 그녀는 본능적으로 손을 올려 배를 만졌다. 그녀의 생리 주기는 절대 늦어지는 법이 없었다. 특수한 상황이 아니라면 말이다. 그런데 지금은...”“서우 씨, 속이 안 좋은 거라면 얼른 병원에 가서 검사받아봐요.”원장의 걱정이 담긴 목소리가 그녀를 정신 차리게 했다. 은서우는 고개를 저으며 괜찮다고 말했다. 하지만 울렁거리는 속을 무시할 수 없었던 그녀는 더는 보육원에서 머물지 않았고 원장과도 먼저 돌아가 보겠다고 말했다.병원으로 돌아온 그녀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인명진을 찾아가지 않고 산부인과로 가서 검사를 받았다. 그 의사는 마침 은서우와 아는 사람이었다. 검사 결과가 나오자 의사는 바로 웃으며 말했다.“축하해요. 은 선생님. 임신 3주 차네요.”엄청난 소식에 은서우는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조심스럽게 손을 배에 올리며 눈을 깜빡였다.“정말, 정말로 임신한 거예요?”검사 결과는 확실히 그녀가 임신했다고 알려주고 있었다. 하지만 결과를 본 은서우는 여전히 믿어지지 않았다. 인명진과 밤을 보낸 후 단 한 번도 피임을 한 적 없었다. 여하간에 두 사람은 나이가 꽤 있었고 게다가 은서우는 집안의 영향으로 항상 아이를 바랐다. 아이와 남편과 함께 오손도손 사는 것이 꿈이었지만 이렇게나 빨리 아이가 찾아올 줄은
은서우는 놀라 소리를 지르며 얼른 내려달라고 했다. 인명진은 그제야 진정할 수 있었다.“미안해. 내가 깜빡 잊고 있었어.”인명진은 조금 전 자신이 한 행동을 후회했다. 하지만 은서우는 아무렇지 않았다. 비록 임신 초기엔 조심해야 하는 건 맞지만 끌어안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기쁨을 만끽하고 있던 와중에 은서우는 보육원이 떠올라 잠깐 망설였다.“이 상태면 그럼 보육원은...”인명진은 시선을 들어 그녀를 보았다.“가고 싶어?”“당연하죠!”은서우는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보육원은 아직 공사도 시작하지 못했을뿐더러 자폐증을 앓고 있는 아이가 나아지는 모습도 계속 지켜보고 싶었다. 그렇게 노력해서 아이의 마음의 문을 열었는데 어떻게 도중에 그만둘 수 있겠는가.하지만 은서우는 인명진이 허락해주지 않을까 봐 걱정되었다. 그가 침묵하고 있던 때 그녀는 이미 그를 설득할 말을 머릿속에 생각해두었다. 입을 열려던 순간 인명진이 먼저 말했다.“그럼 가. 조심하기만 하면 괜찮을 거야.”은서우는 놀란 얼굴로 그를 보자 그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내가 하고 싶은 일을 내가 막아서 뭐해. 결혼은 자유를 속박하는 게 아니야. 난 네가 여전히 너로 살았으면 좋겠어. 하고 싶은 대로 자유롭게 말이야.”그의 말에 은서우는 감동하고 말았다. 그와의 결혼은 너무도 잘한 선택인 것 같았다. 다만 그녀는 기껏해야 한 달 정도 된 배 속의 아기를 위해서라도 무리하면 안 되었다. 그랬기에 그녀는 이틀에 한 번씩 찾아가던 보육원을 사나흘에 한 번씩 방문했다.평소에 감정 표현을 잘하지 않던 천유민은 사흘에 한 번씩 찾아오는 그녀에 먼저 그녀의 손을 잡으며 보육원 안으로 데리고 들어갔다.은서우는 놀라긴 했지만 기쁘기도 했기에 아이가 이끄는 대로 들어갔다. 빠르게 아이는 그녀를 책상 앞으로 데리고 왔다.이 책상은 천유민이 평소 수업을 들을 때 사용하는 책상이었다. 그리고 지금은 완성된 블록이 정갈하게 놓여 있었다. 이 블록은 그날 은서우가 빌려 갔었기에 절반만 맞출 수밖에 없었다
웃고 있던 은서우는 그만 굳어진 얼굴을 하고 말았다.“소태훈?”그녀는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휠체어에 앉은 사람을 보았다. 지금 그녀의 앞에 있는 사람은 정말로 소태훈이었다. 은서우는 그를 만나는 것이 얼마 만인지 알지 못했다. 만약 오늘 소태훈이 그녀의 앞에 나타난 것이 아니었다면 아마 죽을 때까지 평생 다시 만나지 못하리라 생각했다.여하간에 그때의 기억은 그녀에게 너무나도 고통스럽고 괴로웠으니 말이다.소태훈은 휠체어 바퀴를 돌려 그녀의 앞으로 갔다. 무언가 그녀에게 할 말이 있는 것 같은 모습이었지만 그가 말을 하기도 전에 검은색 승용차가 은서우 앞에 멈춰서며 창문이 스르륵 내려갔다. 안에 있는 사람은 인명진이었다.인명진도 소태훈을 발견한 듯했지만 소태훈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고 오로지 은서우에게만 시선을 고정했다.“타. 집으로 가자.”인명진이 입을 열자 유난히도 다정한 목소리가 들렸다. 조금 전 그와 전화 통화할 때 이미 그가 곧 도착할 거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랬기에 그가 그녀의 앞에 있어도 전혀 놀라지 않았다. 그저 시선을 돌려 뒤에 있는 소태훈을 힐끗 보았다.“지금 상태가 꽤 많이 나아진 것 같네. 약은 이미 끊은 것 같고 다른 건 할 말이 없으니까 이만 갈게.”말을 마친 은서우는 차에 올라타려고 했다. 한번 떠난 사람은 뒤돌아보는 법이 없었고 기억이란 쉽게 잊히는 것은 아니었던지라 은서우는 더는 소태훈과 엮이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뜻밖에도 소태훈은 뻔뻔하게 그녀를 다시 불러세웠다.“네가 날 얼마나 원망하고 있는지 나도 알아! 하지만 그래도 우린 20년 넘게 함께 살았던 가족이었잖아. 곧 태연이 기일이야. 설마 영원히 돌아오지 않을 생각은 아니지?”은서우는 그대로 멈칫했다. 그런 그녀의 모습에 소태훈은 아직 기회가 있다는 것을 눈치채고 깊은숨을 내쉰 후 계속 말을 이었다.“한 번이라도 와줘. 함께 식사라도 하자. 예전의 일은 나와 부모님이 너한테 못되게 굴었다는 거 알아. 하지만 그동안 우린 줄곧 널 그리워하고 있었어.”
현관으로 온 지석훈은 그제야 문지원이 떠올라 망설이다가 걸음을 멈추었다. 문지원은 일부러 핸드폰을 꺼내 보면서 괜찮은 척했지만 속에서는 이상하리만큼 씁쓸함이 밀려왔다.“전 괜찮으니까 얼른 가보세요. 그 사람들도 더 어떻게 찾아오진 못할 거예요. 여기서 더 찾아온다면 범죄가 될 테니 말이에요.”“그래. 무슨 일이 생기면 나한테 바로 연락해.”안색이 조금 풀린 지석훈은 바로 문을 열고 나가버렸다. 집 안에는 문지원 혼자 남게 되었다. 예전에도 집 안에 혼자 남은 적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이번엔 이상하리만큼 외롭고 쓸쓸했다. 창문이 굳게 닫혀 있음에도 자꾸만 어딘가 바람이 새어 나와 그녀의 손발을 차갑게 하는 것 같았다.그녀는 최대한 다른 생각은 하지 않으려고 했고 따듯한 물에 샤워한 후 일찍 쉬려고 했다. 다행히 이날 밤 그녀에게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다음 날이 되자 문지원은 청소 직원을 불러 문과 바닥을 도배한 붉은 페인트를 지워달라고 했다. 그러고 나서 그녀는 바로 공장으로 달려가 구인 상황을 살펴보았다. 결과는 놀랍게도 지원자가 14명이나 모였고 그녀는 보자마자 기뻐했다. 손기영과 같은 마을에 사는 마을 주민이라는 것을 들은 그녀는 바로 손기영에게 물었다.“공장장님 마을 사람들이 정말로 공장에서 일하고 싶다고 했어요?”“당연하지. 마다할 리가 있겠어? 내가 충분히 설명했는데도 일하고 싶다고 찾아온 사람들이야.”손기영은 원래 바쁘게 일하고 있었지만 그녀를 보자마자 하던 일을 멈추고는 걱정이 담긴 잔소리를 해댔다.“문 사장, 앞으로 공장으로는 가끔 찾아오는 것이 좋겠어. 여긴 평소에 작업하느라 공기가 좋지 않아. 우리 직원들도 모자며, 마스크며 꽁꽁 쓰고 일한다고.”문지원은 황급히 손을 올려 아무것도 없는 얼굴을 만졌다.“아, 죄송해요. 깜빡하고 있었어요. 지금 바로 가서 마스크와 작업복으로 갈아입고 올게요!”그녀는 얼른 마스크를 착용했다. 이내 손기영은 그녀를 데리고 막 공장으로 출근한 직원들을 소개해주었다. 남자도 있고 여자도
문지원은 지석훈이 자신에게 부담을 주지 않으려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현유한과 프로젝트를 위해 자신을 팔아버린 주현철, 그리고 현유한에게 당한 폭행과 욕설만 떠올리면 저도 모르게 몸이 덜덜 떨렸다. 현유한이 절대 자신이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을 그녀는 확신할 수 있다.지석훈은 그런 그녀의 모습을 눈치챘지만 그가 묻기도 전에 문지원이 먼저 고개를 들어 말했다.“네. 그럼 부탁드릴게요. 저 좀 데려다주세요.”“그래.”지석훈은 구겼던 미간을 폈다. 그녀가 괜찮다고 말하지 않아도 어차피 그는 며칠 동안 그녀를 돌봐줄 생각이었다. 그녀에게 더는 다른 나쁜 일이 생기길 바라지 않았으니까. 그러나 그녀의 집에 도착한 지석훈은 문 앞 바닥과 현관문에 빨간 페인트로 ‘X 녀'와 ‘쌍 X'라는 욕으로 가득 도배된 것을 보게 되었다. 절로 미간을 찌푸리게 하는 욕설들이었다.그는 더는 모른 척 넘어갈 수 없어 옆에 있던 문지원을 보았다.“요즘에 이상한 사람한테 걸리기라도 한 거야?”그녀가 입을 꾹 다물고 있자 그는 계속 물었다.“혹시 오늘 다친 것과 연관이 있는 거지?”비록 의문문이었지만 그의 어투엔 확신으로 가득했다. 더는 숨길 의미가 없을 정도였다. 더구나 현유한이 이렇듯 빨리 자신의 거처까지 찾아낼 줄은 몰랐다. 문지원은 자신이 절대 다른 사람과 맞설 수 없는 존재임을 알았다. 지금 상황에서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은 직접 믿을 만한 사람을 찾아가 도움을 요청하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은 더는 믿을 수가 없다.문지원이 현재 믿을 수 있는 사람은 지석훈 한 명뿐이었다. 괴로운 눈빛으로 빨간 글씨를 보던 문지원은 이내 시선을 돌려 키를 꺼냈다.“일단 들어가서 얘기해요. 오늘은 주말이고 은숙 아주머니도 쉬는 날이에요.”지석훈은 묵묵히 그녀를 따라 들어갔다. 집 안으로 들어온 문지원은 먼저 겉옷을 벗었다. 그리고는 한숨을 내쉬며 소파에 털썩 앉아 오늘에 있었던 일을 전부 지석훈에게 알려주었다.“전 현철 아저씨가 예전에 우리 아빠와 계속 협력을 이어
지석훈은 문지원이 말을 하지 않자 한숨을 내쉬었다.“일단 상처부터 치료해줄게.”이내 그는 소독약을 들고 돌아왔다. 문지원은 움찔하며 다소 민망해진 어투로 말했다.“크게 다친 것도 아닌데 제가 할게요.”그러나 지석훈은 그녀의 손을 꽉 잡으며 낮게 깔린 목소리로 말했다.“움직이지 마.”문지원은 저도 모르게 그의 말을 따랐다. 지석훈이 들고 있는 면봉이 그녀의 피부에 닿을 때마다 그녀는 어딘가 자극을 받은 것처럼 움찔거렸고 차가운 소독약에 찌릿찌릿한 기분이 들었다. 지석훈은 그런 그녀의 모습을 보더니 미간을 찌푸리며 자신이 약을 아프게 바른 것은 아닌지 생각했지만 문지원은 오히려 자신이 그의 심기를 건드렸다고 오해했다.“미안해요... 일부러 그러는 건 아니에요. 약이 상처에 닿으니까 따가워서 저도 모르게 움찔거린 거예요.”문지원은 원래부터 곱게 자란 부잣집 딸이었다. 문용석은 입원하기 전까지 행여나 자기 딸이 조금이라도 다치게 될까 봐 애지중지하며 길렀던지라 상처에 소독약을 발라보는 것은 태어나서 처음이었다.“그럼 살살 발라줄게.”이렇게 말한 지석훈은 천천히 움직였지만 문지원은 오히려 더 고역이었다. 소독약이 묻은 면봉이 상처에 닿을 때 원래는 그저 따갑기만 했지만 지석훈이 살살 바르고 있으니 깃털로 간질이는 것처럼 간지럽기도 했다.어떤 사람들은 고통을 잘 참을 수 있어도 간지러움은 참지 못했다. 문지원이 바로 이런 부류에 속했다. 결국 참지 못한 그녀는 손을 뻗어 지석훈의 손을 잡아버렸다. 지석훈도 멈추며 고개를 천천히 들었다. 시선이 맞닿은 순간 문지원은 그제야 자신이 바보 같은 짓을 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고 눈을 질끈 감으며 말했다.“그냥 아까처럼 발라주세요. 이건 너무 간지러워요.”그 말을 들은 지석훈은 굽혔던 몸을 일으켜 세우더니 헛기침 두어 번하며 어색한 목소리로 말했다.“미안해. 내가 거기까진 생각을 못 했네. 하지만 네 몸에 있는 상처들은 약 발라야 나을 수 있는 상처들이야. 어떤 부위엔 네 손도 닿지 않을 거고. 아니면 내
“지원 씨와 같은 나이대 여자들은 대부분 명품 가방을 좋아하던데, 아니면 명품 액세서리라던가 말이에요. 누가 허구한 날 공장에만 박혀서 더러운 일꾼들과 대화를 해요. 지원 씨 아버님 책임감이 전부 지원 씨가 떠안고 있으면 너무 불공평하잖아요. 안 그래요?”현유한은 자꾸만 슬금슬금 그녀의 옆으로 자리를 옮겼다. 문지원은 불길한 예감이 들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현 대표님, 전 대표님을 아주 존경해요. 오늘 이렇게 온 것도 사업에 관해 얘기하려고 온 거예요. 만약에 대표님께서는 다른 의도로 오신 거라면 전 이만 가볼게요.”주현철이 소개해준 상대는 정말이지 전혀 믿음직스럽지 않았다. 집으로 돌아간다면 그녀는 반드시 주현철의 연락처를 차단하고 더는 연락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그러나 그녀를 곱게 보내줄 현유한이 아니었다. 겨우 그녀를 속여 이곳까지 나오게 했으니 반드시 원하는 대로 놀아야 직성이 풀렸다. 그렇게 생각한 그는 문지원의 팔을 확 잡아당겼다.“나랑 살면 매달 용돈 1000만 원 줄 수 있는데 뭐하러 힘들게 이리저리 돌아다녀요? 어차피 그 공장도 곧 망할 것 같은 데 시간 낭비는 하지 않는 게 더 좋지 않겠어요?”“이거 놔요!”문지원은 두 눈을 부릅뜨며 발을 들어 그를 차버렸다.‘지금 스폰 제안하는 거야? 꿈 깨라고 해!'그녀에게도 자존심이 있었고 아무리 힘들다고 해도 자기 몸까지 팔 정도는 아니었다.“씨X, 좋게 말할 때 이리와.”현유한은 그녀의 발길질에 앓는 소리를 냈다. 룸 안에는 둘 뿐이었고 그의 힘이 그녀보다 셌던지라 당연히 문지원 정도는 쉽게 잡을 수 있을 거로 생각했다. 여하간에 문지원의 집안 상황도 좋지 않았던지라 문지원의 편을 들어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그가 무슨 짓을 해도 그녀를 지켜줄 사람도 없었다.“얌전히 있는 게 좋을 거야. 만약 내 심기를 거스른다면 이 바닥 사람들에게 절대 너와 협력하지 말라고 할 거고 그렇게 되면 네 그 허접한 공장도 망하게 되겠지!”현유한은 문지원을 노려보며 협박했다. 하지만 문지원
전화를 건 사람은 바로 문정 그룹의 단골 협력 업체 대표인 주현철이었다. 어제 문지원은 그에게도 연락했었지만 주현철이 수중에 진행하고 있는 프로젝트가 없다고 대답했기에 그녀는 결국 전화를 끊을 수밖에 없었다. 비록 오늘 갑자기 전화한 목적이 무엇인지 모르지만 일단은 받았다.“네, 아저씨. 무슨 일이세요?”“지원아, 아저씨가 너한테 프로젝트 소개해주려고 전화했단다. 어제 나한테 연락하지 않았니. 나한테까지 연락했으니 당연히 널 도와줘야지. 안 그러니?”주현철의 목소리가 핸드폰 너머로 들려왔다. 사실 문지원은 그의 연락이 불편하게 느껴졌다. 그녀는 분명 상대에게 협력하겠냐고 물었지만 상대는 그녀를 도와주는 것이라고 하지 않겠는가. 분명 협력은 서로 이익을 바라고 하는 일인데 말이다. 하지만 손님은 왕이었던지라 그녀는 그가 꺼낸 말이 불편하게 느껴진다고 해서 말다툼을 할 수는 없었기에 웃으며 대답했다.“네, 고마워요. 아저씨.”“지금 시간이 있는 거면 같이 식사라도 하자꾸나. 내가 소개해주지. 둘이서 잘 얘기해보고 서로 목적이 같다면 오늘 계약서를 쓰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구나. 얘기가 잘 안 되어도 괜찮단다. 이 아저씨한테 다 방법이 있으니까.”주현철은 손가락으로 책상을 툭툭 치며 말했다. 문씨 가문의 상황을 이미 전해 들어서 알고 있던 그였다. 솔직히 말해서 문지원은 현재 홀로 분투하고 있는 상태였다. 그런 그녀가 어떻게 다시 회사를 일으켜 세울 수 있겠는가. 다만 문지원의 미모는 확실히 예뻤다. 예쁜 얼굴을 가진 여자라면 기회는 얼마든지 있었다.“네, 시간 있어요. 아저씨 주소를 문자로 보내주세요. 제가 지금 바로 갈게요.”문지원은 자리에서 일어나 빠르게 문자로 받은 주소로 향했다. 룸의 문을 열자 안에는 남자 두 명이 앉아 있었다. 한 명은 그녀와 통화했던 주현철이었고 다른 한 명은 처음 보는 사람이었다.“지원아, 내가 너한테 소개하고 싶다던 사람이란다. 이름은 현유한이니까 현 대표라고 부르면 되겠구나.”“아니에요. 저와 문지원 씨는 나
“다들 돌아오지 않겠다고 하지? 이미 떠난 마음을 아무리 설득해봐야 돌아서겠어? 그리고 정말로 돌아온다고 해도 전처럼 열심히 일하려 하지 않을 거라고.”유은진이 옆에서 손기영을 달래주었다.“나도 이 사람들이 돌아오든 말든 신경 쓰지 않아. 하지만 문 사장이 직원만 모이면 바로 이 프로젝트를 시작할 수 있다고 했단 말이야. 일손이 부족한데 어떻게 일을 해? 물론 야근해도 괜찮아. 하지만 사람이 매일 야근하면서 살 수는 없잖아. 누가 버틸 수나 있냐고.”손기영은 점점 커지는 책임감에 어깨가 무거워졌다. 문지원은 이 일을 그에게 맡겼던지라 미리 보너스까지 챙겨주었다. 그랬기에 그는 반드시 맡겨진 임무를 잘 완성해야 했고 문지원의 믿음을 져버려서는 안 되었다.“내 기억에 우리 마을에 일거리 없는 사람들 꽤 되지 않았나? 일당만 받으며 불안정한 생활을 하고 있다고 기억해. 같은 마을 사람들이니 그 사람들이 어떤 사람인지 우리가 잘 알잖아. 그 사람들 중 믿음직스러운 사람들만 골라서 리스트를 만들고 문 사장한테 물어보는 건 어때? 괜찮다면 우리가 그 사람들에게 연락하면 되잖아.”유은진은 고민하는 손기영을 위해 방법을 생각해냈다. 손기영은 바로 유은진이 말한 대로 했다. 지금 상황에서 그가 할 수 있는 건 이것뿐이었으니까. 일단 먼저 공장부터 다시 가동하는 것이 먼저였다....다음 날 아침 일찍 문지원은 공장으로 왔다. 공장은 어제보다 더 깨끗했고 먼지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청소 업체를 부르지 않았다.의아했지만 문지원은 일단 발을 들어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손기영이 사람들을 이끌고 청소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들은 전에도 공장 안에 있는 설비들을 다루며 일해야 했던지라 설비에 진심이었다. 그랬기에 청소하는 것도 힘이 났다.“아저씨, 뭐 하세요?”“아, 문 사장. 이 사람들은 오늘부터 일하고 싶다고 한 우리의 직원들이야. 다들 할 일이 없는 거 같기에 일단 공장 청소 좀 하자고 했어. 그럼 나중에 일할 때도 편하잖아.”손기영은 들고 있던
문지원은 여진 그룹과 함께 진행하는 프로젝트를 손기영에게 자세하게 알려주었다. 손기영은 공장장으로 오랫동안 일했었기에 공장의 시스템에 아주 잘 알고 있었고 프로젝트를 듣자마자 그녀에게 자기 생각을 말해주었다.“문 사장, 예전에 일하던 직원 절반만 불러와도 정해진 기간에 완성할 수 있을 거야. 그런데 만약에 다른 사람들도 다시 돌아오고 싶다고 하면 어떻게 하려고? 받아줄 거야?”“당연하죠. 아저씨, 저희가 함께 일한 시간이 얼마인데요. 이번에 회사에 이렇게 큰 곤란이 들이닥치고 월급도 제대로 주지 못하는데도 남아서 함께 일하고 싶다는데 당연히 받아들여야죠. 공장엔 앞으로 이 프로젝트 말고도 다른 프로젝트도 있을 거예요. 그분들만 원하신다면 저는 전부 받아줄 거예요. 사람이 적은 것보다 많은 게 더 낫지 않겠어요?”문지원은 이미 미래까지 생각해두었다. 여진 그룹과의 프로젝트는 지석훈 덕에 뺏어올 수 있었던 것이었기에 급한 불부터 끄고 공장을 성공적으로 다시 가동한다면 다시 회사를 일으켜 세울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공장이 계속 정상적으로 운영되려면 일시적인 프로젝트보다는 장기적으로 프로젝트를 협상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했다. 평생 이 하나의 프로젝트만 바라면서 살 수는 없지 않은가.“알겠어. 문 사장 말만 들어도 힘이 솟아나는구먼. 앞으로 난 문 사장이 아니면 일하지 않을 거야.”손기영은 손을 올려 가슴을 치면서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문지원은 정말이지 문용석을 닮아도 너무 닮았다. 게다가 손기영은 문지원이 회사를 이끌어가면 어쩌면 전보다 훨씬 더 잘 되리라는 예감이 들었다.문씨 가문에서 나온 문지원은 단 한 순간도 쉰 적 없었다. 공장의 일은 손기영에게 맡길 수 있다고 해도 프로젝트를 끌어오는 일은 그녀가 해야 했다.그녀는 이번에 문용석의 사무실로 가 예전에 협력했던 협력 업체의 리스트를 찾아내곤 일일이 전화를 걸어 물었다. 문용석은 쓰러지기 전에 큰 프로젝트든 작은 프로젝트든 전부 직접 관리했고 질량도 꼼꼼히 살폈던지라 협력 업체 쪽에서 명성이
‘이렇게나 빨리 월급을 준다고?'돈을 받은 손기영은 현실감이 떨어져 얼떨떨한 얼굴로 보았다.“지원아, 이 돈은 어디서 난 거니?”“아저씨, 사실 제가 최근에 프로젝트를 하고 있는데 협력처 쪽에서 자금을 투자했어요. 그래서 받자마자 밀린 월급을 주러 온 거예요. 저도 아저씨랑 다른 직원분들의 형편이 안 좋다는 거 알고 있고 더는 미뤄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어요.”문지원은 차근차근 손기영에게 설명해주었다.“그리고 월급 말고도 물어볼 것이 있어요. 혹시 다른 곳으로 취직하셨어요? 그런 게 아니라면 다시 공장으로 돌아와 일할 생각 있으세요? 아저씨가 돌아오셔도 여전히 공장장으로 일하실 거예요. 공장에 새로운 주문이 들어왔는데 직원이 부족하거든요.”갑작스러운 소식에 손기영은 너무도 기쁘면서도 놀랐다.“공장이 이렇게나 빨리 다시 돌아간다고?”그는 확실히 문정 그룹이 다시 일어설 거라고 생각했지만 이렇게나 빨리 일어설 줄은 몰랐고 그것도 문지원의 손에서 다시 일어서게 될 줄은 몰랐다. 겉보기엔 한없이 연약한 문지원이 파산한 기업을 다시 회생하고 있을 줄은 전혀 몰랐다.“네. 전 전에 일하시던 분들이 계속 일했으면 해서요. 어쨌든 그동안 일한 시간이 있으니 경험도 쌓였잖아요. 만약에 정말 싫어서 다들 거부한다면 저도 이해하니까 괜찮아요. 신입을 뽑아서 다시 일 가르쳐주면 돼요.”“난 당연히 좋지. 회장님도 나한테 얼마나 잘해주셨는데. 너도 돈이 생기자마자 우리 밀린 월급부터 주려고 온 거잖아. 난 내일부터 바로 출근할 수 있단다.”손기영은 자신의 허벅지를 ‘탁' 치면서 말했다. 안 그래도 취직이 잘되지 않아 속이 타던 때였다. 그런데 문지원이 다시 일하러 오라고 하니 어찌 기쁘지 않을 수 있겠는가.그는 돈 봉투에서 40만 원 정도 세더니 꺼내 문지원에게 돌려주었다.“지원아, 아니지. 문 사장, 난 월급만 받을게. 우리 사이에 이자라니. 당연히 일한 만큼 받아야 하지 않겠어? 그러니 이 돈은 더 받을 수 없어.”문지원은 웃으며 그를 보았다. 예전부터 그
여자는 문지원을 본 후 딱히 반기는 기색이 아니었고 그저 옆으로 길을 내어주며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들어와요.”“지원아, 네가 여긴 어쩐 일이니?”손기영은 아주 열정적인 모습으로 문지원을 반기며 차도 따라주고 과일도 내주었다. 옆에 있던 그의 아내는 보면 볼수록 짜증이 치밀었다.“그 체리는 해수를 위해 남겨놓은 건데 그걸 왜 꺼내. 지금 체리가 얼마나 비싼지 알고는 있어?”“집에 손님이 왔는데 아무것도 대접하지 말라고? 곧 식사 시간이니까 당신은 얼른 가서 상이나 차려줘.”손기영은 자신의 아내에게 눈빛을 보냈다. 그도 문지원이 자신을 왜 찾아온 것인지 모른다. 어쩌면 그에게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서 찾아왔을 수도 있다. 어쨌든 손기영은 이렇게 반겨주는 것 외엔 그녀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이 없었다. 밀린 한 달 월급은 나중에 천천히 받아도 되었지만 영원히 안 받을 수는 없다.나중에 문씨 가문에 다시 돈이 생겼을 때 받을 생각이었다. 사람이 아무리 힘들고 상황이 어렵다고 해도 양심도 없이 근본을 잃어서는 안 되었으니까. 그는 문지원을 보며 말했다.“오늘은 아저씨네 집에서 저녁이라도 먹고 가. 아저씨 집은 너도 보다시피 그저 그래. 음식도 좋은 걸 내어줄 수 없지만 그래도 싫어하지는 말아줬으면 좋겠구나.”문지원은 얼른 고개를 저었다.“아저씨 그런 말씀은 하지 마세요.”그녀의 집안은 손기영의 상황보다 더 못했기에 그녀가 감히 남의 집을 평가할 자격이 없었다. 더구나 손기영은 그녀에게 월급에 대한 말은 단 한 번도 꺼내지 않았으니 오히려 그에게 고마워해야 했다.“그래. 얼른 앉아. 난 집사람이 어떤 음식을 만들 수 있나 주방으로 가서 확인하고 오마.”손기영은 자기 아내 손을 잡고 주방으로 들어갔다. 문이 닫히자마자 그의 아내라 비꼬아 말했다.“하이고, 공장장님. 아주 그냥 세기의 대인배네. 월급을 달라고 하지 못할망정 지금 나더러 상까지 차려서 바치라는 거야? 참나, 대단하네. 대단해!”여자는 그를 향해 엄지를 척 들며 비꼬았다. 손기영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