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서우는 원장이 정말로 너무도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원장이 진정하길 기다린 후 그녀는 보육원의 아이들을 만나보고 싶다고 말했다. 그러자 원장은 흔쾌히 대답했다.“그래요. 제가 우리 아이들을 보여드릴게요. 다만 아이들 중에 조금 혼자 동떨어져 있는 특별한 아이가 보일 거예요. 그래도 너무 개의치 말아요.”원장은 말을 하다가 진지해졌다. 은서우는 그런 그녀의 모습에 조금 놀랐고 원장의 입에서 나온 특별한 아이가 궁금해졌다.빠르게 그들은 어느 한 교실로 도착했다. 이곳에서 보육교사들은 하나의 방을 쓰고 있었고 다른 곳은 학교 교실처럼 만들었다. 보육원에 아이들이 너무도 많았기 때문에 아이들의 학비를 대줄 여력이 되지 않았다. 이렇게 지원을 받는 것도 너무도 오랜만이었다.하지만 학교 다녀야 할 아이들이 아무런 지식도 없는 채 자라게 될까 봐 보육교사들은 서로 번갈아 가며 아이들을 가르쳐주었다. 그리고 지금 교실에선 한창 수업 중이었다.은서우는 갑자기 들어가면 아이들이 놀라게 될까 봐 들어가지 않고 문밖에서 창문으로 조용히 안을 들여다보았다. 빠르게 그녀는 아이들과 어울리지 못하는 남자아이를 발견했다.다른 아이들은 아주 활발하게 선생님의 질문에 대답도 하고 함께 게임도 했지만 유독 구석에 앉아 있는 남자아이만 혼자 블록 하나를 손에 꼭 쥐고 멍 때리고 있었다.“원장님이 말씀하신 특별한 아이가 혹시 저 아이인가요?”마음이 흔들린 은서우는 바로 물었다. 원장은 고개를 끄덕였고 아이를 보는 두 눈빛엔 근심과 자애로움이 가득했다.“네, 저 아이가 맞아요. 아이의 이름은 천유민이고 아이의 엄마가 아이의 아빠와 이혼한 후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어요. 원래라면 아이의 아빠가 아이를 키워야 하는데 아이의 아빠도 갑작스러운 심근경색으로 세상을 떠나버렸어요. 더는 남은 가족이 없어 우리 보육원으로 오게 되었는데 예전에는 아주 활발하고 잘 웃는 아이였다고 하더라고요. 그런데 그날 후로 단 한 번도 웃지 않았대요. 저와 선생님들이 아무리 말을 걸어봐도 계속 저 모습이에요.”
은서우는 고개를 끄덕였고 보육교사가 나가자마자 아이가 앉아 있는 책상 옆으로 다가갔다. 몸을 굽힌 그녀는 블록만 멍하니 보고 있는 남자아이를 보았다.“그거 어떻게 맞추는 건지 알고 있는데. 가르쳐줄까?”남자아이는 멈칫했다. 은서우는 그런 아이의 모습을 못 본 척했다.“블록 맞추는 거 어렵지? 그리고 네가 들고 있는 그 블록은 하나뿐인 것 같네. 혹시 블록 더 없어?”남자아이는 고개를 들어 그녀를 보았다. 은서우는 아이가 자신의 말에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뜻밖에도 아이는 입을 열었다.“네. 더 있어요. 방에 있어요.”간단하게 대답했지만 아이가 입을 열었던 사실에 은서우는 충분함을 느꼈다. 아이가 입을 열기만 한다면 희망이 있다는 것이었으니까. 그러고 난 후 은서우는 아이를 따라 방으로 가서 블록을 가져왔고 그렇게 오후 내내 블록을 맞췄다.도중에 보육교사가 아이의 식판을 들고 들어왔지만 아이는 음식에 흥미를 보이지 않았다. 설령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나도 먹지 않았고 자신의 몸이 어떻게 되든 신경 쓰지 않았다.은서우는 당연히 지켜만 보고 있을 수 없었다. 그녀는 열심히 블록을 맞추고 있는 아이의 곁으로 다가갔다.“내가 방법을 알려주긴 했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야. 더 알고 싶어? 그런 거라면 일단 밥부터 먹을까?”“배고프지 않아요.”아이가 말을 하자마자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 은서우는 못 들은 척하며 고개를 끄덕였다.“하지만 내가 배고픈걸. 우리 먼저 밥 먹으면 안 될까?”남자아이는 한참 생각했다. 기껏해야 다섯 살쯤 되는 아이가 어른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으니 은서우는 조금 의외라고 생각하긴 했지만 놀라지는 않았다.자폐증이 있는 아이들은 대부분 머리가 좋았다. 심지어 어느 한 분야에서 천재인 경우도 있었지만 대가는 평생 바깥세상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이었다. 아이가 침묵하고 있는 것도 생각에 빠진 것이 틀림없었다. 그녀의 말을 들을지 말지 곰곰이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이것은 좋은 현상이었기에 은서우는 인내심 있게
원장은 아주 기뻐했다.“전부 서우 씨 덕분이에요.”은서우는 겸손한 얼굴로 물 한 모금 마신 후 말을 하려고 했지만 그 순간 밖에서 흘러들어오는 고소한 밥 냄새를 맡게 되었다. 지금 이 시간은 확실히 아이들이 점심을 먹을 시간이었다. 그전에도 그녀는 자주 밥 냄새를 맡았다.하지만 왜인지 모르겠으나 이상하게도 지금은 너무도 메슥거렸다. 속에 있는 것이 역류하는 느낌에 은서우는 빠르게 쓰레기통이 있는 곳으로 뛰어가 헛구역질해댔다. 그런 그녀의 모습에 원장은 긴장한 얼굴로 보았다.“서우 씨, 왜 그래요. 괜찮아요? 속이 안 좋은 거예요?”은서우는 대답하려고 했지만 순간 머릿속에 자신의 생리가 늦어졌다는 것을 떠올랐다. 이 생각에 저도 모르게 긴장해진 그녀는 본능적으로 손을 올려 배를 만졌다. 그녀의 생리 주기는 절대 늦어지는 법이 없었다. 특수한 상황이 아니라면 말이다. 그런데 지금은...”“서우 씨, 속이 안 좋은 거라면 얼른 병원에 가서 검사받아봐요.”원장의 걱정이 담긴 목소리가 그녀를 정신 차리게 했다. 은서우는 고개를 저으며 괜찮다고 말했다. 하지만 울렁거리는 속을 무시할 수 없었던 그녀는 더는 보육원에서 머물지 않았고 원장과도 먼저 돌아가 보겠다고 말했다.병원으로 돌아온 그녀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인명진을 찾아가지 않고 산부인과로 가서 검사를 받았다. 그 의사는 마침 은서우와 아는 사람이었다. 검사 결과가 나오자 의사는 바로 웃으며 말했다.“축하해요. 은 선생님. 임신 3주 차네요.”엄청난 소식에 은서우는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조심스럽게 손을 배에 올리며 눈을 깜빡였다.“정말, 정말로 임신한 거예요?”검사 결과는 확실히 그녀가 임신했다고 알려주고 있었다. 하지만 결과를 본 은서우는 여전히 믿어지지 않았다. 인명진과 밤을 보낸 후 단 한 번도 피임을 한 적 없었다. 여하간에 두 사람은 나이가 꽤 있었고 게다가 은서우는 집안의 영향으로 항상 아이를 바랐다. 아이와 남편과 함께 오손도손 사는 것이 꿈이었지만 이렇게나 빨리 아이가 찾아올 줄은
은서우는 놀라 소리를 지르며 얼른 내려달라고 했다. 인명진은 그제야 진정할 수 있었다.“미안해. 내가 깜빡 잊고 있었어.”인명진은 조금 전 자신이 한 행동을 후회했다. 하지만 은서우는 아무렇지 않았다. 비록 임신 초기엔 조심해야 하는 건 맞지만 끌어안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기쁨을 만끽하고 있던 와중에 은서우는 보육원이 떠올라 잠깐 망설였다.“이 상태면 그럼 보육원은...”인명진은 시선을 들어 그녀를 보았다.“가고 싶어?”“당연하죠!”은서우는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보육원은 아직 공사도 시작하지 못했을뿐더러 자폐증을 앓고 있는 아이가 나아지는 모습도 계속 지켜보고 싶었다. 그렇게 노력해서 아이의 마음의 문을 열었는데 어떻게 도중에 그만둘 수 있겠는가.하지만 은서우는 인명진이 허락해주지 않을까 봐 걱정되었다. 그가 침묵하고 있던 때 그녀는 이미 그를 설득할 말을 머릿속에 생각해두었다. 입을 열려던 순간 인명진이 먼저 말했다.“그럼 가. 조심하기만 하면 괜찮을 거야.”은서우는 놀란 얼굴로 그를 보자 그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내가 하고 싶은 일을 내가 막아서 뭐해. 결혼은 자유를 속박하는 게 아니야. 난 네가 여전히 너로 살았으면 좋겠어. 하고 싶은 대로 자유롭게 말이야.”그의 말에 은서우는 감동하고 말았다. 그와의 결혼은 너무도 잘한 선택인 것 같았다. 다만 그녀는 기껏해야 한 달 정도 된 배 속의 아기를 위해서라도 무리하면 안 되었다. 그랬기에 그녀는 이틀에 한 번씩 찾아가던 보육원을 사나흘에 한 번씩 방문했다.평소에 감정 표현을 잘하지 않던 천유민은 사흘에 한 번씩 찾아오는 그녀에 먼저 그녀의 손을 잡으며 보육원 안으로 데리고 들어갔다.은서우는 놀라긴 했지만 기쁘기도 했기에 아이가 이끄는 대로 들어갔다. 빠르게 아이는 그녀를 책상 앞으로 데리고 왔다.이 책상은 천유민이 평소 수업을 들을 때 사용하는 책상이었다. 그리고 지금은 완성된 블록이 정갈하게 놓여 있었다. 이 블록은 그날 은서우가 빌려 갔었기에 절반만 맞출 수밖에 없었다
웃고 있던 은서우는 그만 굳어진 얼굴을 하고 말았다.“소태훈?”그녀는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휠체어에 앉은 사람을 보았다. 지금 그녀의 앞에 있는 사람은 정말로 소태훈이었다. 은서우는 그를 만나는 것이 얼마 만인지 알지 못했다. 만약 오늘 소태훈이 그녀의 앞에 나타난 것이 아니었다면 아마 죽을 때까지 평생 다시 만나지 못하리라 생각했다.여하간에 그때의 기억은 그녀에게 너무나도 고통스럽고 괴로웠으니 말이다.소태훈은 휠체어 바퀴를 돌려 그녀의 앞으로 갔다. 무언가 그녀에게 할 말이 있는 것 같은 모습이었지만 그가 말을 하기도 전에 검은색 승용차가 은서우 앞에 멈춰서며 창문이 스르륵 내려갔다. 안에 있는 사람은 인명진이었다.인명진도 소태훈을 발견한 듯했지만 소태훈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고 오로지 은서우에게만 시선을 고정했다.“타. 집으로 가자.”인명진이 입을 열자 유난히도 다정한 목소리가 들렸다. 조금 전 그와 전화 통화할 때 이미 그가 곧 도착할 거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랬기에 그가 그녀의 앞에 있어도 전혀 놀라지 않았다. 그저 시선을 돌려 뒤에 있는 소태훈을 힐끗 보았다.“지금 상태가 꽤 많이 나아진 것 같네. 약은 이미 끊은 것 같고 다른 건 할 말이 없으니까 이만 갈게.”말을 마친 은서우는 차에 올라타려고 했다. 한번 떠난 사람은 뒤돌아보는 법이 없었고 기억이란 쉽게 잊히는 것은 아니었던지라 은서우는 더는 소태훈과 엮이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뜻밖에도 소태훈은 뻔뻔하게 그녀를 다시 불러세웠다.“네가 날 얼마나 원망하고 있는지 나도 알아! 하지만 그래도 우린 20년 넘게 함께 살았던 가족이었잖아. 곧 태연이 기일이야. 설마 영원히 돌아오지 않을 생각은 아니지?”은서우는 그대로 멈칫했다. 그런 그녀의 모습에 소태훈은 아직 기회가 있다는 것을 눈치채고 깊은숨을 내쉰 후 계속 말을 이었다.“한 번이라도 와줘. 함께 식사라도 하자. 예전의 일은 나와 부모님이 너한테 못되게 굴었다는 거 알아. 하지만 그동안 우린 줄곧 널 그리워하고 있었어.”
차는 소씨 가문 본가 앞에서 멈추었다. 은서우는 저도 모르게 느껴지는 긴장감에 크게 심호흡했다. 이 긴장감은 연희진이 문을 열었을 때 최대치에 달했다.“너였니?”연희진은 그녀를 보자마자 잔뜩 불쾌한 표정을 지었고 그 뒤로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집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집 안에서는 누군가의 소리가 들렸다. 아마도 소상태가 연희진에게 누가 왔나 물어보는 것 같았다. 그러더니 이내 목소리가 멈추었다. 은서우가 거실로 들어왔기 때문이다.소상태는 소파에 다리를 꼬고 앉아 잔뜩 불쾌한 눈빛으로 은서우를 보았다.“흥, 오랫동안 집을 떠나서 난 네가 그동안 죽은 줄로만 알았다! 차라리 죽지 그랬냐! 뭐하러 사람 기분만 망치게 돌아왔어!”연희진도 맞장구를 쳤다.“그래. 맞아. 너 때문에 우리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아니? 집안 꼴도 좀 봐봐. 너 때문에 어떻게 되었는지.”“아는 사람들은 우리가 너를 키운 부모라고 생각하겠지만 모르는 사람들이 보면 네가 우리 집안 원수인 줄 알겠어!”소씨 가문의 상황은 확실히 연희진이 말한 것처럼 좋지 못했다. 예전에도 그렇게나 부유했던 것은 아니었지만 원목 소파를 살 정도는 되었고 거실엔 커다란 어항도 있었다.소상태는 차를 즐겼기에 집 안엔 여러 가지 찻잎이 가득했었다. 물론 찻잎을 산 돈은 전부 은서우에게서 빌린 것이었다. 하지만 소태훈이 감방에 들어갔다가 나온 뒤 집 안에는 거의 아무것도 없었다. 거실에도 텅 비어 썰렁했다. 은서우는 차라리 잘 됐다고 생각했다.“지금 모습이 원래 모습이라고 생각하는데. 아닌가요?”그녀는 입꼬리를 올리며 비웃었다. 그러자 연희진은 그녀를 노려보았다.“너! 이 재수 없는 X!”은서우는 듣는 척도 하지 않았다. 예전의 그녀였다면 연희진이 한 말에 상처를 받았을 테지만 지금은 달랐다. 더는 예전의 은서우가 아니었기에 이런 욕설쯤은 그녀에게 아무것도 아니었다. 굳이 이런 말에 상처를 받아서 뭐하겠는가.서로 속고 속이는 바깥세상보다 더 아무것도 아닌 일이다. 그녀가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자
매번 소태연을 언급할 때마다 그들은 약속이나 한 듯이 침묵했고 지금도 소태연의 이름도 언급하지 않았다. 식사하는 내내 은서우는 다른 곳에 정신이 팔린 상태였다. 침묵 속의 식사가 끝난 후 그녀는 소태연의 사진 앞으로 다가가 철통에서 지방 종이를 태웠다. 그 순간 누군가 그녀의 옆에 다가왔다.“도와줄게.”은서우는 굳이 고개를 돌리지 않아도 목소리의 주인이 소태훈이라는 것을 알았다.“그때 일은...”은서우가 입을 열자마자 소태훈은 그녀가 무슨 말을 꺼낼지 눈치챈 것인지 빠르게 말을 잘랐다.“지나간 일이니까 그냥 잊자. 너나 나나 앞으로 더는 그 일들에 관해 언급하지 말자.”말하면서 그는 이내 철통에서 불타는 지방 종이를 보았다.“사실 약물중독센터에서 지내는 그동안 수없이 생각해봤어. 우리는 어쩌면 이런 사이가 되지 않을 수는 있지 않았을까 하고 말이야.”그들의 사이가 이렇게 된 것엔 대체 누구의 탓이란 말인가. 아마도 고태훈이거나 그의 부모님, 또는 소씨 가문 사람 모두에게 책임이 있을 것이다.은서우는 시선을 내리깔고 다 타버린 지방 종이를 확인한 후 기운이 없는 모습으로 소씨 가문에서 나왔다. 그녀가 떠나기 전 소태훈은 문 앞에서 그녀를 한참 동안 보았다. 그녀가 아래층으로 내려가던 때 그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은서우, 앞으로는 오지 마. 예전의 일은 전부 잊고 살아.”은서우는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돌려 그를 보았지만 소태훈은 이미 문을 닫아버렸다. 꼭 오늘을 끝으로 그녀와의 연도 끊으려는 것처럼 말이다. 그 탓에 은서우는 그의 안색이 어떠한지 보지 못했다.“왔어? 어땠어?”인명진은 문을 열더니 안에서 겉옷을 꺼내 은서우에게 걸쳐주었다. 차가운 무언가가 머리 위로 떨어지자 은서우는 고개를 들었다. 하늘에선 눈송이가 휘날리고 있었고 그녀가 입을 열자 하얀 입김이 나왔다.“눈이 내리네요.”“응, 눈이 내리네. 오늘 밤은 아마 제일 춥겠어. 얼른 차에 타. 집으로 돌아가자.”인명진은 눈을 맞아도 괜찮았다. 그만큼 몸 상태가 아주 좋았으
은서우는 긴장한 얼굴로 계단 입구를 보았다. 드디어 소방관의 모습이 보이고 소방관은 누군가를 업고 나왔다. 하지만 상태는 그다지 좋지 못했다.“얼른 병원으로 데리고 가요. 이 가족 중 아들을 제외한 중년 부부도 연기에 정신을 잃었어요. 상황이 좋지 않으니까 얼른 병원으로 이송해요!”소방관이 큰 소리로 말했다. 다행히 누군가 구급차를 불러두었기에 현장엔 이미 구급차가 대기하고 있었다. 소방관의 말을 들은 차에 있던 간호사들이 얼른 들것을 들고 내려와 사람을 실었다.그들이 사람을 데리고 떠나기 전 은서우와 인명진도 의사의 신분을 밝히며 차에 올라탔다. 빠르게 구급차는 병원에 도착했다.은서우는 겉옷을 벗어 의사 가운을 갈아입을 때 손이 자꾸만 덜덜 떨렸다. 분명 수술은 지겨워지도록 했지만 가족을 직접 수술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이 생각에 그녀는 온몸이 차갑게 굳어지는 것 같았다.“은 선생님, 지금 수술복으로 갈아입으시려고요? 방금 듣기로 원장님이 이미 수술 들어갔다고 했어요.”누군가 말하자 은서우는 멍한 표정을 짓더니 입을 열었다.“저도 들어갈 거예요.”그녀는 직접 수술실로 들어가 볼 생각이었다. 수술복으로 갈아입은 뒤 은서우는 수술실로 들어갔다. 그녀를 본 인명진은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리며 그녀가 들어오는 것을 반대하려고 했지만 너무나도 확고한 그녀의 눈빛에 말할 수 없었다. 결국 그녀를 들여보내는 수밖에 없었다.“어시는 네가 해.”은서우는 고개를 끄덕인 후 소독을 마치고 들어갔다.소태훈은 아마도 소상태와 연희진의 보호를 받은 것인지 몸에 별다른 상처는 없었다. 그저 연기를 너무 많이 마셔 정신을 잃은 것뿐이었고 병원으로 실려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안정되었다.하지만 소상태와 연희진은 달랐다. 나이도 나이었던지라 화재 현장 속에 너무도 오래 머물렀던 탓에 연기를 많이 마신 것은 물론이고 몸에 화상도 입었다. 연희진은 얼굴 절반이 화상으로 뒤덮였고 목까지 이어졌다.다행히 정신을 차린 은서우는 메스를 안정적으로 들 수 있게 되었고 더는 떨지
“좋은 생각이야.”나도현도 그의 말에 동의했다. 문제는 양시은도 바쁘고 권다솔도 바빴고 온지유는 지석훈만 여자 친구를 데리고 왔다는 말에 아무래도 안 가는 게 낫겠다고 했다. 문지원은 남자들 사이에서 조금 난처했다.그러나 이 사람들이 문정 그룹을 다시 되살릴 수 있었기 때문에 그녀는 불편해도 꾹 참고 있었다.얼마 후, 화장실에서 그녀는 강윤슬과 마주쳤다.금방 맹장염 수술을 받은 사람이 병원에서 푹 쉬고 있어야 할 사람이 여기에 나타나다니...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고 강윤슬은 문지원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자신보다 더 예쁜 것도 아니었다. 게다가 문지원에 대해 조사를 해보니 문씨 가문은 이미 파산하였고 문지원은 바로 그때 지석훈을 만나게 된 것이었다.이 안에는 분명 사정이 있을 것이다.“석훈이가 당신과 거래라도 한 건가요?”강윤슬이 그렇게 물을 줄은 몰랐다.지석훈과 강윤슬 사이에 어떤 관계가 있든 간에 그녀와 강윤슬은 아무 사이도 아니었다. 그러니 여기서 강윤슬의 말을 들을 필요가 없었다. “석훈 씨가 나와 거래를 하든 안 하든 그건 당신과 전혀 상관없는 일이에요.”“건방지군요. 그쪽이 석훈이를 찾아오지 않았다면 지금 이 자리에도 없었겠죠.”강윤슬은 그제야 알아차렸다. 어쩐지 문지원이 자신을 보고도 아무런 반응이 없더라니...정상적인 연인 관계나 약혼녀라면 절대 그러지 않을 것이다. 결국은 그가 문지원과 거래를 하고 그녀를 자극하려고 했던 게 아닐까?잠깐 화장실을 다녀오려고 했던 것뿐인데 이곳에서 강윤슬을 만날 줄은 몰랐고 강윤슬이 이런 말을 할 줄은 더더욱 몰랐다. 싸늘한 표정을 지으며 말을 내뱉는 모습에 문지원도 더 이상 참고 싶지가 않았다. “내가 어디에 있든 죽든 살든 그건 당신이랑 전혀 상관없는 일이에요. 내가 석훈 씨 옆에 있는 게 불만이면 어디 한번 내 곁에서 그 사람을 빼앗아 가봐요. 석훈 씨가 당신한테 다시 돌아간다면 그것 또한 당신의 능력이겠죠.”말을 마친 문지원은 발걸음을 옮겼다.강윤슬이 무슨 짓을 할
다른 사람의 견제를 받지 않으려면 자신감과 실력이 있어야 한다. “고마워요.”그녀는 고개를 숙이며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말만 하지 말고 행동으로 보여줘.”그녀는 더 이상 아무 말이 없었다. 지석훈은 말하면 말한 대로 약속을 지키는 사람이었다. 그의 부름에 여이현과 친구들은 바로 달려왔다. 평소에는 지석훈도 아주 바쁜 사람이라 모처럼 한자리에 모이게 된 것이었다.문지원은 지석훈의 옆에서 그들과 일일이 인사를 건넸다. 이때, 최주하가 먼저 장난스럽게 입을 열었다.“뭐야? 두 사람 벌써 사귀는 사이야? 어쩐지 나한테 양보해달라고 그렇게 말해도 꿈쩍도 안 하더니 진작부터 마음에 두고 있었던 거야?”“이름이 뭐야? 애들한테 소개 좀 해줘.”처음에는 지석훈과 최주하가 만나는 관계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지석훈에 대해 알아가면서 그녀는 그게 다 소문일 뿐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지석훈에게는 오랫동안 좋아한 여자가 있었으니까. “문지원이라고 해요.”나도현이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이제야 우리한테 이렇게 얼굴을 보여주네. 걱정하지 마. 두 사람 결혼하면 내가 축의금은 두둑이 넣을게. 딸 낳으면 나랑 사돈 맺자.”지석훈이 그를 흘겨보며 입을 열었다. “뭔 헛소리야.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내 딸한테 뭔 같지도 않은 소리야? 최주하한테 얼른 딸이나 낳으라고 하던가. 그렇게 며느리를 얻고 싶으면... 아니지. 이현이한테 딸이 있잖아. 이현이 딸로 해 그냥.”나도현은 무의식적으로 여이현을 쳐다보았다. 하민이와 별이는 아주 친한 친구 사이였고 하민이는 하윤이를 아주 좋아했다.그러나 딸이라면 끔찍이도 아끼는 여이현은 전혀 그럴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는 앞으로 자신의 딸과 결혼할 사람은 반드시 그의 시험을 거쳐야 한다고 했다.딸이 정략 혼을 하는 걸 원치 않는다고 했다.여이현도 여이현이지만 하윤이에게는 대단한 외할아버지와 친할아버지가 있으니 훌륭한 남자가 아닌 이상 꿈도 꾸지 못할 것이다. 여이현이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용건부터 얘기해.”
지석훈은 자신의 능력으로 유명한 의사가 된 것이었고 그를 찾아오는 환자는 셀 수 없이 많았다.의사가 되지 않았어도 그는 부잣집 도련님으로 잘 먹고 잘살았을 것이다.그의 신분과 지위라면 그가 원하는 것은 말만 하면 다 이룰 수 있었다. “그래요. 난 당신한테 도움이 안 되죠...”“하지만 뭐 단정 짓기는 어렵지. 나중에 도움이 필요할지도 모르니까.”그가 그녀의 말을 끊고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한편, 지혁진은 두 사람 사이에 대해 완전히 믿는 눈치가 아니었다.그가 문지원을 찾아와 물었다.“석훈이가 정말 널 받아들였단 말이냐?”전에는 이것도 싫다 저것도 싫다던 녀석이 왜 문지원이 나타나자 이리 쉽게 받아들인 것일까?따지고 보면 두 사람이 만난 지는 고작 이틀밖에 되지 않았는데. “아저씨, 석훈 씨가 절 받아들인 건 제가 하도 귀찮게 해서 그런 거예요. 그리고 제 모습이 안타까워 보여서 그랬을 거예요.”문지원은 사실대로 얘기했다.두 사람 사이가 사랑으로 시작된 사이가 아니라는 건 누구나 다 잘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솔직하구나. 내가 왜 널 선택했는지 아느냐?”지혁진이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알아요.”지혁진이 그녀를 찾아갔을 때, 문씨 가문은 이미 엄청난 빚더미에 올라가 있었다. 그녀는 가문의 빚을 갚기 위해 그 돈이 필요했고 그 돈을 위해서라면 어떻게 해서든 그가 시킨 일을 완수할 것이다. “내가 시킨 일은 끝까지 완수하거라. 임신을 하면 10일이면 검사를 할 수 있다고 하니 오늘부터 보름 동안 시간을 더 주겠다.”지혁진이 기한을 줄 줄은 몰랐다.물론 요구를 하면서도 그는 아주 인간적이었다.“보름 안에 네가 석훈이의 아이를 임신하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섭섭지 않게 보상을 해줄 것이야.”그 말인즉 임신을 하든 안 하든 그녀는 손해를 볼 것이 없다는 소리였다. 지혁진도 그리고 지석훈도 모두 최선을 다해 그녀를 도와주고 있었다.너무 고마웠다. “아저씨, 정말 감사합니다.
그가 아버지의 입장이었더라면 그도 아버지처럼 했을 것이다. 그래서 일단 그냥 두기로 했다.“알았어. 아버지한테는 당신이 잘 알아서 해. 미리 말하지만 아버지한테서 가져간 돈은 나중에 꼭 갚아야 할 거야.”그러나 문지원과 아이를 낳을 생각은 없다.그녀도 그의 제안에 대해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하였다.“알았어요. 빚을 청산해 준다면 당신이 원하는 건 뭐든 다 할게요.”“일단 옷부터 입어.”이런 경우는 또 처음이다. 의사 생활을 하면서 그동안 많은 수술을 집도했고 그에게는 남녀 구분 없이 그냥 환자일 뿐이었다.그러나 문지원은 그한테 환자가 아니었다. 최악의 상황을 생각하고 있던 그녀는 지석훈의 말에 이내 옷을 챙겨입었다.그러나 그녀는 여전히 그의 앞에서 무릎을 꿇고 있었다. 인기척이 없자 그는 함부로 고개를 돌리지 못하였고 그 순간 뜻밖에도 그녀가 먼저 입을 열었다.“옷 다 입었어요.”그제야 그가 고개를 돌리고 그녀를 쳐다보았다.다른 뜻은 없었고 그저 사람을 보고 얘기하는 게 예의일 것 같아서 고개를 돌린 것이다. 그러나 그녀가 아직도 무릎을 꿇고 있을 줄은 몰랐다. “왜 아직도 무릎을 꿇고 있어? 당장 일어나.”그의 안색이 어두워졌다.그녀는 여전히 무릎을 꿇은 채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내 행동이 지나치다는 거 알아요. 하지만 정말 방법이 없어서 그래요. 벼랑 끝에 선 나한테 손 내밀어줘서 고마워요. 진심이에요.”“지금 이런 말 소용없어. 얼른 일어나. 아버지 쪽은 당신이 잘 협조해 줬으면 좋겠어. 그리고 하루빨리 제대로 된 직장도 찾아...”그녀가 또다시 그의 말을 끊으며 단호하게 입을 열었다.“문정 그룹의 채무만 갚는다면 회사는 예전처럼 정상적으로 운영될 거예요. 그럼 최대한 빨리 돈을 갚을게요.”그가 눈을 가늘게 뜨고 문지원을 쳐다보았다.“회사를 경영할 줄 알고 사업을 할 줄 안다고?”문정 그룹의 아가씨에 대해 만난 적이 없었기 때문에 그는 문지원이 어떤 사람인지 잘 모르고 있었다.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조금
좋은 마음에서 갈 곳이 없는 그녀한테 숙소의 열쇠를 내어준 것이었다. 그렇게 말하면 문지원이 단념하고 물러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뜻밖에도 그녀는 그를 동아줄로 여기고 있었다.생각하면 할수록 화가 치밀어 올랐다.“이제야 알겠어. 왜 다들 문씨 집안을 나 몰라라 하는지. 당신네 문씨 집안 사람들은 하나같이 못된 사람들뿐이군.”그가 화를 낼 줄은 알았지만 이렇게까지 화를 낼 줄은 몰랐다. 그녀에 대해 뭐라 하는 건 상관없지만 가족까지 건드리는 건 참을 수가 없었다. 그녀도 기분이 상했다.“알아요. 내가 이러는 거 잘못된 일이라는 거. 하지만 방법이 없다고 했잖아요. 그래도 우리 가족한테까지 뭐라 하지는 말아요.”“그렇게 좋은 사람들이 왜 당신한테만 거액의 빚을 남겼을까? 왜 당신 오빠는 행방불명이 된 거야?”이렇게 상처 주는 말을 하고 싶지 않았지만 지나친 그녀의 행동에 화가 났다. 좋은 마음에서 도와주려고 한 건데 결과는?단념하기는커녕 그녀는 일부러 모든 사람이 두 사람의 사이를 오해하게 만들었다. 지금까지 이렇게 화가 난 적이 없었고 여자한테 이렇게 모진 말을 해본 적도 없다. 문지원이 그의 호의를 짓밟은 것이다.그의 말에 그녀 또한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러나 아버지를 믿고 싶었다. 아버지는 문씨 집안을 위해 위험을 무릅쓴 것이고 뜻밖에 손해를 보고 거액의 빚을 지게 된 것이다. 그리고 오빠는 평소에 그녀한테 잘해주었고 책임감이 있는 사람이었다. 지금 행방불명이 된 건 분명 뭔가 다른 이유가 있을 것이다.“아니요. 그럴만한 이유가 있을 거예요. 아까 숙소에서 사진도 찍어 아저씨한테 보냈어요. 아저씨는 날 믿고 있더라고요. 10억을 나한테 주셨고 당신의 아이를 가지게 된다면 우리 집 빚을 다 갚아주실 거라고 했어요.”지혁진의 제안이 너무 유혹적이라 거부할 수가 없었다. 뻔뻔스러운 여자라고 생각해도 좋았다. 막다른 골목에 몰린 상황에서 그녀한테는 이게 최선의 선택이니까.그녀는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런 모습을 보며 지석훈
그가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자신이 강윤슬한테 이런 말투로 얘기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그도 마음이 편치 않았다.“네 진심을 짓밟은 적 없어. 네가 한 프러포즈, 난 한 번도 받아들인 적 없고. 만약 나였다면 처음 거절당했을 때 너랑 거리를 두었을 거야. 나한테 넌 친구야. 그런데 네가 어떻게 나한테 이래? 어떻게 나한테 이런 말을 하냐고? 프러포즈를 거절한 게 그렇게 잘못이냐? 어떻게 다른 여자를 데리고 와서 내 앞에서 연기를 해?”그녀의 목소리는 힘이 없었고 그를 바라보는 눈빛에 슬픔이 담겨 있었다.지석훈은 차갑게 콧방귀를 뀌었다. “잘못은 아니지. 선배한테 그럴 의무도 없고. 하지만 선배의 부름에 나도 꼭 달려가야 한다는 의무도 없어. 그리고 허튼 생각 하지 마. 딴 여자랑 연기 같은 거 한 적 없으니까. 나랑 함께 선배 집으로 갔던 그 여자는 내 약혼녀야.”“이젠 무사하니까 핸드폰 옆에 두고 갈게. 무슨 일 있으면 가족들한테 전화를 하든가 아니면 간호사나 의사 불러.”말을 마치고 그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병실을 떠났다. 그녀는 그가 단지 화가 났을 뿐, 조금 있으면 다시 돌아올 거라고 생각했다. 그가 자신을 이렇게 내버려둘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하지만 시간은 일분일초가 흘렀고 그는 결국 돌아오지 않았다.그가 이번에 이렇게 화를 낼 줄은 몰랐다. 한편, 문지원은 밤에 기숙사에 가지 않고 일부러 출근 시간에 맞춰 낮에 찾아갔다.사람들이 그녀가 열쇠를 가지고 숙소 문을 여는 모습을 보게 된다면 한눈에 눈치챌 수 있으니까. 이내 동료들이 지석훈한테 문자를 보내왔다.[지 선생님, 언제 여자 친구가 생긴 거예요?][숙소에 오신 그 여자분 되게 괜찮아 보이던데요. 결혼은 언제쯤 하실 예정이에요?][지 선생님, 두 분 완전 잘 어울리는 것 같아요.]...이와 비슷한 문자가 수도 없이 쏟아졌다. 문지원에 저녁에 숙소로 갈 줄 알았지 이 시간에 갈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문지원은 여전히 포기하지 않고 그의 마음을
그는 강윤슬이 수술실에서 나오기를 기다렸고 수술을 마치고 나온 그녀의 곁에서 한 발짝도 떠나지 않고 그녀를 지키고 있었다.몇 시간 뒤, 강윤슬의 정신이 돌아왔다.그녀는 자신이 죽은 줄 알았던 모양이다.“여기가 어디지?”코를 찌르는 소독액 냄새에 머리가 어지러웠고 주위의 낯선 환경도 그녀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지석훈이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병원이야. 맹장염 때문에 수술을 받았고.”그의 목소리를 듣고 나서야 강윤슬은 자신이 아직 살아있음에 안심이 되었다.그나저나 지석훈이 옆을 지키고 있다는 건 주변에 다른 사람이 있다는 건가?다른 여자를 그녀의 집까지 데리고 왔으니...그녀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 모습에 그가 차갑게 입을 열었다.“그만 봐. 병실에는 나 혼자 있으니까. 그리고 여긴 VIP 병실이야.”강윤슬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병원에 오는 것도 좋아하지 않았고 그녀가 병원에 왔다는 것을 다른 사람에게 알리고 싶지도 않았다.“임혁수한테 전화해. 와서 돌봐달라고.”그가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차가운 그의 모습에 강윤슬은 미간을 찌푸렸다.“나 금방 수술받고 깨어난 사람이야. 정말 나한테 왜 그래? 말했잖아. 혁수 씨는 딸한테 갔다고.”“그럼 부모님한테 전화해. 아니면 가사 도우미한테 전화하든가.”그의 말투는 여전히 차가웠고 다정했던 눈빛도 사라진 지 오래였다. 그런 그의 모습이 낯설게만 느껴졌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그가 지금 이러는 건 그녀의 관심을 끌기 위한 것이 아니겠나?그녀는 아픈 몸을 이끌고 일어나 앉았다. “지석훈, 꼭 이래야 해? 나랑 혁수 씨 사이에 대해서는 너도 잘 알고 있잖아. 그리고 그들에게 알릴 상황이었다면 너한테 전화를 하지도 않았어. 혁수 씨의 말이 맞아. 내가 프러포즈를 거절해서 네가 지금 나한테 이러는 거잖아...”임혁수의 얘기를 하는 그녀의 말투가 한결 부드러워졌다.그녀한테 지석훈은 늘 비열하고 파렴치한 인간이었고 해명을 하더라도 아무 소용이 없었다.그가 조롱이 가득한 웃
“아버지가 이러시는 것도 잠깐뿐일 거야. 결과가 없으면 자연스럽게 포기하시겠지. 난 날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사랑했었어. 그게 얼마나 힘든 건지는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고. 우리 두 사람은 서로 아무 감정도 없는 사람들이잖아.”그는 사랑이 없는 결혼을 원치 않는다. 그 결혼의 최악은 아이가 생기는 것이겠지. 문지원이 먼저 양육권 포기 각서를 쓰겠다고는 했지만 엄마가 없는 아이가 과연 행복하게 자랄 수 있을까? 나중에 아이가 엄마를 원하게 된다면 그땐 어떡해야 할지?다른 여자한테 엄마라고 부르게 할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아이 때문에 문지원과 계속 함께한다면 그건 두 사람한테 너무 잔인한 일이었다. 그래서 처음부터 확실히 선을 긋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그녀는 그가 이렇게 단도직입적으로 말할 줄 몰랐다.그 말에 더 이상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그녀가 모든 것을 포기하기로 할 때, 그는 솔직하게 자신의 마음을 털어놓았다. 아무리 아버지가 재촉하더라도 자신은 그 뜻에 맞출 생각이 없다고...그럼 그녀는... 문지원은 한동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그럼 돈이라도 좀 빌려줄래요? 나중에 꼭 갚을게요.”“정말 방법이 없어서 그래요. 주변에 날 도와주려는 사람이 없어요. 아저씨가 나한테 많은 요구를 했지만 아저씨는 날 도와주셨어요.”지혁진도 지석훈과 마찬가지로 작은 돈이라면 도울 수 있었다. 그러나 액수가 이렇게 크니 그도 어쩔 수가 없었다. 재산을 다 내놓을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그러나 만약 그녀가 지석훈의 마음을 얻어 그의 아내가 된다면 그럼 그녀도 지씨 가문의 사람이 되는 것이었고 한 가족이라면 당연히 무조건 도울 것이다. 그래서 지혁진이 그 제안을 했을 때, 그녀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제안을 받아들였다. 시작이 반이라고 지석훈의 마음을 얻으려면 쉽지 않을 것이라고 예상은 했었다. 그러나 그가 자신을 병원에 데려다주고 숙소의 열쇠와 돈까지 줄 줄은 몰랐다. 방금 만난 낯선 사람에게 그가 이렇게까지 하는 걸 보면 그는 좋은
지석훈의 말에 문지원은 점점 더 어리둥절해졌다.그녀를 데리고 강윤슬을 찾아간 사람도 그였다. 이젠 강윤슬을 병원으로 데려왔고 그녀는 아무 짓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가 그녀한테 무슨 볼일이 있겠는가?계속 연기를 하고 싶었다면 아까 그녀를 불러야 했던 게 아닌가? 이제 와서 왜 찾는 것일까?그러나 지석훈이 말을 하기 전에, 문지원은 함부로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그녀는 지석훈의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한동안 말이 없던 그가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돈도 없고 게다가 일반 병실에서 제대로 쉬지도 못하잖아. 그래 가지고 아버지를 돌볼 힘이나 있겠어? 이건 병원 숙소의 열쇠야. 평소에 난 거기 살지 않으니까 가서 씻고 쉬어.”말을 하면서 그가 열쇠 하나를 꺼내 그녀에게 건네주었다. 문지원은 믿을 수 없는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았다.그는 분명 그녀와의 접촉을 꺼렸고 그녀의 제안조차 단칼에 거절해 버렸다. 그러나 열쇠를 그녀한테 주다니... 그녀는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내가 거기 가면 다른 사람들이 오해할 수도 있을 텐데요. 괜찮겠어요?”사실 묻고 싶었던 말은 그녀가 사람들에게 함부로 떠들고 다니는 게 두렵지도 않으냐는 것이었다. 진작부터 그녀의 마음을 꿰뚫고 있던 그가 옅은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그게 무서웠더라면 당신한테 열쇠를 주지도 않았겠지. 어찌 됐든 집안끼리 잘 아는 사이이고 게다가 오늘 당신은 나랑 같이 사람을 구했어.”문지원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는 지석훈의 말뜻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가 그녀한테 열쇠를 내어준 건 그와 함께 사람을 구하러 가서였기 때문이다.솔직히 말하면 강윤슬 때문인 것이다. 이 남자의 마음속에는 영원히 강윤슬이 최우선이었다. 만약 그가 강윤슬과 연인 관계였다면 지혁진의 요구 사항을 그녀는 하나도 해낼 수가 없는 것이었다.그렇다면 지석훈의 마음을 확인하고 물러나는 것이 도리일 것 같았다. 차마 입에 담기조차 어려운 말이었지만 그녀는 결국 현실 앞에서 용기를 냈다.“석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