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서우는 긴장한 얼굴로 계단 입구를 보았다. 드디어 소방관의 모습이 보이고 소방관은 누군가를 업고 나왔다. 하지만 상태는 그다지 좋지 못했다.“얼른 병원으로 데리고 가요. 이 가족 중 아들을 제외한 중년 부부도 연기에 정신을 잃었어요. 상황이 좋지 않으니까 얼른 병원으로 이송해요!”소방관이 큰 소리로 말했다. 다행히 누군가 구급차를 불러두었기에 현장엔 이미 구급차가 대기하고 있었다. 소방관의 말을 들은 차에 있던 간호사들이 얼른 들것을 들고 내려와 사람을 실었다.그들이 사람을 데리고 떠나기 전 은서우와 인명진도 의사의 신분을 밝히며 차에 올라탔다. 빠르게 구급차는 병원에 도착했다.은서우는 겉옷을 벗어 의사 가운을 갈아입을 때 손이 자꾸만 덜덜 떨렸다. 분명 수술은 지겨워지도록 했지만 가족을 직접 수술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이 생각에 그녀는 온몸이 차갑게 굳어지는 것 같았다.“은 선생님, 지금 수술복으로 갈아입으시려고요? 방금 듣기로 원장님이 이미 수술 들어갔다고 했어요.”누군가 말하자 은서우는 멍한 표정을 짓더니 입을 열었다.“저도 들어갈 거예요.”그녀는 직접 수술실로 들어가 볼 생각이었다. 수술복으로 갈아입은 뒤 은서우는 수술실로 들어갔다. 그녀를 본 인명진은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리며 그녀가 들어오는 것을 반대하려고 했지만 너무나도 확고한 그녀의 눈빛에 말할 수 없었다. 결국 그녀를 들여보내는 수밖에 없었다.“어시는 네가 해.”은서우는 고개를 끄덕인 후 소독을 마치고 들어갔다.소태훈은 아마도 소상태와 연희진의 보호를 받은 것인지 몸에 별다른 상처는 없었다. 그저 연기를 너무 많이 마셔 정신을 잃은 것뿐이었고 병원으로 실려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안정되었다.하지만 소상태와 연희진은 달랐다. 나이도 나이었던지라 화재 현장 속에 너무도 오래 머물렀던 탓에 연기를 많이 마신 것은 물론이고 몸에 화상도 입었다. 연희진은 얼굴 절반이 화상으로 뒤덮였고 목까지 이어졌다.다행히 정신을 차린 은서우는 메스를 안정적으로 들 수 있게 되었고 더는 떨지
소태훈이 자살하고 싶었던 이유는 속죄하기 위함이었다. 그동안 자신이 한 짓이 얼마나 어리석었는지 깨닫고 거기에다 더는 두 다리로 걸을 수 없었던 그는 이대로 삶을 포기하고 싶었다. 그의 설명을 들은 은서우가 입을 열었다.“이렇게 쉽게 목숨을 포기한다고? 그럼 내가 그동안 당한 거는? 뭐가 되는데? 난 그동안 매일 아르바이트 여러 개를 했었어. 하루에 24시간 있는 것도 모자라서 몸이 여러 개였으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하면서 살았다고. 그런데도 난 돈을 모을 수가 없었어. 아파도 병원에 갈 수도 없었다고. 그런 나도 죽을 생각한 적 없었는데 네가 뭐라고 포기하는 거야? 정신 차려!”욕설을 퍼붓고 나니 은서우는 속이 시원해지는 기분이었다. 그러나 소태훈은 그녀의 말에 멍한 표정을 지었다. 속죄한답시고 그는 자신의 부모까지 죽음으로 이끌었다. 이런 행동은 원래부터 잘못된 것이었고 그는 아직도 제대로 정신을 차리지 못한 것 같았다. 어쩌면 삶을 포기하는 방식으로 이 현실에서 도망치려고 했던 것일지도 모른다.“만약 정말로 나한테 죄책감을 느끼는 거라면. 그럼 멀쩡히 살아있어. 네가 날 위해 뭔갈 할 필요도 없어.”은서우는 자신을 키운 소상태와 연희진을 죽게 했다는 죄명을 뒤집어쓰고 싶지 않았다.소태훈은 공허한 눈빛으로 그녀를 한참 보았다. 뭔가 생각하고 있는 듯한 모습이었고 이내 낙담한 모습으로 말했다.“미안해. 전부 내 탓이야.”그가 앞으로 절대 쉽게 목숨을 포기하지 않겠다고 말하고 난 뒤에야 은서우는 병실에서 나왔다. 소상태와 연희진은 몇 달 동안 입원하게 되었다. 은서우는 두 사람을 살려준 뒤로 신경 쓰지 않았다. 두 사람을 수술해준 사람이 그녀라는 것을 안 뒤 죄책감에 시달리고 있다는 소식을 듣긴 했지만 그녀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어쩌면 그녀는 이미 그때의 일을 진정으로 내려놓은 것일지도 모른다. 내려놓았다고 해서 그들을 깎아내리면서 다니지 않았다. 오히려 다른 사람들이 그들을 언급할 때마다 낯선 사람인 것처럼 행동했다.자신들을 죽일 뻔한
지석훈은 그동안 잘 지내지 못했다. 매일 바쁘게 세미나를 다녔고 수술 일정도 너무도 많았다. 숨 쉴 틈도 없이 바빴지만 그의 아버지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에게 선 자리에 나가보라고 했다.그는 어떻게든 피해 보려고 했지만 뜻밖에도 그의 아버지는 병원으로 찾아와 그의 길까지 막고 있었다.“석훈아, 네 친구들은 이미 다 결혼했어. 인명진, 그래 그 병원장한다는 아이도 병원에서 실력이 뛰어나다는 의사와 결혼했다면서. 그런데 너는 뭐 하는 거니? 같은 의사면서 아직도 혼자면 어떡하니! 병원 일은 아직 급하지 않으니까 일단 짝부터 찾아. 설마 네 병원에는 여자 간호사나 여자 의사 선생이 없는 거니? 그리고 잘 봐. 이 아이는 네가 삼촌이라면서 따르던 문용석의 딸이다!”지석훈은 자신의 아버지가 데리고 온 여자에 아무런 흥미가 없었다.“있어요. 여자 간호사든 의사든 전부 있어요. 하지만 제가 왜 친구들이 다들 결혼했다고 해서 저도 따라 결혼해야 하는 거죠?”지석훈은 머리가 아팠지만 그의 말을 들은 지혁진은 기가 막혔다.“그럼 설마 평생 결혼하지 않고 혼자 살겠다는 거냐? 여이현과 나도현도 이미 결혼해서 아이까지 있어. 그런데 너는? 너 설마 남자를 좋아하는 건 아니지?”“...”지석훈은 어처구니가 없었다.“제가 결혼하지 않고 연애도 하지 않는다고 해서 무조건 남자를 좋아한다는 건 아니잖아요.”“예전에는 너와 여이현 사이에 그런 소문이 돌았는데 누가 알겠니? 그런데 이미 여이현도 결혼하고 나도현도 결혼했으니 그럼 설마...”지석훈은 얼른 말을 잘라버렸다.“대체 누구한테 무슨 소문을 들으신 거예요? 설마 제가 최주하와 그런 사이라고 생각하시는 거예요? 그럴 리가 없잖아요!”“하지만 너와 최주하는 최근에 자주 만나고 있잖아. 둘 사이에 아무것도 없는 게 더 이상하지!”지혁진은 그가 남자인 최주하와 사귀고 있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석훈은 너무도 어처구니가 없었다.“저와 주하는 그냥 단순히 둘 다 솔로이니까 시간이 많아서 만나는 것뿐이에요. 그런데
“하지만 콩떡이는 나랑 정말 오랜 시간을 함께한 존재야. 내 가족이랑 마찬가지야. 콩떡이 없으면 나 진짜 못 버틸 것 같아.”여자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하며 눈물을 흘렸다. 지석훈은 윤슬 앞에 반쯤 무릎을 꿇고 입술을 꽉 깨물며 고뇌하던 끝에 입을 열었다. “선배, 내가 콩떡이 잘 돌봐줄게. 나랑 결혼하자. 그 사람은 더 이상 돌아오지 않아.” 지석훈은 오랫동안 강윤슬의 곁을 지켜왔다. 강윤슬은 지석훈의 학교 선배였고 그는 첫눈에 그녀에게 반했지만 강윤슬의 마음속엔 항상 다른 사람이 있었다. 그럼에도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그녀는 아무 말 없이 그를 바라보았다. 지석훈이 이렇게까지 포기하지 않을 줄은 몰랐다. 지석훈은 조용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동자 속에 비친 그녀는 너무도 작고 흔들리고 있었다.지석훈이 그녀에게 얼마나 진심이었는지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그녀만큼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강윤슬은 입술을 살짝 깨물며 망설이다가 말을 꺼내려던 찰나, 휴대전화가 울리기 시작했다.지석훈은 바로 눈앞에 있었기에 전화기 너머의 목소리가 그대로 들려왔다.“슬아야, 나 돌아왔어. 괜찮으면…지금 바로 만날 수 있을까?”“어디야? 내가 지금 바로 갈게.”강윤슬이 이렇게 급해하는 사람은 임혁수밖에 없었다. 강윤슬은 전화를 끊자마자 지석훈의 얼굴을 조심스레 감싸 쥐었다. “석훈아 혁수 오랜만에 돌아왔어. 나 지금 가야 해. 콩떡이 부탁할게. 결혼 얘기는… 너도 알다시피 나는 혁수를 정말 오랫동안 사랑해 왔어. 혁수가 돌아왔는데 만나러 안 갈 수는 없어.”임혁수는 항상 강윤슬에게는 가장 중요한 사람이었고 누구도 그 자리를 대신할 수 없었다.그녀는 임혁수를 위해 지석훈의 청혼도 거절했고 앞으로도 임혁수가 무슨 일이 생기면 언제든지 달려갈 준비가 되어 있었다.지석훈은 그 순간 자신이 원하는 미래가 이루어질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그가 원하는 것은 그저 강윤슬과 함께 평범하게 살아가는 것이었고 그녀가 그를 받아들여 주는 것뿐이
강윤슬은 얼굴을 찌푸리며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지석훈, 너 어떻게 나한테 그런 말을 할 수 있어? 네 고백도 거절했었고, 청혼도 거절했잖아. 나는 너한테 단 한 번도 여지를 준 적 없어.” 강윤슬은 지석훈을 원망스럽게 바라봤다. 그녀의 표정에는 실망감도 함께 묻어 있었다. 예전 같았으면 지석훈은 강윤슬이 그런 표정을 지을 때마다 마음이 아파서 그런 표정을 짓지 않게 하려고 했을 것이다. “맞아. 선배는 계속 거절했어. 그런데 선배는 계속 나랑 애매한 관계를 유지했잖아. 선배가 필요할 때마다 나는 항상 제일 먼저 달려갔어. 그건 내가 선배를 신경 썼기 때문이야.” “선배, 이제 혁수가 돌아왔으니까 혁수랑 잘 살아. 콩떡이는 내가 말한 대로 편안하게 보내주는 게 나을 거야.” 말을 마친 지석훈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대로 자리를 떠났다.임혁수가 돌아오지 않았다면 지석훈은 아마 계속하여 자신을 달래며 그녀의 주위를 맴돌았을지도 모른다.하지만 임혁수가 돌아왔고 지석훈은 자신이 임혁수에게 비교가 되지 않는다는 걸 너무 잘 알고 있었다.비교가 안 된다고 느끼자 지석훈은 굳이 버틸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 지석훈은 부자 동네를 떠나 병원으로 가지 않고 클럽으로 향했다.처음엔 최주하에게 전화할까 했지만 그와의 스캔들을 떠올리며 결국 그만두기로 했다. 아무리 가까운 사람이라도 자신과 관련된 일에 휘말리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의외로 클럽에서 최주하를 마주쳤다.최주하는 그를 보고 의외라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우리 위대하신 지 선생님 아닌가? 바쁜 사람이 웬일이야? 오늘처럼 한가한 날도 있나 보네. 술 마시러 나오다니.”지석훈은 차가운 시선으로 최주하를 쏘아보며 말했다.“지금 밖에서 어떤 소문이 떠돌고 있는지 알아?”여기서 우연히 마주친 건 그렇다 치고 최주하가 다가와서 이런 말을 한다는 건 분명히 밖의 소문에 대해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는 뜻이었다.최주하는 가볍게 웃으며 대답했다.“소문? 똑똑한 사람은 그런 거 신경 안 써. 입은
“너 지금 무슨 뜻이야? 최주하, 설마...”지석훈은 당황한 채로 손가락으로 최주하를 가리켰다. 그동안 최주하를 형제처럼 여겨 농담을 주고받았지만, 그런 쪽으로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그러나 최주하의 말은 다르게 들렸다. 최주하는 지석훈의 손을 툭 치며 말했다.“지금 뭐 하는 거야?”“너 지금 뭐 하는 거야? 내가 분명히 말했지. 아버지가 찾아오는 거 원하지 않는다고. 너 지금 상황 더 키워서 복잡하게 만들려는 거 아니야? 나까지 끌어들여서 죽일 생각이야?”지석훈은 노려보며 말했다. 최주하는 주위를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장난스럽게 말했다.“그럼 어때? 일 커지면 좋잖아. 그럼 더 이상 우리한테 결혼하라고 잔소리할 사람 없잖아. 어차피 죽는다고 해도 우리 형제니까 같이 죽어줄게.”“너 그만해. 지금 네가 하는 말이 무슨 뜻인지는 알아? 너 나한테 관심 있어?”지석훈은 얼굴이 점점 더 어두워졌다.처음엔 그럴 리 없다고 생각했지만 최주하의 표정과 말투를 보며 점점 확신하게 되었다.지석훈은 온몸에 소름이 끼쳤다.자기 성적 취향을 잘 알고 있던 그는 그동안 최주하와의 관계가 전혀 그런 쪽은 아니었지만 지금만큼은 너무나 불편한 기분이 들었다. 최주하의 태도에서 지석훈은 그가 자신에게 갖고 있는 감정이 친구 이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지석훈은 자신이 전혀 그런 감정을 느낄 리 없다고 확신했지만 최주하의 눈빛과 말투는 그와 전혀 맞지 않게 온몸에 소름을 돋게 했다. 최주하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이 말했다. “지석훈, 너 진짜 죽고 싶어? 내가 지금 너 발로 차서 날려줄까?”그때 멀리서 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죄송하지만 석훈 씨는 제 약혼자예요.”이어 한 여자가 지석훈 옆으로 빠르게 다가왔다.그 여자는 두 사람이 반응하기도 전에 지석훈의 팔을 가볍게 잡았다. 지석훈은 잠시 그녀를 쳐다봤다. 이 여자는 그의 아버지가 병원에 데려온 여자였다.“뭐 하는 거예요?”지석훈은 차가운 표정으로 눈썹을 찌푸리며 그 여자를 밀어내려고 했다.
문지원이 처한 상황에 비하면 지석훈의 거부감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녀는 지석훈이 어디 가든 어떻게든 그 뒤를 따를 것이라는 생각뿐이었다. 어차피 지혁진이 말한 대로 지석훈의 마음만 얻을 수 있다면 그녀는 신씨 집안에 들어갈 수 있었고 게다가 지혁진은 그녀에게 무조건적인 도움을 주겠다고 약속했다.지석훈은 문지원이 여전히 자신의 곁에 있을 거라 생각하지 못했다. 그가 그렇게 차갑게 말했음에도 문지원은 계속해서 그의 옆에 붙어 있었다.지석훈은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당신, 우리 아버지랑 대체 어떤 거래를 한 거야? 솔직히 말하는 게 좋을 거야. 그렇지 않으면 사람 시켜서 조사할 거야.”지석훈은 그런 일을 조사를 시작하는 데 전혀 어려움이 없었다. 차라리 문지원이 모든 것을 설명하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문지원은 진지하게 대답했다.“집에 좀 문제가 생겼고 그때 석훈 씨 아버지께서 석훈 씨를 위해 맞선 상대를 찾고 계셨어요. 그때 제가 나서게 된 거죠. 어차피 저희도 오랜 인연이니까요. 석훈 씨 전에 어떤 성적 취향을 가졌든 지금 제가 이렇게 석훈 씨 옆에 있는 이상 남자를 좋아하는 일은 그냥 두고 볼 수는 없어요.”문지원은 단호한 태도로 자기 뜻을 확실히 밝혔다.지석훈은 그 말을 듣고 그냥 웃어버렸다.“도대체 뇌에 뭐가 들었길래 지금이 어떤 시대인데 아직도 그런 거래를 하고 있어? 아버지랑 약속했다고? 이 일을 끝내면 원하는 걸 얻을 수 있다고? 진짜 대단하다. 이렇게 많은 사람 중에 당신이 원하는 걸 줄 만한 그런 사람 하나 없을 거 같아?”지석훈은 어처구니가 없어서 웃음이 났다.문지원은 무척 난감해했다.어쨌든 그녀는 문씨 집안의 큰 딸이었다. 비록 문씨 집안이 지씨 집안이나 여씨 집안보다 못하긴 했지만 집안에 문제가 없을 때는 그녀의 아버지도 그녀를 공주처럼 키웠다. 그러다 보니 이런 모욕을 당한 적이 없었고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참아야 했다.“저는 이미 당신 아버지와 거래했고 아버지께서 제게 주신 보상도 적
강윤슬은 지석훈을 봤지만 먼저 인사를 건넨 사람은 임혁수였다.지석훈은 대답하지 않고 입술을 굳게 다물고 있었다.그가 주의를 기울인 건 바로 강윤슬이 그를 쏘아보는 차가운 눈빛이었다.최주하는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그렇다면 친한 사람들이니까 한자리에 모여서 놀까?” 최주하는 지금 문지원이 지석훈의 곁에 있다는 사실이 재미있게 느껴졌다. 더군다나 사람도 많으니 분위기도 편할 거라고 생각한 것이다.하지만 예상외로 지석훈은 진지한 표정으로 답했다.“그런 자리 마련할 필요 없어. 우리랑은 어울리지 않는 사람들이니까.”말을 마친 지석훈은 문지원의 손목을 붙잡고는 자리를 떠났다.강윤슬이 아니었으면 지석훈은 절대 문지원에게 손을 대지 않았을 것이다.그렇지만 강윤슬은 임혁수와 함께 왔고 자신을 쏘아보는 그 차가운 시선에서 그가 일부러 그녀를 따라온 것이라 오해한 듯했다. 그래도 지석훈은 강윤슬에게 어떤 이유로든 얕잡아 보일 필요는 없었다.그때 임혁수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석훈아 슬이가 네 얘기 자주 하더라. 네가 없었더라면 지금의 윤슬이는 없었을 거라고.”최주하는 그 말을 듣고는 즉시 관심을 보였다. 지석훈은 일이 바빠서 다른 여자들에게 뭘 도와준 적이 없었다.최주하는 분위기를 보며 아마도 뭔가 흥미로운 일이 있었다고 예감했다.지석훈도 그것을 알지 못했다. 강윤슬이 임혁수에게 모든 일을 이야기했다는 사실은 그가 강윤슬에게 몇 번 청혼했지만 다 실패했다는 사실을 임혁수도 알고 있다는 뜻이었다.그 사실을 깨닫자 지석훈의 얼굴은 갑자기 어두워졌다.“친구끼리 도와주는 건 당연한 거지. 오늘은 내 약혼녀랑 시간 보내야 해서 바쁠 것 같네.”그 말과 함께 지석훈은 문지원의 손목을 잡고는 자신의 품에 끌어당겼다.문지원은 그의 아버지와 거래했기에 떠나지 않았다. 지금 그녀는 그저 연기를 하고 있을 뿐이었다.그리고 지석훈은 일부러 강윤슬을 흘끗 쳐다봤지만 그녀는 그를 아예 쳐다보지도 않았다. 오히려 임혁수는 강윤슬의 어깨를 감싸며 말했다.“석훈이 바
현관으로 온 지석훈은 그제야 문지원이 떠올라 망설이다가 걸음을 멈추었다. 문지원은 일부러 핸드폰을 꺼내 보면서 괜찮은 척했지만 속에서는 이상하리만큼 씁쓸함이 밀려왔다.“전 괜찮으니까 얼른 가보세요. 그 사람들도 더 어떻게 찾아오진 못할 거예요. 여기서 더 찾아온다면 범죄가 될 테니 말이에요.”“그래. 무슨 일이 생기면 나한테 바로 연락해.”안색이 조금 풀린 지석훈은 바로 문을 열고 나가버렸다. 집 안에는 문지원 혼자 남게 되었다. 예전에도 집 안에 혼자 남은 적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이번엔 이상하리만큼 외롭고 쓸쓸했다. 창문이 굳게 닫혀 있음에도 자꾸만 어딘가 바람이 새어 나와 그녀의 손발을 차갑게 하는 것 같았다.그녀는 최대한 다른 생각은 하지 않으려고 했고 따듯한 물에 샤워한 후 일찍 쉬려고 했다. 다행히 이날 밤 그녀에게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다음 날이 되자 문지원은 청소 직원을 불러 문과 바닥을 도배한 붉은 페인트를 지워달라고 했다. 그러고 나서 그녀는 바로 공장으로 달려가 구인 상황을 살펴보았다. 결과는 놀랍게도 지원자가 14명이나 모였고 그녀는 보자마자 기뻐했다. 손기영과 같은 마을에 사는 마을 주민이라는 것을 들은 그녀는 바로 손기영에게 물었다.“공장장님 마을 사람들이 정말로 공장에서 일하고 싶다고 했어요?”“당연하지. 마다할 리가 있겠어? 내가 충분히 설명했는데도 일하고 싶다고 찾아온 사람들이야.”손기영은 원래 바쁘게 일하고 있었지만 그녀를 보자마자 하던 일을 멈추고는 걱정이 담긴 잔소리를 해댔다.“문 사장, 앞으로 공장으로는 가끔 찾아오는 것이 좋겠어. 여긴 평소에 작업하느라 공기가 좋지 않아. 우리 직원들도 모자며, 마스크며 꽁꽁 쓰고 일한다고.”문지원은 황급히 손을 올려 아무것도 없는 얼굴을 만졌다.“아, 죄송해요. 깜빡하고 있었어요. 지금 바로 가서 마스크와 작업복으로 갈아입고 올게요!”그녀는 얼른 마스크를 착용했다. 이내 손기영은 그녀를 데리고 막 공장으로 출근한 직원들을 소개해주었다. 남자도 있고 여자도
문지원은 지석훈이 자신에게 부담을 주지 않으려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현유한과 프로젝트를 위해 자신을 팔아버린 주현철, 그리고 현유한에게 당한 폭행과 욕설만 떠올리면 저도 모르게 몸이 덜덜 떨렸다. 현유한이 절대 자신이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을 그녀는 확신할 수 있다.지석훈은 그런 그녀의 모습을 눈치챘지만 그가 묻기도 전에 문지원이 먼저 고개를 들어 말했다.“네. 그럼 부탁드릴게요. 저 좀 데려다주세요.”“그래.”지석훈은 구겼던 미간을 폈다. 그녀가 괜찮다고 말하지 않아도 어차피 그는 며칠 동안 그녀를 돌봐줄 생각이었다. 그녀에게 더는 다른 나쁜 일이 생기길 바라지 않았으니까. 그러나 그녀의 집에 도착한 지석훈은 문 앞 바닥과 현관문에 빨간 페인트로 ‘X 녀'와 ‘쌍 X'라는 욕으로 가득 도배된 것을 보게 되었다. 절로 미간을 찌푸리게 하는 욕설들이었다.그는 더는 모른 척 넘어갈 수 없어 옆에 있던 문지원을 보았다.“요즘에 이상한 사람한테 걸리기라도 한 거야?”그녀가 입을 꾹 다물고 있자 그는 계속 물었다.“혹시 오늘 다친 것과 연관이 있는 거지?”비록 의문문이었지만 그의 어투엔 확신으로 가득했다. 더는 숨길 의미가 없을 정도였다. 더구나 현유한이 이렇듯 빨리 자신의 거처까지 찾아낼 줄은 몰랐다. 문지원은 자신이 절대 다른 사람과 맞설 수 없는 존재임을 알았다. 지금 상황에서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은 직접 믿을 만한 사람을 찾아가 도움을 요청하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은 더는 믿을 수가 없다.문지원이 현재 믿을 수 있는 사람은 지석훈 한 명뿐이었다. 괴로운 눈빛으로 빨간 글씨를 보던 문지원은 이내 시선을 돌려 키를 꺼냈다.“일단 들어가서 얘기해요. 오늘은 주말이고 은숙 아주머니도 쉬는 날이에요.”지석훈은 묵묵히 그녀를 따라 들어갔다. 집 안으로 들어온 문지원은 먼저 겉옷을 벗었다. 그리고는 한숨을 내쉬며 소파에 털썩 앉아 오늘에 있었던 일을 전부 지석훈에게 알려주었다.“전 현철 아저씨가 예전에 우리 아빠와 계속 협력을 이어
지석훈은 문지원이 말을 하지 않자 한숨을 내쉬었다.“일단 상처부터 치료해줄게.”이내 그는 소독약을 들고 돌아왔다. 문지원은 움찔하며 다소 민망해진 어투로 말했다.“크게 다친 것도 아닌데 제가 할게요.”그러나 지석훈은 그녀의 손을 꽉 잡으며 낮게 깔린 목소리로 말했다.“움직이지 마.”문지원은 저도 모르게 그의 말을 따랐다. 지석훈이 들고 있는 면봉이 그녀의 피부에 닿을 때마다 그녀는 어딘가 자극을 받은 것처럼 움찔거렸고 차가운 소독약에 찌릿찌릿한 기분이 들었다. 지석훈은 그런 그녀의 모습을 보더니 미간을 찌푸리며 자신이 약을 아프게 바른 것은 아닌지 생각했지만 문지원은 오히려 자신이 그의 심기를 건드렸다고 오해했다.“미안해요... 일부러 그러는 건 아니에요. 약이 상처에 닿으니까 따가워서 저도 모르게 움찔거린 거예요.”문지원은 원래부터 곱게 자란 부잣집 딸이었다. 문용석은 입원하기 전까지 행여나 자기 딸이 조금이라도 다치게 될까 봐 애지중지하며 길렀던지라 상처에 소독약을 발라보는 것은 태어나서 처음이었다.“그럼 살살 발라줄게.”이렇게 말한 지석훈은 천천히 움직였지만 문지원은 오히려 더 고역이었다. 소독약이 묻은 면봉이 상처에 닿을 때 원래는 그저 따갑기만 했지만 지석훈이 살살 바르고 있으니 깃털로 간질이는 것처럼 간지럽기도 했다.어떤 사람들은 고통을 잘 참을 수 있어도 간지러움은 참지 못했다. 문지원이 바로 이런 부류에 속했다. 결국 참지 못한 그녀는 손을 뻗어 지석훈의 손을 잡아버렸다. 지석훈도 멈추며 고개를 천천히 들었다. 시선이 맞닿은 순간 문지원은 그제야 자신이 바보 같은 짓을 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고 눈을 질끈 감으며 말했다.“그냥 아까처럼 발라주세요. 이건 너무 간지러워요.”그 말을 들은 지석훈은 굽혔던 몸을 일으켜 세우더니 헛기침 두어 번하며 어색한 목소리로 말했다.“미안해. 내가 거기까진 생각을 못 했네. 하지만 네 몸에 있는 상처들은 약 발라야 나을 수 있는 상처들이야. 어떤 부위엔 네 손도 닿지 않을 거고. 아니면 내
“지원 씨와 같은 나이대 여자들은 대부분 명품 가방을 좋아하던데, 아니면 명품 액세서리라던가 말이에요. 누가 허구한 날 공장에만 박혀서 더러운 일꾼들과 대화를 해요. 지원 씨 아버님 책임감이 전부 지원 씨가 떠안고 있으면 너무 불공평하잖아요. 안 그래요?”현유한은 자꾸만 슬금슬금 그녀의 옆으로 자리를 옮겼다. 문지원은 불길한 예감이 들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현 대표님, 전 대표님을 아주 존경해요. 오늘 이렇게 온 것도 사업에 관해 얘기하려고 온 거예요. 만약에 대표님께서는 다른 의도로 오신 거라면 전 이만 가볼게요.”주현철이 소개해준 상대는 정말이지 전혀 믿음직스럽지 않았다. 집으로 돌아간다면 그녀는 반드시 주현철의 연락처를 차단하고 더는 연락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그러나 그녀를 곱게 보내줄 현유한이 아니었다. 겨우 그녀를 속여 이곳까지 나오게 했으니 반드시 원하는 대로 놀아야 직성이 풀렸다. 그렇게 생각한 그는 문지원의 팔을 확 잡아당겼다.“나랑 살면 매달 용돈 1000만 원 줄 수 있는데 뭐하러 힘들게 이리저리 돌아다녀요? 어차피 그 공장도 곧 망할 것 같은 데 시간 낭비는 하지 않는 게 더 좋지 않겠어요?”“이거 놔요!”문지원은 두 눈을 부릅뜨며 발을 들어 그를 차버렸다.‘지금 스폰 제안하는 거야? 꿈 깨라고 해!'그녀에게도 자존심이 있었고 아무리 힘들다고 해도 자기 몸까지 팔 정도는 아니었다.“씨X, 좋게 말할 때 이리와.”현유한은 그녀의 발길질에 앓는 소리를 냈다. 룸 안에는 둘 뿐이었고 그의 힘이 그녀보다 셌던지라 당연히 문지원 정도는 쉽게 잡을 수 있을 거로 생각했다. 여하간에 문지원의 집안 상황도 좋지 않았던지라 문지원의 편을 들어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그가 무슨 짓을 해도 그녀를 지켜줄 사람도 없었다.“얌전히 있는 게 좋을 거야. 만약 내 심기를 거스른다면 이 바닥 사람들에게 절대 너와 협력하지 말라고 할 거고 그렇게 되면 네 그 허접한 공장도 망하게 되겠지!”현유한은 문지원을 노려보며 협박했다. 하지만 문지원
전화를 건 사람은 바로 문정 그룹의 단골 협력 업체 대표인 주현철이었다. 어제 문지원은 그에게도 연락했었지만 주현철이 수중에 진행하고 있는 프로젝트가 없다고 대답했기에 그녀는 결국 전화를 끊을 수밖에 없었다. 비록 오늘 갑자기 전화한 목적이 무엇인지 모르지만 일단은 받았다.“네, 아저씨. 무슨 일이세요?”“지원아, 아저씨가 너한테 프로젝트 소개해주려고 전화했단다. 어제 나한테 연락하지 않았니. 나한테까지 연락했으니 당연히 널 도와줘야지. 안 그러니?”주현철의 목소리가 핸드폰 너머로 들려왔다. 사실 문지원은 그의 연락이 불편하게 느껴졌다. 그녀는 분명 상대에게 협력하겠냐고 물었지만 상대는 그녀를 도와주는 것이라고 하지 않겠는가. 분명 협력은 서로 이익을 바라고 하는 일인데 말이다. 하지만 손님은 왕이었던지라 그녀는 그가 꺼낸 말이 불편하게 느껴진다고 해서 말다툼을 할 수는 없었기에 웃으며 대답했다.“네, 고마워요. 아저씨.”“지금 시간이 있는 거면 같이 식사라도 하자꾸나. 내가 소개해주지. 둘이서 잘 얘기해보고 서로 목적이 같다면 오늘 계약서를 쓰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구나. 얘기가 잘 안 되어도 괜찮단다. 이 아저씨한테 다 방법이 있으니까.”주현철은 손가락으로 책상을 툭툭 치며 말했다. 문씨 가문의 상황을 이미 전해 들어서 알고 있던 그였다. 솔직히 말해서 문지원은 현재 홀로 분투하고 있는 상태였다. 그런 그녀가 어떻게 다시 회사를 일으켜 세울 수 있겠는가. 다만 문지원의 미모는 확실히 예뻤다. 예쁜 얼굴을 가진 여자라면 기회는 얼마든지 있었다.“네, 시간 있어요. 아저씨 주소를 문자로 보내주세요. 제가 지금 바로 갈게요.”문지원은 자리에서 일어나 빠르게 문자로 받은 주소로 향했다. 룸의 문을 열자 안에는 남자 두 명이 앉아 있었다. 한 명은 그녀와 통화했던 주현철이었고 다른 한 명은 처음 보는 사람이었다.“지원아, 내가 너한테 소개하고 싶다던 사람이란다. 이름은 현유한이니까 현 대표라고 부르면 되겠구나.”“아니에요. 저와 문지원 씨는 나
“다들 돌아오지 않겠다고 하지? 이미 떠난 마음을 아무리 설득해봐야 돌아서겠어? 그리고 정말로 돌아온다고 해도 전처럼 열심히 일하려 하지 않을 거라고.”유은진이 옆에서 손기영을 달래주었다.“나도 이 사람들이 돌아오든 말든 신경 쓰지 않아. 하지만 문 사장이 직원만 모이면 바로 이 프로젝트를 시작할 수 있다고 했단 말이야. 일손이 부족한데 어떻게 일을 해? 물론 야근해도 괜찮아. 하지만 사람이 매일 야근하면서 살 수는 없잖아. 누가 버틸 수나 있냐고.”손기영은 점점 커지는 책임감에 어깨가 무거워졌다. 문지원은 이 일을 그에게 맡겼던지라 미리 보너스까지 챙겨주었다. 그랬기에 그는 반드시 맡겨진 임무를 잘 완성해야 했고 문지원의 믿음을 져버려서는 안 되었다.“내 기억에 우리 마을에 일거리 없는 사람들 꽤 되지 않았나? 일당만 받으며 불안정한 생활을 하고 있다고 기억해. 같은 마을 사람들이니 그 사람들이 어떤 사람인지 우리가 잘 알잖아. 그 사람들 중 믿음직스러운 사람들만 골라서 리스트를 만들고 문 사장한테 물어보는 건 어때? 괜찮다면 우리가 그 사람들에게 연락하면 되잖아.”유은진은 고민하는 손기영을 위해 방법을 생각해냈다. 손기영은 바로 유은진이 말한 대로 했다. 지금 상황에서 그가 할 수 있는 건 이것뿐이었으니까. 일단 먼저 공장부터 다시 가동하는 것이 먼저였다....다음 날 아침 일찍 문지원은 공장으로 왔다. 공장은 어제보다 더 깨끗했고 먼지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청소 업체를 부르지 않았다.의아했지만 문지원은 일단 발을 들어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손기영이 사람들을 이끌고 청소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들은 전에도 공장 안에 있는 설비들을 다루며 일해야 했던지라 설비에 진심이었다. 그랬기에 청소하는 것도 힘이 났다.“아저씨, 뭐 하세요?”“아, 문 사장. 이 사람들은 오늘부터 일하고 싶다고 한 우리의 직원들이야. 다들 할 일이 없는 거 같기에 일단 공장 청소 좀 하자고 했어. 그럼 나중에 일할 때도 편하잖아.”손기영은 들고 있던
문지원은 여진 그룹과 함께 진행하는 프로젝트를 손기영에게 자세하게 알려주었다. 손기영은 공장장으로 오랫동안 일했었기에 공장의 시스템에 아주 잘 알고 있었고 프로젝트를 듣자마자 그녀에게 자기 생각을 말해주었다.“문 사장, 예전에 일하던 직원 절반만 불러와도 정해진 기간에 완성할 수 있을 거야. 그런데 만약에 다른 사람들도 다시 돌아오고 싶다고 하면 어떻게 하려고? 받아줄 거야?”“당연하죠. 아저씨, 저희가 함께 일한 시간이 얼마인데요. 이번에 회사에 이렇게 큰 곤란이 들이닥치고 월급도 제대로 주지 못하는데도 남아서 함께 일하고 싶다는데 당연히 받아들여야죠. 공장엔 앞으로 이 프로젝트 말고도 다른 프로젝트도 있을 거예요. 그분들만 원하신다면 저는 전부 받아줄 거예요. 사람이 적은 것보다 많은 게 더 낫지 않겠어요?”문지원은 이미 미래까지 생각해두었다. 여진 그룹과의 프로젝트는 지석훈 덕에 뺏어올 수 있었던 것이었기에 급한 불부터 끄고 공장을 성공적으로 다시 가동한다면 다시 회사를 일으켜 세울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공장이 계속 정상적으로 운영되려면 일시적인 프로젝트보다는 장기적으로 프로젝트를 협상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했다. 평생 이 하나의 프로젝트만 바라면서 살 수는 없지 않은가.“알겠어. 문 사장 말만 들어도 힘이 솟아나는구먼. 앞으로 난 문 사장이 아니면 일하지 않을 거야.”손기영은 손을 올려 가슴을 치면서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문지원은 정말이지 문용석을 닮아도 너무 닮았다. 게다가 손기영은 문지원이 회사를 이끌어가면 어쩌면 전보다 훨씬 더 잘 되리라는 예감이 들었다.문씨 가문에서 나온 문지원은 단 한 순간도 쉰 적 없었다. 공장의 일은 손기영에게 맡길 수 있다고 해도 프로젝트를 끌어오는 일은 그녀가 해야 했다.그녀는 이번에 문용석의 사무실로 가 예전에 협력했던 협력 업체의 리스트를 찾아내곤 일일이 전화를 걸어 물었다. 문용석은 쓰러지기 전에 큰 프로젝트든 작은 프로젝트든 전부 직접 관리했고 질량도 꼼꼼히 살폈던지라 협력 업체 쪽에서 명성이
‘이렇게나 빨리 월급을 준다고?'돈을 받은 손기영은 현실감이 떨어져 얼떨떨한 얼굴로 보았다.“지원아, 이 돈은 어디서 난 거니?”“아저씨, 사실 제가 최근에 프로젝트를 하고 있는데 협력처 쪽에서 자금을 투자했어요. 그래서 받자마자 밀린 월급을 주러 온 거예요. 저도 아저씨랑 다른 직원분들의 형편이 안 좋다는 거 알고 있고 더는 미뤄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어요.”문지원은 차근차근 손기영에게 설명해주었다.“그리고 월급 말고도 물어볼 것이 있어요. 혹시 다른 곳으로 취직하셨어요? 그런 게 아니라면 다시 공장으로 돌아와 일할 생각 있으세요? 아저씨가 돌아오셔도 여전히 공장장으로 일하실 거예요. 공장에 새로운 주문이 들어왔는데 직원이 부족하거든요.”갑작스러운 소식에 손기영은 너무도 기쁘면서도 놀랐다.“공장이 이렇게나 빨리 다시 돌아간다고?”그는 확실히 문정 그룹이 다시 일어설 거라고 생각했지만 이렇게나 빨리 일어설 줄은 몰랐고 그것도 문지원의 손에서 다시 일어서게 될 줄은 몰랐다. 겉보기엔 한없이 연약한 문지원이 파산한 기업을 다시 회생하고 있을 줄은 전혀 몰랐다.“네. 전 전에 일하시던 분들이 계속 일했으면 해서요. 어쨌든 그동안 일한 시간이 있으니 경험도 쌓였잖아요. 만약에 정말 싫어서 다들 거부한다면 저도 이해하니까 괜찮아요. 신입을 뽑아서 다시 일 가르쳐주면 돼요.”“난 당연히 좋지. 회장님도 나한테 얼마나 잘해주셨는데. 너도 돈이 생기자마자 우리 밀린 월급부터 주려고 온 거잖아. 난 내일부터 바로 출근할 수 있단다.”손기영은 자신의 허벅지를 ‘탁' 치면서 말했다. 안 그래도 취직이 잘되지 않아 속이 타던 때였다. 그런데 문지원이 다시 일하러 오라고 하니 어찌 기쁘지 않을 수 있겠는가.그는 돈 봉투에서 40만 원 정도 세더니 꺼내 문지원에게 돌려주었다.“지원아, 아니지. 문 사장, 난 월급만 받을게. 우리 사이에 이자라니. 당연히 일한 만큼 받아야 하지 않겠어? 그러니 이 돈은 더 받을 수 없어.”문지원은 웃으며 그를 보았다. 예전부터 그
여자는 문지원을 본 후 딱히 반기는 기색이 아니었고 그저 옆으로 길을 내어주며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들어와요.”“지원아, 네가 여긴 어쩐 일이니?”손기영은 아주 열정적인 모습으로 문지원을 반기며 차도 따라주고 과일도 내주었다. 옆에 있던 그의 아내는 보면 볼수록 짜증이 치밀었다.“그 체리는 해수를 위해 남겨놓은 건데 그걸 왜 꺼내. 지금 체리가 얼마나 비싼지 알고는 있어?”“집에 손님이 왔는데 아무것도 대접하지 말라고? 곧 식사 시간이니까 당신은 얼른 가서 상이나 차려줘.”손기영은 자신의 아내에게 눈빛을 보냈다. 그도 문지원이 자신을 왜 찾아온 것인지 모른다. 어쩌면 그에게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서 찾아왔을 수도 있다. 어쨌든 손기영은 이렇게 반겨주는 것 외엔 그녀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이 없었다. 밀린 한 달 월급은 나중에 천천히 받아도 되었지만 영원히 안 받을 수는 없다.나중에 문씨 가문에 다시 돈이 생겼을 때 받을 생각이었다. 사람이 아무리 힘들고 상황이 어렵다고 해도 양심도 없이 근본을 잃어서는 안 되었으니까. 그는 문지원을 보며 말했다.“오늘은 아저씨네 집에서 저녁이라도 먹고 가. 아저씨 집은 너도 보다시피 그저 그래. 음식도 좋은 걸 내어줄 수 없지만 그래도 싫어하지는 말아줬으면 좋겠구나.”문지원은 얼른 고개를 저었다.“아저씨 그런 말씀은 하지 마세요.”그녀의 집안은 손기영의 상황보다 더 못했기에 그녀가 감히 남의 집을 평가할 자격이 없었다. 더구나 손기영은 그녀에게 월급에 대한 말은 단 한 번도 꺼내지 않았으니 오히려 그에게 고마워해야 했다.“그래. 얼른 앉아. 난 집사람이 어떤 음식을 만들 수 있나 주방으로 가서 확인하고 오마.”손기영은 자기 아내 손을 잡고 주방으로 들어갔다. 문이 닫히자마자 그의 아내라 비꼬아 말했다.“하이고, 공장장님. 아주 그냥 세기의 대인배네. 월급을 달라고 하지 못할망정 지금 나더러 상까지 차려서 바치라는 거야? 참나, 대단하네. 대단해!”여자는 그를 향해 엄지를 척 들며 비꼬았다. 손기영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