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윤슬은 지석훈을 봤지만 먼저 인사를 건넨 사람은 임혁수였다.지석훈은 대답하지 않고 입술을 굳게 다물고 있었다.그가 주의를 기울인 건 바로 강윤슬이 그를 쏘아보는 차가운 눈빛이었다.최주하는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그렇다면 친한 사람들이니까 한자리에 모여서 놀까?” 최주하는 지금 문지원이 지석훈의 곁에 있다는 사실이 재미있게 느껴졌다. 더군다나 사람도 많으니 분위기도 편할 거라고 생각한 것이다.하지만 예상외로 지석훈은 진지한 표정으로 답했다.“그런 자리 마련할 필요 없어. 우리랑은 어울리지 않는 사람들이니까.”말을 마친 지석훈은 문지원의 손목을 붙잡고는 자리를 떠났다.강윤슬이 아니었으면 지석훈은 절대 문지원에게 손을 대지 않았을 것이다.그렇지만 강윤슬은 임혁수와 함께 왔고 자신을 쏘아보는 그 차가운 시선에서 그가 일부러 그녀를 따라온 것이라 오해한 듯했다. 그래도 지석훈은 강윤슬에게 어떤 이유로든 얕잡아 보일 필요는 없었다.그때 임혁수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석훈아 슬이가 네 얘기 자주 하더라. 네가 없었더라면 지금의 윤슬이는 없었을 거라고.”최주하는 그 말을 듣고는 즉시 관심을 보였다. 지석훈은 일이 바빠서 다른 여자들에게 뭘 도와준 적이 없었다.최주하는 분위기를 보며 아마도 뭔가 흥미로운 일이 있었다고 예감했다.지석훈도 그것을 알지 못했다. 강윤슬이 임혁수에게 모든 일을 이야기했다는 사실은 그가 강윤슬에게 몇 번 청혼했지만 다 실패했다는 사실을 임혁수도 알고 있다는 뜻이었다.그 사실을 깨닫자 지석훈의 얼굴은 갑자기 어두워졌다.“친구끼리 도와주는 건 당연한 거지. 오늘은 내 약혼녀랑 시간 보내야 해서 바쁠 것 같네.”그 말과 함께 지석훈은 문지원의 손목을 잡고는 자신의 품에 끌어당겼다.문지원은 그의 아버지와 거래했기에 떠나지 않았다. 지금 그녀는 그저 연기를 하고 있을 뿐이었다.그리고 지석훈은 일부러 강윤슬을 흘끗 쳐다봤지만 그녀는 그를 아예 쳐다보지도 않았다. 오히려 임혁수는 강윤슬의 어깨를 감싸며 말했다.“석훈이 바
지석훈은 문지원을 클럽 입구까지 데려다줬다.입구에 도착한 뒤 그가 분명하게 말했다.“더 이상 따라오지 마. 당신한테 관심 없으니까. 돈을 벌고 싶다면 여기가 좋을 것 같은데.”이 클럽에는 강윤슬과 임혁수도 있었기 때문에 그는 더 이상 이곳에 머물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뜻밖에도 문지원은 그의 뒤를 바짝 따라갔다.“어디 갈 데도 없어?”“아저씨가 나한테 당신을 꼭 따라다니라고 하셨거든요. 당신의 마음을 얻으라고 하셨어요.”그 뜻은 임무를 완수하지 않은 한 절대 떠나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고개를 숙이고 있어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녀의 말투에 굳은 의지가 담겨 있었다.이런 상황에서 그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얼마가 필요한 거야? 얼마가 필요하길래 굳이 이런 짓까지 하는 건데?”생판 모르던 여자가 지금은 그의 곁을 맴돌고 있는 상황이 어이가 없었다. 그녀가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아주 많이요.”현재 문씨 가문의 상황에서는 아무도 그녀를 도와주려는 사람이 없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녀도 이렇게까지는 하지 않았을 것이다. 지석훈은 문지원을 빤히 쳐다보았다. 뭐랄까... 불쌍한 강아지 같았다. 지석훈은 생명을 구하는 의사였고 그동안 강윤슬의 곁을 맴돌기만 했다. 강윤슬한테서는 문지원의 이런 모습을 본 적이 없었고 두 사람은 하나도 닮은 구석이 없었다. 그는 자비를 베푸는 사람이 아니었다. 문지원을 어찌 해결하더라도 그의 아버지는 결국 포기하지 않고 계속해서 또 다른 문지원을 그한테 보낼 것이다.“분명히 말하지만 난 당신한테 마음이 흔들리지 않아.”그가 단호하게 입을 열었다. 사실 문지원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지석훈이 방금 그 여자한테 마음이 있다는 것을. 그렇지 않았다면 그가 먼저 다가가지도 않았겠지. “당신도 이런 일로 피곤해지는 거 싫잖아요. 아저씨가 귀찮게 하는 건 내가 막아줄 수 있는데...”그녀는 주먹을 불끈 쥐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180cm가 훌쩍 넘는 키, 의사 가운을 벗고 짙은
의사로서 직업 윤리에 어긋나는 일을 할 수는 없다.“각서까지 쓸 필요 없어. 난 당신이랑 거래 같은 거 하고 싶지 않거든. 아직 젊으니까 빚을 갚는 일은 천천히 해도 돼.”말을 마친 그가 발걸음을 옮겼고 그녀는 여전히 그의 뒤를 따라갔다.“천천히 할 문제가 아니에요. 방법이 있었더라면 당신 앞에 나타나지도 않았을 거예요. 아저씨와 우리 아버지 두 분은 가장 친한 친구세요. 그러나 지금 이 상황에서 아저씨가 줄 수 있는 도움도 얼마 안 돼요. 그러나 만약 내가 아저씨의 뜻대로 당신의 마음을 얻는다면 모든 것이 달라질 거예요.”지혁진이 원하는 것은 아들이 남들처럼 가정을 꾸리고 아내와 아이들과 행복하게 사는 것이었다. 그 집안의 며느리가 된다면 지혁진도 당연히 더 많이 도와줄 것이라고 생각했다. “난 이제 집에 갈 돈도 없어요...”그의 뒤에서 그녀가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아주 작은 목소리였지만 그는 여전히 똑똑히 들었다.그 말에 그가 피식 웃었다.“돈이 없다면서 여긴 어떻게 온 거야? 정말 이렇게 날 따라다닐 건가?”그녀가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 “아저씨가 당신의 위치를 알려주셨고 사람을 시켜 날 여기까지 데려다준 거예요. 오기 전에 돈도 좀 주셨는데... 그 돈은 빚 갚는 데 썼어요.”정말 창피했다. 살면서 지금처럼 이렇게 초라한 적이 없었으니까. 그러나 지석훈한테 쫓겨나지 않고 그가 자신을 데리고 가길 바라는 마음에 그녀는 사실대로 말할 수밖에 없었다.그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그래서 한 푼도 남기지 않았다고? 설마 나한테 다시 데려다 달라는 말은 아니지? 그건 그렇고 잘 곳은 있어?”사실 그녀를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의 말을 들어보면 요즘 세상에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전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그녀는 고개를 숙이며 입을 열었다.“사실 지낼 곳이 없어요. 오늘 집도 압류되고 경매로 넘어갔거든요. 아버지는 지금 응급실에 계시고요...”병원에 들어오면서 병원비를 미리 얼마 정도 냈기 때문에 아직
“저기... 우리 아버지와 거래를 했다면 아버지를 찾아가는 게 어때? 어머니가 돌아가셨으니 당신이 원한다면...”“무슨 소리를 하는 거예요?”그녀는 믿을 수 없는 표정을 지으며 그의 말을 끊어버렸다.그가 이런 말까지 할 줄은 상상도 못 하였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두 사람은 아무 관계도 아니었고 그가 무슨 말을 하든 그건 그의 자유였다. 목이 타들어 갔다. 지금 상황에서 지석훈은 그녀가 잡을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이었다.“아저씨가 원하는 건 내가 당신의 마음을 얻고 당신을 변하게 만드는 거였어요. 지금 난... 정말 다른 방법이 없어요. 아니면 가짜 애인 행세를 하는 건 어떠할까요?”“아저씨가 꼭 결혼을 해야 한다고 하면 그때 가서 다시 생각해 봐요.”“비켜주세요.”그가 입을 열기도 전에 뒤에서 다급한 외침이 들려왔고 누군가 빠르게 달려오고 있었다.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피하려고 했지만 예상치 못하게 누군가 그녀를 향해 달려왔고 미처 피하기도 전에 한쪽으로 넘어졌다. 바닥에 엎어질 줄 알았는데 뜻밖에도 그가 그녀의 허리를 붙잡았다. 두 사람의 시선이 얽히고 그녀는 그의 그윽한 눈을 쳐다보았다.이내, 그가 그녀에게서 손을 뗐다.“병원까지 데려다줄게. 다시 한번 말하지만 난 그럴 생각 없어. 아버지 쪽은 당신이 대충 알아서 넘겨. 아버지한테서 돈을 받은 건 나중에 갚으면 되니까.”말을 마친 그가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겉으로는 차가워 보이지만 실제로 알고 보면 그는 좋은 사람이었다. 그녀가 고개를 숙이며 입을 열었다.“아저씨는 분명히 요구하셨어요. 언제까지 대충 둘러댈 수도 없는 일이에요. 그건 사기꾼이나 다름없는 거니까. 석훈 씨, 그냥 애인인 척하면 안 돼요?”두 사람 사이가 가짜라고 하더라도 지혁진은 뭐라 하지 않을 것이다.지석훈은 아무 말이 없었다.한편, 그가 주차장에서 자신의 차를 발견했을 때, 친구로부터 문자가 왔다. [동문회 참석하는 거 잊지 마. 경성에서 내로라하는 사람들이 다 올 거니까.]강윤슬도 참석할 것이
그가 문지원을 데려다주겠다고 한 건 사실이다. 운전을 그녀가 했어도 병원으로 가야 하는 게 아니겠나?그러나 문지원은 그를 이곳으로 데려왔고 이건 그에 대해 낱낱이 조사를 했다는 걸 말해준다. “운전을 나한테 맡겼으니 당신을 먼저 데려다줘야 할 것 같아서 그랬어요.”“그래?”그가 피식 웃었다.“날 데려다주고 나면 당신은 어떻게 돌아가려고 그래?”말을 하면서 그가 그녀를 향해 가까이 다가갔다.이성과 이렇게 가까이 있어 본 적이 없는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뒤로 물러났다. 게다가 정말 그냥 그를 데려다주고 싶었을 뿐 다른 뜻은 없었다. 그러나... 그는 그녀를 전혀 믿지 못하였다. 한 손을 뻗어 그녀의 어깨를 꽉 잡았다.“묻고 있잖아. 왜 대답이 없어?”대답을 안 하면 그가 자신을 놓아주지 않을 거라는 걸 그녀는 알고 있었다. “내가 운전 안 하면 어떻게 올 생각이었어요? 사실 난... 별다른 뜻 없었어요. 그리고 걱정하지 말아요. 별장 안에 들어갈 생각이 없으니까. 걸어서 돌아가면 돼요.”그가 가볍게 웃었다.“내가 믿을 것 같아?”그가 어디에 사는지도 알고 있는 여자가 그 생각을 하지 않았다는 게 말이 되는가?게다가 이곳부터 병원까지는 차로 몇십 분이 걸리는 거리였다. 걸어서 돌아간다면 최소한 몇 시간은 걸어야 할 것이다.그가 어두운 얼굴로 입을 열었다. “아무리 돈이 없어도 이렇게까지 비굴하게 굴 필요는 없잖아. 여기서 나갔다가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누가 책임지는데?”게다가 지금은 밤이다. 여자가 혼자 한밤중에 몇 시간 동안 거리를 걸어 다닌다는 게 말이 되는 소리인가?그녀는 입술을 오므린 채 아무 말이 없었다. 지석훈의 말을 듣고 나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사실 처음에는 별생각이 없었다.“그럼 돈 좀 빌려줘요. 택시 타고...”“그러니까 처음부터 병원으로 갔으면 됐잖아. 문지원, 그럴 생각이 없었다고? 내가 세 살짜리 어린애로 보이나?”그의 목소리가 점점 더 싸늘해졌다. 그는 세 살짜리 어린애도 아니고 바보도 아니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었던 그녀는 이를 악물었다.말을 마치자마자 그녀가 그에게로 가까이 다가갔다.손을 뻗어 그의 손을 잡으며 진지하게 말했다. “석훈 씨, 나 좀 봐봐요. 나 그렇게 형편없는 여자 아니에요. 우리 사이가 진짜이든 가짜이든 난 다 받아들일 수 있어요.”“오늘 밤은 내 차에서 자.”그 말을 남긴 채 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차에서 내렸다.그의 뒷모습을 쳐다보던 그녀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언젠가 자신이 이 꼴이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한편 지석훈은 한밤중에 강윤슬의 전화를 받게 되었다.핸드폰 너머 그녀의 고통스러운 신음이 들려왔다. “석훈아, 여기 좀 와줄래? 나 배가 너무 아파... 정말...”그녀의 목소리가 그의 마음을 확 낚아챘다.강윤슬을 사랑하는 그는 그녀가 고통받고 상처받는 걸 지켜볼 수가 없었다. 그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임혁수는 어디 간 거야? 옆에 없어? 무슨 일 있으면 임혁수를 찾아야지.”“혁수 씨는 딸한테 갔어. 그리고 넌 의사잖아. 나 지금 병원에 갈 상황이 아니야. 제발 부탁이야...”펑!뭔가 깨지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강윤슬을 신경 안 써도 되지만 의사로서 살려달라는 환자를 외면할 수는 없었다. 결국 그는 강윤슬을 찾아가기로 결정했다.차로 다가가니 운전대에 엎드려 잠이 든 문지원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가 어두운 표정을 지으며 차창을 두드렸다.“왜 여기서 자고 있어? 뒷좌석에서 자면 좀 편할 거 아니야?”그의 목소리에 그녀가 천천히 눈을 떴다. 지석훈을 보고 그녀는 헐레벌떡 차에서 내렸다.차에서 내리자 차가운 밤바람이 불어왔고 검은색 실내복을 입고 있는 그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그녀는 한동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그가 이 늦은 시간에 뛰쳐나올 줄은 몰랐다.“나랑 갈 데가 있어. 일 끝나고 나면 병원에 데려다줄게.”그는 정말 문지원한테 전혀 관심이 없는 듯했다. 가짜 애인 행세를 하자고 제안해도 그는 전혀 그럴 마음이 없어 보였다.아직
그가 비밀번호를 입력하는 걸 보고 문지원은 그가 이곳에 자주 왔다는 것을 눈치챌 수 있었다.‘누구지?’마음속으로 대충 짐작이 가긴 했다. 문이 열리고 지석훈을 따라 안으로 들어가니 거실 소파 위에 웅크리고 있는 강윤슬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가 성큼성큼 다가가서 그녀의 상태를 살폈고 문지원도 빠른 걸음으로 뒤를 따랐다. “맹장염이야. 지금 당장 병원으로 가.”문지원이 가져온 의약 상자는 아예 사용하지 않았다.한편, 문지원을 발견한 강윤슬은 조금 의외였다. 이곳에 오면서 그가 문지원을 데리고 올 줄 몰랐던 모양이다. 지석훈이 그녀를 안아 올리려고 할 때, 강윤슬은 그를 밀어내려고 했다.“지석훈, 너 지금 이런 상황에서 꼭 이렇게까지 해야 해? 이게 무슨 의미가 있는데?”그의 머릿속에는 온통 강윤슬의 몸 상태뿐이었다. 맹장염은 심각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바로 수술을 받아야 했다.“전화를 한 건 선배야. 그리고 선배 지금 맹장염이라서 바로 수술해야 해. 죽고 싶어 환장했어?”그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그는 그녀의 몸부림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억지로 그녀를 안아 들고 밖으로 나갔고 문지원도 빠르게 지석훈의 뒤를 따랐다.지금 상황이라면 문지원이 운전을 해야 하는 상황이다. 강윤슬은 여전히 성질을 부리고 있었다. “그래. 나 죽고 싶어 환장했다. 네가 이렇게 날 화나게 할 줄 알았더라면 너한테 전화 안 했을 거야. 말했잖아. 병원에 안 가겠다고.”“지석훈, 우리는 친구야. 네가 어떻게 나한테 이래?”강윤슬은 문지원의 존재를 신경 쓰고 있는 듯했다. 그러나 지석훈은 지금 강윤슬을 병원으로 데려가 수술을 시킬 생각뿐이었다. 그가 그녀를 뒷좌석에 태우고는 무의식적으로 운전석에 앉으려는데 뜻밖에도 문지원이 이미 운전석에 앉아 있었다. “강윤슬 씨 돌봐요. 운전은 내가 할게요.”강윤슬은 지금 상황이 좋지 않았고 문지원도 별다른 생각이 없었다.그 말에 지석훈은 조금 놀랐다. 문지원은 그와 강윤슬에 대해 훤히 알고 있었다. 사실 그가 운전할
지석훈의 말에 문지원은 점점 더 어리둥절해졌다.그녀를 데리고 강윤슬을 찾아간 사람도 그였다. 이젠 강윤슬을 병원으로 데려왔고 그녀는 아무 짓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가 그녀한테 무슨 볼일이 있겠는가?계속 연기를 하고 싶었다면 아까 그녀를 불러야 했던 게 아닌가? 이제 와서 왜 찾는 것일까?그러나 지석훈이 말을 하기 전에, 문지원은 함부로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그녀는 지석훈의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한동안 말이 없던 그가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돈도 없고 게다가 일반 병실에서 제대로 쉬지도 못하잖아. 그래 가지고 아버지를 돌볼 힘이나 있겠어? 이건 병원 숙소의 열쇠야. 평소에 난 거기 살지 않으니까 가서 씻고 쉬어.”말을 하면서 그가 열쇠 하나를 꺼내 그녀에게 건네주었다. 문지원은 믿을 수 없는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았다.그는 분명 그녀와의 접촉을 꺼렸고 그녀의 제안조차 단칼에 거절해 버렸다. 그러나 열쇠를 그녀한테 주다니... 그녀는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내가 거기 가면 다른 사람들이 오해할 수도 있을 텐데요. 괜찮겠어요?”사실 묻고 싶었던 말은 그녀가 사람들에게 함부로 떠들고 다니는 게 두렵지도 않으냐는 것이었다. 진작부터 그녀의 마음을 꿰뚫고 있던 그가 옅은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그게 무서웠더라면 당신한테 열쇠를 주지도 않았겠지. 어찌 됐든 집안끼리 잘 아는 사이이고 게다가 오늘 당신은 나랑 같이 사람을 구했어.”문지원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는 지석훈의 말뜻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가 그녀한테 열쇠를 내어준 건 그와 함께 사람을 구하러 가서였기 때문이다.솔직히 말하면 강윤슬 때문인 것이다. 이 남자의 마음속에는 영원히 강윤슬이 최우선이었다. 만약 그가 강윤슬과 연인 관계였다면 지혁진의 요구 사항을 그녀는 하나도 해낼 수가 없는 것이었다.그렇다면 지석훈의 마음을 확인하고 물러나는 것이 도리일 것 같았다. 차마 입에 담기조차 어려운 말이었지만 그녀는 결국 현실 앞에서 용기를 냈다.“석훈
현관으로 온 지석훈은 그제야 문지원이 떠올라 망설이다가 걸음을 멈추었다. 문지원은 일부러 핸드폰을 꺼내 보면서 괜찮은 척했지만 속에서는 이상하리만큼 씁쓸함이 밀려왔다.“전 괜찮으니까 얼른 가보세요. 그 사람들도 더 어떻게 찾아오진 못할 거예요. 여기서 더 찾아온다면 범죄가 될 테니 말이에요.”“그래. 무슨 일이 생기면 나한테 바로 연락해.”안색이 조금 풀린 지석훈은 바로 문을 열고 나가버렸다. 집 안에는 문지원 혼자 남게 되었다. 예전에도 집 안에 혼자 남은 적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이번엔 이상하리만큼 외롭고 쓸쓸했다. 창문이 굳게 닫혀 있음에도 자꾸만 어딘가 바람이 새어 나와 그녀의 손발을 차갑게 하는 것 같았다.그녀는 최대한 다른 생각은 하지 않으려고 했고 따듯한 물에 샤워한 후 일찍 쉬려고 했다. 다행히 이날 밤 그녀에게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다음 날이 되자 문지원은 청소 직원을 불러 문과 바닥을 도배한 붉은 페인트를 지워달라고 했다. 그러고 나서 그녀는 바로 공장으로 달려가 구인 상황을 살펴보았다. 결과는 놀랍게도 지원자가 14명이나 모였고 그녀는 보자마자 기뻐했다. 손기영과 같은 마을에 사는 마을 주민이라는 것을 들은 그녀는 바로 손기영에게 물었다.“공장장님 마을 사람들이 정말로 공장에서 일하고 싶다고 했어요?”“당연하지. 마다할 리가 있겠어? 내가 충분히 설명했는데도 일하고 싶다고 찾아온 사람들이야.”손기영은 원래 바쁘게 일하고 있었지만 그녀를 보자마자 하던 일을 멈추고는 걱정이 담긴 잔소리를 해댔다.“문 사장, 앞으로 공장으로는 가끔 찾아오는 것이 좋겠어. 여긴 평소에 작업하느라 공기가 좋지 않아. 우리 직원들도 모자며, 마스크며 꽁꽁 쓰고 일한다고.”문지원은 황급히 손을 올려 아무것도 없는 얼굴을 만졌다.“아, 죄송해요. 깜빡하고 있었어요. 지금 바로 가서 마스크와 작업복으로 갈아입고 올게요!”그녀는 얼른 마스크를 착용했다. 이내 손기영은 그녀를 데리고 막 공장으로 출근한 직원들을 소개해주었다. 남자도 있고 여자도
문지원은 지석훈이 자신에게 부담을 주지 않으려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현유한과 프로젝트를 위해 자신을 팔아버린 주현철, 그리고 현유한에게 당한 폭행과 욕설만 떠올리면 저도 모르게 몸이 덜덜 떨렸다. 현유한이 절대 자신이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을 그녀는 확신할 수 있다.지석훈은 그런 그녀의 모습을 눈치챘지만 그가 묻기도 전에 문지원이 먼저 고개를 들어 말했다.“네. 그럼 부탁드릴게요. 저 좀 데려다주세요.”“그래.”지석훈은 구겼던 미간을 폈다. 그녀가 괜찮다고 말하지 않아도 어차피 그는 며칠 동안 그녀를 돌봐줄 생각이었다. 그녀에게 더는 다른 나쁜 일이 생기길 바라지 않았으니까. 그러나 그녀의 집에 도착한 지석훈은 문 앞 바닥과 현관문에 빨간 페인트로 ‘X 녀'와 ‘쌍 X'라는 욕으로 가득 도배된 것을 보게 되었다. 절로 미간을 찌푸리게 하는 욕설들이었다.그는 더는 모른 척 넘어갈 수 없어 옆에 있던 문지원을 보았다.“요즘에 이상한 사람한테 걸리기라도 한 거야?”그녀가 입을 꾹 다물고 있자 그는 계속 물었다.“혹시 오늘 다친 것과 연관이 있는 거지?”비록 의문문이었지만 그의 어투엔 확신으로 가득했다. 더는 숨길 의미가 없을 정도였다. 더구나 현유한이 이렇듯 빨리 자신의 거처까지 찾아낼 줄은 몰랐다. 문지원은 자신이 절대 다른 사람과 맞설 수 없는 존재임을 알았다. 지금 상황에서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은 직접 믿을 만한 사람을 찾아가 도움을 요청하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은 더는 믿을 수가 없다.문지원이 현재 믿을 수 있는 사람은 지석훈 한 명뿐이었다. 괴로운 눈빛으로 빨간 글씨를 보던 문지원은 이내 시선을 돌려 키를 꺼냈다.“일단 들어가서 얘기해요. 오늘은 주말이고 은숙 아주머니도 쉬는 날이에요.”지석훈은 묵묵히 그녀를 따라 들어갔다. 집 안으로 들어온 문지원은 먼저 겉옷을 벗었다. 그리고는 한숨을 내쉬며 소파에 털썩 앉아 오늘에 있었던 일을 전부 지석훈에게 알려주었다.“전 현철 아저씨가 예전에 우리 아빠와 계속 협력을 이어
지석훈은 문지원이 말을 하지 않자 한숨을 내쉬었다.“일단 상처부터 치료해줄게.”이내 그는 소독약을 들고 돌아왔다. 문지원은 움찔하며 다소 민망해진 어투로 말했다.“크게 다친 것도 아닌데 제가 할게요.”그러나 지석훈은 그녀의 손을 꽉 잡으며 낮게 깔린 목소리로 말했다.“움직이지 마.”문지원은 저도 모르게 그의 말을 따랐다. 지석훈이 들고 있는 면봉이 그녀의 피부에 닿을 때마다 그녀는 어딘가 자극을 받은 것처럼 움찔거렸고 차가운 소독약에 찌릿찌릿한 기분이 들었다. 지석훈은 그런 그녀의 모습을 보더니 미간을 찌푸리며 자신이 약을 아프게 바른 것은 아닌지 생각했지만 문지원은 오히려 자신이 그의 심기를 건드렸다고 오해했다.“미안해요... 일부러 그러는 건 아니에요. 약이 상처에 닿으니까 따가워서 저도 모르게 움찔거린 거예요.”문지원은 원래부터 곱게 자란 부잣집 딸이었다. 문용석은 입원하기 전까지 행여나 자기 딸이 조금이라도 다치게 될까 봐 애지중지하며 길렀던지라 상처에 소독약을 발라보는 것은 태어나서 처음이었다.“그럼 살살 발라줄게.”이렇게 말한 지석훈은 천천히 움직였지만 문지원은 오히려 더 고역이었다. 소독약이 묻은 면봉이 상처에 닿을 때 원래는 그저 따갑기만 했지만 지석훈이 살살 바르고 있으니 깃털로 간질이는 것처럼 간지럽기도 했다.어떤 사람들은 고통을 잘 참을 수 있어도 간지러움은 참지 못했다. 문지원이 바로 이런 부류에 속했다. 결국 참지 못한 그녀는 손을 뻗어 지석훈의 손을 잡아버렸다. 지석훈도 멈추며 고개를 천천히 들었다. 시선이 맞닿은 순간 문지원은 그제야 자신이 바보 같은 짓을 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고 눈을 질끈 감으며 말했다.“그냥 아까처럼 발라주세요. 이건 너무 간지러워요.”그 말을 들은 지석훈은 굽혔던 몸을 일으켜 세우더니 헛기침 두어 번하며 어색한 목소리로 말했다.“미안해. 내가 거기까진 생각을 못 했네. 하지만 네 몸에 있는 상처들은 약 발라야 나을 수 있는 상처들이야. 어떤 부위엔 네 손도 닿지 않을 거고. 아니면 내
“지원 씨와 같은 나이대 여자들은 대부분 명품 가방을 좋아하던데, 아니면 명품 액세서리라던가 말이에요. 누가 허구한 날 공장에만 박혀서 더러운 일꾼들과 대화를 해요. 지원 씨 아버님 책임감이 전부 지원 씨가 떠안고 있으면 너무 불공평하잖아요. 안 그래요?”현유한은 자꾸만 슬금슬금 그녀의 옆으로 자리를 옮겼다. 문지원은 불길한 예감이 들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현 대표님, 전 대표님을 아주 존경해요. 오늘 이렇게 온 것도 사업에 관해 얘기하려고 온 거예요. 만약에 대표님께서는 다른 의도로 오신 거라면 전 이만 가볼게요.”주현철이 소개해준 상대는 정말이지 전혀 믿음직스럽지 않았다. 집으로 돌아간다면 그녀는 반드시 주현철의 연락처를 차단하고 더는 연락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그러나 그녀를 곱게 보내줄 현유한이 아니었다. 겨우 그녀를 속여 이곳까지 나오게 했으니 반드시 원하는 대로 놀아야 직성이 풀렸다. 그렇게 생각한 그는 문지원의 팔을 확 잡아당겼다.“나랑 살면 매달 용돈 1000만 원 줄 수 있는데 뭐하러 힘들게 이리저리 돌아다녀요? 어차피 그 공장도 곧 망할 것 같은 데 시간 낭비는 하지 않는 게 더 좋지 않겠어요?”“이거 놔요!”문지원은 두 눈을 부릅뜨며 발을 들어 그를 차버렸다.‘지금 스폰 제안하는 거야? 꿈 깨라고 해!'그녀에게도 자존심이 있었고 아무리 힘들다고 해도 자기 몸까지 팔 정도는 아니었다.“씨X, 좋게 말할 때 이리와.”현유한은 그녀의 발길질에 앓는 소리를 냈다. 룸 안에는 둘 뿐이었고 그의 힘이 그녀보다 셌던지라 당연히 문지원 정도는 쉽게 잡을 수 있을 거로 생각했다. 여하간에 문지원의 집안 상황도 좋지 않았던지라 문지원의 편을 들어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그가 무슨 짓을 해도 그녀를 지켜줄 사람도 없었다.“얌전히 있는 게 좋을 거야. 만약 내 심기를 거스른다면 이 바닥 사람들에게 절대 너와 협력하지 말라고 할 거고 그렇게 되면 네 그 허접한 공장도 망하게 되겠지!”현유한은 문지원을 노려보며 협박했다. 하지만 문지원
전화를 건 사람은 바로 문정 그룹의 단골 협력 업체 대표인 주현철이었다. 어제 문지원은 그에게도 연락했었지만 주현철이 수중에 진행하고 있는 프로젝트가 없다고 대답했기에 그녀는 결국 전화를 끊을 수밖에 없었다. 비록 오늘 갑자기 전화한 목적이 무엇인지 모르지만 일단은 받았다.“네, 아저씨. 무슨 일이세요?”“지원아, 아저씨가 너한테 프로젝트 소개해주려고 전화했단다. 어제 나한테 연락하지 않았니. 나한테까지 연락했으니 당연히 널 도와줘야지. 안 그러니?”주현철의 목소리가 핸드폰 너머로 들려왔다. 사실 문지원은 그의 연락이 불편하게 느껴졌다. 그녀는 분명 상대에게 협력하겠냐고 물었지만 상대는 그녀를 도와주는 것이라고 하지 않겠는가. 분명 협력은 서로 이익을 바라고 하는 일인데 말이다. 하지만 손님은 왕이었던지라 그녀는 그가 꺼낸 말이 불편하게 느껴진다고 해서 말다툼을 할 수는 없었기에 웃으며 대답했다.“네, 고마워요. 아저씨.”“지금 시간이 있는 거면 같이 식사라도 하자꾸나. 내가 소개해주지. 둘이서 잘 얘기해보고 서로 목적이 같다면 오늘 계약서를 쓰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구나. 얘기가 잘 안 되어도 괜찮단다. 이 아저씨한테 다 방법이 있으니까.”주현철은 손가락으로 책상을 툭툭 치며 말했다. 문씨 가문의 상황을 이미 전해 들어서 알고 있던 그였다. 솔직히 말해서 문지원은 현재 홀로 분투하고 있는 상태였다. 그런 그녀가 어떻게 다시 회사를 일으켜 세울 수 있겠는가. 다만 문지원의 미모는 확실히 예뻤다. 예쁜 얼굴을 가진 여자라면 기회는 얼마든지 있었다.“네, 시간 있어요. 아저씨 주소를 문자로 보내주세요. 제가 지금 바로 갈게요.”문지원은 자리에서 일어나 빠르게 문자로 받은 주소로 향했다. 룸의 문을 열자 안에는 남자 두 명이 앉아 있었다. 한 명은 그녀와 통화했던 주현철이었고 다른 한 명은 처음 보는 사람이었다.“지원아, 내가 너한테 소개하고 싶다던 사람이란다. 이름은 현유한이니까 현 대표라고 부르면 되겠구나.”“아니에요. 저와 문지원 씨는 나
“다들 돌아오지 않겠다고 하지? 이미 떠난 마음을 아무리 설득해봐야 돌아서겠어? 그리고 정말로 돌아온다고 해도 전처럼 열심히 일하려 하지 않을 거라고.”유은진이 옆에서 손기영을 달래주었다.“나도 이 사람들이 돌아오든 말든 신경 쓰지 않아. 하지만 문 사장이 직원만 모이면 바로 이 프로젝트를 시작할 수 있다고 했단 말이야. 일손이 부족한데 어떻게 일을 해? 물론 야근해도 괜찮아. 하지만 사람이 매일 야근하면서 살 수는 없잖아. 누가 버틸 수나 있냐고.”손기영은 점점 커지는 책임감에 어깨가 무거워졌다. 문지원은 이 일을 그에게 맡겼던지라 미리 보너스까지 챙겨주었다. 그랬기에 그는 반드시 맡겨진 임무를 잘 완성해야 했고 문지원의 믿음을 져버려서는 안 되었다.“내 기억에 우리 마을에 일거리 없는 사람들 꽤 되지 않았나? 일당만 받으며 불안정한 생활을 하고 있다고 기억해. 같은 마을 사람들이니 그 사람들이 어떤 사람인지 우리가 잘 알잖아. 그 사람들 중 믿음직스러운 사람들만 골라서 리스트를 만들고 문 사장한테 물어보는 건 어때? 괜찮다면 우리가 그 사람들에게 연락하면 되잖아.”유은진은 고민하는 손기영을 위해 방법을 생각해냈다. 손기영은 바로 유은진이 말한 대로 했다. 지금 상황에서 그가 할 수 있는 건 이것뿐이었으니까. 일단 먼저 공장부터 다시 가동하는 것이 먼저였다....다음 날 아침 일찍 문지원은 공장으로 왔다. 공장은 어제보다 더 깨끗했고 먼지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청소 업체를 부르지 않았다.의아했지만 문지원은 일단 발을 들어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손기영이 사람들을 이끌고 청소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들은 전에도 공장 안에 있는 설비들을 다루며 일해야 했던지라 설비에 진심이었다. 그랬기에 청소하는 것도 힘이 났다.“아저씨, 뭐 하세요?”“아, 문 사장. 이 사람들은 오늘부터 일하고 싶다고 한 우리의 직원들이야. 다들 할 일이 없는 거 같기에 일단 공장 청소 좀 하자고 했어. 그럼 나중에 일할 때도 편하잖아.”손기영은 들고 있던
문지원은 여진 그룹과 함께 진행하는 프로젝트를 손기영에게 자세하게 알려주었다. 손기영은 공장장으로 오랫동안 일했었기에 공장의 시스템에 아주 잘 알고 있었고 프로젝트를 듣자마자 그녀에게 자기 생각을 말해주었다.“문 사장, 예전에 일하던 직원 절반만 불러와도 정해진 기간에 완성할 수 있을 거야. 그런데 만약에 다른 사람들도 다시 돌아오고 싶다고 하면 어떻게 하려고? 받아줄 거야?”“당연하죠. 아저씨, 저희가 함께 일한 시간이 얼마인데요. 이번에 회사에 이렇게 큰 곤란이 들이닥치고 월급도 제대로 주지 못하는데도 남아서 함께 일하고 싶다는데 당연히 받아들여야죠. 공장엔 앞으로 이 프로젝트 말고도 다른 프로젝트도 있을 거예요. 그분들만 원하신다면 저는 전부 받아줄 거예요. 사람이 적은 것보다 많은 게 더 낫지 않겠어요?”문지원은 이미 미래까지 생각해두었다. 여진 그룹과의 프로젝트는 지석훈 덕에 뺏어올 수 있었던 것이었기에 급한 불부터 끄고 공장을 성공적으로 다시 가동한다면 다시 회사를 일으켜 세울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공장이 계속 정상적으로 운영되려면 일시적인 프로젝트보다는 장기적으로 프로젝트를 협상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했다. 평생 이 하나의 프로젝트만 바라면서 살 수는 없지 않은가.“알겠어. 문 사장 말만 들어도 힘이 솟아나는구먼. 앞으로 난 문 사장이 아니면 일하지 않을 거야.”손기영은 손을 올려 가슴을 치면서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문지원은 정말이지 문용석을 닮아도 너무 닮았다. 게다가 손기영은 문지원이 회사를 이끌어가면 어쩌면 전보다 훨씬 더 잘 되리라는 예감이 들었다.문씨 가문에서 나온 문지원은 단 한 순간도 쉰 적 없었다. 공장의 일은 손기영에게 맡길 수 있다고 해도 프로젝트를 끌어오는 일은 그녀가 해야 했다.그녀는 이번에 문용석의 사무실로 가 예전에 협력했던 협력 업체의 리스트를 찾아내곤 일일이 전화를 걸어 물었다. 문용석은 쓰러지기 전에 큰 프로젝트든 작은 프로젝트든 전부 직접 관리했고 질량도 꼼꼼히 살폈던지라 협력 업체 쪽에서 명성이
‘이렇게나 빨리 월급을 준다고?'돈을 받은 손기영은 현실감이 떨어져 얼떨떨한 얼굴로 보았다.“지원아, 이 돈은 어디서 난 거니?”“아저씨, 사실 제가 최근에 프로젝트를 하고 있는데 협력처 쪽에서 자금을 투자했어요. 그래서 받자마자 밀린 월급을 주러 온 거예요. 저도 아저씨랑 다른 직원분들의 형편이 안 좋다는 거 알고 있고 더는 미뤄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어요.”문지원은 차근차근 손기영에게 설명해주었다.“그리고 월급 말고도 물어볼 것이 있어요. 혹시 다른 곳으로 취직하셨어요? 그런 게 아니라면 다시 공장으로 돌아와 일할 생각 있으세요? 아저씨가 돌아오셔도 여전히 공장장으로 일하실 거예요. 공장에 새로운 주문이 들어왔는데 직원이 부족하거든요.”갑작스러운 소식에 손기영은 너무도 기쁘면서도 놀랐다.“공장이 이렇게나 빨리 다시 돌아간다고?”그는 확실히 문정 그룹이 다시 일어설 거라고 생각했지만 이렇게나 빨리 일어설 줄은 몰랐고 그것도 문지원의 손에서 다시 일어서게 될 줄은 몰랐다. 겉보기엔 한없이 연약한 문지원이 파산한 기업을 다시 회생하고 있을 줄은 전혀 몰랐다.“네. 전 전에 일하시던 분들이 계속 일했으면 해서요. 어쨌든 그동안 일한 시간이 있으니 경험도 쌓였잖아요. 만약에 정말 싫어서 다들 거부한다면 저도 이해하니까 괜찮아요. 신입을 뽑아서 다시 일 가르쳐주면 돼요.”“난 당연히 좋지. 회장님도 나한테 얼마나 잘해주셨는데. 너도 돈이 생기자마자 우리 밀린 월급부터 주려고 온 거잖아. 난 내일부터 바로 출근할 수 있단다.”손기영은 자신의 허벅지를 ‘탁' 치면서 말했다. 안 그래도 취직이 잘되지 않아 속이 타던 때였다. 그런데 문지원이 다시 일하러 오라고 하니 어찌 기쁘지 않을 수 있겠는가.그는 돈 봉투에서 40만 원 정도 세더니 꺼내 문지원에게 돌려주었다.“지원아, 아니지. 문 사장, 난 월급만 받을게. 우리 사이에 이자라니. 당연히 일한 만큼 받아야 하지 않겠어? 그러니 이 돈은 더 받을 수 없어.”문지원은 웃으며 그를 보았다. 예전부터 그
여자는 문지원을 본 후 딱히 반기는 기색이 아니었고 그저 옆으로 길을 내어주며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들어와요.”“지원아, 네가 여긴 어쩐 일이니?”손기영은 아주 열정적인 모습으로 문지원을 반기며 차도 따라주고 과일도 내주었다. 옆에 있던 그의 아내는 보면 볼수록 짜증이 치밀었다.“그 체리는 해수를 위해 남겨놓은 건데 그걸 왜 꺼내. 지금 체리가 얼마나 비싼지 알고는 있어?”“집에 손님이 왔는데 아무것도 대접하지 말라고? 곧 식사 시간이니까 당신은 얼른 가서 상이나 차려줘.”손기영은 자신의 아내에게 눈빛을 보냈다. 그도 문지원이 자신을 왜 찾아온 것인지 모른다. 어쩌면 그에게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서 찾아왔을 수도 있다. 어쨌든 손기영은 이렇게 반겨주는 것 외엔 그녀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이 없었다. 밀린 한 달 월급은 나중에 천천히 받아도 되었지만 영원히 안 받을 수는 없다.나중에 문씨 가문에 다시 돈이 생겼을 때 받을 생각이었다. 사람이 아무리 힘들고 상황이 어렵다고 해도 양심도 없이 근본을 잃어서는 안 되었으니까. 그는 문지원을 보며 말했다.“오늘은 아저씨네 집에서 저녁이라도 먹고 가. 아저씨 집은 너도 보다시피 그저 그래. 음식도 좋은 걸 내어줄 수 없지만 그래도 싫어하지는 말아줬으면 좋겠구나.”문지원은 얼른 고개를 저었다.“아저씨 그런 말씀은 하지 마세요.”그녀의 집안은 손기영의 상황보다 더 못했기에 그녀가 감히 남의 집을 평가할 자격이 없었다. 더구나 손기영은 그녀에게 월급에 대한 말은 단 한 번도 꺼내지 않았으니 오히려 그에게 고마워해야 했다.“그래. 얼른 앉아. 난 집사람이 어떤 음식을 만들 수 있나 주방으로 가서 확인하고 오마.”손기영은 자기 아내 손을 잡고 주방으로 들어갔다. 문이 닫히자마자 그의 아내라 비꼬아 말했다.“하이고, 공장장님. 아주 그냥 세기의 대인배네. 월급을 달라고 하지 못할망정 지금 나더러 상까지 차려서 바치라는 거야? 참나, 대단하네. 대단해!”여자는 그를 향해 엄지를 척 들며 비꼬았다. 손기영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