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문지원을 데려다주겠다고 한 건 사실이다. 운전을 그녀가 했어도 병원으로 가야 하는 게 아니겠나?그러나 문지원은 그를 이곳으로 데려왔고 이건 그에 대해 낱낱이 조사를 했다는 걸 말해준다. “운전을 나한테 맡겼으니 당신을 먼저 데려다줘야 할 것 같아서 그랬어요.”“그래?”그가 피식 웃었다.“날 데려다주고 나면 당신은 어떻게 돌아가려고 그래?”말을 하면서 그가 그녀를 향해 가까이 다가갔다.이성과 이렇게 가까이 있어 본 적이 없는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뒤로 물러났다. 게다가 정말 그냥 그를 데려다주고 싶었을 뿐 다른 뜻은 없었다. 그러나... 그는 그녀를 전혀 믿지 못하였다. 한 손을 뻗어 그녀의 어깨를 꽉 잡았다.“묻고 있잖아. 왜 대답이 없어?”대답을 안 하면 그가 자신을 놓아주지 않을 거라는 걸 그녀는 알고 있었다. “내가 운전 안 하면 어떻게 올 생각이었어요? 사실 난... 별다른 뜻 없었어요. 그리고 걱정하지 말아요. 별장 안에 들어갈 생각이 없으니까. 걸어서 돌아가면 돼요.”그가 가볍게 웃었다.“내가 믿을 것 같아?”그가 어디에 사는지도 알고 있는 여자가 그 생각을 하지 않았다는 게 말이 되는가?게다가 이곳부터 병원까지는 차로 몇십 분이 걸리는 거리였다. 걸어서 돌아간다면 최소한 몇 시간은 걸어야 할 것이다.그가 어두운 얼굴로 입을 열었다. “아무리 돈이 없어도 이렇게까지 비굴하게 굴 필요는 없잖아. 여기서 나갔다가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누가 책임지는데?”게다가 지금은 밤이다. 여자가 혼자 한밤중에 몇 시간 동안 거리를 걸어 다닌다는 게 말이 되는 소리인가?그녀는 입술을 오므린 채 아무 말이 없었다. 지석훈의 말을 듣고 나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사실 처음에는 별생각이 없었다.“그럼 돈 좀 빌려줘요. 택시 타고...”“그러니까 처음부터 병원으로 갔으면 됐잖아. 문지원, 그럴 생각이 없었다고? 내가 세 살짜리 어린애로 보이나?”그의 목소리가 점점 더 싸늘해졌다. 그는 세 살짜리 어린애도 아니고 바보도 아니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었던 그녀는 이를 악물었다.말을 마치자마자 그녀가 그에게로 가까이 다가갔다.손을 뻗어 그의 손을 잡으며 진지하게 말했다. “석훈 씨, 나 좀 봐봐요. 나 그렇게 형편없는 여자 아니에요. 우리 사이가 진짜이든 가짜이든 난 다 받아들일 수 있어요.”“오늘 밤은 내 차에서 자.”그 말을 남긴 채 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차에서 내렸다.그의 뒷모습을 쳐다보던 그녀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언젠가 자신이 이 꼴이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한편 지석훈은 한밤중에 강윤슬의 전화를 받게 되었다.핸드폰 너머 그녀의 고통스러운 신음이 들려왔다. “석훈아, 여기 좀 와줄래? 나 배가 너무 아파... 정말...”그녀의 목소리가 그의 마음을 확 낚아챘다.강윤슬을 사랑하는 그는 그녀가 고통받고 상처받는 걸 지켜볼 수가 없었다. 그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임혁수는 어디 간 거야? 옆에 없어? 무슨 일 있으면 임혁수를 찾아야지.”“혁수 씨는 딸한테 갔어. 그리고 넌 의사잖아. 나 지금 병원에 갈 상황이 아니야. 제발 부탁이야...”펑!뭔가 깨지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강윤슬을 신경 안 써도 되지만 의사로서 살려달라는 환자를 외면할 수는 없었다. 결국 그는 강윤슬을 찾아가기로 결정했다.차로 다가가니 운전대에 엎드려 잠이 든 문지원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가 어두운 표정을 지으며 차창을 두드렸다.“왜 여기서 자고 있어? 뒷좌석에서 자면 좀 편할 거 아니야?”그의 목소리에 그녀가 천천히 눈을 떴다. 지석훈을 보고 그녀는 헐레벌떡 차에서 내렸다.차에서 내리자 차가운 밤바람이 불어왔고 검은색 실내복을 입고 있는 그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그녀는 한동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그가 이 늦은 시간에 뛰쳐나올 줄은 몰랐다.“나랑 갈 데가 있어. 일 끝나고 나면 병원에 데려다줄게.”그는 정말 문지원한테 전혀 관심이 없는 듯했다. 가짜 애인 행세를 하자고 제안해도 그는 전혀 그럴 마음이 없어 보였다.아직
그가 비밀번호를 입력하는 걸 보고 문지원은 그가 이곳에 자주 왔다는 것을 눈치챌 수 있었다.‘누구지?’마음속으로 대충 짐작이 가긴 했다. 문이 열리고 지석훈을 따라 안으로 들어가니 거실 소파 위에 웅크리고 있는 강윤슬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가 성큼성큼 다가가서 그녀의 상태를 살폈고 문지원도 빠른 걸음으로 뒤를 따랐다. “맹장염이야. 지금 당장 병원으로 가.”문지원이 가져온 의약 상자는 아예 사용하지 않았다.한편, 문지원을 발견한 강윤슬은 조금 의외였다. 이곳에 오면서 그가 문지원을 데리고 올 줄 몰랐던 모양이다. 지석훈이 그녀를 안아 올리려고 할 때, 강윤슬은 그를 밀어내려고 했다.“지석훈, 너 지금 이런 상황에서 꼭 이렇게까지 해야 해? 이게 무슨 의미가 있는데?”그의 머릿속에는 온통 강윤슬의 몸 상태뿐이었다. 맹장염은 심각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바로 수술을 받아야 했다.“전화를 한 건 선배야. 그리고 선배 지금 맹장염이라서 바로 수술해야 해. 죽고 싶어 환장했어?”그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그는 그녀의 몸부림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억지로 그녀를 안아 들고 밖으로 나갔고 문지원도 빠르게 지석훈의 뒤를 따랐다.지금 상황이라면 문지원이 운전을 해야 하는 상황이다. 강윤슬은 여전히 성질을 부리고 있었다. “그래. 나 죽고 싶어 환장했다. 네가 이렇게 날 화나게 할 줄 알았더라면 너한테 전화 안 했을 거야. 말했잖아. 병원에 안 가겠다고.”“지석훈, 우리는 친구야. 네가 어떻게 나한테 이래?”강윤슬은 문지원의 존재를 신경 쓰고 있는 듯했다. 그러나 지석훈은 지금 강윤슬을 병원으로 데려가 수술을 시킬 생각뿐이었다. 그가 그녀를 뒷좌석에 태우고는 무의식적으로 운전석에 앉으려는데 뜻밖에도 문지원이 이미 운전석에 앉아 있었다. “강윤슬 씨 돌봐요. 운전은 내가 할게요.”강윤슬은 지금 상황이 좋지 않았고 문지원도 별다른 생각이 없었다.그 말에 지석훈은 조금 놀랐다. 문지원은 그와 강윤슬에 대해 훤히 알고 있었다. 사실 그가 운전할
지석훈의 말에 문지원은 점점 더 어리둥절해졌다.그녀를 데리고 강윤슬을 찾아간 사람도 그였다. 이젠 강윤슬을 병원으로 데려왔고 그녀는 아무 짓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가 그녀한테 무슨 볼일이 있겠는가?계속 연기를 하고 싶었다면 아까 그녀를 불러야 했던 게 아닌가? 이제 와서 왜 찾는 것일까?그러나 지석훈이 말을 하기 전에, 문지원은 함부로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그녀는 지석훈의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한동안 말이 없던 그가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돈도 없고 게다가 일반 병실에서 제대로 쉬지도 못하잖아. 그래 가지고 아버지를 돌볼 힘이나 있겠어? 이건 병원 숙소의 열쇠야. 평소에 난 거기 살지 않으니까 가서 씻고 쉬어.”말을 하면서 그가 열쇠 하나를 꺼내 그녀에게 건네주었다. 문지원은 믿을 수 없는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았다.그는 분명 그녀와의 접촉을 꺼렸고 그녀의 제안조차 단칼에 거절해 버렸다. 그러나 열쇠를 그녀한테 주다니... 그녀는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내가 거기 가면 다른 사람들이 오해할 수도 있을 텐데요. 괜찮겠어요?”사실 묻고 싶었던 말은 그녀가 사람들에게 함부로 떠들고 다니는 게 두렵지도 않으냐는 것이었다. 진작부터 그녀의 마음을 꿰뚫고 있던 그가 옅은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그게 무서웠더라면 당신한테 열쇠를 주지도 않았겠지. 어찌 됐든 집안끼리 잘 아는 사이이고 게다가 오늘 당신은 나랑 같이 사람을 구했어.”문지원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는 지석훈의 말뜻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가 그녀한테 열쇠를 내어준 건 그와 함께 사람을 구하러 가서였기 때문이다.솔직히 말하면 강윤슬 때문인 것이다. 이 남자의 마음속에는 영원히 강윤슬이 최우선이었다. 만약 그가 강윤슬과 연인 관계였다면 지혁진의 요구 사항을 그녀는 하나도 해낼 수가 없는 것이었다.그렇다면 지석훈의 마음을 확인하고 물러나는 것이 도리일 것 같았다. 차마 입에 담기조차 어려운 말이었지만 그녀는 결국 현실 앞에서 용기를 냈다.“석훈
“아버지가 이러시는 것도 잠깐뿐일 거야. 결과가 없으면 자연스럽게 포기하시겠지. 난 날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사랑했었어. 그게 얼마나 힘든 건지는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고. 우리 두 사람은 서로 아무 감정도 없는 사람들이잖아.”그는 사랑이 없는 결혼을 원치 않는다. 그 결혼의 최악은 아이가 생기는 것이겠지. 문지원이 먼저 양육권 포기 각서를 쓰겠다고는 했지만 엄마가 없는 아이가 과연 행복하게 자랄 수 있을까? 나중에 아이가 엄마를 원하게 된다면 그땐 어떡해야 할지?다른 여자한테 엄마라고 부르게 할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아이 때문에 문지원과 계속 함께한다면 그건 두 사람한테 너무 잔인한 일이었다. 그래서 처음부터 확실히 선을 긋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그녀는 그가 이렇게 단도직입적으로 말할 줄 몰랐다.그 말에 더 이상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그녀가 모든 것을 포기하기로 할 때, 그는 솔직하게 자신의 마음을 털어놓았다. 아무리 아버지가 재촉하더라도 자신은 그 뜻에 맞출 생각이 없다고...그럼 그녀는... 문지원은 한동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그럼 돈이라도 좀 빌려줄래요? 나중에 꼭 갚을게요.”“정말 방법이 없어서 그래요. 주변에 날 도와주려는 사람이 없어요. 아저씨가 나한테 많은 요구를 했지만 아저씨는 날 도와주셨어요.”지혁진도 지석훈과 마찬가지로 작은 돈이라면 도울 수 있었다. 그러나 액수가 이렇게 크니 그도 어쩔 수가 없었다. 재산을 다 내놓을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그러나 만약 그녀가 지석훈의 마음을 얻어 그의 아내가 된다면 그럼 그녀도 지씨 가문의 사람이 되는 것이었고 한 가족이라면 당연히 무조건 도울 것이다. 그래서 지혁진이 그 제안을 했을 때, 그녀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제안을 받아들였다. 시작이 반이라고 지석훈의 마음을 얻으려면 쉽지 않을 것이라고 예상은 했었다. 그러나 그가 자신을 병원에 데려다주고 숙소의 열쇠와 돈까지 줄 줄은 몰랐다. 방금 만난 낯선 사람에게 그가 이렇게까지 하는 걸 보면 그는 좋은
그는 강윤슬이 수술실에서 나오기를 기다렸고 수술을 마치고 나온 그녀의 곁에서 한 발짝도 떠나지 않고 그녀를 지키고 있었다.몇 시간 뒤, 강윤슬의 정신이 돌아왔다.그녀는 자신이 죽은 줄 알았던 모양이다.“여기가 어디지?”코를 찌르는 소독액 냄새에 머리가 어지러웠고 주위의 낯선 환경도 그녀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지석훈이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병원이야. 맹장염 때문에 수술을 받았고.”그의 목소리를 듣고 나서야 강윤슬은 자신이 아직 살아있음에 안심이 되었다.그나저나 지석훈이 옆을 지키고 있다는 건 주변에 다른 사람이 있다는 건가?다른 여자를 그녀의 집까지 데리고 왔으니...그녀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 모습에 그가 차갑게 입을 열었다.“그만 봐. 병실에는 나 혼자 있으니까. 그리고 여긴 VIP 병실이야.”강윤슬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병원에 오는 것도 좋아하지 않았고 그녀가 병원에 왔다는 것을 다른 사람에게 알리고 싶지도 않았다.“임혁수한테 전화해. 와서 돌봐달라고.”그가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차가운 그의 모습에 강윤슬은 미간을 찌푸렸다.“나 금방 수술받고 깨어난 사람이야. 정말 나한테 왜 그래? 말했잖아. 혁수 씨는 딸한테 갔다고.”“그럼 부모님한테 전화해. 아니면 가사 도우미한테 전화하든가.”그의 말투는 여전히 차가웠고 다정했던 눈빛도 사라진 지 오래였다. 그런 그의 모습이 낯설게만 느껴졌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그가 지금 이러는 건 그녀의 관심을 끌기 위한 것이 아니겠나?그녀는 아픈 몸을 이끌고 일어나 앉았다. “지석훈, 꼭 이래야 해? 나랑 혁수 씨 사이에 대해서는 너도 잘 알고 있잖아. 그리고 그들에게 알릴 상황이었다면 너한테 전화를 하지도 않았어. 혁수 씨의 말이 맞아. 내가 프러포즈를 거절해서 네가 지금 나한테 이러는 거잖아...”임혁수의 얘기를 하는 그녀의 말투가 한결 부드러워졌다.그녀한테 지석훈은 늘 비열하고 파렴치한 인간이었고 해명을 하더라도 아무 소용이 없었다.그가 조롱이 가득한 웃
그가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자신이 강윤슬한테 이런 말투로 얘기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그도 마음이 편치 않았다.“네 진심을 짓밟은 적 없어. 네가 한 프러포즈, 난 한 번도 받아들인 적 없고. 만약 나였다면 처음 거절당했을 때 너랑 거리를 두었을 거야. 나한테 넌 친구야. 그런데 네가 어떻게 나한테 이래? 어떻게 나한테 이런 말을 하냐고? 프러포즈를 거절한 게 그렇게 잘못이냐? 어떻게 다른 여자를 데리고 와서 내 앞에서 연기를 해?”그녀의 목소리는 힘이 없었고 그를 바라보는 눈빛에 슬픔이 담겨 있었다.지석훈은 차갑게 콧방귀를 뀌었다. “잘못은 아니지. 선배한테 그럴 의무도 없고. 하지만 선배의 부름에 나도 꼭 달려가야 한다는 의무도 없어. 그리고 허튼 생각 하지 마. 딴 여자랑 연기 같은 거 한 적 없으니까. 나랑 함께 선배 집으로 갔던 그 여자는 내 약혼녀야.”“이젠 무사하니까 핸드폰 옆에 두고 갈게. 무슨 일 있으면 가족들한테 전화를 하든가 아니면 간호사나 의사 불러.”말을 마치고 그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병실을 떠났다. 그녀는 그가 단지 화가 났을 뿐, 조금 있으면 다시 돌아올 거라고 생각했다. 그가 자신을 이렇게 내버려둘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하지만 시간은 일분일초가 흘렀고 그는 결국 돌아오지 않았다.그가 이번에 이렇게 화를 낼 줄은 몰랐다. 한편, 문지원은 밤에 기숙사에 가지 않고 일부러 출근 시간에 맞춰 낮에 찾아갔다.사람들이 그녀가 열쇠를 가지고 숙소 문을 여는 모습을 보게 된다면 한눈에 눈치챌 수 있으니까. 이내 동료들이 지석훈한테 문자를 보내왔다.[지 선생님, 언제 여자 친구가 생긴 거예요?][숙소에 오신 그 여자분 되게 괜찮아 보이던데요. 결혼은 언제쯤 하실 예정이에요?][지 선생님, 두 분 완전 잘 어울리는 것 같아요.]...이와 비슷한 문자가 수도 없이 쏟아졌다. 문지원에 저녁에 숙소로 갈 줄 알았지 이 시간에 갈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문지원은 여전히 포기하지 않고 그의 마음을
좋은 마음에서 갈 곳이 없는 그녀한테 숙소의 열쇠를 내어준 것이었다. 그렇게 말하면 문지원이 단념하고 물러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뜻밖에도 그녀는 그를 동아줄로 여기고 있었다.생각하면 할수록 화가 치밀어 올랐다.“이제야 알겠어. 왜 다들 문씨 집안을 나 몰라라 하는지. 당신네 문씨 집안 사람들은 하나같이 못된 사람들뿐이군.”그가 화를 낼 줄은 알았지만 이렇게까지 화를 낼 줄은 몰랐다. 그녀에 대해 뭐라 하는 건 상관없지만 가족까지 건드리는 건 참을 수가 없었다. 그녀도 기분이 상했다.“알아요. 내가 이러는 거 잘못된 일이라는 거. 하지만 방법이 없다고 했잖아요. 그래도 우리 가족한테까지 뭐라 하지는 말아요.”“그렇게 좋은 사람들이 왜 당신한테만 거액의 빚을 남겼을까? 왜 당신 오빠는 행방불명이 된 거야?”이렇게 상처 주는 말을 하고 싶지 않았지만 지나친 그녀의 행동에 화가 났다. 좋은 마음에서 도와주려고 한 건데 결과는?단념하기는커녕 그녀는 일부러 모든 사람이 두 사람의 사이를 오해하게 만들었다. 지금까지 이렇게 화가 난 적이 없었고 여자한테 이렇게 모진 말을 해본 적도 없다. 문지원이 그의 호의를 짓밟은 것이다.그의 말에 그녀 또한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러나 아버지를 믿고 싶었다. 아버지는 문씨 집안을 위해 위험을 무릅쓴 것이고 뜻밖에 손해를 보고 거액의 빚을 지게 된 것이다. 그리고 오빠는 평소에 그녀한테 잘해주었고 책임감이 있는 사람이었다. 지금 행방불명이 된 건 분명 뭔가 다른 이유가 있을 것이다.“아니요. 그럴만한 이유가 있을 거예요. 아까 숙소에서 사진도 찍어 아저씨한테 보냈어요. 아저씨는 날 믿고 있더라고요. 10억을 나한테 주셨고 당신의 아이를 가지게 된다면 우리 집 빚을 다 갚아주실 거라고 했어요.”지혁진의 제안이 너무 유혹적이라 거부할 수가 없었다. 뻔뻔스러운 여자라고 생각해도 좋았다. 막다른 골목에 몰린 상황에서 그녀한테는 이게 최선의 선택이니까.그녀는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런 모습을 보며 지석훈
최지후는 피식 웃었다. 눈앞의 여자가 순수하고 귀여웠다. “여울 씨 생각은?”여울은 그가 최주하와 생김새는 비슷하지만 최주하에 비하면 어리석고 오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쉽게 손에 잡히다니, 너무 시시한데...’잠깐 망설이던 그녀는 손을 떨며 치마 뒤에 있는 지퍼를 열었다. 지퍼를 반쯤 내리자 매끄럽고 하얀 등이 훤히 드러났고 그가 바로 손을 뻗어 그녀의 손을 잡았다.“여기서 말고.”모처럼 마음에 드는 여자를 만났으니 여기서 대충 관계를 가지고 싶지는 않았다.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던 그녀는 순순히 그를 따라 나갔다. 한편, 최주하는 핸드폰에 올라온 사진을 보고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최지후가 이렇게 쉽게 걸려들 것이라는 건 진작부터 예상하고 있던 일이라 전혀 놀라지 않았다. 남들 앞에서 고개를 들고 다닐 수 없는 사생아의 신분이니 좋은 여자를 만나봤을 리가 있겠는가?그는 최지후 자신보다 최지후에 대해 더 잘 알고 있었다. 잠시 후, 그가 핸드폰을 내려놓았다....캐슬 호텔.룸 안, 문지원은 두 손을 꼭 잡은 채 초조한 얼굴로 앉아 있었다. 그녀는 가끔 고개를 숙이고 손목시계를 확인했고 약속된 시간을 이미 훨씬 넘긴 시각이었다. 미팅을 하기로 했던 협력자가 나타나지 않자 그녀는 저도 모르게 얼굴을 심하게 찌푸렸다. 얼마 후, 문 앞에서 자물쇠가 비틀리는 소리가 들렸고 검은색 긴 드레스를 입은 차가운 여인이 안으로 들어왔다. “문 대표님, 죄송해요. 제가 좀 늦었네요.”문지원은 바로 고개를 들었고 마음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번 협력은 그녀에게 정말 중요한 것이었다. 오랜 기다림에 대한 분노는 온데간데없고 눈앞의 사람이 약속 장소에 나타난 것을 다행으로 여겼다. 문지원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저도 온 지 얼마 되지 않았어요.”말을 하면서 문지원은 손을 뻗어 의자를 끌어당겼다. 그러나 눈앞의 여자는 자리에 앉지 않고 그녀를 쳐다보며 차갑게 웃었다 .“문지원 씨, 저랑 협력하고 싶은 거예요?”
방 안에 들어온 여자들은 저마다 다른 모습과 옷차림을 하고 있었지만 모두 예외 없이 눈빛 속에 욕망이 가득했다.최지후는 여자들을 한번 스쳐본 후 흥미를 잃은 듯한 표정을 지었다. 이런 여자들은 흔히 보던 사람들이라 특별할 게 없었다.그는 차가운 태도로 매니저를 쳐다보며 물었다.“이게 네가 말한 새로 온 애들이야?”술집 매니저는 순간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최지후는 그의 중요한 고객이었기에 실수하면 큰일 날 수 있었다.“도련님 혹시 마음에 안 드시나요?” 술집 매니저는 어색하게 웃으며 말을 꺼냈다.최지후는 잠시 미소를 지으며 아무 말 없이 그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러더니 갑자기 테이블에 놓인 술잔을 들어 매니저의 얼굴에 확 뿌렸다.“너 지금 나 무시하는 거지? 감히 이런 것들로 대충 넘기려고?”술집 매니저는 잠시 멈칫하다가 곧바로 반응했다. 그는 얼굴을 닦으며 더욱 기를 쓰고 웃음을 지었다. “그럴 리가요. 절대 아니에요. 제가 어떻게 감히 그러겠어요. 도련님 마음에 안 드신다면 바로 다른 사람들로 교체해 드릴게요.”그때 문이 열리며 한 여자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여기 802호 맞나요?”최지후는 그 목소리에 곧바로 반응했다. 그는 목소리가 나는 쪽을 바라봤고 그곳에 눈길이 멈췄다.여자는 흰색 긴 원피스를 입고 있었고 검은 머리는 어깨 위로 흘러내려 있었다. 얼굴에는 화장기가 전혀 없었지만 자연스러우며 청순해 보였다. 무엇보다 그녀의 눈에는 불안하고 긴장된 기색이 가득했다.그녀는 신임임이 분명했다.최지후는 술집 매니저를 놓으며 말했다. “이런 사람이 있으면 진작에 데려왔어야지. 왜 이제야 데려왔어? 좀 더 일찍 데려왔으면 이런 일도 없었을 텐데.”술집 매니저는 최지후가 눈앞의 여자를 매우 만족스러워하는 것을 알아챘다. 그는 머릿속으로 그가 데려온 사람 중에 이 여자가 있었나 하고 잠시 생각해 보았다.그래도 그는 별로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어쨌든 최지후가 만족하면 그게 제일 중요했다.그는 재치 있게 말했다.“좋은 건 항
여자는 잠시 멈칫하다가 최주하가 너무 많은 금액에 당황했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급히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저도 알아요. 이 돈이 적은 금액은 아니라는 거... 하지만 저는...”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최주하가 말을 끊었다. 그는 다소 불쾌한 듯 여자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2억만 있으면 뭐든지 할 거야?”여자는 그 말에 희망의 불씨가 다시 피어났다. 그녀는 서둘러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저 뭐든지 할 수 있어요.”최주하는 입가에 미소를 띠며 말했다. “좋아. 도와줄 수는 있어. 그런데 너도 나를 위해 뭔가를 해야 해.”여자는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일이든지 할 수 있어요.”그러자 그녀는 부끄러운 듯 얼굴을 붉히며 일어나서 최주하의 옷을 풀려고 손을 뻗었다.최주하는 눈살을 찌푸리며 여자의 손목을 잡으며 제지했다.“뭐 하는 짓이야?”그의 눈에 드러난 혐오감에 여자는 순간 얼어붙었다. 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제가 필요하지 않으신가요?”이건 서로가 알고 있는 은유적인 표현이었다. 여자의 의도는 두 사람 모두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여자는 지금 자신이 가진 것 중에서 최주하가 관심을 가질 만한 것은 이 몸밖에 없다고 생각했다.“확실히 네 도움이 필요해. 하지만 그 대상은 내가 아니라 내 동생이야.”그렇게 말하며 최주하는 휴대전화에서 한 장의 사진을 보여주었다. 사진 속 남자는 최주하와 어느 정도 닮아 보였다.“내 동생이야. 내 동생을 유혹해서 그 옆에 남아있는 거야.”최주하는 간결하게 설명했다.여자는 혼란스러워하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조금은 꺼리는 눈치였다. 그녀의 목표는 분명 최주하였기 때문이다.최주하는 그녀의 태도를 보고 눈빛이 차갑게 변했다. “원하지 않는다면 그냥 나가. 강제로 시킬 생각은 없어.”“저 할게요. 하겠습니다.”여자는 곧장 마음을 다잡으며 간절히 말했다.최주하는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말했다. “실망하게 하지 마.”최주하의 말이 끝나자마자 여자의 휴대전화에는 1억이 입
그 여자가 최주하를 붙잡을 수만 있다면 사실 손해 볼 것도 없었다. 최주하는 웃음을 참으며 말했다. “이 클럽에 오는 사람들은 다 대단한 사람들이야. 네가 진짜 누군가를 붙잡고 싶으면 밖에서 아무나 찾으면 돼. 나는 네 구세주가 아니야. 더군다나 남 도와줄 마음도 없어.”하지만 그 여자는 최주하를 꼭 붙잡고 놓지 않았다.그는 저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다. 얼굴은 이미 불쾌하게 굳어 있었다.그제야 그는 여자가 검은색 깊은 V넥 드레스를 입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여자는 정말 마른 체형이었지만 피부는 하얗고 매력적이었다.최주하는 잠시 눈살을 찌푸리며 여자의 얼굴을 힘껏 잡았다. 여자는 그의 힘에 의해 고개를 들었다.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고 최주하는 여자의 작은 얼굴과 그 눈에 맺힌 흐릿한 눈물을 봤다.“내 앞에서 불쌍한 척하지 마.” 최주하는 여자를 거칠게 밀쳐냈다. 그러나 여자는 여전히 그를 놓지 않았다.최주하는 처음에는 여자를 발로 차서 밀어낼 생각이었지만 뜻밖에도 그녀는 그를 더 꽉 붙잡았다.그는 잠시 생각하다 결국 여자에게 손을 쓰지 않기로 했다.“놔.”최주하는 다시 차갑게 말하며 그녀에게 경고했다.그녀는 여전히 놓지 않았다.그러고는 갈라진 목소리로 애원했다. “대표님 저도 정말 어쩔 수 없어요. 다른 방법이 있었다면 절대 이렇게 비참하게 대표님한테 매달리지 않았을 거예요…”사람은 정말 절박하지 않으면 이렇게까지 자존심을 버리지 않는다.하지만 최주하는 구세주가 아니었다. 모든 사람이 돈이 부족하다고 그를 찾아온다고 해도 세상에는 어려운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그가 모든 사람을 도와주는 것은 불가능했다.“나한테 부탁한다고 해결되는 게 아니야. 너는 손이 없어 발이 없어? 스스로 노력하면 되지. 필요하면 일자리 소개해 줄게. 아니면 다른 사람한테 소개 해 줄 수 있어.”최주하는 그녀를 도와줄 마음이 전혀 없었다. 그는 지석훈처럼 결혼 압박을 받는 사람도 아니어서 여자를 붙잡고 연극을 할 필요도 없었다.여자는 최주하가 꿈쩍도
지석훈은 반박하지 못했다.그는 어처구니가 없었다.“야, 너 지금 말하는 게 완전 원망 가득한 아낙네 같아.”“원망이 아니라 사실을 말하는 거거든? 왜? 사실도 말하면 안 돼? 지석훈 너 진짜 너무한 거 아니냐?”최주하는 억울하다는 듯 따져 물었다.지석훈은 주위를 둘러봤다. 다행히 주변에 아무도 없었다. 만약 누군가가 이 대화를 들었다면 그와 최주하 사이의 관계를 오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최주하는 일부러 그렇게 말한 것이었다. 지석훈이 자신의 기분을 언짢게 만들었으니 최주하도 똑같이 그를 기분 나쁘게 만들려 했다.최주하는 어차피 죽을 일도 아닌데 뭐가 문제냐는 식이었다.게다가 설령 죽게 되더라도 그건 지석훈이 화병으로 죽은 것이었기에 최주하와는 아무 상관 없었다.지석훈은 덤덤하게 말했다.“참나. 인간이 너처럼 뻔뻔하기도 쉽지 않겠다.”“내가 뭘? 틀린 말 한 것도 아닌데? 설마 너 다른 사람이 사실을 말하는 것도 막으려는 건 아니지?”최주하는 태연하게 말했다.지석훈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술이나 마실 거면 마시고 아닐 거면 꺼져.”최주하는 그가 진짜로 화낼 리 없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단둘이 술을 마시는 건 심심했던지라 결국 전화를 걸어 사람들을 불렀다.잠시 후 외모가 각기 다른 여자들이 방으로 들어왔고 금세 두 사람을 둘러쌌다.그러나 지석훈은 얼굴을 찌푸리며 몸을 피했다.“너 혼자 실컷 놀아. 난 간다.”말을 마치자마자 지석훈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이제는 최주하가 지석훈을 붙잡고 싶은 상황이었지만 지석훈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방을 나가버렸다.“대표님 더 부를까요?”“꺼져.”최주하는 짜증을 내며 소리쳤다.그는 단순히 지석훈의 기분을 풀어주려고 사람들을 불렀던 건데 정작 당사자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나가버렸다.그러고 나니 혼자 남은 이 상황이 너무도 어이없었다.차라리 다 보내고 혼자 있기만도 못했다.그가 인상을 쓰며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순간 한 여자가 그 앞에 무릎을 꿇었다.“넌 아직도 안 가고 여기서 뭐
게다가 그는 문지원과 단순히 역할놀이를 하는 것뿐 애인이라고 할 수도 없었다.하지만 최주하의 생각은 달랐다.“보아하니 아직 진짜 사귀는 건 아닌가 보네. 이렇게까지 데려와서 보여줬는데 뭘 그렇게 머뭇거려? 이 여자라면 너랑 잘 어울려.”최주하는 평소엔 장난을 많이 쳤지만 지금은 석훈이 솔로를 벗어나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워낙 일에 치여 지내고 이상한 소문도 많이 도는 사람이니 옆에 누군가 있는 게 더 좋을 수도 있었다.하지만 지석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러자 최주하는 아예 그의 옆에 앉으며 말했다.“네 생각이 어떤지 나도 알아. 근데 널 사랑하지도 않는 사람한테 그렇게 집착해서 얻는 게 뭐야? 나중에 너만 힘들어질 거라고. 정말 그렇게 버티다 버티다 몸이라도 망가지면 어쩔 건데?”“인명진 좀 봐.”최주하의 말에 지석훈은 자연스럽게 인명진을 떠올렸다.인명진과 함께 수술하면서 그의 집중력과 실력을 눈여겨보게 되었고 그가 온지유를 바라보는 시선에서 그의 감정까지도 읽을 수 있었다.인명진은 온지유를 위해 정말 헌신했다. 하지만 결국 그는 은서우와 이어졌다.결국 놓지 못할 사람도 없고 못 넘을 고비도 없는 법이었다.지석훈은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알아. 하지만 아직 결혼 생각은 없어.”“그럼 언제 할 건데?”최주하는 정말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지석훈은 그를 째려보며 말했다.“내 결혼 계획 물어볼 시간에 네 계획이나 먼저 세워.”“난 금방 할 건데? 괜찮은 사람 만나면 바로 결혼하고 아니면 그냥 혼자 지내면 되지. 근데 말이야 문지원 너랑 꽤 잘 어울려 보이던데? 더 이상 밀어내지 말고 그냥 받아들이는 게 어때? 그러다 진짜 혼자 남으면 어쩌려고?”최주하의 농담에도 지석훈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혼자면 혼자인 거지. 딱히 문제 될 것도 없잖아.”지석훈은 자신이 죽으면 누군가 발견하고 묻어줄 거라고 생각했다.아무도 발견 못 해도 썩는 데 시간이 걸릴 테니 더더욱 상관없었다.어차피 죽고 나서의 일은 누구도 알 수 없는
문지원은 정말로 일부러 강윤슬을 찾아간 것이 아니었다. 지석훈은 그녀의 말에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빤히 그녀를 보았다. 문지원의 얼굴엔 진지함과 단호함만 담겨 있었다. 그는 확실히 문지원이 일부러 찾아갔을 거라는 생각을 했었다. 그렇게 해야 모든 사람들이 그와 문지원의 관계를 알게 될 거고 경성의 모든 사람들도 어떻게든 문지원을 도와주려고 할 것이니 말이다. 문지원의 야망을 알고 있었지만 이렇듯 솔직하게 말해줄 줄은 몰랐다.그녀가 애초에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다면 이번에는 정말로 강윤슬이 일부러 문지원을 찾아온 것이 맞았다. 그 순간 지석훈은 대충 뭔가를 짐작하게 되었다.그러나 문지원은 그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이어서 말했다.“혹시 저한테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는 거라면 하지 마세요. 전 제 주제를 알고 과욕을 부려서는 안 된다는 걸 알고 있는 사람이니까요. 석훈 씨와 석훈 씨 아버지는 이미 충분히 저를 도와주고 있어요.”그녀에게 정말로 다른 생각이 있었다면 티가 나지 않았겠는가. 게다가 그녀는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지나친 욕심은 오히려 더 큰 화를 불러일으킨다는 것을. 그녀와 지석훈은 결국엔 다른 세계 사람이었고 주건 때문에 그녀는 더는 사랑을 믿지 않았다.“알았어. 그럼 협력 업체를 만나러 온 거야?”지석훈은 더는 그녀와 이 대화를 이어가지 않았다.“네. 프로젝트를 더 많이 받아보려고 왔어요. 저희 직원들이 일을 너무도 잘하는데 아무래도 제가 부족한 것 같아 조금이라도 더 노력해보려고 온 거예요.”직원들이 포기하지 않고 열심히 해주고 있는 덕분에 주문도 밀리지 않고 제때 완성할 수 있는 것이다. 만약 다른 사람이었다면 이미 파산해버린 회사를 버리고 도망쳤을 테지만 그들은 그러지 않았다. 그런 직원들이 자신 때문에 힘들어지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지석훈은 입술을 달싹였다.“내가 사업하는 내 친구들을 소개해줄게. 내 친구들이라면 널 도와줄 수 있을 거야. 최근에 제약 회사에서도 뭔가 프로젝트를 기획하고 있는 것 같으니까 한번 생각해
한쪽 입꼬리만 올라간 것이 지석훈이 그들을 비웃고 있는 게 분명했다. 임혁수의 안색이 더 일그러졌지만 강윤슬은 난감하기만 했다. 예전에 지석훈이 자신에게 어떻게 애절하게 사랑 고백했었는지 전부 지켜보았었다. 그런 지석훈이 그녀가 아닌 다른 사람의 편을 들어주고 있으니 오히려 묘한 기시감이 들었다. 강윤슬은 그런 그의 변화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석훈아, 말 좀 가려서 해. 사람을 존중해야 할 줄 알아야지. 우리가 언제 존재감을 드러내려고 했다고 그래?”강윤슬도 어느새 미간을 찌푸렸다. 임혁수는 계속 강윤슬의 편을 들어주었다.“지석훈, 너 지금 윤슬이를 갖지 못했으니까 질투하고 있는 거잖아. 너 그런 모습 추해. 애초에 네가 강아지처럼 꼬리 살살 흔들며 멋대로 윤슬이 옆에 있었던 거였으면서.”임혁수의 날카로운 눈빛과 말에 지석훈은 정곡을 찔리게 되었고 틀린 말도 아니었다. 예전의 지석훈은 한 마리의 개처럼 강윤슬의 주위만 맴돌았고 비굴하고도 애절하게 사랑 고백하면서 잘해주었지만 결국 지석훈에게 돌아오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프러포즈를 몇 번이나 했지만 강윤슬은 단 한 번도 받아주지 않았고 임학수의 전화 한 통에 강윤슬은 바로 그의 곁을 떠나버렸다. 심지어 강윤슬은 아무런 조건도 없이 임혁수의 편을 들어주었고 자신과 혈연관계도 없는 임혁수의 딸까지 받아주었다. 그렇게 생각한 지석훈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그래. 맞아. 내가 개처럼 꼬리를 흔들었지. 인정해. 그런데 너희들이 한 건? 너희들은 이 세상이 너희들을 둘러싸고 돌아간다고 생각하고 있잖아. 아니야?”“네가 질투한다고 말한 게 그렇게 큰 잘못이냐?”임혁수는 고개를 빳빳이 쳐들며 강윤슬의 편을 들어주었다. 문지원은 더는 뻔뻔한 두 사람을 봐줄 수가 없었다.“만약 우리가 정말 그런 거라면 틀린 말도 아니겠죠. 하지만 이미 죄를 뒤집어씌우려고 하는데 뭔 이유가 필요하겠어요. 안 그래요? 두 사람은 그렇게 평생 함께 살아요. 다른 사람 해칠 궁리는 하지 말고요. 두 사람의 피해망상증이 다른 사람에게도
문지원은 반드시 회사를 다시 살려야 한다는 생각이 강했다. 회사에 다시 활력을 불어넣으려면 방법이 단 하나뿐이었다. 바로 돈을 많이 버는 것.그녀는 프로젝트를 더 많이 받으려고 나온 것이지만 강윤슬과 마주치게 될 줄은 몰랐다. 강윤슬은 연분홍색 정장을 입고 있어 청순하고 아름다운 매력이 있었다. 비록 강윤슬과 친한 것은 아니었지만 지난번 강윤슬이 했던 말을 지금도 잊지 않았다.이번에 우연히 만나도 문지원은 당연히 먼저 인사할 생각도 없었다. 그러나 강윤슬은 먼저 그녀에게 다가가 인사했다. 강윤슬의 두 눈엔 여전히 그녀를 깔보는 듯한 거만함이 담겨 있었다.“오늘은 석훈이랑 같이 있지 않네요?”다른 사람이 듣기엔 별다른 의미가 없지만 문지원이 듣기엔 이상하게도 말 속에 가시가 느껴져 저도 모르게 코웃음을 치고 말았다.“저희 인사할 정도로 친한 사이는 아니지 않나요?”설령 강윤슬과 지석훈이 친한 사이라고 해도 그건 두 사람의 사이에서만 통할 뿐 그녀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었다. 그러나 눈앞에 있는 강윤슬의 모습은 꼭... 일부러 그녀를 골탕 먹이려고 먼저 찾아온 것이 분명했다. 강윤슬은 그녀의 모습에 피식 웃었다.“그렇죠. 우리가 친한 사이는 아니죠. 하지만 석훈이 봐서라도 인사를 해주는 거예요. 석훈이 도움으로 문정 그룹을 다시 일으켜 세우려고 하고 있잖아요. 확실히 좋은 방법이긴 하죠.”문정 그룹의 상황이 점차 나아지고 있는 것도 지석훈의 공로였다. 만약 지석훈이 여이현을 소개해주지 않았더라면 여이현은 아마 끝까지 그녀가 누구인지도 몰랐을 것이다. 그녀는 알고서도 지석훈의 도움을 받는 것이었고 강윤슬의 말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이 말을 강윤슬이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맞아요. 아주 좋은 방법이죠. 그런데 그쪽과는 무슨 상관이 있는 거죠? 강윤슬 씨, 혹시 사람 말귀를 못 알아듣는 거예요?”문지원은 차갑게 코웃음을 쳤다.“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죠?”강윤슬이 대꾸하기도 전에 누군가 끼어들며 강윤슬의 편을 들어주었다. 목소리를 들은 문지원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