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아버지의 입장이었더라면 그도 아버지처럼 했을 것이다. 그래서 일단 그냥 두기로 했다.“알았어. 아버지한테는 당신이 잘 알아서 해. 미리 말하지만 아버지한테서 가져간 돈은 나중에 꼭 갚아야 할 거야.”그러나 문지원과 아이를 낳을 생각은 없다.그녀도 그의 제안에 대해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하였다.“알았어요. 빚을 청산해 준다면 당신이 원하는 건 뭐든 다 할게요.”“일단 옷부터 입어.”이런 경우는 또 처음이다. 의사 생활을 하면서 그동안 많은 수술을 집도했고 그에게는 남녀 구분 없이 그냥 환자일 뿐이었다.그러나 문지원은 그한테 환자가 아니었다. 최악의 상황을 생각하고 있던 그녀는 지석훈의 말에 이내 옷을 챙겨입었다.그러나 그녀는 여전히 그의 앞에서 무릎을 꿇고 있었다. 인기척이 없자 그는 함부로 고개를 돌리지 못하였고 그 순간 뜻밖에도 그녀가 먼저 입을 열었다.“옷 다 입었어요.”그제야 그가 고개를 돌리고 그녀를 쳐다보았다.다른 뜻은 없었고 그저 사람을 보고 얘기하는 게 예의일 것 같아서 고개를 돌린 것이다. 그러나 그녀가 아직도 무릎을 꿇고 있을 줄은 몰랐다. “왜 아직도 무릎을 꿇고 있어? 당장 일어나.”그의 안색이 어두워졌다.그녀는 여전히 무릎을 꿇은 채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내 행동이 지나치다는 거 알아요. 하지만 정말 방법이 없어서 그래요. 벼랑 끝에 선 나한테 손 내밀어줘서 고마워요. 진심이에요.”“지금 이런 말 소용없어. 얼른 일어나. 아버지 쪽은 당신이 잘 협조해 줬으면 좋겠어. 그리고 하루빨리 제대로 된 직장도 찾아...”그녀가 또다시 그의 말을 끊으며 단호하게 입을 열었다.“문정 그룹의 채무만 갚는다면 회사는 예전처럼 정상적으로 운영될 거예요. 그럼 최대한 빨리 돈을 갚을게요.”그가 눈을 가늘게 뜨고 문지원을 쳐다보았다.“회사를 경영할 줄 알고 사업을 할 줄 안다고?”문정 그룹의 아가씨에 대해 만난 적이 없었기 때문에 그는 문지원이 어떤 사람인지 잘 모르고 있었다.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조금
지석훈은 자신의 능력으로 유명한 의사가 된 것이었고 그를 찾아오는 환자는 셀 수 없이 많았다.의사가 되지 않았어도 그는 부잣집 도련님으로 잘 먹고 잘살았을 것이다.그의 신분과 지위라면 그가 원하는 것은 말만 하면 다 이룰 수 있었다. “그래요. 난 당신한테 도움이 안 되죠...”“하지만 뭐 단정 짓기는 어렵지. 나중에 도움이 필요할지도 모르니까.”그가 그녀의 말을 끊고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한편, 지혁진은 두 사람 사이에 대해 완전히 믿는 눈치가 아니었다.그가 문지원을 찾아와 물었다.“석훈이가 정말 널 받아들였단 말이냐?”전에는 이것도 싫다 저것도 싫다던 녀석이 왜 문지원이 나타나자 이리 쉽게 받아들인 것일까?따지고 보면 두 사람이 만난 지는 고작 이틀밖에 되지 않았는데. “아저씨, 석훈 씨가 절 받아들인 건 제가 하도 귀찮게 해서 그런 거예요. 그리고 제 모습이 안타까워 보여서 그랬을 거예요.”문지원은 사실대로 얘기했다.두 사람 사이가 사랑으로 시작된 사이가 아니라는 건 누구나 다 잘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솔직하구나. 내가 왜 널 선택했는지 아느냐?”지혁진이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알아요.”지혁진이 그녀를 찾아갔을 때, 문씨 가문은 이미 엄청난 빚더미에 올라가 있었다. 그녀는 가문의 빚을 갚기 위해 그 돈이 필요했고 그 돈을 위해서라면 어떻게 해서든 그가 시킨 일을 완수할 것이다. “내가 시킨 일은 끝까지 완수하거라. 임신을 하면 10일이면 검사를 할 수 있다고 하니 오늘부터 보름 동안 시간을 더 주겠다.”지혁진이 기한을 줄 줄은 몰랐다.물론 요구를 하면서도 그는 아주 인간적이었다.“보름 안에 네가 석훈이의 아이를 임신하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섭섭지 않게 보상을 해줄 것이야.”그 말인즉 임신을 하든 안 하든 그녀는 손해를 볼 것이 없다는 소리였다. 지혁진도 그리고 지석훈도 모두 최선을 다해 그녀를 도와주고 있었다.너무 고마웠다. “아저씨, 정말 감사합니다.
다른 사람의 견제를 받지 않으려면 자신감과 실력이 있어야 한다. “고마워요.”그녀는 고개를 숙이며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말만 하지 말고 행동으로 보여줘.”그녀는 더 이상 아무 말이 없었다. 지석훈은 말하면 말한 대로 약속을 지키는 사람이었다. 그의 부름에 여이현과 친구들은 바로 달려왔다. 평소에는 지석훈도 아주 바쁜 사람이라 모처럼 한자리에 모이게 된 것이었다.문지원은 지석훈의 옆에서 그들과 일일이 인사를 건넸다. 이때, 최주하가 먼저 장난스럽게 입을 열었다.“뭐야? 두 사람 벌써 사귀는 사이야? 어쩐지 나한테 양보해달라고 그렇게 말해도 꿈쩍도 안 하더니 진작부터 마음에 두고 있었던 거야?”“이름이 뭐야? 애들한테 소개 좀 해줘.”처음에는 지석훈과 최주하가 만나는 관계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지석훈에 대해 알아가면서 그녀는 그게 다 소문일 뿐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지석훈에게는 오랫동안 좋아한 여자가 있었으니까. “문지원이라고 해요.”나도현이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이제야 우리한테 이렇게 얼굴을 보여주네. 걱정하지 마. 두 사람 결혼하면 내가 축의금은 두둑이 넣을게. 딸 낳으면 나랑 사돈 맺자.”지석훈이 그를 흘겨보며 입을 열었다. “뭔 헛소리야.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내 딸한테 뭔 같지도 않은 소리야? 최주하한테 얼른 딸이나 낳으라고 하던가. 그렇게 며느리를 얻고 싶으면... 아니지. 이현이한테 딸이 있잖아. 이현이 딸로 해 그냥.”나도현은 무의식적으로 여이현을 쳐다보았다. 하민이와 별이는 아주 친한 친구 사이였고 하민이는 하윤이를 아주 좋아했다.그러나 딸이라면 끔찍이도 아끼는 여이현은 전혀 그럴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는 앞으로 자신의 딸과 결혼할 사람은 반드시 그의 시험을 거쳐야 한다고 했다.딸이 정략 혼을 하는 걸 원치 않는다고 했다.여이현도 여이현이지만 하윤이에게는 대단한 외할아버지와 친할아버지가 있으니 훌륭한 남자가 아닌 이상 꿈도 꾸지 못할 것이다. 여이현이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용건부터 얘기해.”
“좋은 생각이야.”나도현도 그의 말에 동의했다. 문제는 양시은도 바쁘고 권다솔도 바빴고 온지유는 지석훈만 여자 친구를 데리고 왔다는 말에 아무래도 안 가는 게 낫겠다고 했다. 문지원은 남자들 사이에서 조금 난처했다.그러나 이 사람들이 문정 그룹을 다시 되살릴 수 있었기 때문에 그녀는 불편해도 꾹 참고 있었다.얼마 후, 화장실에서 그녀는 강윤슬과 마주쳤다.금방 맹장염 수술을 받은 사람이 병원에서 푹 쉬고 있어야 할 사람이 여기에 나타나다니...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고 강윤슬은 문지원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자신보다 더 예쁜 것도 아니었다. 게다가 문지원에 대해 조사를 해보니 문씨 가문은 이미 파산하였고 문지원은 바로 그때 지석훈을 만나게 된 것이었다.이 안에는 분명 사정이 있을 것이다.“석훈이가 당신과 거래라도 한 건가요?”강윤슬이 그렇게 물을 줄은 몰랐다.지석훈과 강윤슬 사이에 어떤 관계가 있든 간에 그녀와 강윤슬은 아무 사이도 아니었다. 그러니 여기서 강윤슬의 말을 들을 필요가 없었다. “석훈 씨가 나와 거래를 하든 안 하든 그건 당신과 전혀 상관없는 일이에요.”“건방지군요. 그쪽이 석훈이를 찾아오지 않았다면 지금 이 자리에도 없었겠죠.”강윤슬은 그제야 알아차렸다. 어쩐지 문지원이 자신을 보고도 아무런 반응이 없더라니...정상적인 연인 관계나 약혼녀라면 절대 그러지 않을 것이다. 결국은 그가 문지원과 거래를 하고 그녀를 자극하려고 했던 게 아닐까?잠깐 화장실을 다녀오려고 했던 것뿐인데 이곳에서 강윤슬을 만날 줄은 몰랐고 강윤슬이 이런 말을 할 줄은 더더욱 몰랐다. 싸늘한 표정을 지으며 말을 내뱉는 모습에 문지원도 더 이상 참고 싶지가 않았다. “내가 어디에 있든 죽든 살든 그건 당신이랑 전혀 상관없는 일이에요. 내가 석훈 씨 옆에 있는 게 불만이면 어디 한번 내 곁에서 그 사람을 빼앗아 가봐요. 석훈 씨가 당신한테 다시 돌아간다면 그것 또한 당신의 능력이겠죠.”말을 마친 문지원은 발걸음을 옮겼다.강윤슬이 무슨 짓을 할
문지원의 말에 그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방금 맹장염 수술까지 한 여자가 죽고 싶어서 환장한 것도 아니고 이게 무슨...문지원은 방금 한 말을 다시 반복했고 그는 아무 말도 없이 바로 룸을 뛰쳐나갔다. 그의 뒷모습을 보며 그녀는 강윤슬이 지석훈한테 얼마나 중요한 존재인지를 다시 한번 깨닫게 되었다. 얼마나 지나지 않아 그는 강윤슬이 있는 룸을 찾았다.오늘 강윤슬은 중요한 미팅이 있었고 꼭 참석해야 하는 자리였다. 그러나 그녀는 술을 먹지 않았고 컵에 따뜻한 물을 담아두었다. 사업 파트너도 그 정도는 이해할 수 있었다. 아픈 몸을 이끌고 여기까지 온 것만으로도 존경받을 만한 일이니까. 지석훈은 단번에 달려들어 그녀의 손에 있는 컵을 쏟아버렸다.그는 불같이 화를 냈다. “강윤슬, 정말 왜 이러는 거야? 죽어도 좋아? 지금 선배 몸 상태가 어떤지 몰라?”강윤슬은 그가 이렇게 화를 내는 모습을 처음 봤다.‘그래서 뭐?’지석훈이 여기 나타난 건 방금 문지원을 만났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문지원이 그한테 뭐라고 한 거겠지...“미쳤어? 나 지금 미팅 중...”“미팅은 개뿔. 당장 나가.”분노가 가득 찬 호통에 강윤슬과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어안이 벙벙해졌다. 강윤슬의 사생활에 연루되고 싶지 않았던 사람들은 급히 자리를 떴다. “저기... 강 대표님, 미팅은 다음에 하죠.”“다음은 없습니다.”지석훈은 여전히 화가 나 있었다. 강윤슬의 전화를 받고 그녀가 맹장염이라는 것을 알게 된 후 그는 정신없이 그녀를 병원으로 데려갔다. 수술을 마치고 병실로 옮겨지기까지 그녀의 곁을 지켰는데, 강윤슬은 그가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아무렇지 않은 듯 미팅 자리에 나왔다. 이럴 거면 뭐 하러 수술은 하는가? 차라리 집에서 죽고 말지...이내, 룸 안에는 두 사람뿐이었다. 강윤슬은 이렇게 화를 내는 그의 모습을 보며 차갑게 웃었다.“지석훈, 꼭 이렇게까지 해야 해? 문지원 씨한테 별 얘기 안 했어. 그게 여기까지 무작정 들이닥칠 일이니? 그리
그런데 그가 갑자기 그녀를 확 끌어당겼고 그녀는 그의 몸 위로 넘어졌다. 깜짝 놀란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몸을 일으켜 세웠다.그런데 그가 그녀의 허리를 더 꽉 끌어안았다. “강윤슬, 내가 너 얼마나 사랑하는데. 어떻게 나한테 이래?”“내가 프러포즈를 몇 번이나 했는데 어떻게 한 번을 안 받아주냐? 가라면 가고 오라면 오고 그렇게 강아지같이 꼬리를 흔들었는데 어떻게 내 진심을 이렇게 짓밟는 거냐고?”문지원을 안고 있는 그의 팔에 힘이 점점 더 들어갔다. 그가 점점 더 가까이 다가왔고 높은 콧대가 그녀의 얼굴을 짓누르고 있어 통증이 몰려왔다.입술이 가까이 다가오자 그녀는 재빨리 그의 입을 막았다. “진심을 짓밟은 게 아니야. 너무 바빠서 그랬어. 난... 일이 중요한 사람이잖아. 사랑 같은 건 나한테 사치야.”문지원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가 자신을 강윤슬이라고 착각하고 있으니 지금은 강윤슬이 되기로 했다.사실 그가 술에 취해있으니 지금이 그를 가까이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그러나 이렇게 다가가는 건 아닌 것 같았다.그가 자신을 도와주겠다고 약속까지 했는데...오늘도 그는 그녀를 도와주기 위해 친구들을 불러 모았다. 그녀는 양심 없는 사람이 될 수 없었다. “그래?”그가 씁쓸한 미소를 짓더니 혼자서 중얼거렸다. 문지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러니까 매번 너한테 먼저 전화를 하는 거지.”“그럼 내 프러포즈 받아줄 거야. 나랑 결혼할 거야?”“응.”그를 달래고 있을 뿐이었는데 그가 그녀를 더 꽉 끌어안았다.힘이 너무 세서 숨을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 그녀가 손을 뻗어 그를 밀어냈다. “숨 막혀.”“미안.”그는 이내 그녀를 풀어주었다.만취 상태에도 그는 크게 실수를 하지 않았고 그녀와 거리를 두었다. 그러나 술에 너무 취한 탓인지 자꾸만 휘청거렸다. 소파에 기대는 순간 그가 바로 뻗어버렸고 불과 몇 초 만에 그는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그를 끌어당길 수 없었던 그녀는 어쩔 수 없이 옆에서 지켜보기만 했다.
지석훈은 입가에 깊은 웃음을 머금고 있었다. 그녀는 그가 자신을 조롱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술에 취한 사람을 그냥 두고 갈 수가 없었다. 옆에 그녀밖에 없었으니 그의 곁을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녀가 떠나고 그에게 일이라도 생기면 결국 그녀의 문제가 될 테니까. 게다가 그가 말한 것처럼 그녀는 지금 명목상 그의 여자 친구였다. 그를 혼자 내버려두고 간다면 사람들이 그녀를 어떻게 생각하겠는가?“요즘 세상은 험해요.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고요. 나라도 옆에서 지키고 있어야 할 것 같았어요. 밥 먹으러 가요. 내가 살게요.”“그래.”문지원의 말에 그는 거절하지 않았다. 그녀는 그를 데리고 조식 가게로 향했다.“이 집은 소고기 국수가 맛있어요. 한번 먹어봐요.”“여기 자주 왔었어?”이곳은 클럽 근처에 있는 가게였고 그녀의 집과는 거리가 멀었다.이런 곳에 문지원이 소고기 국수를 먹으러 왔다니?그녀는 고개를 숙이고 대답했다.“옛날에 친구랑 왔었어요.”그녀의 기분이 우울해진 것을 눈치채고 그는 더 이상 캐묻지 않았다. 그런데 이때, 한 남자가 기세등등하게 달려들었다.“문지원, 네가 나랑 헤어진 이유가 이거야?”눈앞의 남자를 본 순간, 그녀는 갑자기 감정이 북받쳐 올랐고 코끝이 찡해졌다.그 모습을 지석훈은 옆에서 지켜보았다. 문지원은 눈앞의 남자를 막아섰다.“할 얘기 있으면 나가서 해. 장사에 방해하지 말고.”“장사에 방해될까 봐 그런 거 아니잖아. 이 남자 때문에 지금 이러는 거 아니야? 문지원, 내가 너한테 못한 거 뭐야? 네가 어떻게 나한테 이래?”눈앞의 남자는 불같이 화를 냈고 문지원을 갈기갈기 찢어서 죽이고 싶은 눈빛이었다. 그녀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인생이 순탄하다면 소중한 사람과 소중한 물건을 버릴 사람이 이 세상에 어디 있겠는가?“남녀가 사귀다 보면 헤어질 수도 있는 거지. 원래 서로 마음이 있어야 만나는 거잖아. 나 이제 너한테 마음 없어. 헤어지자는 게 뭐 잘못됐어?”남자는 그녀의 어깨를
문지원은 바보 취급당하는 것 같아서 가슴이 아팠다. 문지원은 차갑게 웃음을 흘리더니 얘기했다.“혹시, 내가 그렇게 쉬운 사람으로 보여? 속이기 쉬운 사람으로 보이나 봐?”아까 그 여자와 함께 있던 태도를 보면 두 사람이 오래 알고 지낸 사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어쩌면 문지원과 사귈 때도 그 여자랑 연락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주건은 굳은 표정으로 물었다.“그건 다 네가 손도 못 대게 해서 그런 거 아니야. 그렇지 않으면 내가 다른 사람을 찾으러 갔겠어?”말을 마친 주건은 문지원을 슥 보더니 비웃으면서 얘기했다.“하지만 지금 보니까 너도 별반 다를 건 없네. 나랑 헤어지자마자 다른 남자랑 붙어먹다니. 왜, 나로는 부족했어?”주건이 더욱 잔인한 말을 뱉어냈다.눈앞의 두 사람을 보면서 주건은 속에 분노가 들끓었다. 그 분노는 이성을 놓아버릴 만큼의 분노였다.주건은 문지원이 본인을 무시한다고 생각했다.다른 남자에게는 쉽게 주면서 본인에게만 비싸게 구니까 말이다.하지만 그 말을 들은 문지원은 멍해졌다. 이런 사람을 좋아했었다니. 순간 수치심이 들 정도였다.‘내가 좋아했던 사람이... 이 정도라고?’“말조심하세요.”지석훈이 차갑게 얘기하면서 문지원을 끌어당겨 본인 뒤에 숨겨주었다.그 간단한 행동에 문지원은 크나큰 안도감을 느꼈다.문지원은 멍하니 지석훈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지석훈은 그런 문지원의 시선도 모른 채 주건의 말에 반박하고 있었다.“먼저 잘못한 건 그쪽이면서 왜 지원 씨를 욕하는 거죠?”“이건 그쪽이랑 상관없는 일입니다. 꺼져요. 그리고 경고하는데, 우리 둘 사이에 끼어들지 마요.”주건도 지지 않고 반박하면서 문지원을 끌어내려고 했다.하지만 지석훈이 그 모습을 두고 볼 수만은 없다.문지원과 지석훈의 사이가 무슨 사이든 간에 정상적인 남성의 입장으로 봤을 때 전 남자 친구가 전 여자 친구에게 무력을 쓰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지석훈은 바로 주건의 손을 잡았다. 가늘고 기다란 손가락에서 어마어마한 힘이 느껴
하지만 감동보다는 오히려 속이 울렁거렸다. 속이 울렁거리는 느낌에 문지원은 당장 얼굴이 일그러지며 화장실로 달려갔다. 지석훈도 뒤따라 들어오며 물었다.“속이 안 좋아?”“그렇진 않은 것 같아요. 요즘 세 끼 식사도 꽤 규칙적으로 하고 날것 이거나 차갑거나 매운 음식도 먹지 않았는데...”문지원은 배를 움켜쥐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다 문득 한 가지 가능성이 떠올랐다.지석훈도 그녀와 같은 생각을 한 듯 방으로 가서 임신 테스트기를 가져왔다.문지원은 놀라며 물었다.“언제 산 거예요?”지석훈은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만일의 사태에 대비해서.”문지원은 아무 말이 없었다.5분 후, 그녀는 복잡한 얼굴로 다시 나왔다. 한 손은 여전히 배 위에 올려져 있었고 눈에는 믿을 수 없다는 기색이 역력했다.정말 임신한 것이다!그녀와 지석훈이 결혼한 지 겨우 3개월밖에 안 되었는데 이렇게 빨리 임신하다니.지석훈은 오히려 태연해 보였다. 하지만 입가에 감출 수 없는 미소를 보면 그 역시 겉모습처럼 평온하지 않고 흥분을 억누르고 있는 게 분명했다.“정말 임신한 거예요?”문지원은 아직 믿기지 않는 듯 물었다. 왜냐하면, 그녀는 이번 달 초에 생리가 끝났기 때문이다.“아마 생리가 끝난 후 며칠 사이일 거야.”지석훈의 목소리는 문지원에게 그날의 기억을 떠올리게 했다. 당시의 기억을 떠올리니 그녀의 귀는 뜨겁게 달아올랐다. 결국, 그녀는 병원에 가보기로 했다. 임신 테스트기는 가끔 틀릴 수도 있으니 이런 일은 직접 검사를 받아보고 확인해야 마음을 놓을 수 있을 것이다.그리고 그녀는 손에 든 검사지를 보고 완전히 할 말을 잃었다.의사는 마침 지석훈과 알고 지내던 사람이었다.“축하합니다, 지 원장님. 부인께서 임신 2주 차입니다.”“감사합니다.”지석훈은 침착하게 그녀를 부축하며 밖으로 나갔다.병원 진료실을 막 나오자마자 지석훈은 문지원을 품에 안았다.“너무 좋아. 우리 아이가 생겼어.”문지원은 남자가 미세하게 떨리는 모습을 보며 멍하
물론 손에 있는 일을 무턱대고 모두 남에게 맡기는 것은 너무 과한 부담을 주는 일이다.문지원은 비서를 사무실로 불렀다.“올해 25살이죠?”비서는 잠시 멍한 표정을 지었다.그녀의 나이는 모두가 다 아는데 문지원 회장이 갑자기 이 얘기를 꺼낸다는 것은 혹시 소개팅을 시켜주려는 건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비서는 고마웠지만 거절하며 말했다.“문 사장님, 저는 아직 젊어서 당장은 결혼할 생각이 없습니다.”“전 당신더러 결혼하라고 하는게 아니에요.”문지원은 펜으로 탁자를 두드리며 말했다.“그냥 평소에 잡다한 일들을 맡기고 싶어서요. 확인이 필요한 문서들은 평소에 굳이 내게 제출하지 않아도 돼요.”비서는 그 뜻을 이해했다.이건 곧 그녀에게 승진과 급여 인상을 주려는 것이다. 문지원이 그녀의 의견을 확인한 후 급여를 조금 올려줬고 비서에게 몇 명의 적합한 인재를 추가로 모집해서 예비 인력으로 두라고 지시했다.“평소에 내가 처리하지 못한 일들을 대신 처리해주고 만약 문제가 생기면 그때마다 보고하면 돼요.”비서는 한숨을 쉬며 안도의 표정을 지었다. 그녀 혼자서 이렇게 많은 일을 하지 않아도 되어 다행이었다.일정이 정리되자 문지원은 업무에서 상당 부분 해방되었다.예전에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바쁘게 일하다 보면 퇴근 시간이 되어도 일이 끝나지 않고 긴급 통지가 오면 또 회의를 위해 야근을 해야 했다.이제는 오후 4시 반쯤이면 일을 마치고 퇴근할 수 있게 된 것이다.비서가 몇 명을 더 찾아서 양성해 두었기에 업무가 적절히 분배되어 모두 바빠 죽을 정도가 아니라 적당히 딱 맞는 분량을 처리할 수 있었다.그 덕에 문지원은 지석훈과 함께 결혼 후의 삶을 더욱 즐길 수 있게 되었다.지석훈도 이에 매우 만족해했다.“널 주려고 선물을 챙겨왔어. 들어가서 한번 봐.”그가 집 문 앞에 다가서더니 걸음을 멈췄다.문지원은 열쇠로 문을 열고 들어가 보니 안은 어두컴컴했다.“뭐 숨겨놨어요? 아직 불도 켜지 않았네요, 수상하게.”탁! 하며 불이 켜지자 거실의 모든
문지원은 이 주제가 다소 위험하다고 느꼈다. 비록 그녀의 아버지가 그녀에게 물어본 적은 없지만 그렇다고 자신과 배석훈이 결혼한 후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에 대해 말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했다. 돼지고기를 먹어보지 않았다고 해도 돼지가 뛰어다니 것을 본 적은 있을 것이다. 문지원은 그러면서도 반쯤 빚어놓은 만두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저,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이에 지석훈의 어머니가 그녀의 손을 잡았다. “너희들도 이제 나이가 들었으니 아이를 가져야지. 평소에 좀 더 노력해야 한단다.”문지원은 잔소리를 듣고 나서 나오니 기운이 다 빠져있었다.시어머니는 문지원에게 정말 잘해주었다. 거의 마음을 쏟아붓는 수준이었다. 비록 문지원의 집안 사정이 좋은 것을 알면서도 혼수 때 오랜 세월 모은 돈으로 집 한 채를 사서 선물해 주었다. 사실 지석훈도 자기 집이 있었지만, 시어머니는 선물하고 싶다고 하셨다. “너희 집도 너희의 것이지만, 이건 내가 어른으로서 선물하는 거란다.”게다가 그 집에는 문지원의 이름도 함께 올려져 있었다.그래서 시어머니의 출산 독촉에도 문지원은 어쩔 수 없이 버텨야만 했다. 다행히도 시어머니는 어린 이들에게 엄격하게 구는 편은 아니었다. 만두를 빚을 때 한 번 그런 말을 했고 또 떠나면서도 지석훈을 불러 몇 마디 잔소리했다. 문지원은 그 모자간의 대화를 듣지 못했다.돌아가는 길에 문지원은 약간 궁금해져 지석훈에게 물었다.“나갈 때 어머니께서 뭐라고 하셨어요?”“정말 알고 싶어?”“네.”그러자 지석훈은 문지원의 머리를 숙이게 한 후 그녀의 흩어진 머리칼을 살며시 넘겨주며 귀 옆에서 낮게 속삭였다.“우리 아이를 빨리 낳으라고 하셨어.”남자의 낮고 진한 목소리는 얼굴을 붉히고 심장을 뛰게 만드는 약보다도 중독성이 강해 문지원의 귀가 금세 붉어지고 말았다.저녁이 되자 지석훈은 몸소 행동으로 보여주기 시작했다. 한 손으로 문지원의 머리를 받치고 이마를 맞대며 낮은 숨소리를 내쉬었다. 문지원은 마치 파도 속에 잠긴 것
그 눈빛 속에서 조용히 터져 나오는 그 소유욕. 마치 옛 시대의 군벌과 그의 부인 같았다. 그리고 사진작가는 우연히 그 장면을 목격한 운 없는 사람이 되어 몰래 촬영을 하고 있었다. 사진작가는 자신의 상상에 자극받아 목소리가 떨렸다.“지석훈 씨, 고개를 들어 카메라를 봐주세요.”지석훈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사진작가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사진작가는 재빨리 셔터를 눌렀다. 그 후에도 그들은 여러 세트의 사진을 찍었고 찍은 사진들은 모두 문지원에게 하나하나 보여주었다. 문지원은 모든 사진에 다 만족했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마음에 든 것은 민국 시대 주제의 사진이었다.“대략 며칠 안에 나오나요?” 그녀가 물었다.사진작가는 답했다.“빠르면 이삼 일정도 걸릴 겁니다. 그때 완성된 사진들을 택배로 보내드리겠습니다. 그런데 제가 개인적인 부탁이 하나 있는데 혹시 두 분께서 응해주실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바로 아까 찍은 사진 중 몇 장이 제가 개인적으로 아주 마음에 들어서 사진관 벽에 걸어두고 싶습니다.”문지원은 사진관에 들어올 때 봤던 사진 벽이 생각났다.“그 벽에 걸어두시겠다는 건가요?”“네.”사진작가는 그 벽은 사진관의 특별한 기념 및 홍보 방법의 하나라고 설명했다. 잘 나온 사진들은 사진 주인에게 동의를 구한 뒤 동의하면 벽에 전시한다고 한다..문지원은 옆에 있던 지석훈을 바라봤다. “저는 괜찮은데, 당신은요?” 지석훈도 아무 문제 없다고 했다.“마음대로 하도록 해.”며칠 후 문지원은 사진작가가 보내온 사진을 받아 소중히 간직했다. 하지만 그녀는 몰랐다. 그 사진관 벽에 전시된 사진들이 곧 사람들의 눈에 띄어 사진이 찍혀 인터넷에 올라간 것이다.잘생긴 남성과 아름다운 여인의 조합과 최상의 촬영 기술 덕분에 순식간에 인터넷에서 화제가 되었다.네티즌들은 저마다 아아 소리를 냈고 많은 사람이 댓글을 달았다. “마치 옛 시대의 군벌 부인 같다.”“완전 대박이다.”“3분 안에 그들의 모든 정보를 알고 싶다.” 하지만 이 모
문지원은 약간 마음이 움직였다.하지만 웨딩 촬영은 이미 여러 번 한 적이 있었다. 그때 섬에서 몇 세트 찍었고 그 후 결혼식 현장에서 또 몇 세트 찍어 셀 수 없을 정도였다.게다가 이번 촬영은 개인 예약으로 진행되었는데 이 사진관이 꽤 유명하다고 들었다.물론 사진관 이름에 걸맞게 예약은 거의 하늘의 별 따기라고 한다..이 정도면 지석훈이 얼마나 큰 노력을 들여 예약을 잡았는지 알 수 있었다. 단순히 웨딩사진만 찍는 데 사용하기에는 너무 아까웠다.하지만 문지원 역시 이런 곳에 한 번도 와본 적이 없었기에 무엇을 찍어야 할지 몰랐다.“한번 보세요. 이건 저희가 예전부터 선보였던 스타일들이에요.”사진작가는 친절하게 앨범 한 권을 꺼내 보였다.앨범에는 이전 고객들이 이곳에서 찍은 사진들이 담겨 있었는데 정말 다양한 스타일이 있었고 모두 아름다웠다.이 사진관이 만들어낸 결과물은 정말 최고였다.문지원은 그중에서도 민국 시대 주제의 사진이 눈에 들어왔다.“이렇게 찍을 수 있을까요?”사진작가는 그녀가 가리키는 사진을 한 번 살펴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네, 됩니다. 먼저 메이크업하고 옷을 갈아입으세요. 직원들이 촬영 스튜디오를 설치할게요.”옷은 사진관에서 준비한 것으로 하고 지석훈의 요구에 따라 전부 새 옷이었다.사실 문지원은 소품용 옷을 입는 것에 크게 개의치 않았다. 어쨌든 한 번 입었다가 나중에 벗으면 되는 거고 몸에 달라붙지 않아서 안에 옷을 받쳐 입을 수도 있었다.하지만 지석훈은 직업병이 발동했고 그런 건 용납할 수 없었다.결국, 문지원은 어쩔 수 없이 그의 의견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급히 새 옷을 가져와야 했기 때문에 원래 걸리던 시간에서 15분이 더 추가되었고 메이크업 등 기타 과정도 진행해야 했다.문지원이 모든 준비를 마치고 나왔을 때는 이미 2시간이 지난 후였다.그러나 결과는 확실했다.곧은 치파오가 그녀의 아름다운 몸매를 감쌌고 문지원은 옷자락을 살짝 들어 올렸다. 마치 지난 옛 시대의 그림 속에서 걸어 나온 듯한
결혼 후 문지원은 휴가를 내서 신혼여행을 갈까 고민해 본 적이 있었다.하지만 요즘 지석훈이 거의 계속 병원에 머무르며 집에 돌아오지 않는 것을 떠올리며 본의 아니게 한숨이 나왔다. 비록 이미 익숙해졌긴 했지만 실망을 감추기는 어려웠다.비서도 그녀에게 물었다.“문 사장님, 신혼여행 가고 싶지 않으세요? 제 동창 중 한 명이 며칠 전에 결혼했는데 요즘 여기저기서 신혼여행 정보를 알아보며 준비 중이에요. 신혼여행이 없는 결혼은 반은 실패한 거랑 마찬가지라고 하더라고요.”그 말을 들은 문지원은 손에 들고 있던 서류를 제대로 볼 생각조차 들지 않았고 비서는 무언가를 눈치챈 듯했다.“그렇지 않으면... 문 사장님, 지 의사님이 일하시는 곳에 한 번 가보시는 건 어떠세요?”그녀가 머뭇거리며 물었다. 어쨌든 문지원은 요즘 정신이 산만하여 업무에 집중할 기색도 없었다.문지원은 비서의 시선 속에서 정신을 차렸다. 요 며칠 동안 집에 돌아와도 지석훈을 보지 못해 한참 혼란스러워했던 자신을 깨달으며 약간 부끄러워졌다.“그건 나중에 얘기하고 기획서 한 부 복사해 가져다주세요.”점심 무렵, 문지원은 막 일을 끝내고 밥 먹으러 가려던 찰나, 핸드폰에 지석훈의 메시지가 떴다. 같이 밥을 먹자는 메시지에 문지원은 미소를 지었다. 멀리서 이 장면을 본 직원들은 서로 눈빛을 교환하며 웃음을 터뜨렸다.문지원은 재빨리 열쇠를 챙기고 회사를 떠났다. 지석훈은 그녀를 새로 오픈한 가게로 데려갔다.식사를 마친 후 문지원은 지석훈을 바라보며 머뭇거리다가 물었다.“병원에 다시 돌아갈 거예요?”“응?”지석훈은 눈썹을 치켜들며 고의적으로 물었다. “내가 돌아가길 바라는 거야?”그 말을 들은 문지원은 순간 당황했다. 사실 그녀는 지석훈이 자신과 좀 더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주길 바랐는데 이제 막 결혼한 신혼부부임에도 불구하고 각자 업무에만 매달려 밤에야 겨우 함께 잠자리에 들 수 있는 상황이었다.하지만 수줍음이 많은 그녀는 그 마음을 솔직하게 털어놓지 못했다.지석훈은
예전에는 이런 일이 있을 때면 지석훈은 항상 선을 지켰지만 오늘 밤엔 조금 달랐다. 그는 그녀를 침실에서 욕실로 다시 침대로 옮겨가며 몸 곳곳에 뜨거운 입맞춤을 했다.다음 날 아침에 일어났을 때도 문지원은 여전히 몸속 깊이 스며든 감각이 남아 있는 것만 같았다.그리고 그녀는 예상대로 휴가를 냈고 이틀이 지나서야 회사에 다시 나왔다.회사 사람들은 이미 예상이라도 한 듯 문지원이 출근하자 하나같이 말했다.“문 사장님, 결혼 축하드려요.’문지원은 무려 사흘이나 결근했지만 다들 그 사흘 동안 무얼 했는지는 굳이 말 안 해도 짐작이 갔다.분명 부부 생활이 아주 좋았겠지, 아니었으면 일까지 내팽개치고 안 나왔을 리가 없다.문지원은 직원들의 부담스러운 시선에 얼굴을 들 수도 없어 그저 아무렇지 않은 척할 수밖에 없었다.그래도 지난번에 당한 적이 있었던 터라 문지원은 이제 출근 전에 거울 앞에서 꼼꼼히 점검했다.몸에 키스 자국이 드러나지 않는 걸 확인하고 나서야 안심하고 회사를 향했다.그렇지 않았다면 그 흔적들을 들켰을 경우 정말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문지원이 예상치 못했던 건 며칠 지나지 않아 결혼을 축하하는 선물이 회사로 배달됐다는 것이다.문지원은 처음에 여울이 보낸 거라고 생각했지만, 물어보니 아니었다.택배 상자의 외관을 살펴봐도 발신자가 적혀 있지 않아 더욱 수상했다.“이거 가져온 사람이 누가 보낸 건지 말했어요?”문지원이 로비 직원에게 물었다.로비 직원은 고개를 저었다. “아뇨, 그냥 두고 바로 가버렸어요.”문지원은 뭔가 직감적으로 찜찜한 마음이 들어 그 택배를 챙겼고 사무실에 들어와서야 상자를 열었다.그 안에는 브로치 하나와 축하 카드 한 장이 들어 있었다.문지원은 축하 카드를 집어 들어보니 카드 위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결혼 축하해요.”글씨체는 아주 정갈하고 예뻐 여성의 필체 같았다.그녀는 곧바로 짐작이 갔다.문지원은 그 브로치를 지석훈에게 보여주자 그는 눈빛이 살짝 흔들렸지만 아무 말 없이 브로치
여울은 아직 최주하를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최주하도 쉽게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문지원이 알기로 여울은 마음이 여린 사람이었고 결국 받아들이게 되는 건 시간문제일지도 몰랐다.그녀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친구 일에 깊이 관여하는 것도 괜히 어색하고 조심스러웠다.게다가 얼마 전 지석훈이 슬쩍 귀띔하듯 말했다.“며칠 전에 여울 씨가 병원에 재검진받으러 왔는데 주하가 데리고 왔었어.”그 말을 듣고 문지원은 혀를 끌끌 찼다.평소에 말도 없고 조용하던 여울이 은근히 비밀 많은 타입이었던 모양이었다.그렇게 시간은 순식간에 흘러 어느덧 다음 달 중순이 되었다.지석훈은 아예 와인 농장을 통째로 빌려 며칠에 걸쳐 그곳을 자신이 원하는 모습으로 꾸며놓았다.결혼식을 올릴 장소는 바로 거기였다.그 와인 농장은 웬만한 호텔 못지않게 컸고 내부에는 수년간 숙성된 고급 와인들이 그대로 보관되어 있었고 결혼식 날 손님들이 오면 바로 꺼내어 대접할 수 있을 정도였다.그들은 결혼 소식을 널리 알리진 않았다.이건 문지원이 원한 방식이었다.그녀는 온 세상에 떠들썩하게 알리는 그런 결혼식보다는 가까운 가족과 친구들만 초대해서 조용히 축하받는 걸 선호했다.행복은 굳이 남들에게 증명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니까.그런데 결혼식이 한창일 때 지석훈이 무대 위에서 다시 한번 프러포즈했다.해변에서 했던 프러포즈보다 훨씬 더 진지하고 진중한 분위기였다.“하고 싶은 말이 정말 많지만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어서... 예전엔 내가 사랑인 줄도 모르고 놓쳐버렸던 순간이 많아. 이제는 더 이상 놓치고 싶지 않아. 이렇게 내 곁에 있어 줘서 고마워. 앞으로 남은 인생... 너랑 함께할 수 있어서 정말 행복해.”그의 말이 끝나자 하객들 사이에서 박수 소리가 터져 나왔다.문지원은 무대 위에서 입을 손으로 가리고 눈물을 흘렸다.식이 끝날 무렵, 문지원은 멀리서 검은색 카이엔 SUV가 그녀의 친구 여울을 데리러 오는 걸 보았다.차창이 천천히 내려가자 예상대로 그 안에 앉아 있는 사람은 최주하였다
문지원은 문득 자신이 계획에 철저히 걸려들었다는 생각에 의심의 눈길을 보냈다.“처음부터 계획한 거죠?”“응.”지석훈은 미소 지으며 그녀의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사실, 그는 그녀를 향한 마음을 오래전부터 숨겨온 것이었다....해변에서의 프러포즈 이후 문지원에게 찾아온 가장 큰 변화는 손가락에 반짝이는 반지가 생겼다는 점이었다.이 반지는 지석훈이 특별히 맞춤 제작한 것이었다. 그녀는 우연히 그의 휴대폰을 보다가 두 달 전에 이미 주문이 들어가 있었다는 구매 기록을 발견하고는 깜짝 놀랐다. 그렇게 오래전부터 준비해 왔다니 감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두 사람의 결혼 소식을 접한 지석훈의 부모님은 곧바로 혼인신고부터 하라고 재촉하기 시작했다. 어느 날 문지원은 우연히 지석훈의 어머니가 그를 붙잡고 타이르는 말을 듣게 되었다.“네 아빠랑 난 애초에 너한테 기대도 안 했어. 하루가 멀다고 병원에서 살다시피 하니 너 같은 애한테 누가 시집오겠나 싶었거든. 그런데 다행히 네가 능력 있어서 지원이 같은 좋은 아이를 데려왔으니 얼른 확실히 붙잡아야지. 빨리 혼인신고부터 해. 나중에 그 아이가 너 버리고 떠나버리면 그땐 어디 가서 울어도 소용없어!”문지원은 그 대화에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몰랐다.그런데 신기한 건 지석훈이 워낙 점잖고 진지한 사람이어서 집안 분위기도 매우 조용할 줄 알았는데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는 점이었다. 아버지는 이미 퇴직해 한가로운 성격으로 매일 독서나 산책을 즐기는 조용한 스타일이었다. 어머니는 젊었을 때는 커리어 우먼이었고 호탕한 성격으로 남편에게 엄격하면서도 친화력이 강한 사람이었다.두 분 모두 차분한 듯하면서도 내면에 장난기를 숨기고 있는 아들을 낳을 것 같진 않았는데 이게 바로 유전자의 신비인가 싶었다.하지만 어머니가 그렇게 그녀를 좋아해 주는 모습에 문지원도 안심했다. 확실히 시부모님의 사랑을 받고 있다는 증거였다.한편 문지원의 아버지는 지석훈과 따로 대화를 나눈 이후부터 정확히 무슨 얘기를 했는지는 몰라도 그에 대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