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그가 갑자기 그녀를 확 끌어당겼고 그녀는 그의 몸 위로 넘어졌다. 깜짝 놀란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몸을 일으켜 세웠다.그런데 그가 그녀의 허리를 더 꽉 끌어안았다. “강윤슬, 내가 너 얼마나 사랑하는데. 어떻게 나한테 이래?”“내가 프러포즈를 몇 번이나 했는데 어떻게 한 번을 안 받아주냐? 가라면 가고 오라면 오고 그렇게 강아지같이 꼬리를 흔들었는데 어떻게 내 진심을 이렇게 짓밟는 거냐고?”문지원을 안고 있는 그의 팔에 힘이 점점 더 들어갔다. 그가 점점 더 가까이 다가왔고 높은 콧대가 그녀의 얼굴을 짓누르고 있어 통증이 몰려왔다.입술이 가까이 다가오자 그녀는 재빨리 그의 입을 막았다. “진심을 짓밟은 게 아니야. 너무 바빠서 그랬어. 난... 일이 중요한 사람이잖아. 사랑 같은 건 나한테 사치야.”문지원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가 자신을 강윤슬이라고 착각하고 있으니 지금은 강윤슬이 되기로 했다.사실 그가 술에 취해있으니 지금이 그를 가까이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그러나 이렇게 다가가는 건 아닌 것 같았다.그가 자신을 도와주겠다고 약속까지 했는데...오늘도 그는 그녀를 도와주기 위해 친구들을 불러 모았다. 그녀는 양심 없는 사람이 될 수 없었다. “그래?”그가 씁쓸한 미소를 짓더니 혼자서 중얼거렸다. 문지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러니까 매번 너한테 먼저 전화를 하는 거지.”“그럼 내 프러포즈 받아줄 거야. 나랑 결혼할 거야?”“응.”그를 달래고 있을 뿐이었는데 그가 그녀를 더 꽉 끌어안았다.힘이 너무 세서 숨을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 그녀가 손을 뻗어 그를 밀어냈다. “숨 막혀.”“미안.”그는 이내 그녀를 풀어주었다.만취 상태에도 그는 크게 실수를 하지 않았고 그녀와 거리를 두었다. 그러나 술에 너무 취한 탓인지 자꾸만 휘청거렸다. 소파에 기대는 순간 그가 바로 뻗어버렸고 불과 몇 초 만에 그는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그를 끌어당길 수 없었던 그녀는 어쩔 수 없이 옆에서 지켜보기만 했다.
지석훈은 입가에 깊은 웃음을 머금고 있었다. 그녀는 그가 자신을 조롱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술에 취한 사람을 그냥 두고 갈 수가 없었다. 옆에 그녀밖에 없었으니 그의 곁을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녀가 떠나고 그에게 일이라도 생기면 결국 그녀의 문제가 될 테니까. 게다가 그가 말한 것처럼 그녀는 지금 명목상 그의 여자 친구였다. 그를 혼자 내버려두고 간다면 사람들이 그녀를 어떻게 생각하겠는가?“요즘 세상은 험해요.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고요. 나라도 옆에서 지키고 있어야 할 것 같았어요. 밥 먹으러 가요. 내가 살게요.”“그래.”문지원의 말에 그는 거절하지 않았다. 그녀는 그를 데리고 조식 가게로 향했다.“이 집은 소고기 국수가 맛있어요. 한번 먹어봐요.”“여기 자주 왔었어?”이곳은 클럽 근처에 있는 가게였고 그녀의 집과는 거리가 멀었다.이런 곳에 문지원이 소고기 국수를 먹으러 왔다니?그녀는 고개를 숙이고 대답했다.“옛날에 친구랑 왔었어요.”그녀의 기분이 우울해진 것을 눈치채고 그는 더 이상 캐묻지 않았다. 그런데 이때, 한 남자가 기세등등하게 달려들었다.“문지원, 네가 나랑 헤어진 이유가 이거야?”눈앞의 남자를 본 순간, 그녀는 갑자기 감정이 북받쳐 올랐고 코끝이 찡해졌다.그 모습을 지석훈은 옆에서 지켜보았다. 문지원은 눈앞의 남자를 막아섰다.“할 얘기 있으면 나가서 해. 장사에 방해하지 말고.”“장사에 방해될까 봐 그런 거 아니잖아. 이 남자 때문에 지금 이러는 거 아니야? 문지원, 내가 너한테 못한 거 뭐야? 네가 어떻게 나한테 이래?”눈앞의 남자는 불같이 화를 냈고 문지원을 갈기갈기 찢어서 죽이고 싶은 눈빛이었다. 그녀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인생이 순탄하다면 소중한 사람과 소중한 물건을 버릴 사람이 이 세상에 어디 있겠는가?“남녀가 사귀다 보면 헤어질 수도 있는 거지. 원래 서로 마음이 있어야 만나는 거잖아. 나 이제 너한테 마음 없어. 헤어지자는 게 뭐 잘못됐어?”남자는 그녀의 어깨를
문지원은 바보 취급당하는 것 같아서 가슴이 아팠다. 문지원은 차갑게 웃음을 흘리더니 얘기했다.“혹시, 내가 그렇게 쉬운 사람으로 보여? 속이기 쉬운 사람으로 보이나 봐?”아까 그 여자와 함께 있던 태도를 보면 두 사람이 오래 알고 지낸 사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어쩌면 문지원과 사귈 때도 그 여자랑 연락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주건은 굳은 표정으로 물었다.“그건 다 네가 손도 못 대게 해서 그런 거 아니야. 그렇지 않으면 내가 다른 사람을 찾으러 갔겠어?”말을 마친 주건은 문지원을 슥 보더니 비웃으면서 얘기했다.“하지만 지금 보니까 너도 별반 다를 건 없네. 나랑 헤어지자마자 다른 남자랑 붙어먹다니. 왜, 나로는 부족했어?”주건이 더욱 잔인한 말을 뱉어냈다.눈앞의 두 사람을 보면서 주건은 속에 분노가 들끓었다. 그 분노는 이성을 놓아버릴 만큼의 분노였다.주건은 문지원이 본인을 무시한다고 생각했다.다른 남자에게는 쉽게 주면서 본인에게만 비싸게 구니까 말이다.하지만 그 말을 들은 문지원은 멍해졌다. 이런 사람을 좋아했었다니. 순간 수치심이 들 정도였다.‘내가 좋아했던 사람이... 이 정도라고?’“말조심하세요.”지석훈이 차갑게 얘기하면서 문지원을 끌어당겨 본인 뒤에 숨겨주었다.그 간단한 행동에 문지원은 크나큰 안도감을 느꼈다.문지원은 멍하니 지석훈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지석훈은 그런 문지원의 시선도 모른 채 주건의 말에 반박하고 있었다.“먼저 잘못한 건 그쪽이면서 왜 지원 씨를 욕하는 거죠?”“이건 그쪽이랑 상관없는 일입니다. 꺼져요. 그리고 경고하는데, 우리 둘 사이에 끼어들지 마요.”주건도 지지 않고 반박하면서 문지원을 끌어내려고 했다.하지만 지석훈이 그 모습을 두고 볼 수만은 없다.문지원과 지석훈의 사이가 무슨 사이든 간에 정상적인 남성의 입장으로 봤을 때 전 남자 친구가 전 여자 친구에게 무력을 쓰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지석훈은 바로 주건의 손을 잡았다. 가늘고 기다란 손가락에서 어마어마한 힘이 느껴
두근. 두근.문지원의 심장이 세게 뛰기 시작했다.하지만 이내 이성을 붙잡으면서 생각했다.이건 흔들다리 효과다.가장 힘들어하는 시기에 누군가가 나타나 손을 잡아주면 그 사람에게 설레는 것처럼 말이다.지석훈은 문지원을 좋아해서 이러는 것이 아니다. 그저 지석훈이 책임감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도와주는 것이다.지석훈이 좋아하는 건 문지원이 아니다.그렇게 생각한 문지원은 집에 돌아간 후 이내 마음을 추슬렀다.지석훈은 여이현에게 연락해 저녁 약속을 잡았고 위치와 시간을 문지원에게 보내주었다.문자를 받은 문지원은 기쁜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잘 됐어! 이번 기회를 잘 이용하면...!”문지원은 떨리는 심정을 감추면서 중얼거렸다.‘아, 드레스도 준비해야 하는 거 아니야?’그 생각에 문지원은 얼른 옷장에서 드레스를 찾았다.그 움직임에 도우미가 나타나 물었다.“지원 씨, 옷장에서 뭘 찾으시는 거예요?”문씨 가문은 파산했다. 문지원의 아버지는 건강이 악화하여 병원에 입원했고 문지원의 큰 오빠는 사라졌다.평소에 문씨 가문에 빌붙던 사람들도, 친척, 친구들도 모두 사라졌다. 하지만 어릴 때부터 문지원을 키워온 도우미는 여전히 이 집에 남아있었다.문지원이 가지 말라고 붙잡은 건 아니다.도우미가 가지 않겠다고 한 것이었다. 문지원은 그런 도우미의 뜻을 존중해주고 월급도 평소처럼 주기로 했다.가문이 파산했다고 하지만 지석훈과 지혁진의 도움 아래 문지원은 어느 정도의 돈을 준비할 수 있었다. 그리고 곧 프로젝트를 진행할지도 모르니, 문씨 가문에게 아직 희망은 있었다.문지원은 이 도우미에게 너무 감사했다. 문지원에게 이 도우미는 거의 가족과도 같았다.그래서 문지원은 지금 상황을 도우미에게 설명해 주었다.“아주머니, 우리 가문 다시 살아날지도 몰라요. 곧 다른 대표님이랑 프로젝트 얘기를 하러 갈 거예요. 만약 성공한다면 그 빚을 다 갚고 우리 아빠 병원비까지 댈 수 있을 거예요.”도은숙은 문지원을 바라보았다.문지원은 철없던 여자아이에서, 어느새 가
문지원은 마음이 급했다. 하지만 급할수록 더욱 천천히 가야 한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문지원은 심호흡을 한 후 지석훈 옆에 앉았다.음식이 천천히 올라왔다.먹고 얘기하자고 하면서 여이현은 그저 몇 입만 먹은 후 젓가락을 내려놓았다.“들어보니까 문씨 가문에서 여진 그룹의 새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싶다면서요?”여이현의 새 프로젝트에는 재료를 제공해 줄 수 있는 건축재료 회사가 필요했지만 여진 그룹의 심사는 아주 까다로웠다.그리고 여진 그룹에게는 더 좋은 선택지가 있을 것이다.그래도 지석훈이 주선한 자리니 여이현은 지석훈의 얼굴을 봐서 이곳에 나온 것이었다.문지원은 그 말을 듣고 젓가락을 내려놓고 긴장을 감추며 얘기했다.“네. 저희 문씨 가문은 건축재료 업계에서 거의 10년 가까이 종사했습니다.”“하지만 파산하셨잖아요. 제가 알기론 은행에 빚이 많이 있는 거로 아는데... 어디서 나온 자신감이죠?”여이현이 손깍지를 끼고 다리를 꼰 채 날카로운 시선으로 물었다.여기까지 온 건 지석훈의 얼굴을 봐서였지만 그 후부터는 문지원의 몫이다.여이현은 사업가지 자선 활동가가 아니다. 문씨 가문의 파산을 도와줄 의무가 하나도 없다는 뜻이다.세상에 파산한 회사가 얼마나 많은데 여이현이 그런 회사들을 하나하나 도와줄 순 없었다. 만약 문지원이 정말 좋은 거래를 하려고 한다면 여이현은 동의할 것이다.하지만 그렇지 않으면 여이현은 가차 없이 떠나버릴 것이다.문지원도 이 상황을 예견하고 준비했다.지석훈이 도와줬으니 여이현도 도와줄 거라는 생각을 한 건 아니었다. 문지원은 지석훈의 소식을 기다리면서 많은 준비를 했다.“대표님, 먼저 이것 좀 보시죠. 이건 제가 정리한 저희 공장 자료입니다. 물론 이 공장들은 다 문씨 가문 것이죠.”문지원이 서류 하나를 꺼냈다. 스크린이 없어 불편해하지 않을까 걱정했지만 여이현은 개의치 않고 읽어 내려갔다.첫 페이지를 봤을 때 여이현은 약간 미간을 좁혔다.생각보다 정리가 잘 되어있었고 첫 페이지만 봐도 중점을 알 수 있었다.
문씨 가문은 원래 건축업계에 종사해 왔다. 그래서 품질은 보장할 수 있었다.지금은 돈이 급하게 필요한 상황이니 여진 그룹에게 낮은 가격으로 조달한다면 여진 그룹에게는 좋은 조건일 것이다.품질만 합격된다면 누구든지 낮은 가격을 원할 것이다.그게 아무리 여진 그룹의 대표, 여이현이라고 해도 말이다.여이현은 아주 시원하게 대답했다.“알겠습니다. 그러면 계약서를 체결하죠. 비서를 데리고 왔으니까요.”옆의 비서는 빠르게 계약서를 건네주었다.문지원은 빠르게 계약서에 사인을 했다.떠날 때, 여이현이 지석훈을 불러 따로 얘기했다.문지원은 궁금하긴 했지만 애써 그렇지 않은 척하면서 멀리 떨어져 있었다.돌아온 지석훈의 표정은 그리 좋지 않았다. 하지만 그게 문지원과 연관된 일은 아닌 것 같았다.“가자. 데려다줄게.”문지원은 홀로 택시를 타고 가려고 했지만 데려다주겠다는 지석훈의 말에 그의 차에 탔다.집에 돌아왔을 때는 깊은 밤이었다.생각해 보면 지금까지 버틸 수 있었던 것도 지석훈 덕분이다.늦은 시각이었지만 도은숙은 아직 문지원을 기다리고 있었다.도은숙은 문지원이 돌아오지 않자 걱정되어서 계속 기다리고 있었다.문지원이 들어오는 순간 도은숙이 다가와 외투를 들어주면서 얘기했다.“아이고, 지원 씨. 저녁에 추운데 왜 외투를 안 걸쳐요. 많이 입지도 않았으면서.”문지원은 약간 미안해하면서 얘기했다.“미안해요, 아주머니를 신경 쓰게 만들었네요. 다음부터 주의할게요.”“들어가, 난 이만 갈게.”도은숙은 그제야 한 남자가 문지원을 데려다주었다는 것을 발견했다.눈이 좋지 않은 그녀는 한참 있다가 그제야 문지원을 데려다준 남자가 지석훈이라는 걸 발견했다.그러고는 히죽 웃으면서 얘기했다.“시간도 늦었는데 그냥 여기서 자고 가요. 어차피 지원 씨랑 곧 결혼할 사이잖아요.”말을 마친 도은숙이 들어가서 방을 정리했다.문지원은 도은숙이 이러는 의도를 바로 알아차렸다. 지석훈의 귀가 붉게 달아오른 것을 본 문지원이 얼른 도은숙을 말리면서 해명하려고 했다.
지석훈이 나왔을 때 안색이 다시 예전대로 돌아왔고 문지원이 느끼고 있던 어색함도 어느새 줄어들었다. 하지만 그녀의 머릿속엔 자꾸만 조금 전 보았던 것들이 떠올랐다. 샤워 가운으로 가려지지 않는 탄탄한 가슴 근육과 길게 쭉 뻗은 다리가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문지원은 고개를 휙휙 저으며 머릿속에서 지워버렸다.“괜찮아요? 여기 가끔 단수되고 그래요. 너무 가끔 일어나는 일이라 딱히 신경 쓰지 않았는데 하필이면 오늘 단수될 줄은 몰랐네요.”사실 문씨 가문에 벌어진 일이 너무도 많아 미처 수리할 시간이 없었던 것이지만 문지원은 조금 후회가 되었다. 미리 수리했었더라면 이런 민망한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테니 말이다. 다행히 지석훈은 딱히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괜찮아. 이미 다 씻었던 참이었어.”그 말을 들은 문지원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다가 이내 본론이 떠올라 다시 입을 열었다.“참, 여 대표님이 공장으로 사람을 보내 보러 올까요?”“아마도 그럴 거야. 내가 아는 여이현은 행동력이 빠른 사람이라 아마 내일이 아니면 모레 즈음에 직원을 통해 너한테 연락할 거야.”지석훈은 곰곰이 생각했다. 정말로 문지원을 위로해주기 위해 한 말이 아니었다. 여이현은 효율을 따지는 사람이었고 뭐든 미루는 것을 싫어했다. 프로젝트를 문지원에게 맡겼으니 이른 시일 내에 자신의 직원을 보내올 것이 분명했다.“석훈 씨는 여 대표님과 친하죠? 그럼 여 대표님에 대해 좀 알려주면 안 돼요? 그래야 앞으로 프로젝트 진행에도 실수 없이 할 수 있을 것 같아서 그래요.”말을 마친 문지원은 바로 손을 저었다.“혹시 말해주기 불편한 거라면 거절해도 돼요.”문지원은 그럼에도 혹시나 하는 기대를 품고 있었다. 쉽게 찾아온 기회가 아니었던지라 그녀는 정말로 잘하고 싶었고 놓치기 싫었다.지석훈은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아직 잘 시간은 아니니까 조용한 곳에 가서 알려줄게.”문지원은 그를 서재로 안내했다. 서재는 그녀의 아버지인 문용석이 쓰던 곳이었지만 입원하고 나서 아무도 서재로 들어오
비서가 왜 자신에게 이런 말을 꺼내는 것인지 충분히 눈치챌 수 있었다. 여이현은 문씨 가문의 상황을 정말로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아무리 그녀가 원치 않는다고 해도 지금 상황에서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고 지금의 그녀는 너무도 곤란했다.직원이 전부 떠나갔으니 공장이 아무리 좋아도 무용지물이었다. 그녀는 원래 자신에게 조금 남은 돈으로 오랫동안 함께 일했던 직원들을 다시 불러올 생각이었지만 몇 명을 불러올 수 있을지는 몰랐다.그녀의 집안이 망하면서 수많은 직원들이 갑작스럽게 실업하게 되었고 심지어 한 달 월급이 밀려있었던 상태였다. 직원도 많았으니 그들의 월급만 해도 엄청난 금액이었다.문지원은 아직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생각하지 못했고 그저 일단 부딪쳐 보면서 해결하려고 했다. 자신이 죽기 전까지 언젠가는 해결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지그시 감았던 두 눈을 다시 떴을 때 그녀는 자존심을 꾹꾹 눌러버렸다. 지금 상황은 자존심을 챙길 때가 아니었다.“자금 문제만 도와주시면 돼요. 인력 문제는 제가 따로 해결할 수 있으니까요.”문지원이 말하자 비서는 고개를 들어 그녀를 보았다. 그는 문지원처럼 잘살던 집안의 딸이 자기 형편을 인정하고 도움을 요청하는 것은 아주 어려운 일일 거라고 생각했다. 여이현이 그에게 이런 말을 전하라고 할 때도 그는 조금 난감했었다. 하지만 상황을 받아들이고 스스럼없이 도움을 요청하는 문지원을 보니 생각이 바뀌었다. 이런 사람이 앞으로 무슨 일을 하든 성공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알겠습니다. 제가 돌아가서 대표님께 말씀드리겠습니다. 자금은 아마 오늘이 아니면 내일 즈음에 이체될 겁니다. 그때가 되면 문지원 씨께서 알아서 문제를 해결하시길 바랄게요.”비서는 담담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역시나 비서가 말했던 것처럼 오후에 바로 문지원의 핸드폰으로 은행 메시지가 도착했다.그녀의 카드로 이체된 금액은 총 2억 원이었고 이 돈으로 충분히 밀린 직원들의 월급을 해결할 수 있었다.문지원은 돈을 받자마자 바로 예전의 공장장을 찾아갔다. 공
지석훈의 상처를 치료해줄 때 문지원은 아주 열심이었다. 지석훈은 저도 모르게 그런 그녀를 빤히 보게 되었고 은은한 조명 아래에 있는 그녀의 모습은 너무도 예뻤다. 연고가 상처에 닿은 순간 지석훈은 저도 모르게 찬 공기를 들이마셨다.“아, 미안해요. 혹시 방금 아프게 했어요?”문지원은 고개를 숙인 채 그의 상처에 대고 후후 바람을 불었다.“이러면 조금 나을 거예요. 최대한 살살 발라볼 테니까 조금만 참아줘요.”“문지원, 난 어린애가 아니야. 이런 통증쯤이야 얼마든지 참을 수 있어. 그러니까 애 취급하지 마.”지석훈은 그런 그녀의 행동에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문지원이 말했다.“석훈 씨가 아이가 아니라는 거 당연히 알고 있죠. 하지만 아이만 다치면 아픈 게 아니잖아요. 어른도 다치면 똑같이 아파요. 그리고 이런 통증은 줄일 수 있는 거예요. 제가 최대한 살살 바르면요.”최대한 살살 약 발라주겠다고 하면서 대체 왜 자꾸만 그에게 참으라고 하는 것일까.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지석훈은 더 말하지 않았다. 팔을 치료한 뒤 문지원은 그의 다리를 치료해주었다. 전부 치료해주고 나니 어느새 반 시간이 훌쩍 지났다.“시간도 늦었는데 얼른 씻고 쉬어. 내일 공장으로 갈 거면 내가 데려다줄게.”지석훈은 소파에서 일어나며 손님방이 있는 쪽을 가리켰다.“저 방에 새 이불도 있으니까 그냥 덮으면 돼.”“고마워요. 이 은혜를 어떻게 보답해야 할지를 모르겠네요.”문지원은 농담을 반쯤 담아 그에게 말했다. 그녀는 현재 제 코가 석 자인 상황이었다. 집안에 들이닥친 일을 처리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힘들었던지라 지석훈에게 보답할 여력은 없었기에 정말로 보답할 수 있을지 몰랐다.지석훈은 그런 그녀를 보며 고개를 저었다.“우린 친구잖아. 친구 사이에 그런 부담은 가질 필요 없으니까 얼른 들어가서 쉬어. 넌 피곤하지 않을지는 몰라도 내가 피곤해.”“그럼 쉬는 데 방해하지 않게 전 이만 먼저 방으로 들어가 볼게요.”문지원은 몸을 돌려 걸음을 옮겼다. 손님방으로 들어온 그녀는 먼
두 사람이 서로를 알게 된 후 지석훈은 이미 문지원에게 충분히 많은 것을 도와주었다. 그에게 진 빚도 갚지 못할 정도였던지라 만약 그가 그녀를 구해주다가 다치게 된다면 그녀는 정말로 어떻게 보답해야 할지 몰랐다.눈 앞에 펼쳐진 위험한 상황을 지석훈은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이대로 가버린다면 문지원 혼자서 그 위험을 감당해야 했기에 그는 그녀를 두고 절대 혼자 도망칠 수 없었다. 그렇게 그는 두 남자에게 달려들어 싸웠다.문지원이 초조해하고 있던 때 마침 그녀가 신고했던 경찰들이 도착했다. 경찰들은 차에서 내려 그들에게 총을 겨눴다.“움직이지 마! 두 손 들어!”두 남자는 빠르게 도망치려고 했지만 자신들의 차로 문지원의 차를 쳤던지라 더는 시동을 걸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도망칠 수 없었던 그들은 이내 경찰에게 제압당했다. 문지원과 지석훈도 경찰서로 따라가 진술서를 작성했다.진술서를 작성하고 나니 어느새 밤이 되었고 피로 물든 그의 셔츠를 보던 문지원은 눈가가 붉어졌다.“죄송해요. 괜히 저 때문에 이런 일에 휘말리게 했어요. 만약 제가 아니었다면 석훈 씨가 다칠 일도 없었을 텐데...”“크게 다친 것도 아닌데 뭘. 괜찮아.”지석훈은 애초에 자기 상처에 신경 쓰지 않았다.“오늘 밤은 우리 집에서 지내. 거기가 더 안전할 거야.”그러나 문지원은 고개를 저었다. 지금은 누구 집이 더 안전한가의 문제가 아니었다. 다친 사람이 있으니 당연히 병원부터 가야 한다.“다쳤잖아요. 그러면 병원 가서 치료부터 받아야죠. 온몸에 이상 없나 확인해야 저도 마음이 놓일 것 같아요.”지석훈도 그녀가 자신을 걱정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채고 있었고 입꼬리가 저도 모르게 자꾸만 올라갔다.“문지원, 내가 뭐 하는 사람인지 잊은 거야? 내가 의사야. 이 정도 상처는 별거 아니니까 병원까지 갈 필요 없어.”“아무리 별거 아닌 상처라고 해도 치료는 해야죠. 그렇게 내버려 두면 안 되는 거잖아요.”문지원은 여전히 그가 걱정되었다. 그러자 지석훈의 얼굴에 걸린 미소가 더 짙
그 순간 두 남자는 문지원을 향해 빠르게 달려왔다. 문지원은 급하게 차에 올라탄 뒤 사람이 많은 시내로 향했다. 시내엔 사람이 많았던지라 아무리 두 사람이 그녀에게 범죄를 저지르려고 해도 수많은 시선이 느껴지는 앞에서는 대놓고 하지 못할 것이었으니까.다행히 차가 옆에 있어 그녀는 바로 문을 열어 차에 올라탔다. 안전벨트를 할 새도 없이 시동을 걸었고 멈춰선 두 남자는 서로 마주 보았다.“도망치고 있어요!” “뭘 멍청하게 서 있어! 얼른 차 시동 걸어! 쫓아가야지!”옆에 있던 남자가 그의 머리를 내리치며 말했다. 지금이 어느 때인데 이런 쓸데없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인가. 두 사람은 애초에 돈을 받고 무엇이든 해주는 흥신소에서 일하는 사람들이었다. 만약 이대로 문지원을 놓친다면 의뢰인이 난리를 피우며 돈을 달라고 할 것이 뻔했다.두 사람의 차도 근처에 주차되어 있었던지라 남자는 빠르게 차를 몰고 다른 남자가 있는 곳으로 와서 태웠다. 차에 올라탄 남자는 이내 지휘했다.“속도 올려서 일부러 부딪쳐.”“네!”남자는 눈을 가늘게 접으며 속도를 꾹 울린 후 문지원의 차를 쫓아갔다. 엄청난 소리가 울려 퍼지고 두 차는 서로 부딪치게 되었다. 문지원의 몸이 그 충격에 앞으로 확 나갔고 다행히 제때 펴진 에어백 덕에 다치지 않을 수 있었다.그녀는 두 남자가 돈을 위해서 이렇게까지 할 줄은 몰랐다. 두 남자는 차에서 내린 후 그녀가 있는 운전석으로 달려와 끊임없이 창문을 두드렸다. 문지원은 당연히 열어줄 생각이 없었다. 두 남자도 그녀의 생각을 알고 있었던지라 한 사람은 계속 밖에서 그녀를 협박하고 다른 한 사람은 차로 돌아가 망치를 들고 왔다.“문지원 씨, 우린 문지원 씨랑 싸우려고 온 게 아니에요. 일단 내려서 평화롭게 잘 얘기를 나눈다면 우리도 조용히 물러갈 거예요. 굳이 이렇게까진 할 필요 없잖아요. 안 그래?”문지원은 당연히 남자의 말을 믿지 않았다. 흉흉한 두 남자의 얼굴만 봐도 신뢰도가 떨어졌다. 만약 남자의 말을 믿고 문을 열었다면 그들에게 어
마침 월말이었던지라 입원비를 낼 때가 되었고 약값도 내기 위해 특별히 통장 잔액에 얼마가 남아 있나 확인했다. 여이현이 준 2억으로 대부분 재료를 샀고 남은 돈은 밀린 직원들의 월급을 정산해 주었음에도 여전히 6000만 원 넘게 남아 있었다. 거기에다 그녀가 가지고 있던 돈까지 합하니 7000만 원 정도 되었다.잔액을 본 문지원은 다소 믿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어쩌면 여이현이 그녀가 무엇을 할지 미리 예상을 하고 2억을 준 것이 아닌가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하니 여진 그룹을 이끌어가고 있는 여이현이 대단하게 느껴졌다.대부분 사람들이 여이현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잔인한 사람이라고 말했지만 사실은 이렇게나 세심한 사람일 줄은 아무도 몰랐다. 한숨을 내쉰 그녀는 자신이 그에게 꽤나 많은 신세를 지고 있다고 생각했고 복잡한 머릿속을 정리한 채 병원으로 향했다.원무과에서 입원비와 약값을 계산한 후에야 그녀는 문용석을 보러 갔다. 병실에 누워있는 문용석은 여전히 예전 모습 그대로였다. 조용히 눈을 감은 채 침대에 누운 그의 모습은 꼭 바깥세상과 거리를 둔 듯한 모습이다.“아빠, 저 여진 그룹과 프로젝트를 하고 있는 중이에요. 우리 공장도 다시 가동되고 있고 전처럼 활력도 생겼으니까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입을 연 순간 그녀는 코끝이 시큰해졌다. 결국 밀려오는 감정에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수건을 적셔왔다. 문용석의 몸을 닦아주며 그녀는 계속 굳게 눈을 감은 문용석에게 말을 걸었다. 설령 문용석이 병으로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대답하지 못한다고 해도 말이다.그녀는 문용석의 곁에 오래 있어 주고 싶었지만 해야 할 일이 많아 결국 병실에서 한 시간만 머물다가 나올 수밖에 없었다. 병실 문을 열자마자 들어오려는 지석훈과 마주치게 되었다. 지석훈은 하얀 의사 가운을 입고 있었고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 있었다. 가슴팍 주머니엔 펜이 가지런히 꽂혀 있었고 마스크를 낀 채 눈만 내놓고 있었다.그의 뒤로 꽤나 많은 사람들이 있었고 대부분 의사와 간호사들
문지원은 시간을 내서 주현철을 만나 따져 물을 생각이었지만 그녀가 연락하기도 전에 주현철은 무슨 생각인지 먼저 그녀에게 연락했다.전화를 받은 문지원은 전화기 너머로 들리는 주현철의 목소리를 듣게 되었고 그는 훌쩍이며 그녀에게 사과했다.“지원아, 아저씨는 현 대표가 너한테 그런 짓을 할 줄은 몰랐단다. 다 내 탓이다. 내가, 내가 정말 네 아빠 볼 면목도 없구나!”전화기 너머로 철썩철썩 소리가 났다. 아마도 자기 뺨을 때리는 것 같았다. 문지원은 느껴지는 수상함에 일단 그의 말에 맞장구를 치며 그를 떠보기로 했다.‘그날 일을 아저씨가 정말로 몰랐다고?'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 말이 거짓이라고 단정 지었다. 애초에 그 자리는 주현철이 주선한 것인데 어떻게 모를 수가 있겠는가.“아저씨, 전 더 이상 어린아이가 아니에요. 그런 말로 절 속이실 필요 없으세요. 소용없으니까요.”문지원이 직설적으로 말하자 주현철은 역시나 조용해졌다. 한참 지나서 그가 입을 떼려고 하자 그녀는 빠르게 말을 자르며 논리적으로 말했다.“아저씨는 아저씨 체면을 지키기 위해 저한테 사업 파트너를 소개해주겠다고 하신 거겠죠. 저도 사실은 아저씨가 저희 아빠랑 친한 사이여서 아저씨 때문에 그 자리에 나간 거예요. 그런데 어떻게 저한테 그러실 수 있는 거예요? 정말로 아저씨가 몰랐다고 쳐도 마침 그 타이밍에 자리를 비운 건 너무도 이상하지 않아요? 전 앞뒤가 맞지 않는다고 생각하는데요. 그 짐승보다 못한 놈이 제 몸에 자꾸 손을 올릴 땐 왜 말리지 않으셨어요? 한 마디 정도는 하실 수 있으셨잖아요. 그때는 가만히 있다가 이제야 와서 저한테 전화로 몰랐다느니, 미안하다느니 억울한 척하시는 거예요?”가해자가 피해자인 척 연기를 하고 있는데 문지원은 하마터면 속아 넘어갈 뻔했다. 뒤늦게 정신이 번쩍 든 문지원은 어처구니가 없어 헛웃음만 나왔다. 주현철이 대체 무슨 낯짝으로 자신에게 먼저 연락한 것인지 알 수 없었다.전화기 너머로 긴 침묵이 이어졌다.“주현철 씨, 우리 아빠에게서 받은
간단히 말해 나이가 많은 아저씨들은 집안일을 할 줄 모른다는 것이다. 그 말을 들은 문지원은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이 문제는 확실히 그녀가 생각지 못한 문제였고 확실히 사소한 문제는 아니었다. 숙식 문제는 직원들에게 아주 중요한 문제였다. 그렇다고 해서 매번 숙식 제공한다고 말해놓고 정작 더러운 돼지우리를 보여줄 수는 없지 않겠는가.“일단은 그렇게 말씀해 주세요. 청소 문제는 제가 해결해 볼게요.”문지원은 빠르게 머리를 굴려 이 문제를 효과적으로 해결하려고 했다. 위생 문제는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그저 청소부 직원을 고용하면 되는 일이었지만 청소부 직원까지 고용하기엔 너무 수지에 맞지 않았다.청소부 직원은 하루에 몇만 원씩 번다. 그런 직원을 여럿을 고용한다면 하루에 몇십만 원 나갈 것이고 이 돈이면 차라리 그녀가 직접 하는 것이 더 나았다. 그녀가 직접 한다면 돈을 아낄 수 있을뿐더러 구석구석 깨끗하게 청소할 수 있으니까.“참, 그게 있었지! 왜 이제야 생각이 난 거지?”문지원은 뭔가 떠오른 듯 눈빛을 반짝이더니 바로 집으로 달려갔다. 도우미 아주머니 도은숙은 이미 휴가를 마치고 돌아온 상태였다. 다급하게 집으로 들어와 집안의 청소도구를 뒤지는 모습에 놀란 표정을 지었다.“지원 씨, 지금 뭘 찾는 거예요? 집 안의 청소는 제 담당이지 않아요?”도은숙은 그만 놀란 표정을 짓고 말았다. 문지원은 집안일이라곤 전혀 해본 적 없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문용석은 항상 딸은 귀하게 키워야 한다면서 집안일도 못 하게 했고 주방에 들어가 손에 물 묻히는 것조차 못하게 했다. 물론 문지원이 요리나 집안일에 흥미가 있다면 하게 해줄 것이었지만 문지원은 요리에 재능이 없었을 뿐 아니라 집안일에도 재능이 없었다.그랬기에 지금까지 그녀는 손에 물 한 방울 묻힌 적 없이 자랐다고 할 수 있다. 문지원은 빗자루를 찾아내면서 말했다.“공장의 숙소에 청소할 사람이 필요하거든요. 청소부 직원 고용해도 되긴 한데 비싸서 제가 직접 해보려고요. 그러면 돈을 아낄 수 있잖아요
현관으로 온 지석훈은 그제야 문지원이 떠올라 망설이다가 걸음을 멈추었다. 문지원은 일부러 핸드폰을 꺼내 보면서 괜찮은 척했지만 속에서는 이상하리만큼 씁쓸함이 밀려왔다.“전 괜찮으니까 얼른 가보세요. 그 사람들도 더 어떻게 찾아오진 못할 거예요. 여기서 더 찾아온다면 범죄가 될 테니 말이에요.”“그래. 무슨 일이 생기면 나한테 바로 연락해.”안색이 조금 풀린 지석훈은 바로 문을 열고 나가버렸다. 집 안에는 문지원 혼자 남게 되었다. 예전에도 집 안에 혼자 남은 적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이번엔 이상하리만큼 외롭고 쓸쓸했다. 창문이 굳게 닫혀 있음에도 자꾸만 어딘가 바람이 새어 나와 그녀의 손발을 차갑게 하는 것 같았다.그녀는 최대한 다른 생각은 하지 않으려고 했고 따듯한 물에 샤워한 후 일찍 쉬려고 했다. 다행히 이날 밤 그녀에게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다음 날이 되자 문지원은 청소 직원을 불러 문과 바닥을 도배한 붉은 페인트를 지워달라고 했다. 그러고 나서 그녀는 바로 공장으로 달려가 구인 상황을 살펴보았다. 결과는 놀랍게도 지원자가 14명이나 모였고 그녀는 보자마자 기뻐했다. 손기영과 같은 마을에 사는 마을 주민이라는 것을 들은 그녀는 바로 손기영에게 물었다.“공장장님 마을 사람들이 정말로 공장에서 일하고 싶다고 했어요?”“당연하지. 마다할 리가 있겠어? 내가 충분히 설명했는데도 일하고 싶다고 찾아온 사람들이야.”손기영은 원래 바쁘게 일하고 있었지만 그녀를 보자마자 하던 일을 멈추고는 걱정이 담긴 잔소리를 해댔다.“문 사장, 앞으로 공장으로는 가끔 찾아오는 것이 좋겠어. 여긴 평소에 작업하느라 공기가 좋지 않아. 우리 직원들도 모자며, 마스크며 꽁꽁 쓰고 일한다고.”문지원은 황급히 손을 올려 아무것도 없는 얼굴을 만졌다.“아, 죄송해요. 깜빡하고 있었어요. 지금 바로 가서 마스크와 작업복으로 갈아입고 올게요!”그녀는 얼른 마스크를 착용했다. 이내 손기영은 그녀를 데리고 막 공장으로 출근한 직원들을 소개해주었다. 남자도 있고 여자도
문지원은 지석훈이 자신에게 부담을 주지 않으려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현유한과 프로젝트를 위해 자신을 팔아버린 주현철, 그리고 현유한에게 당한 폭행과 욕설만 떠올리면 저도 모르게 몸이 덜덜 떨렸다. 현유한이 절대 자신이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을 그녀는 확신할 수 있다.지석훈은 그런 그녀의 모습을 눈치챘지만 그가 묻기도 전에 문지원이 먼저 고개를 들어 말했다.“네. 그럼 부탁드릴게요. 저 좀 데려다주세요.”“그래.”지석훈은 구겼던 미간을 폈다. 그녀가 괜찮다고 말하지 않아도 어차피 그는 며칠 동안 그녀를 돌봐줄 생각이었다. 그녀에게 더는 다른 나쁜 일이 생기길 바라지 않았으니까. 그러나 그녀의 집에 도착한 지석훈은 문 앞 바닥과 현관문에 빨간 페인트로 ‘X 녀'와 ‘쌍 X'라는 욕으로 가득 도배된 것을 보게 되었다. 절로 미간을 찌푸리게 하는 욕설들이었다.그는 더는 모른 척 넘어갈 수 없어 옆에 있던 문지원을 보았다.“요즘에 이상한 사람한테 걸리기라도 한 거야?”그녀가 입을 꾹 다물고 있자 그는 계속 물었다.“혹시 오늘 다친 것과 연관이 있는 거지?”비록 의문문이었지만 그의 어투엔 확신으로 가득했다. 더는 숨길 의미가 없을 정도였다. 더구나 현유한이 이렇듯 빨리 자신의 거처까지 찾아낼 줄은 몰랐다. 문지원은 자신이 절대 다른 사람과 맞설 수 없는 존재임을 알았다. 지금 상황에서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은 직접 믿을 만한 사람을 찾아가 도움을 요청하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은 더는 믿을 수가 없다.문지원이 현재 믿을 수 있는 사람은 지석훈 한 명뿐이었다. 괴로운 눈빛으로 빨간 글씨를 보던 문지원은 이내 시선을 돌려 키를 꺼냈다.“일단 들어가서 얘기해요. 오늘은 주말이고 은숙 아주머니도 쉬는 날이에요.”지석훈은 묵묵히 그녀를 따라 들어갔다. 집 안으로 들어온 문지원은 먼저 겉옷을 벗었다. 그리고는 한숨을 내쉬며 소파에 털썩 앉아 오늘에 있었던 일을 전부 지석훈에게 알려주었다.“전 현철 아저씨가 예전에 우리 아빠와 계속 협력을 이어
지석훈은 문지원이 말을 하지 않자 한숨을 내쉬었다.“일단 상처부터 치료해줄게.”이내 그는 소독약을 들고 돌아왔다. 문지원은 움찔하며 다소 민망해진 어투로 말했다.“크게 다친 것도 아닌데 제가 할게요.”그러나 지석훈은 그녀의 손을 꽉 잡으며 낮게 깔린 목소리로 말했다.“움직이지 마.”문지원은 저도 모르게 그의 말을 따랐다. 지석훈이 들고 있는 면봉이 그녀의 피부에 닿을 때마다 그녀는 어딘가 자극을 받은 것처럼 움찔거렸고 차가운 소독약에 찌릿찌릿한 기분이 들었다. 지석훈은 그런 그녀의 모습을 보더니 미간을 찌푸리며 자신이 약을 아프게 바른 것은 아닌지 생각했지만 문지원은 오히려 자신이 그의 심기를 건드렸다고 오해했다.“미안해요... 일부러 그러는 건 아니에요. 약이 상처에 닿으니까 따가워서 저도 모르게 움찔거린 거예요.”문지원은 원래부터 곱게 자란 부잣집 딸이었다. 문용석은 입원하기 전까지 행여나 자기 딸이 조금이라도 다치게 될까 봐 애지중지하며 길렀던지라 상처에 소독약을 발라보는 것은 태어나서 처음이었다.“그럼 살살 발라줄게.”이렇게 말한 지석훈은 천천히 움직였지만 문지원은 오히려 더 고역이었다. 소독약이 묻은 면봉이 상처에 닿을 때 원래는 그저 따갑기만 했지만 지석훈이 살살 바르고 있으니 깃털로 간질이는 것처럼 간지럽기도 했다.어떤 사람들은 고통을 잘 참을 수 있어도 간지러움은 참지 못했다. 문지원이 바로 이런 부류에 속했다. 결국 참지 못한 그녀는 손을 뻗어 지석훈의 손을 잡아버렸다. 지석훈도 멈추며 고개를 천천히 들었다. 시선이 맞닿은 순간 문지원은 그제야 자신이 바보 같은 짓을 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고 눈을 질끈 감으며 말했다.“그냥 아까처럼 발라주세요. 이건 너무 간지러워요.”그 말을 들은 지석훈은 굽혔던 몸을 일으켜 세우더니 헛기침 두어 번하며 어색한 목소리로 말했다.“미안해. 내가 거기까진 생각을 못 했네. 하지만 네 몸에 있는 상처들은 약 발라야 나을 수 있는 상처들이야. 어떤 부위엔 네 손도 닿지 않을 거고. 아니면 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