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자신이 강윤슬한테 이런 말투로 얘기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그도 마음이 편치 않았다.“네 진심을 짓밟은 적 없어. 네가 한 프러포즈, 난 한 번도 받아들인 적 없고. 만약 나였다면 처음 거절당했을 때 너랑 거리를 두었을 거야. 나한테 넌 친구야. 그런데 네가 어떻게 나한테 이래? 어떻게 나한테 이런 말을 하냐고? 프러포즈를 거절한 게 그렇게 잘못이냐? 어떻게 다른 여자를 데리고 와서 내 앞에서 연기를 해?”그녀의 목소리는 힘이 없었고 그를 바라보는 눈빛에 슬픔이 담겨 있었다.지석훈은 차갑게 콧방귀를 뀌었다. “잘못은 아니지. 선배한테 그럴 의무도 없고. 하지만 선배의 부름에 나도 꼭 달려가야 한다는 의무도 없어. 그리고 허튼 생각 하지 마. 딴 여자랑 연기 같은 거 한 적 없으니까. 나랑 함께 선배 집으로 갔던 그 여자는 내 약혼녀야.”“이젠 무사하니까 핸드폰 옆에 두고 갈게. 무슨 일 있으면 가족들한테 전화를 하든가 아니면 간호사나 의사 불러.”말을 마치고 그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병실을 떠났다. 그녀는 그가 단지 화가 났을 뿐, 조금 있으면 다시 돌아올 거라고 생각했다. 그가 자신을 이렇게 내버려둘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하지만 시간은 일분일초가 흘렀고 그는 결국 돌아오지 않았다.그가 이번에 이렇게 화를 낼 줄은 몰랐다. 한편, 문지원은 밤에 기숙사에 가지 않고 일부러 출근 시간에 맞춰 낮에 찾아갔다.사람들이 그녀가 열쇠를 가지고 숙소 문을 여는 모습을 보게 된다면 한눈에 눈치챌 수 있으니까. 이내 동료들이 지석훈한테 문자를 보내왔다.[지 선생님, 언제 여자 친구가 생긴 거예요?][숙소에 오신 그 여자분 되게 괜찮아 보이던데요. 결혼은 언제쯤 하실 예정이에요?][지 선생님, 두 분 완전 잘 어울리는 것 같아요.]...이와 비슷한 문자가 수도 없이 쏟아졌다. 문지원에 저녁에 숙소로 갈 줄 알았지 이 시간에 갈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문지원은 여전히 포기하지 않고 그의 마음을
좋은 마음에서 갈 곳이 없는 그녀한테 숙소의 열쇠를 내어준 것이었다. 그렇게 말하면 문지원이 단념하고 물러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뜻밖에도 그녀는 그를 동아줄로 여기고 있었다.생각하면 할수록 화가 치밀어 올랐다.“이제야 알겠어. 왜 다들 문씨 집안을 나 몰라라 하는지. 당신네 문씨 집안 사람들은 하나같이 못된 사람들뿐이군.”그가 화를 낼 줄은 알았지만 이렇게까지 화를 낼 줄은 몰랐다. 그녀에 대해 뭐라 하는 건 상관없지만 가족까지 건드리는 건 참을 수가 없었다. 그녀도 기분이 상했다.“알아요. 내가 이러는 거 잘못된 일이라는 거. 하지만 방법이 없다고 했잖아요. 그래도 우리 가족한테까지 뭐라 하지는 말아요.”“그렇게 좋은 사람들이 왜 당신한테만 거액의 빚을 남겼을까? 왜 당신 오빠는 행방불명이 된 거야?”이렇게 상처 주는 말을 하고 싶지 않았지만 지나친 그녀의 행동에 화가 났다. 좋은 마음에서 도와주려고 한 건데 결과는?단념하기는커녕 그녀는 일부러 모든 사람이 두 사람의 사이를 오해하게 만들었다. 지금까지 이렇게 화가 난 적이 없었고 여자한테 이렇게 모진 말을 해본 적도 없다. 문지원이 그의 호의를 짓밟은 것이다.그의 말에 그녀 또한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러나 아버지를 믿고 싶었다. 아버지는 문씨 집안을 위해 위험을 무릅쓴 것이고 뜻밖에 손해를 보고 거액의 빚을 지게 된 것이다. 그리고 오빠는 평소에 그녀한테 잘해주었고 책임감이 있는 사람이었다. 지금 행방불명이 된 건 분명 뭔가 다른 이유가 있을 것이다.“아니요. 그럴만한 이유가 있을 거예요. 아까 숙소에서 사진도 찍어 아저씨한테 보냈어요. 아저씨는 날 믿고 있더라고요. 10억을 나한테 주셨고 당신의 아이를 가지게 된다면 우리 집 빚을 다 갚아주실 거라고 했어요.”지혁진의 제안이 너무 유혹적이라 거부할 수가 없었다. 뻔뻔스러운 여자라고 생각해도 좋았다. 막다른 골목에 몰린 상황에서 그녀한테는 이게 최선의 선택이니까.그녀는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런 모습을 보며 지석훈
그가 아버지의 입장이었더라면 그도 아버지처럼 했을 것이다. 그래서 일단 그냥 두기로 했다.“알았어. 아버지한테는 당신이 잘 알아서 해. 미리 말하지만 아버지한테서 가져간 돈은 나중에 꼭 갚아야 할 거야.”그러나 문지원과 아이를 낳을 생각은 없다.그녀도 그의 제안에 대해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하였다.“알았어요. 빚을 청산해 준다면 당신이 원하는 건 뭐든 다 할게요.”“일단 옷부터 입어.”이런 경우는 또 처음이다. 의사 생활을 하면서 그동안 많은 수술을 집도했고 그에게는 남녀 구분 없이 그냥 환자일 뿐이었다.그러나 문지원은 그한테 환자가 아니었다. 최악의 상황을 생각하고 있던 그녀는 지석훈의 말에 이내 옷을 챙겨입었다.그러나 그녀는 여전히 그의 앞에서 무릎을 꿇고 있었다. 인기척이 없자 그는 함부로 고개를 돌리지 못하였고 그 순간 뜻밖에도 그녀가 먼저 입을 열었다.“옷 다 입었어요.”그제야 그가 고개를 돌리고 그녀를 쳐다보았다.다른 뜻은 없었고 그저 사람을 보고 얘기하는 게 예의일 것 같아서 고개를 돌린 것이다. 그러나 그녀가 아직도 무릎을 꿇고 있을 줄은 몰랐다. “왜 아직도 무릎을 꿇고 있어? 당장 일어나.”그의 안색이 어두워졌다.그녀는 여전히 무릎을 꿇은 채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내 행동이 지나치다는 거 알아요. 하지만 정말 방법이 없어서 그래요. 벼랑 끝에 선 나한테 손 내밀어줘서 고마워요. 진심이에요.”“지금 이런 말 소용없어. 얼른 일어나. 아버지 쪽은 당신이 잘 협조해 줬으면 좋겠어. 그리고 하루빨리 제대로 된 직장도 찾아...”그녀가 또다시 그의 말을 끊으며 단호하게 입을 열었다.“문정 그룹의 채무만 갚는다면 회사는 예전처럼 정상적으로 운영될 거예요. 그럼 최대한 빨리 돈을 갚을게요.”그가 눈을 가늘게 뜨고 문지원을 쳐다보았다.“회사를 경영할 줄 알고 사업을 할 줄 안다고?”문정 그룹의 아가씨에 대해 만난 적이 없었기 때문에 그는 문지원이 어떤 사람인지 잘 모르고 있었다.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조금
지석훈은 자신의 능력으로 유명한 의사가 된 것이었고 그를 찾아오는 환자는 셀 수 없이 많았다.의사가 되지 않았어도 그는 부잣집 도련님으로 잘 먹고 잘살았을 것이다.그의 신분과 지위라면 그가 원하는 것은 말만 하면 다 이룰 수 있었다. “그래요. 난 당신한테 도움이 안 되죠...”“하지만 뭐 단정 짓기는 어렵지. 나중에 도움이 필요할지도 모르니까.”그가 그녀의 말을 끊고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한편, 지혁진은 두 사람 사이에 대해 완전히 믿는 눈치가 아니었다.그가 문지원을 찾아와 물었다.“석훈이가 정말 널 받아들였단 말이냐?”전에는 이것도 싫다 저것도 싫다던 녀석이 왜 문지원이 나타나자 이리 쉽게 받아들인 것일까?따지고 보면 두 사람이 만난 지는 고작 이틀밖에 되지 않았는데. “아저씨, 석훈 씨가 절 받아들인 건 제가 하도 귀찮게 해서 그런 거예요. 그리고 제 모습이 안타까워 보여서 그랬을 거예요.”문지원은 사실대로 얘기했다.두 사람 사이가 사랑으로 시작된 사이가 아니라는 건 누구나 다 잘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솔직하구나. 내가 왜 널 선택했는지 아느냐?”지혁진이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알아요.”지혁진이 그녀를 찾아갔을 때, 문씨 가문은 이미 엄청난 빚더미에 올라가 있었다. 그녀는 가문의 빚을 갚기 위해 그 돈이 필요했고 그 돈을 위해서라면 어떻게 해서든 그가 시킨 일을 완수할 것이다. “내가 시킨 일은 끝까지 완수하거라. 임신을 하면 10일이면 검사를 할 수 있다고 하니 오늘부터 보름 동안 시간을 더 주겠다.”지혁진이 기한을 줄 줄은 몰랐다.물론 요구를 하면서도 그는 아주 인간적이었다.“보름 안에 네가 석훈이의 아이를 임신하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섭섭지 않게 보상을 해줄 것이야.”그 말인즉 임신을 하든 안 하든 그녀는 손해를 볼 것이 없다는 소리였다. 지혁진도 그리고 지석훈도 모두 최선을 다해 그녀를 도와주고 있었다.너무 고마웠다. “아저씨, 정말 감사합니다.
다른 사람의 견제를 받지 않으려면 자신감과 실력이 있어야 한다. “고마워요.”그녀는 고개를 숙이며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말만 하지 말고 행동으로 보여줘.”그녀는 더 이상 아무 말이 없었다. 지석훈은 말하면 말한 대로 약속을 지키는 사람이었다. 그의 부름에 여이현과 친구들은 바로 달려왔다. 평소에는 지석훈도 아주 바쁜 사람이라 모처럼 한자리에 모이게 된 것이었다.문지원은 지석훈의 옆에서 그들과 일일이 인사를 건넸다. 이때, 최주하가 먼저 장난스럽게 입을 열었다.“뭐야? 두 사람 벌써 사귀는 사이야? 어쩐지 나한테 양보해달라고 그렇게 말해도 꿈쩍도 안 하더니 진작부터 마음에 두고 있었던 거야?”“이름이 뭐야? 애들한테 소개 좀 해줘.”처음에는 지석훈과 최주하가 만나는 관계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지석훈에 대해 알아가면서 그녀는 그게 다 소문일 뿐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지석훈에게는 오랫동안 좋아한 여자가 있었으니까. “문지원이라고 해요.”나도현이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이제야 우리한테 이렇게 얼굴을 보여주네. 걱정하지 마. 두 사람 결혼하면 내가 축의금은 두둑이 넣을게. 딸 낳으면 나랑 사돈 맺자.”지석훈이 그를 흘겨보며 입을 열었다. “뭔 헛소리야.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내 딸한테 뭔 같지도 않은 소리야? 최주하한테 얼른 딸이나 낳으라고 하던가. 그렇게 며느리를 얻고 싶으면... 아니지. 이현이한테 딸이 있잖아. 이현이 딸로 해 그냥.”나도현은 무의식적으로 여이현을 쳐다보았다. 하민이와 별이는 아주 친한 친구 사이였고 하민이는 하윤이를 아주 좋아했다.그러나 딸이라면 끔찍이도 아끼는 여이현은 전혀 그럴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는 앞으로 자신의 딸과 결혼할 사람은 반드시 그의 시험을 거쳐야 한다고 했다.딸이 정략 혼을 하는 걸 원치 않는다고 했다.여이현도 여이현이지만 하윤이에게는 대단한 외할아버지와 친할아버지가 있으니 훌륭한 남자가 아닌 이상 꿈도 꾸지 못할 것이다. 여이현이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용건부터 얘기해.”
“좋은 생각이야.”나도현도 그의 말에 동의했다. 문제는 양시은도 바쁘고 권다솔도 바빴고 온지유는 지석훈만 여자 친구를 데리고 왔다는 말에 아무래도 안 가는 게 낫겠다고 했다. 문지원은 남자들 사이에서 조금 난처했다.그러나 이 사람들이 문정 그룹을 다시 되살릴 수 있었기 때문에 그녀는 불편해도 꾹 참고 있었다.얼마 후, 화장실에서 그녀는 강윤슬과 마주쳤다.금방 맹장염 수술을 받은 사람이 병원에서 푹 쉬고 있어야 할 사람이 여기에 나타나다니...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고 강윤슬은 문지원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자신보다 더 예쁜 것도 아니었다. 게다가 문지원에 대해 조사를 해보니 문씨 가문은 이미 파산하였고 문지원은 바로 그때 지석훈을 만나게 된 것이었다.이 안에는 분명 사정이 있을 것이다.“석훈이가 당신과 거래라도 한 건가요?”강윤슬이 그렇게 물을 줄은 몰랐다.지석훈과 강윤슬 사이에 어떤 관계가 있든 간에 그녀와 강윤슬은 아무 사이도 아니었다. 그러니 여기서 강윤슬의 말을 들을 필요가 없었다. “석훈 씨가 나와 거래를 하든 안 하든 그건 당신과 전혀 상관없는 일이에요.”“건방지군요. 그쪽이 석훈이를 찾아오지 않았다면 지금 이 자리에도 없었겠죠.”강윤슬은 그제야 알아차렸다. 어쩐지 문지원이 자신을 보고도 아무런 반응이 없더라니...정상적인 연인 관계나 약혼녀라면 절대 그러지 않을 것이다. 결국은 그가 문지원과 거래를 하고 그녀를 자극하려고 했던 게 아닐까?잠깐 화장실을 다녀오려고 했던 것뿐인데 이곳에서 강윤슬을 만날 줄은 몰랐고 강윤슬이 이런 말을 할 줄은 더더욱 몰랐다. 싸늘한 표정을 지으며 말을 내뱉는 모습에 문지원도 더 이상 참고 싶지가 않았다. “내가 어디에 있든 죽든 살든 그건 당신이랑 전혀 상관없는 일이에요. 내가 석훈 씨 옆에 있는 게 불만이면 어디 한번 내 곁에서 그 사람을 빼앗아 가봐요. 석훈 씨가 당신한테 다시 돌아간다면 그것 또한 당신의 능력이겠죠.”말을 마친 문지원은 발걸음을 옮겼다.강윤슬이 무슨 짓을 할
문지원의 말에 그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방금 맹장염 수술까지 한 여자가 죽고 싶어서 환장한 것도 아니고 이게 무슨...문지원은 방금 한 말을 다시 반복했고 그는 아무 말도 없이 바로 룸을 뛰쳐나갔다. 그의 뒷모습을 보며 그녀는 강윤슬이 지석훈한테 얼마나 중요한 존재인지를 다시 한번 깨닫게 되었다. 얼마나 지나지 않아 그는 강윤슬이 있는 룸을 찾았다.오늘 강윤슬은 중요한 미팅이 있었고 꼭 참석해야 하는 자리였다. 그러나 그녀는 술을 먹지 않았고 컵에 따뜻한 물을 담아두었다. 사업 파트너도 그 정도는 이해할 수 있었다. 아픈 몸을 이끌고 여기까지 온 것만으로도 존경받을 만한 일이니까. 지석훈은 단번에 달려들어 그녀의 손에 있는 컵을 쏟아버렸다.그는 불같이 화를 냈다. “강윤슬, 정말 왜 이러는 거야? 죽어도 좋아? 지금 선배 몸 상태가 어떤지 몰라?”강윤슬은 그가 이렇게 화를 내는 모습을 처음 봤다.‘그래서 뭐?’지석훈이 여기 나타난 건 방금 문지원을 만났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문지원이 그한테 뭐라고 한 거겠지...“미쳤어? 나 지금 미팅 중...”“미팅은 개뿔. 당장 나가.”분노가 가득 찬 호통에 강윤슬과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어안이 벙벙해졌다. 강윤슬의 사생활에 연루되고 싶지 않았던 사람들은 급히 자리를 떴다. “저기... 강 대표님, 미팅은 다음에 하죠.”“다음은 없습니다.”지석훈은 여전히 화가 나 있었다. 강윤슬의 전화를 받고 그녀가 맹장염이라는 것을 알게 된 후 그는 정신없이 그녀를 병원으로 데려갔다. 수술을 마치고 병실로 옮겨지기까지 그녀의 곁을 지켰는데, 강윤슬은 그가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아무렇지 않은 듯 미팅 자리에 나왔다. 이럴 거면 뭐 하러 수술은 하는가? 차라리 집에서 죽고 말지...이내, 룸 안에는 두 사람뿐이었다. 강윤슬은 이렇게 화를 내는 그의 모습을 보며 차갑게 웃었다.“지석훈, 꼭 이렇게까지 해야 해? 문지원 씨한테 별 얘기 안 했어. 그게 여기까지 무작정 들이닥칠 일이니? 그리
그런데 그가 갑자기 그녀를 확 끌어당겼고 그녀는 그의 몸 위로 넘어졌다. 깜짝 놀란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몸을 일으켜 세웠다.그런데 그가 그녀의 허리를 더 꽉 끌어안았다. “강윤슬, 내가 너 얼마나 사랑하는데. 어떻게 나한테 이래?”“내가 프러포즈를 몇 번이나 했는데 어떻게 한 번을 안 받아주냐? 가라면 가고 오라면 오고 그렇게 강아지같이 꼬리를 흔들었는데 어떻게 내 진심을 이렇게 짓밟는 거냐고?”문지원을 안고 있는 그의 팔에 힘이 점점 더 들어갔다. 그가 점점 더 가까이 다가왔고 높은 콧대가 그녀의 얼굴을 짓누르고 있어 통증이 몰려왔다.입술이 가까이 다가오자 그녀는 재빨리 그의 입을 막았다. “진심을 짓밟은 게 아니야. 너무 바빠서 그랬어. 난... 일이 중요한 사람이잖아. 사랑 같은 건 나한테 사치야.”문지원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가 자신을 강윤슬이라고 착각하고 있으니 지금은 강윤슬이 되기로 했다.사실 그가 술에 취해있으니 지금이 그를 가까이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그러나 이렇게 다가가는 건 아닌 것 같았다.그가 자신을 도와주겠다고 약속까지 했는데...오늘도 그는 그녀를 도와주기 위해 친구들을 불러 모았다. 그녀는 양심 없는 사람이 될 수 없었다. “그래?”그가 씁쓸한 미소를 짓더니 혼자서 중얼거렸다. 문지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러니까 매번 너한테 먼저 전화를 하는 거지.”“그럼 내 프러포즈 받아줄 거야. 나랑 결혼할 거야?”“응.”그를 달래고 있을 뿐이었는데 그가 그녀를 더 꽉 끌어안았다.힘이 너무 세서 숨을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 그녀가 손을 뻗어 그를 밀어냈다. “숨 막혀.”“미안.”그는 이내 그녀를 풀어주었다.만취 상태에도 그는 크게 실수를 하지 않았고 그녀와 거리를 두었다. 그러나 술에 너무 취한 탓인지 자꾸만 휘청거렸다. 소파에 기대는 순간 그가 바로 뻗어버렸고 불과 몇 초 만에 그는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그를 끌어당길 수 없었던 그녀는 어쩔 수 없이 옆에서 지켜보기만 했다.
현관으로 온 지석훈은 그제야 문지원이 떠올라 망설이다가 걸음을 멈추었다. 문지원은 일부러 핸드폰을 꺼내 보면서 괜찮은 척했지만 속에서는 이상하리만큼 씁쓸함이 밀려왔다.“전 괜찮으니까 얼른 가보세요. 그 사람들도 더 어떻게 찾아오진 못할 거예요. 여기서 더 찾아온다면 범죄가 될 테니 말이에요.”“그래. 무슨 일이 생기면 나한테 바로 연락해.”안색이 조금 풀린 지석훈은 바로 문을 열고 나가버렸다. 집 안에는 문지원 혼자 남게 되었다. 예전에도 집 안에 혼자 남은 적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이번엔 이상하리만큼 외롭고 쓸쓸했다. 창문이 굳게 닫혀 있음에도 자꾸만 어딘가 바람이 새어 나와 그녀의 손발을 차갑게 하는 것 같았다.그녀는 최대한 다른 생각은 하지 않으려고 했고 따듯한 물에 샤워한 후 일찍 쉬려고 했다. 다행히 이날 밤 그녀에게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다음 날이 되자 문지원은 청소 직원을 불러 문과 바닥을 도배한 붉은 페인트를 지워달라고 했다. 그러고 나서 그녀는 바로 공장으로 달려가 구인 상황을 살펴보았다. 결과는 놀랍게도 지원자가 14명이나 모였고 그녀는 보자마자 기뻐했다. 손기영과 같은 마을에 사는 마을 주민이라는 것을 들은 그녀는 바로 손기영에게 물었다.“공장장님 마을 사람들이 정말로 공장에서 일하고 싶다고 했어요?”“당연하지. 마다할 리가 있겠어? 내가 충분히 설명했는데도 일하고 싶다고 찾아온 사람들이야.”손기영은 원래 바쁘게 일하고 있었지만 그녀를 보자마자 하던 일을 멈추고는 걱정이 담긴 잔소리를 해댔다.“문 사장, 앞으로 공장으로는 가끔 찾아오는 것이 좋겠어. 여긴 평소에 작업하느라 공기가 좋지 않아. 우리 직원들도 모자며, 마스크며 꽁꽁 쓰고 일한다고.”문지원은 황급히 손을 올려 아무것도 없는 얼굴을 만졌다.“아, 죄송해요. 깜빡하고 있었어요. 지금 바로 가서 마스크와 작업복으로 갈아입고 올게요!”그녀는 얼른 마스크를 착용했다. 이내 손기영은 그녀를 데리고 막 공장으로 출근한 직원들을 소개해주었다. 남자도 있고 여자도
문지원은 지석훈이 자신에게 부담을 주지 않으려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현유한과 프로젝트를 위해 자신을 팔아버린 주현철, 그리고 현유한에게 당한 폭행과 욕설만 떠올리면 저도 모르게 몸이 덜덜 떨렸다. 현유한이 절대 자신이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을 그녀는 확신할 수 있다.지석훈은 그런 그녀의 모습을 눈치챘지만 그가 묻기도 전에 문지원이 먼저 고개를 들어 말했다.“네. 그럼 부탁드릴게요. 저 좀 데려다주세요.”“그래.”지석훈은 구겼던 미간을 폈다. 그녀가 괜찮다고 말하지 않아도 어차피 그는 며칠 동안 그녀를 돌봐줄 생각이었다. 그녀에게 더는 다른 나쁜 일이 생기길 바라지 않았으니까. 그러나 그녀의 집에 도착한 지석훈은 문 앞 바닥과 현관문에 빨간 페인트로 ‘X 녀'와 ‘쌍 X'라는 욕으로 가득 도배된 것을 보게 되었다. 절로 미간을 찌푸리게 하는 욕설들이었다.그는 더는 모른 척 넘어갈 수 없어 옆에 있던 문지원을 보았다.“요즘에 이상한 사람한테 걸리기라도 한 거야?”그녀가 입을 꾹 다물고 있자 그는 계속 물었다.“혹시 오늘 다친 것과 연관이 있는 거지?”비록 의문문이었지만 그의 어투엔 확신으로 가득했다. 더는 숨길 의미가 없을 정도였다. 더구나 현유한이 이렇듯 빨리 자신의 거처까지 찾아낼 줄은 몰랐다. 문지원은 자신이 절대 다른 사람과 맞설 수 없는 존재임을 알았다. 지금 상황에서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은 직접 믿을 만한 사람을 찾아가 도움을 요청하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은 더는 믿을 수가 없다.문지원이 현재 믿을 수 있는 사람은 지석훈 한 명뿐이었다. 괴로운 눈빛으로 빨간 글씨를 보던 문지원은 이내 시선을 돌려 키를 꺼냈다.“일단 들어가서 얘기해요. 오늘은 주말이고 은숙 아주머니도 쉬는 날이에요.”지석훈은 묵묵히 그녀를 따라 들어갔다. 집 안으로 들어온 문지원은 먼저 겉옷을 벗었다. 그리고는 한숨을 내쉬며 소파에 털썩 앉아 오늘에 있었던 일을 전부 지석훈에게 알려주었다.“전 현철 아저씨가 예전에 우리 아빠와 계속 협력을 이어
지석훈은 문지원이 말을 하지 않자 한숨을 내쉬었다.“일단 상처부터 치료해줄게.”이내 그는 소독약을 들고 돌아왔다. 문지원은 움찔하며 다소 민망해진 어투로 말했다.“크게 다친 것도 아닌데 제가 할게요.”그러나 지석훈은 그녀의 손을 꽉 잡으며 낮게 깔린 목소리로 말했다.“움직이지 마.”문지원은 저도 모르게 그의 말을 따랐다. 지석훈이 들고 있는 면봉이 그녀의 피부에 닿을 때마다 그녀는 어딘가 자극을 받은 것처럼 움찔거렸고 차가운 소독약에 찌릿찌릿한 기분이 들었다. 지석훈은 그런 그녀의 모습을 보더니 미간을 찌푸리며 자신이 약을 아프게 바른 것은 아닌지 생각했지만 문지원은 오히려 자신이 그의 심기를 건드렸다고 오해했다.“미안해요... 일부러 그러는 건 아니에요. 약이 상처에 닿으니까 따가워서 저도 모르게 움찔거린 거예요.”문지원은 원래부터 곱게 자란 부잣집 딸이었다. 문용석은 입원하기 전까지 행여나 자기 딸이 조금이라도 다치게 될까 봐 애지중지하며 길렀던지라 상처에 소독약을 발라보는 것은 태어나서 처음이었다.“그럼 살살 발라줄게.”이렇게 말한 지석훈은 천천히 움직였지만 문지원은 오히려 더 고역이었다. 소독약이 묻은 면봉이 상처에 닿을 때 원래는 그저 따갑기만 했지만 지석훈이 살살 바르고 있으니 깃털로 간질이는 것처럼 간지럽기도 했다.어떤 사람들은 고통을 잘 참을 수 있어도 간지러움은 참지 못했다. 문지원이 바로 이런 부류에 속했다. 결국 참지 못한 그녀는 손을 뻗어 지석훈의 손을 잡아버렸다. 지석훈도 멈추며 고개를 천천히 들었다. 시선이 맞닿은 순간 문지원은 그제야 자신이 바보 같은 짓을 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고 눈을 질끈 감으며 말했다.“그냥 아까처럼 발라주세요. 이건 너무 간지러워요.”그 말을 들은 지석훈은 굽혔던 몸을 일으켜 세우더니 헛기침 두어 번하며 어색한 목소리로 말했다.“미안해. 내가 거기까진 생각을 못 했네. 하지만 네 몸에 있는 상처들은 약 발라야 나을 수 있는 상처들이야. 어떤 부위엔 네 손도 닿지 않을 거고. 아니면 내
“지원 씨와 같은 나이대 여자들은 대부분 명품 가방을 좋아하던데, 아니면 명품 액세서리라던가 말이에요. 누가 허구한 날 공장에만 박혀서 더러운 일꾼들과 대화를 해요. 지원 씨 아버님 책임감이 전부 지원 씨가 떠안고 있으면 너무 불공평하잖아요. 안 그래요?”현유한은 자꾸만 슬금슬금 그녀의 옆으로 자리를 옮겼다. 문지원은 불길한 예감이 들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현 대표님, 전 대표님을 아주 존경해요. 오늘 이렇게 온 것도 사업에 관해 얘기하려고 온 거예요. 만약에 대표님께서는 다른 의도로 오신 거라면 전 이만 가볼게요.”주현철이 소개해준 상대는 정말이지 전혀 믿음직스럽지 않았다. 집으로 돌아간다면 그녀는 반드시 주현철의 연락처를 차단하고 더는 연락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그러나 그녀를 곱게 보내줄 현유한이 아니었다. 겨우 그녀를 속여 이곳까지 나오게 했으니 반드시 원하는 대로 놀아야 직성이 풀렸다. 그렇게 생각한 그는 문지원의 팔을 확 잡아당겼다.“나랑 살면 매달 용돈 1000만 원 줄 수 있는데 뭐하러 힘들게 이리저리 돌아다녀요? 어차피 그 공장도 곧 망할 것 같은 데 시간 낭비는 하지 않는 게 더 좋지 않겠어요?”“이거 놔요!”문지원은 두 눈을 부릅뜨며 발을 들어 그를 차버렸다.‘지금 스폰 제안하는 거야? 꿈 깨라고 해!'그녀에게도 자존심이 있었고 아무리 힘들다고 해도 자기 몸까지 팔 정도는 아니었다.“씨X, 좋게 말할 때 이리와.”현유한은 그녀의 발길질에 앓는 소리를 냈다. 룸 안에는 둘 뿐이었고 그의 힘이 그녀보다 셌던지라 당연히 문지원 정도는 쉽게 잡을 수 있을 거로 생각했다. 여하간에 문지원의 집안 상황도 좋지 않았던지라 문지원의 편을 들어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그가 무슨 짓을 해도 그녀를 지켜줄 사람도 없었다.“얌전히 있는 게 좋을 거야. 만약 내 심기를 거스른다면 이 바닥 사람들에게 절대 너와 협력하지 말라고 할 거고 그렇게 되면 네 그 허접한 공장도 망하게 되겠지!”현유한은 문지원을 노려보며 협박했다. 하지만 문지원
전화를 건 사람은 바로 문정 그룹의 단골 협력 업체 대표인 주현철이었다. 어제 문지원은 그에게도 연락했었지만 주현철이 수중에 진행하고 있는 프로젝트가 없다고 대답했기에 그녀는 결국 전화를 끊을 수밖에 없었다. 비록 오늘 갑자기 전화한 목적이 무엇인지 모르지만 일단은 받았다.“네, 아저씨. 무슨 일이세요?”“지원아, 아저씨가 너한테 프로젝트 소개해주려고 전화했단다. 어제 나한테 연락하지 않았니. 나한테까지 연락했으니 당연히 널 도와줘야지. 안 그러니?”주현철의 목소리가 핸드폰 너머로 들려왔다. 사실 문지원은 그의 연락이 불편하게 느껴졌다. 그녀는 분명 상대에게 협력하겠냐고 물었지만 상대는 그녀를 도와주는 것이라고 하지 않겠는가. 분명 협력은 서로 이익을 바라고 하는 일인데 말이다. 하지만 손님은 왕이었던지라 그녀는 그가 꺼낸 말이 불편하게 느껴진다고 해서 말다툼을 할 수는 없었기에 웃으며 대답했다.“네, 고마워요. 아저씨.”“지금 시간이 있는 거면 같이 식사라도 하자꾸나. 내가 소개해주지. 둘이서 잘 얘기해보고 서로 목적이 같다면 오늘 계약서를 쓰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구나. 얘기가 잘 안 되어도 괜찮단다. 이 아저씨한테 다 방법이 있으니까.”주현철은 손가락으로 책상을 툭툭 치며 말했다. 문씨 가문의 상황을 이미 전해 들어서 알고 있던 그였다. 솔직히 말해서 문지원은 현재 홀로 분투하고 있는 상태였다. 그런 그녀가 어떻게 다시 회사를 일으켜 세울 수 있겠는가. 다만 문지원의 미모는 확실히 예뻤다. 예쁜 얼굴을 가진 여자라면 기회는 얼마든지 있었다.“네, 시간 있어요. 아저씨 주소를 문자로 보내주세요. 제가 지금 바로 갈게요.”문지원은 자리에서 일어나 빠르게 문자로 받은 주소로 향했다. 룸의 문을 열자 안에는 남자 두 명이 앉아 있었다. 한 명은 그녀와 통화했던 주현철이었고 다른 한 명은 처음 보는 사람이었다.“지원아, 내가 너한테 소개하고 싶다던 사람이란다. 이름은 현유한이니까 현 대표라고 부르면 되겠구나.”“아니에요. 저와 문지원 씨는 나
“다들 돌아오지 않겠다고 하지? 이미 떠난 마음을 아무리 설득해봐야 돌아서겠어? 그리고 정말로 돌아온다고 해도 전처럼 열심히 일하려 하지 않을 거라고.”유은진이 옆에서 손기영을 달래주었다.“나도 이 사람들이 돌아오든 말든 신경 쓰지 않아. 하지만 문 사장이 직원만 모이면 바로 이 프로젝트를 시작할 수 있다고 했단 말이야. 일손이 부족한데 어떻게 일을 해? 물론 야근해도 괜찮아. 하지만 사람이 매일 야근하면서 살 수는 없잖아. 누가 버틸 수나 있냐고.”손기영은 점점 커지는 책임감에 어깨가 무거워졌다. 문지원은 이 일을 그에게 맡겼던지라 미리 보너스까지 챙겨주었다. 그랬기에 그는 반드시 맡겨진 임무를 잘 완성해야 했고 문지원의 믿음을 져버려서는 안 되었다.“내 기억에 우리 마을에 일거리 없는 사람들 꽤 되지 않았나? 일당만 받으며 불안정한 생활을 하고 있다고 기억해. 같은 마을 사람들이니 그 사람들이 어떤 사람인지 우리가 잘 알잖아. 그 사람들 중 믿음직스러운 사람들만 골라서 리스트를 만들고 문 사장한테 물어보는 건 어때? 괜찮다면 우리가 그 사람들에게 연락하면 되잖아.”유은진은 고민하는 손기영을 위해 방법을 생각해냈다. 손기영은 바로 유은진이 말한 대로 했다. 지금 상황에서 그가 할 수 있는 건 이것뿐이었으니까. 일단 먼저 공장부터 다시 가동하는 것이 먼저였다....다음 날 아침 일찍 문지원은 공장으로 왔다. 공장은 어제보다 더 깨끗했고 먼지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청소 업체를 부르지 않았다.의아했지만 문지원은 일단 발을 들어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손기영이 사람들을 이끌고 청소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들은 전에도 공장 안에 있는 설비들을 다루며 일해야 했던지라 설비에 진심이었다. 그랬기에 청소하는 것도 힘이 났다.“아저씨, 뭐 하세요?”“아, 문 사장. 이 사람들은 오늘부터 일하고 싶다고 한 우리의 직원들이야. 다들 할 일이 없는 거 같기에 일단 공장 청소 좀 하자고 했어. 그럼 나중에 일할 때도 편하잖아.”손기영은 들고 있던
문지원은 여진 그룹과 함께 진행하는 프로젝트를 손기영에게 자세하게 알려주었다. 손기영은 공장장으로 오랫동안 일했었기에 공장의 시스템에 아주 잘 알고 있었고 프로젝트를 듣자마자 그녀에게 자기 생각을 말해주었다.“문 사장, 예전에 일하던 직원 절반만 불러와도 정해진 기간에 완성할 수 있을 거야. 그런데 만약에 다른 사람들도 다시 돌아오고 싶다고 하면 어떻게 하려고? 받아줄 거야?”“당연하죠. 아저씨, 저희가 함께 일한 시간이 얼마인데요. 이번에 회사에 이렇게 큰 곤란이 들이닥치고 월급도 제대로 주지 못하는데도 남아서 함께 일하고 싶다는데 당연히 받아들여야죠. 공장엔 앞으로 이 프로젝트 말고도 다른 프로젝트도 있을 거예요. 그분들만 원하신다면 저는 전부 받아줄 거예요. 사람이 적은 것보다 많은 게 더 낫지 않겠어요?”문지원은 이미 미래까지 생각해두었다. 여진 그룹과의 프로젝트는 지석훈 덕에 뺏어올 수 있었던 것이었기에 급한 불부터 끄고 공장을 성공적으로 다시 가동한다면 다시 회사를 일으켜 세울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공장이 계속 정상적으로 운영되려면 일시적인 프로젝트보다는 장기적으로 프로젝트를 협상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했다. 평생 이 하나의 프로젝트만 바라면서 살 수는 없지 않은가.“알겠어. 문 사장 말만 들어도 힘이 솟아나는구먼. 앞으로 난 문 사장이 아니면 일하지 않을 거야.”손기영은 손을 올려 가슴을 치면서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문지원은 정말이지 문용석을 닮아도 너무 닮았다. 게다가 손기영은 문지원이 회사를 이끌어가면 어쩌면 전보다 훨씬 더 잘 되리라는 예감이 들었다.문씨 가문에서 나온 문지원은 단 한 순간도 쉰 적 없었다. 공장의 일은 손기영에게 맡길 수 있다고 해도 프로젝트를 끌어오는 일은 그녀가 해야 했다.그녀는 이번에 문용석의 사무실로 가 예전에 협력했던 협력 업체의 리스트를 찾아내곤 일일이 전화를 걸어 물었다. 문용석은 쓰러지기 전에 큰 프로젝트든 작은 프로젝트든 전부 직접 관리했고 질량도 꼼꼼히 살폈던지라 협력 업체 쪽에서 명성이
‘이렇게나 빨리 월급을 준다고?'돈을 받은 손기영은 현실감이 떨어져 얼떨떨한 얼굴로 보았다.“지원아, 이 돈은 어디서 난 거니?”“아저씨, 사실 제가 최근에 프로젝트를 하고 있는데 협력처 쪽에서 자금을 투자했어요. 그래서 받자마자 밀린 월급을 주러 온 거예요. 저도 아저씨랑 다른 직원분들의 형편이 안 좋다는 거 알고 있고 더는 미뤄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어요.”문지원은 차근차근 손기영에게 설명해주었다.“그리고 월급 말고도 물어볼 것이 있어요. 혹시 다른 곳으로 취직하셨어요? 그런 게 아니라면 다시 공장으로 돌아와 일할 생각 있으세요? 아저씨가 돌아오셔도 여전히 공장장으로 일하실 거예요. 공장에 새로운 주문이 들어왔는데 직원이 부족하거든요.”갑작스러운 소식에 손기영은 너무도 기쁘면서도 놀랐다.“공장이 이렇게나 빨리 다시 돌아간다고?”그는 확실히 문정 그룹이 다시 일어설 거라고 생각했지만 이렇게나 빨리 일어설 줄은 몰랐고 그것도 문지원의 손에서 다시 일어서게 될 줄은 몰랐다. 겉보기엔 한없이 연약한 문지원이 파산한 기업을 다시 회생하고 있을 줄은 전혀 몰랐다.“네. 전 전에 일하시던 분들이 계속 일했으면 해서요. 어쨌든 그동안 일한 시간이 있으니 경험도 쌓였잖아요. 만약에 정말 싫어서 다들 거부한다면 저도 이해하니까 괜찮아요. 신입을 뽑아서 다시 일 가르쳐주면 돼요.”“난 당연히 좋지. 회장님도 나한테 얼마나 잘해주셨는데. 너도 돈이 생기자마자 우리 밀린 월급부터 주려고 온 거잖아. 난 내일부터 바로 출근할 수 있단다.”손기영은 자신의 허벅지를 ‘탁' 치면서 말했다. 안 그래도 취직이 잘되지 않아 속이 타던 때였다. 그런데 문지원이 다시 일하러 오라고 하니 어찌 기쁘지 않을 수 있겠는가.그는 돈 봉투에서 40만 원 정도 세더니 꺼내 문지원에게 돌려주었다.“지원아, 아니지. 문 사장, 난 월급만 받을게. 우리 사이에 이자라니. 당연히 일한 만큼 받아야 하지 않겠어? 그러니 이 돈은 더 받을 수 없어.”문지원은 웃으며 그를 보았다. 예전부터 그
여자는 문지원을 본 후 딱히 반기는 기색이 아니었고 그저 옆으로 길을 내어주며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들어와요.”“지원아, 네가 여긴 어쩐 일이니?”손기영은 아주 열정적인 모습으로 문지원을 반기며 차도 따라주고 과일도 내주었다. 옆에 있던 그의 아내는 보면 볼수록 짜증이 치밀었다.“그 체리는 해수를 위해 남겨놓은 건데 그걸 왜 꺼내. 지금 체리가 얼마나 비싼지 알고는 있어?”“집에 손님이 왔는데 아무것도 대접하지 말라고? 곧 식사 시간이니까 당신은 얼른 가서 상이나 차려줘.”손기영은 자신의 아내에게 눈빛을 보냈다. 그도 문지원이 자신을 왜 찾아온 것인지 모른다. 어쩌면 그에게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서 찾아왔을 수도 있다. 어쨌든 손기영은 이렇게 반겨주는 것 외엔 그녀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이 없었다. 밀린 한 달 월급은 나중에 천천히 받아도 되었지만 영원히 안 받을 수는 없다.나중에 문씨 가문에 다시 돈이 생겼을 때 받을 생각이었다. 사람이 아무리 힘들고 상황이 어렵다고 해도 양심도 없이 근본을 잃어서는 안 되었으니까. 그는 문지원을 보며 말했다.“오늘은 아저씨네 집에서 저녁이라도 먹고 가. 아저씨 집은 너도 보다시피 그저 그래. 음식도 좋은 걸 내어줄 수 없지만 그래도 싫어하지는 말아줬으면 좋겠구나.”문지원은 얼른 고개를 저었다.“아저씨 그런 말씀은 하지 마세요.”그녀의 집안은 손기영의 상황보다 더 못했기에 그녀가 감히 남의 집을 평가할 자격이 없었다. 더구나 손기영은 그녀에게 월급에 대한 말은 단 한 번도 꺼내지 않았으니 오히려 그에게 고마워해야 했다.“그래. 얼른 앉아. 난 집사람이 어떤 음식을 만들 수 있나 주방으로 가서 확인하고 오마.”손기영은 자기 아내 손을 잡고 주방으로 들어갔다. 문이 닫히자마자 그의 아내라 비꼬아 말했다.“하이고, 공장장님. 아주 그냥 세기의 대인배네. 월급을 달라고 하지 못할망정 지금 나더러 상까지 차려서 바치라는 거야? 참나, 대단하네. 대단해!”여자는 그를 향해 엄지를 척 들며 비꼬았다. 손기영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