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로서 직업 윤리에 어긋나는 일을 할 수는 없다.“각서까지 쓸 필요 없어. 난 당신이랑 거래 같은 거 하고 싶지 않거든. 아직 젊으니까 빚을 갚는 일은 천천히 해도 돼.”말을 마친 그가 발걸음을 옮겼고 그녀는 여전히 그의 뒤를 따라갔다.“천천히 할 문제가 아니에요. 방법이 있었더라면 당신 앞에 나타나지도 않았을 거예요. 아저씨와 우리 아버지 두 분은 가장 친한 친구세요. 그러나 지금 이 상황에서 아저씨가 줄 수 있는 도움도 얼마 안 돼요. 그러나 만약 내가 아저씨의 뜻대로 당신의 마음을 얻는다면 모든 것이 달라질 거예요.”지혁진이 원하는 것은 아들이 남들처럼 가정을 꾸리고 아내와 아이들과 행복하게 사는 것이었다. 그 집안의 며느리가 된다면 지혁진도 당연히 더 많이 도와줄 것이라고 생각했다. “난 이제 집에 갈 돈도 없어요...”그의 뒤에서 그녀가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아주 작은 목소리였지만 그는 여전히 똑똑히 들었다.그 말에 그가 피식 웃었다.“돈이 없다면서 여긴 어떻게 온 거야? 정말 이렇게 날 따라다닐 건가?”그녀가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 “아저씨가 당신의 위치를 알려주셨고 사람을 시켜 날 여기까지 데려다준 거예요. 오기 전에 돈도 좀 주셨는데... 그 돈은 빚 갚는 데 썼어요.”정말 창피했다. 살면서 지금처럼 이렇게 초라한 적이 없었으니까. 그러나 지석훈한테 쫓겨나지 않고 그가 자신을 데리고 가길 바라는 마음에 그녀는 사실대로 말할 수밖에 없었다.그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그래서 한 푼도 남기지 않았다고? 설마 나한테 다시 데려다 달라는 말은 아니지? 그건 그렇고 잘 곳은 있어?”사실 그녀를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의 말을 들어보면 요즘 세상에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전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그녀는 고개를 숙이며 입을 열었다.“사실 지낼 곳이 없어요. 오늘 집도 압류되고 경매로 넘어갔거든요. 아버지는 지금 응급실에 계시고요...”병원에 들어오면서 병원비를 미리 얼마 정도 냈기 때문에 아직
“저기... 우리 아버지와 거래를 했다면 아버지를 찾아가는 게 어때? 어머니가 돌아가셨으니 당신이 원한다면...”“무슨 소리를 하는 거예요?”그녀는 믿을 수 없는 표정을 지으며 그의 말을 끊어버렸다.그가 이런 말까지 할 줄은 상상도 못 하였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두 사람은 아무 관계도 아니었고 그가 무슨 말을 하든 그건 그의 자유였다. 목이 타들어 갔다. 지금 상황에서 지석훈은 그녀가 잡을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이었다.“아저씨가 원하는 건 내가 당신의 마음을 얻고 당신을 변하게 만드는 거였어요. 지금 난... 정말 다른 방법이 없어요. 아니면 가짜 애인 행세를 하는 건 어떠할까요?”“아저씨가 꼭 결혼을 해야 한다고 하면 그때 가서 다시 생각해 봐요.”“비켜주세요.”그가 입을 열기도 전에 뒤에서 다급한 외침이 들려왔고 누군가 빠르게 달려오고 있었다.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피하려고 했지만 예상치 못하게 누군가 그녀를 향해 달려왔고 미처 피하기도 전에 한쪽으로 넘어졌다. 바닥에 엎어질 줄 알았는데 뜻밖에도 그가 그녀의 허리를 붙잡았다. 두 사람의 시선이 얽히고 그녀는 그의 그윽한 눈을 쳐다보았다.이내, 그가 그녀에게서 손을 뗐다.“병원까지 데려다줄게. 다시 한번 말하지만 난 그럴 생각 없어. 아버지 쪽은 당신이 대충 알아서 넘겨. 아버지한테서 돈을 받은 건 나중에 갚으면 되니까.”말을 마친 그가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겉으로는 차가워 보이지만 실제로 알고 보면 그는 좋은 사람이었다. 그녀가 고개를 숙이며 입을 열었다.“아저씨는 분명히 요구하셨어요. 언제까지 대충 둘러댈 수도 없는 일이에요. 그건 사기꾼이나 다름없는 거니까. 석훈 씨, 그냥 애인인 척하면 안 돼요?”두 사람 사이가 가짜라고 하더라도 지혁진은 뭐라 하지 않을 것이다.지석훈은 아무 말이 없었다.한편, 그가 주차장에서 자신의 차를 발견했을 때, 친구로부터 문자가 왔다. [동문회 참석하는 거 잊지 마. 경성에서 내로라하는 사람들이 다 올 거니까.]강윤슬도 참석할 것이
그가 문지원을 데려다주겠다고 한 건 사실이다. 운전을 그녀가 했어도 병원으로 가야 하는 게 아니겠나?그러나 문지원은 그를 이곳으로 데려왔고 이건 그에 대해 낱낱이 조사를 했다는 걸 말해준다. “운전을 나한테 맡겼으니 당신을 먼저 데려다줘야 할 것 같아서 그랬어요.”“그래?”그가 피식 웃었다.“날 데려다주고 나면 당신은 어떻게 돌아가려고 그래?”말을 하면서 그가 그녀를 향해 가까이 다가갔다.이성과 이렇게 가까이 있어 본 적이 없는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뒤로 물러났다. 게다가 정말 그냥 그를 데려다주고 싶었을 뿐 다른 뜻은 없었다. 그러나... 그는 그녀를 전혀 믿지 못하였다. 한 손을 뻗어 그녀의 어깨를 꽉 잡았다.“묻고 있잖아. 왜 대답이 없어?”대답을 안 하면 그가 자신을 놓아주지 않을 거라는 걸 그녀는 알고 있었다. “내가 운전 안 하면 어떻게 올 생각이었어요? 사실 난... 별다른 뜻 없었어요. 그리고 걱정하지 말아요. 별장 안에 들어갈 생각이 없으니까. 걸어서 돌아가면 돼요.”그가 가볍게 웃었다.“내가 믿을 것 같아?”그가 어디에 사는지도 알고 있는 여자가 그 생각을 하지 않았다는 게 말이 되는가?게다가 이곳부터 병원까지는 차로 몇십 분이 걸리는 거리였다. 걸어서 돌아간다면 최소한 몇 시간은 걸어야 할 것이다.그가 어두운 얼굴로 입을 열었다. “아무리 돈이 없어도 이렇게까지 비굴하게 굴 필요는 없잖아. 여기서 나갔다가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누가 책임지는데?”게다가 지금은 밤이다. 여자가 혼자 한밤중에 몇 시간 동안 거리를 걸어 다닌다는 게 말이 되는 소리인가?그녀는 입술을 오므린 채 아무 말이 없었다. 지석훈의 말을 듣고 나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사실 처음에는 별생각이 없었다.“그럼 돈 좀 빌려줘요. 택시 타고...”“그러니까 처음부터 병원으로 갔으면 됐잖아. 문지원, 그럴 생각이 없었다고? 내가 세 살짜리 어린애로 보이나?”그의 목소리가 점점 더 싸늘해졌다. 그는 세 살짜리 어린애도 아니고 바보도 아니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었던 그녀는 이를 악물었다.말을 마치자마자 그녀가 그에게로 가까이 다가갔다.손을 뻗어 그의 손을 잡으며 진지하게 말했다. “석훈 씨, 나 좀 봐봐요. 나 그렇게 형편없는 여자 아니에요. 우리 사이가 진짜이든 가짜이든 난 다 받아들일 수 있어요.”“오늘 밤은 내 차에서 자.”그 말을 남긴 채 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차에서 내렸다.그의 뒷모습을 쳐다보던 그녀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언젠가 자신이 이 꼴이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한편 지석훈은 한밤중에 강윤슬의 전화를 받게 되었다.핸드폰 너머 그녀의 고통스러운 신음이 들려왔다. “석훈아, 여기 좀 와줄래? 나 배가 너무 아파... 정말...”그녀의 목소리가 그의 마음을 확 낚아챘다.강윤슬을 사랑하는 그는 그녀가 고통받고 상처받는 걸 지켜볼 수가 없었다. 그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임혁수는 어디 간 거야? 옆에 없어? 무슨 일 있으면 임혁수를 찾아야지.”“혁수 씨는 딸한테 갔어. 그리고 넌 의사잖아. 나 지금 병원에 갈 상황이 아니야. 제발 부탁이야...”펑!뭔가 깨지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강윤슬을 신경 안 써도 되지만 의사로서 살려달라는 환자를 외면할 수는 없었다. 결국 그는 강윤슬을 찾아가기로 결정했다.차로 다가가니 운전대에 엎드려 잠이 든 문지원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가 어두운 표정을 지으며 차창을 두드렸다.“왜 여기서 자고 있어? 뒷좌석에서 자면 좀 편할 거 아니야?”그의 목소리에 그녀가 천천히 눈을 떴다. 지석훈을 보고 그녀는 헐레벌떡 차에서 내렸다.차에서 내리자 차가운 밤바람이 불어왔고 검은색 실내복을 입고 있는 그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그녀는 한동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그가 이 늦은 시간에 뛰쳐나올 줄은 몰랐다.“나랑 갈 데가 있어. 일 끝나고 나면 병원에 데려다줄게.”그는 정말 문지원한테 전혀 관심이 없는 듯했다. 가짜 애인 행세를 하자고 제안해도 그는 전혀 그럴 마음이 없어 보였다.아직
그가 비밀번호를 입력하는 걸 보고 문지원은 그가 이곳에 자주 왔다는 것을 눈치챌 수 있었다.‘누구지?’마음속으로 대충 짐작이 가긴 했다. 문이 열리고 지석훈을 따라 안으로 들어가니 거실 소파 위에 웅크리고 있는 강윤슬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가 성큼성큼 다가가서 그녀의 상태를 살폈고 문지원도 빠른 걸음으로 뒤를 따랐다. “맹장염이야. 지금 당장 병원으로 가.”문지원이 가져온 의약 상자는 아예 사용하지 않았다.한편, 문지원을 발견한 강윤슬은 조금 의외였다. 이곳에 오면서 그가 문지원을 데리고 올 줄 몰랐던 모양이다. 지석훈이 그녀를 안아 올리려고 할 때, 강윤슬은 그를 밀어내려고 했다.“지석훈, 너 지금 이런 상황에서 꼭 이렇게까지 해야 해? 이게 무슨 의미가 있는데?”그의 머릿속에는 온통 강윤슬의 몸 상태뿐이었다. 맹장염은 심각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바로 수술을 받아야 했다.“전화를 한 건 선배야. 그리고 선배 지금 맹장염이라서 바로 수술해야 해. 죽고 싶어 환장했어?”그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그는 그녀의 몸부림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억지로 그녀를 안아 들고 밖으로 나갔고 문지원도 빠르게 지석훈의 뒤를 따랐다.지금 상황이라면 문지원이 운전을 해야 하는 상황이다. 강윤슬은 여전히 성질을 부리고 있었다. “그래. 나 죽고 싶어 환장했다. 네가 이렇게 날 화나게 할 줄 알았더라면 너한테 전화 안 했을 거야. 말했잖아. 병원에 안 가겠다고.”“지석훈, 우리는 친구야. 네가 어떻게 나한테 이래?”강윤슬은 문지원의 존재를 신경 쓰고 있는 듯했다. 그러나 지석훈은 지금 강윤슬을 병원으로 데려가 수술을 시킬 생각뿐이었다. 그가 그녀를 뒷좌석에 태우고는 무의식적으로 운전석에 앉으려는데 뜻밖에도 문지원이 이미 운전석에 앉아 있었다. “강윤슬 씨 돌봐요. 운전은 내가 할게요.”강윤슬은 지금 상황이 좋지 않았고 문지원도 별다른 생각이 없었다.그 말에 지석훈은 조금 놀랐다. 문지원은 그와 강윤슬에 대해 훤히 알고 있었다. 사실 그가 운전할
지석훈의 말에 문지원은 점점 더 어리둥절해졌다.그녀를 데리고 강윤슬을 찾아간 사람도 그였다. 이젠 강윤슬을 병원으로 데려왔고 그녀는 아무 짓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가 그녀한테 무슨 볼일이 있겠는가?계속 연기를 하고 싶었다면 아까 그녀를 불러야 했던 게 아닌가? 이제 와서 왜 찾는 것일까?그러나 지석훈이 말을 하기 전에, 문지원은 함부로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그녀는 지석훈의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한동안 말이 없던 그가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돈도 없고 게다가 일반 병실에서 제대로 쉬지도 못하잖아. 그래 가지고 아버지를 돌볼 힘이나 있겠어? 이건 병원 숙소의 열쇠야. 평소에 난 거기 살지 않으니까 가서 씻고 쉬어.”말을 하면서 그가 열쇠 하나를 꺼내 그녀에게 건네주었다. 문지원은 믿을 수 없는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았다.그는 분명 그녀와의 접촉을 꺼렸고 그녀의 제안조차 단칼에 거절해 버렸다. 그러나 열쇠를 그녀한테 주다니... 그녀는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내가 거기 가면 다른 사람들이 오해할 수도 있을 텐데요. 괜찮겠어요?”사실 묻고 싶었던 말은 그녀가 사람들에게 함부로 떠들고 다니는 게 두렵지도 않으냐는 것이었다. 진작부터 그녀의 마음을 꿰뚫고 있던 그가 옅은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그게 무서웠더라면 당신한테 열쇠를 주지도 않았겠지. 어찌 됐든 집안끼리 잘 아는 사이이고 게다가 오늘 당신은 나랑 같이 사람을 구했어.”문지원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는 지석훈의 말뜻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가 그녀한테 열쇠를 내어준 건 그와 함께 사람을 구하러 가서였기 때문이다.솔직히 말하면 강윤슬 때문인 것이다. 이 남자의 마음속에는 영원히 강윤슬이 최우선이었다. 만약 그가 강윤슬과 연인 관계였다면 지혁진의 요구 사항을 그녀는 하나도 해낼 수가 없는 것이었다.그렇다면 지석훈의 마음을 확인하고 물러나는 것이 도리일 것 같았다. 차마 입에 담기조차 어려운 말이었지만 그녀는 결국 현실 앞에서 용기를 냈다.“석훈
“아버지가 이러시는 것도 잠깐뿐일 거야. 결과가 없으면 자연스럽게 포기하시겠지. 난 날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사랑했었어. 그게 얼마나 힘든 건지는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고. 우리 두 사람은 서로 아무 감정도 없는 사람들이잖아.”그는 사랑이 없는 결혼을 원치 않는다. 그 결혼의 최악은 아이가 생기는 것이겠지. 문지원이 먼저 양육권 포기 각서를 쓰겠다고는 했지만 엄마가 없는 아이가 과연 행복하게 자랄 수 있을까? 나중에 아이가 엄마를 원하게 된다면 그땐 어떡해야 할지?다른 여자한테 엄마라고 부르게 할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아이 때문에 문지원과 계속 함께한다면 그건 두 사람한테 너무 잔인한 일이었다. 그래서 처음부터 확실히 선을 긋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그녀는 그가 이렇게 단도직입적으로 말할 줄 몰랐다.그 말에 더 이상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그녀가 모든 것을 포기하기로 할 때, 그는 솔직하게 자신의 마음을 털어놓았다. 아무리 아버지가 재촉하더라도 자신은 그 뜻에 맞출 생각이 없다고...그럼 그녀는... 문지원은 한동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그럼 돈이라도 좀 빌려줄래요? 나중에 꼭 갚을게요.”“정말 방법이 없어서 그래요. 주변에 날 도와주려는 사람이 없어요. 아저씨가 나한테 많은 요구를 했지만 아저씨는 날 도와주셨어요.”지혁진도 지석훈과 마찬가지로 작은 돈이라면 도울 수 있었다. 그러나 액수가 이렇게 크니 그도 어쩔 수가 없었다. 재산을 다 내놓을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그러나 만약 그녀가 지석훈의 마음을 얻어 그의 아내가 된다면 그럼 그녀도 지씨 가문의 사람이 되는 것이었고 한 가족이라면 당연히 무조건 도울 것이다. 그래서 지혁진이 그 제안을 했을 때, 그녀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제안을 받아들였다. 시작이 반이라고 지석훈의 마음을 얻으려면 쉽지 않을 것이라고 예상은 했었다. 그러나 그가 자신을 병원에 데려다주고 숙소의 열쇠와 돈까지 줄 줄은 몰랐다. 방금 만난 낯선 사람에게 그가 이렇게까지 하는 걸 보면 그는 좋은
그는 강윤슬이 수술실에서 나오기를 기다렸고 수술을 마치고 나온 그녀의 곁에서 한 발짝도 떠나지 않고 그녀를 지키고 있었다.몇 시간 뒤, 강윤슬의 정신이 돌아왔다.그녀는 자신이 죽은 줄 알았던 모양이다.“여기가 어디지?”코를 찌르는 소독액 냄새에 머리가 어지러웠고 주위의 낯선 환경도 그녀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지석훈이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병원이야. 맹장염 때문에 수술을 받았고.”그의 목소리를 듣고 나서야 강윤슬은 자신이 아직 살아있음에 안심이 되었다.그나저나 지석훈이 옆을 지키고 있다는 건 주변에 다른 사람이 있다는 건가?다른 여자를 그녀의 집까지 데리고 왔으니...그녀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 모습에 그가 차갑게 입을 열었다.“그만 봐. 병실에는 나 혼자 있으니까. 그리고 여긴 VIP 병실이야.”강윤슬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병원에 오는 것도 좋아하지 않았고 그녀가 병원에 왔다는 것을 다른 사람에게 알리고 싶지도 않았다.“임혁수한테 전화해. 와서 돌봐달라고.”그가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차가운 그의 모습에 강윤슬은 미간을 찌푸렸다.“나 금방 수술받고 깨어난 사람이야. 정말 나한테 왜 그래? 말했잖아. 혁수 씨는 딸한테 갔다고.”“그럼 부모님한테 전화해. 아니면 가사 도우미한테 전화하든가.”그의 말투는 여전히 차가웠고 다정했던 눈빛도 사라진 지 오래였다. 그런 그의 모습이 낯설게만 느껴졌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그가 지금 이러는 건 그녀의 관심을 끌기 위한 것이 아니겠나?그녀는 아픈 몸을 이끌고 일어나 앉았다. “지석훈, 꼭 이래야 해? 나랑 혁수 씨 사이에 대해서는 너도 잘 알고 있잖아. 그리고 그들에게 알릴 상황이었다면 너한테 전화를 하지도 않았어. 혁수 씨의 말이 맞아. 내가 프러포즈를 거절해서 네가 지금 나한테 이러는 거잖아...”임혁수의 얘기를 하는 그녀의 말투가 한결 부드러워졌다.그녀한테 지석훈은 늘 비열하고 파렴치한 인간이었고 해명을 하더라도 아무 소용이 없었다.그가 조롱이 가득한 웃
지석훈의 상처를 치료해줄 때 문지원은 아주 열심이었다. 지석훈은 저도 모르게 그런 그녀를 빤히 보게 되었고 은은한 조명 아래에 있는 그녀의 모습은 너무도 예뻤다. 연고가 상처에 닿은 순간 지석훈은 저도 모르게 찬 공기를 들이마셨다.“아, 미안해요. 혹시 방금 아프게 했어요?”문지원은 고개를 숙인 채 그의 상처에 대고 후후 바람을 불었다.“이러면 조금 나을 거예요. 최대한 살살 발라볼 테니까 조금만 참아줘요.”“문지원, 난 어린애가 아니야. 이런 통증쯤이야 얼마든지 참을 수 있어. 그러니까 애 취급하지 마.”지석훈은 그런 그녀의 행동에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문지원이 말했다.“석훈 씨가 아이가 아니라는 거 당연히 알고 있죠. 하지만 아이만 다치면 아픈 게 아니잖아요. 어른도 다치면 똑같이 아파요. 그리고 이런 통증은 줄일 수 있는 거예요. 제가 최대한 살살 바르면요.”최대한 살살 약 발라주겠다고 하면서 대체 왜 자꾸만 그에게 참으라고 하는 것일까.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지석훈은 더 말하지 않았다. 팔을 치료한 뒤 문지원은 그의 다리를 치료해주었다. 전부 치료해주고 나니 어느새 반 시간이 훌쩍 지났다.“시간도 늦었는데 얼른 씻고 쉬어. 내일 공장으로 갈 거면 내가 데려다줄게.”지석훈은 소파에서 일어나며 손님방이 있는 쪽을 가리켰다.“저 방에 새 이불도 있으니까 그냥 덮으면 돼.”“고마워요. 이 은혜를 어떻게 보답해야 할지를 모르겠네요.”문지원은 농담을 반쯤 담아 그에게 말했다. 그녀는 현재 제 코가 석 자인 상황이었다. 집안에 들이닥친 일을 처리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힘들었던지라 지석훈에게 보답할 여력은 없었기에 정말로 보답할 수 있을지 몰랐다.지석훈은 그런 그녀를 보며 고개를 저었다.“우린 친구잖아. 친구 사이에 그런 부담은 가질 필요 없으니까 얼른 들어가서 쉬어. 넌 피곤하지 않을지는 몰라도 내가 피곤해.”“그럼 쉬는 데 방해하지 않게 전 이만 먼저 방으로 들어가 볼게요.”문지원은 몸을 돌려 걸음을 옮겼다. 손님방으로 들어온 그녀는 먼
두 사람이 서로를 알게 된 후 지석훈은 이미 문지원에게 충분히 많은 것을 도와주었다. 그에게 진 빚도 갚지 못할 정도였던지라 만약 그가 그녀를 구해주다가 다치게 된다면 그녀는 정말로 어떻게 보답해야 할지 몰랐다.눈 앞에 펼쳐진 위험한 상황을 지석훈은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이대로 가버린다면 문지원 혼자서 그 위험을 감당해야 했기에 그는 그녀를 두고 절대 혼자 도망칠 수 없었다. 그렇게 그는 두 남자에게 달려들어 싸웠다.문지원이 초조해하고 있던 때 마침 그녀가 신고했던 경찰들이 도착했다. 경찰들은 차에서 내려 그들에게 총을 겨눴다.“움직이지 마! 두 손 들어!”두 남자는 빠르게 도망치려고 했지만 자신들의 차로 문지원의 차를 쳤던지라 더는 시동을 걸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도망칠 수 없었던 그들은 이내 경찰에게 제압당했다. 문지원과 지석훈도 경찰서로 따라가 진술서를 작성했다.진술서를 작성하고 나니 어느새 밤이 되었고 피로 물든 그의 셔츠를 보던 문지원은 눈가가 붉어졌다.“죄송해요. 괜히 저 때문에 이런 일에 휘말리게 했어요. 만약 제가 아니었다면 석훈 씨가 다칠 일도 없었을 텐데...”“크게 다친 것도 아닌데 뭘. 괜찮아.”지석훈은 애초에 자기 상처에 신경 쓰지 않았다.“오늘 밤은 우리 집에서 지내. 거기가 더 안전할 거야.”그러나 문지원은 고개를 저었다. 지금은 누구 집이 더 안전한가의 문제가 아니었다. 다친 사람이 있으니 당연히 병원부터 가야 한다.“다쳤잖아요. 그러면 병원 가서 치료부터 받아야죠. 온몸에 이상 없나 확인해야 저도 마음이 놓일 것 같아요.”지석훈도 그녀가 자신을 걱정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채고 있었고 입꼬리가 저도 모르게 자꾸만 올라갔다.“문지원, 내가 뭐 하는 사람인지 잊은 거야? 내가 의사야. 이 정도 상처는 별거 아니니까 병원까지 갈 필요 없어.”“아무리 별거 아닌 상처라고 해도 치료는 해야죠. 그렇게 내버려 두면 안 되는 거잖아요.”문지원은 여전히 그가 걱정되었다. 그러자 지석훈의 얼굴에 걸린 미소가 더 짙
그 순간 두 남자는 문지원을 향해 빠르게 달려왔다. 문지원은 급하게 차에 올라탄 뒤 사람이 많은 시내로 향했다. 시내엔 사람이 많았던지라 아무리 두 사람이 그녀에게 범죄를 저지르려고 해도 수많은 시선이 느껴지는 앞에서는 대놓고 하지 못할 것이었으니까.다행히 차가 옆에 있어 그녀는 바로 문을 열어 차에 올라탔다. 안전벨트를 할 새도 없이 시동을 걸었고 멈춰선 두 남자는 서로 마주 보았다.“도망치고 있어요!” “뭘 멍청하게 서 있어! 얼른 차 시동 걸어! 쫓아가야지!”옆에 있던 남자가 그의 머리를 내리치며 말했다. 지금이 어느 때인데 이런 쓸데없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인가. 두 사람은 애초에 돈을 받고 무엇이든 해주는 흥신소에서 일하는 사람들이었다. 만약 이대로 문지원을 놓친다면 의뢰인이 난리를 피우며 돈을 달라고 할 것이 뻔했다.두 사람의 차도 근처에 주차되어 있었던지라 남자는 빠르게 차를 몰고 다른 남자가 있는 곳으로 와서 태웠다. 차에 올라탄 남자는 이내 지휘했다.“속도 올려서 일부러 부딪쳐.”“네!”남자는 눈을 가늘게 접으며 속도를 꾹 울린 후 문지원의 차를 쫓아갔다. 엄청난 소리가 울려 퍼지고 두 차는 서로 부딪치게 되었다. 문지원의 몸이 그 충격에 앞으로 확 나갔고 다행히 제때 펴진 에어백 덕에 다치지 않을 수 있었다.그녀는 두 남자가 돈을 위해서 이렇게까지 할 줄은 몰랐다. 두 남자는 차에서 내린 후 그녀가 있는 운전석으로 달려와 끊임없이 창문을 두드렸다. 문지원은 당연히 열어줄 생각이 없었다. 두 남자도 그녀의 생각을 알고 있었던지라 한 사람은 계속 밖에서 그녀를 협박하고 다른 한 사람은 차로 돌아가 망치를 들고 왔다.“문지원 씨, 우린 문지원 씨랑 싸우려고 온 게 아니에요. 일단 내려서 평화롭게 잘 얘기를 나눈다면 우리도 조용히 물러갈 거예요. 굳이 이렇게까진 할 필요 없잖아요. 안 그래?”문지원은 당연히 남자의 말을 믿지 않았다. 흉흉한 두 남자의 얼굴만 봐도 신뢰도가 떨어졌다. 만약 남자의 말을 믿고 문을 열었다면 그들에게 어
마침 월말이었던지라 입원비를 낼 때가 되었고 약값도 내기 위해 특별히 통장 잔액에 얼마가 남아 있나 확인했다. 여이현이 준 2억으로 대부분 재료를 샀고 남은 돈은 밀린 직원들의 월급을 정산해 주었음에도 여전히 6000만 원 넘게 남아 있었다. 거기에다 그녀가 가지고 있던 돈까지 합하니 7000만 원 정도 되었다.잔액을 본 문지원은 다소 믿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어쩌면 여이현이 그녀가 무엇을 할지 미리 예상을 하고 2억을 준 것이 아닌가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하니 여진 그룹을 이끌어가고 있는 여이현이 대단하게 느껴졌다.대부분 사람들이 여이현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잔인한 사람이라고 말했지만 사실은 이렇게나 세심한 사람일 줄은 아무도 몰랐다. 한숨을 내쉰 그녀는 자신이 그에게 꽤나 많은 신세를 지고 있다고 생각했고 복잡한 머릿속을 정리한 채 병원으로 향했다.원무과에서 입원비와 약값을 계산한 후에야 그녀는 문용석을 보러 갔다. 병실에 누워있는 문용석은 여전히 예전 모습 그대로였다. 조용히 눈을 감은 채 침대에 누운 그의 모습은 꼭 바깥세상과 거리를 둔 듯한 모습이다.“아빠, 저 여진 그룹과 프로젝트를 하고 있는 중이에요. 우리 공장도 다시 가동되고 있고 전처럼 활력도 생겼으니까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입을 연 순간 그녀는 코끝이 시큰해졌다. 결국 밀려오는 감정에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수건을 적셔왔다. 문용석의 몸을 닦아주며 그녀는 계속 굳게 눈을 감은 문용석에게 말을 걸었다. 설령 문용석이 병으로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대답하지 못한다고 해도 말이다.그녀는 문용석의 곁에 오래 있어 주고 싶었지만 해야 할 일이 많아 결국 병실에서 한 시간만 머물다가 나올 수밖에 없었다. 병실 문을 열자마자 들어오려는 지석훈과 마주치게 되었다. 지석훈은 하얀 의사 가운을 입고 있었고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 있었다. 가슴팍 주머니엔 펜이 가지런히 꽂혀 있었고 마스크를 낀 채 눈만 내놓고 있었다.그의 뒤로 꽤나 많은 사람들이 있었고 대부분 의사와 간호사들
문지원은 시간을 내서 주현철을 만나 따져 물을 생각이었지만 그녀가 연락하기도 전에 주현철은 무슨 생각인지 먼저 그녀에게 연락했다.전화를 받은 문지원은 전화기 너머로 들리는 주현철의 목소리를 듣게 되었고 그는 훌쩍이며 그녀에게 사과했다.“지원아, 아저씨는 현 대표가 너한테 그런 짓을 할 줄은 몰랐단다. 다 내 탓이다. 내가, 내가 정말 네 아빠 볼 면목도 없구나!”전화기 너머로 철썩철썩 소리가 났다. 아마도 자기 뺨을 때리는 것 같았다. 문지원은 느껴지는 수상함에 일단 그의 말에 맞장구를 치며 그를 떠보기로 했다.‘그날 일을 아저씨가 정말로 몰랐다고?'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 말이 거짓이라고 단정 지었다. 애초에 그 자리는 주현철이 주선한 것인데 어떻게 모를 수가 있겠는가.“아저씨, 전 더 이상 어린아이가 아니에요. 그런 말로 절 속이실 필요 없으세요. 소용없으니까요.”문지원이 직설적으로 말하자 주현철은 역시나 조용해졌다. 한참 지나서 그가 입을 떼려고 하자 그녀는 빠르게 말을 자르며 논리적으로 말했다.“아저씨는 아저씨 체면을 지키기 위해 저한테 사업 파트너를 소개해주겠다고 하신 거겠죠. 저도 사실은 아저씨가 저희 아빠랑 친한 사이여서 아저씨 때문에 그 자리에 나간 거예요. 그런데 어떻게 저한테 그러실 수 있는 거예요? 정말로 아저씨가 몰랐다고 쳐도 마침 그 타이밍에 자리를 비운 건 너무도 이상하지 않아요? 전 앞뒤가 맞지 않는다고 생각하는데요. 그 짐승보다 못한 놈이 제 몸에 자꾸 손을 올릴 땐 왜 말리지 않으셨어요? 한 마디 정도는 하실 수 있으셨잖아요. 그때는 가만히 있다가 이제야 와서 저한테 전화로 몰랐다느니, 미안하다느니 억울한 척하시는 거예요?”가해자가 피해자인 척 연기를 하고 있는데 문지원은 하마터면 속아 넘어갈 뻔했다. 뒤늦게 정신이 번쩍 든 문지원은 어처구니가 없어 헛웃음만 나왔다. 주현철이 대체 무슨 낯짝으로 자신에게 먼저 연락한 것인지 알 수 없었다.전화기 너머로 긴 침묵이 이어졌다.“주현철 씨, 우리 아빠에게서 받은
간단히 말해 나이가 많은 아저씨들은 집안일을 할 줄 모른다는 것이다. 그 말을 들은 문지원은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이 문제는 확실히 그녀가 생각지 못한 문제였고 확실히 사소한 문제는 아니었다. 숙식 문제는 직원들에게 아주 중요한 문제였다. 그렇다고 해서 매번 숙식 제공한다고 말해놓고 정작 더러운 돼지우리를 보여줄 수는 없지 않겠는가.“일단은 그렇게 말씀해 주세요. 청소 문제는 제가 해결해 볼게요.”문지원은 빠르게 머리를 굴려 이 문제를 효과적으로 해결하려고 했다. 위생 문제는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그저 청소부 직원을 고용하면 되는 일이었지만 청소부 직원까지 고용하기엔 너무 수지에 맞지 않았다.청소부 직원은 하루에 몇만 원씩 번다. 그런 직원을 여럿을 고용한다면 하루에 몇십만 원 나갈 것이고 이 돈이면 차라리 그녀가 직접 하는 것이 더 나았다. 그녀가 직접 한다면 돈을 아낄 수 있을뿐더러 구석구석 깨끗하게 청소할 수 있으니까.“참, 그게 있었지! 왜 이제야 생각이 난 거지?”문지원은 뭔가 떠오른 듯 눈빛을 반짝이더니 바로 집으로 달려갔다. 도우미 아주머니 도은숙은 이미 휴가를 마치고 돌아온 상태였다. 다급하게 집으로 들어와 집안의 청소도구를 뒤지는 모습에 놀란 표정을 지었다.“지원 씨, 지금 뭘 찾는 거예요? 집 안의 청소는 제 담당이지 않아요?”도은숙은 그만 놀란 표정을 짓고 말았다. 문지원은 집안일이라곤 전혀 해본 적 없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문용석은 항상 딸은 귀하게 키워야 한다면서 집안일도 못 하게 했고 주방에 들어가 손에 물 묻히는 것조차 못하게 했다. 물론 문지원이 요리나 집안일에 흥미가 있다면 하게 해줄 것이었지만 문지원은 요리에 재능이 없었을 뿐 아니라 집안일에도 재능이 없었다.그랬기에 지금까지 그녀는 손에 물 한 방울 묻힌 적 없이 자랐다고 할 수 있다. 문지원은 빗자루를 찾아내면서 말했다.“공장의 숙소에 청소할 사람이 필요하거든요. 청소부 직원 고용해도 되긴 한데 비싸서 제가 직접 해보려고요. 그러면 돈을 아낄 수 있잖아요
현관으로 온 지석훈은 그제야 문지원이 떠올라 망설이다가 걸음을 멈추었다. 문지원은 일부러 핸드폰을 꺼내 보면서 괜찮은 척했지만 속에서는 이상하리만큼 씁쓸함이 밀려왔다.“전 괜찮으니까 얼른 가보세요. 그 사람들도 더 어떻게 찾아오진 못할 거예요. 여기서 더 찾아온다면 범죄가 될 테니 말이에요.”“그래. 무슨 일이 생기면 나한테 바로 연락해.”안색이 조금 풀린 지석훈은 바로 문을 열고 나가버렸다. 집 안에는 문지원 혼자 남게 되었다. 예전에도 집 안에 혼자 남은 적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이번엔 이상하리만큼 외롭고 쓸쓸했다. 창문이 굳게 닫혀 있음에도 자꾸만 어딘가 바람이 새어 나와 그녀의 손발을 차갑게 하는 것 같았다.그녀는 최대한 다른 생각은 하지 않으려고 했고 따듯한 물에 샤워한 후 일찍 쉬려고 했다. 다행히 이날 밤 그녀에게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다음 날이 되자 문지원은 청소 직원을 불러 문과 바닥을 도배한 붉은 페인트를 지워달라고 했다. 그러고 나서 그녀는 바로 공장으로 달려가 구인 상황을 살펴보았다. 결과는 놀랍게도 지원자가 14명이나 모였고 그녀는 보자마자 기뻐했다. 손기영과 같은 마을에 사는 마을 주민이라는 것을 들은 그녀는 바로 손기영에게 물었다.“공장장님 마을 사람들이 정말로 공장에서 일하고 싶다고 했어요?”“당연하지. 마다할 리가 있겠어? 내가 충분히 설명했는데도 일하고 싶다고 찾아온 사람들이야.”손기영은 원래 바쁘게 일하고 있었지만 그녀를 보자마자 하던 일을 멈추고는 걱정이 담긴 잔소리를 해댔다.“문 사장, 앞으로 공장으로는 가끔 찾아오는 것이 좋겠어. 여긴 평소에 작업하느라 공기가 좋지 않아. 우리 직원들도 모자며, 마스크며 꽁꽁 쓰고 일한다고.”문지원은 황급히 손을 올려 아무것도 없는 얼굴을 만졌다.“아, 죄송해요. 깜빡하고 있었어요. 지금 바로 가서 마스크와 작업복으로 갈아입고 올게요!”그녀는 얼른 마스크를 착용했다. 이내 손기영은 그녀를 데리고 막 공장으로 출근한 직원들을 소개해주었다. 남자도 있고 여자도
문지원은 지석훈이 자신에게 부담을 주지 않으려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현유한과 프로젝트를 위해 자신을 팔아버린 주현철, 그리고 현유한에게 당한 폭행과 욕설만 떠올리면 저도 모르게 몸이 덜덜 떨렸다. 현유한이 절대 자신이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을 그녀는 확신할 수 있다.지석훈은 그런 그녀의 모습을 눈치챘지만 그가 묻기도 전에 문지원이 먼저 고개를 들어 말했다.“네. 그럼 부탁드릴게요. 저 좀 데려다주세요.”“그래.”지석훈은 구겼던 미간을 폈다. 그녀가 괜찮다고 말하지 않아도 어차피 그는 며칠 동안 그녀를 돌봐줄 생각이었다. 그녀에게 더는 다른 나쁜 일이 생기길 바라지 않았으니까. 그러나 그녀의 집에 도착한 지석훈은 문 앞 바닥과 현관문에 빨간 페인트로 ‘X 녀'와 ‘쌍 X'라는 욕으로 가득 도배된 것을 보게 되었다. 절로 미간을 찌푸리게 하는 욕설들이었다.그는 더는 모른 척 넘어갈 수 없어 옆에 있던 문지원을 보았다.“요즘에 이상한 사람한테 걸리기라도 한 거야?”그녀가 입을 꾹 다물고 있자 그는 계속 물었다.“혹시 오늘 다친 것과 연관이 있는 거지?”비록 의문문이었지만 그의 어투엔 확신으로 가득했다. 더는 숨길 의미가 없을 정도였다. 더구나 현유한이 이렇듯 빨리 자신의 거처까지 찾아낼 줄은 몰랐다. 문지원은 자신이 절대 다른 사람과 맞설 수 없는 존재임을 알았다. 지금 상황에서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은 직접 믿을 만한 사람을 찾아가 도움을 요청하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은 더는 믿을 수가 없다.문지원이 현재 믿을 수 있는 사람은 지석훈 한 명뿐이었다. 괴로운 눈빛으로 빨간 글씨를 보던 문지원은 이내 시선을 돌려 키를 꺼냈다.“일단 들어가서 얘기해요. 오늘은 주말이고 은숙 아주머니도 쉬는 날이에요.”지석훈은 묵묵히 그녀를 따라 들어갔다. 집 안으로 들어온 문지원은 먼저 겉옷을 벗었다. 그리고는 한숨을 내쉬며 소파에 털썩 앉아 오늘에 있었던 일을 전부 지석훈에게 알려주었다.“전 현철 아저씨가 예전에 우리 아빠와 계속 협력을 이어
지석훈은 문지원이 말을 하지 않자 한숨을 내쉬었다.“일단 상처부터 치료해줄게.”이내 그는 소독약을 들고 돌아왔다. 문지원은 움찔하며 다소 민망해진 어투로 말했다.“크게 다친 것도 아닌데 제가 할게요.”그러나 지석훈은 그녀의 손을 꽉 잡으며 낮게 깔린 목소리로 말했다.“움직이지 마.”문지원은 저도 모르게 그의 말을 따랐다. 지석훈이 들고 있는 면봉이 그녀의 피부에 닿을 때마다 그녀는 어딘가 자극을 받은 것처럼 움찔거렸고 차가운 소독약에 찌릿찌릿한 기분이 들었다. 지석훈은 그런 그녀의 모습을 보더니 미간을 찌푸리며 자신이 약을 아프게 바른 것은 아닌지 생각했지만 문지원은 오히려 자신이 그의 심기를 건드렸다고 오해했다.“미안해요... 일부러 그러는 건 아니에요. 약이 상처에 닿으니까 따가워서 저도 모르게 움찔거린 거예요.”문지원은 원래부터 곱게 자란 부잣집 딸이었다. 문용석은 입원하기 전까지 행여나 자기 딸이 조금이라도 다치게 될까 봐 애지중지하며 길렀던지라 상처에 소독약을 발라보는 것은 태어나서 처음이었다.“그럼 살살 발라줄게.”이렇게 말한 지석훈은 천천히 움직였지만 문지원은 오히려 더 고역이었다. 소독약이 묻은 면봉이 상처에 닿을 때 원래는 그저 따갑기만 했지만 지석훈이 살살 바르고 있으니 깃털로 간질이는 것처럼 간지럽기도 했다.어떤 사람들은 고통을 잘 참을 수 있어도 간지러움은 참지 못했다. 문지원이 바로 이런 부류에 속했다. 결국 참지 못한 그녀는 손을 뻗어 지석훈의 손을 잡아버렸다. 지석훈도 멈추며 고개를 천천히 들었다. 시선이 맞닿은 순간 문지원은 그제야 자신이 바보 같은 짓을 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고 눈을 질끈 감으며 말했다.“그냥 아까처럼 발라주세요. 이건 너무 간지러워요.”그 말을 들은 지석훈은 굽혔던 몸을 일으켜 세우더니 헛기침 두어 번하며 어색한 목소리로 말했다.“미안해. 내가 거기까진 생각을 못 했네. 하지만 네 몸에 있는 상처들은 약 발라야 나을 수 있는 상처들이야. 어떤 부위엔 네 손도 닿지 않을 거고. 아니면 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