웨딩드레스를 피팅하는 과정에서 은서우는 정말이지 어디 숨을 곳이라도 있으면 당장이라도 숨고 싶었다. 인명진의 눈빛이 너무도 노골적이기 때문이다.그녀는 주위에서 피팅을 도와주는 직원들이 자신과 인명진을 힐끗힐끗 보고 있는 시선이 느껴졌다. 원래부터 민망했던 은서우는 더 민망해졌고 얼른 다른 웨딩드레스를 입어보려고 하는 것으로 민망함을 숨겨보았다. 그러자 피팅을 도와주는 직원이 부러운 목소리로 말했다.“두 분 정말 서로 많이 사랑하고 있는 게 느껴지네요.”순간 당황해진 은서우는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 그러자 직원은 계속 말을 이었다.“제가 여기서 일한 지 몇 년 되거든요. 그런데 신랑님처럼 그런 눈빛으로 신부님을 보는 건 처음이었어요.”마치 애정이 흘러넘쳐 이 웨딩숍을 담가버릴 정도였다. 은서우는 태연한 척하려고 했지만 그녀의 입꼬리는 생각이 다른 듯 자꾸만 올라갔다.“아, 그렇군요.”두 사람 사이가 좋다는 의미였기에 인명진이 계속 같은 눈빛으로 그녀를 보아도 그녀는 더는 민망해하거나 피하려고 하지 않았다. 하지만 어느 디자인을 선택해야 할지 몰라 은서우는 머리가 아팠다.그러자 인명진은 큰 손을 올리더니 문제가 아니라는 듯 말했다.“그럼 다 입으면 되죠.”은서우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얼굴로 그를 보았다.“하객들은 제 패션쇼가 아니라 우리 결혼식에 참석하는 거잖아요. 그리고 다른 사람의 소중한 시간을 낭비할 수는 없죠.”말을 마치자마자 그녀는 인명진의 곁으로 끌려가게 되었고 그는 그녀의 귓가에 입술을 대더니 둘만 들을 수 있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그럼 전부 다 사요. 그리고 나한테만 보여주면 되죠.”은서우의 얼굴이 순식간에 빨갛게 달아올랐다. 이내 그녀는 그가 미래를 암시하려고 이 말 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채곤 작게 대답했다.“누가 웨딩드레스를 이렇게나 많이 사요.”그녀가 거절하자 인명진도 고집을 부리지 않았다. 그저 웃으며 말했다.“어차피 내 아내는 예쁘니까 어떤 옷이든 전부 다 소화해내죠. 예쁜 모습을 볼 기회는 앞으로도
이혜성은 원래 조금 더 버텨보려고 했지만 인명진과 인명진의 친구들이 힘으로 밀어버린 덕에 문이 열려버렸다.분명 그와 만난 지 엊그제인 것 같았지만 눈앞에 이런 상황이 펼쳐지니 은서우는 감회가 남달랐다. 시끌벅적한 분위기와 손에 든 부케, 사람들에게 둘러싸인 인명진이 한 걸음씩 그녀에게 다가왔다...은서우의 심장이 쿵쾅쿵쾅 뛰었다. 이혜성은 먼저 인명진의 앞을 가로막으며 다가갈 수 없게 했다.“이렇게 쉽게 우리 서우를 데려가게 할 수는 없죠. 꿈 깨요!”이 말을 마친 이혜성은 손가락을 튕겼고 이내 들러리들과 함께 말했다.“앞으로 결혼 후 돈 관리는 누가 하죠?”인명진은 은서우를 힐끗 보았다.“당연히 아내한테 맡겨야죠!”그들은 이어서 물었다.“앞으로 누구 말만 들어야 하죠?”“당연히 아내 말만 들어야죠!”주위에 있던 사람들은 어느새 웃음을 터뜨려 버렸고 질문은 계속 이어졌다.“집안일은 누가 하죠?”“내가 해야죠.”...연거푸 10개가 넘는 질문을 하고 나서야 그들은 입을 다물었다. 이혜성은 눈웃음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축하해요. 남편감으로 합격이네요.”그녀는 뒤로 물러서며 인명진이 은서우에게 다가갈 수 있게 해주었다. 한 걸음만 움직였을 뿐인데 이혜성은 또 그의 앞을 가로막으며 눈을 깜빡였다.“설마 한 입으로 두말할 건 아니죠? 만약의 상황을 위해 저희가 이렇게 각서를 준비해왔어요. 말로 하겠다고 하는 것보다 종이에 증거를 남기는 게 더 좋잖아요.”이혜성이 손뼉을 치자 들러리들은 대체 어디서 가져왔는지 모를 의자와 테이블을 그의 앞에 대령했다. 테이블 위엔 종이와 인장이 있었다. 글씨로 빼곡한 종이엔 전부 그녀들이 방금 했던 질문과 그가 지켜야 할 서약이 적혀 있었다. 그리고 오른쪽 끝 모서리엔 인명진이 인장을 찍을 수 있는 빈 곳도 있었다. 들러리들은 인명진의 손을 잡더니 인장을 쥐여주며 종잇장에 꾹 찍게 했다. 한 장, 두 장... 꽤나 많은 종이가 휙휙 지나갔다. 인명진은 너무도 빨리 종이를 빼버리는 그들 때문에 뭐가 적
이혜성을 빤히 보던 은서우는 얼굴에 웃음을 띤 채 고개를 젓다가 손에 든 부케를 보았다. 무언가 좋은 생각이 떠오른 듯했다. 더는 부케를 누구에게 줘야 할지 고민하지 않아도 되었다.빠르게 시간이 흘러 어느새 부케를 던지는 순서가 되었다. 순백의 웨딩드레스를 입은 은서우는 부케를 어느 한 방향으로 높이 들어 올렸지만 꽃은 떨어지지 않았다. 던지려고 준비하는 그녀의 모습에 사람들은 긴장감이 조금 풀리게 되었다. 그 순간 은서우는 갑자기 방향을 틀더니 이혜성이 있는 곳으로 휙 던져버렸다.지금 이 순간 이혜성 옆에 있던 사람들은 뭔가라도 눈치챈 것처럼 전부 옆으로 비켜주었다. 부케는 이혜성이 있는 곳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이혜성은 부케를 받지 않으려고 본능적으로 뒤로 물러났지만 그녀의 주위엔 아무도 없었다.그녀가 받지 않는다면 부케는 잔디 바닥에 떨어지고 마는 것이었다. 부케가 바닥에 떨어지려고 하자 이혜성은 결국 앞으로 달려가 떨어지기 직전에 품으로 받아버렸다.그런데 행동이 너무도 컸는지 저도 모르게 치맛자락을 밟게 되었다. 중심을 잃은 그녀는 넘어질 것이 분명했지만 뜻밖에도 아무런 통증도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누군가의 따스한 품이 느껴졌고 머리 위로 듣기 좋은 중저음의 목소리가 들렸다.“괜찮아요?”이혜성은 황급히 몸을 일으켜 세우며 고개를 저었다.“네, 괜찮아요.”너무도 다급하게 움직였던 탓인지 아니면 남자의 품으로 넘어지면서 무언가가 남자의 옷에 걸렸던 탓인지 그녀가 몸을 일으켜 세우자 단추 하나가 잔디 위로 떨어졌다.민망해진 이혜성은 얼른 허리를 굽혀 줍고 그에게 건넸다.“이거 돌려드릴게요.”말을 마친 후 이상한 기분에 잠시 생각하다가 다시 그에게 단추를 건넸다.“전 바느질 할 줄 몰라요.”그러자 상대는 나직하게 웃으며 말했다.“괜찮아요.”정식적인 절차가 끝나고 다들 잔디 위에서 자유롭게 돌아다니며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야외에서 진행하는 결혼식이었던지라 그들은 사전에 함께 할 수 있는 게임도 준비했고 뷔페와 술도 가득했다.은서
이혜성을 언급하자 은서우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그래도 혜성이가 마지막에 마음 약해져서 부케를 받아서 다행이에요. 안 그랬으면 헛수고가 될 뻔했잖아요.”오늘 이혜성의 옆에 서 있던 사람들도 전부 미리 그녀의 말을 듣고 피한 것이었다. 다들 그녀가 이혜성에게 부케를 던질 것을 알고 있었기에 혼자 덩그러니 남은 이혜성이 부케를 받았다. 그런데 이혜성도 피할 줄은 몰랐다. 만약 정말로 피했다면 그녀의 계획은 실패로 넘어가게 된다.“그러고 보니.”은서우는 뭔가가 떠오른 듯 고개를 돌려 인명진을 보았다.“오늘 혜성이가 넘어질 뻔한 걸 잡아준 사람이 누구예요? 애인이 없겠죠? 겉보기엔 꽤 괜찮은 사람 같던데. 애인이 없다면 혜성이한테 소개해주고 싶네요.”그러자 인명진은 바로 미간을 구겼다.“오늘은 서우 씨와 나의 결혼식인데 다른 남자 볼 여유가 있나 봐요.”죄를 씌우려면 얼마든지 핑계가 있다고 은서우는 어처구니가 없어 인명진을 째려보았다. 곧 화를 낼 것 같은 그녀의 모습에 인명진은 그제야 장난기를 거두고 말했다.“내 친구예요. 인성은 문제없고 예전에는 바이오에 관한 기술을 연구했던 사람이기도 하죠. 개인적인 사정으로 그만뒀지만요. 소개하는 건 딱히 문제가 되진 않는데 혜성 씨가 흔쾌히 소개받을는지는 모르겠네요.”은서우는 곰곰이 생각하다가 이혜성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감정이라는 것은 노력한다고 해서 생기는 것이 아니었다. 가끔은 운명일 때도 있었다.“아무리 운명에 맡긴다고 해도 부케도 이미 받았고 이참에 소개까지 해주면 남은 건 혜성이가 알아서 하겠죠.”인명진은 화장을 고치는 은서우의 옆에 한참 머물렀다. 옷도 갈아입은 은서우가 문밖을 나서자 이미 그들이 술잔을 든 채 문 앞에서 인명진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그 술잔들은 인명진을 위해 준비한 것임이 분명했다. 인명진은 분위기를 깨지 않고 받아 들었다. 일전에 이미 숙취해소제와 위장약을 챙겨 먹었던지라 그들과 즐겁게 웃으며 술을 마셨다.주량을 조금 넘어버리자 은서우는 슬쩍 그의
은서우는 바로 다가가 이혜성을 방해하지 않았다. 그저 고개를 돌려 인명진과 서로 마주 보며 미소를 지었다. 결혼식이 끝나고 하객들도 돌아갔다. 하루 종일 바쁘게 움직였던 은서우는 그제야 한숨 돌릴 수 있을 것 같았다.집으로 돌아오니 집안 곳곳에 그녀의 손길이 닿은 흔적이 있어 은서우는 마음이 너무도 편안해졌다. 예전이었다면 볼 수 없는 집안 모습이었다.“수고했어요.”어깨에 커다란 두 손이 올려지고 적당한 압력으로 그녀의 어깨를 주물러 주었다. 은서우는 무의식적으로 미간을 찌푸리며 남자의 손을 잡았다. 인명진은 부드럽게 그녀의 손을 내리며 말했다.“괜찮으니까 긴장 풀어요.”은서우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그렇네. 깜빡 잊고 있었네. 지금과 예전은 다르잖아. 난 이젠 명진 씨 아내라고.'“고마워요.”인명진은 눈썹을 꿈틀거렸다.“대체 언제까지 거리감이 느껴지게 나한테 고맙다는 인사를 할 셈이에요? 이참에 우리 말도 놔요.”그녀는 입을 꾹 다물고 장난기 가득한 눈빛으로 보는 인명진을 보았다. 그녀의 얼굴이 점점 더 붉어졌다. 인명진은 민망해하는 그녀의 얼굴을 빤히 보더니 그윽한 모습으로 그녀의 귓가에 대고 작게 속삭였다.“욕실에 물 받아뒀는데 오늘은 같이 씻을까?”은서우는 하마터면 말하는 법을 잊을 뻔했다. 그녀는 대답하지 않았지만 본능적으로 인명진의 목으로 올라간 팔이 지금 그녀의 기분을 말해주는 것 같았다.인명진은 바로 그녀를 공주님 안기 자세로 들어 올렸다. 신혼 생활은 예전과 많이 달랐다. 혼자 살던 때와 달리 두 사람이 한 지붕 아래 함께 살아가야 했다. 처음에 은서우는 너무도 적응되지 않았다.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자신의 옆에 누군가 누웠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저도 모르게 멍한 얼굴로 보다가 어젯밤 보냈던 오붓한 시간들이 떠올라 얼굴이 한참 동안 붉어졌다.함께 사는 시간이 점점 더 길어지고 더는 낯설어하지도 않았고 부끄러워하지도 않았다. 두 사람은 점점 서로에게 적응되었고 화목하게 지냈다. 병원으로 오자 사람들은
“응, 내가 보육원도 이미 알아봤어. 그런데 왜 자꾸 존댓말이야?”인명진이 말하자 은서우는 의아한 목소리로 말했다.“반말은 아직 좀 어색해서요. 넌 나중에 천천히 할게요. 그런데 이미 알아봤다고요? 전에... 새로 지을 거라고 하지 않았어요?”인명진은 고개를 저었다.“곰곰이 생각해봤는데 새로 짓기엔 비용이 너무 많이 들고 사람들의 믿음을 얻기도 힘들잖아. 새로 지으면 사람들이 어떻게 믿고 아이들을 맡기겠어.”그들의 보육원에는 원장과 보육교사도 필요했다. 받는 월급이 적었던지라 보육원에서 일하려는 사람이 많지 않았고 대부분 시간을 낭비라면서 보육원에 일하려 하지 않았다.“마침 적당한 보육원이 하나 있더라고. 운영 부진으로 폐업되었는데 그곳엔 여전히 보육교사들과 갈 곳 없는 아이들이 살고 있어. 보육원이 파산당하긴 했지만 갈 곳도 없어서 계속 남아 있었나 봐. 게다가 보육교사들도 어떻게든 다시 보육원을 되살리려고 애를 쓰고 있더라고.”그의 말을 들은 은서우는 눈을 반짝였다.“그래서 새로 짓지 않고 그 사람들을 도와주려고 한 거예요?”그녀는 기쁜 얼굴로 인명진의 얼굴을 감싸더니 뽀뽀를 해주었다. 쪽 소리가 유난히도 크게 울려 퍼졌다.“완전 좋은 생각이잖아요!”그러나 은서우는 너무 기쁜 나머지 점점 어두워지는 인명진의 눈빛을 미처 발견하지 못했다. 그 순간 그녀는 인명진에게 확 끌어당겨 졌다. 반응하기도 전에 그녀는 그의 품에 꽉 끌어안겼다. 이내 그녀의 입술로 그의 입술이 닿더니 거친 키스가 이어졌다.점차 숨이 차는 은서우는 그의 옷깃을 꽉 잡았다.“잠깐만요... 여긴 병원이잖아요. 명진 씨 진정 좀 해요.”인명진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병원으로 돌아온 뒤로 고강도의 업무에 시달렸던지라 두 사람은 며칠 동안이나 부부 생활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그랬기에 인명진은 현재 불만이 가득 쌓인 상태였다. 겨우 이런 기회가 찾아왔으니 그는 당연히 놓칠 생각이 없었다.한참 지나서야 인명진은 그녀를 놓아주었다. 얼굴이 빨갛게 물든 은서우는 그를 밀어내더니
기획안은 빠르게 완성되었지만 제일 중요한 것은 그래도 직접 보육원으로 찾아가 살펴보는 것이었다. 그렇게 은서우는 시간을 내서 인명진과 함께 보육원으로 출발했다.보육원은 위치가 아주 좋았지만 그다지 환영받지 않았다. 마치 사람들에게 잊혀버린 곳처럼 보육원에 있는 모든 물건들이 전부 낡은 것이었고 건물도 몇십 년 전에 지어진 것처럼 대문마저 녹슬어 있었다.보육원으로 도착했을 때 은서우는 바로 페인트 떨어진 벽을 보게 되었다.“이런 집에 사람이 살고 있다고요? 확실해요? 이건 언제 무너져도 이상하지 않은 집이잖아요.”그녀가 묻자마자 모직 코트를 입은 여자가 안에서 나왔다. 그녀의 말을 들은 것인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맞아요. 여긴 보육원인데 올해 가을에 철거한다는 결정이 났어요. 보육원엔 아직 서른 명이 넘는 아이들과 보육교사, 그리고 저까지 전부 합쳐서 총 마흔 명이 있어요. 만약 이 보육원이 철거된다면 서른 명이 넘는 아이들은 어디로 가야 할까요. 전 아직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르겠어요. 그걸 지금까지 생각하다 보니 어느새 지금까지 여기서 버티게 되었네요. 그러니 저희를 좀 도와주세요.”은서우는 중년의 여자를 보았다. 여자는 온화하게 생겼지만 입고 있는 모직 코트는 낡아 색도 바랬다. 보아하니 아주 오래 입은 것 같았다. 여자의 옷차림에서도 보육원이 얼마나 가난한지 알 수 있었다.“죄송해요. 그런데 혹시 누구신지 알 수 있을까요?”은서우는 자신이 말실수했음을 알고 바로 사과했다. 중년의 여자는 이곳 보육원의 원장이라고 그들에게 소개했다. 그 말은 들은 은서우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눈앞에 있는 사람이 원장이라니 말이다.“아가씨, 뭘 그렇게 놀래요? 대부분 아가씨와 같은 반응이더라고요. 밖은 추우니까 일단 들어가서 계속 얘기해요.”원장은 그들을 안으로 초대했다. 안으로 들어간 은서우는 이곳 보육원이 얼마나 가난한지 더 깊이 알게 되었다. 이곳은 정말이지 가난해도 너무 가난했다. 원장이 그들에게 대접할 수 있는 음료수도 그저 따듯하게 끓인 물
은서우는 원장이 정말로 너무도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원장이 진정하길 기다린 후 그녀는 보육원의 아이들을 만나보고 싶다고 말했다. 그러자 원장은 흔쾌히 대답했다.“그래요. 제가 우리 아이들을 보여드릴게요. 다만 아이들 중에 조금 혼자 동떨어져 있는 특별한 아이가 보일 거예요. 그래도 너무 개의치 말아요.”원장은 말을 하다가 진지해졌다. 은서우는 그런 그녀의 모습에 조금 놀랐고 원장의 입에서 나온 특별한 아이가 궁금해졌다.빠르게 그들은 어느 한 교실로 도착했다. 이곳에서 보육교사들은 하나의 방을 쓰고 있었고 다른 곳은 학교 교실처럼 만들었다. 보육원에 아이들이 너무도 많았기 때문에 아이들의 학비를 대줄 여력이 되지 않았다. 이렇게 지원을 받는 것도 너무도 오랜만이었다.하지만 학교 다녀야 할 아이들이 아무런 지식도 없는 채 자라게 될까 봐 보육교사들은 서로 번갈아 가며 아이들을 가르쳐주었다. 그리고 지금 교실에선 한창 수업 중이었다.은서우는 갑자기 들어가면 아이들이 놀라게 될까 봐 들어가지 않고 문밖에서 창문으로 조용히 안을 들여다보았다. 빠르게 그녀는 아이들과 어울리지 못하는 남자아이를 발견했다.다른 아이들은 아주 활발하게 선생님의 질문에 대답도 하고 함께 게임도 했지만 유독 구석에 앉아 있는 남자아이만 혼자 블록 하나를 손에 꼭 쥐고 멍 때리고 있었다.“원장님이 말씀하신 특별한 아이가 혹시 저 아이인가요?”마음이 흔들린 은서우는 바로 물었다. 원장은 고개를 끄덕였고 아이를 보는 두 눈빛엔 근심과 자애로움이 가득했다.“네, 저 아이가 맞아요. 아이의 이름은 천유민이고 아이의 엄마가 아이의 아빠와 이혼한 후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어요. 원래라면 아이의 아빠가 아이를 키워야 하는데 아이의 아빠도 갑작스러운 심근경색으로 세상을 떠나버렸어요. 더는 남은 가족이 없어 우리 보육원으로 오게 되었는데 예전에는 아주 활발하고 잘 웃는 아이였다고 하더라고요. 그런데 그날 후로 단 한 번도 웃지 않았대요. 저와 선생님들이 아무리 말을 걸어봐도 계속 저 모습이에요.”
하지만 감동보다는 오히려 속이 울렁거렸다. 속이 울렁거리는 느낌에 문지원은 당장 얼굴이 일그러지며 화장실로 달려갔다. 지석훈도 뒤따라 들어오며 물었다.“속이 안 좋아?”“그렇진 않은 것 같아요. 요즘 세 끼 식사도 꽤 규칙적으로 하고 날것 이거나 차갑거나 매운 음식도 먹지 않았는데...”문지원은 배를 움켜쥐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다 문득 한 가지 가능성이 떠올랐다.지석훈도 그녀와 같은 생각을 한 듯 방으로 가서 임신 테스트기를 가져왔다.문지원은 놀라며 물었다.“언제 산 거예요?”지석훈은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만일의 사태에 대비해서.”문지원은 아무 말이 없었다.5분 후, 그녀는 복잡한 얼굴로 다시 나왔다. 한 손은 여전히 배 위에 올려져 있었고 눈에는 믿을 수 없다는 기색이 역력했다.정말 임신한 것이다!그녀와 지석훈이 결혼한 지 겨우 3개월밖에 안 되었는데 이렇게 빨리 임신하다니.지석훈은 오히려 태연해 보였다. 하지만 입가에 감출 수 없는 미소를 보면 그 역시 겉모습처럼 평온하지 않고 흥분을 억누르고 있는 게 분명했다.“정말 임신한 거예요?”문지원은 아직 믿기지 않는 듯 물었다. 왜냐하면, 그녀는 이번 달 초에 생리가 끝났기 때문이다.“아마 생리가 끝난 후 며칠 사이일 거야.”지석훈의 목소리는 문지원에게 그날의 기억을 떠올리게 했다. 당시의 기억을 떠올리니 그녀의 귀는 뜨겁게 달아올랐다. 결국, 그녀는 병원에 가보기로 했다. 임신 테스트기는 가끔 틀릴 수도 있으니 이런 일은 직접 검사를 받아보고 확인해야 마음을 놓을 수 있을 것이다.그리고 그녀는 손에 든 검사지를 보고 완전히 할 말을 잃었다.의사는 마침 지석훈과 알고 지내던 사람이었다.“축하합니다, 지 원장님. 부인께서 임신 2주 차입니다.”“감사합니다.”지석훈은 침착하게 그녀를 부축하며 밖으로 나갔다.병원 진료실을 막 나오자마자 지석훈은 문지원을 품에 안았다.“너무 좋아. 우리 아이가 생겼어.”문지원은 남자가 미세하게 떨리는 모습을 보며 멍하
물론 손에 있는 일을 무턱대고 모두 남에게 맡기는 것은 너무 과한 부담을 주는 일이다.문지원은 비서를 사무실로 불렀다.“올해 25살이죠?”비서는 잠시 멍한 표정을 지었다.그녀의 나이는 모두가 다 아는데 문지원 회장이 갑자기 이 얘기를 꺼낸다는 것은 혹시 소개팅을 시켜주려는 건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비서는 고마웠지만 거절하며 말했다.“문 사장님, 저는 아직 젊어서 당장은 결혼할 생각이 없습니다.”“전 당신더러 결혼하라고 하는게 아니에요.”문지원은 펜으로 탁자를 두드리며 말했다.“그냥 평소에 잡다한 일들을 맡기고 싶어서요. 확인이 필요한 문서들은 평소에 굳이 내게 제출하지 않아도 돼요.”비서는 그 뜻을 이해했다.이건 곧 그녀에게 승진과 급여 인상을 주려는 것이다. 문지원이 그녀의 의견을 확인한 후 급여를 조금 올려줬고 비서에게 몇 명의 적합한 인재를 추가로 모집해서 예비 인력으로 두라고 지시했다.“평소에 내가 처리하지 못한 일들을 대신 처리해주고 만약 문제가 생기면 그때마다 보고하면 돼요.”비서는 한숨을 쉬며 안도의 표정을 지었다. 그녀 혼자서 이렇게 많은 일을 하지 않아도 되어 다행이었다.일정이 정리되자 문지원은 업무에서 상당 부분 해방되었다.예전에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바쁘게 일하다 보면 퇴근 시간이 되어도 일이 끝나지 않고 긴급 통지가 오면 또 회의를 위해 야근을 해야 했다.이제는 오후 4시 반쯤이면 일을 마치고 퇴근할 수 있게 된 것이다.비서가 몇 명을 더 찾아서 양성해 두었기에 업무가 적절히 분배되어 모두 바빠 죽을 정도가 아니라 적당히 딱 맞는 분량을 처리할 수 있었다.그 덕에 문지원은 지석훈과 함께 결혼 후의 삶을 더욱 즐길 수 있게 되었다.지석훈도 이에 매우 만족해했다.“널 주려고 선물을 챙겨왔어. 들어가서 한번 봐.”그가 집 문 앞에 다가서더니 걸음을 멈췄다.문지원은 열쇠로 문을 열고 들어가 보니 안은 어두컴컴했다.“뭐 숨겨놨어요? 아직 불도 켜지 않았네요, 수상하게.”탁! 하며 불이 켜지자 거실의 모든
문지원은 이 주제가 다소 위험하다고 느꼈다. 비록 그녀의 아버지가 그녀에게 물어본 적은 없지만 그렇다고 자신과 배석훈이 결혼한 후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에 대해 말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했다. 돼지고기를 먹어보지 않았다고 해도 돼지가 뛰어다니 것을 본 적은 있을 것이다. 문지원은 그러면서도 반쯤 빚어놓은 만두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저,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이에 지석훈의 어머니가 그녀의 손을 잡았다. “너희들도 이제 나이가 들었으니 아이를 가져야지. 평소에 좀 더 노력해야 한단다.”문지원은 잔소리를 듣고 나서 나오니 기운이 다 빠져있었다.시어머니는 문지원에게 정말 잘해주었다. 거의 마음을 쏟아붓는 수준이었다. 비록 문지원의 집안 사정이 좋은 것을 알면서도 혼수 때 오랜 세월 모은 돈으로 집 한 채를 사서 선물해 주었다. 사실 지석훈도 자기 집이 있었지만, 시어머니는 선물하고 싶다고 하셨다. “너희 집도 너희의 것이지만, 이건 내가 어른으로서 선물하는 거란다.”게다가 그 집에는 문지원의 이름도 함께 올려져 있었다.그래서 시어머니의 출산 독촉에도 문지원은 어쩔 수 없이 버텨야만 했다. 다행히도 시어머니는 어린 이들에게 엄격하게 구는 편은 아니었다. 만두를 빚을 때 한 번 그런 말을 했고 또 떠나면서도 지석훈을 불러 몇 마디 잔소리했다. 문지원은 그 모자간의 대화를 듣지 못했다.돌아가는 길에 문지원은 약간 궁금해져 지석훈에게 물었다.“나갈 때 어머니께서 뭐라고 하셨어요?”“정말 알고 싶어?”“네.”그러자 지석훈은 문지원의 머리를 숙이게 한 후 그녀의 흩어진 머리칼을 살며시 넘겨주며 귀 옆에서 낮게 속삭였다.“우리 아이를 빨리 낳으라고 하셨어.”남자의 낮고 진한 목소리는 얼굴을 붉히고 심장을 뛰게 만드는 약보다도 중독성이 강해 문지원의 귀가 금세 붉어지고 말았다.저녁이 되자 지석훈은 몸소 행동으로 보여주기 시작했다. 한 손으로 문지원의 머리를 받치고 이마를 맞대며 낮은 숨소리를 내쉬었다. 문지원은 마치 파도 속에 잠긴 것
그 눈빛 속에서 조용히 터져 나오는 그 소유욕. 마치 옛 시대의 군벌과 그의 부인 같았다. 그리고 사진작가는 우연히 그 장면을 목격한 운 없는 사람이 되어 몰래 촬영을 하고 있었다. 사진작가는 자신의 상상에 자극받아 목소리가 떨렸다.“지석훈 씨, 고개를 들어 카메라를 봐주세요.”지석훈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사진작가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사진작가는 재빨리 셔터를 눌렀다. 그 후에도 그들은 여러 세트의 사진을 찍었고 찍은 사진들은 모두 문지원에게 하나하나 보여주었다. 문지원은 모든 사진에 다 만족했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마음에 든 것은 민국 시대 주제의 사진이었다.“대략 며칠 안에 나오나요?” 그녀가 물었다.사진작가는 답했다.“빠르면 이삼 일정도 걸릴 겁니다. 그때 완성된 사진들을 택배로 보내드리겠습니다. 그런데 제가 개인적인 부탁이 하나 있는데 혹시 두 분께서 응해주실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바로 아까 찍은 사진 중 몇 장이 제가 개인적으로 아주 마음에 들어서 사진관 벽에 걸어두고 싶습니다.”문지원은 사진관에 들어올 때 봤던 사진 벽이 생각났다.“그 벽에 걸어두시겠다는 건가요?”“네.”사진작가는 그 벽은 사진관의 특별한 기념 및 홍보 방법의 하나라고 설명했다. 잘 나온 사진들은 사진 주인에게 동의를 구한 뒤 동의하면 벽에 전시한다고 한다..문지원은 옆에 있던 지석훈을 바라봤다. “저는 괜찮은데, 당신은요?” 지석훈도 아무 문제 없다고 했다.“마음대로 하도록 해.”며칠 후 문지원은 사진작가가 보내온 사진을 받아 소중히 간직했다. 하지만 그녀는 몰랐다. 그 사진관 벽에 전시된 사진들이 곧 사람들의 눈에 띄어 사진이 찍혀 인터넷에 올라간 것이다.잘생긴 남성과 아름다운 여인의 조합과 최상의 촬영 기술 덕분에 순식간에 인터넷에서 화제가 되었다.네티즌들은 저마다 아아 소리를 냈고 많은 사람이 댓글을 달았다. “마치 옛 시대의 군벌 부인 같다.”“완전 대박이다.”“3분 안에 그들의 모든 정보를 알고 싶다.” 하지만 이 모
문지원은 약간 마음이 움직였다.하지만 웨딩 촬영은 이미 여러 번 한 적이 있었다. 그때 섬에서 몇 세트 찍었고 그 후 결혼식 현장에서 또 몇 세트 찍어 셀 수 없을 정도였다.게다가 이번 촬영은 개인 예약으로 진행되었는데 이 사진관이 꽤 유명하다고 들었다.물론 사진관 이름에 걸맞게 예약은 거의 하늘의 별 따기라고 한다..이 정도면 지석훈이 얼마나 큰 노력을 들여 예약을 잡았는지 알 수 있었다. 단순히 웨딩사진만 찍는 데 사용하기에는 너무 아까웠다.하지만 문지원 역시 이런 곳에 한 번도 와본 적이 없었기에 무엇을 찍어야 할지 몰랐다.“한번 보세요. 이건 저희가 예전부터 선보였던 스타일들이에요.”사진작가는 친절하게 앨범 한 권을 꺼내 보였다.앨범에는 이전 고객들이 이곳에서 찍은 사진들이 담겨 있었는데 정말 다양한 스타일이 있었고 모두 아름다웠다.이 사진관이 만들어낸 결과물은 정말 최고였다.문지원은 그중에서도 민국 시대 주제의 사진이 눈에 들어왔다.“이렇게 찍을 수 있을까요?”사진작가는 그녀가 가리키는 사진을 한 번 살펴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네, 됩니다. 먼저 메이크업하고 옷을 갈아입으세요. 직원들이 촬영 스튜디오를 설치할게요.”옷은 사진관에서 준비한 것으로 하고 지석훈의 요구에 따라 전부 새 옷이었다.사실 문지원은 소품용 옷을 입는 것에 크게 개의치 않았다. 어쨌든 한 번 입었다가 나중에 벗으면 되는 거고 몸에 달라붙지 않아서 안에 옷을 받쳐 입을 수도 있었다.하지만 지석훈은 직업병이 발동했고 그런 건 용납할 수 없었다.결국, 문지원은 어쩔 수 없이 그의 의견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급히 새 옷을 가져와야 했기 때문에 원래 걸리던 시간에서 15분이 더 추가되었고 메이크업 등 기타 과정도 진행해야 했다.문지원이 모든 준비를 마치고 나왔을 때는 이미 2시간이 지난 후였다.그러나 결과는 확실했다.곧은 치파오가 그녀의 아름다운 몸매를 감쌌고 문지원은 옷자락을 살짝 들어 올렸다. 마치 지난 옛 시대의 그림 속에서 걸어 나온 듯한
결혼 후 문지원은 휴가를 내서 신혼여행을 갈까 고민해 본 적이 있었다.하지만 요즘 지석훈이 거의 계속 병원에 머무르며 집에 돌아오지 않는 것을 떠올리며 본의 아니게 한숨이 나왔다. 비록 이미 익숙해졌긴 했지만 실망을 감추기는 어려웠다.비서도 그녀에게 물었다.“문 사장님, 신혼여행 가고 싶지 않으세요? 제 동창 중 한 명이 며칠 전에 결혼했는데 요즘 여기저기서 신혼여행 정보를 알아보며 준비 중이에요. 신혼여행이 없는 결혼은 반은 실패한 거랑 마찬가지라고 하더라고요.”그 말을 들은 문지원은 손에 들고 있던 서류를 제대로 볼 생각조차 들지 않았고 비서는 무언가를 눈치챈 듯했다.“그렇지 않으면... 문 사장님, 지 의사님이 일하시는 곳에 한 번 가보시는 건 어떠세요?”그녀가 머뭇거리며 물었다. 어쨌든 문지원은 요즘 정신이 산만하여 업무에 집중할 기색도 없었다.문지원은 비서의 시선 속에서 정신을 차렸다. 요 며칠 동안 집에 돌아와도 지석훈을 보지 못해 한참 혼란스러워했던 자신을 깨달으며 약간 부끄러워졌다.“그건 나중에 얘기하고 기획서 한 부 복사해 가져다주세요.”점심 무렵, 문지원은 막 일을 끝내고 밥 먹으러 가려던 찰나, 핸드폰에 지석훈의 메시지가 떴다. 같이 밥을 먹자는 메시지에 문지원은 미소를 지었다. 멀리서 이 장면을 본 직원들은 서로 눈빛을 교환하며 웃음을 터뜨렸다.문지원은 재빨리 열쇠를 챙기고 회사를 떠났다. 지석훈은 그녀를 새로 오픈한 가게로 데려갔다.식사를 마친 후 문지원은 지석훈을 바라보며 머뭇거리다가 물었다.“병원에 다시 돌아갈 거예요?”“응?”지석훈은 눈썹을 치켜들며 고의적으로 물었다. “내가 돌아가길 바라는 거야?”그 말을 들은 문지원은 순간 당황했다. 사실 그녀는 지석훈이 자신과 좀 더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주길 바랐는데 이제 막 결혼한 신혼부부임에도 불구하고 각자 업무에만 매달려 밤에야 겨우 함께 잠자리에 들 수 있는 상황이었다.하지만 수줍음이 많은 그녀는 그 마음을 솔직하게 털어놓지 못했다.지석훈은
예전에는 이런 일이 있을 때면 지석훈은 항상 선을 지켰지만 오늘 밤엔 조금 달랐다. 그는 그녀를 침실에서 욕실로 다시 침대로 옮겨가며 몸 곳곳에 뜨거운 입맞춤을 했다.다음 날 아침에 일어났을 때도 문지원은 여전히 몸속 깊이 스며든 감각이 남아 있는 것만 같았다.그리고 그녀는 예상대로 휴가를 냈고 이틀이 지나서야 회사에 다시 나왔다.회사 사람들은 이미 예상이라도 한 듯 문지원이 출근하자 하나같이 말했다.“문 사장님, 결혼 축하드려요.’문지원은 무려 사흘이나 결근했지만 다들 그 사흘 동안 무얼 했는지는 굳이 말 안 해도 짐작이 갔다.분명 부부 생활이 아주 좋았겠지, 아니었으면 일까지 내팽개치고 안 나왔을 리가 없다.문지원은 직원들의 부담스러운 시선에 얼굴을 들 수도 없어 그저 아무렇지 않은 척할 수밖에 없었다.그래도 지난번에 당한 적이 있었던 터라 문지원은 이제 출근 전에 거울 앞에서 꼼꼼히 점검했다.몸에 키스 자국이 드러나지 않는 걸 확인하고 나서야 안심하고 회사를 향했다.그렇지 않았다면 그 흔적들을 들켰을 경우 정말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문지원이 예상치 못했던 건 며칠 지나지 않아 결혼을 축하하는 선물이 회사로 배달됐다는 것이다.문지원은 처음에 여울이 보낸 거라고 생각했지만, 물어보니 아니었다.택배 상자의 외관을 살펴봐도 발신자가 적혀 있지 않아 더욱 수상했다.“이거 가져온 사람이 누가 보낸 건지 말했어요?”문지원이 로비 직원에게 물었다.로비 직원은 고개를 저었다. “아뇨, 그냥 두고 바로 가버렸어요.”문지원은 뭔가 직감적으로 찜찜한 마음이 들어 그 택배를 챙겼고 사무실에 들어와서야 상자를 열었다.그 안에는 브로치 하나와 축하 카드 한 장이 들어 있었다.문지원은 축하 카드를 집어 들어보니 카드 위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결혼 축하해요.”글씨체는 아주 정갈하고 예뻐 여성의 필체 같았다.그녀는 곧바로 짐작이 갔다.문지원은 그 브로치를 지석훈에게 보여주자 그는 눈빛이 살짝 흔들렸지만 아무 말 없이 브로치
여울은 아직 최주하를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최주하도 쉽게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문지원이 알기로 여울은 마음이 여린 사람이었고 결국 받아들이게 되는 건 시간문제일지도 몰랐다.그녀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친구 일에 깊이 관여하는 것도 괜히 어색하고 조심스러웠다.게다가 얼마 전 지석훈이 슬쩍 귀띔하듯 말했다.“며칠 전에 여울 씨가 병원에 재검진받으러 왔는데 주하가 데리고 왔었어.”그 말을 듣고 문지원은 혀를 끌끌 찼다.평소에 말도 없고 조용하던 여울이 은근히 비밀 많은 타입이었던 모양이었다.그렇게 시간은 순식간에 흘러 어느덧 다음 달 중순이 되었다.지석훈은 아예 와인 농장을 통째로 빌려 며칠에 걸쳐 그곳을 자신이 원하는 모습으로 꾸며놓았다.결혼식을 올릴 장소는 바로 거기였다.그 와인 농장은 웬만한 호텔 못지않게 컸고 내부에는 수년간 숙성된 고급 와인들이 그대로 보관되어 있었고 결혼식 날 손님들이 오면 바로 꺼내어 대접할 수 있을 정도였다.그들은 결혼 소식을 널리 알리진 않았다.이건 문지원이 원한 방식이었다.그녀는 온 세상에 떠들썩하게 알리는 그런 결혼식보다는 가까운 가족과 친구들만 초대해서 조용히 축하받는 걸 선호했다.행복은 굳이 남들에게 증명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니까.그런데 결혼식이 한창일 때 지석훈이 무대 위에서 다시 한번 프러포즈했다.해변에서 했던 프러포즈보다 훨씬 더 진지하고 진중한 분위기였다.“하고 싶은 말이 정말 많지만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어서... 예전엔 내가 사랑인 줄도 모르고 놓쳐버렸던 순간이 많아. 이제는 더 이상 놓치고 싶지 않아. 이렇게 내 곁에 있어 줘서 고마워. 앞으로 남은 인생... 너랑 함께할 수 있어서 정말 행복해.”그의 말이 끝나자 하객들 사이에서 박수 소리가 터져 나왔다.문지원은 무대 위에서 입을 손으로 가리고 눈물을 흘렸다.식이 끝날 무렵, 문지원은 멀리서 검은색 카이엔 SUV가 그녀의 친구 여울을 데리러 오는 걸 보았다.차창이 천천히 내려가자 예상대로 그 안에 앉아 있는 사람은 최주하였다
문지원은 문득 자신이 계획에 철저히 걸려들었다는 생각에 의심의 눈길을 보냈다.“처음부터 계획한 거죠?”“응.”지석훈은 미소 지으며 그녀의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사실, 그는 그녀를 향한 마음을 오래전부터 숨겨온 것이었다....해변에서의 프러포즈 이후 문지원에게 찾아온 가장 큰 변화는 손가락에 반짝이는 반지가 생겼다는 점이었다.이 반지는 지석훈이 특별히 맞춤 제작한 것이었다. 그녀는 우연히 그의 휴대폰을 보다가 두 달 전에 이미 주문이 들어가 있었다는 구매 기록을 발견하고는 깜짝 놀랐다. 그렇게 오래전부터 준비해 왔다니 감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두 사람의 결혼 소식을 접한 지석훈의 부모님은 곧바로 혼인신고부터 하라고 재촉하기 시작했다. 어느 날 문지원은 우연히 지석훈의 어머니가 그를 붙잡고 타이르는 말을 듣게 되었다.“네 아빠랑 난 애초에 너한테 기대도 안 했어. 하루가 멀다고 병원에서 살다시피 하니 너 같은 애한테 누가 시집오겠나 싶었거든. 그런데 다행히 네가 능력 있어서 지원이 같은 좋은 아이를 데려왔으니 얼른 확실히 붙잡아야지. 빨리 혼인신고부터 해. 나중에 그 아이가 너 버리고 떠나버리면 그땐 어디 가서 울어도 소용없어!”문지원은 그 대화에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몰랐다.그런데 신기한 건 지석훈이 워낙 점잖고 진지한 사람이어서 집안 분위기도 매우 조용할 줄 알았는데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는 점이었다. 아버지는 이미 퇴직해 한가로운 성격으로 매일 독서나 산책을 즐기는 조용한 스타일이었다. 어머니는 젊었을 때는 커리어 우먼이었고 호탕한 성격으로 남편에게 엄격하면서도 친화력이 강한 사람이었다.두 분 모두 차분한 듯하면서도 내면에 장난기를 숨기고 있는 아들을 낳을 것 같진 않았는데 이게 바로 유전자의 신비인가 싶었다.하지만 어머니가 그렇게 그녀를 좋아해 주는 모습에 문지원도 안심했다. 확실히 시부모님의 사랑을 받고 있다는 증거였다.한편 문지원의 아버지는 지석훈과 따로 대화를 나눈 이후부터 정확히 무슨 얘기를 했는지는 몰라도 그에 대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