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에 직원도 점차 많아졌다. 직원들은 자신의 상사가 깨가 쏟아지는 커플임을 알게 된 후 아주 부러워했다.“부대표님과 대표님 사이가 아주 좋으시네요!”“그러게 말이에요! 그런데 두 분 언제 결혼하실 예정이세요?”“아마 회사가 안정되고 나면 할 것 같네요. 두 분 지금 회사를 키우는 데 아주 중요한 시기에 놓였잖아요. 아직 결혼할 때가 아니죠. 하지만 제가 보기엔 곧 할 것 같네요.”매일 바쁘게 보내고 있었지만, 권다솔 얼굴에는 여전히 미소가 있었다.배진호는 그런 그녀의 모습에 매일 포기하지 않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옳은 선택을 했음에 다행으로 생각하기도 하면서 자신을 도와준 여이현에게 고마움을 느끼고 있었다.여이현은 딱히 신경 쓰지 않았다.“배 비서가 날 도와준 것에 비하면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죠.”두 사람은 대화를 나누며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밖으로 나오자 붉은 장미 꽃다발을 들고 있는 권다솔이 보였다.권다솔은 하늘색 원피스를 입고 있었고 긴 머리를 낮게 묶은 채 꽃을 들고 있었다.그런 그녀의 모습을 본 순간 배진호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무언가 막혀버린 듯 답답하기도 했다.권다솔은 아직 그가 나왔다는 것을 발견하지 못하고 미간을 찌푸린 채 로비 직원에게 물었다.“정말로 누가 보낸 건지 몰라요?”직원은 고개를 저었다.“네, 배달 기사분이 가져오셨어요. 꽃다발에 혹시 카드가 없나요? 카드가 있으면 알 수 있지 않을까요?”권다솔은 이미 확인해 보았지만, 카드에는 간단한 글귀만 적혀 있을 뿐 다른 글은 없었다.“다솔 씨, 무슨 일이에요?”권다솔은 고개를 돌렸다. 배진호와 여이현이 그녀를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좋아하는 사람이 자신을 향해 다가오자 권다솔은 그제야 미간을 풀었다.그녀는 손에 들고 있던 장미를 배진호에게 건넸다.“로비로 내려오니까 직원이 내 앞으로 꽃다발이 배달되었다고 말해주더라고요. 이거, 혹시 진호 씨가 주문한 거예요?”권다솔이 이런 의심을 하는 것도 의외가 아니었다.배진호는 조용히 서프라이즈를
권다솔은 바로 뚜껑을 닫아버렸다.“다들 어디 가서 말하면 안 돼요.”그녀의 말에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다는 눈길로 그녀를 보았다. 그녀는 얼른 방으로 올라갔다. 배진호의 방으로 들어온 그녀는 책상 위에 상자를 내려놓고 그의 앞으로 밀었다.배진호는 보자마자 알아챘다.“또 그 사람인가요?”“아마도 그런 것 같아요.”권다솔은 미간을 찌푸렸다. 대체 누가 그녀에게 왜 이런 선물을 보낸 것인지 알 수 없었다.“이번엔 이 쪽지까지 있었어요. 내일 만나자고 하더군요.”배진호는 쪽지를 보았다. 그녀의 말대로 위에는 장소까지 적혀 있었다.“유니랜드 회사에서 별로 멀지 않네요.”“그 말인즉슨 한 번 만나보라고요?”배진호는 쪽지를 내려놓았다. 그의 목소리는 유난히도 차분하고 냉정했다. 회사를 설립한 이후로 그의 위엄은 나날이 커져만 갔다.지금의 배진호는 비서 때와 완전히 달랐고 진정한 상위 포식자가 되어 있었다.“한번 만나보고 와요. 대체 뭐 하려는 속셈인지 잘 알아보고 오는 거예요. 걱정할 필요 없어요. 나도 따라갈 거니까.”그의 얼굴에 웃음이 번지기 시작했다. 냉담하던 모습은 사라지고 없었고 웃음기 머금은 두 눈으로 볼 빨개진 권다솔을 보았다.“누가 함께 가 달라고 했나요?! 이런 일은 나 혼자서도 다녀올 수 있어요!”비록 말은 이렇게 했지만, 권다솔은 배진호가 함께 가는 것에 관해 거부하지 않았다.다음 날, 그녀는 유니랜드로 왔다.목걸이를 선물한 사람은 유니랜드 근처 빈티지 레코드 가게에서 만나자고 했다.권다솔은 한참 길을 헤매고 나서야 그 레코드 가게를 찾았다. 안으로 들어가자 뜻밖의 사람을 만나게 되었다.“오랜만이네. 너 정말 하나도 안 변했구나. 예전이랑 똑같아.”단정하게 정장을 차려입은 남자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하지만 지나치게도 날렵한 얼굴선에 쉽사리 다가갈 수 없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그런 모습으로 이런 말을 하니 오히려 뭔가 거짓말을 하는 듯한 기시감이 들었다.권다솔은 놀란 마음을 몰래 억누르며 말했다.“태
“지금 부모님께서 허락해주시는 일만 남았어요. 그럼 바로 진호 씨랑 결혼할 거거든요. 오빠도 그때 가서 우리의 결혼에 기뻐해 줄 거죠?”남태건의 눈빛이 어두워졌다. 테이블 아래로 내렸던 손은 어느새 주먹을 꽉 움켜쥐고 있었다.권다솔은 머리도 좋고 사리 분별도 잘하는 여자였다.그녀는 배진호를 소개하는 방식으로 그에게 알려주고 있었다. 그의 의도는 이미 눈치챘으니 거절하겠다고.권다솔의 마음속엔 배진호라는 인물이 있었기 때문이다.속에서 분노가 들끓어 오르면서 이성을 집어삼키려 했으나 남태건은 그대로 감정을 드러낼 수 없어 입술을 짓이기며 말했다.“아저씨랑 아주머니가 허락하지 않으셨다는 건 너랑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란 소리잖아.”“넌 어릴 때부터 그랬지. 앞뒤 가리지 않고 네가 원하는 것이라면 갖고 싶어 했지. 하지만 네가 원하는 건 너한테 어울린다는 보장은 없었어.”권다솔이 대답을 하기도 전에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떠나버렸다.결국 이 재회는 불쾌하게 끝나고 말았다.돌아가는 길에 권다솔은 남태건에 대해 배진호에게 알려주었다.비록 그가 무슨 사이인지 묻지 않았으나 권다솔은 그가 신경 쓰고 있음을 잘 알고 있었다.“방금 그 사람은 어릴 때 잠깐 알게 된 사람이에요.”권다솔은 그가 시동을 끈 틈을 타 손을 그의 팔에 올리며 애교 부리듯 당겼다.“미리 말해주지 않은 건 돌아올 줄 몰라서였어요. 혹시 날 원망하고 있는 건 아니죠?”배진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처음에는 아무렇지 않았으나 말이 없는 남자에 다소 마음이 불안해지기 시작했다.“진호 씨, 혹시 화가 난 건 아니...”말을 마치기도 전에 갑자기 그녀의 눈앞으로 그림자가 드리워지면서 그가 그녀에게 입을 맞추었다.시원한 향에 코끝에서 느껴지며 그녀의 머릿속도 맑아지게 했다. 그의 키스에 권다솔은 정신이 아득해졌고 오늘따라 유난히 거칠게 느껴졌다.역시나... 질투하고 있었던 것이 분명했다.하지만 그녀는 차 안이라는 것을 잊지 않았다.얼른 배진호를 밀어내고 말했다.“여기서는 싫어요.
여이현은 몇 개의 대책을 내놓으면서 배진호에게 선택하라고 했다.빠르게 회의는 끝났다.사무실로 돌아온 배진호는 조금 전 있었던 일을 전부 떠올려 보면서 손끝으로 이마를 짚었다. 생각만 해도 피곤함이 밀려왔다.“진호 씨! 회사에 비상이 걸렸다면서요! 괜찮아요?”권다솔이 들어오며 말했다.“여긴 왜 왔어요.”배진호는 무의식적으로 표정 관리를 했다. 그녀의 앞에서 초췌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내가 말했잖아요. 매일 회사로 출근할 필요가 없다고요. 다솔 씨가 힘들면 안 된다고요.”분명 지금 힘든 사람은 그였지만 억지웃음을 지으며 그녀를 걱정하고 있었다. 권다솔은 순간 화가 났다.“내 앞에서 연기하지 말아요!”“오는 길에 이미 전부 전해 들었어요. 회사에서 진행하고 있던 프로젝트 전부 계약 해지당했다면서요. 회사에 비상이 걸렸는데 왜 나한테는 말해주지 않은 거예요?”권다솔은 속상해 미칠 것 같았다.다른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배진호가 자신에게 말해주지 않았다는 사실에 서운했다.무슨 일이 있든 그는 그녀에게 말해주지 않았고 어떻게든 그녀가 안락한 삶을 살아가게 하려고 했다. 그는 대체 그녀를 뭐로 생각하는 것일까?상처 입은 권다솔의 눈빛은 배진호가 그냥 넘길 수 없을 정도가 되었다.그는 가슴이 미어지듯 아팠다. 곧이어 그는 그녀의 어깨를 돌리며 사과했다.“미안해요. 내가 잘못했어요. 다솔 씨에게 숨겨서는 안 되는 데 말이에요. 나한테 한 번 더 기회를 줄래요?”“이번이 마지막이에요. 다음에 또 그러면 용서해주지 않을 거예요.”권다솔은 그를 째려보았다. 조금 붉어진 눈가였기에 무섭기는커녕 오히려 귀여워 보였다.그렇다고 해서 배진호는 그냥 넘기지 않았다. 그녀가 하는 말에 꼬박꼬박 대답했다.권다솔을 달랜 후 배진호는 이틀간 일어난 일들과 여이현이 회의에서 했던 말을 전부 말해주었다.전부 들은 권다솔은 역시나 걱정하고 있었다.“그렇게 심각한 거예요? 그럼 회사 자금 사정도 그렇게 나쁜 건 아니겠죠? 아니면 일단 내가 돈
말을 마친 권다솔은 바로 집을 나서려 했다.이때 줄곧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지켜보기만 하던 권용민이 위엄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아무 데도 갈 생각하지 말아라.”“저녁에 파티가 있다. 남씨 가문에서 주최한 거야. 유학 갔던 아들이 돌아와서 앞으로 잘 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여는 파티라더구나. 네가 어릴 때 함께 놀던 남태건이 돌아온 거니까 너도 참석해.”그는 권다솔이 거절할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권다솔은 참고 있던 감정이 결국 터져버렸다.“안 갈 거예요.”권용민픠 표정이 바로 어두워졌다. 그는 평소에 과묵한 성격이었고 누군가 자신의 말에 토를 달거나 반항하는 것을 아주 싫어했다.그런데 권다솔이 지금 그의 인내심의 한계에 도전하고 있었다.그는 분노를 꾹꾹 참고 있었다. 권다솔이 자신의 딸이라는 이유만으로 말이다.“다솔아, 아빠한테 그게 무슨 말버릇이니.”눈치챈 김영은이 얼른 말렸다.“우리 집안은 전부터 친하게 지냈잖니. 유학하고 돌아온 사람도 네가 그렇게 따르던 태건이기도 하고 말이야. 그러니 우리가 더욱 귀국 파티에 참석해야 하지 않겠니?”“제가 모를 거로 생각하지 마세요. 두 분이 저랑 태건 오빠를 이어주려고 하는 거 모를 줄 알았어요?”권다솔은 코웃음을 치며 말을 이었다.“아무튼, 전 절대 가지 않을 거예요.”권용민은 결국 자리에서 일어났다. 얼굴엔 냉소가 지어져 있었다.“그럼 이 집에서 나갈 생각을 하지 말아라.”결국 권다솔은 집에서 나올 수 없었다.그녀의 부모님은 그녀를 집안에 가둬버렸다. 권용민은 그녀에게 남씨 가문 파티에 갈 것을 강요하면서 핸드폰을 압수했다.권다솔은 배진호에게 연락할 수 없게 되자 마음이 조급해졌다. 하지만 별다른 방법이 없었다.다음 날 밤, 권다솔은 브이넥으로 된 검은 원피스를 입고 남씨 가문으로 갔다.김영은도 함께 말이다.김영은이 따라간 목적은 권다솔이 파티 도중에 도망치지 않게 감시하기 위함이었다.차에서 내린 후부터 권다솔은 줄곧 미간을 구기고 있었다. 사람들이 인사를 해도 무시하면서
권다솔은 남태건과 눈이 마주쳤다. 웃음기 머금은 눈으로 자신을 보는 남태건에 그녀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남태건의 의도가 무엇인지 더 알 수 없었다.반면 김영은은 바로 눈치챘다. 그러고는 바로 행동으로 옮겨 두 사람을 이어주려고 했다.“오랜만에 만났는데 서로 하고 싶은 얘기가 많겠구나. 그래, 우리가 빠져줄 테니까 둘이 얘기 잘 나눠보렴.”김영은은 최선정의 팔을 잡으며 자리를 옮겼다.다가오는 사람도 없었기에 두 사람만 남게 되었다.권다솔은 직설적으로 말했다.“대체 무슨 생각인 거예요?”“내가 무슨 생각하는 지 바로 알리지 않아?”남태건은 그윽한 눈길로 그녀를 보았다. 아예 감정을 숨길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어릴 때 그랬잖아. 나한테 시집오겠다고. 비록 우리가 꽤 오랫동안 떨어져 있긴 했지만 난 아직도 그때 네가 한 말을 기억하고 있거든.”하지만 그때의 말을 진심으로 생각한 건 오직 남태건 뿐이었다.권다솔은 어릴 때 아무것도 모르고 내뱉은 말을 잊은 지 오래였다.남태건은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분노가 치밀었다.권다솔은 그런 그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어릴 때 내뱉은 말을 진심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세상에 몇이나 되겠는가.“태건 씨, 그 마음은 이해가 되지만 정말 죄송하네요. 어릴 때 뭣도 모르고 내뱉은 말을 한 번도 진심으로 생각한 적 없거든요. 전 태건 씨가 바라는 걸 이뤄드릴 수 없어요. 그러니 차라리 다른 여자를 만나보는 게 더 시간 절약될 것 같네요. 한 나무에만 목매다는 것이 아니라.”“그 사람 때문인 거지?”남태건의 한 마디에 권다솔은 멍해지고 말았다.고개를 들어 남태건을 보았다. 블랙홀처럼 끝이 보이지 않는 두 눈동자는 그녀를 빨아들일 것 같았고 이상하게도 공포가 밀려와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쳤다.하지만 그녀는 최대한 차분하게 말했다.“이건 진호 씨랑 아무 상관없어요.”그러나 남태건은 그녀의 말을 귓등으로 흘려보내고 있었다.“그 남자가 널 위해 회사까지 세웠다면서. 요즘도 회사가 잘 되긴 해? 협력
권다솔은 배진호의 품이 너무도 따듯하게 느껴졌고 저도 모르게 코를 훌쩍이며 말했다.“치, 안 믿어요. 진호 씨는 항상 모든 걸 생략해서 말하는 버릇이 있더라고요.”배진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두 사람은 확실히 말을 하지 않아도 서로의 마음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권다솔은 배진호의 품에 한참 안겨 있었다. 그런 그녀의 좋지 않은 기분을 눈치챈 그는 어떠한 재촉도 하지 않았다.두 사람은 그렇게 한참 서로 끌어안으며 서 있었다. 권다솔의 기분이 나아질 때까지. 그러고 난 뒤, 차에 올라탔다.권다솔은 배진호에게 그동안 있었던 일을 설명해 주었다.남태건이 한 짓이라는 것을 알게 된 배진호는 담담하게 말했다.“남원 그룹이 한 짓이라는 건 알고 있었어요. 그래서 받은 그대로 돌려줄 생각이었고요.”이미 대책이 있다고 하니 권다솔은 마음이 놓였다.며칠 지나지 않아 여이현이 남원 그룹에 손을 대기 시작했다.먼저 그들이 반년 동안 준비하고 있던 프로젝트를 밀어버리는가 하면 몇 년 동안 묻히고 있었던 남원 그룹의 기사도 내면서 여론으로 압박을 주기 시작했다.고작 며칠이라는 시간 사이에 남원 그룹의 주가는 절벽에 떨어진 것처럼 하락했다.배진호도 남원 그룹을 무너뜨리는 데에 꽤나 많은 힘을 들였다.남원 그룹이 필사적으로 숨기고 있던 비밀을 증거와 함께 전부 세상에 공개했다.남원 그룹은 세상에 공개된 비밀을 수습하느라 당연히 준비 중이던 프로젝트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고 협력 업체들도 원하던 이익을 얻지 못하자 자연스럽게 다시 돌아왔다.이번에 배진호는 한 번에 여러 부의 계약서를 써두었다. 또 이런 사태가 일어나지 않기 위해서 말이다.그 후로 남원 그룹은 며칠 동안 아주 잠잠했고 아무런 행보가 없었다. 그들은 며칠 동안 남원 그룹을 지켜보고 나서야 안심할 수 있었다.“역시 대표님이세요! 한 번에 빠르고도 정확하게 남원 그룹을 무너뜨리다니. 아마 남원 그룹에서는 아직도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몰라 얼떨떨해 있을 거예요!”
권다솔은 놀라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 몰랐다. 이 소식은 그녀에게 너무도 갑작스러운 소식이었다.얼마 지나지 않아 의사는 엽산을 처방해 주었다.두 사람은 세워 둔 차 앞으로 돌아왔다.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차에 올라탄 뒤에야 배진호는 진정하고 권다솔을 볼 수 있었다.“다솔 씨...”“나도 몰랐어요. 생리가 한 달 정도 안 오긴 했는데 원래 생리 주기가 불규칙해서 이번에도 그런 줄 알고 신경 쓰지 않았어요.”권다솔은 그가 말을 이어가기 전에 먼저 당황스러운 어투로 말했다.그녀는 배 속에 아기가 자라고 있을 줄은 전혀 몰랐다.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도 몰랐다.부모님은 아직 배진호와 그녀의 사이를 허락하지 않았는데 말이다.이틀 전에도 그녀와 남태건을 이어주려고 하지 않았는가. 만약 이 사실을 부모님이 알게 된다면 두 사람의 반응이 어떨지도 상상 가지 않았다.그럼에도 권다솔은 아이를 지울 생각은 하지 않았다.배 속에 있는 아기는 그녀와 배진호의 아기였으니까.그렇게 생각한 그녀는 가슴 한구석이 따스해지며 미래를 상상하게 되었다.배진호는 그녀가 망설이고 있는 것을 눈치채고 입술을 틀어 문 채 물었다.“아기 낳으려고요?”권다솔은 확고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그녀는 이미 대책까지 생각해 두었다. 설령 그녀의 가문에서 받아주지 않고 부모님이 허락해주지 않는다고 해도 어떻게든 이 아기를 낳아서 잘 키우리라고.그러나 배진호가 그녀에게 말했다.“이 아기 낳으면 안 돼요. 다솔 씨한테 짐만 될 거예요. 아직 초기니까 몸에 무리 가지 않게 지울 수 있을 거예요.”쿵!권다솔은 순간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믿을 수 없다는 눈빛으로 배진호를 보았다. 그 눈빛은 이내 분노로 바뀌었다.“진호 씨! 이 아기는 진호 씨 아기예요! 그런데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거예요?!”“그러니까 반드시 지워야 한다는 거예요.”배진호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도 괴로운 듯했다.“우리 아직 부모님 허락받지 못했잖아요. 이 아기가 세상에 나오게 되면 아주
온지유는 소미가 어느 나라에서 왔는지 몰랐다. 그랬기에 종류별로 접시에 담아주었다.“먹어 봐, 입에 맞는 거 있으면 더 가지러 오면 되니까. 하지만 낭비하면 안 돼. 먹을 만큼 가져가야 해. 알았지?”“아주머니가 골라준 거라면 소미는 전부 좋아요.”소미는 정말로 음식을 낭비하지 않았다.온지유가 담아준 음식은 전부 먹어치웠고 수프도 한 방울도 남기지 않고 전부 마셨다.배를 채운 후 여이현은 그들을 데리고 놀이공원으로 향했다. 소미는 처음에 어색해하면서 편히 놀지 못하는 모습을 보였지만 몇 개의 놀이기구를 타고 난 뒤 신나게 놀았다.“오빠, 난 회전목마가 좋아. 우리 한 번 더 타면 안 돼?”“아까 내가 큰 말에 탔으니까 이번엔 네가 큰 말에 타. 내가 작은 말에 탈게.”별이는 소미의 손을 잡았다.두 아이는 아직 어렸기에 위험한 놀이기구는 탈 수 없었다. 어린아이들이 타도 위험하지 않은 놀이기구를 전부 타본 뒤 마지막엔 온지유와 여이현과 함께 관람차를 탔다.관람차가 제일 높은 곳까지 올라갔을 때 소미는 두 손을 꼭 모아 말았다.“관람차가 제일 높은 곳에 올라갔을 때 소원을 빌면 이루어진다고 들었어요. 전 오빠랑 오빠 가족이랑 평생 같이 살고 싶어요.”“그럴 거야.”온지유는 아이를 보며 온화한 표정을 지었다.가족 구성원이 넷이면 아주 좋았다. 다섯이면 더 말할 나위 없이 좋을 것이다.놀이공원에서 나온 뒤 여이현은 호텔로 운전했다. 돌아가는 길에 고속도로를 지나서 온하윤을 태우려고 했다.온하윤은 이틀 동안 아빠와 엄마, 오빠를 보지 못해 반가웠는지 작은 손을 접었다 폈다 하면서 아주 좋아했다.“소미야, 봐봐. 하윤이는 내 여동생이야. 귀엽지?”별이는 소미를 데리고 온지유 옆에 서 있었다. 두 아이는 온지유가 안고 있는 온하윤을 보았다.소미는 조심스럽게 손가락을 온하윤의 입가로 가져다 댔다. 온하윤은 먹을 것인 줄 알고 혀를 내밀며 소미의 손을 깨물려고 했다.여이현은 얼른 소미를 안아 올렸다.“안 돼. 하윤이한테 손가락 물리면 안
“그래, 별이한테도 친구가 생겼으니 우리도 둘만 있을 시간이 더 많아지겠지.”여이현은 손가락으로 온지유의 손등을 천천히 쓸어내렸다.따듯하면서도 간지러웠다.온지유는 붉어진 얼굴로 그를 밀어냈다.“그러지 마. 아이들이 밖에 있다고. 만약 소리를 듣기라도 한다면 안 좋아.”별이는 아주 똑똑한 아이였다. 만약 별이가 그것이 무슨 소리냐고 묻는다면 온지유는 정말로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그녀는 정말이지 너무도 민망했다.“이 호텔은 방음이 아주 잘 되어 있어. 더구나 꼬맹이들은 지금 티브이에 정신이 팔렸잖아. 그래도 걱정된다면 티브이 음량을 더 높이면 되지.”온지유가 반박의 말을 하기도 전에 여이현은 이미 손을 뻗어 리모컨을 들고 오더니 음량을 두 개 정도 높였다.그리고 몸을 돌려 그녀에게 키스했다.그의 리드에 온지유는 몸이 녹아내릴 것 같았다.하늘에 어둠이 깔리고 나서야 두 사람의 몸은 떨어지게 되었다. 온지유는 티브이를 끈 뒤 녹초처럼 침대에 흐느적 누웠다.땀에 몸은 끈적거렸기에 너무도 샤워하러 욕실로 들어가고 싶었으나 움직이는 것이 귀찮았다.여이현은 욕실로 들어가 욕조에 따듯한 물 받아놓았다. 그리고 다시 나와 온지유를 안은 후 천천히 그 욕조 안으로 내려놓았다.온지유는 몸을 감싸는 따듯한 온기에 온몸이 나른해졌다.“지유야.”여이현이 나직하게 그녀를 불렀다. 그의 목소리는 너무도 매혹적이었다.“나 오늘 너랑 같이 자면 안 될까?'온지유는 하마터면 그의 목소리에 홀려 고개를 끄덕일 뻔했다.다행히도 정신이 번쩍 들어 그의 요구를 거부했다.“안 돼. 꿈도 꾸지 마. 내일 아이들이랑 놀이공원도 가기로 했단 말이야.”이미 조금 전의 일로 힘이 전부 빠진 그녀였다. 만약 또 반복하게 된다면 내일은 아마 눈을 뜰 수 없을지도 모른다.여이현은 점점 더 짙은 미소를 지었다.“얼른 씻어. 밖에서 기다릴게.”그도 온지유를 피곤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목욕을 마친 온지유는 샤워 가운을 입고 나와 의자에 앉았다. 그러자 여이현은 자연스럽게
소미는 줄곧 여이현과 온지유 앞에서 좋은 모습을 보이려 애썼다.별이는 그녀를 무척 좋아했다. 온지유가 그녀를 보육원에 맡기려 했으나 소미는 온지유의 팔을 꼭 끌어안고 놓지 않았다.“이모, 지금 바로 이모네 집에 가면 안 돼요?”“이젠 우리 집이야.”옆에 있던 별이가 말했다.“네가 원하기만 하면 언제까지나 머물 수 있어. 우리 아빠, 엄마 모두 정말 좋은 분들이고 여동생도 아주 귀여워.”어떤 아이들은 낯을 가리지만, 온하윤은 절대 그러지 않았다. 낯선 사람을 보아도 웃으며 울거나 떼쓰지 않는 아이였다.“응, 응.”소미는 힘차게 고개를 끄덕이고 다른 한 손으로 별이의 손을 잡았다.“다 같이 있으니 정말 좋아.”원래 여이현과 온지유는 이 도시에 사흘쯤 머무르며 놀 예정이었지만, 지금은 소미가 있으니 집으로 빨리 돌아가고 싶어졌다.떠나기 전, 그들은 아이들에게 물었다.“별아, 소미야, 놀이공원에 가보고 싶어?” “가고 싶어요!”별이는 힘껏 고개를 끄덕였다. 예전에도 놀이공원에 가본 적은 있지만 늘 혼자서만 놀았다. 이번엔 엄마 아빠도 곁에 있고 방금 사귄 새 친구 소미도 있다. 그와 달리 소미는 좀 더 주저하는 듯했다.“그... 그런데 놀이공원이 뭐예요?” “엄청 재밌는 곳이야. 거기엔 놀이기구가 잔뜩 있고, 큰 목마를 탈 수도 있고, 공중에서 빙글빙글 돌 수도 있어. 사람보다 더 큰 인형들이 있고 맛있는 음식도 많아.”별이가 간단히 설명했다. 소미의 눈이 점점 반짝였다.“세상에 그런 곳도 있구나!” “당연하지, 혹시 지금까지 한 번도 못 가봤어?”이번엔 별이가 놀랐다. 해외에도 놀이공원은 있을 것이니 말이다.소미는 고개를 끄덕이며 점점 목소리를 낮췄다.“엄마 아빠는 나를 한 번도 데려가지 않았어. 갈 때마다 동생들만 데리고 갔거든.” 주변 사람들이 모두 얼어붙은 듯 잠시 말이 없었다. 한참 뒤, 별이가 먼저 사과했다.“미안해, 내가 그런 말을 하지 말아야 했는데...” 그는 생각할수록 자신이 너무
권다솔은 고개를 숙여 문손잡이를 보고는 찰칵 소리를 내며 문을 열었다.마침 석규리가 약기운을 이기지 못하고 배진호에게 달려들던 순간이었다.배진호는 잠시 방심한 채 도와주려고 했던 상대가 되레 등 뒤에서 들이받을 줄 몰라 예기치 않게 큰 침대 위로 쓰러지고 말았다.석규리는 손을 더듬어 그의 입술로 키스하려고 했다.배진호의 눈동자는 순식간에 어두운 그림자로 뒤덮이며 고개를 젖혀 피했고 그녀의 입술은 그의 턱 끝에 스칠 뿐이었다.그는 찌푸린 얼굴로 그녀를 피한 바로 그때 문이 열렸다.배진호는 깜짝 놀라 문가를 바라봤고, 거기에 서 있는 사람은... 권다솔이었다.권다솔은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다솔 씨, 잠깐만. 오해했어요!”항상 침착하고 무너지지 않던 그의 태도에 균열이 가고 허둥대며 일어서려 했다.하지만 권다솔은 그의 움직임에 겁이라도 난 듯 더 빨리 뒤로 물러났다. 그녀의 얼굴에는 슬픔이 가득했으며 몸을 돌려 곧장 밖으로 나갔다.배진호는 뒤쫓으려 했으나, 석규리가 그를 끌어안으며 막았다.그는 멀어지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두 눈을 부릅떴다.얼마나 익숙한 장면인가.지난번 권다솔이 떠났을 때, 그는 하루 밤낮을 그녀를 찾아다니고 또 이삼일을 애타게 기다려서야 겨우 그녀를 곁에 둘 수 있었다.이번에는 얼마를 기다려야 할까?이번에도 돌아와 주기는 할까?...권다솔은 정신이 반쯤 나간 상태로 집에 돌아왔다. 마침 봄 휴가를 마치고 돌아온 도우미가 그녀를 보고 감추지 못할 놀라움을 드러냈다.“웬일이세요? 아직 병원에 계실 때 아닌가요?” 권다솔은 대답하지 않았다. 지금 이 순간 그녀는 누구와도 대화할 마음이 없었다.그녀는 자기 방 안에 스스로를 가둔 뒤, 배진호의 흔적으로 가득한 공간을 바라보았다. 칫솔은 그의 것이고, 컵도 그렇고, 수건마저 그에게 속한 것이며, 침대 위 이불조차도 반은 그의 몫이었다.그는 언젠가 말했었다. 그녀 외에는 그 누구도 원하지 않는다고. 하지만 그는 그 말을 지키지 못했다. 사람들은 모두
배진호는 냉담하게 그녀를 밀어냈고, 석규리는 침대에 쓰러지며 답답한 신음을 토해냈다.그가 약간 힘을 뺀 게 다행이었다. 그렇지 않았으면 아마 그녀는 바닥에 나뒹굴었을 터이다.“이미 말했잖아요. 다른 여자한테는 관심 없다고요.”배진호는 차가운 어조로 마지막 말을 던졌다.그는 곧장 문으로 가서 손잡이를 잡았다. 그러나 아무리 돌려도 문이 열리지 않았다.바깥에서 문을 잠근 것 같았다.뒤에서 훌쩍이는 소리가 작게 들려오자, 그는 뒤를 돌아보았다. 그녀도 피해자일 수 있다는 생각에 얇게 다문 입술을 살짝 움직였다.“차가운 물로 샤워라도 하는 게 어때요?”석규리는 붉어진 눈으로 그를 보며 중얼거렸다.“옷이 없어요.” 배진호는 잠시 침묵하더니 말했다.“...그럼 관두죠.”그에게 그녀가 입을 만한 옷은 전혀 없었다. 자기 옷을 빌려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한편, 권다솔은 몇 번이나 고민하다가 마침내 배진호의 집 초인종을 눌렀다.잠시 뒤, 정미진이 문을 열었다.결국 지난번과 같은 상황이 벌어지고 말았다. 그녀는 권다솔을 보자마자 반사적으로 문을 닫으려 했다.그런데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이상한 웃음을 흘리며 다시 문을 열고 말했다.“다솔 씨, 잘 왔어요. 들어와요.”권다솔은 정미진의 태도가 이상하다고 느꼈다.조금 전까지만 해도 그녀를 들여보내기 싫어하던 정미진이었다.그런데 왜 갑자기 마음을 바꿨을까? 혹시 동네 어르신들이 말했던 것처럼, 이 안에 배진호가 다른 여자와 있는 게 맞는 걸까?문턱을 넘어서면 두 사람이 정답게 대화를 나누거나 애정에 빠져 있는 장면을 마주하게 될지도 몰랐다. 그런 상상만으로도 가슴이 예리하게 찔렸다.권다솔은 심호흡을 하고 들어가기로 결심했다. 남은 미련이 있으니 직접 확인해야 했다.하지만 문턱을 넘어섰을 때, 그녀가 기대했던 충격적인 장면은 전혀 없었다. 배진호의 모습조차 보이지 않았다.거실에는 배상준만 덩그러니 앉아 있을 뿐이었다.‘내가 착각했나?’권다솔은 문득 스스로를 의심했다. 어쩌면 배진호는 정
배진호는 마시고 싶지 않았다.그는 물건만 챙겨 가고 싶었지만, 정미진의 말투에는 미묘한 강압과 간청이 뒤섞여 있어 냉정하게 등을 돌리고 떠나기가 쉽지 않았다.게다가 그는 그 물건들을 권다솔에게 돌려주어야 했다. 아이를 잃은 경위를 그녀가 알 필요가 있었다. 또 다른 이유는 아무리 그래도 상대는 그의 어머니였다. 20여 년을 길러준 어머니 아니던가.배진호는 목울대를 조금 움직이며 잔을 들어 단숨에 들이켰다. 이 한 잔으로 인연을 칼로 베듯 끊어버리려는 듯이 말이다.다 마신 뒤, 그는 홍경천 통을 들고 문밖으로 향했다.“진호 씨, 왜 가는 거예요?”석규리는 깜짝 놀라 일어섰다. 그러나 말을 마치자마자 몸이 격하게 흔들렸고 양 뺨은 유달리 붉게 달아올랐다.이미 현관까지 다다른 배진호는 머리를 움켜쥐고 뒤로 비틀거리다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긴 다리가 탁자에 걸려 날카로운 마찰음을 냈다.아랫배 깊은 곳에서 불덩이 같은 열기가 타오르는 듯 격렬했고 땀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목젖이 오르내리며 형언하기 어려운 갈망이 몸속 어딘가에서 피어났다.곁에 있는 석규리는 훨씬 더 상태가 심각했다. 그래도 배진호는 자제력이 좋아 약간의 의식이라도 남아 있었지만, 그녀는 이미 더위를 참지 못해 스스로 옷을 벗으려 하고 있었다.배진호는 그쪽을 쳐다볼 엄두도 내지 못하고 최대한 떨어져 앉았다. 이 상황에서 그는 단번에 한 가지 가설이 떠올랐다.“어머니, 그 물에 약을 탄 거예요?”그는 믿을 수 없다는 듯 흔들리는 눈빛으로 정미진을 바라봤다. 설마 친모가 이런 짓을 할 줄은 누가 알았겠는가.하지만 지금 정미진은 대답할 여유조차 없었다.배진호의 상태를 보고 약이 듣는 것을 확인한 그녀는 방 안에 숨은 배상준에게 신호를 보냈다. 이 집의 방음이 꽤 좋은 탓에 배상준은 한참 뒤에야 밖으로 나왔다. “얼른 진호랑 규리 씨를 2층 침실로 옮겨.”정미진이 지시했다.2층에는 빈 침실이 세 개 있었고, 그중 두 개는 복도의 맨 왼쪽 끝과 맨 오른쪽 끝에 있어 거리가 멀었다
권다솔은 순간적으로 몸이 굳어버렸다. 주변에서 밀려오는 말들은 차디차고 날 선 바람결 같았다. 손가락은 경직되고, 팔다리는 감각을 잃은 듯했다. 이곳에 남은 것은 껍데기뿐인 육신밖에 없었다.‘진호 씨가 나한테 숨겼던 일이 이거였어?’한참이 지나서야 권다솔은 그 상태에서 벗어나 위층으로 올라갔다.그녀가 위로 향하는 동안, 배진호는 이미 거실에 앉아 있었다. 단지 그의 얼굴빛은 들어올 때보다 한층 더 싸늘했고, 눈동자 깊숙한 곳에는 얼음꽃이 맺힌 듯 미세한 온기조차 엿볼 수 없었다. 곁에 있던 석규리는 억울함이 거의 실체를 띨 듯했다. 그녀는 정미진을 바라보며 말을 건넸다.“아주머니...” 석규리는는 이해할 수 없었다. 자신의 조건은 분명히 뛰어난데 배진호가 왜 이러는 걸까. 게다가 그녀는 어머니의 명을 어기고 몰래 이곳까지 찾아온 상황이었다. 조연숙은 배진호가 결혼한 적 있다는 걸 알게 된 후부터 그를 원치 않았지만, 석규리는 쉽게 포기할 수 없었다. 그날 밤 처음 배진호를 만났던 순간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녀는 조연숙이 집을 비운 틈을 타 슬쩍 이곳으로 들어왔는데, 어째서 배진호는 여전히 차가운 태도로 일관하는 걸까? 전 아내와 비교해 그녀가 어떤 점에서 모자란다는 건가?“진호야, 규리가 틈내서 이렇게 어렵게 온 건데 얼굴 좀 피워봐.”정미진이 그를 나무랐다. 하지만 배진호가 이곳에 온 목적은 맞선이 아니었다. 그는 단지 정미진이 주겠다고 한 물건을 받기 위해 방문했을 뿐인데 도리어 속은 셈이다. 그런데 어찌 좋은 표정이 나올 리 있겠는가?그는 더 이상 인내심이 남아있지 않은 듯, 벌떡 일어나 한겨울 칼바람 같은 표정으로 말을 뱉었다.“물건을 줄 마음이 없으시다면 제가 괜히 헛걸음친 거네요.” 그는 정말 이대로 나가버릴 기세였다. 정미진은 가까스로 그를 속여 불러놓고 이렇게 그냥 보낼 수는 없었다. 그녀는 다급히 문 앞으로 달려가 가로막았고, 석규리 또한 긴장한 얼굴로 일어났다. “알았어, 알
하지만 지금 권다솔이 과연 좋은 삶을 누리고 있는가?배진호의 눈동자에 흐릿한 망설임이 스쳤다. 그는 문득 자신이 고집해 온 길이 옳았는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아마 회사를 차리지 않아도 다른 방법으로 권다솔의 부모를 설득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랬다면 이런 사태까진 오지 않았을 수도 있지 않을까?“집으로 돌아가세요. 그리고 저는 앞으로 나오지 않을 겁니다.”배진호는 한 템포 쉬고 나서 등 뒤의 정미진에게 차분히 말했다.“남은 장홍화는 저한테 주세요.”그 말을 남긴 뒤 그는 곧장 자리를 떴다.이번에도 정미진과 배진호 사이에는 불협화음만 남았다.그 후로 배진호는 쭉 권다솔 곁에 머물며 회사 일조차 손을 놓고 남에게 맡겼다. 여이현이 선뜻 도와줘서 참 다행인 부분이었다.밤낮으로 곁을 지킨 덕분에, 권다솔의 상태는 한결 나아졌다. 아이를 잃은 상실감의 그림자에서 서서히 벗어나고 있었다. 드물게 어린아이 용품이나 작은 장난감을 멍하니 응시하기는 했지만 전반적으로 회복세를 보였다.그녀의 상태가 좋아지는 걸 보자, 늘 긴장하던 배진호도 마음을 조금 놓을 수 있었다.그러던 어느 날, 며칠간 잠잠하던 정미진이 마침내 전화를 걸어서 장홍화를 넘기겠다고 했다. 배진호는 바로 비서에게 심부름을 시키려고 했다. 하지만 정미진이 그 의도를 못 알아챌 리 없었다. “물건을 가져가려면 네가 직접 와.”배진호는 잠시 생각한 뒤, 권다솔에게 한마디 알리고 집으로 향했다.그는 짐작도 못 했다. 자신이 막 출발한 직후, 권다솔이 병원에서 빠져나와 뒤를 밟을 줄은 말이다.“기사님, 앞에 가는 저 차 따라가 주세요.”권다솔은 택시 기사에게 부탁했다. 기사는 자신과 두 대 앞서 달리는 검은색 차를 힐끗 보고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아가씨, 대낮에 이런 건 좀 그렇지 않나요.”그러고는 무언가 충고라도 하려는 듯 입을 열었다. “제 남편이 바람피우고 있어요. 증거 잡으러 가는 길입니다.” 권다솔의 짧은 한마디에 기사는 할 말을 잃었다. 뭔가 목이 막힌 듯
조연숙이 말을 꺼내자 순간 방 안은 조용해졌다.정미진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었다. 그녀는 조연숙 모녀의 달라진 기색을 인지하곤 허둥지둥 수습하려고 했다. 그러나 바로 그때 배진호가 입을 열었다. “저는 결혼했습니다.”석규리의 젓가락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녀는 잠시 멍하니 있다가 눈시울이 붉어졌다. 조연숙은 분노에 들끓은 채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며 쏘아붙였다. “네 아들이 결혼했다는 걸 왜 이제 와서 말해?”“아니, 그게 아니고, 얘가 헛소리를...” 정미진은 황급히 배진호를 노려보곤 변명에 나섰다. “우리 집안에 얽혔던 여자가 있었던 건 맞지만, 두 사람은 이미 오래전에 헤어졌어.”하지만 조연숙은 냉소를 지었다. 이런 변명 따윈 세상 물정 다 겪은 사람들 눈에는 뻔히 보이는 허점 덩어리에 불과했다. 설령 정미진의 말대로라고 해도, 결국 배진호는 한번 결혼한 경력이 있는 남자라는 이야기다. 조건이 아무리 좋아도 무엇하랴? 잘 키운 딸을 돌싱에게 시집보낼 순 없었다.조연숙은 바로 석규리의 손을 잡아채며 노려봤다. “우리 딸은 그런 사람한테 시집갈 수 없어. 나가자.” 석규리는 아직 멍한 상태였으나 조연숙에게 이끌려 나가면서 미련 어린 시선으로 뒤를 돌아보았다.이렇게 상대를 떠나보내고 나서야 정미진은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그녀는 답답한 듯 한심하다는 눈빛으로 배진호에게 소리쳤다. “왜 그런 말을 했어? 규리가 널 얼마나 마음에 들어 했는지 몰라? 네가 입 다물고만 있었으면 일이 순조롭게 진행됐을 텐데!”“어머니, 저는 오늘 물을 게 있어서 온 거예요.” 배진호는 느닷없이 정미진의 말을 끊어버렸다. 그의 눈동자는 한기 서린 빛을 품고 있었고, 그런 기세에 정미진은 본능적으로 한 걸음 물러났다. “뭔데?”“다솔 씨 일 어머니한테 책임이 있죠?”배진호는 또박또박 말했다. 기세도 점점 살벌해졌다.자신이 뒷걸음질 친 사실을 깨달은 뒤, 정미진은 고개를 떨구며 고약한 얼굴빛을 띠었다. “내가 네 엄마인 거 모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