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다솔은 놀라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 몰랐다. 이 소식은 그녀에게 너무도 갑작스러운 소식이었다.얼마 지나지 않아 의사는 엽산을 처방해 주었다.두 사람은 세워 둔 차 앞으로 돌아왔다.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차에 올라탄 뒤에야 배진호는 진정하고 권다솔을 볼 수 있었다.“다솔 씨...”“나도 몰랐어요. 생리가 한 달 정도 안 오긴 했는데 원래 생리 주기가 불규칙해서 이번에도 그런 줄 알고 신경 쓰지 않았어요.”권다솔은 그가 말을 이어가기 전에 먼저 당황스러운 어투로 말했다.그녀는 배 속에 아기가 자라고 있을 줄은 전혀 몰랐다.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도 몰랐다.부모님은 아직 배진호와 그녀의 사이를 허락하지 않았는데 말이다.이틀 전에도 그녀와 남태건을 이어주려고 하지 않았는가. 만약 이 사실을 부모님이 알게 된다면 두 사람의 반응이 어떨지도 상상 가지 않았다.그럼에도 권다솔은 아이를 지울 생각은 하지 않았다.배 속에 있는 아기는 그녀와 배진호의 아기였으니까.그렇게 생각한 그녀는 가슴 한구석이 따스해지며 미래를 상상하게 되었다.배진호는 그녀가 망설이고 있는 것을 눈치채고 입술을 틀어 문 채 물었다.“아기 낳으려고요?”권다솔은 확고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그녀는 이미 대책까지 생각해 두었다. 설령 그녀의 가문에서 받아주지 않고 부모님이 허락해주지 않는다고 해도 어떻게든 이 아기를 낳아서 잘 키우리라고.그러나 배진호가 그녀에게 말했다.“이 아기 낳으면 안 돼요. 다솔 씨한테 짐만 될 거예요. 아직 초기니까 몸에 무리 가지 않게 지울 수 있을 거예요.”쿵!권다솔은 순간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믿을 수 없다는 눈빛으로 배진호를 보았다. 그 눈빛은 이내 분노로 바뀌었다.“진호 씨! 이 아기는 진호 씨 아기예요! 그런데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거예요?!”“그러니까 반드시 지워야 한다는 거예요.”배진호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도 괴로운 듯했다.“우리 아직 부모님 허락받지 못했잖아요. 이 아기가 세상에 나오게 되면 아주
임신한 사실을 배진호와 권다솔은 숨기기로 했고 부모님에게도 비밀로 하기로 했다. 한편으로는 권다솔은 아직 그들의 반응을 마주할 자신이 없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임신 사실을 알게 된 김영은이 회사로 와서 난동을 부릴까 봐 두려웠다.하지만 권다솔은 매일 외출했고 거기에다 남씨 가문 파티에서도 말없이 먼저 떠난 것에 대해 김영은은 이미 속이 타들어 가고 있었다.결국 권용민과 상의해 권다솔을 집으로 불러들이기로 했다.권씨 가문 본가 거실.권용민은 안경을 낀 채 소파에 앉아 있었다. 신문을 읽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상 현관 쪽을 힐끔대며 관찰하고 있었다. 손가락으로 소파를 톡톡 두드리며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는 듯했다.“여보, 이번에도 지난번처럼 행동하면 안 돼요! 다솔이 얘기를 들어주기로 했으니까 다솔이한테 자꾸 소리를 지르지 말아요. 그러다 괜히 싸움만 날 거니까요.”권용민은 건성으로 답했다.“알았어, 알았다고. 일단 다솔이가 오고 나면 다시 얘기해.”김영은은 여전히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몇십 년 동안 부부로 지냈기에 권용민이 어떤 성격인지 아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절대 자존심을 내려놓을 사람이 아니었다.그 순간 그녀의 눈이 빛났다. 현관 쪽에서 인기척이 들렸기 때문이다.“다솔아, 왔구나. 나랑 네 아빠가 네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단다. 손에 든 건 뭐니?”김영은이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며 권다솔을 맞이했다. 권다솔은 뜻밖의 환대에 멈칫하더니 선물로 사 온 찻잎을 건넸다.“이건 찻잎이에요. 아빠한테 드리려고 사 온 거예요.”권용민은 사업에 오랫동안 몸을 담그고 있었던지라 좋아하는 것이 별로 없었다.유일하게 좋아하는 것이라곤 찻잎이었다.이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극히 드물었다. 다른 사람이 아무리 머리를 쥐어짜며 생각해도 권용민에게 찻잎을 선물할 생각을 해내지 못했다. 하지만 딸로서 권다솔은 당연히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그녀가 사 온 찻잎도 권용민이 제일 좋아하는 대홍포였다.김영은은 그 찻잎을 권용민에게 건넸다. 그의 입꼬리
배진호는 권다솔을 보며 한숨을 쉬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를 소파에 앉혔다.“내 눈치를 보면서 말하지 않아도 돼요. 다솔 씨 아버님이 하신 말씀이니 당연히 가야죠.” 비록 두 사람의 사이를 허락해주지 않았지만, 그는 이미 권용민을 자신의 장인어른으로 생각하고 있었다.장인어른도 반쯤 그의 아버지가 된 것과 다를 바 없었다.그러니 어떻게 찾아가지 않을 수 있겠는가.배진호는 점심 즈음에 다정 그룹으로 찾아갈 생각이었다.권다솔은 마음이 놓이지 않아 함께 가려고 했으나 배진호는 거절하며 가만히 회사에 있으라고 했다.물론 이견이 좁혀지지 않았다. 하지만 결국 권다솔은 고개를 끄덕이게 되었다.다정 그룹.높게 솟아오른 고층 빌딩에 금방 차에서 내린 배진호는 다소 긴장감을 느끼게 되었다.분명 여이현의 곁에서 비서로 일하면서 수많은 회사와 대표님들을 만나봤고 다정 그룹은 그가 봐온 회사 중 큰 회사도 아니었지만, 이상하게도 긴장되었다.그는 옷매무새를 정리하고 걸음을 옮겼다.로비 직원이 미소를 지으며 그에게 말을 걸었다.“안녕하세요, 방금 저희 회장님을 뵙겠다고 하셨는데, 혹시 약속 잡고 오신 걸까요?”“네, 회장님이 직접 저를 부르셨습니다.”배진호는 간단히 대답했다.그의 말을 들은 로비 직원은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며 확인 전화를 걸었다.얼마 지나지 않아 그를 안으로 들여보냈다.3층이 바로 회장실이었다. 배진호는 그곳으로 안내를 받게 되었고 막힘없이 안까지 들어갔다.너무도 순조롭게 안으로 들어오게 되어 그도 믿어지지 않았다.권용민은 역시나 푹신한 의자에 앉아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가 들어오자 고개를 들었다.“진호 씨, 왔군요. 앉아요.”배진호는 침을 꿀꺽 삼켰다.그와 친한 사람이라면 눈치챘을 것이다. 그가 지금 엄청 긴장해 하고 있다는 것을.권용민은 겉보기엔 태산처럼 듬직하고 얼굴에 표정이 없었기에 배진호도 그가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아맞히기 어려웠다.“최근에 회사에 위기를 맞이하게 되었다던데, 프로젝트 몇 개나 잃게 되
“그러게 누가 나 혼자만 남겨두고 가라고 했어요. 진호 씨가 혼자 가니까 이렇게 따라온 거잖아요! 다음에도 또 나 혼자 두고 갈 거예요?!”배진호는 씁쓸한 웃음만 지을 수밖에 없었다.무력한 얼굴로 아직 평평한 그녀의 배를 보고서 속으로 다음엔 그러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지금의 권다솔은 그에게 반쯤 정성을 다해 모셔야 하는 조상님 같은 존재였다.두 사람은 이런 모습이 별다른 문제가 없다고 생각했지만 권용민은 아니었다. 딸이 갑자기 뛰어 들어와 남자의 품에 폭삭 안겼기 때문이다.“다솔아, 떨어져. 거울이 있으면 네 꼴 좀 봐! 뭐가 됐는지!”권용민은 잔뜩 화가 난 목소리로 말했다. 권다솔은 그제야 이곳에 권용민도 있다는 것을 떠올리고 얼른 그의 품에서 떨어졌다.“아빠...”“내가 평소에 그렇게 회사로 부를 땐 이 핑계 저 핑계 대면서 안 오더니. 배진호를 불렀다고 바로 달려오는구나.”권용민은 무심하게 말했다.권다솔은 말문이 막혀버렸다.권용민은 또 코웃음을 치더니 탐탁지 않는다는 눈빛으로 배진호를 보았다. 하지만 약속은 약속이었기에 무를 수 없었다.“아는 사람이 최근에 한 부지를 사서 회사 건물을 지어주겠다고 하더군요. 규모도 크니까 이윤도 꽤나 남을 거예요. 할 생각 있으면 이틀 뒤에 다시 와요. 내가 그 사람 소개해 줄 테니까.”배진호는 권다솔을 보았다. 그러자 권다솔은 자꾸만 그의 시선을 피하고 있어 바로 무슨 상황인지 눈치채게 되었다.그는 무의식적으로 미간을 찌푸렸다.다른 사람의 도움은 받고 싶지 않던 배진호였다. 세상엔 공짜라는 것은 없었으니까. 다른 사람이 도와준다는 것은 나중에 더 큰 도움으로 받아가겠다는 의미였다.하지만 눈앞에 잇는 사람은 권다솔의 아버지였다. 더구나 그는 권용민을 거절할 수가 없는 처지였다.그렇게 한참 고민한 후 고개를 끄덕였다.얘기가 끝났을 때 권용민은 권다솔을 붙잡고 싶었다. 애지중지 키운 딸이 허구한 날 배진호의 곁에만 붙어있는 것이 짜증이 났기 때문이다.그러나 두 사람 사이에 흐르는 공기는
권용민은 다행히 밖에서는 배진호를 싫어하는 티를 내지 않았다. 그는 사업 파트너에게 배진호를 소개했다.다만 자신의 미래 사위라는 것은 말해주지 않았다.“아, 권 회장님이 신경 써 주시고 있는 분이셨군요. 역시 잘생긴 얼굴만 봐도 유능한 사람일 것 같네요!”남자는 배진호를 칭찬했다.“과찬이네.”권용민은 무심코 배진호를 향해 선을 그었고 배진호뿐 아니라 사업 파트너도 눈치채게 되었다.한참 얘기를 나누다 보니 그는 배진호에 대해 미묘한 감정을 느끼게 되었다.배진호는 아주 담담했다.서로 인사치레를 한 후 그들은 자리에 앉아 식사를 하기 시작했다.그들이 예약한 곳은 오성급 호텔이었고 테이블 가득 먹음직스러운 음식이 있었다. 배진호는 담담하게 먹고 있었지만, 속으로는 권다솔을 생각하고 있었다.그는 권다솔이 최근 입덧을 심하게 한다는 것이 떠올랐다. 평소에도 그가 그녀가 밥을 먹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기에 겨우 음식을 섭취할 수 있었다. 하지만 출장을 나온 지금은 혼자서도 잘 챙겨 먹고 있는지 몰라 걱정되었다.그렇게 생각한 그는 미간을 살짝 찌푸리게 되었고 테이블 아래로 몰래 핸드폰을 꺼내 권다솔에게 문자를 보냈다.빠르게 권다솔이 답장했다.두 사람은 그렇게 서로 문자를 주고받게 되었다.문자를 주고받는 과정에서 배진호는 자신의 입꼬리가 저도 모르게 올라갔다는 것을 알아채지 못했다.그러나 권용민은 이 모든 것을 지켜보고 있었고 테이블 아래로 향한 그의 손을 힐끗 보았다. 배진호 핸드폰에 저장된 이름을 본 그는 코웃음을 쳤다.‘흥, 다솔이한테는 잘해주네!'권용민은 아직 배진호를 인정하지 않았다. 여하간에 배진호가 일하는 모습을 본 적 없었으니까.하지만 사업 파트너가 일에 관한 얘기를 꺼내자 배진호는 바로 진지해졌다.사업 파트너는 까다로운 질문만 해댔다.“듣기론 배진호 씨가 회사 처음 설립했을 때 여진 그룹의 도움을 받았다고 하던데, 맞나요?”배진호는 쿨하게 인정했다.“그럼 여진 그룹을 믿고 그 자리에 앉아 있는 거겠네요?”“이 문제에 관
“하지만 걱정되는 걸 어떻게 해요...”“근데 아무리 연락해도 대표님이 받지 않잖아요. 차라리 다른 사람에게 하면 모를까.”권다솔은 순간 누군가 떠올랐다.‘그래! 우리 아빠랑 함께 간 거잖아! 내가 왜 그 생각을 못 했지?!'그녀는 바로 권용민에게 전화를 걸었다. 권용민이 걱정되는 건 마찬가지였으니까.연결음이 들려오는 순간은 가장 괴로운 순간이었다. 속으로 끊임없이 두 사람이 무사하길 기도하면서 권용민이 전화를 받기만을 기다렸다.다행히 연결되었다.“여보세...치지직, 여기 치지직... 신호가 안 좋아.”전화기 너머로 권용민의 소리가 뚝뚝 끊겨서 들려왔다.지금 그들이 어디에 있는지 몰랐으나 신호가 잘 잡히지 않는지 자꾸만 치지직 소리만 났다.권다솔은 다시 걱정되기 시작했다. 행여나 그녀의 목소리가 안 들릴까 봐 목소리를 높여 말했다.“아빠, 지금 어디에 계신 거예요? 방금 인터넷을 보니까 영천시에 지진이 일어날 가능성이 있다고 하더라고요!”“뭐라고? 안... 들리는구나.”“거기에 지진이 일어난다고요! 외출하지 마세요!”권다솔이 말을 마치자마자 뚝뚝 끊기던 소리가 갑자기 선명하게 들려오기 시작했다. 그녀가 기뻐하기도 전에 전화기 너머로 다급한 배진호의 목소리가 들렸다.“지진이에요. 아버님, 얼른 피하세요!”그러더니 전화가 뚝 끊겨버렸다.의자에 앉아 있던 권다솔은 순간 손발이 차가워지며 온몸을 덜덜 떨게 되었다.옆에 있던 비서가 그런 그녀를 몇 번이나 불렀다.“부대표님, 부대표님! 진정하세요. 최대한 좋은 쪽으로만 생각하세요. 재빨리 안전한 곳으로 피했을 수도 있잖아요. 방금 전화가 끊기기 전에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오지 않았죠? 그럼 지진의 강도가 그다지 심하지 않다는 얘기에요. 그러니까 두 사람은 무사할 거라고요.”그 말을 들은 권다솔은 다시 희망을 품게 되었다.비서의 말이 맞았다.아직 상황이 그렇게까지 심한 정도가 아니었다. 소식을 받기 전까지 긍정적인 생각을 하는 것이 좋았다.그녀는 이내 김영은에게 전화를 걸어 상황을
권용민은 이불을 반쯤 덮고 있었다. 밖에서 들리는 의사와 김영은의 대화에 권다솔은 권용민이 다리를 다치게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하지만 그녀는 이불을 들춰 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왜인지 모르겠으나 눈물이 주룩주룩 흘러나와 이불에 떨어지게 되었다.권다솔은 침대에 기대어 처음으로 자신이 밉게 느껴졌다. 그녀는 어릴 때부터 권용민의 말을 잘 듣지 않았다.“아빠, 죄송해요. 제가 정말로 죄송해요!”“울긴 왜 우는 거니. 내가 죽은 것도 아니고.”이때 목소리에 기운이 넘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녀는 순간 멍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혈색이 좋은 권용민의 얼굴이 시야에 들어왔다.권용민은 여전히 엄숙한 표정을 짓고 있었고 미간을 찌푸린 채 그녀를 보고 있었다. 꼭 지금 이 순간에도 그녀에게 쓴소리해댈 것 같았다.그러나 권다솔은 전처럼 반항기를 보이지 않았다.빨개진 눈가로 권용민을 보다가 끌어안았다.“아빠, 죄송해요. 제가 너무 늦게 왔죠.”“고작 지진이 일어난 거로 뭘 그렇게 호들갑이냐.”권용민은 다소 당황했다. 어정쩡하게 팔을 들어 어찌할 바를 몰랐다.“내가 젊었을 때 이것보다 더 한 일도 당해봤단다. 고작 이 지진으로 날 어쩌지 못해. 그냥 조금 미끄러져서 넘어졌을 뿐이야.”“네? 부러진 게 아니었어요?”그의 말에 권다솔은 그제야 이상함을 느꼈다.역시나 권용민의 안색이 어두워졌다.“누가 그래? 내 다리가 부러졌다고.”두 사람의 목소리를 들은 김영은과 배진호도 병실로 들어왔다.마침 권다솔이 입을 열었을 때 김영은이 들어와 전부 듣게 되었고 다소 의아한 목소리로 말했다.“다솔아, 누가 네 아빠 다리가 부러졌다고 했니? 내가 방금 의사 선생님께 물어봤어. 선생님이 그러는데 네 아빠 아주 건강하대. 그냥 살짝 뼈에 금이 갔을 뿐이래. 걱정할 필요 없어. 이틀간 병원에서 푹 쉬고 있으면 퇴원할 수 있다고 하더구나.”권다솔은 고개를 홱 돌려 배진호를 보았다.배진호는 시선을 피하며 다소 머쓱한 얼굴로 말했다.“난 다솔 씨
권다솔은 몸을 흠칫 떨었다. 손을 내리고 싶었지만 행여나 숨기고 있던 비밀을 들킬까 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다.그 순간 그녀는 정말이지 긴장하게 되었다. 옆에 있던 배진호에게 눈빛을 보내며 도움을 청했다.배진호는 다행히 그녀의 눈빛을 바로 알아들었다.김영은은 병실에 남아 권용민을 간호해야 했고 두 사람은 얼마 지나지 않아 병실을 나섰다.지금까지 두 사람은 혼인 신고를 하지 않았다. 권다솔의 부모님이 두 사람 사이를 반대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권용민이 허락해주었으니 권다솔은 행여나 권용민의 마음이 바뀔까 봐 얼른 혼인 신고하고 싶었다. 마침 그녀는 필요한 신분증을 들고 왔기에 바로 구청으로 가면 되었다.한참 후 두 사람은 행복한 얼굴로 구청에서 나왔다. 권다솔은 예쁜 눈웃음을 지으며 배진호의 손을 잡았다.“안녕하세요, 남편님. 오늘부터 잘 부탁해요.”배진호도 보기 드문 웃음을 짓고 있었다. 너무도 매력적인 웃음이었다.주위에 사람이 없다는 것을 확인한 후 권다솔의 얼굴을 잡더니 보물을 다루듯 조심스럽게 입을 맞추었다.“잘 부탁해요, 아내님.”혼인 신고한 사실을 권다솔은 다른 사람에게 알리지 않았다. 여하간에 회사는 스타트업이었고 그녀도 조용히 지나고 싶었다.그래도 부모님에게는 말씀을 드렸다.딸이 생각보다 빨리 혼인 신고를 마쳤다는 사실을 두 사람은 알게 되었다. 거의 병실을 나서자마자 혼인 신고한 것이었다.권다솔과 배진호는 김영은에게서 이틀 내내 권용민의 표정이 좋지 않다는 것을 전해 듣게 되었다. 심지어 이틀 동안 집으로 돌아오지 말라고 했다.괜히 눈에 띄어 두 사람에게 화를 낼까 봐 말이다.권다솔은 입을 삐죽 내밀며 말했다.“치, 분명 아빠가 허락해주신 거잖아요. 근데 왜 삐지셨대요?”“허락한 거랑 이미 혼인 신고 마친 소식을 듣게 되는 거랑 같니?”김영은도 다소 화가 난 목소리로 말했다.“우리가 너를 얼마나 애지중지하면서 키웠는데. 그런데 갑자기 어떤 놈팡이가 널 홀랑 빼앗아 갔는데 어떻게 기뻐할 수 있겠니?”김영은의 말
권다솔은 이미 자신을 때릴 준비가 된 아버지의 손바닥을 감당할 각오를 하고 눈을 감았다. 그러나 예상했던 통증은 오지 않았다.눈을 뜬 그녀는 권용민이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저으면서 참아내는 모습을 보았다.김영은이 옆에서 권용민을 달래며 말했다.“혼자 화낸다고 뭐가 달라지겠어요. 지금 중요한 건 어떻게 이 문제를 해결하느냐죠. 이건 분명히 진호 씨 쪽 문제예요.”“당장 진호 씨를 불러서 해결해야 해요.”권용민은 그 말을 듣고 딸을 곁눈질로 보며 속으로 화를 다스렸다.참고 또 참고 나서야 그는 여전히 차갑고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들었지.”“만약 아직도 자존심이 있다면 더는 진호 씨를 감싸선 안 돼. 그는 다 큰 남자다. 자신의 문제는 스스로 해결해야 한다.”권다솔은 잠시 침묵한 후 배진호에게 문자를 보내 집으로 오라고 했다.문자를 받은 배진호는 급히 회사에서 달려왔다.거실에서 앉아 있는 권다솔을 보자마자 다가가려 했지만 권용민의 날카로운 시선에 얼어붙었다.“길게 말하고 싶지 않네요.”권용민은 단호하게 말했다. 그는 손으로 권다솔을 가리키며 말했다.“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리고 당신 어머니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도 모두 들었습니다.”배진호는 고개를 들고 권용민을 정면으로 바라보며 말했다.“제 어머니가 그날 한 말은 잘못됐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제 생각도 그렇다는 뜻이 아닙니다.”권용민은 그의 단호한 눈빛을 보며 속으로 약간 안도하면서도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사실 그는 배진호를 나쁘게 보지 않았다.그를 존중한 이유는 단순히 과거에 자신을 구한 은혜 때문이 아니라 그의 능력을 직접 목격했기 때문이었다.처음에는 배진호를 단순한 비서로만 보았다. 하지만 이후 그는 자신의 실력으로 한 기업을 성공적으로 운영하며 능력을 증명했다.그의 경영 방식은 보통 사람이 쉽게 해낼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 점에서 권용민은 배진호를 인정했다.그 기억을 떠올리며 권용민은 자신의 날카로웠던 시선을 조금 누그러뜨리며 말했다.“진호 씨, 저는
김영은은 깜짝 놀라 잠시 말을 잃었다.“너 그 집안과 엮이고 싶지 않다고 했었잖아. 그런데 이제 와서 왜 또?”권다솔은 고개를 숙이며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김영은은 딸의 반응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그녀가 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은 걸 알았기에 굳이 캐묻지 않았다.하지만 권용민은 달랐다.“그때는 결혼하면 잘해 주겠다느니 너희가 행복하게 살 거라느니 말만 번지르르하게 했네.”권용민은 어이없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결혼한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이런 일이 생긴 거냐?”“이건 전적으로 진호 씨의 잘못은 아니에요...”“아직도 진호 씨를 두둔하는 거야? 그럼 말해 봐. 진호 씨 잘못이 아니라면 왜 너는 이틀 동안 아무 소식도 없었던 거냐?”권다솔은 갑작스러운 질문에 말문이 막혔다. 테이블 아래에서 손가락을 꼬며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라 머릿속이 뒤엉켰다.그녀는 부모님의 성격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두 분 모두 불의를 참지 못하고 화를 잘 내는 성격이었다. 만약 자신이 배진호의 어머니에게서 받은 모욕을 털어놓으면 김영은은 분명 즉시 그 집으로 찾아가 난리를 칠 것이다.그리고 겨우 허락했던 권용민 역시 배진호와의 이혼을 요구할 게 뻔했다.부모님에게 있어 딸을 소중히 여기지 않는 사람은 용납할 수 없는 대상이었다.결국 권다솔은 침묵을 선택했다.그녀의 태도에 권용민은 더욱 답답함과 분노를 느꼈다. 딸이 집으로 돌아오긴 했지만 아무것도 말하지 않으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 수 없었다.“좋아, 네가 말하지 않으면 내가 진호 씨에게 직접 물어봐야겠다!”권용민은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결혼한 지 일주일도 안 돼서 내 딸이 이런 대접을 받는 이유가 뭔지 물어보지 않으면 안 되겠어!”그러면서 휴대폰을 들어 배진호에게 전화를 걸려 했다.권다솔은 급히 그의 손을 붙잡으며 전화를 막아섰다. 그녀는 김영은과 함께 애타게 설득하며 아버지를 저지했다.휴대폰을 간신히 빼앗았지만 권용민의 화는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분명히 말한다, 다솔아. 오늘 네
남태건의 거듭되는 청혼은 권다솔에게 그의 절박함을 분명히 느끼게 했다.그 절박함은 오히려 그녀가 떠나야겠다는 결심을 굳히게 했다.다음 날, 열이 내린 권다솔은 남태건에게 떠나겠다고 말했다. 그 말을 들은 남태건은 잠시 멈춰 서 담담하게 물었다.“아직 몸이 완전히 회복되지 않았는데 왜 그렇게 서둘러 떠나려는 거야?”“의사도 쉬라고 했잖아.”어제 공진혁이 분명히 더 쉬어야 한다고 말했었다.하지만 공진혁과 남태건의 친밀한 분위기를 본 권다솔은 그의 말을 신뢰할 수 없었다.권다솔은 단호히 떠나겠다고 했다.남태건의 눈빛은 점점 차가워졌다. 그는 입을 다물었다. 거실에는 무거운 침묵이 흐르며 불안한 공기가 감돌았다.유선화와 집안 사람들은 분위기를 파악하고 입을 다물었다.오랜 침묵 끝에 남태건이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그는 우아하게 입가를 닦으며 말했다.“지금은 안 돼.”“왜 안 되는 건데요?”권다솔이 이마를 찌푸리며 물었다.“지금 인터넷에서 떠도는 소문들 잊었어? 여론이 정리되지 않으면 네가 안전하다고 장담할 수 없어. 차라리 배진호에게 더 책임감 있게 행동해서 빨리 그런 소문들을 잠재우라고 해.”남태건은 입가에 냉소를 띠며 말했다.권다솔은 지금 인터넷에 떠도는 소문들을 떠올리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소문이 어디서 시작됐는지 알 수 없었지만 그것들은 그녀를 괴롭히고 있었다.배진호는 자신이 해결하겠다고 했지만 시간이 지나도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다.권다솔은 다시 한번 스스로를 다독였다.‘믿어야 해. 진호 씨를 믿어야만 해.’그녀는 깊은숨을 들이쉬며 말했다.“그래도 여기에 더 이상 머물 수는 없어요. 이미 오래 머물렀고 더 이상 신세를 지고 싶지 않아요. 오늘 밤 짐을 정리해 집으로 돌아가겠어요.”“가능하다면 차를 마련해 주셨으면 하지만 그렇지 않아도 상관없어요. 제가 알아서 갈게요.”권다솔의 단호한 태도에 남태건은 잠시 그녀를 응시했다. 그 순간 그녀를 억지로라도 붙잡아 두고 싶다는 어두운 충동이 머릿속을 스쳤다.하지만 결국 남태
권다솔의 간곡한 부탁에 유선화는 충전 중이던 휴대폰을 건네주었다.권다솔은 통화 기록을 열어보았다. 부재중 전화는 예상대로 열 통이 넘었고 가장 최근 것은 5분 전에 걸려 온 것이었다.익숙한 번호를 바라보며 그녀는 망설였다.마음 깊은 곳에서는 배진호의 목소리를 듣고 싶었다. 그가 자신의 안부를 묻는 다정한 목소리 걱정 어린 말들이 그리웠지만 전화를 걸 손가락이 화면에 닿을 때마다 정미진의 차가운 말투가 떠올랐다.결정을 내리지 못한 채 머뭇거리던 찰나 휴대폰이 갑자기 진동하며 울리기 시작했다.놀란 권다솔은 전화기를 떨어뜨릴 뻔했다.“선화 씨, 이 전화 좀 대신 받아주실 수 있나요?”권다솔은 유선화를 바라보며 말했다.방금 겨우 모은 용기가 전화벨 소리와 함께 흔들려버렸다.“지금은 누구와도 연락하고 싶지 않아요.”유선화는 의아해했지만 그녀의 부탁을 들어주었다.전화기를 받아 든 유선화는 뜻밖에도 상대가 남자라는 점에 놀랐다. 그리고 그의 목소리에는 지친 기색이 가득했다.전화기 너머에서 배진호는 기쁨을 억누르지 못한 듯 말했다.“다솔 씨, 드디어 전화를 받아줬네요! 도대체 어디에 있었던 거예요?”“다솔 씨를 정말 오래 찾아다녔어요. 아무리 찾아도 너를 찾을 수 없었어요. 어머니 대신 사과할게요. 제발 집으로 돌아와 주세요.”“저기... 죄송하지만, 저는 다솔 씨가 아닙니다.”유선화는 약간 어색하게 말을 끊었다.전화기 너머로 잠시 정적이 흘렀다. 그리고 나서야 배진호의 혼란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그럼 당신은 누구죠?”“저는 집안일을 돕는 사람입니다. 다솔 씨께서 지금 집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으시다고 하셨어요. 그리고 당신을 만나고 싶지 않다고도 하셨습니다. 며칠 동안 혼자만의 시간을 원하신다고 하시네요.”권다솔은 옆에서 손짓으로 유선화에게 할 말을 알려주었고 유선화는 그녀의 말을 따라 천천히 전달했다.모든 말을 전한 뒤 전화기 너머에서는 길고도 무거운 침묵이 이어졌다.마치 시간이 멈춘 듯 그 침묵은 끝날 줄 몰랐다.한참의 침묵
남태건은 굳은 얼굴로 권다솔에게 다가가 손등을 그녀의 이마에 살짝 대었다.뜨거운 열기가 손끝으로 전해지자 그의 얼굴은 더 어두워졌다.남태건이 손을 거두며 공진혁을 부르려 했지만 그 순간 손을 붙잡혔다. 멈칫하며 아래를 내려다보니 권다솔이 그의 손을 꽉 잡고 있었다.옆에서 지켜보던 유선화와 비서는 잠시 말을 잃었다.방 안은 무거운 침묵으로 가득 찼다.남태건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번지려는 찰나 권다솔의 입에서 그의 인내심을 시험할 이름이 흘러나왔다.“배진호 씨...”남태건은 순간적으로 손을 뿌리치듯 빼냈다.“대표님! 제가 의사를 불러오겠습니다.”비서는 서둘러 상황을 정리하려 했다.유선화도 눈치를 보며 방에서 나갔다.곧 가정의인 공진혁이 도착해 기본적인 검사와 약 처방을 준비했다.하지만 약을 처방하려던 순간 남태건이 중단시켰다.“임신 중이니까 약효가 순하고 아이에게 해가 되지 않는 걸로 처방해 줘.”남태건은 침대에서 잠든 권다솔을 바라보며 속으로 생각했다.‘이 사실을 알게 되면 너는 또 얼마나 나를 원망하게 될까.’공진혁은 그의 말을 듣고 깜짝 놀라 물었다.“아이를 임신했다고?!”남태건은 담담한 얼굴로 공진혁을 흘낏 보며 대답했다.“내 아이는 아니야. 더는 묻지 말고 진료나 계속해.”공진혁은 남태건의 차가운 얼굴을 보고 무언가 복잡한 사정이 있다는 걸 눈치채고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권다솔은 약을 먹은 뒤에도 깨어나지 않았지만 표정은 한결 부드러워졌다. 하루 종일 이어진 소동 끝에 이제야 조금 안정을 찾을 수 있었다.공진혁은 남태건을 한쪽으로 데리고 가 물었다.“아까 네 아이가 아니라고 했잖아. 그런데도 이렇게 애쓰는 걸 보면 무언가 특별한 감정이 있는 것 같은데.”“설마 남의 아이를 키울 생각이라도 있는 거야?”남태건은 그 말을 듣고 싸늘한 눈빛으로 공진혁을 쳐다보았다.비록 오랜 친구 사이였지만 그 질문은 그가 참아내기 어려운 선을 넘었다.남태건의 날카로운 시선에 공진혁은 긴장한 듯 침을 삼키며 말했다.“역시 너
얇은 입술을 살짝 다문 남태건의 검은 눈동자는 어디에도 초점을 맞추지 않았다.그때, 발표를 하느라 진이 빠진 팀장이 기대 어린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대표님, 어떻게 생각하십니까?”“좋아요.”남태건은 무심하게 대답한 뒤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그대로 진행하세요.”그 말을 남기고 직원들의 혼란스러운 얼굴을 뒤로 한 채 회의실을 떠났다.밖으로 나오자마자 그의 비서가 다급히 다가왔다.“대표님! 한 남성분이 회사에 무단으로 들어와 대표님을 꼭 만나야 한다고 합니다.”남태건은 발걸음을 멈췄다.1층 로비로 내려간 그는 예상대로 배진호와 마주쳤다.두 사람의 분위기는 지난번 유람선에서의 만남보다 훨씬 더 날카로웠다. 차가운 표정을 한 두 사람은 마치 당장이라도 싸울 것처럼 서로를 노려봤다.리셉션 직원은 긴장하며 상황을 지켜봤다. 혹시라도 자신이 말려들까 봐 잔뜩 몸을 움츠렸다.“남태건 씨, 다솔 씨를 어디로 데려갔죠?”배진호는 냉정하게 물었다.그는 밤새 고민했다.권다솔의 집을 찾아봤지만 그녀는 없었다. 남태건 외에 권다솔이 찾아갈 만한 사람은 없었다.권다솔은 원래 이런저런 곳을 다니는 성격이 아니었고 가까운 사람도 몇 없었기에 남태건이 가장 의심스러웠다. 과거에 이미 그녀를 데리고 간 적도 있었으니 더욱 그랬다.남태건은 두 손을 주머니에 넣고 태연한 태도로 대답했다.“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군요.”배진호의 눈에는 억누를 수 없는 분노가 차올랐다.“태건 씨! 무슨 말을 하는지 잘 알고 있을 텐데요. 다솔 씨에 대한 마음을 제가 모를 거라고 생각해요? 당신이 인터넷 여론을 조작한 것도 모를 거라고요?”두 사람의 시선이 강렬하게 부딪혔다.배진호는 분노로 가득 찬 눈빛으로 응시했다. 남태건은 도발적인 미소를 짓고 있었다.리셉션 직원은 충격을 받으며 조용히 입을 틀어막았다.‘이렇게 큰일을 듣게 되다니... 혹시 이 때문에 회사에서 쫓겨나는 건 아니겠지?’남태건은 끝까지 권다솔의 행방을 밝히지 않았다.시간이 지날수록
남태건은 권다솔에게 서두르거나 답을 강요하지 않았다. 그는 그녀를 집에 머물게 하며 객실을 준비해 주었다.권다솔은 지금 어디로 갈지조차 알 수 없었다.휴대폰은 꺼둔 상태였고 배진호와 마주치고 싶지도 않았으며 집으로 돌아갈 수도 없었다. 그 결과 자연스럽게 이곳에 머무르게 되었다.밤이 지나고, 권다솔은 휴대폰을 다시 켰다. 부재중 전화가 열 통 넘게 쌓여 있었다.모두 배진호가 걸어온 것이었다.“아가씨.”문을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일어나셨나요?”문을 열자 한 중년 여성이 서 있었다. 온화한 인상을 가진 그녀는 손에 새우 죽 한 그릇을 들고 있었다. 죽 위에는 은은한 기름과 짧게 썬 파가 얹혀 있었고 식욕을 자극하는 향이 은은하게 퍼졌다.권다솔의 시선을 눈치챈 여성은 부드럽게 말했다.“저는 이 집의 가정부입니다. 유선화예요.”“도련님께서 방해하지 말라고 하셨지만 벌써 점심때가 다 됐는데 다솔 씨께서 아무것도 드시지 않은 것 같아서 몸이 상할까 걱정돼 죽을 가져왔어요.”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죽 그릇을 옆 테이블에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태건 씨가 그렇게 하라고 한 거예요?”“그런 셈이죠. 다솔 씨를 많이 걱정하고 계세요. 사실 저는 가문 쪽에서 이곳으로 온 사람이에요.”유선화는 마치 어린아이를 보는 듯한 친절한 눈빛으로 권다솔을 바라봤고 그 시선에 둰가솔은 조금 어색함을 느꼈다.“도련님께서 이렇게 누군가를 신경 쓰시는 건 정말 처음 봐요.”“그래요...”권다솔은 입술을 움직였지만 뭐라고 해야 할지 몰랐다.남태건의 마음을 그녀는 이미 알고 있었다.솔직히 말해 권다솔은 어젯밤 그 차에 탄 걸 후회하고 있었다.어젯밤 그녀는 너무 큰 충격을 받았고 비를 맞은 탓에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남태건의 집까지 따라올 일은 없었을 것이다.이리저리 얽힌 생각 때문에 머리가 아팠다. 권다솔은 손으로 머리를 짚으며 약간 힘없는 목소리로 말했다.“그냥 거기 놔두세요. 조금 있다 제가 먹을게요.”그렇게 말한 뒤
차는 3층짜리 고급 별장 앞에서 멈춰 섰다.남태건은 권다솔에게 차에서 내려 옷을 바꿔 입을 것을 제안했다.그제야 권다솔은 그를 본 후 처음으로 말을 꺼냈다.“저는 안 들어갈게요. 그냥 길가 아무 데나 내려주시면 돼요. 혼자 돌아갈 수 있어요.”“이 상태로 길가에서 쭈그리고 앉아 있을 거야?”남태건이 가리킨 곳을 바라본 권다솔은 젖은 옷이 몸에 착 달라붙어 드러난 몸을 확인하고는 깜짝 놀라 당황했다.어디를 가려야 할지도 몰라 순간적으로 경직된 얼굴이 되었다.남태건은 더 이상 말로 설득하지 않고 별장의 문으로 가서 지문 잠금을 해제한 뒤 안으로 들어갔다.권다솔은 잠시 망설이다가 결국 그를 따라 들어갔다.남태건이 그녀에게 불순한 마음을 품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었다.하지만 두 집안의 오랜 인연을 고려하면 그가 실제로 그녀를 해칠 가능성은 크지 않아 보였다.반면 밤길에 홀로 남아 위험을 마주할 가능성은 훨씬 높았다.권다솔은 그런 상황을 감수하고 싶지 않았다.별장의 인테리어는 단정하면서도 차가운 느낌을 주었다.남태건이라는 사람처럼 차가우면서도 품위 있는 오만함이 묻어나는 공간이었다.처음엔 그런 분위기가 다가가기 어렵게 느껴졌지만 권다솔은 곧 자신의 생각을 바꿨다.남태건은 그녀를 위해 목욕물을 미리 준비했고 수건과 세면도구 세트는 물론, 갈아입을 옷까지도 마련해 두었다.그 세심함에 권다솔은 약간 놀라면서도 의아했다.샤워를 마치고 나오자 남태건은 그녀에게 따뜻한 우유 한 잔을 건네며 말했다.“이거 마셔. 기분을 안정시키는 데 도움이 될 거야.”권다솔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잔을 받아 들고 조용히 말했다.“고마워요.”잔을 손에 든 채 소파에 앉자 몸속으로 퍼지는 따뜻함이 빗속에서 느꼈던 차가움을 몰아내는 듯했다.식어 있던 마음도 몸이 따뜻해짐에 따라 서서히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남태건은 소파의 다른 쪽에 자연스럽게 앉아 다리를 꼬았다. 카키색 스웨터가 그의 움직임에 따라 약간 주름이 생겼다. 그는 솔직하게 물었다.“왜 혼자 비를
권다솔은 순간 온몸의 피가 얼어붙은 듯 멍하니 서 있었다.배진호는 두 주먹을 단단히 쥔 채였다.“어머니, 말이 너무 심하잖아요. 이건 다솔 씨의 잘못이 아니에요. 다솔 씨에게 사과하세요.”“사과? 그까짓 거 하면 되지.”배진호의 어머니인 정미진은 입으로는 사과한다고 말했지만 표정에는 일말의 미안함도 없었다.“다솔 씨, 이해하지? 우리 집이 큰 가문은 아니어도 나와 진호 아버지는 교직에 몸담아 왔어. 교양 있는 가문이라고. 그런 우리 집에 당신 같은 사람은 받아들일 수 없어.”정미진은 애초에 말을 순화할 의도가 없었다.권다솔은 마치 자신이 모든 것을 빼앗긴 채 사람들 앞에 던져진 것 같은 굴욕감을 느꼈다. 참혹함에 권다솔은 숨을 쉬는 것조차 고통스러웠다.그녀의 마음이 소리쳤다.'여기서 더는 못 버텨. 당장 이곳을 벗어나야 해.'권다솔은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의자가 날카로운 소리를 냈다.“오늘은 제가 실례했습니다. 이만 가보겠습니다.”그 말을 남기고 권다솔은 뒤돌아보지 않은 채 밖으로 뛰쳐나갔다.배진호는 그녀를 따라가려 했지만 정미진의 차가운 목소리가 그의 발을 붙잡았다.“지금 나가면 다시는 이 집으로 돌아올 생각하지 마! 진호야, 내 말 잘 들어. 내가 죽기 전에는 절대로 이런 여자와 결혼 못 시켜. 결혼한 다음에도 이런저런 남자와 얽히는 여자는 절대 안 돼!”배진호가 잠깐 망설인 사이 모든 것이 틀어지고 말았다.몇 분 후, 배진호는 비를 맞으며 권다솔을 찾아봤지만 그녀는 이미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없었다.그가 건 전화도 모두 연결되지 않았다.여이현이 그의 전화를 받았을 때 배진호는 거의 이성을 잃은 상태였다.“대표님! 제발 다솔 씨를 찾아주세요. 다솔 씨를 본가로 데리고 갔다가 문제가 생겼습니다.”“집 밖으로 뛰쳐나가서 어디로 갔는지 모르는 상태입니다. 비가 오는 데 혼자 있어서 걱정돼요.”배진호의 다급한 목소리에 그가 얼마나 초조한 상태인지 쉽게 알 수 있었다.여이현은 아무런 주저 없이 돕기로 했다.하지만 두 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