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걱정되는 걸 어떻게 해요...”“근데 아무리 연락해도 대표님이 받지 않잖아요. 차라리 다른 사람에게 하면 모를까.”권다솔은 순간 누군가 떠올랐다.‘그래! 우리 아빠랑 함께 간 거잖아! 내가 왜 그 생각을 못 했지?!'그녀는 바로 권용민에게 전화를 걸었다. 권용민이 걱정되는 건 마찬가지였으니까.연결음이 들려오는 순간은 가장 괴로운 순간이었다. 속으로 끊임없이 두 사람이 무사하길 기도하면서 권용민이 전화를 받기만을 기다렸다.다행히 연결되었다.“여보세...치지직, 여기 치지직... 신호가 안 좋아.”전화기 너머로 권용민의 소리가 뚝뚝 끊겨서 들려왔다.지금 그들이 어디에 있는지 몰랐으나 신호가 잘 잡히지 않는지 자꾸만 치지직 소리만 났다.권다솔은 다시 걱정되기 시작했다. 행여나 그녀의 목소리가 안 들릴까 봐 목소리를 높여 말했다.“아빠, 지금 어디에 계신 거예요? 방금 인터넷을 보니까 영천시에 지진이 일어날 가능성이 있다고 하더라고요!”“뭐라고? 안... 들리는구나.”“거기에 지진이 일어난다고요! 외출하지 마세요!”권다솔이 말을 마치자마자 뚝뚝 끊기던 소리가 갑자기 선명하게 들려오기 시작했다. 그녀가 기뻐하기도 전에 전화기 너머로 다급한 배진호의 목소리가 들렸다.“지진이에요. 아버님, 얼른 피하세요!”그러더니 전화가 뚝 끊겨버렸다.의자에 앉아 있던 권다솔은 순간 손발이 차가워지며 온몸을 덜덜 떨게 되었다.옆에 있던 비서가 그런 그녀를 몇 번이나 불렀다.“부대표님, 부대표님! 진정하세요. 최대한 좋은 쪽으로만 생각하세요. 재빨리 안전한 곳으로 피했을 수도 있잖아요. 방금 전화가 끊기기 전에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오지 않았죠? 그럼 지진의 강도가 그다지 심하지 않다는 얘기에요. 그러니까 두 사람은 무사할 거라고요.”그 말을 들은 권다솔은 다시 희망을 품게 되었다.비서의 말이 맞았다.아직 상황이 그렇게까지 심한 정도가 아니었다. 소식을 받기 전까지 긍정적인 생각을 하는 것이 좋았다.그녀는 이내 김영은에게 전화를 걸어 상황을
권용민은 이불을 반쯤 덮고 있었다. 밖에서 들리는 의사와 김영은의 대화에 권다솔은 권용민이 다리를 다치게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하지만 그녀는 이불을 들춰 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왜인지 모르겠으나 눈물이 주룩주룩 흘러나와 이불에 떨어지게 되었다.권다솔은 침대에 기대어 처음으로 자신이 밉게 느껴졌다. 그녀는 어릴 때부터 권용민의 말을 잘 듣지 않았다.“아빠, 죄송해요. 제가 정말로 죄송해요!”“울긴 왜 우는 거니. 내가 죽은 것도 아니고.”이때 목소리에 기운이 넘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녀는 순간 멍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혈색이 좋은 권용민의 얼굴이 시야에 들어왔다.권용민은 여전히 엄숙한 표정을 짓고 있었고 미간을 찌푸린 채 그녀를 보고 있었다. 꼭 지금 이 순간에도 그녀에게 쓴소리해댈 것 같았다.그러나 권다솔은 전처럼 반항기를 보이지 않았다.빨개진 눈가로 권용민을 보다가 끌어안았다.“아빠, 죄송해요. 제가 너무 늦게 왔죠.”“고작 지진이 일어난 거로 뭘 그렇게 호들갑이냐.”권용민은 다소 당황했다. 어정쩡하게 팔을 들어 어찌할 바를 몰랐다.“내가 젊었을 때 이것보다 더 한 일도 당해봤단다. 고작 이 지진으로 날 어쩌지 못해. 그냥 조금 미끄러져서 넘어졌을 뿐이야.”“네? 부러진 게 아니었어요?”그의 말에 권다솔은 그제야 이상함을 느꼈다.역시나 권용민의 안색이 어두워졌다.“누가 그래? 내 다리가 부러졌다고.”두 사람의 목소리를 들은 김영은과 배진호도 병실로 들어왔다.마침 권다솔이 입을 열었을 때 김영은이 들어와 전부 듣게 되었고 다소 의아한 목소리로 말했다.“다솔아, 누가 네 아빠 다리가 부러졌다고 했니? 내가 방금 의사 선생님께 물어봤어. 선생님이 그러는데 네 아빠 아주 건강하대. 그냥 살짝 뼈에 금이 갔을 뿐이래. 걱정할 필요 없어. 이틀간 병원에서 푹 쉬고 있으면 퇴원할 수 있다고 하더구나.”권다솔은 고개를 홱 돌려 배진호를 보았다.배진호는 시선을 피하며 다소 머쓱한 얼굴로 말했다.“난 다솔 씨
권다솔은 몸을 흠칫 떨었다. 손을 내리고 싶었지만 행여나 숨기고 있던 비밀을 들킬까 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다.그 순간 그녀는 정말이지 긴장하게 되었다. 옆에 있던 배진호에게 눈빛을 보내며 도움을 청했다.배진호는 다행히 그녀의 눈빛을 바로 알아들었다.김영은은 병실에 남아 권용민을 간호해야 했고 두 사람은 얼마 지나지 않아 병실을 나섰다.지금까지 두 사람은 혼인 신고를 하지 않았다. 권다솔의 부모님이 두 사람 사이를 반대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권용민이 허락해주었으니 권다솔은 행여나 권용민의 마음이 바뀔까 봐 얼른 혼인 신고하고 싶었다. 마침 그녀는 필요한 신분증을 들고 왔기에 바로 구청으로 가면 되었다.한참 후 두 사람은 행복한 얼굴로 구청에서 나왔다. 권다솔은 예쁜 눈웃음을 지으며 배진호의 손을 잡았다.“안녕하세요, 남편님. 오늘부터 잘 부탁해요.”배진호도 보기 드문 웃음을 짓고 있었다. 너무도 매력적인 웃음이었다.주위에 사람이 없다는 것을 확인한 후 권다솔의 얼굴을 잡더니 보물을 다루듯 조심스럽게 입을 맞추었다.“잘 부탁해요, 아내님.”혼인 신고한 사실을 권다솔은 다른 사람에게 알리지 않았다. 여하간에 회사는 스타트업이었고 그녀도 조용히 지나고 싶었다.그래도 부모님에게는 말씀을 드렸다.딸이 생각보다 빨리 혼인 신고를 마쳤다는 사실을 두 사람은 알게 되었다. 거의 병실을 나서자마자 혼인 신고한 것이었다.권다솔과 배진호는 김영은에게서 이틀 내내 권용민의 표정이 좋지 않다는 것을 전해 듣게 되었다. 심지어 이틀 동안 집으로 돌아오지 말라고 했다.괜히 눈에 띄어 두 사람에게 화를 낼까 봐 말이다.권다솔은 입을 삐죽 내밀며 말했다.“치, 분명 아빠가 허락해주신 거잖아요. 근데 왜 삐지셨대요?”“허락한 거랑 이미 혼인 신고 마친 소식을 듣게 되는 거랑 같니?”김영은도 다소 화가 난 목소리로 말했다.“우리가 너를 얼마나 애지중지하면서 키웠는데. 그런데 갑자기 어떤 놈팡이가 널 홀랑 빼앗아 갔는데 어떻게 기뻐할 수 있겠니?”김영은의 말
권다솔은 본능적으로 거절하려고 했으나 눈치챈 최선정이 할 말이 있는 것처럼 다시 말을 이었다.“생각해보니 너랑 그렇게 만나는 건 오랜만인 것 같구나. 네가 어렸을 때 기억나니? 아주 자그마한 아이였는데 그새 어른이 되었구나. 설마 오랜만에 만나서 내가 어색해진 건 아니겠지?”최선정이 이렇게까지 말한 이상 거절한다면 권다솔이 무정한 사람으로 낙인찍히는 것이었기에 하는 수 없이 수락했다.전화를 끊은 후 권다솔은 그제야 남태건도 가는 건지에 관해 묻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기에 조금 고민이 되었다.그녀는 남태건을 만나고 싶지 않았다.하지만 다시 전화를 건다면 이런 그녀의 속마음이 들키지 않겠는가.그녀는 한숨을 내쉬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됐어. 그때 가서 제대로 분명하게 말하면 되는 거야.”한편 남씨 가문 본가 거실.통화를 마친 최선정이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전화는 내가 이미 했으니까 이 기회는 네가 단단히 잡아.”옆에 앉은 남자는 짙은 회색의 옷을 입고 있었다.은테 안경을 낀 남자는 편한 복장 차림이었던지라 왠지 모르게 친근감이 느껴졌으나 사나운 눈매만큼은 아무리 친근감이 느껴지는 복장이라고 해도 다가가기 어려운 분위기를 풍겼다. 어딘가 위험한 분위기를 내뿜고 있었다.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으나 천천히 입꼬리를 올렸다.“내 고양이, 우리 곧 또 만나게 되었네?”권다솔은 한참 망설였다. 최선정과 함께 자선 파티에 간다는 말을 배진호에게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말이다.말을 해준다면 행여나 배진호가 오해할까 봐 걱정되었다.하지만 말을 하지 않는다면 오히려 더 수상해 보일 수 있었다.그렇게 고민하고 있을 때 배진호 테이블에 있는 초대장을 발견하게 되었다.“당신도 이 자선 파티에 가요?”배진호는 그녀의 말을 듣고 멈칫했다.“당신도라니?”“남태건 씨 어머니가 저한테 이 파티에 같이 가자고 전화하셨어요. 그리고 전 동의했고요.”말을 마친 권다솔은 그의 얼굴을 빤히 보다가 물었다.“화 안나요?”그녀의 말을 들었을 때 배진
직원이 샴페인을 쟁반에 올려놓고 사람들 사이를 지나가며 서빙하고 있었다.권다솔이 배진호의 팔짱을 끼고 입장하자 모든 이의 시선이 두 사람에게 쏠리게 되었다.누군가는 그녀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다른 이유는 없었다. 그녀가 너무도 예뻤기 때문이다.네이비색 드레스엔 반짝이는 것들이 붙어있어 꼭 밤하늘의 별같이 절로 시선이 갔다. 움직일 때마다 찰랑거리는 드레스 자락은 고요한 밤에 출렁이는 파도 같았다.물결 파마로 정리한 긴 머리는 그녀의 분위기와 아주 잘 어울렸다. 드레스 자락을 들고 등장할 때 사람들은 전설에서만 나오는 인어공주가 등장한 듯한 기분을 느꼈다.유람선에는 여러 부류의 사람이 있었다. 재계에 처음 발을 들인 사람도 있었고 해외에서 참석한 기업 회장도 있었다. 또 이 자선 파티를 기회로 인맥을 쌓으러 온 사람도 있었다.여자 스캔이 끝난 그들은 서로 눈빛을 주고받더니 바로 다가가 말을 걸었다.권다솔처럼 예쁘고 처음 보는 인물은 더욱 그들이 놓칠 수 없는 먹잇감이었다.“예쁜 아가씨, 연락처 좀 알 수 있을까요?”“하, 그 얼굴로 그런 말 할 자격이 있어요? 준다고 해도 저한테 주겠죠. 평소에 거울도 자주 안 보고 다니시나 봐요. 이분뿐만 아니라 평범한 여자들도 연락처를 안 주게 생겼네요.”“지금 뭐라고 했어요?!”배진호는 아주 담담했다. 묵묵히 작업을 걸어오는 남자들을 향해 서늘한 경고의 눈빛을 보냈다.그의 눈빛에 권다솔에게 함부로 작업을 걸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눈치챈 사람이 먼저 옆 사람의 어깨를 툭툭 치며 말했다.“됐어요. 작업 걸 생각은 접는 게 좋겠네요. 임자가 있는 사람을 빼앗을 수 있을 리가 없잖아요.”남자는 부러운 눈길로 배진호를 보곤 작업을 걸려던 생각을 접었다.권다솔에게 꽂힌 시선들이 그제야 사라지게 되었다.배진호는 권다솔의 손을 꽉 잡고 나직하게 말했다.“날 꽉 잡아요. 절대 내 곁에서 떨어지면 안 돼요.”권다솔도 자신을 훑어보던 사람들을 눈치챘다. 좋은 시선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기에 그의 곁에 꼭 붙
권다솔은 배진호가 뭘 걱정하고 있는지 잘 알고 있었기에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안심시켰다.“괜찮아요. 금방 다녀올게요. 우 대표님이랑 대화가 끝나서도 내가 안 보이면 그때 찾으러 와줘요. 그러면 괜찮죠?”배진호는 그제야 그녀를 보내주었다.유람선 안은 아주 컸기에 권다솔은 한참 헤매고 나서야 화장실을 찾을 수 있었다.화장실 안도 호화롭기는 마찬가지였다.벽은 금색으로 도배되었고 세면대 거울 테두리는 정교한 꽃무늬가 새겨져 있어 아주 호화로웠다.권다솔은 손을 씻은 뒤 나오자마자 누군가 그녀의 앞을 막아섰다.“다솔아, 이런 우연이 다 있네.”권다솔은 고개를 들어 남자를 보았다. 남태건을 제외하고 그녀를 막아 세울 사람이 또 누가 있겠는가.“여긴 어쩐 일이세요.”말을 하고 나니 그녀는 후회가 되었다.최선정이 왔으니 최선정의 아들인 남태건이 오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기 때문이다.그녀는 정말이지 쓸데없는 질문을 한 것이다.남태건은 역시나 웃음을 터뜨리며 그윽한 눈길로 그녀를 보았다. 그 눈빛에 담겨 있는 불손한 마음 때문에 권다솔은 다소 무서웠다.“넌 역시 전과 달라진 게 하나도 없네.”권다솔은 미간을 찌푸렸다. 남태건이 자꾸만 의미도 없는 어릴 적 일을 언급하고 있으니 말이다.어릴 적 일은 그녀에게 전부 지나간 일이었다. 이미 지나간 일을 언급해 봤자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그러나 남태건은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꿰뚫고 있는 듯했다.권다솔이 입을 열기도 전에 그가 먼저 말을 꺼냈다.“오늘 경매에 아주 귀하고 희귀한 보석이 나온대. 해외 유명 디자이너가 그걸 조각해서 원석으로 만들었지. 그리고 이름은 Devil's Love이라고 지었대. 그 의미 또한 악마의 사랑이고.”“사실 이 보석은 보라색 보석이야. 의미가 사랑이긴 하지만 사람에게 두려움을 심어주는 의미는 아니었거든. 그냥 이 디자이너가 그 의미를 왜곡한 거야.”복도의 불빛이 남태건에게로 쏟아지며 드리워진 그림자가 더 무서운 분위기를 만들어냈다.하지만 조금 머리가 어질거리는
권다솔은 빠르게 사과한 후 고개를 숙인 채 지나가려 했다.“뭐야! 감히 부딪치고 간단한 사과 한마디로 도망가려고? 내가 그렇게 놔둘 것 같아!”남자는 그녀의 손목을 확 잡더니 잡아당겼다.권다솔은 아픈 소리를 내며 벽에 부딪치게 되었다.그녀의 목소리에 남자는 술이 확 깬 듯 눈을 껌뻑이며 그녀를 자세히 보려고 했다.그러더니 이내 눈을 반짝였다.“아주 예쁘게 생겼네? 하룻밤 얼마야? 내가 오늘 네 시간 전부 사지!”배가 불룩 튀어나온 남자는 음흉한 눈빛으로 그녀를 위아래 훑어보았다. 권다솔을 몸을 아끼지 않는 사람이라고 확신한 듯했다.유람선 안에는 확실히 이런 부류의 여자가 있었다. 대부분 이곳에 모인 부잣집 도련님을 노리고 어떻게든 엮여 호화로운 인생을 살아보자고 했다.그러나 권다솔은 아니었다.“비켜! 거울이나 좀 보고 그런 말을 해! 내가 아무나 만나주는 사람인 줄 알아?!”권다솔은 하이힐을 신은 발을 들어 남자의 발을 꽉 밟았다. 남자가 고통에 아우성을 치고 있을 때 그녀는 얼른 치맛자락을 들고 도망쳤다.빠르게 남자는 화를 내며 뒤쫓아왔다.“씨 x, 감히 발을 밟아? 내가 오늘 절대 가만두지 않을 거야!”조금 전 남자가 나왔던 룸의 문이 또 한 번 열리더니 이번엔 경호원이 우르르 나왔다. 복도는 정장을 입은 사람들로 가득했다.남자는 경호원들에게 당장 권다솔을 잡아 오라고 명령했다.하지만 권다솔은 아주 빨랐다.그들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여자가, 그것도 하이힐을 신었음에도 어떻게 이렇게 빨리 뛸 수 있는지를.얼마 지나지 않아 권다솔은 코너를 돌더니 더 힘을 내서 뛰었다. 메인홀까지 말이다.그럼에도 그 사람들은 포기하지 않고 그녀를 따라와 그녀의 팔을 하나씩 붙잡았다.방금 권다솔에게 발 밟힌 남자는 거친 숨을 내쉬며 뛰어왔다.“너, 방, 방금 아주 빨리 달리지 않았나? 어, 어디 지금 내 앞에서 또 달려보시지.”권다솔은 차갑게 코웃음 쳤다.“숨이나 돌리고 말하는 게 어때. 내가 지금 어떤 기분인지 알아? 숨 헐떡이는 개랑
남태건의 시선이 권다솔에게 닿았다. 하지만 그가 내뱉은 말은 그녀에게 하는 것이 아닌 주위 사람들에게 하는 것이었다.“경매가 곧 시작할 겁니다. 좋은 물건을 놓치고 싶지 않은 거라면 얼른 준비하는 것이 좋겠죠.”남태건은 긴말하기 싫어하는 태도였다. 주위 사람들도 눈치가 있었던지라 바로 알아챘다.“남 대표님 말씀이 맞습니다. 이번 경매는 절대 놓쳐서는 안 됩니다!”“맞습니다. 곧 경매가 시작할 때가 되었지요.”말을 마치자마자 홀 안에 있던 조명이 어두워졌다.사람들이 혼란스러워하고 있을 때 홀 중앙으로 빛이 들어왔다. 사회자는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중앙으로 갔다. 한바탕 식상한 인사치레를 한 뒤 경매를 시작했다.홀에 있던 사람들은 알아서 자리를 찾아 앉았다. 권다솔도 배진호와 함께 자리를 찾아 앉으려 했다.걸음을 뗄 때 남태건이 그녀에게 말했다.“이따 경매가 끝나면 또 봐.”권다솔은 그를 힐끗 보기만 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녀는 배진호와 함께 시야가 탁 트인 좋은 자리를 찾아 앉았다. 그러고 난 후 그에게 손을 보여달라고 했다.빨갛게 물든 손가락 관절에 권다솔은 미간을 찌푸렸다. 화가 나면서도 속상했다.“방금 물어봤을 땐 괜찮다면서요. 이게 뭐예요. 괜찮은 게 손이 이 모양인 거예요?”배진호는 별것 아니라고 생각했다.그의 손에는 방금 그녀를 붙잡고 있던 경호원을 때렸을 때 난 상처가 남아 있었다. 같은 상황이 반복된다고 해도 그는 망설임 없이 똑같이 행동했을 것이다. 그들이 권다솔에게 손을 대고 있었으니 말이다.“난 정말 괜찮아요.”그는 권다솔을 달래곤 따듯한 온기가 느껴지는 손으로 그녀의 손을 잡았다.“이것도 그냥 살짝 까진 것일 뿐이에요. 내버려 두면 알아서 상처가 아물 거예요.”그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녀를 달래고 나서야 권다솔은 마음이 풀렸다.경매는 지금까지 진행되었고 이미 5개의 물건을 낙찰받았다.낙찰받은 5개의 물건은 전부 자잘한 것이었다. 엽전이나 서화 등 뒤로 가면서 점차 소장 의미가 있는 것이었다.남
차는 3층짜리 고급 별장 앞에서 멈춰 섰다.남태건은 권다솔에게 차에서 내려 옷을 바꿔 입을 것을 제안했다.그제야 권다솔은 그를 본 후 처음으로 말을 꺼냈다.“저는 안 들어갈게요. 그냥 길가 아무 데나 내려주시면 돼요. 혼자 돌아갈 수 있어요.”“이 상태로 길가에서 쭈그리고 앉아 있을 거야?”남태건이 가리킨 곳을 바라본 권다솔은 젖은 옷이 몸에 착 달라붙어 드러난 몸을 확인하고는 깜짝 놀라 당황했다.어디를 가려야 할지도 몰라 순간적으로 경직된 얼굴이 되었다.남태건은 더 이상 말로 설득하지 않고 별장의 문으로 가서 지문 잠금을 해제한 뒤 안으로 들어갔다.권다솔은 잠시 망설이다가 결국 그를 따라 들어갔다.남태건이 그녀에게 불순한 마음을 품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었다.하지만 두 집안의 오랜 인연을 고려하면 그가 실제로 그녀를 해칠 가능성은 크지 않아 보였다.반면 밤길에 홀로 남아 위험을 마주할 가능성은 훨씬 높았다.권다솔은 그런 상황을 감수하고 싶지 않았다.별장의 인테리어는 단정하면서도 차가운 느낌을 주었다.남태건이라는 사람처럼 차가우면서도 품위 있는 오만함이 묻어나는 공간이었다.처음엔 그런 분위기가 다가가기 어렵게 느껴졌지만 권다솔은 곧 자신의 생각을 바꿨다.남태건은 그녀를 위해 목욕물을 미리 준비했고 수건과 세면도구 세트는 물론, 갈아입을 옷까지도 마련해 두었다.그 세심함에 권다솔은 약간 놀라면서도 의아했다.샤워를 마치고 나오자 남태건은 그녀에게 따뜻한 우유 한 잔을 건네며 말했다.“이거 마셔. 기분을 안정시키는 데 도움이 될 거야.”권다솔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잔을 받아 들고 조용히 말했다.“고마워요.”잔을 손에 든 채 소파에 앉자 몸속으로 퍼지는 따뜻함이 빗속에서 느꼈던 차가움을 몰아내는 듯했다.식어 있던 마음도 몸이 따뜻해짐에 따라 서서히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남태건은 소파의 다른 쪽에 자연스럽게 앉아 다리를 꼬았다. 카키색 스웨터가 그의 움직임에 따라 약간 주름이 생겼다. 그는 솔직하게 물었다.“왜 혼자 비를
권다솔은 순간 온몸의 피가 얼어붙은 듯 멍하니 서 있었다.배진호는 두 주먹을 단단히 쥔 채였다.“어머니, 말이 너무 심하잖아요. 이건 다솔 씨의 잘못이 아니에요. 다솔 씨에게 사과하세요.”“사과? 그까짓 거 하면 되지.”배진호의 어머니인 정미진은 입으로는 사과한다고 말했지만 표정에는 일말의 미안함도 없었다.“다솔 씨, 이해하지? 우리 집이 큰 가문은 아니어도 나와 진호 아버지는 교직에 몸담아 왔어. 교양 있는 가문이라고. 그런 우리 집에 당신 같은 사람은 받아들일 수 없어.”정미진은 애초에 말을 순화할 의도가 없었다.권다솔은 마치 자신이 모든 것을 빼앗긴 채 사람들 앞에 던져진 것 같은 굴욕감을 느꼈다. 참혹함에 권다솔은 숨을 쉬는 것조차 고통스러웠다.그녀의 마음이 소리쳤다.'여기서 더는 못 버텨. 당장 이곳을 벗어나야 해.'권다솔은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의자가 날카로운 소리를 냈다.“오늘은 제가 실례했습니다. 이만 가보겠습니다.”그 말을 남기고 권다솔은 뒤돌아보지 않은 채 밖으로 뛰쳐나갔다.배진호는 그녀를 따라가려 했지만 정미진의 차가운 목소리가 그의 발을 붙잡았다.“지금 나가면 다시는 이 집으로 돌아올 생각하지 마! 진호야, 내 말 잘 들어. 내가 죽기 전에는 절대로 이런 여자와 결혼 못 시켜. 결혼한 다음에도 이런저런 남자와 얽히는 여자는 절대 안 돼!”배진호가 잠깐 망설인 사이 모든 것이 틀어지고 말았다.몇 분 후, 배진호는 비를 맞으며 권다솔을 찾아봤지만 그녀는 이미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없었다.그가 건 전화도 모두 연결되지 않았다.여이현이 그의 전화를 받았을 때 배진호는 거의 이성을 잃은 상태였다.“대표님! 제발 다솔 씨를 찾아주세요. 다솔 씨를 본가로 데리고 갔다가 문제가 생겼습니다.”“집 밖으로 뛰쳐나가서 어디로 갔는지 모르는 상태입니다. 비가 오는 데 혼자 있어서 걱정돼요.”배진호의 다급한 목소리에 그가 얼마나 초조한 상태인지 쉽게 알 수 있었다.여이현은 아무런 주저 없이 돕기로 했다.하지만 두 사
권다솔은 컵을 받았다. 역시나 너무 뜨겁지 않고 적당한 온도였다. 아마도 배진호가 일부러 온도를 확인했을 것이다. 그녀는 배진호를 한 번 쳐다봤고 그가 자신을 위해 군밤을 까주는 모습을 보며 마음이 따뜻해졌다. 그녀는 더위도 추위도 모두 싫어하는 사람이다. 많은 사람들이 그녀를 예민하다 했으며 가끔은 부모님조차도 참을 수 없다고 말하곤 했다. 하지만 배진호는 그런 말을 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매번 그는 자발적으로 그녀를 돌봐주었다. 주방에서는 김이 모락모락 나고 팬을 뒤집는 소리와 함께 요리 냄새가 퍼져 나왔다. 거실에서는 권다솔과 배진호가 별다른 말 없이 가볍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권다솔의 얼굴에 떠오르는 미소를 보면 사실 그들이 대화를 나누고 있는 것이라기보다는 배진호가 권다솔을 웃기고 있는 것이었다. 이 장면을 본 배진호 어머니는 권다솔이 더 마음에 들지 않았다. “우리 아들이 이렇게 친절하다니. 정말 우리 아들이 맞는지 믿을 수가 없네.” 배진호 어머니는 권다솔을 쏘아보며 말했다. 물론 권다솔에게는 보이지 않게 했다. “진짜 진호에게 무슨 짓이라도 한 거 아니야.” “그만해. 당신이 사람을 불러온 거잖아. 근데 또 뭐가 문제야?” “내가 쟤를 불러온 이유 아직도 모르겠어? 인터넷에 떠도는 그 험한 말들 때문이지! 당신도 봤잖아! 얼마나 듣기 싫은 말들이 있었는지.”배진호의 어머니는 불만이 가득했다. 배진호 아버지는 그저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수년간 부부 생활을 해온 그는 이미 잘 알고 있었다. 어떤 일이든 여자와는 싸우지 않는 것이 최선이라는 것을.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배진호 어머니는 결국 잠잠해졌다. 하지만 여전히 권다솔을 못마땅해했다. “안 돼. 쟤가 진호를 계속 속이게 둘 수 없어. 결혼했더라도 떼어놓아야 해.” “이런 품위 없는 여자가 어떻게 우리 아들한테 어울릴 수 있겠어?” 잠시 후 음식이 나오고 드디어 밥을 먹기 시작했다. 배진호는 권다솔의 오른쪽에
배진호는 부모님이 갑자기 권다솔을 만나고 싶다고 해서 좀 이상하게 느꼈지만 별다르게 생각하지 않고 그저 그들이 며느리를 보고 싶어 하는 거겠으니 여겼다. 그는 권다솔을 위로하며 말했다. “우리가 결혼한 이후로 아직 부모님을 뵙지 못했으니 이번 기회에 처음 인사하는 걸로 생각하면 돼요.” “알겠어요.” “걱정하지 마요. 다솔 씨 난처하게 할 분들 아니에요.” 배진호의 반복적인 위로에 권다솔은 조금 진정되었고 결혼한 후엔 부모님을 만나는 게 당연한 일이라며 스스로를 달랬다. 생각해 보면 결혼하고 나서 부모님을 만나는 건 사실 너무 늦은 거다. 배진호의 집안은 그다지 부유하지 않았다. 평범한 중산층 가정으로 2환 구역에 오래된 아파트가 한 채 있었다. 그들의 회사는 시내 중심에 있었고 2환 구역까지는 그렇게 멀지 않았지만 중간에 차가 많이 막혀 시간이 꽤 걸렸다. 차 안에서 권다솔은 지나가며 보이는 오래된 건물들을 바라보며 물었다. “근데 왜 부모님께 더 좋은 집을 마련해 드리지 않았어요?” “당신 수입이면 훨씬 전에 도시 중심에 집을 살 수 있었을 텐데.” 권다솔의 부모님은 배진호를 그저 돈이 없는 비서일 뿐이라고 얕보았다.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그녀가 알기로는 여이현은 배진호에게 매우 후한 대우를 했으며 매달 지급하는 월급은 적어도 여덟 자릿수에 달했다. 도시 중심에 집을 사는 건 다른 사람들에게는 어려운 일이겠지만 배진호에게는 절대로 불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권다솔은 그가 일부러 그렇게 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도 자기 사정이 있을 거라고 여겼다. “우리 집 그 오래된 집은 아버지가 퇴직할 때 회사에서 준 거예요.” 배진호는 차를 운전하며 설명했다. “부모님은 옛날 걸 좋아하셔서 이사 가기 싫어하세요.” 권다솔은 그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고 차는 곧 멈췄다. 드디어 배진호 부모님의 집에 도착했다. 권다솔은 차 트렁크로 가서 위에 놓인 선물 가방을 들려고 손을 뻗었다. 그
“이런 일 없었어도 나는 여전히 당신을 믿었을 거예요. 당신은 절대 나를 배신하지 않을 거잖아요.” “진호 씨!” 권다솔은 그의 품에 안겼다. 그녀는 처참하게 울었지만 마음속은 마치 꿀에 잠긴 듯 달콤했다. 그냥 배진호가 그녀를 믿어 준다면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배진호는 홍보팀에 지시해 인터넷에서 떠도는 루머를 처리하도록 했다. 최대한 확산하지 않게 막으라고 했다. 하지만 이번 루머는 누군가 뒤에서 조종하고 있는 듯 보였다. 홍보팀은 수십만 원을 쏟아부으며 사람들의 입을 막으려 했고 법적 경고장도 보냈다. 회사의 모든 사람이 바쁘게 움직이며 이 일에 대처했지만 효과는 그다지 크지 않았다. 며칠 동안 이어진 논란은 결국 권다솔의 부모님에게도 알려졌다. 권다솔은 곧바로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전화는 어머니가 걸었지만 실제로는 아버지가 대신 물어본 것이었다. “너랑 남씨 가문 그 아들 대체 뭐야? 너 안 좋아한다고 했잖아.” 김영은은 이상하다는 듯 물었다. “난 그 사람이랑 정말 아무 관계도 없어요.” 권다솔은 손끝을 움켜쥐며 눈빛이 어두워졌다. “저도 정말 이 일을 누가 의도적으로 이렇게 퍼뜨리고 있는지 궁금해요.” 김영은은 똑똑한 사람이었다. 고위층의 아내로 살아온 만큼 그녀도 결국 평범하지 않았다. 그리고 김영은은 권다솔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권다솔은 절대 그런 짓을 할 리 없다는 걸. 어머니는 안도의 한숨을 쉬고 나서 다시 긴장하며 물었다. “그러니까 이 일이 남씨 가문하고 관련이 있다는 거네?” 권다솔은 잠시 망설였지만 두 집안의 오랜 관계를 고려해 유람선에서 있었던 일을 전부 말하진 않았다. 그저 일부만을 살짝 흘렸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 일부만으로도 김영은은 분노를 참지 못했다. “정말 말도 안 돼! 그 사람이 너를 불러낸 거면 그건 순전히 자기 아들하고 엮으려는 의도였을 거야.” 권다솔은 말이 나오지 않았다. 자신을 아끼는 아주머니가 이렇게까지 자신을 이용하고 있다
“부사장님, 괜찮으세요? 병원에 가보셔야 하는 거 아니에요? 아니면 대표님께 연락해 볼게요.” “인터넷에 떠도는 얘기가 꼭 사실이라는 보장은 없잖아요.” “맞아요.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아까까지 수군대던 직원들이 갑자기 모두 걱정스러운 얼굴로 권다솔을 위로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런 말들이 권다솔에게 위로가 될 리 없었다. 오히려 차갑고 공허하게 느껴졌다. 그녀는 그들의 도움을 받지 않고 기획팀 직원 중 한 명을 붙잡고 물었다. “대표님 지금 어디 계세요?” 기획팀은 배진호의 사무실 바로 옆이라 그가 어디 있는지 알 가능성이 높았다. 직원은 배진호가 지금 자신의 사무실에 있다고 알려주었다. 권다솔은 다른 건 신경 쓸 틈도 없이 곧장 그곳으로 달려갔다. 그런데 사무실 문은 굳게 잠겨 있었고 비서조차 문밖에서 대기 중이었다. “부사장님, 오셨어요. 그런데 지금 아무도 안으로 들어갈 수 없어요. 대표님께서 아까 핸드폰을 한 번 보시더니 우리 모두를 내보내셨어요.” “핸드폰을 봤다고요?” 권다솔은 중얼거리듯 되뇌었다. “네. 평소엔 이런 적 없으셨는데 무슨 일인지 모르겠어요.” 비서는 한숨을 내쉬며 덧붙였다. “곧 중요한 회의가 있는데 이렇게 나오지 않으시면 회의는 어떻게 하시려고 그러는 건지.” 권다솔은 깊이 숨을 들이쉬고는 사무실 문을 힘껏 두드렸다. “진호 씨, 나와요! 무슨 일이든 우리 얼굴 보고 얘기해요. 당신이 생각하는 그런 거 아니에요!” 문을 두드리는 그녀의 손은 이미 새빨갛게 부어올랐다. 비서가 옆에서 말렸다. “부사장님, 제발 그만하세요. 손 다칠 것 같아요. 대표님이 아시면 걱정하세요.” 하지만 권다솔은 멈추지 않았다. 비서가 속으로 걱정하고 있을 때 닫혀 있던 문이 갑자기 열렸다. 문 안에서 나온 배진호는 권다솔의 손을 잡으며 애틋한 표정으로 말했다. “어떻게 손을 이 지경으로 만들어요? 내가 문을 열지 않는다고 이렇게 계속 두드리면 안 되
“하지만 이번이 마지막이었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부탁인데 남태건 씨에게 전해주세요. 더는 그 사람과 어떤 얽힘도 원하지 않는다고요.” 최선정의 목소리는 아직 뭔가 더 할 말이 있는 듯했다. 하지만 권다솔은 그들에 대해 진절머리가 나 있었고 망설임 없이 전화를 끊어버렸다. 그 통화 이후 권다솔은 며칠 동안 회사 프런트를 신경 써서 살폈다. 심지어 따로 물어보기도 했다.프런트 직원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지난 이틀 동안은 아무 이상의 소포도 오지 않았습니다.” “좋아요. 앞으로도 계속 신경 좀 써주세요. 이상한 소포 오면 그냥 버리세요.” 권다솔은 그제야 안심하고 자리를 떠났다. 그 이후로 끊임없이 배달되던 소포도 멈추고 남씨 가문 쪽에서도 더는 연락이 오지 않았다. 권다솔은 한동안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이제 더는 남씨 가문에서 이상한 짓을 하지 않을 거라며 안심했다. 그런데 며칠 지나지 않아 평소처럼 회사에 출근하던 권다솔은 회사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직원들이 무리 지어져 있는 걸 보았다. “야! 그거 진짜라던데?” “우리 부사장님이 남원 그룹 남태건 사장님이랑...” “내 생각엔 진짜인 것 같아. 그런 사진까지 유출됐잖아. 인터넷 여기저기 난리더라. 우리 대표님이 정말 불쌍해.” “지금 무슨 얘기를 하는 거예요?” 권다솔의 목소리가 차갑게 울려 퍼졌다. 직원들은 깜짝 놀라 벌떡 일어서서 권다솔을 보며 어쩔 줄 몰라 했다. 한 직원이 억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부사장님, 오늘은 왜 이렇게 일찍 오셨어요? 평소엔 9시쯤에 오시던데...” 권다솔은 요즘 임신 중이라 배진호는 그녀가 너무 힘들지 않도록 아침에 조금 늦게 출근하라고 배려해 줬다. 그래서 평소에 그녀는 9시가 좀 넘어서야 회사에 오곤 했다. 오늘은 조금 일찍 일어난 거였다. 더구나 배진호도 이미 출근했고 혼자 집에서 할 것도 없어서 회사에 좀 더 일찍 온 것이었다. 그러나 오자마자 자신을 둘러싼 소문을 들을 줄은 몰랐다.
권다솔은 배진호 덕에 눈을 뜰 수 있었다. 머리가 무겁고 어지러운 느낌이었지만 눈을 뜨자마자 걱정으로 가득한 배진호의 얼굴을 보게 되었다.“진호 씨가 여긴 어떻게... 아, 머리가 너무 아파요.”그녀는 머리를 감싸며 말했다.머리가 두 개로 갈라질 것 같았다.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억을 더듬어 보려고 했지만,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았다. 그저 직원과 부딪치게 되었던 것만 기억났다.그 뒤의 기억은 흐릿했다. 배진호가 자신을 어떻게 찾았는지도 몰랐다.권다솔은 배진호에게 이것저것 물었지만, 그녀를 보는 배진호의 눈빛은 심란했다.그는 망설이고 있었다. 그녀에게 할 말이 있었으나 다시 꾹 삼켜버렸다.“머리가 아프면 아무것도 생각하지 말아요. 날이 밝는 대로 항구에 도착할 수 있을 거예요. 그럼 대충 짐 정리해서 떠나요.”할 말이 있지만 하지 않는 배진호를 보며 권다솔은 무의식적으로 그가 자신에게 숨기는 것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머리가 너무 아픈 탓에 이마저도 깊이 생각할 수 없었다.그랬기에 일단 이 일은 넘어가기로 했다.유람선이 항구에 도착하자마자 배진호는 그녀를 데리고 근처 병원으로 가서 검사를 진행했다.배진호의 태도는 강압적이었던지라 권다솔은 이상함을 느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다행히 검사 결과엔 아무런 이상이 없다고 나왔다.“코로 마취 성분의 액체가 흘러 들어간 겁니다.”의사는 미간을 찌푸리며 말을 보탰다.“이 약물의 성분은 임산부에게 아주 나빠요. 남편이라는 사람이 대체 아내한테 무슨 짓을 한 거죠?”“마취약이라고요...”권다솔은 자신이 어딘가에 머리를 부딪쳐 정신을 잃은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기에 의사에게 얼른 설명했다.“선생님, 오해하고 있는 거예요. 제가 부주의로 머리를 부딪쳐서 그런 거예요.”의사는 그녀를 힐끗 보더니 더는 말을 잇지 않았다.돌아가는 길에서 결국 권다솔은 참지 못하고 물었다.“진호 씨, 혹시 나한테 뭐 숨기는 거 있어요? 어젯밤 분명 진호 씨를 놀리고 도망쳤던 것 같은데 깨어나고 보니 방에 있더라
남태건은 권다솔이 있는 방으로 왔다.문을 열려고 하자 싸늘한 얼굴로 달려온 배진호와 마주쳤다.“다솔 씨를 납치한 사람, 그쪽이죠?”배진호는 서늘한 목소리로 말했다.남태건은 멈칫하더니 손잡이를 돌리지 않았다. 그저 입꼬리를 올리며 몸을 돌렸다.“그게 무슨 소리죠. 내 고양이가 그쪽이랑 함께 있지 않았나요?”“고양이요?”“네, 우린 서로 어릴 때 별명을 지어줬거든요.”남태건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설명했다.배진호는 미소를 지으며 자신을 보고 있는 남태건을 빤히 보았다. 남태건의 표정을 보니 기분이 나빴다.첫 만남에서부터 배진호는 남태건이 좋은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눈치챘다. 여하간에 이 바닥에서 일하며 그는 뒤도 깨끗한 사람을 본 적 없기도 했다.그러나 남태건은 달랐다.그의 손에 있는 더러운 것조차 사람들을 두렵게 했다.그런 사람이 권다솔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으니 배진호가 마음이 놓일 리가 있겠는가. 그래서 계속 남태건을 경계하고 있었지만 자선 파티에 그 틈을 보여주게 될 줄은 몰랐다.배진호는 숨을 크게 들이쉬더니 앞으로 성큼성큼 다가가 그의 멱살을 잡았다.“정말로 다솔 씨를 좋아하는 거라면 이런 짓을 하면 안 돼요. 우리 일은 우리끼리 남자답게 해결하자고요. 무슨 일 있으면 다른 사람한테 피해 주지 말고 나한테 하라고요.” 남태건은 달려들려던 경호원을 향해 손을 들어 올리며 막았다.“그쪽한테 하라고요.”그는 배진호가 한 말을 반복하며 곱씹었다. 그의 주위로 위험한 아우라가 뿜어져 나왔다.“그쪽이 무슨 자격이 있다고 그쪽한테 하죠? 난 다솔이랑 어릴 때부터 알고 지낸 사이에요. 다솔이랑 먼저 알게 된 건 나라고요. 그쪽은 후에 나타난 주제에 무슨 자격이 있는 거죠? 나한테 그저 다솔이를 훔쳐 간 도둑일 뿐인데요.”남태건의 두 눈 가득한 살기는 곧 흘러넘쳐 유람선을 채울 것 같았다.주위에 다른 사람이 없었기에 그는 본색을 드러내는 것이었다.두 남자는 서로를 살기 가득한 눈빛으로 보고 있었다. 주위는 시간이 멈춘 듯 아주 고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