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진호는 권다솔을 보며 한숨을 쉬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를 소파에 앉혔다.“내 눈치를 보면서 말하지 않아도 돼요. 다솔 씨 아버님이 하신 말씀이니 당연히 가야죠.” 비록 두 사람의 사이를 허락해주지 않았지만, 그는 이미 권용민을 자신의 장인어른으로 생각하고 있었다.장인어른도 반쯤 그의 아버지가 된 것과 다를 바 없었다.그러니 어떻게 찾아가지 않을 수 있겠는가.배진호는 점심 즈음에 다정 그룹으로 찾아갈 생각이었다.권다솔은 마음이 놓이지 않아 함께 가려고 했으나 배진호는 거절하며 가만히 회사에 있으라고 했다.물론 이견이 좁혀지지 않았다. 하지만 결국 권다솔은 고개를 끄덕이게 되었다.다정 그룹.높게 솟아오른 고층 빌딩에 금방 차에서 내린 배진호는 다소 긴장감을 느끼게 되었다.분명 여이현의 곁에서 비서로 일하면서 수많은 회사와 대표님들을 만나봤고 다정 그룹은 그가 봐온 회사 중 큰 회사도 아니었지만, 이상하게도 긴장되었다.그는 옷매무새를 정리하고 걸음을 옮겼다.로비 직원이 미소를 지으며 그에게 말을 걸었다.“안녕하세요, 방금 저희 회장님을 뵙겠다고 하셨는데, 혹시 약속 잡고 오신 걸까요?”“네, 회장님이 직접 저를 부르셨습니다.”배진호는 간단히 대답했다.그의 말을 들은 로비 직원은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며 확인 전화를 걸었다.얼마 지나지 않아 그를 안으로 들여보냈다.3층이 바로 회장실이었다. 배진호는 그곳으로 안내를 받게 되었고 막힘없이 안까지 들어갔다.너무도 순조롭게 안으로 들어오게 되어 그도 믿어지지 않았다.권용민은 역시나 푹신한 의자에 앉아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가 들어오자 고개를 들었다.“진호 씨, 왔군요. 앉아요.”배진호는 침을 꿀꺽 삼켰다.그와 친한 사람이라면 눈치챘을 것이다. 그가 지금 엄청 긴장해 하고 있다는 것을.권용민은 겉보기엔 태산처럼 듬직하고 얼굴에 표정이 없었기에 배진호도 그가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아맞히기 어려웠다.“최근에 회사에 위기를 맞이하게 되었다던데, 프로젝트 몇 개나 잃게 되
“그러게 누가 나 혼자만 남겨두고 가라고 했어요. 진호 씨가 혼자 가니까 이렇게 따라온 거잖아요! 다음에도 또 나 혼자 두고 갈 거예요?!”배진호는 씁쓸한 웃음만 지을 수밖에 없었다.무력한 얼굴로 아직 평평한 그녀의 배를 보고서 속으로 다음엔 그러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지금의 권다솔은 그에게 반쯤 정성을 다해 모셔야 하는 조상님 같은 존재였다.두 사람은 이런 모습이 별다른 문제가 없다고 생각했지만 권용민은 아니었다. 딸이 갑자기 뛰어 들어와 남자의 품에 폭삭 안겼기 때문이다.“다솔아, 떨어져. 거울이 있으면 네 꼴 좀 봐! 뭐가 됐는지!”권용민은 잔뜩 화가 난 목소리로 말했다. 권다솔은 그제야 이곳에 권용민도 있다는 것을 떠올리고 얼른 그의 품에서 떨어졌다.“아빠...”“내가 평소에 그렇게 회사로 부를 땐 이 핑계 저 핑계 대면서 안 오더니. 배진호를 불렀다고 바로 달려오는구나.”권용민은 무심하게 말했다.권다솔은 말문이 막혀버렸다.권용민은 또 코웃음을 치더니 탐탁지 않는다는 눈빛으로 배진호를 보았다. 하지만 약속은 약속이었기에 무를 수 없었다.“아는 사람이 최근에 한 부지를 사서 회사 건물을 지어주겠다고 하더군요. 규모도 크니까 이윤도 꽤나 남을 거예요. 할 생각 있으면 이틀 뒤에 다시 와요. 내가 그 사람 소개해 줄 테니까.”배진호는 권다솔을 보았다. 그러자 권다솔은 자꾸만 그의 시선을 피하고 있어 바로 무슨 상황인지 눈치채게 되었다.그는 무의식적으로 미간을 찌푸렸다.다른 사람의 도움은 받고 싶지 않던 배진호였다. 세상엔 공짜라는 것은 없었으니까. 다른 사람이 도와준다는 것은 나중에 더 큰 도움으로 받아가겠다는 의미였다.하지만 눈앞에 잇는 사람은 권다솔의 아버지였다. 더구나 그는 권용민을 거절할 수가 없는 처지였다.그렇게 한참 고민한 후 고개를 끄덕였다.얘기가 끝났을 때 권용민은 권다솔을 붙잡고 싶었다. 애지중지 키운 딸이 허구한 날 배진호의 곁에만 붙어있는 것이 짜증이 났기 때문이다.그러나 두 사람 사이에 흐르는 공기는
권용민은 다행히 밖에서는 배진호를 싫어하는 티를 내지 않았다. 그는 사업 파트너에게 배진호를 소개했다.다만 자신의 미래 사위라는 것은 말해주지 않았다.“아, 권 회장님이 신경 써 주시고 있는 분이셨군요. 역시 잘생긴 얼굴만 봐도 유능한 사람일 것 같네요!”남자는 배진호를 칭찬했다.“과찬이네.”권용민은 무심코 배진호를 향해 선을 그었고 배진호뿐 아니라 사업 파트너도 눈치채게 되었다.한참 얘기를 나누다 보니 그는 배진호에 대해 미묘한 감정을 느끼게 되었다.배진호는 아주 담담했다.서로 인사치레를 한 후 그들은 자리에 앉아 식사를 하기 시작했다.그들이 예약한 곳은 오성급 호텔이었고 테이블 가득 먹음직스러운 음식이 있었다. 배진호는 담담하게 먹고 있었지만, 속으로는 권다솔을 생각하고 있었다.그는 권다솔이 최근 입덧을 심하게 한다는 것이 떠올랐다. 평소에도 그가 그녀가 밥을 먹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기에 겨우 음식을 섭취할 수 있었다. 하지만 출장을 나온 지금은 혼자서도 잘 챙겨 먹고 있는지 몰라 걱정되었다.그렇게 생각한 그는 미간을 살짝 찌푸리게 되었고 테이블 아래로 몰래 핸드폰을 꺼내 권다솔에게 문자를 보냈다.빠르게 권다솔이 답장했다.두 사람은 그렇게 서로 문자를 주고받게 되었다.문자를 주고받는 과정에서 배진호는 자신의 입꼬리가 저도 모르게 올라갔다는 것을 알아채지 못했다.그러나 권용민은 이 모든 것을 지켜보고 있었고 테이블 아래로 향한 그의 손을 힐끗 보았다. 배진호 핸드폰에 저장된 이름을 본 그는 코웃음을 쳤다.‘흥, 다솔이한테는 잘해주네!'권용민은 아직 배진호를 인정하지 않았다. 여하간에 배진호가 일하는 모습을 본 적 없었으니까.하지만 사업 파트너가 일에 관한 얘기를 꺼내자 배진호는 바로 진지해졌다.사업 파트너는 까다로운 질문만 해댔다.“듣기론 배진호 씨가 회사 처음 설립했을 때 여진 그룹의 도움을 받았다고 하던데, 맞나요?”배진호는 쿨하게 인정했다.“그럼 여진 그룹을 믿고 그 자리에 앉아 있는 거겠네요?”“이 문제에 관
“하지만 걱정되는 걸 어떻게 해요...”“근데 아무리 연락해도 대표님이 받지 않잖아요. 차라리 다른 사람에게 하면 모를까.”권다솔은 순간 누군가 떠올랐다.‘그래! 우리 아빠랑 함께 간 거잖아! 내가 왜 그 생각을 못 했지?!'그녀는 바로 권용민에게 전화를 걸었다. 권용민이 걱정되는 건 마찬가지였으니까.연결음이 들려오는 순간은 가장 괴로운 순간이었다. 속으로 끊임없이 두 사람이 무사하길 기도하면서 권용민이 전화를 받기만을 기다렸다.다행히 연결되었다.“여보세...치지직, 여기 치지직... 신호가 안 좋아.”전화기 너머로 권용민의 소리가 뚝뚝 끊겨서 들려왔다.지금 그들이 어디에 있는지 몰랐으나 신호가 잘 잡히지 않는지 자꾸만 치지직 소리만 났다.권다솔은 다시 걱정되기 시작했다. 행여나 그녀의 목소리가 안 들릴까 봐 목소리를 높여 말했다.“아빠, 지금 어디에 계신 거예요? 방금 인터넷을 보니까 영천시에 지진이 일어날 가능성이 있다고 하더라고요!”“뭐라고? 안... 들리는구나.”“거기에 지진이 일어난다고요! 외출하지 마세요!”권다솔이 말을 마치자마자 뚝뚝 끊기던 소리가 갑자기 선명하게 들려오기 시작했다. 그녀가 기뻐하기도 전에 전화기 너머로 다급한 배진호의 목소리가 들렸다.“지진이에요. 아버님, 얼른 피하세요!”그러더니 전화가 뚝 끊겨버렸다.의자에 앉아 있던 권다솔은 순간 손발이 차가워지며 온몸을 덜덜 떨게 되었다.옆에 있던 비서가 그런 그녀를 몇 번이나 불렀다.“부대표님, 부대표님! 진정하세요. 최대한 좋은 쪽으로만 생각하세요. 재빨리 안전한 곳으로 피했을 수도 있잖아요. 방금 전화가 끊기기 전에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오지 않았죠? 그럼 지진의 강도가 그다지 심하지 않다는 얘기에요. 그러니까 두 사람은 무사할 거라고요.”그 말을 들은 권다솔은 다시 희망을 품게 되었다.비서의 말이 맞았다.아직 상황이 그렇게까지 심한 정도가 아니었다. 소식을 받기 전까지 긍정적인 생각을 하는 것이 좋았다.그녀는 이내 김영은에게 전화를 걸어 상황을
권용민은 이불을 반쯤 덮고 있었다. 밖에서 들리는 의사와 김영은의 대화에 권다솔은 권용민이 다리를 다치게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하지만 그녀는 이불을 들춰 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왜인지 모르겠으나 눈물이 주룩주룩 흘러나와 이불에 떨어지게 되었다.권다솔은 침대에 기대어 처음으로 자신이 밉게 느껴졌다. 그녀는 어릴 때부터 권용민의 말을 잘 듣지 않았다.“아빠, 죄송해요. 제가 정말로 죄송해요!”“울긴 왜 우는 거니. 내가 죽은 것도 아니고.”이때 목소리에 기운이 넘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녀는 순간 멍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혈색이 좋은 권용민의 얼굴이 시야에 들어왔다.권용민은 여전히 엄숙한 표정을 짓고 있었고 미간을 찌푸린 채 그녀를 보고 있었다. 꼭 지금 이 순간에도 그녀에게 쓴소리해댈 것 같았다.그러나 권다솔은 전처럼 반항기를 보이지 않았다.빨개진 눈가로 권용민을 보다가 끌어안았다.“아빠, 죄송해요. 제가 너무 늦게 왔죠.”“고작 지진이 일어난 거로 뭘 그렇게 호들갑이냐.”권용민은 다소 당황했다. 어정쩡하게 팔을 들어 어찌할 바를 몰랐다.“내가 젊었을 때 이것보다 더 한 일도 당해봤단다. 고작 이 지진으로 날 어쩌지 못해. 그냥 조금 미끄러져서 넘어졌을 뿐이야.”“네? 부러진 게 아니었어요?”그의 말에 권다솔은 그제야 이상함을 느꼈다.역시나 권용민의 안색이 어두워졌다.“누가 그래? 내 다리가 부러졌다고.”두 사람의 목소리를 들은 김영은과 배진호도 병실로 들어왔다.마침 권다솔이 입을 열었을 때 김영은이 들어와 전부 듣게 되었고 다소 의아한 목소리로 말했다.“다솔아, 누가 네 아빠 다리가 부러졌다고 했니? 내가 방금 의사 선생님께 물어봤어. 선생님이 그러는데 네 아빠 아주 건강하대. 그냥 살짝 뼈에 금이 갔을 뿐이래. 걱정할 필요 없어. 이틀간 병원에서 푹 쉬고 있으면 퇴원할 수 있다고 하더구나.”권다솔은 고개를 홱 돌려 배진호를 보았다.배진호는 시선을 피하며 다소 머쓱한 얼굴로 말했다.“난 다솔 씨
권다솔은 몸을 흠칫 떨었다. 손을 내리고 싶었지만 행여나 숨기고 있던 비밀을 들킬까 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다.그 순간 그녀는 정말이지 긴장하게 되었다. 옆에 있던 배진호에게 눈빛을 보내며 도움을 청했다.배진호는 다행히 그녀의 눈빛을 바로 알아들었다.김영은은 병실에 남아 권용민을 간호해야 했고 두 사람은 얼마 지나지 않아 병실을 나섰다.지금까지 두 사람은 혼인 신고를 하지 않았다. 권다솔의 부모님이 두 사람 사이를 반대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권용민이 허락해주었으니 권다솔은 행여나 권용민의 마음이 바뀔까 봐 얼른 혼인 신고하고 싶었다. 마침 그녀는 필요한 신분증을 들고 왔기에 바로 구청으로 가면 되었다.한참 후 두 사람은 행복한 얼굴로 구청에서 나왔다. 권다솔은 예쁜 눈웃음을 지으며 배진호의 손을 잡았다.“안녕하세요, 남편님. 오늘부터 잘 부탁해요.”배진호도 보기 드문 웃음을 짓고 있었다. 너무도 매력적인 웃음이었다.주위에 사람이 없다는 것을 확인한 후 권다솔의 얼굴을 잡더니 보물을 다루듯 조심스럽게 입을 맞추었다.“잘 부탁해요, 아내님.”혼인 신고한 사실을 권다솔은 다른 사람에게 알리지 않았다. 여하간에 회사는 스타트업이었고 그녀도 조용히 지나고 싶었다.그래도 부모님에게는 말씀을 드렸다.딸이 생각보다 빨리 혼인 신고를 마쳤다는 사실을 두 사람은 알게 되었다. 거의 병실을 나서자마자 혼인 신고한 것이었다.권다솔과 배진호는 김영은에게서 이틀 내내 권용민의 표정이 좋지 않다는 것을 전해 듣게 되었다. 심지어 이틀 동안 집으로 돌아오지 말라고 했다.괜히 눈에 띄어 두 사람에게 화를 낼까 봐 말이다.권다솔은 입을 삐죽 내밀며 말했다.“치, 분명 아빠가 허락해주신 거잖아요. 근데 왜 삐지셨대요?”“허락한 거랑 이미 혼인 신고 마친 소식을 듣게 되는 거랑 같니?”김영은도 다소 화가 난 목소리로 말했다.“우리가 너를 얼마나 애지중지하면서 키웠는데. 그런데 갑자기 어떤 놈팡이가 널 홀랑 빼앗아 갔는데 어떻게 기뻐할 수 있겠니?”김영은의 말
권다솔은 본능적으로 거절하려고 했으나 눈치챈 최선정이 할 말이 있는 것처럼 다시 말을 이었다.“생각해보니 너랑 그렇게 만나는 건 오랜만인 것 같구나. 네가 어렸을 때 기억나니? 아주 자그마한 아이였는데 그새 어른이 되었구나. 설마 오랜만에 만나서 내가 어색해진 건 아니겠지?”최선정이 이렇게까지 말한 이상 거절한다면 권다솔이 무정한 사람으로 낙인찍히는 것이었기에 하는 수 없이 수락했다.전화를 끊은 후 권다솔은 그제야 남태건도 가는 건지에 관해 묻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기에 조금 고민이 되었다.그녀는 남태건을 만나고 싶지 않았다.하지만 다시 전화를 건다면 이런 그녀의 속마음이 들키지 않겠는가.그녀는 한숨을 내쉬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됐어. 그때 가서 제대로 분명하게 말하면 되는 거야.”한편 남씨 가문 본가 거실.통화를 마친 최선정이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전화는 내가 이미 했으니까 이 기회는 네가 단단히 잡아.”옆에 앉은 남자는 짙은 회색의 옷을 입고 있었다.은테 안경을 낀 남자는 편한 복장 차림이었던지라 왠지 모르게 친근감이 느껴졌으나 사나운 눈매만큼은 아무리 친근감이 느껴지는 복장이라고 해도 다가가기 어려운 분위기를 풍겼다. 어딘가 위험한 분위기를 내뿜고 있었다.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으나 천천히 입꼬리를 올렸다.“내 고양이, 우리 곧 또 만나게 되었네?”권다솔은 한참 망설였다. 최선정과 함께 자선 파티에 간다는 말을 배진호에게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말이다.말을 해준다면 행여나 배진호가 오해할까 봐 걱정되었다.하지만 말을 하지 않는다면 오히려 더 수상해 보일 수 있었다.그렇게 고민하고 있을 때 배진호 테이블에 있는 초대장을 발견하게 되었다.“당신도 이 자선 파티에 가요?”배진호는 그녀의 말을 듣고 멈칫했다.“당신도라니?”“남태건 씨 어머니가 저한테 이 파티에 같이 가자고 전화하셨어요. 그리고 전 동의했고요.”말을 마친 권다솔은 그의 얼굴을 빤히 보다가 물었다.“화 안나요?”그녀의 말을 들었을 때 배진
직원이 샴페인을 쟁반에 올려놓고 사람들 사이를 지나가며 서빙하고 있었다.권다솔이 배진호의 팔짱을 끼고 입장하자 모든 이의 시선이 두 사람에게 쏠리게 되었다.누군가는 그녀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다른 이유는 없었다. 그녀가 너무도 예뻤기 때문이다.네이비색 드레스엔 반짝이는 것들이 붙어있어 꼭 밤하늘의 별같이 절로 시선이 갔다. 움직일 때마다 찰랑거리는 드레스 자락은 고요한 밤에 출렁이는 파도 같았다.물결 파마로 정리한 긴 머리는 그녀의 분위기와 아주 잘 어울렸다. 드레스 자락을 들고 등장할 때 사람들은 전설에서만 나오는 인어공주가 등장한 듯한 기분을 느꼈다.유람선에는 여러 부류의 사람이 있었다. 재계에 처음 발을 들인 사람도 있었고 해외에서 참석한 기업 회장도 있었다. 또 이 자선 파티를 기회로 인맥을 쌓으러 온 사람도 있었다.여자 스캔이 끝난 그들은 서로 눈빛을 주고받더니 바로 다가가 말을 걸었다.권다솔처럼 예쁘고 처음 보는 인물은 더욱 그들이 놓칠 수 없는 먹잇감이었다.“예쁜 아가씨, 연락처 좀 알 수 있을까요?”“하, 그 얼굴로 그런 말 할 자격이 있어요? 준다고 해도 저한테 주겠죠. 평소에 거울도 자주 안 보고 다니시나 봐요. 이분뿐만 아니라 평범한 여자들도 연락처를 안 주게 생겼네요.”“지금 뭐라고 했어요?!”배진호는 아주 담담했다. 묵묵히 작업을 걸어오는 남자들을 향해 서늘한 경고의 눈빛을 보냈다.그의 눈빛에 권다솔에게 함부로 작업을 걸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눈치챈 사람이 먼저 옆 사람의 어깨를 툭툭 치며 말했다.“됐어요. 작업 걸 생각은 접는 게 좋겠네요. 임자가 있는 사람을 빼앗을 수 있을 리가 없잖아요.”남자는 부러운 눈길로 배진호를 보곤 작업을 걸려던 생각을 접었다.권다솔에게 꽂힌 시선들이 그제야 사라지게 되었다.배진호는 권다솔의 손을 꽉 잡고 나직하게 말했다.“날 꽉 잡아요. 절대 내 곁에서 떨어지면 안 돼요.”권다솔도 자신을 훑어보던 사람들을 눈치챘다. 좋은 시선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기에 그의 곁에 꼭 붙
하지만 감동보다는 오히려 속이 울렁거렸다. 속이 울렁거리는 느낌에 문지원은 당장 얼굴이 일그러지며 화장실로 달려갔다. 지석훈도 뒤따라 들어오며 물었다.“속이 안 좋아?”“그렇진 않은 것 같아요. 요즘 세 끼 식사도 꽤 규칙적으로 하고 날것 이거나 차갑거나 매운 음식도 먹지 않았는데...”문지원은 배를 움켜쥐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다 문득 한 가지 가능성이 떠올랐다.지석훈도 그녀와 같은 생각을 한 듯 방으로 가서 임신 테스트기를 가져왔다.문지원은 놀라며 물었다.“언제 산 거예요?”지석훈은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만일의 사태에 대비해서.”문지원은 아무 말이 없었다.5분 후, 그녀는 복잡한 얼굴로 다시 나왔다. 한 손은 여전히 배 위에 올려져 있었고 눈에는 믿을 수 없다는 기색이 역력했다.정말 임신한 것이다!그녀와 지석훈이 결혼한 지 겨우 3개월밖에 안 되었는데 이렇게 빨리 임신하다니.지석훈은 오히려 태연해 보였다. 하지만 입가에 감출 수 없는 미소를 보면 그 역시 겉모습처럼 평온하지 않고 흥분을 억누르고 있는 게 분명했다.“정말 임신한 거예요?”문지원은 아직 믿기지 않는 듯 물었다. 왜냐하면, 그녀는 이번 달 초에 생리가 끝났기 때문이다.“아마 생리가 끝난 후 며칠 사이일 거야.”지석훈의 목소리는 문지원에게 그날의 기억을 떠올리게 했다. 당시의 기억을 떠올리니 그녀의 귀는 뜨겁게 달아올랐다. 결국, 그녀는 병원에 가보기로 했다. 임신 테스트기는 가끔 틀릴 수도 있으니 이런 일은 직접 검사를 받아보고 확인해야 마음을 놓을 수 있을 것이다.그리고 그녀는 손에 든 검사지를 보고 완전히 할 말을 잃었다.의사는 마침 지석훈과 알고 지내던 사람이었다.“축하합니다, 지 원장님. 부인께서 임신 2주 차입니다.”“감사합니다.”지석훈은 침착하게 그녀를 부축하며 밖으로 나갔다.병원 진료실을 막 나오자마자 지석훈은 문지원을 품에 안았다.“너무 좋아. 우리 아이가 생겼어.”문지원은 남자가 미세하게 떨리는 모습을 보며 멍하
물론 손에 있는 일을 무턱대고 모두 남에게 맡기는 것은 너무 과한 부담을 주는 일이다.문지원은 비서를 사무실로 불렀다.“올해 25살이죠?”비서는 잠시 멍한 표정을 지었다.그녀의 나이는 모두가 다 아는데 문지원 회장이 갑자기 이 얘기를 꺼낸다는 것은 혹시 소개팅을 시켜주려는 건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비서는 고마웠지만 거절하며 말했다.“문 사장님, 저는 아직 젊어서 당장은 결혼할 생각이 없습니다.”“전 당신더러 결혼하라고 하는게 아니에요.”문지원은 펜으로 탁자를 두드리며 말했다.“그냥 평소에 잡다한 일들을 맡기고 싶어서요. 확인이 필요한 문서들은 평소에 굳이 내게 제출하지 않아도 돼요.”비서는 그 뜻을 이해했다.이건 곧 그녀에게 승진과 급여 인상을 주려는 것이다. 문지원이 그녀의 의견을 확인한 후 급여를 조금 올려줬고 비서에게 몇 명의 적합한 인재를 추가로 모집해서 예비 인력으로 두라고 지시했다.“평소에 내가 처리하지 못한 일들을 대신 처리해주고 만약 문제가 생기면 그때마다 보고하면 돼요.”비서는 한숨을 쉬며 안도의 표정을 지었다. 그녀 혼자서 이렇게 많은 일을 하지 않아도 되어 다행이었다.일정이 정리되자 문지원은 업무에서 상당 부분 해방되었다.예전에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바쁘게 일하다 보면 퇴근 시간이 되어도 일이 끝나지 않고 긴급 통지가 오면 또 회의를 위해 야근을 해야 했다.이제는 오후 4시 반쯤이면 일을 마치고 퇴근할 수 있게 된 것이다.비서가 몇 명을 더 찾아서 양성해 두었기에 업무가 적절히 분배되어 모두 바빠 죽을 정도가 아니라 적당히 딱 맞는 분량을 처리할 수 있었다.그 덕에 문지원은 지석훈과 함께 결혼 후의 삶을 더욱 즐길 수 있게 되었다.지석훈도 이에 매우 만족해했다.“널 주려고 선물을 챙겨왔어. 들어가서 한번 봐.”그가 집 문 앞에 다가서더니 걸음을 멈췄다.문지원은 열쇠로 문을 열고 들어가 보니 안은 어두컴컴했다.“뭐 숨겨놨어요? 아직 불도 켜지 않았네요, 수상하게.”탁! 하며 불이 켜지자 거실의 모든
문지원은 이 주제가 다소 위험하다고 느꼈다. 비록 그녀의 아버지가 그녀에게 물어본 적은 없지만 그렇다고 자신과 배석훈이 결혼한 후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에 대해 말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했다. 돼지고기를 먹어보지 않았다고 해도 돼지가 뛰어다니 것을 본 적은 있을 것이다. 문지원은 그러면서도 반쯤 빚어놓은 만두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저,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이에 지석훈의 어머니가 그녀의 손을 잡았다. “너희들도 이제 나이가 들었으니 아이를 가져야지. 평소에 좀 더 노력해야 한단다.”문지원은 잔소리를 듣고 나서 나오니 기운이 다 빠져있었다.시어머니는 문지원에게 정말 잘해주었다. 거의 마음을 쏟아붓는 수준이었다. 비록 문지원의 집안 사정이 좋은 것을 알면서도 혼수 때 오랜 세월 모은 돈으로 집 한 채를 사서 선물해 주었다. 사실 지석훈도 자기 집이 있었지만, 시어머니는 선물하고 싶다고 하셨다. “너희 집도 너희의 것이지만, 이건 내가 어른으로서 선물하는 거란다.”게다가 그 집에는 문지원의 이름도 함께 올려져 있었다.그래서 시어머니의 출산 독촉에도 문지원은 어쩔 수 없이 버텨야만 했다. 다행히도 시어머니는 어린 이들에게 엄격하게 구는 편은 아니었다. 만두를 빚을 때 한 번 그런 말을 했고 또 떠나면서도 지석훈을 불러 몇 마디 잔소리했다. 문지원은 그 모자간의 대화를 듣지 못했다.돌아가는 길에 문지원은 약간 궁금해져 지석훈에게 물었다.“나갈 때 어머니께서 뭐라고 하셨어요?”“정말 알고 싶어?”“네.”그러자 지석훈은 문지원의 머리를 숙이게 한 후 그녀의 흩어진 머리칼을 살며시 넘겨주며 귀 옆에서 낮게 속삭였다.“우리 아이를 빨리 낳으라고 하셨어.”남자의 낮고 진한 목소리는 얼굴을 붉히고 심장을 뛰게 만드는 약보다도 중독성이 강해 문지원의 귀가 금세 붉어지고 말았다.저녁이 되자 지석훈은 몸소 행동으로 보여주기 시작했다. 한 손으로 문지원의 머리를 받치고 이마를 맞대며 낮은 숨소리를 내쉬었다. 문지원은 마치 파도 속에 잠긴 것
그 눈빛 속에서 조용히 터져 나오는 그 소유욕. 마치 옛 시대의 군벌과 그의 부인 같았다. 그리고 사진작가는 우연히 그 장면을 목격한 운 없는 사람이 되어 몰래 촬영을 하고 있었다. 사진작가는 자신의 상상에 자극받아 목소리가 떨렸다.“지석훈 씨, 고개를 들어 카메라를 봐주세요.”지석훈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사진작가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사진작가는 재빨리 셔터를 눌렀다. 그 후에도 그들은 여러 세트의 사진을 찍었고 찍은 사진들은 모두 문지원에게 하나하나 보여주었다. 문지원은 모든 사진에 다 만족했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마음에 든 것은 민국 시대 주제의 사진이었다.“대략 며칠 안에 나오나요?” 그녀가 물었다.사진작가는 답했다.“빠르면 이삼 일정도 걸릴 겁니다. 그때 완성된 사진들을 택배로 보내드리겠습니다. 그런데 제가 개인적인 부탁이 하나 있는데 혹시 두 분께서 응해주실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바로 아까 찍은 사진 중 몇 장이 제가 개인적으로 아주 마음에 들어서 사진관 벽에 걸어두고 싶습니다.”문지원은 사진관에 들어올 때 봤던 사진 벽이 생각났다.“그 벽에 걸어두시겠다는 건가요?”“네.”사진작가는 그 벽은 사진관의 특별한 기념 및 홍보 방법의 하나라고 설명했다. 잘 나온 사진들은 사진 주인에게 동의를 구한 뒤 동의하면 벽에 전시한다고 한다..문지원은 옆에 있던 지석훈을 바라봤다. “저는 괜찮은데, 당신은요?” 지석훈도 아무 문제 없다고 했다.“마음대로 하도록 해.”며칠 후 문지원은 사진작가가 보내온 사진을 받아 소중히 간직했다. 하지만 그녀는 몰랐다. 그 사진관 벽에 전시된 사진들이 곧 사람들의 눈에 띄어 사진이 찍혀 인터넷에 올라간 것이다.잘생긴 남성과 아름다운 여인의 조합과 최상의 촬영 기술 덕분에 순식간에 인터넷에서 화제가 되었다.네티즌들은 저마다 아아 소리를 냈고 많은 사람이 댓글을 달았다. “마치 옛 시대의 군벌 부인 같다.”“완전 대박이다.”“3분 안에 그들의 모든 정보를 알고 싶다.” 하지만 이 모
문지원은 약간 마음이 움직였다.하지만 웨딩 촬영은 이미 여러 번 한 적이 있었다. 그때 섬에서 몇 세트 찍었고 그 후 결혼식 현장에서 또 몇 세트 찍어 셀 수 없을 정도였다.게다가 이번 촬영은 개인 예약으로 진행되었는데 이 사진관이 꽤 유명하다고 들었다.물론 사진관 이름에 걸맞게 예약은 거의 하늘의 별 따기라고 한다..이 정도면 지석훈이 얼마나 큰 노력을 들여 예약을 잡았는지 알 수 있었다. 단순히 웨딩사진만 찍는 데 사용하기에는 너무 아까웠다.하지만 문지원 역시 이런 곳에 한 번도 와본 적이 없었기에 무엇을 찍어야 할지 몰랐다.“한번 보세요. 이건 저희가 예전부터 선보였던 스타일들이에요.”사진작가는 친절하게 앨범 한 권을 꺼내 보였다.앨범에는 이전 고객들이 이곳에서 찍은 사진들이 담겨 있었는데 정말 다양한 스타일이 있었고 모두 아름다웠다.이 사진관이 만들어낸 결과물은 정말 최고였다.문지원은 그중에서도 민국 시대 주제의 사진이 눈에 들어왔다.“이렇게 찍을 수 있을까요?”사진작가는 그녀가 가리키는 사진을 한 번 살펴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네, 됩니다. 먼저 메이크업하고 옷을 갈아입으세요. 직원들이 촬영 스튜디오를 설치할게요.”옷은 사진관에서 준비한 것으로 하고 지석훈의 요구에 따라 전부 새 옷이었다.사실 문지원은 소품용 옷을 입는 것에 크게 개의치 않았다. 어쨌든 한 번 입었다가 나중에 벗으면 되는 거고 몸에 달라붙지 않아서 안에 옷을 받쳐 입을 수도 있었다.하지만 지석훈은 직업병이 발동했고 그런 건 용납할 수 없었다.결국, 문지원은 어쩔 수 없이 그의 의견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급히 새 옷을 가져와야 했기 때문에 원래 걸리던 시간에서 15분이 더 추가되었고 메이크업 등 기타 과정도 진행해야 했다.문지원이 모든 준비를 마치고 나왔을 때는 이미 2시간이 지난 후였다.그러나 결과는 확실했다.곧은 치파오가 그녀의 아름다운 몸매를 감쌌고 문지원은 옷자락을 살짝 들어 올렸다. 마치 지난 옛 시대의 그림 속에서 걸어 나온 듯한
결혼 후 문지원은 휴가를 내서 신혼여행을 갈까 고민해 본 적이 있었다.하지만 요즘 지석훈이 거의 계속 병원에 머무르며 집에 돌아오지 않는 것을 떠올리며 본의 아니게 한숨이 나왔다. 비록 이미 익숙해졌긴 했지만 실망을 감추기는 어려웠다.비서도 그녀에게 물었다.“문 사장님, 신혼여행 가고 싶지 않으세요? 제 동창 중 한 명이 며칠 전에 결혼했는데 요즘 여기저기서 신혼여행 정보를 알아보며 준비 중이에요. 신혼여행이 없는 결혼은 반은 실패한 거랑 마찬가지라고 하더라고요.”그 말을 들은 문지원은 손에 들고 있던 서류를 제대로 볼 생각조차 들지 않았고 비서는 무언가를 눈치챈 듯했다.“그렇지 않으면... 문 사장님, 지 의사님이 일하시는 곳에 한 번 가보시는 건 어떠세요?”그녀가 머뭇거리며 물었다. 어쨌든 문지원은 요즘 정신이 산만하여 업무에 집중할 기색도 없었다.문지원은 비서의 시선 속에서 정신을 차렸다. 요 며칠 동안 집에 돌아와도 지석훈을 보지 못해 한참 혼란스러워했던 자신을 깨달으며 약간 부끄러워졌다.“그건 나중에 얘기하고 기획서 한 부 복사해 가져다주세요.”점심 무렵, 문지원은 막 일을 끝내고 밥 먹으러 가려던 찰나, 핸드폰에 지석훈의 메시지가 떴다. 같이 밥을 먹자는 메시지에 문지원은 미소를 지었다. 멀리서 이 장면을 본 직원들은 서로 눈빛을 교환하며 웃음을 터뜨렸다.문지원은 재빨리 열쇠를 챙기고 회사를 떠났다. 지석훈은 그녀를 새로 오픈한 가게로 데려갔다.식사를 마친 후 문지원은 지석훈을 바라보며 머뭇거리다가 물었다.“병원에 다시 돌아갈 거예요?”“응?”지석훈은 눈썹을 치켜들며 고의적으로 물었다. “내가 돌아가길 바라는 거야?”그 말을 들은 문지원은 순간 당황했다. 사실 그녀는 지석훈이 자신과 좀 더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주길 바랐는데 이제 막 결혼한 신혼부부임에도 불구하고 각자 업무에만 매달려 밤에야 겨우 함께 잠자리에 들 수 있는 상황이었다.하지만 수줍음이 많은 그녀는 그 마음을 솔직하게 털어놓지 못했다.지석훈은
예전에는 이런 일이 있을 때면 지석훈은 항상 선을 지켰지만 오늘 밤엔 조금 달랐다. 그는 그녀를 침실에서 욕실로 다시 침대로 옮겨가며 몸 곳곳에 뜨거운 입맞춤을 했다.다음 날 아침에 일어났을 때도 문지원은 여전히 몸속 깊이 스며든 감각이 남아 있는 것만 같았다.그리고 그녀는 예상대로 휴가를 냈고 이틀이 지나서야 회사에 다시 나왔다.회사 사람들은 이미 예상이라도 한 듯 문지원이 출근하자 하나같이 말했다.“문 사장님, 결혼 축하드려요.’문지원은 무려 사흘이나 결근했지만 다들 그 사흘 동안 무얼 했는지는 굳이 말 안 해도 짐작이 갔다.분명 부부 생활이 아주 좋았겠지, 아니었으면 일까지 내팽개치고 안 나왔을 리가 없다.문지원은 직원들의 부담스러운 시선에 얼굴을 들 수도 없어 그저 아무렇지 않은 척할 수밖에 없었다.그래도 지난번에 당한 적이 있었던 터라 문지원은 이제 출근 전에 거울 앞에서 꼼꼼히 점검했다.몸에 키스 자국이 드러나지 않는 걸 확인하고 나서야 안심하고 회사를 향했다.그렇지 않았다면 그 흔적들을 들켰을 경우 정말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문지원이 예상치 못했던 건 며칠 지나지 않아 결혼을 축하하는 선물이 회사로 배달됐다는 것이다.문지원은 처음에 여울이 보낸 거라고 생각했지만, 물어보니 아니었다.택배 상자의 외관을 살펴봐도 발신자가 적혀 있지 않아 더욱 수상했다.“이거 가져온 사람이 누가 보낸 건지 말했어요?”문지원이 로비 직원에게 물었다.로비 직원은 고개를 저었다. “아뇨, 그냥 두고 바로 가버렸어요.”문지원은 뭔가 직감적으로 찜찜한 마음이 들어 그 택배를 챙겼고 사무실에 들어와서야 상자를 열었다.그 안에는 브로치 하나와 축하 카드 한 장이 들어 있었다.문지원은 축하 카드를 집어 들어보니 카드 위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결혼 축하해요.”글씨체는 아주 정갈하고 예뻐 여성의 필체 같았다.그녀는 곧바로 짐작이 갔다.문지원은 그 브로치를 지석훈에게 보여주자 그는 눈빛이 살짝 흔들렸지만 아무 말 없이 브로치
여울은 아직 최주하를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최주하도 쉽게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문지원이 알기로 여울은 마음이 여린 사람이었고 결국 받아들이게 되는 건 시간문제일지도 몰랐다.그녀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친구 일에 깊이 관여하는 것도 괜히 어색하고 조심스러웠다.게다가 얼마 전 지석훈이 슬쩍 귀띔하듯 말했다.“며칠 전에 여울 씨가 병원에 재검진받으러 왔는데 주하가 데리고 왔었어.”그 말을 듣고 문지원은 혀를 끌끌 찼다.평소에 말도 없고 조용하던 여울이 은근히 비밀 많은 타입이었던 모양이었다.그렇게 시간은 순식간에 흘러 어느덧 다음 달 중순이 되었다.지석훈은 아예 와인 농장을 통째로 빌려 며칠에 걸쳐 그곳을 자신이 원하는 모습으로 꾸며놓았다.결혼식을 올릴 장소는 바로 거기였다.그 와인 농장은 웬만한 호텔 못지않게 컸고 내부에는 수년간 숙성된 고급 와인들이 그대로 보관되어 있었고 결혼식 날 손님들이 오면 바로 꺼내어 대접할 수 있을 정도였다.그들은 결혼 소식을 널리 알리진 않았다.이건 문지원이 원한 방식이었다.그녀는 온 세상에 떠들썩하게 알리는 그런 결혼식보다는 가까운 가족과 친구들만 초대해서 조용히 축하받는 걸 선호했다.행복은 굳이 남들에게 증명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니까.그런데 결혼식이 한창일 때 지석훈이 무대 위에서 다시 한번 프러포즈했다.해변에서 했던 프러포즈보다 훨씬 더 진지하고 진중한 분위기였다.“하고 싶은 말이 정말 많지만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어서... 예전엔 내가 사랑인 줄도 모르고 놓쳐버렸던 순간이 많아. 이제는 더 이상 놓치고 싶지 않아. 이렇게 내 곁에 있어 줘서 고마워. 앞으로 남은 인생... 너랑 함께할 수 있어서 정말 행복해.”그의 말이 끝나자 하객들 사이에서 박수 소리가 터져 나왔다.문지원은 무대 위에서 입을 손으로 가리고 눈물을 흘렸다.식이 끝날 무렵, 문지원은 멀리서 검은색 카이엔 SUV가 그녀의 친구 여울을 데리러 오는 걸 보았다.차창이 천천히 내려가자 예상대로 그 안에 앉아 있는 사람은 최주하였다
문지원은 문득 자신이 계획에 철저히 걸려들었다는 생각에 의심의 눈길을 보냈다.“처음부터 계획한 거죠?”“응.”지석훈은 미소 지으며 그녀의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사실, 그는 그녀를 향한 마음을 오래전부터 숨겨온 것이었다....해변에서의 프러포즈 이후 문지원에게 찾아온 가장 큰 변화는 손가락에 반짝이는 반지가 생겼다는 점이었다.이 반지는 지석훈이 특별히 맞춤 제작한 것이었다. 그녀는 우연히 그의 휴대폰을 보다가 두 달 전에 이미 주문이 들어가 있었다는 구매 기록을 발견하고는 깜짝 놀랐다. 그렇게 오래전부터 준비해 왔다니 감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두 사람의 결혼 소식을 접한 지석훈의 부모님은 곧바로 혼인신고부터 하라고 재촉하기 시작했다. 어느 날 문지원은 우연히 지석훈의 어머니가 그를 붙잡고 타이르는 말을 듣게 되었다.“네 아빠랑 난 애초에 너한테 기대도 안 했어. 하루가 멀다고 병원에서 살다시피 하니 너 같은 애한테 누가 시집오겠나 싶었거든. 그런데 다행히 네가 능력 있어서 지원이 같은 좋은 아이를 데려왔으니 얼른 확실히 붙잡아야지. 빨리 혼인신고부터 해. 나중에 그 아이가 너 버리고 떠나버리면 그땐 어디 가서 울어도 소용없어!”문지원은 그 대화에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몰랐다.그런데 신기한 건 지석훈이 워낙 점잖고 진지한 사람이어서 집안 분위기도 매우 조용할 줄 알았는데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는 점이었다. 아버지는 이미 퇴직해 한가로운 성격으로 매일 독서나 산책을 즐기는 조용한 스타일이었다. 어머니는 젊었을 때는 커리어 우먼이었고 호탕한 성격으로 남편에게 엄격하면서도 친화력이 강한 사람이었다.두 분 모두 차분한 듯하면서도 내면에 장난기를 숨기고 있는 아들을 낳을 것 같진 않았는데 이게 바로 유전자의 신비인가 싶었다.하지만 어머니가 그렇게 그녀를 좋아해 주는 모습에 문지원도 안심했다. 확실히 시부모님의 사랑을 받고 있다는 증거였다.한편 문지원의 아버지는 지석훈과 따로 대화를 나눈 이후부터 정확히 무슨 얘기를 했는지는 몰라도 그에 대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