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부모님께서 허락해주시는 일만 남았어요. 그럼 바로 진호 씨랑 결혼할 거거든요. 오빠도 그때 가서 우리의 결혼에 기뻐해 줄 거죠?”남태건의 눈빛이 어두워졌다. 테이블 아래로 내렸던 손은 어느새 주먹을 꽉 움켜쥐고 있었다.권다솔은 머리도 좋고 사리 분별도 잘하는 여자였다.그녀는 배진호를 소개하는 방식으로 그에게 알려주고 있었다. 그의 의도는 이미 눈치챘으니 거절하겠다고.권다솔의 마음속엔 배진호라는 인물이 있었기 때문이다.속에서 분노가 들끓어 오르면서 이성을 집어삼키려 했으나 남태건은 그대로 감정을 드러낼 수 없어 입술을 짓이기며 말했다.“아저씨랑 아주머니가 허락하지 않으셨다는 건 너랑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란 소리잖아.”“넌 어릴 때부터 그랬지. 앞뒤 가리지 않고 네가 원하는 것이라면 갖고 싶어 했지. 하지만 네가 원하는 건 너한테 어울린다는 보장은 없었어.”권다솔이 대답을 하기도 전에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떠나버렸다.결국 이 재회는 불쾌하게 끝나고 말았다.돌아가는 길에 권다솔은 남태건에 대해 배진호에게 알려주었다.비록 그가 무슨 사이인지 묻지 않았으나 권다솔은 그가 신경 쓰고 있음을 잘 알고 있었다.“방금 그 사람은 어릴 때 잠깐 알게 된 사람이에요.”권다솔은 그가 시동을 끈 틈을 타 손을 그의 팔에 올리며 애교 부리듯 당겼다.“미리 말해주지 않은 건 돌아올 줄 몰라서였어요. 혹시 날 원망하고 있는 건 아니죠?”배진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처음에는 아무렇지 않았으나 말이 없는 남자에 다소 마음이 불안해지기 시작했다.“진호 씨, 혹시 화가 난 건 아니...”말을 마치기도 전에 갑자기 그녀의 눈앞으로 그림자가 드리워지면서 그가 그녀에게 입을 맞추었다.시원한 향에 코끝에서 느껴지며 그녀의 머릿속도 맑아지게 했다. 그의 키스에 권다솔은 정신이 아득해졌고 오늘따라 유난히 거칠게 느껴졌다.역시나... 질투하고 있었던 것이 분명했다.하지만 그녀는 차 안이라는 것을 잊지 않았다.얼른 배진호를 밀어내고 말했다.“여기서는 싫어요.
여이현은 몇 개의 대책을 내놓으면서 배진호에게 선택하라고 했다.빠르게 회의는 끝났다.사무실로 돌아온 배진호는 조금 전 있었던 일을 전부 떠올려 보면서 손끝으로 이마를 짚었다. 생각만 해도 피곤함이 밀려왔다.“진호 씨! 회사에 비상이 걸렸다면서요! 괜찮아요?”권다솔이 들어오며 말했다.“여긴 왜 왔어요.”배진호는 무의식적으로 표정 관리를 했다. 그녀의 앞에서 초췌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내가 말했잖아요. 매일 회사로 출근할 필요가 없다고요. 다솔 씨가 힘들면 안 된다고요.”분명 지금 힘든 사람은 그였지만 억지웃음을 지으며 그녀를 걱정하고 있었다. 권다솔은 순간 화가 났다.“내 앞에서 연기하지 말아요!”“오는 길에 이미 전부 전해 들었어요. 회사에서 진행하고 있던 프로젝트 전부 계약 해지당했다면서요. 회사에 비상이 걸렸는데 왜 나한테는 말해주지 않은 거예요?”권다솔은 속상해 미칠 것 같았다.다른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배진호가 자신에게 말해주지 않았다는 사실에 서운했다.무슨 일이 있든 그는 그녀에게 말해주지 않았고 어떻게든 그녀가 안락한 삶을 살아가게 하려고 했다. 그는 대체 그녀를 뭐로 생각하는 것일까?상처 입은 권다솔의 눈빛은 배진호가 그냥 넘길 수 없을 정도가 되었다.그는 가슴이 미어지듯 아팠다. 곧이어 그는 그녀의 어깨를 돌리며 사과했다.“미안해요. 내가 잘못했어요. 다솔 씨에게 숨겨서는 안 되는 데 말이에요. 나한테 한 번 더 기회를 줄래요?”“이번이 마지막이에요. 다음에 또 그러면 용서해주지 않을 거예요.”권다솔은 그를 째려보았다. 조금 붉어진 눈가였기에 무섭기는커녕 오히려 귀여워 보였다.그렇다고 해서 배진호는 그냥 넘기지 않았다. 그녀가 하는 말에 꼬박꼬박 대답했다.권다솔을 달랜 후 배진호는 이틀간 일어난 일들과 여이현이 회의에서 했던 말을 전부 말해주었다.전부 들은 권다솔은 역시나 걱정하고 있었다.“그렇게 심각한 거예요? 그럼 회사 자금 사정도 그렇게 나쁜 건 아니겠죠? 아니면 일단 내가 돈
말을 마친 권다솔은 바로 집을 나서려 했다.이때 줄곧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지켜보기만 하던 권용민이 위엄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아무 데도 갈 생각하지 말아라.”“저녁에 파티가 있다. 남씨 가문에서 주최한 거야. 유학 갔던 아들이 돌아와서 앞으로 잘 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여는 파티라더구나. 네가 어릴 때 함께 놀던 남태건이 돌아온 거니까 너도 참석해.”그는 권다솔이 거절할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권다솔은 참고 있던 감정이 결국 터져버렸다.“안 갈 거예요.”권용민픠 표정이 바로 어두워졌다. 그는 평소에 과묵한 성격이었고 누군가 자신의 말에 토를 달거나 반항하는 것을 아주 싫어했다.그런데 권다솔이 지금 그의 인내심의 한계에 도전하고 있었다.그는 분노를 꾹꾹 참고 있었다. 권다솔이 자신의 딸이라는 이유만으로 말이다.“다솔아, 아빠한테 그게 무슨 말버릇이니.”눈치챈 김영은이 얼른 말렸다.“우리 집안은 전부터 친하게 지냈잖니. 유학하고 돌아온 사람도 네가 그렇게 따르던 태건이기도 하고 말이야. 그러니 우리가 더욱 귀국 파티에 참석해야 하지 않겠니?”“제가 모를 거로 생각하지 마세요. 두 분이 저랑 태건 오빠를 이어주려고 하는 거 모를 줄 알았어요?”권다솔은 코웃음을 치며 말을 이었다.“아무튼, 전 절대 가지 않을 거예요.”권용민은 결국 자리에서 일어났다. 얼굴엔 냉소가 지어져 있었다.“그럼 이 집에서 나갈 생각을 하지 말아라.”결국 권다솔은 집에서 나올 수 없었다.그녀의 부모님은 그녀를 집안에 가둬버렸다. 권용민은 그녀에게 남씨 가문 파티에 갈 것을 강요하면서 핸드폰을 압수했다.권다솔은 배진호에게 연락할 수 없게 되자 마음이 조급해졌다. 하지만 별다른 방법이 없었다.다음 날 밤, 권다솔은 브이넥으로 된 검은 원피스를 입고 남씨 가문으로 갔다.김영은도 함께 말이다.김영은이 따라간 목적은 권다솔이 파티 도중에 도망치지 않게 감시하기 위함이었다.차에서 내린 후부터 권다솔은 줄곧 미간을 구기고 있었다. 사람들이 인사를 해도 무시하면서
권다솔은 남태건과 눈이 마주쳤다. 웃음기 머금은 눈으로 자신을 보는 남태건에 그녀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남태건의 의도가 무엇인지 더 알 수 없었다.반면 김영은은 바로 눈치챘다. 그러고는 바로 행동으로 옮겨 두 사람을 이어주려고 했다.“오랜만에 만났는데 서로 하고 싶은 얘기가 많겠구나. 그래, 우리가 빠져줄 테니까 둘이 얘기 잘 나눠보렴.”김영은은 최선정의 팔을 잡으며 자리를 옮겼다.다가오는 사람도 없었기에 두 사람만 남게 되었다.권다솔은 직설적으로 말했다.“대체 무슨 생각인 거예요?”“내가 무슨 생각하는 지 바로 알리지 않아?”남태건은 그윽한 눈길로 그녀를 보았다. 아예 감정을 숨길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어릴 때 그랬잖아. 나한테 시집오겠다고. 비록 우리가 꽤 오랫동안 떨어져 있긴 했지만 난 아직도 그때 네가 한 말을 기억하고 있거든.”하지만 그때의 말을 진심으로 생각한 건 오직 남태건 뿐이었다.권다솔은 어릴 때 아무것도 모르고 내뱉은 말을 잊은 지 오래였다.남태건은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분노가 치밀었다.권다솔은 그런 그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어릴 때 내뱉은 말을 진심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세상에 몇이나 되겠는가.“태건 씨, 그 마음은 이해가 되지만 정말 죄송하네요. 어릴 때 뭣도 모르고 내뱉은 말을 한 번도 진심으로 생각한 적 없거든요. 전 태건 씨가 바라는 걸 이뤄드릴 수 없어요. 그러니 차라리 다른 여자를 만나보는 게 더 시간 절약될 것 같네요. 한 나무에만 목매다는 것이 아니라.”“그 사람 때문인 거지?”남태건의 한 마디에 권다솔은 멍해지고 말았다.고개를 들어 남태건을 보았다. 블랙홀처럼 끝이 보이지 않는 두 눈동자는 그녀를 빨아들일 것 같았고 이상하게도 공포가 밀려와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쳤다.하지만 그녀는 최대한 차분하게 말했다.“이건 진호 씨랑 아무 상관없어요.”그러나 남태건은 그녀의 말을 귓등으로 흘려보내고 있었다.“그 남자가 널 위해 회사까지 세웠다면서. 요즘도 회사가 잘 되긴 해? 협력
권다솔은 배진호의 품이 너무도 따듯하게 느껴졌고 저도 모르게 코를 훌쩍이며 말했다.“치, 안 믿어요. 진호 씨는 항상 모든 걸 생략해서 말하는 버릇이 있더라고요.”배진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두 사람은 확실히 말을 하지 않아도 서로의 마음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권다솔은 배진호의 품에 한참 안겨 있었다. 그런 그녀의 좋지 않은 기분을 눈치챈 그는 어떠한 재촉도 하지 않았다.두 사람은 그렇게 한참 서로 끌어안으며 서 있었다. 권다솔의 기분이 나아질 때까지. 그러고 난 뒤, 차에 올라탔다.권다솔은 배진호에게 그동안 있었던 일을 설명해 주었다.남태건이 한 짓이라는 것을 알게 된 배진호는 담담하게 말했다.“남원 그룹이 한 짓이라는 건 알고 있었어요. 그래서 받은 그대로 돌려줄 생각이었고요.”이미 대책이 있다고 하니 권다솔은 마음이 놓였다.며칠 지나지 않아 여이현이 남원 그룹에 손을 대기 시작했다.먼저 그들이 반년 동안 준비하고 있던 프로젝트를 밀어버리는가 하면 몇 년 동안 묻히고 있었던 남원 그룹의 기사도 내면서 여론으로 압박을 주기 시작했다.고작 며칠이라는 시간 사이에 남원 그룹의 주가는 절벽에 떨어진 것처럼 하락했다.배진호도 남원 그룹을 무너뜨리는 데에 꽤나 많은 힘을 들였다.남원 그룹이 필사적으로 숨기고 있던 비밀을 증거와 함께 전부 세상에 공개했다.남원 그룹은 세상에 공개된 비밀을 수습하느라 당연히 준비 중이던 프로젝트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고 협력 업체들도 원하던 이익을 얻지 못하자 자연스럽게 다시 돌아왔다.이번에 배진호는 한 번에 여러 부의 계약서를 써두었다. 또 이런 사태가 일어나지 않기 위해서 말이다.그 후로 남원 그룹은 며칠 동안 아주 잠잠했고 아무런 행보가 없었다. 그들은 며칠 동안 남원 그룹을 지켜보고 나서야 안심할 수 있었다.“역시 대표님이세요! 한 번에 빠르고도 정확하게 남원 그룹을 무너뜨리다니. 아마 남원 그룹에서는 아직도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몰라 얼떨떨해 있을 거예요!”
권다솔은 놀라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 몰랐다. 이 소식은 그녀에게 너무도 갑작스러운 소식이었다.얼마 지나지 않아 의사는 엽산을 처방해 주었다.두 사람은 세워 둔 차 앞으로 돌아왔다.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차에 올라탄 뒤에야 배진호는 진정하고 권다솔을 볼 수 있었다.“다솔 씨...”“나도 몰랐어요. 생리가 한 달 정도 안 오긴 했는데 원래 생리 주기가 불규칙해서 이번에도 그런 줄 알고 신경 쓰지 않았어요.”권다솔은 그가 말을 이어가기 전에 먼저 당황스러운 어투로 말했다.그녀는 배 속에 아기가 자라고 있을 줄은 전혀 몰랐다.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도 몰랐다.부모님은 아직 배진호와 그녀의 사이를 허락하지 않았는데 말이다.이틀 전에도 그녀와 남태건을 이어주려고 하지 않았는가. 만약 이 사실을 부모님이 알게 된다면 두 사람의 반응이 어떨지도 상상 가지 않았다.그럼에도 권다솔은 아이를 지울 생각은 하지 않았다.배 속에 있는 아기는 그녀와 배진호의 아기였으니까.그렇게 생각한 그녀는 가슴 한구석이 따스해지며 미래를 상상하게 되었다.배진호는 그녀가 망설이고 있는 것을 눈치채고 입술을 틀어 문 채 물었다.“아기 낳으려고요?”권다솔은 확고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그녀는 이미 대책까지 생각해 두었다. 설령 그녀의 가문에서 받아주지 않고 부모님이 허락해주지 않는다고 해도 어떻게든 이 아기를 낳아서 잘 키우리라고.그러나 배진호가 그녀에게 말했다.“이 아기 낳으면 안 돼요. 다솔 씨한테 짐만 될 거예요. 아직 초기니까 몸에 무리 가지 않게 지울 수 있을 거예요.”쿵!권다솔은 순간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믿을 수 없다는 눈빛으로 배진호를 보았다. 그 눈빛은 이내 분노로 바뀌었다.“진호 씨! 이 아기는 진호 씨 아기예요! 그런데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거예요?!”“그러니까 반드시 지워야 한다는 거예요.”배진호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도 괴로운 듯했다.“우리 아직 부모님 허락받지 못했잖아요. 이 아기가 세상에 나오게 되면 아주
임신한 사실을 배진호와 권다솔은 숨기기로 했고 부모님에게도 비밀로 하기로 했다. 한편으로는 권다솔은 아직 그들의 반응을 마주할 자신이 없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임신 사실을 알게 된 김영은이 회사로 와서 난동을 부릴까 봐 두려웠다.하지만 권다솔은 매일 외출했고 거기에다 남씨 가문 파티에서도 말없이 먼저 떠난 것에 대해 김영은은 이미 속이 타들어 가고 있었다.결국 권용민과 상의해 권다솔을 집으로 불러들이기로 했다.권씨 가문 본가 거실.권용민은 안경을 낀 채 소파에 앉아 있었다. 신문을 읽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상 현관 쪽을 힐끔대며 관찰하고 있었다. 손가락으로 소파를 톡톡 두드리며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는 듯했다.“여보, 이번에도 지난번처럼 행동하면 안 돼요! 다솔이 얘기를 들어주기로 했으니까 다솔이한테 자꾸 소리를 지르지 말아요. 그러다 괜히 싸움만 날 거니까요.”권용민은 건성으로 답했다.“알았어, 알았다고. 일단 다솔이가 오고 나면 다시 얘기해.”김영은은 여전히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몇십 년 동안 부부로 지냈기에 권용민이 어떤 성격인지 아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절대 자존심을 내려놓을 사람이 아니었다.그 순간 그녀의 눈이 빛났다. 현관 쪽에서 인기척이 들렸기 때문이다.“다솔아, 왔구나. 나랑 네 아빠가 네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단다. 손에 든 건 뭐니?”김영은이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며 권다솔을 맞이했다. 권다솔은 뜻밖의 환대에 멈칫하더니 선물로 사 온 찻잎을 건넸다.“이건 찻잎이에요. 아빠한테 드리려고 사 온 거예요.”권용민은 사업에 오랫동안 몸을 담그고 있었던지라 좋아하는 것이 별로 없었다.유일하게 좋아하는 것이라곤 찻잎이었다.이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극히 드물었다. 다른 사람이 아무리 머리를 쥐어짜며 생각해도 권용민에게 찻잎을 선물할 생각을 해내지 못했다. 하지만 딸로서 권다솔은 당연히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그녀가 사 온 찻잎도 권용민이 제일 좋아하는 대홍포였다.김영은은 그 찻잎을 권용민에게 건넸다. 그의 입꼬리
배진호는 권다솔을 보며 한숨을 쉬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를 소파에 앉혔다.“내 눈치를 보면서 말하지 않아도 돼요. 다솔 씨 아버님이 하신 말씀이니 당연히 가야죠.” 비록 두 사람의 사이를 허락해주지 않았지만, 그는 이미 권용민을 자신의 장인어른으로 생각하고 있었다.장인어른도 반쯤 그의 아버지가 된 것과 다를 바 없었다.그러니 어떻게 찾아가지 않을 수 있겠는가.배진호는 점심 즈음에 다정 그룹으로 찾아갈 생각이었다.권다솔은 마음이 놓이지 않아 함께 가려고 했으나 배진호는 거절하며 가만히 회사에 있으라고 했다.물론 이견이 좁혀지지 않았다. 하지만 결국 권다솔은 고개를 끄덕이게 되었다.다정 그룹.높게 솟아오른 고층 빌딩에 금방 차에서 내린 배진호는 다소 긴장감을 느끼게 되었다.분명 여이현의 곁에서 비서로 일하면서 수많은 회사와 대표님들을 만나봤고 다정 그룹은 그가 봐온 회사 중 큰 회사도 아니었지만, 이상하게도 긴장되었다.그는 옷매무새를 정리하고 걸음을 옮겼다.로비 직원이 미소를 지으며 그에게 말을 걸었다.“안녕하세요, 방금 저희 회장님을 뵙겠다고 하셨는데, 혹시 약속 잡고 오신 걸까요?”“네, 회장님이 직접 저를 부르셨습니다.”배진호는 간단히 대답했다.그의 말을 들은 로비 직원은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며 확인 전화를 걸었다.얼마 지나지 않아 그를 안으로 들여보냈다.3층이 바로 회장실이었다. 배진호는 그곳으로 안내를 받게 되었고 막힘없이 안까지 들어갔다.너무도 순조롭게 안으로 들어오게 되어 그도 믿어지지 않았다.권용민은 역시나 푹신한 의자에 앉아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가 들어오자 고개를 들었다.“진호 씨, 왔군요. 앉아요.”배진호는 침을 꿀꺽 삼켰다.그와 친한 사람이라면 눈치챘을 것이다. 그가 지금 엄청 긴장해 하고 있다는 것을.권용민은 겉보기엔 태산처럼 듬직하고 얼굴에 표정이 없었기에 배진호도 그가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아맞히기 어려웠다.“최근에 회사에 위기를 맞이하게 되었다던데, 프로젝트 몇 개나 잃게 되
대신 일을 해줄 사람이 넘쳐나는데 뭐하러 본인이 고생하냐는 식으로 말하는 박은희에 나도현은 그저 씁쓸하게 웃을 뿐이었다.“어머니, 시은이 몸 상태도 고려해주셔야죠. 시은이가 최근 4년간 하민이를 위해서 밤낮없이 일만 해온 거 어머니도 잘 아시잖아요. 저랑 같이 살게 된 지도 얼마 안 됐는데 여유를 즐길 틈도 없이 또 덜컥 아이를 가져서 힘들게 하고 싶지 않아요. 어머니도 여자니까 임신과 출산의 고생을 누구보다도 잘 아실 거 아니에요.”나도현의 그 한마디에 박은희도 할 말이 없었다.나도현은 박은희가 조금 망설이는 것 같아 냉큼 말을 이어갔다.“만약 하민이가 혼자라서 외롭다고 하면 당연히 둘째든 셋째든 낳을 테니까 그 점은 시름 놓으세요. 하지만 시은이와 저의 계획을 물으신다면 그건 그냥 순리에 맡기고 싶어요.”“알겠어, 그럼 너희 뜻대로 해.”박은희는 나도현이 이렇게까지 말한 이상 더 밀어붙였다간 양시은은 안중에도 없는 것처럼 보일까 봐 더 말하지 않기로 했다.그제야 박은희는 은근히 걱정됐다.“내가 이렇게 급해 했다고 시은이가 또 오해하진 않겠지?”“그럴리가요. 시은이는 어머니 마음을 이해할 거예요. 그뿐만 아니라 어머니가 그런 사람이 아니란 것도 잘 알고 있을 거예요.”나도현이 박은희의 어깨를 토닥이며 별다른 말도 하지 않았을 때 양시은이 박은희를 향해 걸어왔다.양시은이 자신에게 미소를 짓는 것을 보자 박은희는 그제야 무겁게 가라앉았던 마음이 가벼워지는 것 같았다.박은희는 나도현에게 넌지시 말을 건넸다.“넌 시은이를 데리고 밖에 나가서 바람을 좀 쐬고 들어와. 회사 일은 절대 걱정하지 말고 둘만의 시간을 좀 보내. 네가 그랬잖니, 그동안 고생을 너무 많이 했다고. 그러니까 이제는 정말 아무 생각 없이 현재를 즐겨.”“알겠어요.”나도현은 대답과 함께 양시은에게 다가갔고 둘은 알게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함께 올라갔다.양시은이 단미주와 합작한 프로젝트로 인해 업계의 많은 사람은 양시은을 다시 볼 것이다.양시은은 그 결과에 대해
하민은 박은희와 함께 지낸 지 3년이나 되었고 이 집에서 제일 친한 사람이었다.하지만 하민은 어릴 때부터 아버지의 사랑을 갈망했다.그래서 양시은과 나도현은 퇴근하는 대로 집으로 돌아와 하민과 함께 시간을 보내기로 한 것이다. 가끔 학부모의 참여가 필요한 활동은 함께 참여하기도 했다.“하지만 너희들도 보다시피 하민이도 나를 잘 따르고 나도 시연이 널 도와서 아이를 잘 돌봐주잖니. 지금 너랑 도현이도 시간이 있고 하민이도 학교에 다니니까 내가 돌봐줄 수 있을 때 딱 둘만 더 낳는 건 어떠니? 그럼 우리 집안도 더 복작거리고 좋을 것 같은데 말이야.”양시은이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라 망설이고 있을 때 나도현이 말을 가로챘다.“싫다는 게 아니에요. 다만 저랑 시은이는 아직은 하민이만 생각하고 있어요. 우리 아이 일은 나중에 더 말하는 거로 해요.”나도현은 하민이 한 명에게도 제대로 된 사랑을 못 주고 있는데 둘째까지 낳아버리면 하민이가 원래도 부족했던 사랑을 나눠줘야 할 것처럼 느낄까 봐 걱정됐다.“왜? 너희 둘 중에 누가 아프기라도 한 거야?”박은희는 말은 그렇게 해도 눈길은 이미 나도현에게 향해있었다.양시은은 이미 하민이를 낳았기 때문에 문제가 없으리라 판단했기 때문이다.박은희의 시선을 느낀 나도현은 어쩔 수 없이 말을 이어갈 수밖에 없었다.“맞아요, 제 몸에 문제가 생겼어요. 최근 4년간 병원에 다니고 있었고 일도 바빠서 제 정자 생존율이 엄청나게 낮아졌어요.”그 말을 들은 박은희가 침착할 리 없었다.박은희는 당장 나용민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당신이 기를 쓰고 도현이에게 회사를 물려주려고 부담을 주니까 도현이 몸이 망가졌잖아요. 지금 당장 회사 업무를 이어받아서 책임지고 도현이 좀 푹 쉬게 해줘요. 국가 정책도 개방된 마당에 애가 하나밖에 없는 게 말이 돼요?”박은희에게는 나도현이 유일했다. 애당초 박은희는 나도현이 양시은과 사귈까 봐 온갖 방법을 다 대며 노력을 했지만 결국 나도현은 그런 박은희의 노력을 무시하듯 박은희의 뜻대로
그 순간 양시은은 단미주를 흘겨보았다. 차디찬 양시은의 눈빛이 이미 모든 걸 설명하고 있었다.양시은이 설령 지금 나진 그룹의 비서가 아니라고 해도 대학을 나온 사람인데 PPT 하나 만들 줄 모른다는 게 말이 될 리가 없었다.단미주는 잠시 멈칫하더니 물었다.“그냥 궁금해하는 것도 문제가 되나요?”양시은은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절로 나왔다.이윽고 양시은은 단미주를 회의실 안으로 안내했고 단미주가 그렇게나 기다리던 PPT를 그녀의 눈앞에 보란 듯이 전시해두었다.양시은은 미소를 띠며 단미주에게 물었다.“단미주 씨, 무슨 문제라도 있을까요?”양시은은 단미주와의 합작이 절대 쉽지 않을 것을 직감하고 그녀가 제기할 모든 문제점을 예상해 아주 작은 방면들까지 철저히 준비했다.게다가 그날은 단미주도 나도현에 대한 은근한 마음을 드러냈었지만 나도현은 양시은 때문에 단미주에게 더는 반응을 하지 않은 것이었다.단미주도 양시은이 자신을 통해 양시은이라는 사람을 증명하고 싶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단미주는 양시은이 얼마나 문제를 전면적으로 바라보는지를 깨달았고 덩달아 양시은이 훌륭한 여자라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단미주는 양시은의 치밀함에 진심으로 탄복하였고 마침내 나도현이 왜 양시은을 선택했는지도 알게 되었다.“이 프로젝트에 서명할게요. 그리고 앞으로 더는 양시은 씨를 난감하게 하지도 않을게요.”“벗이 늘어나는 건 어떻게 보나 적이 늘어나는 것보단 이득이죠. 단미주 씨도 상당히 능력 있는 사람이에요.”양시은도 그 순간에는 진심으로 단미주를 칭찬하고 있었다. 하지만 단미주는 자신이 결코 양시은의 칭찬을 받을만한 사람이 못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양시은 씨, 그동안 제가 양시은 씨에게 했던 무례한 행동들에 대해 사과할게요.”말을 마친 단미주는 정말로 90도 인사를 하며 사과를 했다.회의실에는 다른 사람들도 있었지만 단미주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단미주 역시 업계에서 꽤 유명한 사람인데 그런 단미주가 양시은에게 고개 숙여 사과하리라고는 그 누구도
나도현은 결코 쉽게 알려주지 않았다. 양시은은 작게 투덜거렸지만 그래도 설레는 마음은 어쩔 수 없었다.비장하게 찾아보라고 말한 것 치고는 그리 깊은 곳에 숨긴 것도 아니었다.막 잠자리에 들려고 할 때 양시은은 침대 밑에서 나도현의 마지막 서프라이즈를 찾아냈다.그건 다름 아닌 사진 한 장이었다.사진 속 양채은과 엄마 문해미가 해외의 유명한 철탑 아래에서 해맑게 웃고 있었다.잠시 얼어붙었던 양시은은 이내 눈시울을 붉히며 목멘 소리로 나도현에게 물었다.“채은이랑 엄마는 어떻게 찾은 거야?”나도현은 양시은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양시은을 반쯤 안은 상태로 사진을 들고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내가 찾은 게 아니야. 정확히 말하면 이 사람들이 날 찾은 거지.”이윽고 나도현이 설명해주었다.그 사진은 바로 어제 받은 산 건너 물 건너온 우편이었다.지금처럼 인터넷이 발전한 시대에 우편을 사용하는 사람은 극히 드물었다. 이미 해외에서 이곳까지 넘어오는데 꽤 오랜 시간이 걸렸을 테니 지금 당장 그곳에 가서 사람을 찾는다고 해도 찾지 못할 게 뻔했다.나도현은 고개를 숙이고 말했다.“내 생각엔 그 사람들이 시은이 네 생일을 기억하고 일부러 시간을 철저히 계산해서 너한테 이 사진을 보낸 것 같아.”나도현의 말을 끝으로 양시은은 사진을 액자에 넣어 침대 머리맡 탁자 위에 세워두었다.양시은은 하루 만에 초안 수정을 마쳤다.철저하게 시간 계산을 마친 단미주가 때마침 하이힐을 도각거리며 나진 그룹에 들이닥쳤다.“어떻게 됐어요, 양시은 씨. 제가 준 프로젝트에 대한 방안이 생기긴 했어요?”양시은이 막 대답하려고 할 때 단미주는 새로 바꾼 네일아트를 자랑이라도 하듯 손을 휘저으며 멋대로 말을 가로챘다.“방안이 생기지 않아도 상관없어요. 저도 일부러 사람 난감하게 하는 악취미는 없어서요.”양시은은 어이가 없다 못해 웃음이 터질 것만 같았다.“단미주 씨는 정말 본인이 요구한 조건들이 사람을 난감하게 만들지 않았다고 생각하나요?”“당연하죠.”단미주는 비웃음과 함
양시은은 커다란 장미꽃 다발을 보고는 물었다.“도현 씨는 이미 알고 있었던 거지?”“그래서 꽃다발도 준비했는데 한 번만 봐주면 안 될까?”나도현은 자상하게 웃으며 양시은에게 말했다. 업무 중일 때는 그토록 차가운 사람에게 이렇게나 다정한 모습이 있을 거라고는 감히 상상하기 어려울 것이다.얼마 후 양시은은 나도현의 손에 들린 꽃다발을 받아 들고 말했다.“할 수 없지 뭐...”양시은이 아직 뽀로통한 걸 본 나도현은 고개를 돌려 또 살짝 웃어 보였다.하민은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는 손가락 틈새로 둘을 훔쳐보았다.온지유는 일부러 목을 가다듬고 말했다.“두 사람 사이가 여전히 좋은 건 잘 알겠어요. 아무리 그래도 저희까지 찬밥신세로 만들어야 하겠어요? 지금 먹지 않으면 음식도 다 식을 것 같으니까 빨리 앉아요.”양시은은 하민을 챙겼고 그제야 함께 서 있던 사람들도 모두 앉아서 식사를 시작했다.가정부가 보이지 않자 양시은은 이 많은 음식을 누가 준비했는지 궁금해져 몇 번 더 두리번거리다가 온지유에게 물었다.“지유 씨가 이 음식들을 모두 준비한 거예요?”온지유는 별이에게 음식을 집어다 주며 고개를 끄덕였다.“일부는 제가 했어요. 그리고 나머지 일부분은 시은 씨 남편이 준비한 거예요.”그러고는 손으로 나도현을 가리켰다.양시은은 믿기 힘들다는 얼굴로 물었다.“오늘 온종일 회사에 있지 않았어?”나도현은 많이 해본 듯 익숙한 손놀림으로 양시은에게 국을 퍼주고는 대답했다.“일부는 사전에 준비해야 하는 것들도 있어. 그래서 내가 특별히 세프님도 찾아가서 어떻게 하는지 배워왔단 말이야. 그리고 미리 해서 냉장고에 숨겨뒀지.”양시은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입만 뻐끔거릴 뿐이었다. 마음속으로는 감동이 밀려왔지만 그와 동시에 웃음이 터질 것 같기도 했다.양시은은 자칫 자신도 잊어버릴 뻔한 생일을 그들이 자기 몰래 이렇게나 정성 들여 준비해준 게 고마웠다.아무래도 양시은이 꽤 오랫동안 생일을 챙기지 않은 탓에 그 감동이 더 큰 것 같았다.그건 그렇
초안을 한참 동안 들여다보던 나도현은 뻐근한 눈을 비비고는 이내 눈을 뜨고 양시은을 향해 웃어 보였다.“작은 문제들이 있는 거 빼고는 전반적으로 참 괜찮은 초안이야.”양시은은 바로 고쳐야 할 점들을 물어보았다. 그 모습은 마치 공부를 사랑하는 학생 같았다.그리고 양시은의 선생님이라고 봐도 무방한 나도현 역시도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것을 자신의 학생에게 아낌없이 전수해주었다.둘은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오후 내내 초안을 토론했다.양시은은 만족스러운 피드백을 얻어내고 나서야 아직 완성되지 않은 초안을 들고 곧장 수정하러 달려갔다.양시은은 그렇게 꼬박 저녁까지 초안을 수정했다.일을 마친 나도현은 아직도 컴퓨터 앞에서 고개를 박고 초안 수정하기에 여념이 없는 양시은을 발견하고는 난감한 듯 이마를 짚었다. 그리고는 손을 뻗어 양시은을 자리에서 일으켰다.양시은은 갑자기 붕 뜬 상반신에 놀라 얼떨떨해했다.“뭐 하는 거야, 도현 씨. 난 아직 일이 남았단 말이야.”나도현은 손목시계를 가리키며 말했다.“지금이 몇 신지 직접 봐.”양시은은 시간을 확인하자마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탓에 하마터면 나도현과 부딪칠뻔했다.“하민아!”순간 놀라서 이마를 탁 친 양시은은 뒤늦게 이미 가정부에게 대신 하민이를 데리러 가달라고 부탁했던 것이 생각났다.양시은의 기색을 확인한 나도현은 굳이 묻지 않아도 양시은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결국 나도현은 난감하단 듯이 말했다.“하민이를 데리러 가지 않아도 퇴근은 해야지. 무작정 야근한다고 내가 야근 수당을 챙겨주는 것도 아니잖아.”말을 끝낸 나도현은 무 뽑듯 양시은을 의자에서 일으켰다.양시은은 회사를 떠나면서 이처럼 미련이 뚝뚝 떨어지기는 처음이었다.(그 사람의 초안이 거의 다 완성됐는데...)하지만 양시은을 퇴근시키려는 나도현의 태도는 굳건했다.출퇴근 시간이라 돌아가는 길에 차가 막혔다.양시은은 그다지 일에 집착하는 타입이 아니었기에 미처 끝내지 못하고 퇴근한 일에 대한 미련은 진작에 없어진
나도현은 그저 한쪽에 두었던 기획서를 빼갈 뿐이었다.자신이 오해했음을 깨달은 단미주는 머쓱함을 숨기려 애써 진정하며 나도현이 움직임을 슬쩍 살피고는 말했다.“이 프로젝트는 원래부터 도현 씨에게 맡기려고 했던 거니까 프로젝트를 받아들일지 아닐지만 말해줘요!”양시은은 나도현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다만 양시은은 아침부터 찾아와 시비를 걸고 대놓고 불만을 드러낸 단미주의 뜻대로 일이 흘러가게 내버려 두고 싶지 않았을 뿐이다.제멋대로인 사람에게 조금의 틈도 허락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하지만 나도현은 양시은을 한번 보고는 입꼬리가 휘게 웃으며 그녀를 달래듯 말했다.“제 생각엔 가능할 것 같아요.”그 말은 양시은에게 하는 말이었다.하지만 단미주는 자신에게 하는 말인 줄 알고 아까의 울분은 금방 잊어버리고 의기양양하게 말했다.“양시은 씨 들었죠? 도현 씨가 당신 직속 상사인 것도 맞죠? 직속 상사도 받아들인 마당에 당신이 더 할 말은 없겠죠?”단미주는 이미 자신이 양시은의 갑이라도 된 것처럼 의기양양한 모습이었다.비록 사실이기는 했으나 콧대 높은 모습이 퍽 얄미운 것만은 사실이었다.양시은이 작게 미간을 찌푸렸을 때 나도현은 단미주를 보며 입을 열었다.“단미주 씨, 제가 이 프로젝트를 맡을 수 있다고 해서 단미주 씨가 나진 그룹에서 멋대로 행패를 부려도 된다는 뜻은 아닌데요. 그러니 제 비서에게도 예의를 갖춰주세요. 그러지 않으면 사람을 불러 단미주 씨를 이곳에서 끌어낼 수도 있으니까 조심해주세요.”단미주는 충격을 받은 듯 입을 뻐끔거리더니 순식간에 낯빛이 어두워졌다.양시은은 나도현 덕분에 꽉 막힌 것 같던 가슴이 조금 전보다 매우 후련해졌고 이 프로젝트를 받아들이는 것도 아까만큼 싫진 않았다.“알겠습니다, 승낙하겠습니다.”양시은은 그렇게 말하며 나도현의 손에서 기획안을 가져왔다.단미주는 양시은과 나도현을 번갈아 가며 보고는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그럼 절 실망하게 하는 일은 없어야 할 거예요, 양 비서님.”단미주가 나가
단미주는 담담히 말했다.“아무도 안 배워줬다면 지금 배우면 되겠네요. 전에 서비스업 할 때 어땠는지 잘 알잖아요. 이제 나도현 씨랑 결혼했다고 태도를 바꾸겠다는 거예요? 사람은요, 초심을 버리면 안 되는 거예요.”나도현은 클럽 안까지 따라오려고 했다. 하지만 양시은이 거절하고 그를 밖에 세워뒀다. 그걸 모르는 단미주는 그녀 혼자 있는 게 만만해 보였는지 처음부터 줄곧 막말을 쏟아냈다.“단미주 씨, 제가 오늘 왜 여기 왔을 것 같아요?”양시은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며 예리한 시선으로 단미주를 바라봤다.단미주는 비웃는 표정으로 대꾸했다.“제가 그것도 알아야 해요? 여기 온 이상 똑똑히 기억해요. 저는 갑이고, 양시은 씨는 을이에요.”갑과 을이라는 표현에 양시은은 피식 웃음이 터졌다.“협력이 성사됐나요? 제가 협력 얘기는 없던 거로 하자면 어떡할 건데요. 저도 단미주 씨랑 꼭 협력해야 한다는 의무는 없어요.”양시은은 단미주의 거만한 태도가 못마땅했다. 단미주가 조금은 자중하다가 협력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뒤에야 빈정대려나 싶었는데, 예상과 달리 시작부터 전혀 자제할 마음이 없어 보였다.그렇다면 양시은도 더 이상 배려할 필요가 없다.“협력할 마음이 없는 것 같으니, 저도 여기 있을 이유가 없겠어요. 단미주 씨, 앞으로 저를 계속 괴롭히려 든다면 저도 가만있지 않을 거예요. 퇴로는 마련하고 이러는 건지 모르겠네요.”그 한마디를 남기고, 양시은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방을 나섰다. 그런데 문을 나서려던 찰나 나도현이 문간으로 들어서는 게 보였다.그의 시선은 아주 날카로웠다. 양시은은 그가 분명 단미주에게 따지러 왔다는 걸 직감했다.얼마 전 연회장에서, 나도현은 단미주를 크게 문제 삼지 않고 넘어가 줬다. 하지만 단미주는 전혀 자중하지 않고 또다시 양시은을 건드렸다.나도현은 입가에 냉소를 띠었다.“협력이라는 것도 결국 내 아내를 곤란하게 하려는 속셈 아니었나요? 근데 왜 이어가지 않아요?”단미주는 그가 밖에서 기다리고만 있으리라 생각했지, 직접
그날 연회장에서, 사람들은 나도현이 바로 옆에 있는데도 대놓고 양시은을 무시했다. 하물며 그가 없는 틈을 노려 양시은에게 험한 말을 하는 건 말할 것도 없었다.나도현은 양시은의 손을 꼭 잡으며 부드러운 눈빛을 보냈다.“우리 예전에 얼마나 힘들었는지 알잖아. 이제 겨우 함께하게 됐는데 내가 널 지키고 싶은 마음도 알아줘. 무슨 일을 겪든 나한테 꼭 말해 줘. 말 안 해주면 내가 모르고 지나갈 테고, 그럼 너 혼자서 괜한 고생할 거잖아.”차분하고도 따뜻한 나도현의 목소리가 귀에 맴돌았다.양시은은 고개를 끄덕였다.“알았어. 네 마음 다 알고 있어. 그런데 이번 협력은 정말 내 실력을 증명할 기회라고 생각해.”스스로 능력을 입증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그와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을까.양시은은 나도현의 곁에서 누구도 의심하지 못할 당당한 모습을 보여 주고 싶었다.“그 여자랑 협력한다고 해서 뭘 증명할 수 있는데? 시은아, 내가 있으면 굳이...”나도현이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양시은이 손으로 그의 입술을 막았다. 더는 말하지 말라는 뜻이었다.나도현의 생각은 그녀도 알았다. 그래서 조곤조곤 설명하기 시작했다.“단미주 씨는 나를 무시하고 있어. 만약 이번 기회에 단미주 씨의 기를 꺾으면 아무도 날 얕볼 수 없을 텐데, 넌 어떻게 생각해?”양시은의 의도는 너무나 단순하고 직설적이었다.나도현은 그녀의 머리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악감정을 품은 사람의 생각은 쉽게 바꿀 수 없어. 네가 아무리 잘해도 끝없이 딴지를 걸 거야. 넌 그냥 네가 해야 할 일을 잘하면 돼. 굳이 모두를 설득할 필요는 없어.”그의 부모만 해도 양시은에게 엄청난 편견이 있었다. 비록 지금은 편견을 내려놓고 하민에게 관심을 쏟고 있지만 말이다.어찌 됐든 유언비어는 끊임없이 생기는 법이라, 양시은이 모든 공격을 다 막기에는 무리가 있었다.“아니, 난 이미 마음먹었어. 말리지 말아 줘.”양시은은 결심이 확고했다. 나도현도 억지로 막을 수 없음을 잘 알았다.“그래. 그렇다면 내가 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