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이는 아직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 사람은 다시 빈정거렸다.“보세요. 부모님은 계속 여동생만 챙기고 있잖아요. 도련님은 신경도 안 쓰는 거 같은데요.”그 사람의 말투는 명백히 악의적이었다.그때 김혜연이 다가와 별이를 옆으로 데리고 가며 단호히 말했다.“이보세요, 이런 식으로 말하는 건 좀 아니죠. 지유 씨와 이현 씨는 두 아이를 다 사랑해요. 그러니 함부로 말하지 마세요.”그 사람은 김혜연을 위아래로 훑어보며 비웃듯 말했다.“당신은 여 대표님의 부인도 아니잖아요. 그분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어떻게 알겠어요? 딸을 더 예뻐한다는 건 다 아는 사실이잖아요. 별이 도련님이 태어났을 때 이렇게 큰 잔치를 열었나요? 전 본 적 없는데요.”별이는 차분히 웃으며 말했다.“아주머니가 못 봤다고 해서 없었다는 건 아니죠. 그리고 아주머니는 우리 부모님이 아니니까 부모님이 절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 리 없잖아요.”김혜연은 몰래 별이를 칭찬하며 엄지를 들어 보였다.하지만 그 사람은 포기하지 않고 뭔가 더 말하려 했지만 별이가 먼저 말을 끊으며 말했다.“아주머니, 부모님이 아주머니를 별로 사랑하지 않았던 거 같네요. 그래서 이런 생각을 하는 거겠죠. 하지만 오늘은 좋은 날이니, 기분 좋게 술이나 한 잔 더 하세요.”그 말을 끝내고 별이는 김혜연의 손을 잡고 온지유와 여이현 부부에게 걸어갔다.김혜연은 조용히 온지유에게 방금 있었던 일을 이야기했다.온지유는 별이의 반응에 감탄하며 말했다.“별이가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이 남편을 닮아가네요. 이 아이도 커서 또 하나의 여이현이 되겠어요.”그때 연회장의 음악이 울리며 주최 측의 인사가 시작될 시간이 되었다. 별이는 음료잔을 내려놓고 여이현을 불렀다.“아빠, 제가 해도 될까요?”온지유는 여이현의 팔을 살짝 잡아당기며 별이에게 맡기라고 했다.여이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조용히 말했다.“우리 아들 정말 멋져졌구나.”별이는 미소를 지으며 마이크를 들고 무대 위로 올라갔다.“여러분, 오늘은 제 여동생의 백일
배진호와 권다솔은 저번의 일을 겪으며 깊은 신뢰를 쌓아왔다.감정을 확인한 두 사람은 연인이자 동료로서 함께 일하며 특별한 관계를 이어갔다.연인 사이는 적절한 거리가 중요하다고들 한다.너무 멀면 그리움이 생기고 너무 가까우면 다툼이 생긴다고 하지만 배진호와 권다솔은 함께 문제를 해결하며 큰 다툼 없이 지내왔다.퇴근 후에는 같이 식사하거나 영화를 보고 때로는 함께 출근하며 서로에게서 편안함을 느꼈다.배진호는 자신의 나이와 책임을 생각하며 권다솔에게 확실한 약속을 해야 할 때라고 느꼈다.그녀를 사랑하는 만큼 그녀에 대한 책임도 지고 싶었다.현장에서는 사람들이 기쁨에 넘쳐 외쳤다.“배 비서는 대표님과 함께 오랜 세월 동안 가족 같은 존재였어요. 배 비서의 능력은 여기에 있는 모두가 아는 사실이죠!”“맞아요, 배 비서의 능력은 모두가 인정하죠! 이런 경사스러운 날에 정말 어울리는 일입니다!”“대표님의 가장 든든한 왼팔과 오른팔이 부부가 된다니 정말 축하할 일이에요!”“두 사람의 행복을 위해 건배합시다!”...배진호는 전부터 권다솔에게 청혼할 생각이 있었지만 업무가 바쁜 나머지 타이밍을 놓치고 있었다.오늘처럼 많은 사람이 모인 특별한 날에, 그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기로 했다.권다솔은 여이현의 중요한 날에 주목을 빼앗고 싶지 않았지만 배진호는 이미 무릎을 꿇고 반지를 들고 있는 상황이었다.이 자리에서 거절하는 것은 그를 난처하게 만들 뿐이라고 생각했다.결국 권다솔은 부드럽게 손을 내밀며 말했다.“네, 받아들일게요.”배진호는 환하게 웃으며 반지를 그녀의 손가락에 끼워 주었다.그 모습은 사진으로 남겨졌고 곧 인터넷에 퍼져 많은 사람들의 축복과 부러움을 받았다.그러나 권다솔의 아버지인 권용민은 이 결혼에 대해 탐탁지 않게 생각했다.백일 잔치를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 권용민은 두 사람의 앞을 막아섰다.그의 표정은 어두웠고 권다솔은 그런 아버지의 뜻을 이미 알고 있었다.그녀는 배진호와 함께 있는 것이 행복했고 청혼을 받아들인 지금 가족이
권용민은 깊고 날카로운 눈빛으로 배진호를 쏘아보듯 바라보며 말했다.“진호 씨가 아무리 성공했어도 결국은 남의 밑에서 일하는 사람일 뿐이죠. 내 딸은 최고의 것을 누릴 자격이 있습니다. 다솔이가 경험을 쌓고 싶어 했다고 해서 그저 평범한 사람으로 여겨선 안 돼요.”권용민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그의 말은 매우 공격적이었다.배진호는 여이현 곁에서 오랜 시간 동안 자신의 능력을 증명하며 존경받아 왔다. 많은 사람들이 여이현과의 관계를 이유로 그를 존중했고 그의 뛰어난 능력 또한 경외의 대상이었다.여이현처럼 까다로운 기준을 가진 사람 곁에 남아 있는 것은 능력이 탁월한 자들만 가능한 일이었다.그러나 권용민의 앞에서 배진호는 모든 것이 무의미해 보였다.배진호는 조용히, 그러나 단호히 말했다.“아버님, 제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제 직업이 다솔 씨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하실 수도 있다는 것도요. 하지만 저는 다솔 씨를 진심으로 사랑합니다. 다솔 씨가 입사했을 때부터 저는 다솔 씨의 신분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저희는 각자의 능력으로 이 자리에 올랐습니다. 만약 직업이 문제라면 제 회사를 설립할 수도 있지만 지금의 제가 있기까지는 모두 대표님 덕분입니다. 그래서 될수록 이 자리를 지키고 싶습니다. 이 일을 포기한다는 것은 제 자신을 부정하는 것과도 같습니다.”그의 말은 단호했으며 은혜를 배신하지 않겠다는 의지가 강하게 보였다.게다가 지금 여이현은 아이와 온지유에게 집중하고 있어 배진호와 권다솔이 모두 떠난다면 큰 손실을 입을 것이 분명했다.권용민은 차갑게 말을 이었다.“지금 당장 내 앞에서 전업하겠다고 한다 해도 딸을 내줄 생각은 없습니다.”그는 권다솔을 날카로운 눈빛으로 보며 덧붙였다.“이제 충분히 놀았으면 집으로 돌아와라. 내가 직접 나서서 너를 데려가고 싶지는 않다.”그 말을 남기고 권용민은 뒤돌아보지 않고 떠났다.비록 강제로 딸을 데려가진 않았지만 그의 생각과 입장은 명확히 전달되었다.권다솔은 배진호를
권다솔은 배진호를 가볍게 안고 말했다."제가 여진 그룹에 온 건 스스로를 성장시키고 싶어서였어요. 진호 씨 도움 덕분에 정말 많이 배웠지만 언젠가 저는 이 회사를 떠날 거예요. 진호 씨, 저는 진호 씨가 더 멋진 사람이 되길 바라요. 누군가의 그림자에 가려진 채로 살지 않길 바란다는 뜻이에요. 이해하죠?"그녀는 단지 배진호가 더 나은 삶을 살길 바랐던 것뿐이다. 물론 그가 남기로 고집한다면 그녀가 더 이상 관여하지 않을 것이다.하지만 사람이라면 더 높은 곳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 그럴 수 있는 자리에 서 있는데 왜 낮은 곳에 머물러야 하겠는가?“알겠어요. 하지만 다솔 씨, 저는 평생 대표님을 따를 겁니다. 아버님 쪽은 제가 잘 설득해 볼게요. 아버님이 끝내 반대한다면...”배진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권다솔은 단호한 표정으로 돌변했다."진호 씨, 진호 씨는 경험도 많잖아요. 아버지가 안 된다고 하면 정말 안 되는 거예요?"권다솔은 화가 치밀었다.그렇게 힘든 순간도 함께 버텨냈는데 이제 와서 아버지의 반대 때문에 배진호는 포기하려는 거란 말인가.만약 정말 포기한다면 그들 사이의 감정은 너무나도 하찮은 것이 되고 말 것이다.배진호는 한숨을 쉬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안 된다는 뜻이 아니에요. 아버님이 우리를 허락하도록 최선을 다할 겁니다. 하지만 끝까지 반대한다면 다솔 씨를 억지로 붙잡거나 혼인신고를 강행할 수는 없어요. 그런 건 옳지 않잖아요."그는 축복받지 못한 사랑을 하고 싶지 않았다. 또 모두가 반대하는 결혼식은 더더욱 원하지 않았다.권용민의 말대로 권다솔은 더 나은 대우를 받을 자격이 있었다.권다솔은 화가 나면서도 웃음이 났다."반대한다고요? 기정사실화라는 건 몰라요? 아이가 생기면 반대할 방법도 없어질 거예요.""그렇겠죠. 하지만 나는 그런 일을 할 수 없어요. 만약 내 딸이 누군가에게 그렇게 끌려가고 마음에 들지 않는 남자의 아이를 가졌다면 나도 정말 분통이 터질 거니까요."배진호는 그렇게 말하며 권다솔의 어깨를 단단히
배진호가 백일잔치에서 청혼했기에 여이현은 아주 잘 기억하고 있었다.배진호와 권다솔은 그의 왼팔과 오른팔이었을 뿐 아니라 믿을 만한 부하직원이었다.“아마 결혼하지 못할 것 같아요.”배진호는 여이현에게 솔직하게 말했다.여이현은 바로 눈치를 챘다. 권다솔의 집안에서 배진호와의 결혼을 반대하고 있다는 것을. 반면 배진호의 집안에서는 오히려 결혼을 재촉하고 있었다. 여하간에 배진호도 나이를 먹을 만큼 먹었으니까.여이현은 그런 배진호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열심히 노력하면 언젠가 할 수 있을 거예요. 일단 휴가를 줄게요. 먼저 권다솔 씨 마음부터 완전히 얻고 장인어른이 그쪽 집안 사업을 이으라고 하면 가요. 여긴 내가 다른 비서를 새로 또 뽑으면 되니까. 여하간에 배 비서 인생보다 중요한 일은 없잖아요.”여이현은 진심을 담아 말했다. 배진호는 그와 오랫동안 같이 일을 해온 사람이었다. 대충 계산을 해보아도 10년은 훌쩍 넘었다.배진호는 그의 비서였을 뿐 아니라 친구이자 형제, 가족 같은 사람이었다.배진호에게 더 좋은 선택이 있다면 그는 축복해줄 뿐 아니라 배진호를 도와줄 마음도 있었다.애당초 그가 바라던 일에 배진호의 도움이 없었다면 완성할 수조차 없었을 것이다.“대표님, 전 이미 대표님 곁에서 평생 일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그런 제가 만약 사직서를 낸다면...”배진호는 마음이 무거워졌다.여이현은 나직하게 웃었다.“배 비서가 행복해지는 길이라면 난 괜찮아요. 오히려 기쁘기만 한데 내가 왜 배 비서가 날 배신했다고 생각하겠어요? 그리고 내 곁에서 일한 게 어디 하루 이틀도 아니잖아요. 배 비서, 배 비서가 사직한다면 물론 나도 처음엔 많이 힘들겠죠. 그래도 세상엔 인재가 많잖아요. 배 비서처럼 일 잘하는 비서로 새로 뽑거나 키우면 되는 거지만 행복해질 기회는 많지 않아요.”그는 배진호 없이 일을 못 하는 것은 아니었다. 물론 그도 배진호가 곁에 남아주길 바랐지만, 자신의 이기적인 마음으로 배진호의 행복을 방해할 수는 없었다.“가요. 배 비서가
김영은은 배진호가 이렇듯 단호할 줄은 몰랐다.그럼에도 그녀는 배진호에게 분명하게 말했다.“배진호 씨, 만약 배진호 씨가 한 아이의 부모라면 이미 성공을 이룬 사위와 창업을 시도하고 있는 사위 중 누굴 선택하겠어요?”“전 전자를 선택할 겁니다. 하지만 어머님, 전 그래도 제게 한 번만이라도 기회를 주셨으면 합니다. 전 쓸모없는 사람은 아니거든요.”배진호는 단정한 자세로 김영은 앞에 서 있었다. 그래서인지 유난히도 확고해 보였다.그는 여러 방면에서 유능한 인재였다.특히 그의 일거수일투족에선 상인의 기질이 보였고 왕자의 기품도 느껴지기도 했다.여하간에 여이현의 곁에서 10년을 넘게 일한 사람이었으니 어쩌면 당연했다.하지만 배진호와 여이현을 비길 수는 없었다. 여이현의 등 뒤로 여진 그룹이 있었을 뿐 아니라 온지유의 친부와 여이현의 친부 또한 높은 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이었다.여이현이 아무리 배진호를 가족처럼 여긴다고 해도 배진호는 그저 비서일 뿐이다.여진 그룹을 배진호에게 넘겨줄 리도 없었다. 배진호는 여이현의 은혜를 입고 성공을 한다고 해도 절대 여이현을 공격하는 어떠한 짓도 하지 않을 것이었다.다정 그룹은 경성의 일인자 자리를 노리고 있었다.배진호는 아무런 뒷배경도 없었고 지위도 없었다. 그들에게 도움이 되어주지도 못하는데 굳이 왜 이런 그를 사위로 받아들이겠는가.그렇다고 해서 배진호에게 자선 사업을 할 수는 없지 않은가. 모든 걸 배진호에게 넘길 수도 없었다. 넘기는 순간 여진 그룹과 합쳐질 가능성이 있으니까.김영은도 원래 이런 말을 꺼내고 싶지 않았으나 해야 할 것 같았다.그녀는 차갑게 말했다.“다솔이를 사랑하는 것 외에 가진 게 뭐가 있죠? 그동안 여진 그룹을 위해 충성을 다 한 거? 하지만 우리 다솔이는 어릴 때부터 귀하게 자랐어요. 좋은 것만 먹고, 좋은 것만 입고, 좋은 것만 보고 자랐다고요. 권씨 집안에서 누린 모든 것이 배진호 씨와 함께 사는 것보다 좋을 거예요.”“배진호 씨, 그래도 포기가 되지 않는다면 나랑 다솔이
심지어 김영은은 권다솔을 혼내기도 했다.“이미 선 자리 알아봤으니까 집안에 얌전히 있어. 이따가 맞선 상대가 집으로 올 거야. 네 아빠 심기를 거슬러서 또 집에 갇혀 지내고 싶지 않은 거라면 얌전하게 있는 게 좋을 거야!”소파에 앉은 김영은은 엄격한 눈빛으로 그녀를 보았다. 그 기세는 엄청났다.이때 아픈 척하고 있던 권용민이 나왔다.“네 엄마도 마음이 약해져서 그 자식을 집안까지 들인 거야. 만약 나였으면 곱게 돌려보내지 않았을 거라고. 계속 포기하지 않을 거라고 하면 사람을 불러 쫓아냈을 거야!”권다솔은 숨 막혔다.자신의 부모님의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올 거라곤 전혀 상상도 못 했다.그녀의 부모님은 늘 다정하고 지식이 많은 사람이었다. ‘성공한 사람' 같은 단어가 그들의 입에서 나올 줄 몰랐다. 심지어 억지로 맞선 자리까지 만들다니.대체 그녀를 뭐로 생각한 걸까?상품처럼 팔아버리려는 걸까?권다솔은 자조적으로 말했다.“우리 가문이 크면 얼마나 크고 재산이 많으면 얼마나 많다고요. 대체 언제쯤이 되어야 만족하실 건데요. 대체 언제 욕심을 그만 부릴 건데요?!”“여이현은 경성 일 인자예요. 차라리 여이현을 사위로 맞이하시지 그래요?”권다솔은 이성을 잃고 말았다. 하지만 그녀의 탓이라곤 할 수 없었다. 여하간에 그녀의 부모님이 먼저 심한 말을 했으니까.그녀의 부모님은 그녀의 말대로 여이현을 사위로 맞이할 생각도 한 적 있었다. 하지만 여이현에겐 이미 아내가 있었고 여이현은 가정에 충실했을 뿐 아니라 아내를 너무도 사랑했기에 그들에겐 방법이 없었다.권다솔은 두 사람의 눈빛에서 모든 걸 눈치채게 되었다. 순간 모든 것이 가소로웠다.“저더러 굳이 여진 그룹의 비서로 입사하라고 했던 게 이제야 이해가 가네요. 두 분 모두 그런 생각을 하고 있으셨던 거네요!”어떻게든 여이현의 곁에 붙어야 가망이 있을 수 있었으니까.“여이현은 유부남이에요. 아이도 있는 사람인데 괜찮으신 거예요? 아이까지 딸린 유부남도 사위로 받아들일 수 있으면서 왜 어떻게든 노
권용민은 가슴을 움켜쥐었다.“다솔아, 그 자식을 위해 지금 목숨으로 우리를 협박하는 거냐?”김영은은 순간 불안해졌다.“다솔아, 네 아빠 몸 안 좋은 거 알잖니. 얼른 그 칼을 내려놔. 네 아빠 화나게 하지 마. 그러다 쓰러져!”권다솔은 과도를 내려놓지 않았다. 오히려 피식 웃었다.“엄마는 항상 제게 아빠 화나게 하지 말라고, 상처받게 하지 말라고 하시네요. 그럼 두 분은요? 두 분이 저한테 상처 줬다는 생각은 안 해보셨어요? 전 지금까지 늘, 계속 얌전하게 지냈어요. 두 분이 원하는 대로 하면서 두 분을 만족시켜드리려고 노력했죠.”“여진 그룹 비서 일도 말이에요. 두 분은 제게 다른 사람처럼 직장인 체험도 해봐야 한다고 하시면서 보냈죠. 하지만 그 결과는 어떻게 됐는데요?”“학교 다니면서도 전 연애 한 번 못 해 봤어요. 남자친구 사귀어 보려고 노력도 안 해봤죠. 이제 겨우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는데, 진호 씨가 저한테 얼마나 잘해주는데, 대체 왜 반대하시는 거죠?”“배진호 씨가 엉망인 사람은 아니잖아요. 아닌가요?”만약 배진호가 엉망인 사람이었다면 여이현도 그를 비서로 뽑을 리도 없고 10년 넘게 곁에 두고 함께 일하지도 않았을 것이다.배진호는 아주 능력 있는 사람이었다. 업계에서도 어떻게든 배진호를 자신의 회사로 빼앗아 오려고 하기도 했었지만, 배진호는 전부 거절했다.그는 여이현에게만 뚝심 있게 충성을 다했다.이런 사람을 두 사람은 왜 믿지 않는 것일까?여이현이 사라진 5년 동안에도 배진호가 여진 그룹을 관리하고 있었다. 하지만 배진호는 그 5년 동안 단 한 번도 여진을 탐낸 적도 없었고 배신한 적도 없었다.배진호에겐 따라 배울 점이 많았다.김영은은 권다솔의 목에서 흐르는 피를 보았다. 순간 가슴이 덜컥 내려앉으며 긴장해졌다.“얼른 내려놔. 배진호 씨도 엉망인 사람이 아니야. 나랑 네 아빠는 네가 더 좋은 사람과 결혼해서 행복하게 살길 바랄 뿐이었어.”“하지만 두 분은 돈이 많은 사람이 더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계시잖아요.
대신 일을 해줄 사람이 넘쳐나는데 뭐하러 본인이 고생하냐는 식으로 말하는 박은희에 나도현은 그저 씁쓸하게 웃을 뿐이었다.“어머니, 시은이 몸 상태도 고려해주셔야죠. 시은이가 최근 4년간 하민이를 위해서 밤낮없이 일만 해온 거 어머니도 잘 아시잖아요. 저랑 같이 살게 된 지도 얼마 안 됐는데 여유를 즐길 틈도 없이 또 덜컥 아이를 가져서 힘들게 하고 싶지 않아요. 어머니도 여자니까 임신과 출산의 고생을 누구보다도 잘 아실 거 아니에요.”나도현의 그 한마디에 박은희도 할 말이 없었다.나도현은 박은희가 조금 망설이는 것 같아 냉큼 말을 이어갔다.“만약 하민이가 혼자라서 외롭다고 하면 당연히 둘째든 셋째든 낳을 테니까 그 점은 시름 놓으세요. 하지만 시은이와 저의 계획을 물으신다면 그건 그냥 순리에 맡기고 싶어요.”“알겠어, 그럼 너희 뜻대로 해.”박은희는 나도현이 이렇게까지 말한 이상 더 밀어붙였다간 양시은은 안중에도 없는 것처럼 보일까 봐 더 말하지 않기로 했다.그제야 박은희는 은근히 걱정됐다.“내가 이렇게 급해 했다고 시은이가 또 오해하진 않겠지?”“그럴리가요. 시은이는 어머니 마음을 이해할 거예요. 그뿐만 아니라 어머니가 그런 사람이 아니란 것도 잘 알고 있을 거예요.”나도현이 박은희의 어깨를 토닥이며 별다른 말도 하지 않았을 때 양시은이 박은희를 향해 걸어왔다.양시은이 자신에게 미소를 짓는 것을 보자 박은희는 그제야 무겁게 가라앉았던 마음이 가벼워지는 것 같았다.박은희는 나도현에게 넌지시 말을 건넸다.“넌 시은이를 데리고 밖에 나가서 바람을 좀 쐬고 들어와. 회사 일은 절대 걱정하지 말고 둘만의 시간을 좀 보내. 네가 그랬잖니, 그동안 고생을 너무 많이 했다고. 그러니까 이제는 정말 아무 생각 없이 현재를 즐겨.”“알겠어요.”나도현은 대답과 함께 양시은에게 다가갔고 둘은 알게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함께 올라갔다.양시은이 단미주와 합작한 프로젝트로 인해 업계의 많은 사람은 양시은을 다시 볼 것이다.양시은은 그 결과에 대해
하민은 박은희와 함께 지낸 지 3년이나 되었고 이 집에서 제일 친한 사람이었다.하지만 하민은 어릴 때부터 아버지의 사랑을 갈망했다.그래서 양시은과 나도현은 퇴근하는 대로 집으로 돌아와 하민과 함께 시간을 보내기로 한 것이다. 가끔 학부모의 참여가 필요한 활동은 함께 참여하기도 했다.“하지만 너희들도 보다시피 하민이도 나를 잘 따르고 나도 시연이 널 도와서 아이를 잘 돌봐주잖니. 지금 너랑 도현이도 시간이 있고 하민이도 학교에 다니니까 내가 돌봐줄 수 있을 때 딱 둘만 더 낳는 건 어떠니? 그럼 우리 집안도 더 복작거리고 좋을 것 같은데 말이야.”양시은이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라 망설이고 있을 때 나도현이 말을 가로챘다.“싫다는 게 아니에요. 다만 저랑 시은이는 아직은 하민이만 생각하고 있어요. 우리 아이 일은 나중에 더 말하는 거로 해요.”나도현은 하민이 한 명에게도 제대로 된 사랑을 못 주고 있는데 둘째까지 낳아버리면 하민이가 원래도 부족했던 사랑을 나눠줘야 할 것처럼 느낄까 봐 걱정됐다.“왜? 너희 둘 중에 누가 아프기라도 한 거야?”박은희는 말은 그렇게 해도 눈길은 이미 나도현에게 향해있었다.양시은은 이미 하민이를 낳았기 때문에 문제가 없으리라 판단했기 때문이다.박은희의 시선을 느낀 나도현은 어쩔 수 없이 말을 이어갈 수밖에 없었다.“맞아요, 제 몸에 문제가 생겼어요. 최근 4년간 병원에 다니고 있었고 일도 바빠서 제 정자 생존율이 엄청나게 낮아졌어요.”그 말을 들은 박은희가 침착할 리 없었다.박은희는 당장 나용민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당신이 기를 쓰고 도현이에게 회사를 물려주려고 부담을 주니까 도현이 몸이 망가졌잖아요. 지금 당장 회사 업무를 이어받아서 책임지고 도현이 좀 푹 쉬게 해줘요. 국가 정책도 개방된 마당에 애가 하나밖에 없는 게 말이 돼요?”박은희에게는 나도현이 유일했다. 애당초 박은희는 나도현이 양시은과 사귈까 봐 온갖 방법을 다 대며 노력을 했지만 결국 나도현은 그런 박은희의 노력을 무시하듯 박은희의 뜻대로
그 순간 양시은은 단미주를 흘겨보았다. 차디찬 양시은의 눈빛이 이미 모든 걸 설명하고 있었다.양시은이 설령 지금 나진 그룹의 비서가 아니라고 해도 대학을 나온 사람인데 PPT 하나 만들 줄 모른다는 게 말이 될 리가 없었다.단미주는 잠시 멈칫하더니 물었다.“그냥 궁금해하는 것도 문제가 되나요?”양시은은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절로 나왔다.이윽고 양시은은 단미주를 회의실 안으로 안내했고 단미주가 그렇게나 기다리던 PPT를 그녀의 눈앞에 보란 듯이 전시해두었다.양시은은 미소를 띠며 단미주에게 물었다.“단미주 씨, 무슨 문제라도 있을까요?”양시은은 단미주와의 합작이 절대 쉽지 않을 것을 직감하고 그녀가 제기할 모든 문제점을 예상해 아주 작은 방면들까지 철저히 준비했다.게다가 그날은 단미주도 나도현에 대한 은근한 마음을 드러냈었지만 나도현은 양시은 때문에 단미주에게 더는 반응을 하지 않은 것이었다.단미주도 양시은이 자신을 통해 양시은이라는 사람을 증명하고 싶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단미주는 양시은이 얼마나 문제를 전면적으로 바라보는지를 깨달았고 덩달아 양시은이 훌륭한 여자라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단미주는 양시은의 치밀함에 진심으로 탄복하였고 마침내 나도현이 왜 양시은을 선택했는지도 알게 되었다.“이 프로젝트에 서명할게요. 그리고 앞으로 더는 양시은 씨를 난감하게 하지도 않을게요.”“벗이 늘어나는 건 어떻게 보나 적이 늘어나는 것보단 이득이죠. 단미주 씨도 상당히 능력 있는 사람이에요.”양시은도 그 순간에는 진심으로 단미주를 칭찬하고 있었다. 하지만 단미주는 자신이 결코 양시은의 칭찬을 받을만한 사람이 못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양시은 씨, 그동안 제가 양시은 씨에게 했던 무례한 행동들에 대해 사과할게요.”말을 마친 단미주는 정말로 90도 인사를 하며 사과를 했다.회의실에는 다른 사람들도 있었지만 단미주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단미주 역시 업계에서 꽤 유명한 사람인데 그런 단미주가 양시은에게 고개 숙여 사과하리라고는 그 누구도
나도현은 결코 쉽게 알려주지 않았다. 양시은은 작게 투덜거렸지만 그래도 설레는 마음은 어쩔 수 없었다.비장하게 찾아보라고 말한 것 치고는 그리 깊은 곳에 숨긴 것도 아니었다.막 잠자리에 들려고 할 때 양시은은 침대 밑에서 나도현의 마지막 서프라이즈를 찾아냈다.그건 다름 아닌 사진 한 장이었다.사진 속 양채은과 엄마 문해미가 해외의 유명한 철탑 아래에서 해맑게 웃고 있었다.잠시 얼어붙었던 양시은은 이내 눈시울을 붉히며 목멘 소리로 나도현에게 물었다.“채은이랑 엄마는 어떻게 찾은 거야?”나도현은 양시은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양시은을 반쯤 안은 상태로 사진을 들고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내가 찾은 게 아니야. 정확히 말하면 이 사람들이 날 찾은 거지.”이윽고 나도현이 설명해주었다.그 사진은 바로 어제 받은 산 건너 물 건너온 우편이었다.지금처럼 인터넷이 발전한 시대에 우편을 사용하는 사람은 극히 드물었다. 이미 해외에서 이곳까지 넘어오는데 꽤 오랜 시간이 걸렸을 테니 지금 당장 그곳에 가서 사람을 찾는다고 해도 찾지 못할 게 뻔했다.나도현은 고개를 숙이고 말했다.“내 생각엔 그 사람들이 시은이 네 생일을 기억하고 일부러 시간을 철저히 계산해서 너한테 이 사진을 보낸 것 같아.”나도현의 말을 끝으로 양시은은 사진을 액자에 넣어 침대 머리맡 탁자 위에 세워두었다.양시은은 하루 만에 초안 수정을 마쳤다.철저하게 시간 계산을 마친 단미주가 때마침 하이힐을 도각거리며 나진 그룹에 들이닥쳤다.“어떻게 됐어요, 양시은 씨. 제가 준 프로젝트에 대한 방안이 생기긴 했어요?”양시은이 막 대답하려고 할 때 단미주는 새로 바꾼 네일아트를 자랑이라도 하듯 손을 휘저으며 멋대로 말을 가로챘다.“방안이 생기지 않아도 상관없어요. 저도 일부러 사람 난감하게 하는 악취미는 없어서요.”양시은은 어이가 없다 못해 웃음이 터질 것만 같았다.“단미주 씨는 정말 본인이 요구한 조건들이 사람을 난감하게 만들지 않았다고 생각하나요?”“당연하죠.”단미주는 비웃음과 함
양시은은 커다란 장미꽃 다발을 보고는 물었다.“도현 씨는 이미 알고 있었던 거지?”“그래서 꽃다발도 준비했는데 한 번만 봐주면 안 될까?”나도현은 자상하게 웃으며 양시은에게 말했다. 업무 중일 때는 그토록 차가운 사람에게 이렇게나 다정한 모습이 있을 거라고는 감히 상상하기 어려울 것이다.얼마 후 양시은은 나도현의 손에 들린 꽃다발을 받아 들고 말했다.“할 수 없지 뭐...”양시은이 아직 뽀로통한 걸 본 나도현은 고개를 돌려 또 살짝 웃어 보였다.하민은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는 손가락 틈새로 둘을 훔쳐보았다.온지유는 일부러 목을 가다듬고 말했다.“두 사람 사이가 여전히 좋은 건 잘 알겠어요. 아무리 그래도 저희까지 찬밥신세로 만들어야 하겠어요? 지금 먹지 않으면 음식도 다 식을 것 같으니까 빨리 앉아요.”양시은은 하민을 챙겼고 그제야 함께 서 있던 사람들도 모두 앉아서 식사를 시작했다.가정부가 보이지 않자 양시은은 이 많은 음식을 누가 준비했는지 궁금해져 몇 번 더 두리번거리다가 온지유에게 물었다.“지유 씨가 이 음식들을 모두 준비한 거예요?”온지유는 별이에게 음식을 집어다 주며 고개를 끄덕였다.“일부는 제가 했어요. 그리고 나머지 일부분은 시은 씨 남편이 준비한 거예요.”그러고는 손으로 나도현을 가리켰다.양시은은 믿기 힘들다는 얼굴로 물었다.“오늘 온종일 회사에 있지 않았어?”나도현은 많이 해본 듯 익숙한 손놀림으로 양시은에게 국을 퍼주고는 대답했다.“일부는 사전에 준비해야 하는 것들도 있어. 그래서 내가 특별히 세프님도 찾아가서 어떻게 하는지 배워왔단 말이야. 그리고 미리 해서 냉장고에 숨겨뒀지.”양시은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입만 뻐끔거릴 뿐이었다. 마음속으로는 감동이 밀려왔지만 그와 동시에 웃음이 터질 것 같기도 했다.양시은은 자칫 자신도 잊어버릴 뻔한 생일을 그들이 자기 몰래 이렇게나 정성 들여 준비해준 게 고마웠다.아무래도 양시은이 꽤 오랫동안 생일을 챙기지 않은 탓에 그 감동이 더 큰 것 같았다.그건 그렇
초안을 한참 동안 들여다보던 나도현은 뻐근한 눈을 비비고는 이내 눈을 뜨고 양시은을 향해 웃어 보였다.“작은 문제들이 있는 거 빼고는 전반적으로 참 괜찮은 초안이야.”양시은은 바로 고쳐야 할 점들을 물어보았다. 그 모습은 마치 공부를 사랑하는 학생 같았다.그리고 양시은의 선생님이라고 봐도 무방한 나도현 역시도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것을 자신의 학생에게 아낌없이 전수해주었다.둘은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오후 내내 초안을 토론했다.양시은은 만족스러운 피드백을 얻어내고 나서야 아직 완성되지 않은 초안을 들고 곧장 수정하러 달려갔다.양시은은 그렇게 꼬박 저녁까지 초안을 수정했다.일을 마친 나도현은 아직도 컴퓨터 앞에서 고개를 박고 초안 수정하기에 여념이 없는 양시은을 발견하고는 난감한 듯 이마를 짚었다. 그리고는 손을 뻗어 양시은을 자리에서 일으켰다.양시은은 갑자기 붕 뜬 상반신에 놀라 얼떨떨해했다.“뭐 하는 거야, 도현 씨. 난 아직 일이 남았단 말이야.”나도현은 손목시계를 가리키며 말했다.“지금이 몇 신지 직접 봐.”양시은은 시간을 확인하자마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탓에 하마터면 나도현과 부딪칠뻔했다.“하민아!”순간 놀라서 이마를 탁 친 양시은은 뒤늦게 이미 가정부에게 대신 하민이를 데리러 가달라고 부탁했던 것이 생각났다.양시은의 기색을 확인한 나도현은 굳이 묻지 않아도 양시은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결국 나도현은 난감하단 듯이 말했다.“하민이를 데리러 가지 않아도 퇴근은 해야지. 무작정 야근한다고 내가 야근 수당을 챙겨주는 것도 아니잖아.”말을 끝낸 나도현은 무 뽑듯 양시은을 의자에서 일으켰다.양시은은 회사를 떠나면서 이처럼 미련이 뚝뚝 떨어지기는 처음이었다.(그 사람의 초안이 거의 다 완성됐는데...)하지만 양시은을 퇴근시키려는 나도현의 태도는 굳건했다.출퇴근 시간이라 돌아가는 길에 차가 막혔다.양시은은 그다지 일에 집착하는 타입이 아니었기에 미처 끝내지 못하고 퇴근한 일에 대한 미련은 진작에 없어진
나도현은 그저 한쪽에 두었던 기획서를 빼갈 뿐이었다.자신이 오해했음을 깨달은 단미주는 머쓱함을 숨기려 애써 진정하며 나도현이 움직임을 슬쩍 살피고는 말했다.“이 프로젝트는 원래부터 도현 씨에게 맡기려고 했던 거니까 프로젝트를 받아들일지 아닐지만 말해줘요!”양시은은 나도현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다만 양시은은 아침부터 찾아와 시비를 걸고 대놓고 불만을 드러낸 단미주의 뜻대로 일이 흘러가게 내버려 두고 싶지 않았을 뿐이다.제멋대로인 사람에게 조금의 틈도 허락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하지만 나도현은 양시은을 한번 보고는 입꼬리가 휘게 웃으며 그녀를 달래듯 말했다.“제 생각엔 가능할 것 같아요.”그 말은 양시은에게 하는 말이었다.하지만 단미주는 자신에게 하는 말인 줄 알고 아까의 울분은 금방 잊어버리고 의기양양하게 말했다.“양시은 씨 들었죠? 도현 씨가 당신 직속 상사인 것도 맞죠? 직속 상사도 받아들인 마당에 당신이 더 할 말은 없겠죠?”단미주는 이미 자신이 양시은의 갑이라도 된 것처럼 의기양양한 모습이었다.비록 사실이기는 했으나 콧대 높은 모습이 퍽 얄미운 것만은 사실이었다.양시은이 작게 미간을 찌푸렸을 때 나도현은 단미주를 보며 입을 열었다.“단미주 씨, 제가 이 프로젝트를 맡을 수 있다고 해서 단미주 씨가 나진 그룹에서 멋대로 행패를 부려도 된다는 뜻은 아닌데요. 그러니 제 비서에게도 예의를 갖춰주세요. 그러지 않으면 사람을 불러 단미주 씨를 이곳에서 끌어낼 수도 있으니까 조심해주세요.”단미주는 충격을 받은 듯 입을 뻐끔거리더니 순식간에 낯빛이 어두워졌다.양시은은 나도현 덕분에 꽉 막힌 것 같던 가슴이 조금 전보다 매우 후련해졌고 이 프로젝트를 받아들이는 것도 아까만큼 싫진 않았다.“알겠습니다, 승낙하겠습니다.”양시은은 그렇게 말하며 나도현의 손에서 기획안을 가져왔다.단미주는 양시은과 나도현을 번갈아 가며 보고는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그럼 절 실망하게 하는 일은 없어야 할 거예요, 양 비서님.”단미주가 나가
단미주는 담담히 말했다.“아무도 안 배워줬다면 지금 배우면 되겠네요. 전에 서비스업 할 때 어땠는지 잘 알잖아요. 이제 나도현 씨랑 결혼했다고 태도를 바꾸겠다는 거예요? 사람은요, 초심을 버리면 안 되는 거예요.”나도현은 클럽 안까지 따라오려고 했다. 하지만 양시은이 거절하고 그를 밖에 세워뒀다. 그걸 모르는 단미주는 그녀 혼자 있는 게 만만해 보였는지 처음부터 줄곧 막말을 쏟아냈다.“단미주 씨, 제가 오늘 왜 여기 왔을 것 같아요?”양시은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며 예리한 시선으로 단미주를 바라봤다.단미주는 비웃는 표정으로 대꾸했다.“제가 그것도 알아야 해요? 여기 온 이상 똑똑히 기억해요. 저는 갑이고, 양시은 씨는 을이에요.”갑과 을이라는 표현에 양시은은 피식 웃음이 터졌다.“협력이 성사됐나요? 제가 협력 얘기는 없던 거로 하자면 어떡할 건데요. 저도 단미주 씨랑 꼭 협력해야 한다는 의무는 없어요.”양시은은 단미주의 거만한 태도가 못마땅했다. 단미주가 조금은 자중하다가 협력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뒤에야 빈정대려나 싶었는데, 예상과 달리 시작부터 전혀 자제할 마음이 없어 보였다.그렇다면 양시은도 더 이상 배려할 필요가 없다.“협력할 마음이 없는 것 같으니, 저도 여기 있을 이유가 없겠어요. 단미주 씨, 앞으로 저를 계속 괴롭히려 든다면 저도 가만있지 않을 거예요. 퇴로는 마련하고 이러는 건지 모르겠네요.”그 한마디를 남기고, 양시은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방을 나섰다. 그런데 문을 나서려던 찰나 나도현이 문간으로 들어서는 게 보였다.그의 시선은 아주 날카로웠다. 양시은은 그가 분명 단미주에게 따지러 왔다는 걸 직감했다.얼마 전 연회장에서, 나도현은 단미주를 크게 문제 삼지 않고 넘어가 줬다. 하지만 단미주는 전혀 자중하지 않고 또다시 양시은을 건드렸다.나도현은 입가에 냉소를 띠었다.“협력이라는 것도 결국 내 아내를 곤란하게 하려는 속셈 아니었나요? 근데 왜 이어가지 않아요?”단미주는 그가 밖에서 기다리고만 있으리라 생각했지, 직접
그날 연회장에서, 사람들은 나도현이 바로 옆에 있는데도 대놓고 양시은을 무시했다. 하물며 그가 없는 틈을 노려 양시은에게 험한 말을 하는 건 말할 것도 없었다.나도현은 양시은의 손을 꼭 잡으며 부드러운 눈빛을 보냈다.“우리 예전에 얼마나 힘들었는지 알잖아. 이제 겨우 함께하게 됐는데 내가 널 지키고 싶은 마음도 알아줘. 무슨 일을 겪든 나한테 꼭 말해 줘. 말 안 해주면 내가 모르고 지나갈 테고, 그럼 너 혼자서 괜한 고생할 거잖아.”차분하고도 따뜻한 나도현의 목소리가 귀에 맴돌았다.양시은은 고개를 끄덕였다.“알았어. 네 마음 다 알고 있어. 그런데 이번 협력은 정말 내 실력을 증명할 기회라고 생각해.”스스로 능력을 입증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그와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을까.양시은은 나도현의 곁에서 누구도 의심하지 못할 당당한 모습을 보여 주고 싶었다.“그 여자랑 협력한다고 해서 뭘 증명할 수 있는데? 시은아, 내가 있으면 굳이...”나도현이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양시은이 손으로 그의 입술을 막았다. 더는 말하지 말라는 뜻이었다.나도현의 생각은 그녀도 알았다. 그래서 조곤조곤 설명하기 시작했다.“단미주 씨는 나를 무시하고 있어. 만약 이번 기회에 단미주 씨의 기를 꺾으면 아무도 날 얕볼 수 없을 텐데, 넌 어떻게 생각해?”양시은의 의도는 너무나 단순하고 직설적이었다.나도현은 그녀의 머리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악감정을 품은 사람의 생각은 쉽게 바꿀 수 없어. 네가 아무리 잘해도 끝없이 딴지를 걸 거야. 넌 그냥 네가 해야 할 일을 잘하면 돼. 굳이 모두를 설득할 필요는 없어.”그의 부모만 해도 양시은에게 엄청난 편견이 있었다. 비록 지금은 편견을 내려놓고 하민에게 관심을 쏟고 있지만 말이다.어찌 됐든 유언비어는 끊임없이 생기는 법이라, 양시은이 모든 공격을 다 막기에는 무리가 있었다.“아니, 난 이미 마음먹었어. 말리지 말아 줘.”양시은은 결심이 확고했다. 나도현도 억지로 막을 수 없음을 잘 알았다.“그래. 그렇다면 내가 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