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지어 김영은은 권다솔을 혼내기도 했다.“이미 선 자리 알아봤으니까 집안에 얌전히 있어. 이따가 맞선 상대가 집으로 올 거야. 네 아빠 심기를 거슬러서 또 집에 갇혀 지내고 싶지 않은 거라면 얌전하게 있는 게 좋을 거야!”소파에 앉은 김영은은 엄격한 눈빛으로 그녀를 보았다. 그 기세는 엄청났다.이때 아픈 척하고 있던 권용민이 나왔다.“네 엄마도 마음이 약해져서 그 자식을 집안까지 들인 거야. 만약 나였으면 곱게 돌려보내지 않았을 거라고. 계속 포기하지 않을 거라고 하면 사람을 불러 쫓아냈을 거야!”권다솔은 숨 막혔다.자신의 부모님의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올 거라곤 전혀 상상도 못 했다.그녀의 부모님은 늘 다정하고 지식이 많은 사람이었다. ‘성공한 사람' 같은 단어가 그들의 입에서 나올 줄 몰랐다. 심지어 억지로 맞선 자리까지 만들다니.대체 그녀를 뭐로 생각한 걸까?상품처럼 팔아버리려는 걸까?권다솔은 자조적으로 말했다.“우리 가문이 크면 얼마나 크고 재산이 많으면 얼마나 많다고요. 대체 언제쯤이 되어야 만족하실 건데요. 대체 언제 욕심을 그만 부릴 건데요?!”“여이현은 경성 일 인자예요. 차라리 여이현을 사위로 맞이하시지 그래요?”권다솔은 이성을 잃고 말았다. 하지만 그녀의 탓이라곤 할 수 없었다. 여하간에 그녀의 부모님이 먼저 심한 말을 했으니까.그녀의 부모님은 그녀의 말대로 여이현을 사위로 맞이할 생각도 한 적 있었다. 하지만 여이현에겐 이미 아내가 있었고 여이현은 가정에 충실했을 뿐 아니라 아내를 너무도 사랑했기에 그들에겐 방법이 없었다.권다솔은 두 사람의 눈빛에서 모든 걸 눈치채게 되었다. 순간 모든 것이 가소로웠다.“저더러 굳이 여진 그룹의 비서로 입사하라고 했던 게 이제야 이해가 가네요. 두 분 모두 그런 생각을 하고 있으셨던 거네요!”어떻게든 여이현의 곁에 붙어야 가망이 있을 수 있었으니까.“여이현은 유부남이에요. 아이도 있는 사람인데 괜찮으신 거예요? 아이까지 딸린 유부남도 사위로 받아들일 수 있으면서 왜 어떻게든 노
권용민은 가슴을 움켜쥐었다.“다솔아, 그 자식을 위해 지금 목숨으로 우리를 협박하는 거냐?”김영은은 순간 불안해졌다.“다솔아, 네 아빠 몸 안 좋은 거 알잖니. 얼른 그 칼을 내려놔. 네 아빠 화나게 하지 마. 그러다 쓰러져!”권다솔은 과도를 내려놓지 않았다. 오히려 피식 웃었다.“엄마는 항상 제게 아빠 화나게 하지 말라고, 상처받게 하지 말라고 하시네요. 그럼 두 분은요? 두 분이 저한테 상처 줬다는 생각은 안 해보셨어요? 전 지금까지 늘, 계속 얌전하게 지냈어요. 두 분이 원하는 대로 하면서 두 분을 만족시켜드리려고 노력했죠.”“여진 그룹 비서 일도 말이에요. 두 분은 제게 다른 사람처럼 직장인 체험도 해봐야 한다고 하시면서 보냈죠. 하지만 그 결과는 어떻게 됐는데요?”“학교 다니면서도 전 연애 한 번 못 해 봤어요. 남자친구 사귀어 보려고 노력도 안 해봤죠. 이제 겨우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는데, 진호 씨가 저한테 얼마나 잘해주는데, 대체 왜 반대하시는 거죠?”“배진호 씨가 엉망인 사람은 아니잖아요. 아닌가요?”만약 배진호가 엉망인 사람이었다면 여이현도 그를 비서로 뽑을 리도 없고 10년 넘게 곁에 두고 함께 일하지도 않았을 것이다.배진호는 아주 능력 있는 사람이었다. 업계에서도 어떻게든 배진호를 자신의 회사로 빼앗아 오려고 하기도 했었지만, 배진호는 전부 거절했다.그는 여이현에게만 뚝심 있게 충성을 다했다.이런 사람을 두 사람은 왜 믿지 않는 것일까?여이현이 사라진 5년 동안에도 배진호가 여진 그룹을 관리하고 있었다. 하지만 배진호는 그 5년 동안 단 한 번도 여진을 탐낸 적도 없었고 배신한 적도 없었다.배진호에겐 따라 배울 점이 많았다.김영은은 권다솔의 목에서 흐르는 피를 보았다. 순간 가슴이 덜컥 내려앉으며 긴장해졌다.“얼른 내려놔. 배진호 씨도 엉망인 사람이 아니야. 나랑 네 아빠는 네가 더 좋은 사람과 결혼해서 행복하게 살길 바랄 뿐이었어.”“하지만 두 분은 돈이 많은 사람이 더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계시잖아요.
“다솔 씨를 찾아간 그날, 다솔 씨 부모님이 막아섰죠? 두 분이 원하는 게 뭐라고 하던가요? 내가 도와줄 건 없어요?”여이현은 이런 일에 있어 배진호에게 선배나 마찬가지였다. 그랬기에 배진호가 부딪친 문제에 대해서도 아주 잘 알고 있었다.배진호는 더는 권씨 가문에 대해 말을 하고 싶지 않았다.“대표님, 저랑 다솔 씨는 이미 끝난 사이입니다.”여이현은 두 사람이 이렇게나 빨리 헤어질 줄은 몰랐다. 하지만 배진호는 방금 권다솔에게 청혼하지 않았던가.만약 권다솔이 배진호를 싫어했다면 배진호와 연인 사이가 될 리가 없었을 뿐 아니라 청혼을 받아들일 리도 없었다.그랬기에 두 사람의 사이는 배진호의 일방적인 관계 정리인 것이다.권다솔 부모님의 반대로 말이다.여이현도 예전에 이런 일을 겪었었다. 배진호와 권다솔이 서로 얼마나 좋아하는지 알고 있었던 여이현은 이렇게 끝내게 놔둘 수는 없었다.“다솔 씨도 배 비서를 좋아하고, 배 비서도 다솔 씨를 좋아하는데 이렇게 포기하려고요? 아쉽지 않아요?”여이현은 손에 들고 있던 서류를 내려놓고 배진호 앞으로 다가갔다.“게다가 배 비서 나이도 먹을 만큼 먹었잖아요. 겨우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고 연인 사이가 되었는데 함께 시간을 보내지 못할망정 이렇게 포기한다고요?”“다솔 씨도 헤어지겠다고 해서 헤어진 거예요? 만약 부모님의 반대 때문에 그런 거라면 어떻게든 설득하면 되잖아요. 두 사람의 사이를 응원할 수 있게 말이에요.”여이현은 손을 배진호의 어깨에 올렸다.“두 사람은 태도가 보고 싶으셨던 거예요. 배 비서가 회사를 차리게 되면 내가 전적으로 후훤해줄게요. 돈이 필요하면 돈도 줄게요. 필요한 게 있으면 전부 가져가도 돼요. 만약 두 분이 원하는 게 여진 그룹이라면... 그것도 줄게요. 여진 그룹에 배 비서가 없었다면 지금도 멀쩡히 남아있었을 리가 없었을 테니까요.”애당초 그는 여진 그룹을 온지유에게 주었다. 하지만 온지유가 싫다고 하면서 모든 지분을 고모인 여희영에게 선물했다.그런데 여희영은 온지유가 돌아오자
권다솔의 질책하는 눈빛에 마음을 다잡았던 배진호는 순간 마음이 무거워지면서 아팠다.고개를 돌려 일부러 그녀의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다솔 씨 부모님께서 하신 말씀이 맞아요. 두 분도 다솔 씨를 위해서 한 말이잖아요. 저 같은 일개 비서가 다솔 씨가 원하는 걸 해줄 수 없을 거예요.”“거짓말! 속으로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지 않잖아요! 만약 그런 거라면 왜 지금 내 시선을 피하고 있는 건데요?”“다솔 씨...”“내 두 눈을 보면서 헤어지자고 말하기 전까지 난 믿지 않을 거예요. 진호 씨가 무슨 말을 하든 말이에요.”말을 마친 권다솔은 바로 나가버렸다.얼마 지나지 않아 여이현이 다시 들어왔다. 배진호는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배 비서가 이렇게 고개를 푹 숙이고 이는 모습은 처음이네요. 왜요, 잘 안 돼요?”배진호는 입꼬리를 올리며 씁쓸하게 웃었다.“직접 두 눈을 보면서 헤어지자고 말하기 전까지 믿지 않겠대요. 제가 어떻게 그런 말을 꺼낼 수 있겠어요?”“그런 거라면 더는 망설이지 말아요. 다솔 씨 부모님이 배 비서를 무시하고 있는 거라면 회사를 만들어 증명해 보이면 되는 거잖아요. 내가 알고 있는 배 비서는 쉽게 포기하는 사람이 아니에요.”그는 멍한 표정으로 여이현을 보았다. 조금 감동이었다. 그의 눈빛에도 다시 생기가 돌았다.얼른 밖으로 나가 권다솔을 붙잡으려고 했으나 권다솔은 애초에 떠나지 않았다.그저 회사 카페에 앉아 망연자실한 얼굴로 창밖을 보고 있었다.직원이 그녀에게 다가가 물었다.“주문을 도와드릴까요?”“카푸치노 한 잔 주세요.”직원은 바로 걸음을 옮겼다.카페에선 부드러운 바이올린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러나 권다솔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머릿속에 온통 그녀의 시선을 피하는 배진호의 모습뿐이었다. 그는 일부러 그녀를 피하고 있었다.“나쁜 놈! 누가 어울린다는 둥 안 어울린다는 둥 하는 말이 대체 뭐가 중요하다고! 내가 좋아하는 거면 되는 거 아닌가?”권다솔은 씩씩대며 가방을 테이블 위로 쾅 내려놓았다. 눈가가 촉
회사에 직원도 점차 많아졌다. 직원들은 자신의 상사가 깨가 쏟아지는 커플임을 알게 된 후 아주 부러워했다.“부대표님과 대표님 사이가 아주 좋으시네요!”“그러게 말이에요! 그런데 두 분 언제 결혼하실 예정이세요?”“아마 회사가 안정되고 나면 할 것 같네요. 두 분 지금 회사를 키우는 데 아주 중요한 시기에 놓였잖아요. 아직 결혼할 때가 아니죠. 하지만 제가 보기엔 곧 할 것 같네요.”매일 바쁘게 보내고 있었지만, 권다솔 얼굴에는 여전히 미소가 있었다.배진호는 그런 그녀의 모습에 매일 포기하지 않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옳은 선택을 했음에 다행으로 생각하기도 하면서 자신을 도와준 여이현에게 고마움을 느끼고 있었다.여이현은 딱히 신경 쓰지 않았다.“배 비서가 날 도와준 것에 비하면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죠.”두 사람은 대화를 나누며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밖으로 나오자 붉은 장미 꽃다발을 들고 있는 권다솔이 보였다.권다솔은 하늘색 원피스를 입고 있었고 긴 머리를 낮게 묶은 채 꽃을 들고 있었다.그런 그녀의 모습을 본 순간 배진호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무언가 막혀버린 듯 답답하기도 했다.권다솔은 아직 그가 나왔다는 것을 발견하지 못하고 미간을 찌푸린 채 로비 직원에게 물었다.“정말로 누가 보낸 건지 몰라요?”직원은 고개를 저었다.“네, 배달 기사분이 가져오셨어요. 꽃다발에 혹시 카드가 없나요? 카드가 있으면 알 수 있지 않을까요?”권다솔은 이미 확인해 보았지만, 카드에는 간단한 글귀만 적혀 있을 뿐 다른 글은 없었다.“다솔 씨, 무슨 일이에요?”권다솔은 고개를 돌렸다. 배진호와 여이현이 그녀를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좋아하는 사람이 자신을 향해 다가오자 권다솔은 그제야 미간을 풀었다.그녀는 손에 들고 있던 장미를 배진호에게 건넸다.“로비로 내려오니까 직원이 내 앞으로 꽃다발이 배달되었다고 말해주더라고요. 이거, 혹시 진호 씨가 주문한 거예요?”권다솔이 이런 의심을 하는 것도 의외가 아니었다.배진호는 조용히 서프라이즈를
권다솔은 바로 뚜껑을 닫아버렸다.“다들 어디 가서 말하면 안 돼요.”그녀의 말에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다는 눈길로 그녀를 보았다. 그녀는 얼른 방으로 올라갔다. 배진호의 방으로 들어온 그녀는 책상 위에 상자를 내려놓고 그의 앞으로 밀었다.배진호는 보자마자 알아챘다.“또 그 사람인가요?”“아마도 그런 것 같아요.”권다솔은 미간을 찌푸렸다. 대체 누가 그녀에게 왜 이런 선물을 보낸 것인지 알 수 없었다.“이번엔 이 쪽지까지 있었어요. 내일 만나자고 하더군요.”배진호는 쪽지를 보았다. 그녀의 말대로 위에는 장소까지 적혀 있었다.“유니랜드 회사에서 별로 멀지 않네요.”“그 말인즉슨 한 번 만나보라고요?”배진호는 쪽지를 내려놓았다. 그의 목소리는 유난히도 차분하고 냉정했다. 회사를 설립한 이후로 그의 위엄은 나날이 커져만 갔다.지금의 배진호는 비서 때와 완전히 달랐고 진정한 상위 포식자가 되어 있었다.“한번 만나보고 와요. 대체 뭐 하려는 속셈인지 잘 알아보고 오는 거예요. 걱정할 필요 없어요. 나도 따라갈 거니까.”그의 얼굴에 웃음이 번지기 시작했다. 냉담하던 모습은 사라지고 없었고 웃음기 머금은 두 눈으로 볼 빨개진 권다솔을 보았다.“누가 함께 가 달라고 했나요?! 이런 일은 나 혼자서도 다녀올 수 있어요!”비록 말은 이렇게 했지만, 권다솔은 배진호가 함께 가는 것에 관해 거부하지 않았다.다음 날, 그녀는 유니랜드로 왔다.목걸이를 선물한 사람은 유니랜드 근처 빈티지 레코드 가게에서 만나자고 했다.권다솔은 한참 길을 헤매고 나서야 그 레코드 가게를 찾았다. 안으로 들어가자 뜻밖의 사람을 만나게 되었다.“오랜만이네. 너 정말 하나도 안 변했구나. 예전이랑 똑같아.”단정하게 정장을 차려입은 남자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하지만 지나치게도 날렵한 얼굴선에 쉽사리 다가갈 수 없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그런 모습으로 이런 말을 하니 오히려 뭔가 거짓말을 하는 듯한 기시감이 들었다.권다솔은 놀란 마음을 몰래 억누르며 말했다.“태
“지금 부모님께서 허락해주시는 일만 남았어요. 그럼 바로 진호 씨랑 결혼할 거거든요. 오빠도 그때 가서 우리의 결혼에 기뻐해 줄 거죠?”남태건의 눈빛이 어두워졌다. 테이블 아래로 내렸던 손은 어느새 주먹을 꽉 움켜쥐고 있었다.권다솔은 머리도 좋고 사리 분별도 잘하는 여자였다.그녀는 배진호를 소개하는 방식으로 그에게 알려주고 있었다. 그의 의도는 이미 눈치챘으니 거절하겠다고.권다솔의 마음속엔 배진호라는 인물이 있었기 때문이다.속에서 분노가 들끓어 오르면서 이성을 집어삼키려 했으나 남태건은 그대로 감정을 드러낼 수 없어 입술을 짓이기며 말했다.“아저씨랑 아주머니가 허락하지 않으셨다는 건 너랑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란 소리잖아.”“넌 어릴 때부터 그랬지. 앞뒤 가리지 않고 네가 원하는 것이라면 갖고 싶어 했지. 하지만 네가 원하는 건 너한테 어울린다는 보장은 없었어.”권다솔이 대답을 하기도 전에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떠나버렸다.결국 이 재회는 불쾌하게 끝나고 말았다.돌아가는 길에 권다솔은 남태건에 대해 배진호에게 알려주었다.비록 그가 무슨 사이인지 묻지 않았으나 권다솔은 그가 신경 쓰고 있음을 잘 알고 있었다.“방금 그 사람은 어릴 때 잠깐 알게 된 사람이에요.”권다솔은 그가 시동을 끈 틈을 타 손을 그의 팔에 올리며 애교 부리듯 당겼다.“미리 말해주지 않은 건 돌아올 줄 몰라서였어요. 혹시 날 원망하고 있는 건 아니죠?”배진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처음에는 아무렇지 않았으나 말이 없는 남자에 다소 마음이 불안해지기 시작했다.“진호 씨, 혹시 화가 난 건 아니...”말을 마치기도 전에 갑자기 그녀의 눈앞으로 그림자가 드리워지면서 그가 그녀에게 입을 맞추었다.시원한 향에 코끝에서 느껴지며 그녀의 머릿속도 맑아지게 했다. 그의 키스에 권다솔은 정신이 아득해졌고 오늘따라 유난히 거칠게 느껴졌다.역시나... 질투하고 있었던 것이 분명했다.하지만 그녀는 차 안이라는 것을 잊지 않았다.얼른 배진호를 밀어내고 말했다.“여기서는 싫어요.
여이현은 몇 개의 대책을 내놓으면서 배진호에게 선택하라고 했다.빠르게 회의는 끝났다.사무실로 돌아온 배진호는 조금 전 있었던 일을 전부 떠올려 보면서 손끝으로 이마를 짚었다. 생각만 해도 피곤함이 밀려왔다.“진호 씨! 회사에 비상이 걸렸다면서요! 괜찮아요?”권다솔이 들어오며 말했다.“여긴 왜 왔어요.”배진호는 무의식적으로 표정 관리를 했다. 그녀의 앞에서 초췌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내가 말했잖아요. 매일 회사로 출근할 필요가 없다고요. 다솔 씨가 힘들면 안 된다고요.”분명 지금 힘든 사람은 그였지만 억지웃음을 지으며 그녀를 걱정하고 있었다. 권다솔은 순간 화가 났다.“내 앞에서 연기하지 말아요!”“오는 길에 이미 전부 전해 들었어요. 회사에서 진행하고 있던 프로젝트 전부 계약 해지당했다면서요. 회사에 비상이 걸렸는데 왜 나한테는 말해주지 않은 거예요?”권다솔은 속상해 미칠 것 같았다.다른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배진호가 자신에게 말해주지 않았다는 사실에 서운했다.무슨 일이 있든 그는 그녀에게 말해주지 않았고 어떻게든 그녀가 안락한 삶을 살아가게 하려고 했다. 그는 대체 그녀를 뭐로 생각하는 것일까?상처 입은 권다솔의 눈빛은 배진호가 그냥 넘길 수 없을 정도가 되었다.그는 가슴이 미어지듯 아팠다. 곧이어 그는 그녀의 어깨를 돌리며 사과했다.“미안해요. 내가 잘못했어요. 다솔 씨에게 숨겨서는 안 되는 데 말이에요. 나한테 한 번 더 기회를 줄래요?”“이번이 마지막이에요. 다음에 또 그러면 용서해주지 않을 거예요.”권다솔은 그를 째려보았다. 조금 붉어진 눈가였기에 무섭기는커녕 오히려 귀여워 보였다.그렇다고 해서 배진호는 그냥 넘기지 않았다. 그녀가 하는 말에 꼬박꼬박 대답했다.권다솔을 달랜 후 배진호는 이틀간 일어난 일들과 여이현이 회의에서 했던 말을 전부 말해주었다.전부 들은 권다솔은 역시나 걱정하고 있었다.“그렇게 심각한 거예요? 그럼 회사 자금 사정도 그렇게 나쁜 건 아니겠죠? 아니면 일단 내가 돈
정말 기막힌 우연이었다.남태건과 권다솔이 차를 지하 주차장에 세우고 걸어오는데 멀리서부터 배진호의 목소리가 들렸다.지금 배진호는 누군가와 부딪힌 차 문제로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다. 그는 최대한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제가 그쪽 차를 뒤에서 들이받은 게 맞고 사진도 찍었으니 보험 처리를 할게요.”“안 돼. 네가 보험 처리한다면 바로 넘어가 줄 것 같아? 난 그렇게 한가하지 않아. 이 차 뭔 줄 알아? 비싼 차야. 당장 1000만 원 물어내. 한 푼도 깎지 말고.”남자는 막무가내로 우겼다. 그는 심지어 옆에 서 있던 석규리에게까지 시비를 걸었다.“너희 둘 어디 결혼하러 가? 운전은 왜 그렇게 급하게 해? 제정신이야?”배진호는 속에서 불길이 치솟았지만 참고 견뎠다.“책임질 테니 말 좀 가려 해요. 인신공격도 삼가세요.”조금 떨어진 곳에서 이 광경을 지켜보던 권다솔은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녀는 문득 회사가 막 출범하던 시절을 떠올렸다.그때 배진호는 사업을 키우기 위해 하루가 멀다 하고 술자리에 나가야 했다. 아마 고객들을 대할 때도 지금처럼 불편해도 참고 화가 나도 웃어넘겼을 것이다.그녀 어머니가 말했던 것 중 하나는 틀렸다. 배진호가 정말 그녀를 이용하려 했더라면 고객 붙잡느라 고생할 시간에 차라리 그녀의 집안에 매달렸을 테니 말이다.“내 차를 망가뜨려 놓고 내가 한두 마디 하는 것도 못 참아? 너랑 네 마누라가 뭐 그렇게 대단한 것들이라고!”남자가 계속 악담을 퍼부었다.“우린 부부 사이 아니에요.”배진호가 짧게 반박했다.“부부가 아니면 내연 관계냐? 아니면 왜 손을 잡고 다녀? 내가 보기엔 둘 다 멀쩡한 사람은 아닌 것 같네. 분명 매일 밤 한 이불 덮고 잘 거 아냐?”남자는 목청을 높여 일부러 주위 사람들 귀에 들어가도록 비아냥댔다.더는 참기 힘들었던 배진호가 경찰을 부르려 할 때, 그 남자가 갑자기 고개를 돌려 남태건을 발견했다.“어이쿠, 남 대표님! 여기 어쩐 일이세요?”그는 태도가 싹 바뀌어 허리를 굽혔다.남태건은
“생선구이 다 먹고 나서 1층 좀 더 둘러보고 싶었는데 네가 피곤해 보이네.”남태건은 권다솔의 눈 밑 다크서클을 보며 아쉬워도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권다솔은 작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어제 잠을 잘 못 자서요. 집에 가서 좀 더 자지 않으면 너무 피곤할 것 같아요.”그러자 남태건은 미련을 감추지 못한 얼굴로도 결국 인정했다.“그럼 내가 집에 데려다줄게. 우선 편히 쉬어.”그들은 더 이상 화장품을 고르지 않았다. 남태건이 아예 중장년층용 세트 전부를 싹 쓸어 담았다. 에센스 제품까지 통으로 챙기니 점원의 입꼬리가 귀 뒤까지 넘어갈 듯했다.“손님 정말 통 크시네요. 이렇게나 많은 세트라면 세 사람이 써도 다 못 쓸걸요?”점원이 감탄을 흘렸다.“어머니께 드리고 싶은데 어떤 걸 좋아하실지 몰라서요. 일단 다 사서 직접 써보시게 하려고요.”이렇게 말하며 그의 시선은 줄곧 권다솔에게 머물렀다.점원들은 눈치가 빨랐다. 입으로는 어머니라고 하지만 사실상 예비 장모님에게 바치는 선물이라는 의미였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느 남자가 이렇게까지 신경을 쓸까?급기야 한 점원은 권다솔에게 다가와 치켜세웠다.“예비 신랑이 정말 좋네요. 요즘 같은 시대에 이렇게 신경 써주는 남자 찾기 힘들어요. 저도 애가 있지만 친정 갈 때 뭘 좀 챙기려 하면 남편은 내켜 하지도 않거든요.”그러자 권다솔이 고개를 저었다.“저희 그런 사이 아니에요. 그리고 이 세트들 제 카드로 결제할게요.”‘어차피 엄마한테 드릴 물건이니까...’점원 말대로라면 사위가 장모님을 위해 챙기는 선물이겠지만, 남태건과 그녀는 그저 친구 사이일 뿐 남의 돈을 이렇게 많이 쓸 수는 없었다.점원은 잠시 멈칫했다. 자신이 너무 들떴나 싶었다. 그래도 누가 결제하든 상관없었다. 팔기만 하면 되는 법이니까.카드 결제는 금방 끝났다. 잠시 후 남태건이 세트 박스를 다 포장해 들고 왔을 때, 권다솔의 손에 영수증이 있는 걸 발견했다.“왜 네가 결제했어?”남태건은 의아해했다.“원래도 엄마한테
“제가 무슨 서러울 게 있겠어요?”권다솔은 헛웃음을 지었다. 방금 전에 배진호를 본 건 맞지만, 본 건 본 거지 그렇게 넋 놓을 정도는 아니었다. 그녀는 이미 배진호를 천천히 잊으려 하고 있었다. 인생은 길고 한 남자 때문에 평생 슬픔에 잠길 순 없는 법이다.‘조금씩 잊으면 되는 거야.’그녀는 마음속으로 이렇게 다짐했다.“원래는 너 호텔에 데려가서 밥 먹이려고 했는데, 네가 배고프다길래 그냥 이 상가에서 아무 가게나 들어왔어. 다솔아, 전에 네가 권씨 집안에 있을 때 이런 서러움 당한 적 있어?”남태건은 계속해서 그녀를 부추기는 말투를 이어갔다. 그의 의도는 분명했다. 이 모든 게 배진호 탓이라는 것이다.배진호의 가정형편은 평범했다. 그동안 돈을 꽤 모아두긴 했지만 집 사고 결혼하는 데 쓰고, 또 직접 회사를 운영해야 하니 형편이 팍팍했을 터였다.반면 오래 운영해 온 권씨 가문 같은 기업은 달랐다. 안정적인 현금 흐름과 배당금이 있고 집안에 고정 자산도 많았다. 상가 임대료만으로도 충분히 쓸 수 있을 정도니까.권다솔은 남태건의 속내를 알았지만 정말로 이게 서러울 일인지 의문이었다.“이 가게 생선이 아주 신선하고 손님도 많네요. 입맛 좀 바꿔보는 것도 나쁘지 않고요. 저 가끔은 노상에서 파는 간식도 사 먹어요.”특히 그녀와 배진호가 가장 힘들었던 시절엔 더욱 그랬다. 둘은 정말 바빴고 돈도 별로 없었으며 밤늦게 퇴근하니 집에 가서 요리할 시간이 없었다.그래서 집으로 가는 길에 간단히 사 먹곤 했다. 그 시절은 오히려 가볍고 한가로웠다. 지금 돌이켜봐도 권다솔은 전혀 후회하지 않았고 서러울 것도 없었다.‘그때가 훨씬 마음 편했어.’그녀는 속으로 담담히 생각했다.“노상 간식?”남태건의 눈가가 붉어졌다.“네가 나한테 시집오면 절대 이런 서러움 안 겪게 해줄게. 권다솔, 맹세하는데 너를 모두가 부러워할 사람으로 만들어줄 거야.”마침 그때 종업원이 생선구이를 내왔다. 이들이 시킨 건 국물이 있는 생선구이였는데, 펄펄 끓는 국물에서 나온 뜨거
배진호는 그 말에 대답하지 않고 화제를 돌렸다.“방금 전 석규리 씨가 다솔 씨한테 뭐라고 했는지 기억해요?”“당연히 기억하죠.”석규리는 왜 배진호가 갑자기 이런 질문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하지만 한 번 말했으면 두 번도 말할 수 있었다. 더군다나 이번에는 배진호가 먼저 물어본 것이다.“권다솔 씨는 진호 씨와 이혼하지 않은 상태에서 다른 남자를 만난 거니 좋은 여자가 아니에요. 아까 진호 씨도 직접 봤잖아요. 지금 당장은 받아들이기 어렵겠지만 계속 자신을 속일 순 없지 않나요?”석규리는 말을 하며 정미진 이야기를 꺼냈다.“만약 어머님께서 이걸 알면 분명 더 화낼 거예요.”“그래요. 다솔 씨랑 저 아직 이혼하지 않았어요. 석규리 씨, 저는 지금 기혼자예요. 이렇게 제 앞에서 이런 얘기 하는 걸 나서서 내연녀가 되려는 거라고 이해해도 되나요?”석규리의 얼굴은 금세 붉었다가 하얗게 질렸다. 그녀는 입술을 부들부들 떨었다. 내연녀라니, 얼마나 거북한 단어인가. 배진호는 어떻게 이렇게 불쾌한 표현으로 그녀를 묘사할 수 있을까?“우리 둘 사이에는 아무 일도 없었는데, 어떻게 그렇게 볼 수 있나요...?”“다솔 씨와 그 남자는 훨씬 더 결백해요. 둘은 서로 껴안거나 옷차림 흐트러진 채 한 방에 있은 적도 없고, 게다가 다솔 씨 어머니는 자식한테 약을 먹이는 짓 따윈 하지 않아요.”배진호는 이 일을 떠올릴 때마다 화가 치밀었다. 요즘은 반려동물을 키울 때도 동물의 의견을 중요하게 여기는데, 정미진은 정말 온갖 수단을 가리지 않는다.석규리는 여전히 자신이 내연녀 짓을 했다는 걸 인정하지 않고 반박했다.“그렇다면 어머님께서 권다솔 씨를 싫어하는 건 분명 권다솔 씨한테 문제가 있다는 뜻 아니에요? 아니면 왜 두 분 사이가 이렇게 험악해졌겠어요?”이건 전형적인 피해자 유죄 논리였다.“저는 석규리 씨를 좋아하지 않아요. 그 논리대로라면 그건 전부 석규리 씨 탓이라는 얘기겠네요. 집에 가서 곰곰이 생각해 보고 저랑은 좀 떨어져 지내줘요.”석규리는 한마디도
남태건은 배진호에게 도전적인 눈빛을 보내며 말했다.“배진호 씨, 한 회사의 대표로서 이렇게 질척거리는 모습 보이는 건 별로 좋지 않지 않나요? 소문이라도 나면 어쩌려고요?”배진호는 권다솔을 되찾을 수만 있다면 명예 따위 신경 쓰지 않을 참이었다. 처음부터 회사를 키운 이유도 그녀에게 더 나은 생활을 마련해주고 싶었기 때문이다.하지만 이런 태도가 권다솔에게 불편과 피로만 안긴다면 그건 그냥 자기중심적인 욕심일 뿐이었다.“됐어요. 저 피곤해요. 어머님께 드릴 화장품 얼른 고르고 돌아가고 싶어요.”권다솔은 마지막으로 배진호를 한 번 바라봤다. 그를 진심으로 사랑했던 마음은 지금도 옅어지지 않았다. 이혼하게 된다 해도 다른 이가 배진호를 함부로 헐뜯는 걸 듣고 싶지 않았다.남태건은 재빨리 그녀의 손을 잡았다.“그럼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자. 가까운 가게 들어가서 뭐라도 먹으면서 좀 쉬면 되잖아. 우리 둘밖에 없으니까 천천히 해도 돼.”석규리는 다가와 배진호의 팔을 끼고 일부러 목소리를 높였다.“진호 씨, 우리도 가서 밥 먹어요. 제가 찍어둔 립스틱 색상들이 있는데 성연 씨는 뭐가 좋은지 물어보고 싶어요.”“석규리 씨, 여긴 무대도 아니고 촬영장도 아니에요. 그런 행동은 하지 말아요.”배진호는 그녀의 손을 뿌리쳤다. 아무리 권다솔이 남태건과 함께 있어도 석규리와 유치한 신경전을 벌일 생각은 없었다. 둘 다 어른인데 이런 식으로 굴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그저 권다솔이 행복하면 그걸로 충분하다고 여겼다.“진호 씨! 전 당신을 도우려고 하는 거예요.”석규리는 권다솔의 뒷모습을 가리켰다.“두 사람 아직 이혼 전이고, 결과가 나오기까지 기다려야 하잖아요. 그런데 벌써 다른 남자랑 다니는 여자가 뭐가 아쉬워요? 어머님 말씀이 맞아요, 저 여자는 정말...”짝!석규리는 얼어붙은 듯 얼굴을 감쌌다. 믿기지 않는 듯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지금... 저를 때린 거예요?”많은 사람이 오가는 쇼핑몰 한가운데서 배진호는 그녀의 뺨을 후려쳤다. 그녀에
권다솔은 발걸음을 멈췄다.고개를 돌려 배진호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엔 믿기지 않는다는 감정이 가득했다. 배진호가 하는 말의 낱말 하나하나는 이해할 수 있었지만, 그 단어들이 합쳐진 문장은 너무나 낯설게 느껴졌다.그녀는 참지 못하고 되묻듯 말했다.“진호 씨 말은... 어머님이 약을 썼다는 뜻이에요? 그것도 그런 종류의 약을?”“네.”배진호는 고개를 끄덕였다.이런 말을 하는 것 자체가 참 창피했다. 하지만 반드시 권다솔에게 알리고 싶었다. 이혼을 하든, 하지 않든, 적어도 오해는 풀고 싶었다.그리고 무엇보다, 권다솔 눈에 그가 감정을 농락하는 사람으로 비치는 건 바라지 않았다. 적어도 그가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건 알아줬으면 했다.“솔직히 그 말 믿기 어려워요. 저... 저는...”권다솔은 당장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난감해했다. 그녀의 눈가엔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고, 마침내 그 눈물방울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그 순간 그녀는 잃은 아이를 떠올렸다.분명 아무 문제 없던 아이였다. 그녀의 몸 상태도 나쁘지 않았다. 그런데 정미진이 와서 돌봐주겠다고 한 뒤 이상하게도 아이를 잃었다.그때부터 의심은 있었지만, 동시에 그런 의심을 품은 자신이 부끄러웠다. 정미진이 아무리 그녀를 좋아하지 않아도 손주의 존재만큼은 중요하게 생각할 거라 여겼다.하지만 오늘 배진호의 말을 듣고 나니 자신이 어리석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미진은 그들이 이혼하도록 어떤 수단이라도 쓰는 사람이었다. 친아들에게 약을 먹일 정도라면 무슨 못할 일이 있을까. 이젠 증거가 필요 없었다.권다솔은 배진호의 손을 뿌리쳤다.“어머님이 약을 썼다고 해도 그게 무슨 소용이겠어요? 저는 두 사람이 서로 껴안은 걸 직접 봤어요. 진호 씨, 설마 그날 아무 일도 없었다고 할 생각이에요? 지금은 없다 해도 앞으로 없으리란 보장은 없잖아요.”“다솔 씨! 저를 믿지 않는 거예요?”배진호의 눈빛에는 깊은 괴로움이 어렸다.권다솔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그녀가 배진호를 믿지 않았다면 애초에 결혼하
“괜찮습니다. 전혀 번거롭지 않아요.”석규리는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배진호와 오래 함께 있을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기뻤다. 더 함께 있고 싶은 마당에 어찌 번거롭다는 생각이 들겠는가?배성연은 난처한 듯 미소 지었다.“오빠, 우리 둘은 비슷한 점이 많아. 규리 씨는 내가 뭘 원하는지 알고 있어.”배진호는 말없이 조용히 돌아서 나갔다. 어차피 다 정해진 상황이었다.그가 거절하기만 하면 불효자 취급을 당할 것이고, 그러면 정미진은 약도 주사도 거부할 게 뻔했다. 불효 소리를 듣는 건 상관없지만 정미진이 제대로 치료를 받지 않으면 정말 문제가 생긴다.‘정말로 이 길밖에 없는 건가.’석규리는 들뜬 표정으로 그를 뒤따랐다.쇼핑몰로 향하는 길 내내 그녀는 쉴 새 없이 말을 이어갔지만, 배진호는 전혀 대꾸하지 않았다. 그는 그저 형식적으로 나온 것일 뿐이었다. 대체 이 자리가 무슨 의미가 있나 싶었다.쇼핑몰 1층에는 다양한 화장품 매장이 있었다. 석규리는 무심코 립스틱 두 개를 골라 배진호에게 물었다.“진호 씨, 어떤 색이 더 괜찮아요?”배진호는 힐끗 보며 무심하게 답했다.“똑같지 않아요?”“아니에요. 이건 토마토 레드고, 이건 자몽 레드라서 달라요.”“결국 다 빨간색 아니냐는 겁니다.”배진호는 전혀 인내심을 보이지 않았다.석규리는 어쩔 수 없이 립스틱을 내려놓고 다른 제품을 골랐다.파운데이션을 고르던 중 그녀는 우연히 고개를 들었고, 멀리서 권다솔과 낯선 남자가 함께 다가오는 것을 발견했다.그 순간 석규리의 눈에 강렬한 기쁨이 피어올랐다. 권다솔이 이렇게 빨리 다른 남자를 찾다니 말이다. 안 그래도 배진호 앞에서 권다솔을 깎아내릴 궁리를 하고 있었는데, 이제 그가 직접 확인하게 된 셈이다.‘좋아, 이걸로 변명도 못 하겠지.’석규리는 허둥지둥 돌아서서 배진호의 소매를 잡았다.“여긴 제가 원하는 게 없네요. 우리 다른 가게 한번 볼까요?”“정말 번거롭네요.”배진호의 목소리에는 인내심이 바닥난 기색이 역력했다.그는 석규리의 손을 뿌
그와 권다솔은 진심으로 사랑했고 서로에게 많은 것을 바쳤다. 그런데 어떻게 이런 상황에서 ‘호구 짓’ 같은 말이 나올 수 있단 말인가?“다솔 씨는 한 번도 나를 배신하거나 잘못한 적 없어. 오히려 내가 잘못했지. 그리고 어머니, 친아들한테 약을 먹이는 짓은 어머니밖에 못 할 겁니다.”배진호는 병상에 누운 어머니를 바라보았다.깊은 슬픔과 무력감이 그를 짓눌렀다.그는 지금도 어머니가 자기에게 약을 먹였다는 사실을 도저히 용서할 수 없다. 하지만 어머니가 아픈 상황에서 아들로서 그 과거를 들추거나 모른 척할 수도 없었다.결국 모든 감정을 억누르며 버틸 수밖에 없었고 그 기분은 정말 참기 어려웠다.배성연은 약을 먹인 일에 대해선 몰랐다. 그녀는 정미진을 바라보며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처음 자신을 불렀을 때 이런 일까지 있었다는 말은 전혀 듣지 못했기 때문이다.이때 정미진은 갑자기 심하게 기침하기 시작했고 석규리는 급히 다가가 그녀의 등을 두드리며 말했다.“아주머니, 의사 선생님이 그러셨잖아요. 지금 몸 상태로는 절대 화내면 안 된다고요. 일단 진정하시고 쉬셔야죠.”“규리야, 봤지? 내가 이렇게 병상에 누워 아무것도 못 하는데도 일부러 나를 화나게 만드는 사람이 있어.”정미진은 특정 인물을 지목하진 않았지만 시선은 아들을 향하고 있었다.배진호는 더 이상 어쩔 수가 없었다.“아들이 병실에 있는 게 기분만 나빠진다면 차라리 나가는 게 낫겠어요. 그래야 어머니도 마음 편히 요양할 수 있겠죠.”그는 더 이상 이곳에서 억눌린 채로 있고 싶지 않았다. 상황이 계속된다면 정말로 견디기 어려울 것 같았다.왜 자신은 이런 부모를 만나서 이 고생을 해야 하는지 그저 답답할 뿐이었다.“가, 가려거든 이제 다시는 돌아오지 마. 네가 어릴 때 온갖 고생 다 하며 널 키웠는데 이젠 내가 늙고 병드니까 짐짝 취급을 받는구나. 됐다, 너희들 아무도 나를 신경 쓰지 않아도 좋아. 내가 죽더라도 너는 부르지 않을 거야. 밖에서 네 맘대로 살고, 네가 행복하면 그걸로 됐
권다솔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고개를 숙였다.사실 그녀도 아이를 정말 좋아했다. 임신 소식을 처음 들었을 때는 너무나도 기뻤다.그런데 결과는?아이를 잃었고 깊이 사랑했던 남편도 잃었다. 한때 행복했던 순간들은 마치 환상처럼 손가락으로 살짝만 건드려도 깨져버렸고 남은 것은 산산조각 난 유리 조각들뿐이었다.“미안해. 내가 괜히 네 아픈 기억을 건드렸어. 다 내 잘못이야. 왜 그런 말을 했을까? 바보 같이...”남태건은 점점 초조해지며 자신의 뺨을 때렸다.두 번째로 자신을 때리려 했지만 권다솔은 그의 손을 잡으며 고개를 저었다.“그러지 마세요. 태건 씨를 탓하려는 게 아니에요. 이건 태건 씨 잘못이 아니잖아요.”그녀가 아이를 잃은 건 남태건과 전혀 상관이 없었다.게다가 방금 했던 말도 그녀에게 크게 상처가 되지 않았다. 아이를 잃었다고 해서 주변 모든 사람이 그녀 앞에서 아이 이야기를 꺼내지 않는 건 현실적이지 않았다.“그래도 네가 힘들어할까 봐 걱정돼. 다솔아, 기분이 안 좋으면 마음껏 화를 내. 나를 화풀이 대상으로 써도 괜찮아. 난 널 위해서라면 그 정도는 할 수 있어.”남태건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말했다.권다솔은 휴대폰 잠금을 해제하며 시간을 확인하려 했지만 화면에는 끝없이 많은 메시지로 가득 차 있었다.모두 배진호가 보낸 메시지였다.그렇게 많은 메시지를 보냈지만 그녀는 단 하나도 읽고 싶지 않았다.권다솔은 모든 메시지를 선택하고 삭제 버튼을 눌렀다.남태건은 계속해서 그녀의 휴대폰을 흘끗거렸다.각도상 화면의 글씨는 보이지 않았지만 이 시점에 권다솔에게 장문의 메시지를 보낼 사람은 한 사람뿐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배진호다!지금은 상황이 완전히 뒤바꼈다. 권다솔이 유산한 이후로 배진호는 남태건과 비교할 자격조차 없게 되었다.방금 일부러 떠본 결과 권다솔은 아직도 그 아이에 대한 미련을 떨치지 못하고 있다는 게 분명했다.두 사람 사이에는 생명의 무게가 가로막혀 있고 정미진이 적극적으로 방해하고 있는 상황에서 둘이 다시 함께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