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솔 씨를 찾아간 그날, 다솔 씨 부모님이 막아섰죠? 두 분이 원하는 게 뭐라고 하던가요? 내가 도와줄 건 없어요?”여이현은 이런 일에 있어 배진호에게 선배나 마찬가지였다. 그랬기에 배진호가 부딪친 문제에 대해서도 아주 잘 알고 있었다.배진호는 더는 권씨 가문에 대해 말을 하고 싶지 않았다.“대표님, 저랑 다솔 씨는 이미 끝난 사이입니다.”여이현은 두 사람이 이렇게나 빨리 헤어질 줄은 몰랐다. 하지만 배진호는 방금 권다솔에게 청혼하지 않았던가.만약 권다솔이 배진호를 싫어했다면 배진호와 연인 사이가 될 리가 없었을 뿐 아니라 청혼을 받아들일 리도 없었다.그랬기에 두 사람의 사이는 배진호의 일방적인 관계 정리인 것이다.권다솔 부모님의 반대로 말이다.여이현도 예전에 이런 일을 겪었었다. 배진호와 권다솔이 서로 얼마나 좋아하는지 알고 있었던 여이현은 이렇게 끝내게 놔둘 수는 없었다.“다솔 씨도 배 비서를 좋아하고, 배 비서도 다솔 씨를 좋아하는데 이렇게 포기하려고요? 아쉽지 않아요?”여이현은 손에 들고 있던 서류를 내려놓고 배진호 앞으로 다가갔다.“게다가 배 비서 나이도 먹을 만큼 먹었잖아요. 겨우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고 연인 사이가 되었는데 함께 시간을 보내지 못할망정 이렇게 포기한다고요?”“다솔 씨도 헤어지겠다고 해서 헤어진 거예요? 만약 부모님의 반대 때문에 그런 거라면 어떻게든 설득하면 되잖아요. 두 사람의 사이를 응원할 수 있게 말이에요.”여이현은 손을 배진호의 어깨에 올렸다.“두 사람은 태도가 보고 싶으셨던 거예요. 배 비서가 회사를 차리게 되면 내가 전적으로 후훤해줄게요. 돈이 필요하면 돈도 줄게요. 필요한 게 있으면 전부 가져가도 돼요. 만약 두 분이 원하는 게 여진 그룹이라면... 그것도 줄게요. 여진 그룹에 배 비서가 없었다면 지금도 멀쩡히 남아있었을 리가 없었을 테니까요.”애당초 그는 여진 그룹을 온지유에게 주었다. 하지만 온지유가 싫다고 하면서 모든 지분을 고모인 여희영에게 선물했다.그런데 여희영은 온지유가 돌아오자
권다솔의 질책하는 눈빛에 마음을 다잡았던 배진호는 순간 마음이 무거워지면서 아팠다.고개를 돌려 일부러 그녀의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다솔 씨 부모님께서 하신 말씀이 맞아요. 두 분도 다솔 씨를 위해서 한 말이잖아요. 저 같은 일개 비서가 다솔 씨가 원하는 걸 해줄 수 없을 거예요.”“거짓말! 속으로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지 않잖아요! 만약 그런 거라면 왜 지금 내 시선을 피하고 있는 건데요?”“다솔 씨...”“내 두 눈을 보면서 헤어지자고 말하기 전까지 난 믿지 않을 거예요. 진호 씨가 무슨 말을 하든 말이에요.”말을 마친 권다솔은 바로 나가버렸다.얼마 지나지 않아 여이현이 다시 들어왔다. 배진호는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배 비서가 이렇게 고개를 푹 숙이고 이는 모습은 처음이네요. 왜요, 잘 안 돼요?”배진호는 입꼬리를 올리며 씁쓸하게 웃었다.“직접 두 눈을 보면서 헤어지자고 말하기 전까지 믿지 않겠대요. 제가 어떻게 그런 말을 꺼낼 수 있겠어요?”“그런 거라면 더는 망설이지 말아요. 다솔 씨 부모님이 배 비서를 무시하고 있는 거라면 회사를 만들어 증명해 보이면 되는 거잖아요. 내가 알고 있는 배 비서는 쉽게 포기하는 사람이 아니에요.”그는 멍한 표정으로 여이현을 보았다. 조금 감동이었다. 그의 눈빛에도 다시 생기가 돌았다.얼른 밖으로 나가 권다솔을 붙잡으려고 했으나 권다솔은 애초에 떠나지 않았다.그저 회사 카페에 앉아 망연자실한 얼굴로 창밖을 보고 있었다.직원이 그녀에게 다가가 물었다.“주문을 도와드릴까요?”“카푸치노 한 잔 주세요.”직원은 바로 걸음을 옮겼다.카페에선 부드러운 바이올린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러나 권다솔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머릿속에 온통 그녀의 시선을 피하는 배진호의 모습뿐이었다. 그는 일부러 그녀를 피하고 있었다.“나쁜 놈! 누가 어울린다는 둥 안 어울린다는 둥 하는 말이 대체 뭐가 중요하다고! 내가 좋아하는 거면 되는 거 아닌가?”권다솔은 씩씩대며 가방을 테이블 위로 쾅 내려놓았다. 눈가가 촉
회사에 직원도 점차 많아졌다. 직원들은 자신의 상사가 깨가 쏟아지는 커플임을 알게 된 후 아주 부러워했다.“부대표님과 대표님 사이가 아주 좋으시네요!”“그러게 말이에요! 그런데 두 분 언제 결혼하실 예정이세요?”“아마 회사가 안정되고 나면 할 것 같네요. 두 분 지금 회사를 키우는 데 아주 중요한 시기에 놓였잖아요. 아직 결혼할 때가 아니죠. 하지만 제가 보기엔 곧 할 것 같네요.”매일 바쁘게 보내고 있었지만, 권다솔 얼굴에는 여전히 미소가 있었다.배진호는 그런 그녀의 모습에 매일 포기하지 않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옳은 선택을 했음에 다행으로 생각하기도 하면서 자신을 도와준 여이현에게 고마움을 느끼고 있었다.여이현은 딱히 신경 쓰지 않았다.“배 비서가 날 도와준 것에 비하면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죠.”두 사람은 대화를 나누며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밖으로 나오자 붉은 장미 꽃다발을 들고 있는 권다솔이 보였다.권다솔은 하늘색 원피스를 입고 있었고 긴 머리를 낮게 묶은 채 꽃을 들고 있었다.그런 그녀의 모습을 본 순간 배진호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무언가 막혀버린 듯 답답하기도 했다.권다솔은 아직 그가 나왔다는 것을 발견하지 못하고 미간을 찌푸린 채 로비 직원에게 물었다.“정말로 누가 보낸 건지 몰라요?”직원은 고개를 저었다.“네, 배달 기사분이 가져오셨어요. 꽃다발에 혹시 카드가 없나요? 카드가 있으면 알 수 있지 않을까요?”권다솔은 이미 확인해 보았지만, 카드에는 간단한 글귀만 적혀 있을 뿐 다른 글은 없었다.“다솔 씨, 무슨 일이에요?”권다솔은 고개를 돌렸다. 배진호와 여이현이 그녀를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좋아하는 사람이 자신을 향해 다가오자 권다솔은 그제야 미간을 풀었다.그녀는 손에 들고 있던 장미를 배진호에게 건넸다.“로비로 내려오니까 직원이 내 앞으로 꽃다발이 배달되었다고 말해주더라고요. 이거, 혹시 진호 씨가 주문한 거예요?”권다솔이 이런 의심을 하는 것도 의외가 아니었다.배진호는 조용히 서프라이즈를
권다솔은 바로 뚜껑을 닫아버렸다.“다들 어디 가서 말하면 안 돼요.”그녀의 말에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다는 눈길로 그녀를 보았다. 그녀는 얼른 방으로 올라갔다. 배진호의 방으로 들어온 그녀는 책상 위에 상자를 내려놓고 그의 앞으로 밀었다.배진호는 보자마자 알아챘다.“또 그 사람인가요?”“아마도 그런 것 같아요.”권다솔은 미간을 찌푸렸다. 대체 누가 그녀에게 왜 이런 선물을 보낸 것인지 알 수 없었다.“이번엔 이 쪽지까지 있었어요. 내일 만나자고 하더군요.”배진호는 쪽지를 보았다. 그녀의 말대로 위에는 장소까지 적혀 있었다.“유니랜드 회사에서 별로 멀지 않네요.”“그 말인즉슨 한 번 만나보라고요?”배진호는 쪽지를 내려놓았다. 그의 목소리는 유난히도 차분하고 냉정했다. 회사를 설립한 이후로 그의 위엄은 나날이 커져만 갔다.지금의 배진호는 비서 때와 완전히 달랐고 진정한 상위 포식자가 되어 있었다.“한번 만나보고 와요. 대체 뭐 하려는 속셈인지 잘 알아보고 오는 거예요. 걱정할 필요 없어요. 나도 따라갈 거니까.”그의 얼굴에 웃음이 번지기 시작했다. 냉담하던 모습은 사라지고 없었고 웃음기 머금은 두 눈으로 볼 빨개진 권다솔을 보았다.“누가 함께 가 달라고 했나요?! 이런 일은 나 혼자서도 다녀올 수 있어요!”비록 말은 이렇게 했지만, 권다솔은 배진호가 함께 가는 것에 관해 거부하지 않았다.다음 날, 그녀는 유니랜드로 왔다.목걸이를 선물한 사람은 유니랜드 근처 빈티지 레코드 가게에서 만나자고 했다.권다솔은 한참 길을 헤매고 나서야 그 레코드 가게를 찾았다. 안으로 들어가자 뜻밖의 사람을 만나게 되었다.“오랜만이네. 너 정말 하나도 안 변했구나. 예전이랑 똑같아.”단정하게 정장을 차려입은 남자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하지만 지나치게도 날렵한 얼굴선에 쉽사리 다가갈 수 없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그런 모습으로 이런 말을 하니 오히려 뭔가 거짓말을 하는 듯한 기시감이 들었다.권다솔은 놀란 마음을 몰래 억누르며 말했다.“태
“지금 부모님께서 허락해주시는 일만 남았어요. 그럼 바로 진호 씨랑 결혼할 거거든요. 오빠도 그때 가서 우리의 결혼에 기뻐해 줄 거죠?”남태건의 눈빛이 어두워졌다. 테이블 아래로 내렸던 손은 어느새 주먹을 꽉 움켜쥐고 있었다.권다솔은 머리도 좋고 사리 분별도 잘하는 여자였다.그녀는 배진호를 소개하는 방식으로 그에게 알려주고 있었다. 그의 의도는 이미 눈치챘으니 거절하겠다고.권다솔의 마음속엔 배진호라는 인물이 있었기 때문이다.속에서 분노가 들끓어 오르면서 이성을 집어삼키려 했으나 남태건은 그대로 감정을 드러낼 수 없어 입술을 짓이기며 말했다.“아저씨랑 아주머니가 허락하지 않으셨다는 건 너랑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란 소리잖아.”“넌 어릴 때부터 그랬지. 앞뒤 가리지 않고 네가 원하는 것이라면 갖고 싶어 했지. 하지만 네가 원하는 건 너한테 어울린다는 보장은 없었어.”권다솔이 대답을 하기도 전에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떠나버렸다.결국 이 재회는 불쾌하게 끝나고 말았다.돌아가는 길에 권다솔은 남태건에 대해 배진호에게 알려주었다.비록 그가 무슨 사이인지 묻지 않았으나 권다솔은 그가 신경 쓰고 있음을 잘 알고 있었다.“방금 그 사람은 어릴 때 잠깐 알게 된 사람이에요.”권다솔은 그가 시동을 끈 틈을 타 손을 그의 팔에 올리며 애교 부리듯 당겼다.“미리 말해주지 않은 건 돌아올 줄 몰라서였어요. 혹시 날 원망하고 있는 건 아니죠?”배진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처음에는 아무렇지 않았으나 말이 없는 남자에 다소 마음이 불안해지기 시작했다.“진호 씨, 혹시 화가 난 건 아니...”말을 마치기도 전에 갑자기 그녀의 눈앞으로 그림자가 드리워지면서 그가 그녀에게 입을 맞추었다.시원한 향에 코끝에서 느껴지며 그녀의 머릿속도 맑아지게 했다. 그의 키스에 권다솔은 정신이 아득해졌고 오늘따라 유난히 거칠게 느껴졌다.역시나... 질투하고 있었던 것이 분명했다.하지만 그녀는 차 안이라는 것을 잊지 않았다.얼른 배진호를 밀어내고 말했다.“여기서는 싫어요.
여이현은 몇 개의 대책을 내놓으면서 배진호에게 선택하라고 했다.빠르게 회의는 끝났다.사무실로 돌아온 배진호는 조금 전 있었던 일을 전부 떠올려 보면서 손끝으로 이마를 짚었다. 생각만 해도 피곤함이 밀려왔다.“진호 씨! 회사에 비상이 걸렸다면서요! 괜찮아요?”권다솔이 들어오며 말했다.“여긴 왜 왔어요.”배진호는 무의식적으로 표정 관리를 했다. 그녀의 앞에서 초췌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내가 말했잖아요. 매일 회사로 출근할 필요가 없다고요. 다솔 씨가 힘들면 안 된다고요.”분명 지금 힘든 사람은 그였지만 억지웃음을 지으며 그녀를 걱정하고 있었다. 권다솔은 순간 화가 났다.“내 앞에서 연기하지 말아요!”“오는 길에 이미 전부 전해 들었어요. 회사에서 진행하고 있던 프로젝트 전부 계약 해지당했다면서요. 회사에 비상이 걸렸는데 왜 나한테는 말해주지 않은 거예요?”권다솔은 속상해 미칠 것 같았다.다른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배진호가 자신에게 말해주지 않았다는 사실에 서운했다.무슨 일이 있든 그는 그녀에게 말해주지 않았고 어떻게든 그녀가 안락한 삶을 살아가게 하려고 했다. 그는 대체 그녀를 뭐로 생각하는 것일까?상처 입은 권다솔의 눈빛은 배진호가 그냥 넘길 수 없을 정도가 되었다.그는 가슴이 미어지듯 아팠다. 곧이어 그는 그녀의 어깨를 돌리며 사과했다.“미안해요. 내가 잘못했어요. 다솔 씨에게 숨겨서는 안 되는 데 말이에요. 나한테 한 번 더 기회를 줄래요?”“이번이 마지막이에요. 다음에 또 그러면 용서해주지 않을 거예요.”권다솔은 그를 째려보았다. 조금 붉어진 눈가였기에 무섭기는커녕 오히려 귀여워 보였다.그렇다고 해서 배진호는 그냥 넘기지 않았다. 그녀가 하는 말에 꼬박꼬박 대답했다.권다솔을 달랜 후 배진호는 이틀간 일어난 일들과 여이현이 회의에서 했던 말을 전부 말해주었다.전부 들은 권다솔은 역시나 걱정하고 있었다.“그렇게 심각한 거예요? 그럼 회사 자금 사정도 그렇게 나쁜 건 아니겠죠? 아니면 일단 내가 돈
말을 마친 권다솔은 바로 집을 나서려 했다.이때 줄곧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지켜보기만 하던 권용민이 위엄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아무 데도 갈 생각하지 말아라.”“저녁에 파티가 있다. 남씨 가문에서 주최한 거야. 유학 갔던 아들이 돌아와서 앞으로 잘 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여는 파티라더구나. 네가 어릴 때 함께 놀던 남태건이 돌아온 거니까 너도 참석해.”그는 권다솔이 거절할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권다솔은 참고 있던 감정이 결국 터져버렸다.“안 갈 거예요.”권용민픠 표정이 바로 어두워졌다. 그는 평소에 과묵한 성격이었고 누군가 자신의 말에 토를 달거나 반항하는 것을 아주 싫어했다.그런데 권다솔이 지금 그의 인내심의 한계에 도전하고 있었다.그는 분노를 꾹꾹 참고 있었다. 권다솔이 자신의 딸이라는 이유만으로 말이다.“다솔아, 아빠한테 그게 무슨 말버릇이니.”눈치챈 김영은이 얼른 말렸다.“우리 집안은 전부터 친하게 지냈잖니. 유학하고 돌아온 사람도 네가 그렇게 따르던 태건이기도 하고 말이야. 그러니 우리가 더욱 귀국 파티에 참석해야 하지 않겠니?”“제가 모를 거로 생각하지 마세요. 두 분이 저랑 태건 오빠를 이어주려고 하는 거 모를 줄 알았어요?”권다솔은 코웃음을 치며 말을 이었다.“아무튼, 전 절대 가지 않을 거예요.”권용민은 결국 자리에서 일어났다. 얼굴엔 냉소가 지어져 있었다.“그럼 이 집에서 나갈 생각을 하지 말아라.”결국 권다솔은 집에서 나올 수 없었다.그녀의 부모님은 그녀를 집안에 가둬버렸다. 권용민은 그녀에게 남씨 가문 파티에 갈 것을 강요하면서 핸드폰을 압수했다.권다솔은 배진호에게 연락할 수 없게 되자 마음이 조급해졌다. 하지만 별다른 방법이 없었다.다음 날 밤, 권다솔은 브이넥으로 된 검은 원피스를 입고 남씨 가문으로 갔다.김영은도 함께 말이다.김영은이 따라간 목적은 권다솔이 파티 도중에 도망치지 않게 감시하기 위함이었다.차에서 내린 후부터 권다솔은 줄곧 미간을 구기고 있었다. 사람들이 인사를 해도 무시하면서
권다솔은 남태건과 눈이 마주쳤다. 웃음기 머금은 눈으로 자신을 보는 남태건에 그녀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남태건의 의도가 무엇인지 더 알 수 없었다.반면 김영은은 바로 눈치챘다. 그러고는 바로 행동으로 옮겨 두 사람을 이어주려고 했다.“오랜만에 만났는데 서로 하고 싶은 얘기가 많겠구나. 그래, 우리가 빠져줄 테니까 둘이 얘기 잘 나눠보렴.”김영은은 최선정의 팔을 잡으며 자리를 옮겼다.다가오는 사람도 없었기에 두 사람만 남게 되었다.권다솔은 직설적으로 말했다.“대체 무슨 생각인 거예요?”“내가 무슨 생각하는 지 바로 알리지 않아?”남태건은 그윽한 눈길로 그녀를 보았다. 아예 감정을 숨길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어릴 때 그랬잖아. 나한테 시집오겠다고. 비록 우리가 꽤 오랫동안 떨어져 있긴 했지만 난 아직도 그때 네가 한 말을 기억하고 있거든.”하지만 그때의 말을 진심으로 생각한 건 오직 남태건 뿐이었다.권다솔은 어릴 때 아무것도 모르고 내뱉은 말을 잊은 지 오래였다.남태건은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분노가 치밀었다.권다솔은 그런 그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어릴 때 내뱉은 말을 진심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세상에 몇이나 되겠는가.“태건 씨, 그 마음은 이해가 되지만 정말 죄송하네요. 어릴 때 뭣도 모르고 내뱉은 말을 한 번도 진심으로 생각한 적 없거든요. 전 태건 씨가 바라는 걸 이뤄드릴 수 없어요. 그러니 차라리 다른 여자를 만나보는 게 더 시간 절약될 것 같네요. 한 나무에만 목매다는 것이 아니라.”“그 사람 때문인 거지?”남태건의 한 마디에 권다솔은 멍해지고 말았다.고개를 들어 남태건을 보았다. 블랙홀처럼 끝이 보이지 않는 두 눈동자는 그녀를 빨아들일 것 같았고 이상하게도 공포가 밀려와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쳤다.하지만 그녀는 최대한 차분하게 말했다.“이건 진호 씨랑 아무 상관없어요.”그러나 남태건은 그녀의 말을 귓등으로 흘려보내고 있었다.“그 남자가 널 위해 회사까지 세웠다면서. 요즘도 회사가 잘 되긴 해? 협력
“다른 사람들은 다 가까이 다가가도 되는데 왜 나만 안 돼? 지금 날 따돌리고 있는 거잖아. 그런데 어떻게 가족처럼 지내? 애초에 날 진짜 가족으로 받아들일 생각도 없었던 거잖아!”소미는 말을 하면 할수록 괴로웠다.만약 온하윤이 세상에서 완벽하게 사라진다면 별이에게 남은 동생은 자신 한 명뿐이라고 생각했다.앞으로 그녀에게만 잘해줄 것이고 모든 사람들의 관심도 그녀에게만 쏟아질 것이니 온하윤 때문에 누군가 자신에게 짜증을 낼 일은 없을 거라 생각했다.‘이럴 줄 알았으면 약을 더 먹이는 거였는데.'‘그래, 어차피 약병은 내 가방에 있어. 그 나쁜 사람들이 그 약의 효과가 엄청나다고 했었어. 반병만 먹어도 어른 한 명은 거뜬히 죽일 수 있다고 했으니까 아기한테는 그 절반을 먹이면 되겠지.'‘기회를 봐서 조금만 더 먹이면 돼. 그러면 온하윤은 이 세상에서 완벽히 사라질 수 있어.'‘그렇게 되면 엄마도 볼 수 있고 별이 오빠도 온전히 내게만 잘해줄 거야.'“이상한 생각하지 마. 우린 가족이 맞아. 우리가 가족이니까 동생을 챙겨야 하는 거고 엄마도 배려해 줘야 하는 거야.”별이는 계속 설명했다.그러나 아무리 설명해도 소미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가족은 세상에서 제일 가까운 사이였다.그들은 한 가족이 되었다곤 하지만 온하윤은 유독 그녀만을 보면 울기 시작했다.게다가 다른 사람들이 온하윤에게 다가가는 것은 괜찮았지만 유독 그녀만 다가갈 수 없었다. 가족이라면 차별하지 않는가.“어쨌든 지금은 혼자 놀고 있어. 난 엄마를 도와서 하윤이를 돌봐야 하니까. 하윤이가 나아지면 그때 같이 놀아줄게. 그때 가서 우리 같이 아쿠아리움도 가자.”“그럼 그때 가서 하윤이도 데리고 갈 거야?”소미가 물었다.별이는 곰곰이 생각했다.“아마 당연히 데리고 갈 것 같아.”“그럼 그때 오빠 동생이 방금처럼 울면서 칭얼대면?”“그럼 다음에 가면 되지.”그녀가 한 질문에 별이는 빠르게 대답했다.어쨌든 그들에겐 시간이 많았으니 급할 건 없었다.오늘 갈 수 없다면 내일,
“이미 열이 내렸다고 하지 않았어?”소미는 사람들의 주목을 한 몸에 받는 온하윤을 보며 순간 또 나쁜 마음을 먹게 되었다.‘온하윤은 이미 모든 사람들의 관심을 받고 있잖아. 그런데 왜 나한테서 별이 오빠를 빼앗아 가는 거야?'분명 별이와 함께 놀고 싶었으나 별이는 그녀의 작은 요구도 들어주지 않았다.“응, 열은 내렸는데 그래도 좀 걱정돼서.”별이의 인내심은 점점 바닥을 보이었다. 어느새 소미를 보는 시선엔 짜증이 조금 섞여 있었다.“일단 혼자 놀고 있으라니까. 나 좀 그만 찾아와. 하윤이는 내 동생이니까 내가 걱정하는 건 당연한 거잖아!”별이는 전처럼 소미가 귀엽게 느껴지지 않았다.그의 친동생은 온하윤이지 소미가 아니었다. 그럼에도 소미를 가족처럼 생각하면서 앞으로도 함께 살아가려고 했다.그런데 지금 온하윤은 아팠다. 언니로서 소미도 자신처럼 걱정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지만 소미는 계속 자신을 찾아오며 놀아달라고 칭얼대고 있었다.“오빠?”소미는 당황하고 말았다.방금 별이는 있는 힘껏 그녀의 손을 뿌리쳤다. 처음이었다. 별이가 이렇게까지 짜증을 낸 적은.순식간에 눈에 눈물이 맺혔다.“미안해. 내가 오빠를 방해하고 있었어. 오빠한테 자꾸 놀아달라고 칭얼거리면 안 되는 건데. 그럼 오빠랑 같이 하윤이를 돌봐도 돼?”“그래. 나도 미안해. 일부러 짜증을 내려던 건 아니었어. 그냥 난 지금 놀 기분이 아니었을 뿐이야.”별이는 옆으로 자리를 옮겼다.온하윤은 아기였기에 아무것도 몰랐다. 그랬기에 소미의 행동이 자신을 죽이려고 한 행동임을 몰랐다.하지만 아기들의 감은 정확했다.소미가 다가온 순산 조용하던 온하윤이 갑자기 큰 소리를 내며 울기 시작했다. 소미가 다가갈수록 더 크게 울어댔다.“하윤아, 뚝. 괜찮아. 오빠가 옆에 있잖아.”별이가 얼른 온하윤을 토닥여주며 달랬다.하지만 소용이 없었다. 소미가 이 자리에 있는 한 온하윤은 울음을 그칠 생각이 없었다.빠르게 집 안의 사람들도 아기의 울음소리에 모여들었다. 소미는 덩그러니 서서 어찌
심지어 밤에도 편히 눈을 감지 못했다. 두 시간에 한 번씩 잠자리에서 일어나 온하윤의 상태를 살펴보았다.그녀는 아주 열심히 아기를 돌봤다. 온하윤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길까 봐 아기에게 분유를 제외한 다른 음식을 먹일 생각도 하지 않았다.“알겠어요. 일단 들어가 보세요.”여이현은 증거가 없는 상태였다. 그랬기에 김명자를 붙들고 모든 책임을 돌릴 수 없었다.만약 전부터 집 안에 감시카메라를 설치해 두었다면 아마 누가 온하윤을 해친 것인지 바로 찾아낼 수 있었을 것이다.김명자는 집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비서가 그에게 연락했다.“대표님, 이미 찾아낸 자료를 전부 전송해 드리겠습니다.”비서가 찾은 자료엔 김명자의 가족 관계는 아주 단일했다.김명자에겐 딸이 한 명 있었다. 몇 년 전에 결혼해 남편과 함께 작은 마트를 운영하고 있었고 아이도 낳았다. 그녀에겐 빚도 없었을 뿐 아니라 통장에 거액의 돈이 오간 흔적도 없었다.업계에서 김명자에 대한 평가는 아주 좋았다. 그녀를 베이비 시터로 고용한 사람들은 대부분 아기에게 정성을 다한다고 말했고 친할머니 같다는 평가도 있었다.자료만 봐도 여이현은 김명자가 아주 좋은 베이비 시터라고 생각했다.그런데 온하윤은 대체 왜 갑자기 중독된 것일까?여이현은 여전히 이해가 가지 않았다.그러다 그는 한 통의 전화를 받게 되었다. 온지유가 그에게 전화한 것이다. 그가 병원을 나서기 전보다 온지유의 목소리는 많이 평온해졌다.“이현 씨, 하윤이는 제때 치료받아서 지금 열도 내리고 있어. 많이 괜찮아졌어.”“응, 괜찮아졌다면 다행이야. 내가 지금 갈게.”여이현은 원래 병원으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하지만 조금 전 별이의 모습이 떠올라 이내 생각을 바꾸었다.별이를 데리고 가기로.“소미야, 나랑 같이 하윤이 보러 가지 않을래?”집을 나서기 전 별이는 고개를 돌려 소미에게 물었다.소미는 급하게 고개를 저었다.그녀는 지금 여이현의 두 눈을 마주할 엄두가 나지 않아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돌려버렸다.다만 같은 공간에 있던 모든
온하윤은 치료를 받을 수 있게 되었다.온지유는 피를 너무 많이 뽑은 탓에 안색이 창백했고 입술에는 혈색이 없었다.그녀는 힘겹게 의자의 손잡이에 의지하며 일어났다. 몸이 잠깐 휘청였지만 그래도 힘을 내서 병실 쪽으로 비틀대며 걸어가려 했다.“앉아서 쉬고 있어요. 저희가 다시 수혈해드릴게요. 지금 이 모습으로는 병실을 돌아가기는커녕 몇 발자국도 못가서 쓰러지게 되실 거예요.”간호사가 얼른 온지유의 팔을 잡으며 부축했다.온지유는 자신의 몸 상태가 어떤지 아주 잘 알고 있었다.그녀는 무리하지 않았다. 다시 의자에 앉아 쉬면서 따듯한 차를 마셨다. 어리럼증이 사라지고 나서야 그녀는 딸의 병실로 갈 수 있었다.온하윤의 상태는 처음 병원으로 찾아왔을 때보다 마노이 나아져 있었다. 더는 고열에 시달리지 않았지만 열은 있었다.“아마 세 시간쯤 지나야 정상 체온으로 돌아올 거예요. 만약 그동안 체온이 다시 올라간다면 바로 절 불러주세요.”의사가 세심하게 말해주었다.온지유는 주현도의 말을 전부 머릿속에 새겨듣고 있었다.의사가 나간 후 그녀는 딸 옆에 앉아 손을 뻗어 이마를 쓸어주었다.“아가야, 얼른 나아야 해.”한편 여이현 쪽.시동을 걸어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그는 비서에게 전화를 걸었다.“지금 당장 김명자 씨 가정 상황까지 전부 조사해서 나한테 보내요.”집안에 사람이라곤 몇 없었다. 별이는 친동생을 해칠 리가 없었기에 남은 가능성은 김명자였다.소미는 아직 어렸고 별이와 비슷한 또래였기에 절대 그런 짓을 할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여이현이든 온지유든 누구든 소미가 그랬을 거라곤 전혀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빠르게 차는 집 앞에 세워졌다. 여이현은 문을 열고 내렸다. 그가 집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별이가 초조한 얼굴로 맞이했다.“아빠, 하윤이는 어때요?”“괜찮아. 열이 내렸으니까 곧 집으로 돌아올 수 있을 거야. 별이 먼저 들어가서 자. 아빠는 이모님이랑 할 얘기가 있으니까.”여이현은 별이의 등을 토닥이며 말했다.그리고 그는 김명자를 뒷마당으로
“둘 다 아니에요. 최근에 구한 베이비 시터 이모님이 대신 돌봐주고 있었어요.”이렇게 말하니 온지유는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의사가 갑자기 이런 질문을 할 리가 없었기 때문이다.그다음으로 의사는 들고 있던 검사 결과를 그녀에게 건넸다.“하윤이는 중독으로 고열에 시달리고 있는 거예요. 다행히 제때 병원으로 데려와 치료할 수 있게 된 거고요. 만약 한 시간이라도 더 늦게 찾아왔다면 아마 정말로 다시는 못 보게 될 수도 있었을 거예요.”그 순간 온지유는 자신이 잘못 듣기를 바랐다.옆에 있던 여이현이 대신 검사 결과를 받았다. 하얀 종이엔 까만 글씨로 분명하게 적혀 있었다. 온하윤의 혈액에서 대량의 독 성분이 검출되었다고 말이다.“전에 우리 병원에서 베이비 시터가 아기한테 약을 먹이고 찾아온 사례도 있었거든요. 하지만 그 이모님은 수면제를 먹인 거죠. 아기가 자꾸 우니까 수면제를 먹여서 온 하루 자게 만든 거예요. 그런데 이런 경우는 또 처음이네요. 아기한테 독을 먹이다니. 이건 두 분 아기의 목숨을 앗아가려고 계획한 거나 마찬가지예요.”의사는 너무도 황당했다.이렇게나 어린 아기를 죽여서 무슨 이득을 손에 넣을 수 있단 말인가.물론 다른 가능성도 있었다. 그것은 바로 복수.“선생님, 얼른 제 딸 좀 치료해 주세요. 전 어떻게 된 일인지 가서 알아봐야겠어요.”온지유는 여이현을 보았다.두 사람은 함께 보낸 시간이 아주 길었기에 눈빛만으로도 서로의 뜻을 알아챌 수 있었다.“넌 하윤이 곁에 있어 줘. 내가 가서 알아보고 올게.”여이현은 그렇게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온지유는 다시 병실로 들어갔다.작고 작은 몸에 가득 연결된 주삿바늘을 보며 가슴이 찢어질 것 같았다.그녀에게 대신 아파줄 수 있는 능력이 있다면 정말이지 지금 당장 목숨이라도 바꿔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녀는 누군가 이 독을 어린 딸에게 아닌 자신에게 먹인 것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했다.자신이 고통을 받는 건 얼마든지 괜찮았지만 어린 딸이 고통을 받으며 병원에 눈을 감고 누워있는
“엄마, 저도 갈래요.”별이는 온지유를 쫓아가며 큰 소리로 말했다.소미는 무의식적으로 별이를 붙잡으려 했으나 너무도 빨리 달려가는 별이에 공기만 잡았다.현관까지 걸어온 온지유는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려 말했다.“별아, 엄마랑 아빠는 지금 정말로 정신이 없어서 별이까지 챙겨줄 수가 없어. 그러니까 별이는 집에 있어 줘. 집에는 이모님이 있으니까. 그래야 엄마랑 아빠도 마음 놓고 하윤이랑 병원에 갈 수 있을 것 같아.”비록 별이가 얌전하고 병원에 데리고 간다고 해도 칭얼대지 않으며 온하윤까지 돌봐줄 것이지만 병원엔 사람도 많고 그녀와 여이현은 별이에게 신경 써줄 겨를이 없었다. 그러다가 만약 유괴범이라도 섞여 들어온다면 어떻게 하겠는가.만약의 상황을 위해 아이를 집에 두고 나가는 것이 나았다.“네. 그럼 엄마, 하윤이가 나아지면 바로 별이한테도 말해줘야 해요.”별이는 현실적인 문제를 고려하곤 걸음을 멈추었다. 집을 나서는 온지유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속으로는 온하윤이 얼른 나아 건강해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오빠.”현관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자 소미는 인형을 들고 다가왔다.“우리 같이 소꿉놀이하자. 나는 얘 언니 할게, 오빠는 오빠 해.”“미안해, 소미야. 난 지금 소꿉놀이할 기분이 아니야.”별이는 고개를 저었다.지금 아픈 사람은 인형이 아니라 별이의 친동생이었다.그러니 소미와 함께 소꿉놀이할 마음이 있을 리가 있겠는가?소미는 입술을 틀어 물며 손을 뻗어 별이의 팔을 잡고는 작게 물었다.“오빠, 오빠는 하윤이가 아주 아주 좋아?”“당연하지. 난 하윤이가 너무너무 좋아. 나한테 하윤이는 우리 엄마랑 아빠 다음으로 세상에서 제일 소중한 사람이라고.”별이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답했다.별이가 동생을 잘 돌보게 된 것은 여이현과 온지유가 바쁜 이유도 있었고 다른 한편으로 정말로 동생을 좋아했기 때문이다.소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묵묵히 고개를 떨구었다....한편 병원.온하윤이 너무도 어려 병원에 도착하자마자 응급실로 들
소미는 얼른 약병을 숨기며 가방에 넣고는 태연하게 다시 바닥에 앉았다.“소미야, 나 왔어. 방금 뭐 하고 있었어?”별이는 소미의 곁으로 다가갔다. 소미와 함께 놀고 싶었기 때문이다.여하간에 소미는 6살 즈음 되는 어린아이였기에 표정 숨기는 것에 능하지 않았고 별이의 맑은 두 눈을 똑바로 볼 엄두가 나지 않아 고개를 돌리고 말했다.“아무것도 안 했어. 그냥 조금 졸려. 자고 싶어.”“그럼 좀 자. 이모님은?”“내가 배고파서 타르트 만들어 달라고 했어. 근데 지금은 너무 졸리니까 일단 좀 잘게. 이따가 말해.”소미는 소파에서 담요를 끌어당기며 얼굴까지 푹 뒤집어썼다.별이가 온하윤을 엄청나게 좋아했으니 만약 자신이 약을 먹였다는 사실을 별이가 알게 된다면 별이는 더는 자신과 말도 하지 않으려고 할 것이다.하지만 이렇게 하지 않으면 영원히 가족들을 만나지 못하게 된다.여하간에 별이의 부모님을 해치지 않았고 별이한테도 나쁜 짓을 하지 않았는가. 그리고 별이 동생은...아직 어리고 말도 못 하니 여이현과 온지유가 또 한 명 낳으면 된다고 생각했다.빠르게 김명자가 갓 구운 타르트를 들고 돌아왔다.“소미가 방금 막 잠들었어요. 타르트는 여기에 놔주세요. 이따가 소미가 깨면 먹을 거예요.”별이는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 행여나 소미가 깰까 봐 말이다.김명자는 고개를 끄덕였다.별이는 혼자 책을 읽었다. 소미는 처음에 자는 척했지만, 나중엔 정말 자게 되었다.어느덧 해가 뉘엿뉘엿 져버렸다. 김명자는 아직도 깨어나지 않은 온하윤을 보며 이상하게 생각했다.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아이를 본 순간 화들짝 놀라며 말했다.“세상에! 하윤이가 열이 나고 있잖아?”“네? 제 동생이 아파요?!”별이는 고개를 확 들었다.다급했던 별이는 옆에 누가 잠들어있다는 사실조차 신경 쓸 겨를이 없이 일어나 온하윤의 상황을 살펴보려 했다.“도련님, 일단 여기서 지켜보고 있어요. 내가 얼른 사장님이랑 사모님한테 가서 말하고 올게요.”김명자는 별이를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온지유는 소미가 어느 나라에서 왔는지 몰랐다. 그랬기에 종류별로 접시에 담아주었다.“먹어 봐, 입에 맞는 거 있으면 더 가지러 오면 되니까. 하지만 낭비하면 안 돼. 먹을 만큼 가져가야 해. 알았지?”“아주머니가 골라준 거라면 소미는 전부 좋아요.”소미는 정말로 음식을 낭비하지 않았다.온지유가 담아준 음식은 전부 먹어치웠고 수프도 한 방울도 남기지 않고 전부 마셨다.배를 채운 후 여이현은 그들을 데리고 놀이공원으로 향했다. 소미는 처음에 어색해하면서 편히 놀지 못하는 모습을 보였지만 몇 개의 놀이기구를 타고 난 뒤 신나게 놀았다.“오빠, 난 회전목마가 좋아. 우리 한 번 더 타면 안 돼?”“아까 내가 큰 말에 탔으니까 이번엔 네가 큰 말에 타. 내가 작은 말에 탈게.”별이는 소미의 손을 잡았다.두 아이는 아직 어렸기에 위험한 놀이기구는 탈 수 없었다. 어린아이들이 타도 위험하지 않은 놀이기구를 전부 타본 뒤 마지막엔 온지유와 여이현과 함께 관람차를 탔다.관람차가 제일 높은 곳까지 올라갔을 때 소미는 두 손을 꼭 모아 말았다.“관람차가 제일 높은 곳에 올라갔을 때 소원을 빌면 이루어진다고 들었어요. 전 오빠랑 오빠 가족이랑 평생 같이 살고 싶어요.”“그럴 거야.”온지유는 아이를 보며 온화한 표정을 지었다.가족 구성원이 넷이면 아주 좋았다. 다섯이면 더 말할 나위 없이 좋을 것이다.놀이공원에서 나온 뒤 여이현은 호텔로 운전했다. 돌아가는 길에 고속도로를 지나서 온하윤을 태우려고 했다.온하윤은 이틀 동안 아빠와 엄마, 오빠를 보지 못해 반가웠는지 작은 손을 접었다 폈다 하면서 아주 좋아했다.“소미야, 봐봐. 하윤이는 내 여동생이야. 귀엽지?”별이는 소미를 데리고 온지유 옆에 서 있었다. 두 아이는 온지유가 안고 있는 온하윤을 보았다.소미는 조심스럽게 손가락을 온하윤의 입가로 가져다 댔다. 온하윤은 먹을 것인 줄 알고 혀를 내밀며 소미의 손을 깨물려고 했다.여이현은 얼른 소미를 안아 올렸다.“안 돼. 하윤이한테 손가락 물리면 안
“그래, 별이한테도 친구가 생겼으니 우리도 둘만 있을 시간이 더 많아지겠지.”여이현은 손가락으로 온지유의 손등을 천천히 쓸어내렸다.따듯하면서도 간지러웠다.온지유는 붉어진 얼굴로 그를 밀어냈다.“그러지 마. 아이들이 밖에 있다고. 만약 소리를 듣기라도 한다면 안 좋아.”별이는 아주 똑똑한 아이였다. 만약 별이가 그것이 무슨 소리냐고 묻는다면 온지유는 정말로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그녀는 정말이지 너무도 민망했다.“이 호텔은 방음이 아주 잘 되어 있어. 더구나 꼬맹이들은 지금 티브이에 정신이 팔렸잖아. 그래도 걱정된다면 티브이 음량을 더 높이면 되지.”온지유가 반박의 말을 하기도 전에 여이현은 이미 손을 뻗어 리모컨을 들고 오더니 음량을 두 개 정도 높였다.그리고 몸을 돌려 그녀에게 키스했다.그의 리드에 온지유는 몸이 녹아내릴 것 같았다.하늘에 어둠이 깔리고 나서야 두 사람의 몸은 떨어지게 되었다. 온지유는 티브이를 끈 뒤 녹초처럼 침대에 흐느적 누웠다.땀에 몸은 끈적거렸기에 너무도 샤워하러 욕실로 들어가고 싶었으나 움직이는 것이 귀찮았다.여이현은 욕실로 들어가 욕조에 따듯한 물 받아놓았다. 그리고 다시 나와 온지유를 안은 후 천천히 그 욕조 안으로 내려놓았다.온지유는 몸을 감싸는 따듯한 온기에 온몸이 나른해졌다.“지유야.”여이현이 나직하게 그녀를 불렀다. 그의 목소리는 너무도 매혹적이었다.“나 오늘 너랑 같이 자면 안 될까?'온지유는 하마터면 그의 목소리에 홀려 고개를 끄덕일 뻔했다.다행히도 정신이 번쩍 들어 그의 요구를 거부했다.“안 돼. 꿈도 꾸지 마. 내일 아이들이랑 놀이공원도 가기로 했단 말이야.”이미 조금 전의 일로 힘이 전부 빠진 그녀였다. 만약 또 반복하게 된다면 내일은 아마 눈을 뜰 수 없을지도 모른다.여이현은 점점 더 짙은 미소를 지었다.“얼른 씻어. 밖에서 기다릴게.”그도 온지유를 피곤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목욕을 마친 온지유는 샤워 가운을 입고 나와 의자에 앉았다. 그러자 여이현은 자연스럽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