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용민은 깊고 날카로운 눈빛으로 배진호를 쏘아보듯 바라보며 말했다.“진호 씨가 아무리 성공했어도 결국은 남의 밑에서 일하는 사람일 뿐이죠. 내 딸은 최고의 것을 누릴 자격이 있습니다. 다솔이가 경험을 쌓고 싶어 했다고 해서 그저 평범한 사람으로 여겨선 안 돼요.”권용민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그의 말은 매우 공격적이었다.배진호는 여이현 곁에서 오랜 시간 동안 자신의 능력을 증명하며 존경받아 왔다. 많은 사람들이 여이현과의 관계를 이유로 그를 존중했고 그의 뛰어난 능력 또한 경외의 대상이었다.여이현처럼 까다로운 기준을 가진 사람 곁에 남아 있는 것은 능력이 탁월한 자들만 가능한 일이었다.그러나 권용민의 앞에서 배진호는 모든 것이 무의미해 보였다.배진호는 조용히, 그러나 단호히 말했다.“아버님, 제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제 직업이 다솔 씨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하실 수도 있다는 것도요. 하지만 저는 다솔 씨를 진심으로 사랑합니다. 다솔 씨가 입사했을 때부터 저는 다솔 씨의 신분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저희는 각자의 능력으로 이 자리에 올랐습니다. 만약 직업이 문제라면 제 회사를 설립할 수도 있지만 지금의 제가 있기까지는 모두 대표님 덕분입니다. 그래서 될수록 이 자리를 지키고 싶습니다. 이 일을 포기한다는 것은 제 자신을 부정하는 것과도 같습니다.”그의 말은 단호했으며 은혜를 배신하지 않겠다는 의지가 강하게 보였다.게다가 지금 여이현은 아이와 온지유에게 집중하고 있어 배진호와 권다솔이 모두 떠난다면 큰 손실을 입을 것이 분명했다.권용민은 차갑게 말을 이었다.“지금 당장 내 앞에서 전업하겠다고 한다 해도 딸을 내줄 생각은 없습니다.”그는 권다솔을 날카로운 눈빛으로 보며 덧붙였다.“이제 충분히 놀았으면 집으로 돌아와라. 내가 직접 나서서 너를 데려가고 싶지는 않다.”그 말을 남기고 권용민은 뒤돌아보지 않고 떠났다.비록 강제로 딸을 데려가진 않았지만 그의 생각과 입장은 명확히 전달되었다.권다솔은 배진호를
권다솔은 배진호를 가볍게 안고 말했다."제가 여진 그룹에 온 건 스스로를 성장시키고 싶어서였어요. 진호 씨 도움 덕분에 정말 많이 배웠지만 언젠가 저는 이 회사를 떠날 거예요. 진호 씨, 저는 진호 씨가 더 멋진 사람이 되길 바라요. 누군가의 그림자에 가려진 채로 살지 않길 바란다는 뜻이에요. 이해하죠?"그녀는 단지 배진호가 더 나은 삶을 살길 바랐던 것뿐이다. 물론 그가 남기로 고집한다면 그녀가 더 이상 관여하지 않을 것이다.하지만 사람이라면 더 높은 곳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 그럴 수 있는 자리에 서 있는데 왜 낮은 곳에 머물러야 하겠는가?“알겠어요. 하지만 다솔 씨, 저는 평생 대표님을 따를 겁니다. 아버님 쪽은 제가 잘 설득해 볼게요. 아버님이 끝내 반대한다면...”배진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권다솔은 단호한 표정으로 돌변했다."진호 씨, 진호 씨는 경험도 많잖아요. 아버지가 안 된다고 하면 정말 안 되는 거예요?"권다솔은 화가 치밀었다.그렇게 힘든 순간도 함께 버텨냈는데 이제 와서 아버지의 반대 때문에 배진호는 포기하려는 거란 말인가.만약 정말 포기한다면 그들 사이의 감정은 너무나도 하찮은 것이 되고 말 것이다.배진호는 한숨을 쉬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안 된다는 뜻이 아니에요. 아버님이 우리를 허락하도록 최선을 다할 겁니다. 하지만 끝까지 반대한다면 다솔 씨를 억지로 붙잡거나 혼인신고를 강행할 수는 없어요. 그런 건 옳지 않잖아요."그는 축복받지 못한 사랑을 하고 싶지 않았다. 또 모두가 반대하는 결혼식은 더더욱 원하지 않았다.권용민의 말대로 권다솔은 더 나은 대우를 받을 자격이 있었다.권다솔은 화가 나면서도 웃음이 났다."반대한다고요? 기정사실화라는 건 몰라요? 아이가 생기면 반대할 방법도 없어질 거예요.""그렇겠죠. 하지만 나는 그런 일을 할 수 없어요. 만약 내 딸이 누군가에게 그렇게 끌려가고 마음에 들지 않는 남자의 아이를 가졌다면 나도 정말 분통이 터질 거니까요."배진호는 그렇게 말하며 권다솔의 어깨를 단단히
배진호가 백일잔치에서 청혼했기에 여이현은 아주 잘 기억하고 있었다.배진호와 권다솔은 그의 왼팔과 오른팔이었을 뿐 아니라 믿을 만한 부하직원이었다.“아마 결혼하지 못할 것 같아요.”배진호는 여이현에게 솔직하게 말했다.여이현은 바로 눈치를 챘다. 권다솔의 집안에서 배진호와의 결혼을 반대하고 있다는 것을. 반면 배진호의 집안에서는 오히려 결혼을 재촉하고 있었다. 여하간에 배진호도 나이를 먹을 만큼 먹었으니까.여이현은 그런 배진호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열심히 노력하면 언젠가 할 수 있을 거예요. 일단 휴가를 줄게요. 먼저 권다솔 씨 마음부터 완전히 얻고 장인어른이 그쪽 집안 사업을 이으라고 하면 가요. 여긴 내가 다른 비서를 새로 또 뽑으면 되니까. 여하간에 배 비서 인생보다 중요한 일은 없잖아요.”여이현은 진심을 담아 말했다. 배진호는 그와 오랫동안 같이 일을 해온 사람이었다. 대충 계산을 해보아도 10년은 훌쩍 넘었다.배진호는 그의 비서였을 뿐 아니라 친구이자 형제, 가족 같은 사람이었다.배진호에게 더 좋은 선택이 있다면 그는 축복해줄 뿐 아니라 배진호를 도와줄 마음도 있었다.애당초 그가 바라던 일에 배진호의 도움이 없었다면 완성할 수조차 없었을 것이다.“대표님, 전 이미 대표님 곁에서 평생 일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그런 제가 만약 사직서를 낸다면...”배진호는 마음이 무거워졌다.여이현은 나직하게 웃었다.“배 비서가 행복해지는 길이라면 난 괜찮아요. 오히려 기쁘기만 한데 내가 왜 배 비서가 날 배신했다고 생각하겠어요? 그리고 내 곁에서 일한 게 어디 하루 이틀도 아니잖아요. 배 비서, 배 비서가 사직한다면 물론 나도 처음엔 많이 힘들겠죠. 그래도 세상엔 인재가 많잖아요. 배 비서처럼 일 잘하는 비서로 새로 뽑거나 키우면 되는 거지만 행복해질 기회는 많지 않아요.”그는 배진호 없이 일을 못 하는 것은 아니었다. 물론 그도 배진호가 곁에 남아주길 바랐지만, 자신의 이기적인 마음으로 배진호의 행복을 방해할 수는 없었다.“가요. 배 비서가
김영은은 배진호가 이렇듯 단호할 줄은 몰랐다.그럼에도 그녀는 배진호에게 분명하게 말했다.“배진호 씨, 만약 배진호 씨가 한 아이의 부모라면 이미 성공을 이룬 사위와 창업을 시도하고 있는 사위 중 누굴 선택하겠어요?”“전 전자를 선택할 겁니다. 하지만 어머님, 전 그래도 제게 한 번만이라도 기회를 주셨으면 합니다. 전 쓸모없는 사람은 아니거든요.”배진호는 단정한 자세로 김영은 앞에 서 있었다. 그래서인지 유난히도 확고해 보였다.그는 여러 방면에서 유능한 인재였다.특히 그의 일거수일투족에선 상인의 기질이 보였고 왕자의 기품도 느껴지기도 했다.여하간에 여이현의 곁에서 10년을 넘게 일한 사람이었으니 어쩌면 당연했다.하지만 배진호와 여이현을 비길 수는 없었다. 여이현의 등 뒤로 여진 그룹이 있었을 뿐 아니라 온지유의 친부와 여이현의 친부 또한 높은 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이었다.여이현이 아무리 배진호를 가족처럼 여긴다고 해도 배진호는 그저 비서일 뿐이다.여진 그룹을 배진호에게 넘겨줄 리도 없었다. 배진호는 여이현의 은혜를 입고 성공을 한다고 해도 절대 여이현을 공격하는 어떠한 짓도 하지 않을 것이었다.다정 그룹은 경성의 일인자 자리를 노리고 있었다.배진호는 아무런 뒷배경도 없었고 지위도 없었다. 그들에게 도움이 되어주지도 못하는데 굳이 왜 이런 그를 사위로 받아들이겠는가.그렇다고 해서 배진호에게 자선 사업을 할 수는 없지 않은가. 모든 걸 배진호에게 넘길 수도 없었다. 넘기는 순간 여진 그룹과 합쳐질 가능성이 있으니까.김영은도 원래 이런 말을 꺼내고 싶지 않았으나 해야 할 것 같았다.그녀는 차갑게 말했다.“다솔이를 사랑하는 것 외에 가진 게 뭐가 있죠? 그동안 여진 그룹을 위해 충성을 다 한 거? 하지만 우리 다솔이는 어릴 때부터 귀하게 자랐어요. 좋은 것만 먹고, 좋은 것만 입고, 좋은 것만 보고 자랐다고요. 권씨 집안에서 누린 모든 것이 배진호 씨와 함께 사는 것보다 좋을 거예요.”“배진호 씨, 그래도 포기가 되지 않는다면 나랑 다솔이
심지어 김영은은 권다솔을 혼내기도 했다.“이미 선 자리 알아봤으니까 집안에 얌전히 있어. 이따가 맞선 상대가 집으로 올 거야. 네 아빠 심기를 거슬러서 또 집에 갇혀 지내고 싶지 않은 거라면 얌전하게 있는 게 좋을 거야!”소파에 앉은 김영은은 엄격한 눈빛으로 그녀를 보았다. 그 기세는 엄청났다.이때 아픈 척하고 있던 권용민이 나왔다.“네 엄마도 마음이 약해져서 그 자식을 집안까지 들인 거야. 만약 나였으면 곱게 돌려보내지 않았을 거라고. 계속 포기하지 않을 거라고 하면 사람을 불러 쫓아냈을 거야!”권다솔은 숨 막혔다.자신의 부모님의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올 거라곤 전혀 상상도 못 했다.그녀의 부모님은 늘 다정하고 지식이 많은 사람이었다. ‘성공한 사람' 같은 단어가 그들의 입에서 나올 줄 몰랐다. 심지어 억지로 맞선 자리까지 만들다니.대체 그녀를 뭐로 생각한 걸까?상품처럼 팔아버리려는 걸까?권다솔은 자조적으로 말했다.“우리 가문이 크면 얼마나 크고 재산이 많으면 얼마나 많다고요. 대체 언제쯤이 되어야 만족하실 건데요. 대체 언제 욕심을 그만 부릴 건데요?!”“여이현은 경성 일 인자예요. 차라리 여이현을 사위로 맞이하시지 그래요?”권다솔은 이성을 잃고 말았다. 하지만 그녀의 탓이라곤 할 수 없었다. 여하간에 그녀의 부모님이 먼저 심한 말을 했으니까.그녀의 부모님은 그녀의 말대로 여이현을 사위로 맞이할 생각도 한 적 있었다. 하지만 여이현에겐 이미 아내가 있었고 여이현은 가정에 충실했을 뿐 아니라 아내를 너무도 사랑했기에 그들에겐 방법이 없었다.권다솔은 두 사람의 눈빛에서 모든 걸 눈치채게 되었다. 순간 모든 것이 가소로웠다.“저더러 굳이 여진 그룹의 비서로 입사하라고 했던 게 이제야 이해가 가네요. 두 분 모두 그런 생각을 하고 있으셨던 거네요!”어떻게든 여이현의 곁에 붙어야 가망이 있을 수 있었으니까.“여이현은 유부남이에요. 아이도 있는 사람인데 괜찮으신 거예요? 아이까지 딸린 유부남도 사위로 받아들일 수 있으면서 왜 어떻게든 노
권용민은 가슴을 움켜쥐었다.“다솔아, 그 자식을 위해 지금 목숨으로 우리를 협박하는 거냐?”김영은은 순간 불안해졌다.“다솔아, 네 아빠 몸 안 좋은 거 알잖니. 얼른 그 칼을 내려놔. 네 아빠 화나게 하지 마. 그러다 쓰러져!”권다솔은 과도를 내려놓지 않았다. 오히려 피식 웃었다.“엄마는 항상 제게 아빠 화나게 하지 말라고, 상처받게 하지 말라고 하시네요. 그럼 두 분은요? 두 분이 저한테 상처 줬다는 생각은 안 해보셨어요? 전 지금까지 늘, 계속 얌전하게 지냈어요. 두 분이 원하는 대로 하면서 두 분을 만족시켜드리려고 노력했죠.”“여진 그룹 비서 일도 말이에요. 두 분은 제게 다른 사람처럼 직장인 체험도 해봐야 한다고 하시면서 보냈죠. 하지만 그 결과는 어떻게 됐는데요?”“학교 다니면서도 전 연애 한 번 못 해 봤어요. 남자친구 사귀어 보려고 노력도 안 해봤죠. 이제 겨우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는데, 진호 씨가 저한테 얼마나 잘해주는데, 대체 왜 반대하시는 거죠?”“배진호 씨가 엉망인 사람은 아니잖아요. 아닌가요?”만약 배진호가 엉망인 사람이었다면 여이현도 그를 비서로 뽑을 리도 없고 10년 넘게 곁에 두고 함께 일하지도 않았을 것이다.배진호는 아주 능력 있는 사람이었다. 업계에서도 어떻게든 배진호를 자신의 회사로 빼앗아 오려고 하기도 했었지만, 배진호는 전부 거절했다.그는 여이현에게만 뚝심 있게 충성을 다했다.이런 사람을 두 사람은 왜 믿지 않는 것일까?여이현이 사라진 5년 동안에도 배진호가 여진 그룹을 관리하고 있었다. 하지만 배진호는 그 5년 동안 단 한 번도 여진을 탐낸 적도 없었고 배신한 적도 없었다.배진호에겐 따라 배울 점이 많았다.김영은은 권다솔의 목에서 흐르는 피를 보았다. 순간 가슴이 덜컥 내려앉으며 긴장해졌다.“얼른 내려놔. 배진호 씨도 엉망인 사람이 아니야. 나랑 네 아빠는 네가 더 좋은 사람과 결혼해서 행복하게 살길 바랄 뿐이었어.”“하지만 두 분은 돈이 많은 사람이 더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계시잖아요.
“다솔 씨를 찾아간 그날, 다솔 씨 부모님이 막아섰죠? 두 분이 원하는 게 뭐라고 하던가요? 내가 도와줄 건 없어요?”여이현은 이런 일에 있어 배진호에게 선배나 마찬가지였다. 그랬기에 배진호가 부딪친 문제에 대해서도 아주 잘 알고 있었다.배진호는 더는 권씨 가문에 대해 말을 하고 싶지 않았다.“대표님, 저랑 다솔 씨는 이미 끝난 사이입니다.”여이현은 두 사람이 이렇게나 빨리 헤어질 줄은 몰랐다. 하지만 배진호는 방금 권다솔에게 청혼하지 않았던가.만약 권다솔이 배진호를 싫어했다면 배진호와 연인 사이가 될 리가 없었을 뿐 아니라 청혼을 받아들일 리도 없었다.그랬기에 두 사람의 사이는 배진호의 일방적인 관계 정리인 것이다.권다솔 부모님의 반대로 말이다.여이현도 예전에 이런 일을 겪었었다. 배진호와 권다솔이 서로 얼마나 좋아하는지 알고 있었던 여이현은 이렇게 끝내게 놔둘 수는 없었다.“다솔 씨도 배 비서를 좋아하고, 배 비서도 다솔 씨를 좋아하는데 이렇게 포기하려고요? 아쉽지 않아요?”여이현은 손에 들고 있던 서류를 내려놓고 배진호 앞으로 다가갔다.“게다가 배 비서 나이도 먹을 만큼 먹었잖아요. 겨우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고 연인 사이가 되었는데 함께 시간을 보내지 못할망정 이렇게 포기한다고요?”“다솔 씨도 헤어지겠다고 해서 헤어진 거예요? 만약 부모님의 반대 때문에 그런 거라면 어떻게든 설득하면 되잖아요. 두 사람의 사이를 응원할 수 있게 말이에요.”여이현은 손을 배진호의 어깨에 올렸다.“두 사람은 태도가 보고 싶으셨던 거예요. 배 비서가 회사를 차리게 되면 내가 전적으로 후훤해줄게요. 돈이 필요하면 돈도 줄게요. 필요한 게 있으면 전부 가져가도 돼요. 만약 두 분이 원하는 게 여진 그룹이라면... 그것도 줄게요. 여진 그룹에 배 비서가 없었다면 지금도 멀쩡히 남아있었을 리가 없었을 테니까요.”애당초 그는 여진 그룹을 온지유에게 주었다. 하지만 온지유가 싫다고 하면서 모든 지분을 고모인 여희영에게 선물했다.그런데 여희영은 온지유가 돌아오자
권다솔의 질책하는 눈빛에 마음을 다잡았던 배진호는 순간 마음이 무거워지면서 아팠다.고개를 돌려 일부러 그녀의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다솔 씨 부모님께서 하신 말씀이 맞아요. 두 분도 다솔 씨를 위해서 한 말이잖아요. 저 같은 일개 비서가 다솔 씨가 원하는 걸 해줄 수 없을 거예요.”“거짓말! 속으로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지 않잖아요! 만약 그런 거라면 왜 지금 내 시선을 피하고 있는 건데요?”“다솔 씨...”“내 두 눈을 보면서 헤어지자고 말하기 전까지 난 믿지 않을 거예요. 진호 씨가 무슨 말을 하든 말이에요.”말을 마친 권다솔은 바로 나가버렸다.얼마 지나지 않아 여이현이 다시 들어왔다. 배진호는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배 비서가 이렇게 고개를 푹 숙이고 이는 모습은 처음이네요. 왜요, 잘 안 돼요?”배진호는 입꼬리를 올리며 씁쓸하게 웃었다.“직접 두 눈을 보면서 헤어지자고 말하기 전까지 믿지 않겠대요. 제가 어떻게 그런 말을 꺼낼 수 있겠어요?”“그런 거라면 더는 망설이지 말아요. 다솔 씨 부모님이 배 비서를 무시하고 있는 거라면 회사를 만들어 증명해 보이면 되는 거잖아요. 내가 알고 있는 배 비서는 쉽게 포기하는 사람이 아니에요.”그는 멍한 표정으로 여이현을 보았다. 조금 감동이었다. 그의 눈빛에도 다시 생기가 돌았다.얼른 밖으로 나가 권다솔을 붙잡으려고 했으나 권다솔은 애초에 떠나지 않았다.그저 회사 카페에 앉아 망연자실한 얼굴로 창밖을 보고 있었다.직원이 그녀에게 다가가 물었다.“주문을 도와드릴까요?”“카푸치노 한 잔 주세요.”직원은 바로 걸음을 옮겼다.카페에선 부드러운 바이올린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러나 권다솔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머릿속에 온통 그녀의 시선을 피하는 배진호의 모습뿐이었다. 그는 일부러 그녀를 피하고 있었다.“나쁜 놈! 누가 어울린다는 둥 안 어울린다는 둥 하는 말이 대체 뭐가 중요하다고! 내가 좋아하는 거면 되는 거 아닌가?”권다솔은 씩씩대며 가방을 테이블 위로 쾅 내려놓았다. 눈가가 촉
온지유는 고개를 끄덕였다. 비록 노래를 잘 부르는 것은 아니나 음치는 아니었다.별이는 기쁜 얼굴로 손뼉을 쳤다.“너무 좋아요. 아빠, 엄마, 내일 어린이집에서 가족 이벤트를 한다고 했어요. 노래 대회라고 했는데 별이랑 같이 참가해줄 거죠?”내일은 주말이었다. 어린이집에서 주말에 이런 이벤트를 계획한 것도 평일 출근할 학부모를 고려해서였다.만약 여이현에게 다른 일정이 없다면 당연히 아내와 함께 별이의 어린이집으로 갈 것이었지만 하필이면 새 프로젝트를 맡게 되었다.배진호는 권다솔의 마음을 되돌리느라 시간이 없으니 그가 해야 했다.“여보, 여보가 별이랑 같이 가줘. 난 그날 거래처 만나봐야 하거든.”신호를 기다리는 틈을 타 여이현이 온지유에게 말했다.온지유는 당연히 고개를 끄덕였다.아이의 일에 부모 모두 책임을 져야 했지만 두 사람은 부부였던지라 서로 이해하고 배려하는 것도 필요했다.여이현이 바쁘게 일하는 것도 더 유복하고 행복한 가정을 만들기 위함이라는 것을 온지유도 잘 알고 있었다.별이는 더욱 배려심이 깊은 아이였다. 고집을 부리지도 않고 온지유의 팔을 꼬옥 잡아 기대며 말했다.“그럼 아빠는 일하러 가세요. 별이는 엄마만 있어도 괜찮아요. 선생님도 두 분 중 한 명만 있어도 된다고 했어요. 물론 두 분이 같이 가면 더 환영한댔어요.”집으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 세 사람은 웃고 떠들다 보니 어느새 집에 도착했다.세 사람이 돌아왔다는 것을 눈치채기라도 한 것인지 자고 있던 온하윤도 눈을 떴다. 작은 입을 벌리며 하품했다.옆에 있던 김명자는 얼른 주방으로 가서 분유를 탄 뒤 온하윤의 입에 물려주었다. 향긋한 분유 냄새를 맡은 온하윤은 꿀꺽꿀꺽 젖병을 빨아 먹었다.세 사람이 집 안으로 들어왔을 때 마침 이 모습을 보게 되었다. 너무도 행복했다.“오늘 저녁은 내가 할게. 별이가 먹고 싶다는 햄버거를 만들고 있을 테니까 당신은 아이들이랑 놀아줘.”온지유는 여이현에게 뽀뽀한 뒤 앞치마를 두르곤 주방으로 들어갔다.거실에선 웃고 떠드는 소리가 울
권다솔은 이혼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바로 결혼할 수 없었다.게다가 남태건과 평생 묶여 살고 싶지도 않았다.설령 어젯밤 이상한 약물 탓에 그와 밤을 보내게 되었다고 해도 그녀의 마음속엔 온통 배진호뿐이었다. 오늘 아침 눈을 떴을 때 그녀의 온몸이 남태건의 터치를 거부하고 있었다. 설령 그저 손을 잡는 것일 뿐이라고 해도 말이다.남태건은 잔뜩 실망한 기색이었지만 포기하지 않았다.“그래, 일단 생각은 해봐. 다솔아, 급하게 답을 주지 않아도 돼.”그녀가 계속 거절한다면 그녀의 부모님을 찾아가 설득하면 그만이었다.권다솔의 부모님은 그를 아주 좋아했다. 어떻게든 그녀와 이어주려고 했으니 그들과 손을 잡는다면 권다솔과 결혼할 수 있을 것이다.권다솔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설령 오랫동안 생각을 해본다고 해도 남태건을 받아줄 리가 없었다....한편 온지유 쪽.권다솔이 떠난 후 두 사람은 서로 연락하지 않았다.그동안 여이현은 배진호를 찾아간 적 있었다. 기획하고 있던 프로젝트를 넘겨주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배진호는 집안일로 상태가 아주 좋지 못했다. 지금까지 혼자 회사를 운영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힘들어 보였으며 새로운 프로젝트를 맡을 기력은 없었다.배진호는 여이현의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아 솔직하게 말했다.그가 솔직하게 말하니 여이현도 강요하지 않았다.“일단 집안일부터 처리하세요.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 말하고요. 집안일이 어느 정도 정리가 되면 나한테 다시 찾아와도 돼요. 그때 또 새로운 일을 줄 테니까요.”여하간에 여진 그룹은 대기업이었기에 프로젝트는 언제든지 있었다.한번 기회를 놓친다고 해서 문제가 될 건 없었다.배진호는 그런 여이현이 너무도 고마웠다. 이미 충분히 그를 도와주고 있었다.하지만 감정이라는 건 결국 사람마다 다르게 느끼는 법이었다. 물을 마셔도 뜨거운 것인지 차가운 것인지 본인만 아는 것처럼 말이다. 너무 많은 사람이 끼어들면 때로는 오히려 역효과를 일으킬 때도 있었다.그는 권다솔과 다시 함께 살고 싶었지만, 전제가
“참.”권다솔은 갑자기 걸음을 멈추었다.“체크아웃 해야겠어요.”“그럴 필요 없어. 어젯밤 방은 내가 예약한 거거든. 우린 그냥 바로 병원으로 가면 돼. 나머진 내가 알아서 다 처리할 거야.”남태건은 급하게 그녀를 말렸다.두 사람이 나가자마자 배진호가 돌아왔다.그의 손에는 금방 만든 샌드위치가 있었다. 맛집으로 소문난 가게였던지라 그는 족히 반 시간은 기다려서야 살 수 있었다.하지만 괜찮았다. 권다솔이 좋아하기만 한다면 반 시간이든 한 시간이든 얼마든지 기다릴 수 있었다.“손님.”이때 로비 직원이 그를 불렀다.그녀는 배진호를 측은한 눈길로 보았다. 즐거운 마음으로 아침을 사러 나갔다가 그의 여자친구가 다른 남자와 함께 떠나버렸기 때문이다. 그 사실을 모르는 그는 다시 호텔로 돌아왔다.직원은 결국 참지 못하고 말해주었다.“여자친구분이 이미 떠나셨어요. 체크아웃하시겠어요?”“네, 체크아웃할게요.”배진호는 멍한 표정을 지었다.잠에서 깨어난 권다솔이 그에게 말도 없이 가버린 것을 보면 아직 그를 어떻게 마주해야 할지 모르는 것 같았다.그래서 그가 나간 사이에 생각을 정리할 겸 먼저 가버린 것으로 생각했다.체크 아웃을 한 뒤 배진호도 호텔에서 나왔다.그는 누군가 자신을 사칭하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다.남태건은 권다솔을 데리고 병원으로 온 뒤 기본적인 검사를 진행했다. 권다솔은 아주 건강했다.하지만 그녀는 기쁘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의 두 눈에서 눈물이 똑똑 떨어지고 있었다.“다솔아, 나랑 함께 밤을 보낸 게 그렇게 슬픈 일이야? 너한테 나는 그런 존재였어?”그녀를 집으로 데려다주던 남태건은 눈가가 붉어졌다.권다솔은 오직 배진호만 원했다. 그 사실에 그는 가슴이 쓰라리면서 분노가 치밀었다.그는 이미 권다솔을 자신의 아내로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배진호는 그의 아내와 밤을 보내지 않았는가.권다솔은 고개를 저었다.“그런 게 아니에요. 전 그냥 이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을 뿐이에요. 전 태건 씨를 여전히 친구로만 생각하고 있거든요.
권다솔은 눈을 떴다.옆에 누워있는 남태건을 본 순간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머릿속도 하얘졌다.그녀는 힘겹게 입을 뗐다.“어젯밤에... 그럴 리가 없잖아요?”머릿속에 남아 있던 기억이 알려주고 있었다. 어젯밤 그녀와 함께 있었던 사람은 배진호라고. 하지만 왜 남태건이 눈앞에 있는 것일까?그녀는 이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다솔아, 내가 어제 일찍 집에 들어가라고 했잖아. 그런데 네가 싫다면서 나더러 먼저 가라고 했지. 내가 어떻게 너만 혼자 남겨두고 집에 가? 주위에 남자들이 득실거리는데. 정말로 내가 먼저 갔다면 이상한 파리들이 너한테 꼬였을 거라고. 내가 그렇게 경계하고 있었는데도 너한테 파리가 꼬였을 줄은 몰랐네.”남태건은 태연하게 거짓말을 해댔다.얼굴도 붉지 않고 가슴도 요동치지 않을 정도로 태연했지만 두 눈엔 안타까움만 남아 있었다.“누가 네 술잔에 뭔가를 탔어. 그걸 눈치 못 챈 네가 주스를 가지러 갈 때 결국 정신을 잃게 되었었지. 하마터면 처음 보는 놈들에게 끌려갈 뻔한 걸 내가 막은 거야.”권다솔은 어젯밤 있었던 일을 기억해내려고 애를 썼다.그녀는 확실히 자신에게 치근대던 남자가 있다는 것을 기억해냈다. 그녀에게 손을 대려고 했으나 배진호가 나타나 남자를 때려주며 무사하게 되었다.분명 기억하고 있었다. 자신을 구해준 사람이 배진호라는 것을. 애초에 남태건이 아니었다.“정말로 절 구해준 사람이 태건 씨예요? 거짓말 하고 있는 건 아니죠?”권다솔은 반신반의하며 말했다.남태건은 손을 번쩍 들며 맹세했다.“당연히 거짓말이 아니야. 어젯밤 널 구한 사람이 내가 아니라면 내가 어떻게 너랑 같은 방에 있겠어? 다솔아, 그 약은 아주 위험한 약이야. 사람 기억까지 흐릿하게 만들 수 있는 약이지. 이따가 나랑 같이 병원에 가자. 후유증이라도 남으면 안 되잖아.”기억까지 흐릿하게 만든다는 말에 권다솔은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설마 진호 씨랑 보낸 시간이 전부 꿈인 거야? 약 때문에 환각이 생긴 거야?'그녀는 어제 꿈속에서 배
만약 권다솔이 모른다고 한다면 그는 이곳을 떠나 그녀가 푹 쉴 수 있게 해줄 생각이었다.그는 알고 있었다. 권다솔이 취했다는 것을. 술에 취한 사람과 억지로 하고 싶지 않았다.“진호 씨, 내가 어떻게 진호 씨 얼굴을 잊겠어요. 설마 내가 진호 씨를 못 알아볼 거로 생각한 거예요?”권다솔은 그를 보았다.그녀는 지금 술기운이 올라오고 있었다. 호텔 불빛 아래 보이는 배진호의 얼굴도 흐릿했다.이 모든 게 꿈일 거로 생각했다.현실에서는 감정을 꾹꾹 누르고 있었으니 꿈에서만큼은 전부 표현하리라 생각했다.그녀는 한번 또 한 번 배진호의 이름을 불렀다.그저 그의 이름을 불렀을 뿐인데 배진호는 이성을 잃고 말았다.그는 옷을 하나씩 벗으며 방 안의 불을 꺼버렸다. 그리고 고개를 내려 권다솔에게 키스했다. 두 사람은 뜨거운 키스를 나누었다.얼마나 지났을까, 두 사람은 전부 힘이 빠진 상태였다. 그제야 서로에게서 떨어졌다.권다솔은 몸에 힘이 하나도 없었다. 손가락 하나조차 움직일 수 없었기에 샤워하는 것은 더욱 불가능했다.그래서 그대로 눈을 감고 자버렸다.그날 밤, 그녀와 배진호는 그 어느 때보다 푹 자게 되었다.다음 날 아침이 되자 열린 커튼 틈 사이로 햇볕이 들어와 배진호는 눈을 뜰 수밖에 없었다.옆에 누워있는 권다솔을 본 그는 전례 없던 행복을 느끼게 되었고 이대로 시간이 멈추길 바랐다.그는 권다솔에게 이불을 덮어준 뒤 옷을 입었다. 아침을 사러 갈 생각이었다.어젯밤 두 사람은 아주 격렬하게 서로를 원했기에 권다솔이 깨어나면 분명 배고플 것이었다.아침을 먹은 후에 두 사람을 편히 잠 못 이루게 했던 문제들을 해결해볼 생각이었고 이혼도 취소할 생각이었다.그는 그렇게 호텔을 나섰다.그 모습을 마침 남태건이 목격했다. 그는 어젯밤 내내 권다솔을 찾아다니느라 잠도 자지 못했지만 찾지 못했다.조급해진 그가 경찰에 실종 신고를 하려던 때 배진호를 발견하게 된 것이다. 심지어 배진호는 호텔에서 나왔다.그렇다는 건...남태건은 이를 빠득 갈며 호텔
남자는 머리가 어질거렸다. 고개를 들자 보이는 잔뜩 화가 난 배진호의 얼굴에 그는 꼬리를 내리게 되었고 이내 배진호에게 비위를 맞추려고 했다.“깼어요, 깼어요. 이 여자는 형님한테 넘길게요. 두 사람 방해하지 않고 바로 여기서 꺼져드릴 테니까 형님은 천천히 즐기십시오!”“여자도 사람이야. 우리랑 같은 인간이라고. 물건처럼 넘기느니 마느니 할 자격 없어, 너한테.”배진호는 손을 뻗어 남자의 멱살을 잡으며 엄숙하게 경고했다.그는 방금 이곳에서 나는 소리를 들었다. 나서서 도와준 이유는 아무 잘못도 없는 여자가 괴롭힘당하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그저 한 몫 챙겨보려고 구하러 온 것이 아니었다.그의 마음속에 권다솔 외에는 누구도 들어올 수 없었다.“네, 네. 지당하신 말씀이십니다.”남자는 바닥을 기어 다니더니 빠르게 몸을 일으켜 도망쳤고 중얼거리며 배진호를 욕했다.‘어디서 허세를 부려!'‘세상에 욕망이 없는 남자가 어디에 있다고! 다들 여자를 원한다고!'배진호는 쫓아가지 않았다. 고개를 돌려 방금 남자에게 당하고 있었던 여자에게 밤늦게 술집에 왔을 땐 조심하라고 말하고 싶었다.그런데 그는 권다솔을 발견하게 되었다.“진호 씨? 내가 지금 헛것을 보고 있는 건 아니죠? 진호 씨가 왜 여기에 있어요?”권다솔은 그를 향해 한 걸음씩 다가갔다.그녀는 눈앞에 있는 남자를 보았다. 자신이 그렇게나 그리워했던 남자가 지금 바로 눈앞에 있자 땜이 무너져버린 저수지처럼 감정이 흘러나왔다.이 모든 것이 꿈만 같았다.권다솔은 속으로 자신에 말했지만, 여전히 참지 못하고 손을 뻗게 되었다. 배진호를 직접 만지며 꿈인지 현실인지 확인하고 싶었다.“나예요. 우리가 같은 목적으로 여기에 온 것 같네요.”배진호는 씁쓸하게 웃었다.방금 그는 차를 몰고 이곳으로 오면서 안에서 빛나는 불빛 보며 생각했었다. 만약 이곳에 권다솔이 있다면 분명 안으로 들어가 한잔 마셨을 것이라고.그 생각으로 이 안까지 들어온 것이다.그러나 그는 정말로 이곳에서 권다솔을 만나게
“태건 씨, 다시 말하지만 나는 도움이 필요 없어요. 빨리 돌아가세요.”권다솔의 목소리엔 이미 지친 듯한 짜증이 묻어났다.그녀가 밤늦게 클럽에 온 이유는 마음을 풀고 스트레스를 해소하기 위해서이지 남태건이 옆에서 잔소리를 늘어놓으라고 온 게 아니었다. 하지만 남태건은 그녀의 말을 듣지 않고 오히려 그녀 옆에 자리를 잡고 자신도 맥주 한 병을 땄다.“네가 술을 마시고 싶다면 내가 같이 마셔줄게. 네가 집에 가고 싶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데려다줄게.”권다솔은 한동안 대답하지 못했다.갑자기 술 마실 기분이 뚝 떨어진 그녀는 술병을 옆으로 밀어두고 춤추는 남녀들로 가득한 스테이지를 멍하니 바라봤다.‘이 순간에 배진호가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다솔아, 우리도 같이 춤출래?”남태건이 먼저 제안했다.아까 이쪽으로 오면서 그는 배진호를 봤다.그 남자는 정말로 끈질기게 권다솔의 앞에 나타났다. 아니면 둘 사이엔 정말 인연이라도 있는 걸까? 이렇게 힘들고 지칠 때 찾는 곳이 똑같다는 것 자체가.하지만 남태건은 그런 인연도 자신이 있는 한 반드시 끊어낼 거라 다짐했다.그는 배진호가 자신의 두 눈으로 확인하도록 만들고 싶었다. 권다솔과 자신이 춤을 추며 두 사람의 몸이 밀착해 있는 모습을 말이다.권다솔은 고개를 저었다.“혼자 가세요. 난 그냥 조용히 있고 싶어요.”“네가 안 간다면 나도 안 가. 나는 너하고만 있고 싶어. 다른 여자는 보지도 않을 거야.”남태건은 천천히 그녀에게 더 가까이 다가갔다.둘 사이의 거리가 한층 더 좁혀졌다.남태건이 손을 내밀어 권다솔의 손끝에 닿으려는 순간, 권다솔이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다솔아, 어디 가려고?”남태건은 그녀가 화난 줄 알고 얼른 따라가려고 몸을 일으켰다.권다솔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주스 좀 받아어려고요. 금방 올 테니까 여기 있으세요.”그제야 남태건은 안심하고 자리에 앉았다.그는 미리 준비해 둔 액세서리를 가방에서 꺼냈다. 권다솔이 돌아오면 그녀에게 선물할 생각에 미소를 지
술병이 박살 나며 바닥이 깨진 조각들로 가득 찼다.여자는 눈앞의 상황에 깜짝 놀라 화들짝 일어섰다.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배진호를 쳐다보는 그녀의 심장은 놀라서 요동쳤다."당신 지금 뭐 하는 거야?""비키라고 했잖아."배진호는 마침내 그녀를 바라보았다.그의 눈빛엔 감정이 전혀 없었다. 욕망은커녕 오히려 혐오감만 가득 차 있었다.그 순간, 여자는 철저히 무너지는 기분을 느꼈다.‘내가 그렇게 형편없나?’제 발로 찾아온 여자도 거부할 뿐만 아니라 맥주병까지 깨버리다니."알았어. 가면 되잖아. 설마 내가 당신 아니면 안 될 줄 알아?"그녀도 자존심에 화가 났다.체면을 세우고 싶었던 그녀는 독설을 날렸다."당신 같은 사람 나 말고 누가 좋아한다고 그래? 사람들한테 방해받기 싫으면 여기엔 왜 온 건데?"클럽은 남녀가 자유롭게 어울리는 곳 아닌가?자기가 순진한 남자라도 되는 줄 아는가?배진호는 그녀의 말에 아랑곳하지 않았다. 주변이 조용해진 뒤, 그는 다시 자리에 앉아 조용히 술잔을 들었다.만약 권다솔이 여기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러나 그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이루어질 수 없는 꿈일 뿐이라는 것을.그가 술잔을 집으려 고개를 숙인 순간, 남태건이 그의 옆을 지나 안쪽 자리로 향했다.권다솔이 그곳에 앉아 있었다.그녀는 자신이 쫓아낸 남자들이 몇 명인지 셀 수도 없었다. 몇몇은 버티며 소란을 피우려 했지만 그녀의 손에 든 맥주병은 그들을 봐주지 않았다.머리를 맞을 뻔한 남자들은 당연히 더 이상 그녀를 귀찮게 하지 못했다.하지만 그들 역시 쉽게 물러서지 않았다. 틈틈이 이쪽을 힐끔거리며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그때 남태건이 다가왔다.그는 권다솔의 손에 있던 술병을 순식간에 낚아챘다.“다솔아, 이게 뭐 하는 짓이야? 밤늦게 집에 안 들어가고 왜 여기서 혼자 술을 마시고 있어?”“이건 내 일이에요. 당신이랑은 아무 상관 없어요.”권다솔은 그의 말을 듣고도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권다솔은 방금 뺏긴 술병 대신 새로운 술병
클럽에는 예쁜 여자들이 많았지만 권다솔 같은 분위기의 사람은 얼마 보이지 않았다.권다솔이 들어서자마자 한 남자가 술잔을 들고 와서 말을 걸었다.“저희 이미 자리 잡았는데 오실래요? 스페이드 에이스도 깠어요. 마시러 와요.”“저 사람 따라가실 거면 그만두고 이쪽으로 오세요. 전 이 클럽 회원이에요. 마시고 싶은 술이 있으면 아무거나 불러요.”하지만 권다솔은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그들을 밀어냈다.“비켜주세요.”권다솔은 곧장 카운터로 걸어가서 테이블 석과 맥주를 한 박스 주문했다.그녀는 혼자서 자리에 앉아 기계식으로 맥주를 열고 입안으로 털어 넣었다. 곧 테이블 위에는 빈 맥주병들이 줄을 지었다.알콜로 정신을 마비시키고 싶었지만 이렇게 많은 술을 마셔도 머리는 점점 맑아지기만 했다.머릿속에는 심지어 배진호의 모습이 그려지기까지 했다.같이 일을 하던 장면들, 행복한 연애를 하던 장면들, 많은 조각들이 모여져 무릎을 꿇고 프러포즈를 하는 배진호의 모습으로 변했다.한때 그녀는 자신이 세계에서 가장 행복한 여자인 것 같았다. 크면서 한 번도 억울함을 겪은 적 없었고 일도 순조로웠다. 배진호라는 사랑하는 남자도 만났고 말이다.하지만 지금은 그저 광대가 돼버린듯한 기분이었다.“웨이터.”권다솔은 빈 술병을 한쪽에 치워두고 휘청거리며 일어섰다.“소주 몇 병 추가해 주세요.”맥주로는 아무리 마셔도 도저히 취하지 않았다.소주라도 더 마셔야 할 것 같았다.취하고 나면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아도 된다. 더 이상 슬프지도 않을 것이다.머지않은 곳 다른 테이블 석에서 배진호도 한잔 또 한잔 술을 입안에 들이붓고 있었다.잘 생기고 분위기 있는 그의 모습에 고급스러운 옷차림, 게다가 주변에는 다른 여자도 없었다.이 모든 것이 어우러져 바에 있는 여자들의 이목을 끌었다.곧 노출이 심한 복장을 항 여자 한 명이 그의 곁에 와서 앉으며 배진호의 허리를 두 손으로 감쌌다.“오빠, 혼자 왔어? 혼자 마셔도 재미없는데 나랑 게임 할까? 진 사람이 옷 하나씩 벗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