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지유가 자연분만을 고집하지 않았다면 여이현은 아마 그녀에게 제왕절개를 하라고 설득했을 것이다.하지만 그녀의 의지를 알게 된 여이현은 답답함과 걱정이 교차했다.그는 온지유를 설득하려고 시도했다.“요즘은 무통 주사도 있다고 하지만 여보가 매일 밤 이렇게 고생하는 걸 보니 정말 속상해. 차라리 한 번만 아프고 끝내는 게 낫지 않을까? 흉터가 걱정된다면 내가 최고의 미용 의료팀을 찾아서 완벽하게 처리해 줄게.”매일 밤 반복되는 통증에, 낮에도 간헐적으로 이어지는 고통.온지유가 고생을 하며 잠조차 제대로 자지 못하는 모습을 보며 여이현은 그녀에게 출산할 힘이 남아 있을지 걱정됐다.수시로 반복되는 고통은 그녀에게도 자신에게도 큰 스트레스였다.하지만 온지유는 단호히 대답했다.“아니, 자연분만을 할 거야. 아이가 천천히 나오려는 것뿐이지 안 나온다는 건 아니잖아. 그리고 의사들도 건강 상태가 아주 좋다고 하지 않았어?”“자연분만은 회복이 빨라. 제왕절개를 하고 나서 일주일 동안 침대에 누워 꼼짝도 못 하는 건 정말 싫어.”온지유는 직접 제왕절개의 고통을 경험한 적은 없지만 최근 여러 정보를 통해 그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알게 되었고 그 상상만으로도 충분히 괴로웠다.“하지만 난 네가 이렇게 아프고 고생하는 게 너무 안타깝단 말이야.”여이현은 솔직하게 그녀를 걱정하는 마음을 드러냈다.온지유는 그의 손을 꼭 잡으며 부드럽게 말했다.“아픈 건 지나가면 끝이잖아. 그리고 아이는 이미 우리 곁에 와 있어. 지금 와서 그 아이를 포기할 수는 없잖아. 힘들더라도 우리 아이를 맞아들여야지.” 3일 후, 온지유의 상태는 여전히 변화가 없었다.간호사와 의사들은 병실을 돌며 그녀에게 요가 볼로 운동을 더 하거나 계단을 자주 오르내려 보라고 했다. 그래도 변화가 없다면 의학적 개입이 필요할 수도 있었다.그러나 예상치 못한 일이 일어났다.그날 밤, 온지유가 화장실에 가려고 일어나자 양수가 갑자기 터졌고 이어서 극심한 통증이 그녀를 덮쳤다. 여이현은 온지유 곁에서
아기의 얼굴은 작고 앙증맞았다.분홍빛의 얼굴은 약간 주름졌고 작은 주먹을 꼭 쥔 채 입을 살짝 벌리고 있었다.온지유는 아기를 보면 볼수록 사랑스러움을 느꼈다.그녀는 문득 별이를 낳았던 날이 떠올랐다.그토록 힘들게 낳은 아이를 겨우 한 번 스치듯 보고는 바로 데려가 버린 뒤 죽었다고 전해 들었다. 5년이라는 시간...이번에는 꼭 자신이 직접 아이를 키우겠다고 다짐했다.“아이 이름은 뭐로 할까?”온지유는 여이현에게 물었지만 사실 그녀는 이미 마음속으로 이름을 떠올리고 있었다.“여민하.”그녀는 그 이름을 조용히 중얼거렸다.하지만 여이현은 그녀의 이마에 입 맞추며 부드럽게 말했다.“여보, 딸아이 성은 당신 성으로 하면 어떨까?”“정말?”온지유는 믿기 어려운 듯 물었다.대개 아이의 성은 아버지를 따른다. 어머니의 성을 따르는 경우는 최근에서야 생겨난 일이었다.여이현이 먼저 그렇게 제안하니 놀랄 수밖에 없었다.여이현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내가 여보를 속인 적 있어? 온... 온시유는 어때?”“이 아이는 긴 시간 기다려 온 아이야. 우리가 지난날의 상처를 치유할 기회를 준 아이이고.”온지유는 이 이름을 조용히 되뇌며 고개를 끄덕였다.“좋아.”그녀는 갑자기 별이의 이름이 떠올랐다.빛나는 별, 윤별.“별이의 이름에 대해선 여태 물어본 적 없네. 당신이 지은 거야, 아니면 당신 아버지가 지은 거야?”그녀는 깊은숨을 내쉬며 덧붙였다.“지금 와서 이런 걸 묻는 건 너무 늦었나?”“늦지 않았어. 당신은 항상 별이를 찾으려고 노력했잖아. 내가 했던 말, 죽었다는 말도 믿지 않았고. 이 몇 년간 정말 고생 많았어. 경성으로 돌아와서도 정말 많은 노력을 했잖아.”여이현은 온지유의 헌신과 노고를 진심으로 인정하며 그녀를 위로했다.그러나 그는 갑자기 무언가 떠오른 듯 말했다.“아니다. 딸아이 이름이 시유라면 여보 이름과 발음이 너무 비슷해. 내 생각엔... 온하윤이 더 좋을 것 같아.”윤별은 빛나는 별, 하윤은 따뜻한 햇빛.“좋아.
온지유는 갓 태어난 딸과 떨어지기를 원치 않았다.“아버지, 괜찮아요. 아이가 이제 막 태어났으니 아무리 운다고 해도 큰 소란을 피우진 않을 거예요. 그리고 별이 때는 제가 직접 돌볼 수 없었잖아요. 이번 딸만큼은 제가 직접 돌보고 싶어요. 한동안 저와 이현 씨가 별이에게 신경을 많이 못 쓸 텐데, 이번엔 별이는 아빠가 더 챙겨주셔야 할 것 같아요.”온지유의 말을 듣자 법로는 바로 손녀를 온지유 곁에 두었다. 온지유는 딸을 품에 안고 따스한 눈길로 아기를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너 참, 무슨 이렇게 서먹한 말을 하고 그래. 별이는 내 외손자야. 내가 여기 있는 것도 별이랑 시간을 더 보내고 싶어서지. 넌 네 몸이나 잘 챙겨. 필요한 건 산후도우미나 이현이에게 부탁하면 되잖아. 별이는 내게 맡겨. 걱정하지 마라.”법로는 온지유에게 약속했다. 별이는 침대 옆으로 다가와 난간에 기대어 손을 뻗어 온하윤의 작은 얼굴을 살며시 만졌다.얼굴은 부드럽고 말랑했다.“엄마, 동생이 엄청 작아요.”별이의 첫 감촉이었다.동생은 아직 눈도 뜨지 않은 채 고요히 자고 있었다.온지유는 가슴 깊이 행복을 느끼며 부드럽게 말했다.“갓 태어난 아이는 원래 이렇게 작단다. 별아, 엄마가 동생을 낳았지만 너를 사랑하는 마음은 하나도 변하지 않았어.”별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알아요, 엄마. 엄마랑 아빠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도 저 다 알아요. 그러니까 두 분은 두 분의 아쉬움을 채우세요. 저는 신경 쓰지 마세요.”온지유는 임신 전 별이의 동의를 구했었다. 어리지만 별이는 또래보다 훨씬 성숙하고 이해심 많은 아이였다.그의 말을 들으며 온지유는 따뜻함과 동시에 깊은 애틋함을 느꼈다.온지유는 손을 뻗어 별이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말했다.“엄마가 널 신경 안 쓸 리 없지. 넌 엄마의 소중한 보물이야.”“아빠의 보물이기도 하고.”여이현은 별이의 뒤에 서며 말했다.별이는 학교에 가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항상 온지유 곁을 지키고 있었다.온경준, 정미리, 그리
김혜연의 눈에는 눈물이 맺혔고,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감사함이 가슴속에 가득 찼다.그녀는 말 대신 발돋움해 신무열의 얼굴에 가볍게 키스했다.신무열은 그녀를 보며 미소를 지으며 장난스럽게 물었다.“얼굴에만?”김혜연은 얼굴이 빨개져 고개를 돌리며 작게 속삭였다.“사람들이 보고 있잖아요.”신무열은 웃음을 참지 못하며 그녀의 귀에 낮게 속삭였다.“밤에는 먼저, 방금처럼 네가 먼저 해 줘야 해.”“무슨 말 하는 거예요!”김혜연은 부끄러움을 감추지 못했다.다행히 진료실에 도착했고 대기자가 없어 김혜연은 바로 진료를 받을 수 있었다.10분 정도가 지난 후 김혜연은 눈이 붉어진 채로 진료실에서 나왔다.신무열은 그녀가 걱정돼 곧장 다가가 부드럽게 물었다.“무슨 일이야? 괜찮아?”김혜연은 말없이 한 장의 종이를 건넸다. 신무열은 그녀에게 무슨 문제가 생긴 줄 알고 조심스럽게 위로하며 말했다.“걱정하지 마. 난 항상 네 곁에 있어.”김혜연은 눈물이 맺힌 채 말했다.“먼저 검사 결과를 봐주세요.”그러고 나서 그녀는 고개를 숙이며 작게 울기 시작했다.그녀가 건넨 것은 초음파 검사 결과였다.‘임신 4주, 모든 것 정상’이라고 적혀 있었다. 즉, 한 달이 된 상태였다.신무열은 그 결과를 보고 너무 기뻐 손이 떨릴 정도였다.김혜연을 껴안고 싶었지만 신무열은 뱃속의 아이를 생각해 그녀를 살며시 안으며 이마에 키스했다.“무열 씨.”김혜연은 부끄러워하며 그의 품속에서 얼굴을 가렸다.신무열은 참을 수 없는 기쁨에 외쳤다.“내가 아빠가 된대! 내가 아빠가 된대!”지금의 그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처럼 보였다.김혜연도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임신을 하게 돼서 정말 다행이었다.만약 몸에 문제가 생겨 아이를 가질 수 없었다면 그녀는 신무열의 실망과 슬픔을 어떻게 감당했을지 상상조차 할 수 없었을 것이다.김혜연은 임신한 사실에 가슴 깊이 안도하며 기쁨을 느꼈다.“가요, 어서 우리 이 소식을 아버지께 알려드려요.”신무열은 그녀를 다정하게 품에
별이는 아직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 사람은 다시 빈정거렸다.“보세요. 부모님은 계속 여동생만 챙기고 있잖아요. 도련님은 신경도 안 쓰는 거 같은데요.”그 사람의 말투는 명백히 악의적이었다.그때 김혜연이 다가와 별이를 옆으로 데리고 가며 단호히 말했다.“이보세요, 이런 식으로 말하는 건 좀 아니죠. 지유 씨와 이현 씨는 두 아이를 다 사랑해요. 그러니 함부로 말하지 마세요.”그 사람은 김혜연을 위아래로 훑어보며 비웃듯 말했다.“당신은 여 대표님의 부인도 아니잖아요. 그분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어떻게 알겠어요? 딸을 더 예뻐한다는 건 다 아는 사실이잖아요. 별이 도련님이 태어났을 때 이렇게 큰 잔치를 열었나요? 전 본 적 없는데요.”별이는 차분히 웃으며 말했다.“아주머니가 못 봤다고 해서 없었다는 건 아니죠. 그리고 아주머니는 우리 부모님이 아니니까 부모님이 절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 리 없잖아요.”김혜연은 몰래 별이를 칭찬하며 엄지를 들어 보였다.하지만 그 사람은 포기하지 않고 뭔가 더 말하려 했지만 별이가 먼저 말을 끊으며 말했다.“아주머니, 부모님이 아주머니를 별로 사랑하지 않았던 거 같네요. 그래서 이런 생각을 하는 거겠죠. 하지만 오늘은 좋은 날이니, 기분 좋게 술이나 한 잔 더 하세요.”그 말을 끝내고 별이는 김혜연의 손을 잡고 온지유와 여이현 부부에게 걸어갔다.김혜연은 조용히 온지유에게 방금 있었던 일을 이야기했다.온지유는 별이의 반응에 감탄하며 말했다.“별이가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이 남편을 닮아가네요. 이 아이도 커서 또 하나의 여이현이 되겠어요.”그때 연회장의 음악이 울리며 주최 측의 인사가 시작될 시간이 되었다. 별이는 음료잔을 내려놓고 여이현을 불렀다.“아빠, 제가 해도 될까요?”온지유는 여이현의 팔을 살짝 잡아당기며 별이에게 맡기라고 했다.여이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조용히 말했다.“우리 아들 정말 멋져졌구나.”별이는 미소를 지으며 마이크를 들고 무대 위로 올라갔다.“여러분, 오늘은 제 여동생의 백일
배진호와 권다솔은 저번의 일을 겪으며 깊은 신뢰를 쌓아왔다.감정을 확인한 두 사람은 연인이자 동료로서 함께 일하며 특별한 관계를 이어갔다.연인 사이는 적절한 거리가 중요하다고들 한다.너무 멀면 그리움이 생기고 너무 가까우면 다툼이 생긴다고 하지만 배진호와 권다솔은 함께 문제를 해결하며 큰 다툼 없이 지내왔다.퇴근 후에는 같이 식사하거나 영화를 보고 때로는 함께 출근하며 서로에게서 편안함을 느꼈다.배진호는 자신의 나이와 책임을 생각하며 권다솔에게 확실한 약속을 해야 할 때라고 느꼈다.그녀를 사랑하는 만큼 그녀에 대한 책임도 지고 싶었다.현장에서는 사람들이 기쁨에 넘쳐 외쳤다.“배 비서는 대표님과 함께 오랜 세월 동안 가족 같은 존재였어요. 배 비서의 능력은 여기에 있는 모두가 아는 사실이죠!”“맞아요, 배 비서의 능력은 모두가 인정하죠! 이런 경사스러운 날에 정말 어울리는 일입니다!”“대표님의 가장 든든한 왼팔과 오른팔이 부부가 된다니 정말 축하할 일이에요!”“두 사람의 행복을 위해 건배합시다!”...배진호는 전부터 권다솔에게 청혼할 생각이 있었지만 업무가 바쁜 나머지 타이밍을 놓치고 있었다.오늘처럼 많은 사람이 모인 특별한 날에, 그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기로 했다.권다솔은 여이현의 중요한 날에 주목을 빼앗고 싶지 않았지만 배진호는 이미 무릎을 꿇고 반지를 들고 있는 상황이었다.이 자리에서 거절하는 것은 그를 난처하게 만들 뿐이라고 생각했다.결국 권다솔은 부드럽게 손을 내밀며 말했다.“네, 받아들일게요.”배진호는 환하게 웃으며 반지를 그녀의 손가락에 끼워 주었다.그 모습은 사진으로 남겨졌고 곧 인터넷에 퍼져 많은 사람들의 축복과 부러움을 받았다.그러나 권다솔의 아버지인 권용민은 이 결혼에 대해 탐탁지 않게 생각했다.백일 잔치를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 권용민은 두 사람의 앞을 막아섰다.그의 표정은 어두웠고 권다솔은 그런 아버지의 뜻을 이미 알고 있었다.그녀는 배진호와 함께 있는 것이 행복했고 청혼을 받아들인 지금 가족이
권용민은 깊고 날카로운 눈빛으로 배진호를 쏘아보듯 바라보며 말했다.“진호 씨가 아무리 성공했어도 결국은 남의 밑에서 일하는 사람일 뿐이죠. 내 딸은 최고의 것을 누릴 자격이 있습니다. 다솔이가 경험을 쌓고 싶어 했다고 해서 그저 평범한 사람으로 여겨선 안 돼요.”권용민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그의 말은 매우 공격적이었다.배진호는 여이현 곁에서 오랜 시간 동안 자신의 능력을 증명하며 존경받아 왔다. 많은 사람들이 여이현과의 관계를 이유로 그를 존중했고 그의 뛰어난 능력 또한 경외의 대상이었다.여이현처럼 까다로운 기준을 가진 사람 곁에 남아 있는 것은 능력이 탁월한 자들만 가능한 일이었다.그러나 권용민의 앞에서 배진호는 모든 것이 무의미해 보였다.배진호는 조용히, 그러나 단호히 말했다.“아버님, 제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제 직업이 다솔 씨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하실 수도 있다는 것도요. 하지만 저는 다솔 씨를 진심으로 사랑합니다. 다솔 씨가 입사했을 때부터 저는 다솔 씨의 신분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저희는 각자의 능력으로 이 자리에 올랐습니다. 만약 직업이 문제라면 제 회사를 설립할 수도 있지만 지금의 제가 있기까지는 모두 대표님 덕분입니다. 그래서 될수록 이 자리를 지키고 싶습니다. 이 일을 포기한다는 것은 제 자신을 부정하는 것과도 같습니다.”그의 말은 단호했으며 은혜를 배신하지 않겠다는 의지가 강하게 보였다.게다가 지금 여이현은 아이와 온지유에게 집중하고 있어 배진호와 권다솔이 모두 떠난다면 큰 손실을 입을 것이 분명했다.권용민은 차갑게 말을 이었다.“지금 당장 내 앞에서 전업하겠다고 한다 해도 딸을 내줄 생각은 없습니다.”그는 권다솔을 날카로운 눈빛으로 보며 덧붙였다.“이제 충분히 놀았으면 집으로 돌아와라. 내가 직접 나서서 너를 데려가고 싶지는 않다.”그 말을 남기고 권용민은 뒤돌아보지 않고 떠났다.비록 강제로 딸을 데려가진 않았지만 그의 생각과 입장은 명확히 전달되었다.권다솔은 배진호를
권다솔은 배진호를 가볍게 안고 말했다."제가 여진 그룹에 온 건 스스로를 성장시키고 싶어서였어요. 진호 씨 도움 덕분에 정말 많이 배웠지만 언젠가 저는 이 회사를 떠날 거예요. 진호 씨, 저는 진호 씨가 더 멋진 사람이 되길 바라요. 누군가의 그림자에 가려진 채로 살지 않길 바란다는 뜻이에요. 이해하죠?"그녀는 단지 배진호가 더 나은 삶을 살길 바랐던 것뿐이다. 물론 그가 남기로 고집한다면 그녀가 더 이상 관여하지 않을 것이다.하지만 사람이라면 더 높은 곳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 그럴 수 있는 자리에 서 있는데 왜 낮은 곳에 머물러야 하겠는가?“알겠어요. 하지만 다솔 씨, 저는 평생 대표님을 따를 겁니다. 아버님 쪽은 제가 잘 설득해 볼게요. 아버님이 끝내 반대한다면...”배진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권다솔은 단호한 표정으로 돌변했다."진호 씨, 진호 씨는 경험도 많잖아요. 아버지가 안 된다고 하면 정말 안 되는 거예요?"권다솔은 화가 치밀었다.그렇게 힘든 순간도 함께 버텨냈는데 이제 와서 아버지의 반대 때문에 배진호는 포기하려는 거란 말인가.만약 정말 포기한다면 그들 사이의 감정은 너무나도 하찮은 것이 되고 말 것이다.배진호는 한숨을 쉬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안 된다는 뜻이 아니에요. 아버님이 우리를 허락하도록 최선을 다할 겁니다. 하지만 끝까지 반대한다면 다솔 씨를 억지로 붙잡거나 혼인신고를 강행할 수는 없어요. 그런 건 옳지 않잖아요."그는 축복받지 못한 사랑을 하고 싶지 않았다. 또 모두가 반대하는 결혼식은 더더욱 원하지 않았다.권용민의 말대로 권다솔은 더 나은 대우를 받을 자격이 있었다.권다솔은 화가 나면서도 웃음이 났다."반대한다고요? 기정사실화라는 건 몰라요? 아이가 생기면 반대할 방법도 없어질 거예요.""그렇겠죠. 하지만 나는 그런 일을 할 수 없어요. 만약 내 딸이 누군가에게 그렇게 끌려가고 마음에 들지 않는 남자의 아이를 가졌다면 나도 정말 분통이 터질 거니까요."배진호는 그렇게 말하며 권다솔의 어깨를 단단히
대신 일을 해줄 사람이 넘쳐나는데 뭐하러 본인이 고생하냐는 식으로 말하는 박은희에 나도현은 그저 씁쓸하게 웃을 뿐이었다.“어머니, 시은이 몸 상태도 고려해주셔야죠. 시은이가 최근 4년간 하민이를 위해서 밤낮없이 일만 해온 거 어머니도 잘 아시잖아요. 저랑 같이 살게 된 지도 얼마 안 됐는데 여유를 즐길 틈도 없이 또 덜컥 아이를 가져서 힘들게 하고 싶지 않아요. 어머니도 여자니까 임신과 출산의 고생을 누구보다도 잘 아실 거 아니에요.”나도현의 그 한마디에 박은희도 할 말이 없었다.나도현은 박은희가 조금 망설이는 것 같아 냉큼 말을 이어갔다.“만약 하민이가 혼자라서 외롭다고 하면 당연히 둘째든 셋째든 낳을 테니까 그 점은 시름 놓으세요. 하지만 시은이와 저의 계획을 물으신다면 그건 그냥 순리에 맡기고 싶어요.”“알겠어, 그럼 너희 뜻대로 해.”박은희는 나도현이 이렇게까지 말한 이상 더 밀어붙였다간 양시은은 안중에도 없는 것처럼 보일까 봐 더 말하지 않기로 했다.그제야 박은희는 은근히 걱정됐다.“내가 이렇게 급해 했다고 시은이가 또 오해하진 않겠지?”“그럴리가요. 시은이는 어머니 마음을 이해할 거예요. 그뿐만 아니라 어머니가 그런 사람이 아니란 것도 잘 알고 있을 거예요.”나도현이 박은희의 어깨를 토닥이며 별다른 말도 하지 않았을 때 양시은이 박은희를 향해 걸어왔다.양시은이 자신에게 미소를 짓는 것을 보자 박은희는 그제야 무겁게 가라앉았던 마음이 가벼워지는 것 같았다.박은희는 나도현에게 넌지시 말을 건넸다.“넌 시은이를 데리고 밖에 나가서 바람을 좀 쐬고 들어와. 회사 일은 절대 걱정하지 말고 둘만의 시간을 좀 보내. 네가 그랬잖니, 그동안 고생을 너무 많이 했다고. 그러니까 이제는 정말 아무 생각 없이 현재를 즐겨.”“알겠어요.”나도현은 대답과 함께 양시은에게 다가갔고 둘은 알게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함께 올라갔다.양시은이 단미주와 합작한 프로젝트로 인해 업계의 많은 사람은 양시은을 다시 볼 것이다.양시은은 그 결과에 대해
하민은 박은희와 함께 지낸 지 3년이나 되었고 이 집에서 제일 친한 사람이었다.하지만 하민은 어릴 때부터 아버지의 사랑을 갈망했다.그래서 양시은과 나도현은 퇴근하는 대로 집으로 돌아와 하민과 함께 시간을 보내기로 한 것이다. 가끔 학부모의 참여가 필요한 활동은 함께 참여하기도 했다.“하지만 너희들도 보다시피 하민이도 나를 잘 따르고 나도 시연이 널 도와서 아이를 잘 돌봐주잖니. 지금 너랑 도현이도 시간이 있고 하민이도 학교에 다니니까 내가 돌봐줄 수 있을 때 딱 둘만 더 낳는 건 어떠니? 그럼 우리 집안도 더 복작거리고 좋을 것 같은데 말이야.”양시은이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라 망설이고 있을 때 나도현이 말을 가로챘다.“싫다는 게 아니에요. 다만 저랑 시은이는 아직은 하민이만 생각하고 있어요. 우리 아이 일은 나중에 더 말하는 거로 해요.”나도현은 하민이 한 명에게도 제대로 된 사랑을 못 주고 있는데 둘째까지 낳아버리면 하민이가 원래도 부족했던 사랑을 나눠줘야 할 것처럼 느낄까 봐 걱정됐다.“왜? 너희 둘 중에 누가 아프기라도 한 거야?”박은희는 말은 그렇게 해도 눈길은 이미 나도현에게 향해있었다.양시은은 이미 하민이를 낳았기 때문에 문제가 없으리라 판단했기 때문이다.박은희의 시선을 느낀 나도현은 어쩔 수 없이 말을 이어갈 수밖에 없었다.“맞아요, 제 몸에 문제가 생겼어요. 최근 4년간 병원에 다니고 있었고 일도 바빠서 제 정자 생존율이 엄청나게 낮아졌어요.”그 말을 들은 박은희가 침착할 리 없었다.박은희는 당장 나용민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당신이 기를 쓰고 도현이에게 회사를 물려주려고 부담을 주니까 도현이 몸이 망가졌잖아요. 지금 당장 회사 업무를 이어받아서 책임지고 도현이 좀 푹 쉬게 해줘요. 국가 정책도 개방된 마당에 애가 하나밖에 없는 게 말이 돼요?”박은희에게는 나도현이 유일했다. 애당초 박은희는 나도현이 양시은과 사귈까 봐 온갖 방법을 다 대며 노력을 했지만 결국 나도현은 그런 박은희의 노력을 무시하듯 박은희의 뜻대로
그 순간 양시은은 단미주를 흘겨보았다. 차디찬 양시은의 눈빛이 이미 모든 걸 설명하고 있었다.양시은이 설령 지금 나진 그룹의 비서가 아니라고 해도 대학을 나온 사람인데 PPT 하나 만들 줄 모른다는 게 말이 될 리가 없었다.단미주는 잠시 멈칫하더니 물었다.“그냥 궁금해하는 것도 문제가 되나요?”양시은은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절로 나왔다.이윽고 양시은은 단미주를 회의실 안으로 안내했고 단미주가 그렇게나 기다리던 PPT를 그녀의 눈앞에 보란 듯이 전시해두었다.양시은은 미소를 띠며 단미주에게 물었다.“단미주 씨, 무슨 문제라도 있을까요?”양시은은 단미주와의 합작이 절대 쉽지 않을 것을 직감하고 그녀가 제기할 모든 문제점을 예상해 아주 작은 방면들까지 철저히 준비했다.게다가 그날은 단미주도 나도현에 대한 은근한 마음을 드러냈었지만 나도현은 양시은 때문에 단미주에게 더는 반응을 하지 않은 것이었다.단미주도 양시은이 자신을 통해 양시은이라는 사람을 증명하고 싶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단미주는 양시은이 얼마나 문제를 전면적으로 바라보는지를 깨달았고 덩달아 양시은이 훌륭한 여자라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단미주는 양시은의 치밀함에 진심으로 탄복하였고 마침내 나도현이 왜 양시은을 선택했는지도 알게 되었다.“이 프로젝트에 서명할게요. 그리고 앞으로 더는 양시은 씨를 난감하게 하지도 않을게요.”“벗이 늘어나는 건 어떻게 보나 적이 늘어나는 것보단 이득이죠. 단미주 씨도 상당히 능력 있는 사람이에요.”양시은도 그 순간에는 진심으로 단미주를 칭찬하고 있었다. 하지만 단미주는 자신이 결코 양시은의 칭찬을 받을만한 사람이 못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양시은 씨, 그동안 제가 양시은 씨에게 했던 무례한 행동들에 대해 사과할게요.”말을 마친 단미주는 정말로 90도 인사를 하며 사과를 했다.회의실에는 다른 사람들도 있었지만 단미주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단미주 역시 업계에서 꽤 유명한 사람인데 그런 단미주가 양시은에게 고개 숙여 사과하리라고는 그 누구도
나도현은 결코 쉽게 알려주지 않았다. 양시은은 작게 투덜거렸지만 그래도 설레는 마음은 어쩔 수 없었다.비장하게 찾아보라고 말한 것 치고는 그리 깊은 곳에 숨긴 것도 아니었다.막 잠자리에 들려고 할 때 양시은은 침대 밑에서 나도현의 마지막 서프라이즈를 찾아냈다.그건 다름 아닌 사진 한 장이었다.사진 속 양채은과 엄마 문해미가 해외의 유명한 철탑 아래에서 해맑게 웃고 있었다.잠시 얼어붙었던 양시은은 이내 눈시울을 붉히며 목멘 소리로 나도현에게 물었다.“채은이랑 엄마는 어떻게 찾은 거야?”나도현은 양시은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양시은을 반쯤 안은 상태로 사진을 들고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내가 찾은 게 아니야. 정확히 말하면 이 사람들이 날 찾은 거지.”이윽고 나도현이 설명해주었다.그 사진은 바로 어제 받은 산 건너 물 건너온 우편이었다.지금처럼 인터넷이 발전한 시대에 우편을 사용하는 사람은 극히 드물었다. 이미 해외에서 이곳까지 넘어오는데 꽤 오랜 시간이 걸렸을 테니 지금 당장 그곳에 가서 사람을 찾는다고 해도 찾지 못할 게 뻔했다.나도현은 고개를 숙이고 말했다.“내 생각엔 그 사람들이 시은이 네 생일을 기억하고 일부러 시간을 철저히 계산해서 너한테 이 사진을 보낸 것 같아.”나도현의 말을 끝으로 양시은은 사진을 액자에 넣어 침대 머리맡 탁자 위에 세워두었다.양시은은 하루 만에 초안 수정을 마쳤다.철저하게 시간 계산을 마친 단미주가 때마침 하이힐을 도각거리며 나진 그룹에 들이닥쳤다.“어떻게 됐어요, 양시은 씨. 제가 준 프로젝트에 대한 방안이 생기긴 했어요?”양시은이 막 대답하려고 할 때 단미주는 새로 바꾼 네일아트를 자랑이라도 하듯 손을 휘저으며 멋대로 말을 가로챘다.“방안이 생기지 않아도 상관없어요. 저도 일부러 사람 난감하게 하는 악취미는 없어서요.”양시은은 어이가 없다 못해 웃음이 터질 것만 같았다.“단미주 씨는 정말 본인이 요구한 조건들이 사람을 난감하게 만들지 않았다고 생각하나요?”“당연하죠.”단미주는 비웃음과 함
양시은은 커다란 장미꽃 다발을 보고는 물었다.“도현 씨는 이미 알고 있었던 거지?”“그래서 꽃다발도 준비했는데 한 번만 봐주면 안 될까?”나도현은 자상하게 웃으며 양시은에게 말했다. 업무 중일 때는 그토록 차가운 사람에게 이렇게나 다정한 모습이 있을 거라고는 감히 상상하기 어려울 것이다.얼마 후 양시은은 나도현의 손에 들린 꽃다발을 받아 들고 말했다.“할 수 없지 뭐...”양시은이 아직 뽀로통한 걸 본 나도현은 고개를 돌려 또 살짝 웃어 보였다.하민은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는 손가락 틈새로 둘을 훔쳐보았다.온지유는 일부러 목을 가다듬고 말했다.“두 사람 사이가 여전히 좋은 건 잘 알겠어요. 아무리 그래도 저희까지 찬밥신세로 만들어야 하겠어요? 지금 먹지 않으면 음식도 다 식을 것 같으니까 빨리 앉아요.”양시은은 하민을 챙겼고 그제야 함께 서 있던 사람들도 모두 앉아서 식사를 시작했다.가정부가 보이지 않자 양시은은 이 많은 음식을 누가 준비했는지 궁금해져 몇 번 더 두리번거리다가 온지유에게 물었다.“지유 씨가 이 음식들을 모두 준비한 거예요?”온지유는 별이에게 음식을 집어다 주며 고개를 끄덕였다.“일부는 제가 했어요. 그리고 나머지 일부분은 시은 씨 남편이 준비한 거예요.”그러고는 손으로 나도현을 가리켰다.양시은은 믿기 힘들다는 얼굴로 물었다.“오늘 온종일 회사에 있지 않았어?”나도현은 많이 해본 듯 익숙한 손놀림으로 양시은에게 국을 퍼주고는 대답했다.“일부는 사전에 준비해야 하는 것들도 있어. 그래서 내가 특별히 세프님도 찾아가서 어떻게 하는지 배워왔단 말이야. 그리고 미리 해서 냉장고에 숨겨뒀지.”양시은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입만 뻐끔거릴 뿐이었다. 마음속으로는 감동이 밀려왔지만 그와 동시에 웃음이 터질 것 같기도 했다.양시은은 자칫 자신도 잊어버릴 뻔한 생일을 그들이 자기 몰래 이렇게나 정성 들여 준비해준 게 고마웠다.아무래도 양시은이 꽤 오랫동안 생일을 챙기지 않은 탓에 그 감동이 더 큰 것 같았다.그건 그렇
초안을 한참 동안 들여다보던 나도현은 뻐근한 눈을 비비고는 이내 눈을 뜨고 양시은을 향해 웃어 보였다.“작은 문제들이 있는 거 빼고는 전반적으로 참 괜찮은 초안이야.”양시은은 바로 고쳐야 할 점들을 물어보았다. 그 모습은 마치 공부를 사랑하는 학생 같았다.그리고 양시은의 선생님이라고 봐도 무방한 나도현 역시도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것을 자신의 학생에게 아낌없이 전수해주었다.둘은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오후 내내 초안을 토론했다.양시은은 만족스러운 피드백을 얻어내고 나서야 아직 완성되지 않은 초안을 들고 곧장 수정하러 달려갔다.양시은은 그렇게 꼬박 저녁까지 초안을 수정했다.일을 마친 나도현은 아직도 컴퓨터 앞에서 고개를 박고 초안 수정하기에 여념이 없는 양시은을 발견하고는 난감한 듯 이마를 짚었다. 그리고는 손을 뻗어 양시은을 자리에서 일으켰다.양시은은 갑자기 붕 뜬 상반신에 놀라 얼떨떨해했다.“뭐 하는 거야, 도현 씨. 난 아직 일이 남았단 말이야.”나도현은 손목시계를 가리키며 말했다.“지금이 몇 신지 직접 봐.”양시은은 시간을 확인하자마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탓에 하마터면 나도현과 부딪칠뻔했다.“하민아!”순간 놀라서 이마를 탁 친 양시은은 뒤늦게 이미 가정부에게 대신 하민이를 데리러 가달라고 부탁했던 것이 생각났다.양시은의 기색을 확인한 나도현은 굳이 묻지 않아도 양시은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결국 나도현은 난감하단 듯이 말했다.“하민이를 데리러 가지 않아도 퇴근은 해야지. 무작정 야근한다고 내가 야근 수당을 챙겨주는 것도 아니잖아.”말을 끝낸 나도현은 무 뽑듯 양시은을 의자에서 일으켰다.양시은은 회사를 떠나면서 이처럼 미련이 뚝뚝 떨어지기는 처음이었다.(그 사람의 초안이 거의 다 완성됐는데...)하지만 양시은을 퇴근시키려는 나도현의 태도는 굳건했다.출퇴근 시간이라 돌아가는 길에 차가 막혔다.양시은은 그다지 일에 집착하는 타입이 아니었기에 미처 끝내지 못하고 퇴근한 일에 대한 미련은 진작에 없어진
나도현은 그저 한쪽에 두었던 기획서를 빼갈 뿐이었다.자신이 오해했음을 깨달은 단미주는 머쓱함을 숨기려 애써 진정하며 나도현이 움직임을 슬쩍 살피고는 말했다.“이 프로젝트는 원래부터 도현 씨에게 맡기려고 했던 거니까 프로젝트를 받아들일지 아닐지만 말해줘요!”양시은은 나도현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다만 양시은은 아침부터 찾아와 시비를 걸고 대놓고 불만을 드러낸 단미주의 뜻대로 일이 흘러가게 내버려 두고 싶지 않았을 뿐이다.제멋대로인 사람에게 조금의 틈도 허락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하지만 나도현은 양시은을 한번 보고는 입꼬리가 휘게 웃으며 그녀를 달래듯 말했다.“제 생각엔 가능할 것 같아요.”그 말은 양시은에게 하는 말이었다.하지만 단미주는 자신에게 하는 말인 줄 알고 아까의 울분은 금방 잊어버리고 의기양양하게 말했다.“양시은 씨 들었죠? 도현 씨가 당신 직속 상사인 것도 맞죠? 직속 상사도 받아들인 마당에 당신이 더 할 말은 없겠죠?”단미주는 이미 자신이 양시은의 갑이라도 된 것처럼 의기양양한 모습이었다.비록 사실이기는 했으나 콧대 높은 모습이 퍽 얄미운 것만은 사실이었다.양시은이 작게 미간을 찌푸렸을 때 나도현은 단미주를 보며 입을 열었다.“단미주 씨, 제가 이 프로젝트를 맡을 수 있다고 해서 단미주 씨가 나진 그룹에서 멋대로 행패를 부려도 된다는 뜻은 아닌데요. 그러니 제 비서에게도 예의를 갖춰주세요. 그러지 않으면 사람을 불러 단미주 씨를 이곳에서 끌어낼 수도 있으니까 조심해주세요.”단미주는 충격을 받은 듯 입을 뻐끔거리더니 순식간에 낯빛이 어두워졌다.양시은은 나도현 덕분에 꽉 막힌 것 같던 가슴이 조금 전보다 매우 후련해졌고 이 프로젝트를 받아들이는 것도 아까만큼 싫진 않았다.“알겠습니다, 승낙하겠습니다.”양시은은 그렇게 말하며 나도현의 손에서 기획안을 가져왔다.단미주는 양시은과 나도현을 번갈아 가며 보고는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그럼 절 실망하게 하는 일은 없어야 할 거예요, 양 비서님.”단미주가 나가
단미주는 담담히 말했다.“아무도 안 배워줬다면 지금 배우면 되겠네요. 전에 서비스업 할 때 어땠는지 잘 알잖아요. 이제 나도현 씨랑 결혼했다고 태도를 바꾸겠다는 거예요? 사람은요, 초심을 버리면 안 되는 거예요.”나도현은 클럽 안까지 따라오려고 했다. 하지만 양시은이 거절하고 그를 밖에 세워뒀다. 그걸 모르는 단미주는 그녀 혼자 있는 게 만만해 보였는지 처음부터 줄곧 막말을 쏟아냈다.“단미주 씨, 제가 오늘 왜 여기 왔을 것 같아요?”양시은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며 예리한 시선으로 단미주를 바라봤다.단미주는 비웃는 표정으로 대꾸했다.“제가 그것도 알아야 해요? 여기 온 이상 똑똑히 기억해요. 저는 갑이고, 양시은 씨는 을이에요.”갑과 을이라는 표현에 양시은은 피식 웃음이 터졌다.“협력이 성사됐나요? 제가 협력 얘기는 없던 거로 하자면 어떡할 건데요. 저도 단미주 씨랑 꼭 협력해야 한다는 의무는 없어요.”양시은은 단미주의 거만한 태도가 못마땅했다. 단미주가 조금은 자중하다가 협력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뒤에야 빈정대려나 싶었는데, 예상과 달리 시작부터 전혀 자제할 마음이 없어 보였다.그렇다면 양시은도 더 이상 배려할 필요가 없다.“협력할 마음이 없는 것 같으니, 저도 여기 있을 이유가 없겠어요. 단미주 씨, 앞으로 저를 계속 괴롭히려 든다면 저도 가만있지 않을 거예요. 퇴로는 마련하고 이러는 건지 모르겠네요.”그 한마디를 남기고, 양시은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방을 나섰다. 그런데 문을 나서려던 찰나 나도현이 문간으로 들어서는 게 보였다.그의 시선은 아주 날카로웠다. 양시은은 그가 분명 단미주에게 따지러 왔다는 걸 직감했다.얼마 전 연회장에서, 나도현은 단미주를 크게 문제 삼지 않고 넘어가 줬다. 하지만 단미주는 전혀 자중하지 않고 또다시 양시은을 건드렸다.나도현은 입가에 냉소를 띠었다.“협력이라는 것도 결국 내 아내를 곤란하게 하려는 속셈 아니었나요? 근데 왜 이어가지 않아요?”단미주는 그가 밖에서 기다리고만 있으리라 생각했지, 직접
그날 연회장에서, 사람들은 나도현이 바로 옆에 있는데도 대놓고 양시은을 무시했다. 하물며 그가 없는 틈을 노려 양시은에게 험한 말을 하는 건 말할 것도 없었다.나도현은 양시은의 손을 꼭 잡으며 부드러운 눈빛을 보냈다.“우리 예전에 얼마나 힘들었는지 알잖아. 이제 겨우 함께하게 됐는데 내가 널 지키고 싶은 마음도 알아줘. 무슨 일을 겪든 나한테 꼭 말해 줘. 말 안 해주면 내가 모르고 지나갈 테고, 그럼 너 혼자서 괜한 고생할 거잖아.”차분하고도 따뜻한 나도현의 목소리가 귀에 맴돌았다.양시은은 고개를 끄덕였다.“알았어. 네 마음 다 알고 있어. 그런데 이번 협력은 정말 내 실력을 증명할 기회라고 생각해.”스스로 능력을 입증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그와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을까.양시은은 나도현의 곁에서 누구도 의심하지 못할 당당한 모습을 보여 주고 싶었다.“그 여자랑 협력한다고 해서 뭘 증명할 수 있는데? 시은아, 내가 있으면 굳이...”나도현이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양시은이 손으로 그의 입술을 막았다. 더는 말하지 말라는 뜻이었다.나도현의 생각은 그녀도 알았다. 그래서 조곤조곤 설명하기 시작했다.“단미주 씨는 나를 무시하고 있어. 만약 이번 기회에 단미주 씨의 기를 꺾으면 아무도 날 얕볼 수 없을 텐데, 넌 어떻게 생각해?”양시은의 의도는 너무나 단순하고 직설적이었다.나도현은 그녀의 머리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악감정을 품은 사람의 생각은 쉽게 바꿀 수 없어. 네가 아무리 잘해도 끝없이 딴지를 걸 거야. 넌 그냥 네가 해야 할 일을 잘하면 돼. 굳이 모두를 설득할 필요는 없어.”그의 부모만 해도 양시은에게 엄청난 편견이 있었다. 비록 지금은 편견을 내려놓고 하민에게 관심을 쏟고 있지만 말이다.어찌 됐든 유언비어는 끊임없이 생기는 법이라, 양시은이 모든 공격을 다 막기에는 무리가 있었다.“아니, 난 이미 마음먹었어. 말리지 말아 줘.”양시은은 결심이 확고했다. 나도현도 억지로 막을 수 없음을 잘 알았다.“그래. 그렇다면 내가 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