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수아의 부모님은 여이현에게 감사를 표했다.둘은 마치 구세주를 만난 듯 그에게 거의 무릎이라도 꿇을 듯한 태도로 말했다.“대표님, 이번 일은 모두 대표님 덕분입니다. 대표님이 아니었다면 저희는 정말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을 겁니다!”“고맙다는 말씀은 필요 없습니다.”여이현은 담담하게 대답했다.그에게는 그저 간단히 처리할 수 있는 일이었을 뿐이었다.만약 별이가 사건에 휘말리지 않았더라면 그는 다른 사람의 문제에 굳이 관여하지 않았을 것이다.하지만 임상우와 전수진은 이번 일을 좋은 계기로 삼았다.임수아와 별이의 친밀한 관계를 보며 부부는 한 가지 결론을 내렸다.반드시 여이현과의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고.이 기회는 임씨 가문을 다시 일으킬 수 있는 기회일 뿐이 아니라 그들의 딸 임수아도 풍족한 삶을 누릴 수 있는 기회라 확신했다.여이현은 임씨 가문과 엮이고 싶지 않았지만 별이를 봐서 그들과의 관계를 완전히 끊지는 않았다.시간이 흐르면서 임상우는 여진 그룹과의 사업 협력을 시작했다.임수아는 별이의 진정한 단짝 친구로 자리 잡았다.한 달 후.온지유의 출산 예정일이 다가왔지만 출산 징후는 전혀 나타나지 않았다.조급해 진 여이현은 온지유를 병원으로 데려갔다.예정일을 지나면 양수가 탁해지는 위험이 있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여이현은 온지유의 상태를 극도로 조심했다.온지유를 위해 VIP 병실을 예약했고 10명 이상의 의료진이 24시간 그녀를 돌보도록 했다.하지만 온지유는 여이현만큼 긴장하지 않았다.그녀는 두 번째 출산이었고 아직 출산 징후도 없었기 때문에 병원에 누워서 안심하고 있었다. 혹시 무슨 일이 있으면 의사가 구해 주리라 믿고 있었다.온지유는 평소처럼 잘 먹고 잘 지내며 여유를 보였다.그러나!상황은 다소 괴로웠다. 낮에는 아무런 이상이 없었지만 밤이 되면 진통이 시작되었다.출산 단계까지는 이르지 않은 진통이었지만 그녀를 괴롭혀 제대로 잠을 잘 수 없게 만들었다.여이현은 그런 온지유를 보며 가슴 아파하며 고통을 나누고 싶어
온지유가 자연분만을 고집하지 않았다면 여이현은 아마 그녀에게 제왕절개를 하라고 설득했을 것이다.하지만 그녀의 의지를 알게 된 여이현은 답답함과 걱정이 교차했다.그는 온지유를 설득하려고 시도했다.“요즘은 무통 주사도 있다고 하지만 여보가 매일 밤 이렇게 고생하는 걸 보니 정말 속상해. 차라리 한 번만 아프고 끝내는 게 낫지 않을까? 흉터가 걱정된다면 내가 최고의 미용 의료팀을 찾아서 완벽하게 처리해 줄게.”매일 밤 반복되는 통증에, 낮에도 간헐적으로 이어지는 고통.온지유가 고생을 하며 잠조차 제대로 자지 못하는 모습을 보며 여이현은 그녀에게 출산할 힘이 남아 있을지 걱정됐다.수시로 반복되는 고통은 그녀에게도 자신에게도 큰 스트레스였다.하지만 온지유는 단호히 대답했다.“아니, 자연분만을 할 거야. 아이가 천천히 나오려는 것뿐이지 안 나온다는 건 아니잖아. 그리고 의사들도 건강 상태가 아주 좋다고 하지 않았어?”“자연분만은 회복이 빨라. 제왕절개를 하고 나서 일주일 동안 침대에 누워 꼼짝도 못 하는 건 정말 싫어.”온지유는 직접 제왕절개의 고통을 경험한 적은 없지만 최근 여러 정보를 통해 그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알게 되었고 그 상상만으로도 충분히 괴로웠다.“하지만 난 네가 이렇게 아프고 고생하는 게 너무 안타깝단 말이야.”여이현은 솔직하게 그녀를 걱정하는 마음을 드러냈다.온지유는 그의 손을 꼭 잡으며 부드럽게 말했다.“아픈 건 지나가면 끝이잖아. 그리고 아이는 이미 우리 곁에 와 있어. 지금 와서 그 아이를 포기할 수는 없잖아. 힘들더라도 우리 아이를 맞아들여야지.” 3일 후, 온지유의 상태는 여전히 변화가 없었다.간호사와 의사들은 병실을 돌며 그녀에게 요가 볼로 운동을 더 하거나 계단을 자주 오르내려 보라고 했다. 그래도 변화가 없다면 의학적 개입이 필요할 수도 있었다.그러나 예상치 못한 일이 일어났다.그날 밤, 온지유가 화장실에 가려고 일어나자 양수가 갑자기 터졌고 이어서 극심한 통증이 그녀를 덮쳤다. 여이현은 온지유 곁에서
아기의 얼굴은 작고 앙증맞았다.분홍빛의 얼굴은 약간 주름졌고 작은 주먹을 꼭 쥔 채 입을 살짝 벌리고 있었다.온지유는 아기를 보면 볼수록 사랑스러움을 느꼈다.그녀는 문득 별이를 낳았던 날이 떠올랐다.그토록 힘들게 낳은 아이를 겨우 한 번 스치듯 보고는 바로 데려가 버린 뒤 죽었다고 전해 들었다. 5년이라는 시간...이번에는 꼭 자신이 직접 아이를 키우겠다고 다짐했다.“아이 이름은 뭐로 할까?”온지유는 여이현에게 물었지만 사실 그녀는 이미 마음속으로 이름을 떠올리고 있었다.“여민하.”그녀는 그 이름을 조용히 중얼거렸다.하지만 여이현은 그녀의 이마에 입 맞추며 부드럽게 말했다.“여보, 딸아이 성은 당신 성으로 하면 어떨까?”“정말?”온지유는 믿기 어려운 듯 물었다.대개 아이의 성은 아버지를 따른다. 어머니의 성을 따르는 경우는 최근에서야 생겨난 일이었다.여이현이 먼저 그렇게 제안하니 놀랄 수밖에 없었다.여이현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내가 여보를 속인 적 있어? 온... 온시유는 어때?”“이 아이는 긴 시간 기다려 온 아이야. 우리가 지난날의 상처를 치유할 기회를 준 아이이고.”온지유는 이 이름을 조용히 되뇌며 고개를 끄덕였다.“좋아.”그녀는 갑자기 별이의 이름이 떠올랐다.빛나는 별, 윤별.“별이의 이름에 대해선 여태 물어본 적 없네. 당신이 지은 거야, 아니면 당신 아버지가 지은 거야?”그녀는 깊은숨을 내쉬며 덧붙였다.“지금 와서 이런 걸 묻는 건 너무 늦었나?”“늦지 않았어. 당신은 항상 별이를 찾으려고 노력했잖아. 내가 했던 말, 죽었다는 말도 믿지 않았고. 이 몇 년간 정말 고생 많았어. 경성으로 돌아와서도 정말 많은 노력을 했잖아.”여이현은 온지유의 헌신과 노고를 진심으로 인정하며 그녀를 위로했다.그러나 그는 갑자기 무언가 떠오른 듯 말했다.“아니다. 딸아이 이름이 시유라면 여보 이름과 발음이 너무 비슷해. 내 생각엔... 온하윤이 더 좋을 것 같아.”윤별은 빛나는 별, 하윤은 따뜻한 햇빛.“좋아.
온지유는 갓 태어난 딸과 떨어지기를 원치 않았다.“아버지, 괜찮아요. 아이가 이제 막 태어났으니 아무리 운다고 해도 큰 소란을 피우진 않을 거예요. 그리고 별이 때는 제가 직접 돌볼 수 없었잖아요. 이번 딸만큼은 제가 직접 돌보고 싶어요. 한동안 저와 이현 씨가 별이에게 신경을 많이 못 쓸 텐데, 이번엔 별이는 아빠가 더 챙겨주셔야 할 것 같아요.”온지유의 말을 듣자 법로는 바로 손녀를 온지유 곁에 두었다. 온지유는 딸을 품에 안고 따스한 눈길로 아기를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너 참, 무슨 이렇게 서먹한 말을 하고 그래. 별이는 내 외손자야. 내가 여기 있는 것도 별이랑 시간을 더 보내고 싶어서지. 넌 네 몸이나 잘 챙겨. 필요한 건 산후도우미나 이현이에게 부탁하면 되잖아. 별이는 내게 맡겨. 걱정하지 마라.”법로는 온지유에게 약속했다. 별이는 침대 옆으로 다가와 난간에 기대어 손을 뻗어 온하윤의 작은 얼굴을 살며시 만졌다.얼굴은 부드럽고 말랑했다.“엄마, 동생이 엄청 작아요.”별이의 첫 감촉이었다.동생은 아직 눈도 뜨지 않은 채 고요히 자고 있었다.온지유는 가슴 깊이 행복을 느끼며 부드럽게 말했다.“갓 태어난 아이는 원래 이렇게 작단다. 별아, 엄마가 동생을 낳았지만 너를 사랑하는 마음은 하나도 변하지 않았어.”별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알아요, 엄마. 엄마랑 아빠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도 저 다 알아요. 그러니까 두 분은 두 분의 아쉬움을 채우세요. 저는 신경 쓰지 마세요.”온지유는 임신 전 별이의 동의를 구했었다. 어리지만 별이는 또래보다 훨씬 성숙하고 이해심 많은 아이였다.그의 말을 들으며 온지유는 따뜻함과 동시에 깊은 애틋함을 느꼈다.온지유는 손을 뻗어 별이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말했다.“엄마가 널 신경 안 쓸 리 없지. 넌 엄마의 소중한 보물이야.”“아빠의 보물이기도 하고.”여이현은 별이의 뒤에 서며 말했다.별이는 학교에 가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항상 온지유 곁을 지키고 있었다.온경준, 정미리, 그리
김혜연의 눈에는 눈물이 맺혔고,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감사함이 가슴속에 가득 찼다.그녀는 말 대신 발돋움해 신무열의 얼굴에 가볍게 키스했다.신무열은 그녀를 보며 미소를 지으며 장난스럽게 물었다.“얼굴에만?”김혜연은 얼굴이 빨개져 고개를 돌리며 작게 속삭였다.“사람들이 보고 있잖아요.”신무열은 웃음을 참지 못하며 그녀의 귀에 낮게 속삭였다.“밤에는 먼저, 방금처럼 네가 먼저 해 줘야 해.”“무슨 말 하는 거예요!”김혜연은 부끄러움을 감추지 못했다.다행히 진료실에 도착했고 대기자가 없어 김혜연은 바로 진료를 받을 수 있었다.10분 정도가 지난 후 김혜연은 눈이 붉어진 채로 진료실에서 나왔다.신무열은 그녀가 걱정돼 곧장 다가가 부드럽게 물었다.“무슨 일이야? 괜찮아?”김혜연은 말없이 한 장의 종이를 건넸다. 신무열은 그녀에게 무슨 문제가 생긴 줄 알고 조심스럽게 위로하며 말했다.“걱정하지 마. 난 항상 네 곁에 있어.”김혜연은 눈물이 맺힌 채 말했다.“먼저 검사 결과를 봐주세요.”그러고 나서 그녀는 고개를 숙이며 작게 울기 시작했다.그녀가 건넨 것은 초음파 검사 결과였다.‘임신 4주, 모든 것 정상’이라고 적혀 있었다. 즉, 한 달이 된 상태였다.신무열은 그 결과를 보고 너무 기뻐 손이 떨릴 정도였다.김혜연을 껴안고 싶었지만 신무열은 뱃속의 아이를 생각해 그녀를 살며시 안으며 이마에 키스했다.“무열 씨.”김혜연은 부끄러워하며 그의 품속에서 얼굴을 가렸다.신무열은 참을 수 없는 기쁨에 외쳤다.“내가 아빠가 된대! 내가 아빠가 된대!”지금의 그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처럼 보였다.김혜연도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임신을 하게 돼서 정말 다행이었다.만약 몸에 문제가 생겨 아이를 가질 수 없었다면 그녀는 신무열의 실망과 슬픔을 어떻게 감당했을지 상상조차 할 수 없었을 것이다.김혜연은 임신한 사실에 가슴 깊이 안도하며 기쁨을 느꼈다.“가요, 어서 우리 이 소식을 아버지께 알려드려요.”신무열은 그녀를 다정하게 품에
별이는 아직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 사람은 다시 빈정거렸다.“보세요. 부모님은 계속 여동생만 챙기고 있잖아요. 도련님은 신경도 안 쓰는 거 같은데요.”그 사람의 말투는 명백히 악의적이었다.그때 김혜연이 다가와 별이를 옆으로 데리고 가며 단호히 말했다.“이보세요, 이런 식으로 말하는 건 좀 아니죠. 지유 씨와 이현 씨는 두 아이를 다 사랑해요. 그러니 함부로 말하지 마세요.”그 사람은 김혜연을 위아래로 훑어보며 비웃듯 말했다.“당신은 여 대표님의 부인도 아니잖아요. 그분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어떻게 알겠어요? 딸을 더 예뻐한다는 건 다 아는 사실이잖아요. 별이 도련님이 태어났을 때 이렇게 큰 잔치를 열었나요? 전 본 적 없는데요.”별이는 차분히 웃으며 말했다.“아주머니가 못 봤다고 해서 없었다는 건 아니죠. 그리고 아주머니는 우리 부모님이 아니니까 부모님이 절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 리 없잖아요.”김혜연은 몰래 별이를 칭찬하며 엄지를 들어 보였다.하지만 그 사람은 포기하지 않고 뭔가 더 말하려 했지만 별이가 먼저 말을 끊으며 말했다.“아주머니, 부모님이 아주머니를 별로 사랑하지 않았던 거 같네요. 그래서 이런 생각을 하는 거겠죠. 하지만 오늘은 좋은 날이니, 기분 좋게 술이나 한 잔 더 하세요.”그 말을 끝내고 별이는 김혜연의 손을 잡고 온지유와 여이현 부부에게 걸어갔다.김혜연은 조용히 온지유에게 방금 있었던 일을 이야기했다.온지유는 별이의 반응에 감탄하며 말했다.“별이가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이 남편을 닮아가네요. 이 아이도 커서 또 하나의 여이현이 되겠어요.”그때 연회장의 음악이 울리며 주최 측의 인사가 시작될 시간이 되었다. 별이는 음료잔을 내려놓고 여이현을 불렀다.“아빠, 제가 해도 될까요?”온지유는 여이현의 팔을 살짝 잡아당기며 별이에게 맡기라고 했다.여이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조용히 말했다.“우리 아들 정말 멋져졌구나.”별이는 미소를 지으며 마이크를 들고 무대 위로 올라갔다.“여러분, 오늘은 제 여동생의 백일
배진호와 권다솔은 저번의 일을 겪으며 깊은 신뢰를 쌓아왔다.감정을 확인한 두 사람은 연인이자 동료로서 함께 일하며 특별한 관계를 이어갔다.연인 사이는 적절한 거리가 중요하다고들 한다.너무 멀면 그리움이 생기고 너무 가까우면 다툼이 생긴다고 하지만 배진호와 권다솔은 함께 문제를 해결하며 큰 다툼 없이 지내왔다.퇴근 후에는 같이 식사하거나 영화를 보고 때로는 함께 출근하며 서로에게서 편안함을 느꼈다.배진호는 자신의 나이와 책임을 생각하며 권다솔에게 확실한 약속을 해야 할 때라고 느꼈다.그녀를 사랑하는 만큼 그녀에 대한 책임도 지고 싶었다.현장에서는 사람들이 기쁨에 넘쳐 외쳤다.“배 비서는 대표님과 함께 오랜 세월 동안 가족 같은 존재였어요. 배 비서의 능력은 여기에 있는 모두가 아는 사실이죠!”“맞아요, 배 비서의 능력은 모두가 인정하죠! 이런 경사스러운 날에 정말 어울리는 일입니다!”“대표님의 가장 든든한 왼팔과 오른팔이 부부가 된다니 정말 축하할 일이에요!”“두 사람의 행복을 위해 건배합시다!”...배진호는 전부터 권다솔에게 청혼할 생각이 있었지만 업무가 바쁜 나머지 타이밍을 놓치고 있었다.오늘처럼 많은 사람이 모인 특별한 날에, 그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기로 했다.권다솔은 여이현의 중요한 날에 주목을 빼앗고 싶지 않았지만 배진호는 이미 무릎을 꿇고 반지를 들고 있는 상황이었다.이 자리에서 거절하는 것은 그를 난처하게 만들 뿐이라고 생각했다.결국 권다솔은 부드럽게 손을 내밀며 말했다.“네, 받아들일게요.”배진호는 환하게 웃으며 반지를 그녀의 손가락에 끼워 주었다.그 모습은 사진으로 남겨졌고 곧 인터넷에 퍼져 많은 사람들의 축복과 부러움을 받았다.그러나 권다솔의 아버지인 권용민은 이 결혼에 대해 탐탁지 않게 생각했다.백일 잔치를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 권용민은 두 사람의 앞을 막아섰다.그의 표정은 어두웠고 권다솔은 그런 아버지의 뜻을 이미 알고 있었다.그녀는 배진호와 함께 있는 것이 행복했고 청혼을 받아들인 지금 가족이
권용민은 깊고 날카로운 눈빛으로 배진호를 쏘아보듯 바라보며 말했다.“진호 씨가 아무리 성공했어도 결국은 남의 밑에서 일하는 사람일 뿐이죠. 내 딸은 최고의 것을 누릴 자격이 있습니다. 다솔이가 경험을 쌓고 싶어 했다고 해서 그저 평범한 사람으로 여겨선 안 돼요.”권용민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그의 말은 매우 공격적이었다.배진호는 여이현 곁에서 오랜 시간 동안 자신의 능력을 증명하며 존경받아 왔다. 많은 사람들이 여이현과의 관계를 이유로 그를 존중했고 그의 뛰어난 능력 또한 경외의 대상이었다.여이현처럼 까다로운 기준을 가진 사람 곁에 남아 있는 것은 능력이 탁월한 자들만 가능한 일이었다.그러나 권용민의 앞에서 배진호는 모든 것이 무의미해 보였다.배진호는 조용히, 그러나 단호히 말했다.“아버님, 제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제 직업이 다솔 씨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하실 수도 있다는 것도요. 하지만 저는 다솔 씨를 진심으로 사랑합니다. 다솔 씨가 입사했을 때부터 저는 다솔 씨의 신분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저희는 각자의 능력으로 이 자리에 올랐습니다. 만약 직업이 문제라면 제 회사를 설립할 수도 있지만 지금의 제가 있기까지는 모두 대표님 덕분입니다. 그래서 될수록 이 자리를 지키고 싶습니다. 이 일을 포기한다는 것은 제 자신을 부정하는 것과도 같습니다.”그의 말은 단호했으며 은혜를 배신하지 않겠다는 의지가 강하게 보였다.게다가 지금 여이현은 아이와 온지유에게 집중하고 있어 배진호와 권다솔이 모두 떠난다면 큰 손실을 입을 것이 분명했다.권용민은 차갑게 말을 이었다.“지금 당장 내 앞에서 전업하겠다고 한다 해도 딸을 내줄 생각은 없습니다.”그는 권다솔을 날카로운 눈빛으로 보며 덧붙였다.“이제 충분히 놀았으면 집으로 돌아와라. 내가 직접 나서서 너를 데려가고 싶지는 않다.”그 말을 남기고 권용민은 뒤돌아보지 않고 떠났다.비록 강제로 딸을 데려가진 않았지만 그의 생각과 입장은 명확히 전달되었다.권다솔은 배진호를
온지유는 고개를 끄덕였다. 비록 노래를 잘 부르는 것은 아니나 음치는 아니었다.별이는 기쁜 얼굴로 손뼉을 쳤다.“너무 좋아요. 아빠, 엄마, 내일 어린이집에서 가족 이벤트를 한다고 했어요. 노래 대회라고 했는데 별이랑 같이 참가해줄 거죠?”내일은 주말이었다. 어린이집에서 주말에 이런 이벤트를 계획한 것도 평일 출근할 학부모를 고려해서였다.만약 여이현에게 다른 일정이 없다면 당연히 아내와 함께 별이의 어린이집으로 갈 것이었지만 하필이면 새 프로젝트를 맡게 되었다.배진호는 권다솔의 마음을 되돌리느라 시간이 없으니 그가 해야 했다.“여보, 여보가 별이랑 같이 가줘. 난 그날 거래처 만나봐야 하거든.”신호를 기다리는 틈을 타 여이현이 온지유에게 말했다.온지유는 당연히 고개를 끄덕였다.아이의 일에 부모 모두 책임을 져야 했지만 두 사람은 부부였던지라 서로 이해하고 배려하는 것도 필요했다.여이현이 바쁘게 일하는 것도 더 유복하고 행복한 가정을 만들기 위함이라는 것을 온지유도 잘 알고 있었다.별이는 더욱 배려심이 깊은 아이였다. 고집을 부리지도 않고 온지유의 팔을 꼬옥 잡아 기대며 말했다.“그럼 아빠는 일하러 가세요. 별이는 엄마만 있어도 괜찮아요. 선생님도 두 분 중 한 명만 있어도 된다고 했어요. 물론 두 분이 같이 가면 더 환영한댔어요.”집으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 세 사람은 웃고 떠들다 보니 어느새 집에 도착했다.세 사람이 돌아왔다는 것을 눈치채기라도 한 것인지 자고 있던 온하윤도 눈을 떴다. 작은 입을 벌리며 하품했다.옆에 있던 김명자는 얼른 주방으로 가서 분유를 탄 뒤 온하윤의 입에 물려주었다. 향긋한 분유 냄새를 맡은 온하윤은 꿀꺽꿀꺽 젖병을 빨아 먹었다.세 사람이 집 안으로 들어왔을 때 마침 이 모습을 보게 되었다. 너무도 행복했다.“오늘 저녁은 내가 할게. 별이가 먹고 싶다는 햄버거를 만들고 있을 테니까 당신은 아이들이랑 놀아줘.”온지유는 여이현에게 뽀뽀한 뒤 앞치마를 두르곤 주방으로 들어갔다.거실에선 웃고 떠드는 소리가 울
권다솔은 이혼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바로 결혼할 수 없었다.게다가 남태건과 평생 묶여 살고 싶지도 않았다.설령 어젯밤 이상한 약물 탓에 그와 밤을 보내게 되었다고 해도 그녀의 마음속엔 온통 배진호뿐이었다. 오늘 아침 눈을 떴을 때 그녀의 온몸이 남태건의 터치를 거부하고 있었다. 설령 그저 손을 잡는 것일 뿐이라고 해도 말이다.남태건은 잔뜩 실망한 기색이었지만 포기하지 않았다.“그래, 일단 생각은 해봐. 다솔아, 급하게 답을 주지 않아도 돼.”그녀가 계속 거절한다면 그녀의 부모님을 찾아가 설득하면 그만이었다.권다솔의 부모님은 그를 아주 좋아했다. 어떻게든 그녀와 이어주려고 했으니 그들과 손을 잡는다면 권다솔과 결혼할 수 있을 것이다.권다솔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설령 오랫동안 생각을 해본다고 해도 남태건을 받아줄 리가 없었다....한편 온지유 쪽.권다솔이 떠난 후 두 사람은 서로 연락하지 않았다.그동안 여이현은 배진호를 찾아간 적 있었다. 기획하고 있던 프로젝트를 넘겨주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배진호는 집안일로 상태가 아주 좋지 못했다. 지금까지 혼자 회사를 운영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힘들어 보였으며 새로운 프로젝트를 맡을 기력은 없었다.배진호는 여이현의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아 솔직하게 말했다.그가 솔직하게 말하니 여이현도 강요하지 않았다.“일단 집안일부터 처리하세요.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 말하고요. 집안일이 어느 정도 정리가 되면 나한테 다시 찾아와도 돼요. 그때 또 새로운 일을 줄 테니까요.”여하간에 여진 그룹은 대기업이었기에 프로젝트는 언제든지 있었다.한번 기회를 놓친다고 해서 문제가 될 건 없었다.배진호는 그런 여이현이 너무도 고마웠다. 이미 충분히 그를 도와주고 있었다.하지만 감정이라는 건 결국 사람마다 다르게 느끼는 법이었다. 물을 마셔도 뜨거운 것인지 차가운 것인지 본인만 아는 것처럼 말이다. 너무 많은 사람이 끼어들면 때로는 오히려 역효과를 일으킬 때도 있었다.그는 권다솔과 다시 함께 살고 싶었지만, 전제가
“참.”권다솔은 갑자기 걸음을 멈추었다.“체크아웃 해야겠어요.”“그럴 필요 없어. 어젯밤 방은 내가 예약한 거거든. 우린 그냥 바로 병원으로 가면 돼. 나머진 내가 알아서 다 처리할 거야.”남태건은 급하게 그녀를 말렸다.두 사람이 나가자마자 배진호가 돌아왔다.그의 손에는 금방 만든 샌드위치가 있었다. 맛집으로 소문난 가게였던지라 그는 족히 반 시간은 기다려서야 살 수 있었다.하지만 괜찮았다. 권다솔이 좋아하기만 한다면 반 시간이든 한 시간이든 얼마든지 기다릴 수 있었다.“손님.”이때 로비 직원이 그를 불렀다.그녀는 배진호를 측은한 눈길로 보았다. 즐거운 마음으로 아침을 사러 나갔다가 그의 여자친구가 다른 남자와 함께 떠나버렸기 때문이다. 그 사실을 모르는 그는 다시 호텔로 돌아왔다.직원은 결국 참지 못하고 말해주었다.“여자친구분이 이미 떠나셨어요. 체크아웃하시겠어요?”“네, 체크아웃할게요.”배진호는 멍한 표정을 지었다.잠에서 깨어난 권다솔이 그에게 말도 없이 가버린 것을 보면 아직 그를 어떻게 마주해야 할지 모르는 것 같았다.그래서 그가 나간 사이에 생각을 정리할 겸 먼저 가버린 것으로 생각했다.체크 아웃을 한 뒤 배진호도 호텔에서 나왔다.그는 누군가 자신을 사칭하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다.남태건은 권다솔을 데리고 병원으로 온 뒤 기본적인 검사를 진행했다. 권다솔은 아주 건강했다.하지만 그녀는 기쁘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의 두 눈에서 눈물이 똑똑 떨어지고 있었다.“다솔아, 나랑 함께 밤을 보낸 게 그렇게 슬픈 일이야? 너한테 나는 그런 존재였어?”그녀를 집으로 데려다주던 남태건은 눈가가 붉어졌다.권다솔은 오직 배진호만 원했다. 그 사실에 그는 가슴이 쓰라리면서 분노가 치밀었다.그는 이미 권다솔을 자신의 아내로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배진호는 그의 아내와 밤을 보내지 않았는가.권다솔은 고개를 저었다.“그런 게 아니에요. 전 그냥 이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을 뿐이에요. 전 태건 씨를 여전히 친구로만 생각하고 있거든요.
권다솔은 눈을 떴다.옆에 누워있는 남태건을 본 순간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머릿속도 하얘졌다.그녀는 힘겹게 입을 뗐다.“어젯밤에... 그럴 리가 없잖아요?”머릿속에 남아 있던 기억이 알려주고 있었다. 어젯밤 그녀와 함께 있었던 사람은 배진호라고. 하지만 왜 남태건이 눈앞에 있는 것일까?그녀는 이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다솔아, 내가 어제 일찍 집에 들어가라고 했잖아. 그런데 네가 싫다면서 나더러 먼저 가라고 했지. 내가 어떻게 너만 혼자 남겨두고 집에 가? 주위에 남자들이 득실거리는데. 정말로 내가 먼저 갔다면 이상한 파리들이 너한테 꼬였을 거라고. 내가 그렇게 경계하고 있었는데도 너한테 파리가 꼬였을 줄은 몰랐네.”남태건은 태연하게 거짓말을 해댔다.얼굴도 붉지 않고 가슴도 요동치지 않을 정도로 태연했지만 두 눈엔 안타까움만 남아 있었다.“누가 네 술잔에 뭔가를 탔어. 그걸 눈치 못 챈 네가 주스를 가지러 갈 때 결국 정신을 잃게 되었었지. 하마터면 처음 보는 놈들에게 끌려갈 뻔한 걸 내가 막은 거야.”권다솔은 어젯밤 있었던 일을 기억해내려고 애를 썼다.그녀는 확실히 자신에게 치근대던 남자가 있다는 것을 기억해냈다. 그녀에게 손을 대려고 했으나 배진호가 나타나 남자를 때려주며 무사하게 되었다.분명 기억하고 있었다. 자신을 구해준 사람이 배진호라는 것을. 애초에 남태건이 아니었다.“정말로 절 구해준 사람이 태건 씨예요? 거짓말 하고 있는 건 아니죠?”권다솔은 반신반의하며 말했다.남태건은 손을 번쩍 들며 맹세했다.“당연히 거짓말이 아니야. 어젯밤 널 구한 사람이 내가 아니라면 내가 어떻게 너랑 같은 방에 있겠어? 다솔아, 그 약은 아주 위험한 약이야. 사람 기억까지 흐릿하게 만들 수 있는 약이지. 이따가 나랑 같이 병원에 가자. 후유증이라도 남으면 안 되잖아.”기억까지 흐릿하게 만든다는 말에 권다솔은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설마 진호 씨랑 보낸 시간이 전부 꿈인 거야? 약 때문에 환각이 생긴 거야?'그녀는 어제 꿈속에서 배
만약 권다솔이 모른다고 한다면 그는 이곳을 떠나 그녀가 푹 쉴 수 있게 해줄 생각이었다.그는 알고 있었다. 권다솔이 취했다는 것을. 술에 취한 사람과 억지로 하고 싶지 않았다.“진호 씨, 내가 어떻게 진호 씨 얼굴을 잊겠어요. 설마 내가 진호 씨를 못 알아볼 거로 생각한 거예요?”권다솔은 그를 보았다.그녀는 지금 술기운이 올라오고 있었다. 호텔 불빛 아래 보이는 배진호의 얼굴도 흐릿했다.이 모든 게 꿈일 거로 생각했다.현실에서는 감정을 꾹꾹 누르고 있었으니 꿈에서만큼은 전부 표현하리라 생각했다.그녀는 한번 또 한 번 배진호의 이름을 불렀다.그저 그의 이름을 불렀을 뿐인데 배진호는 이성을 잃고 말았다.그는 옷을 하나씩 벗으며 방 안의 불을 꺼버렸다. 그리고 고개를 내려 권다솔에게 키스했다. 두 사람은 뜨거운 키스를 나누었다.얼마나 지났을까, 두 사람은 전부 힘이 빠진 상태였다. 그제야 서로에게서 떨어졌다.권다솔은 몸에 힘이 하나도 없었다. 손가락 하나조차 움직일 수 없었기에 샤워하는 것은 더욱 불가능했다.그래서 그대로 눈을 감고 자버렸다.그날 밤, 그녀와 배진호는 그 어느 때보다 푹 자게 되었다.다음 날 아침이 되자 열린 커튼 틈 사이로 햇볕이 들어와 배진호는 눈을 뜰 수밖에 없었다.옆에 누워있는 권다솔을 본 그는 전례 없던 행복을 느끼게 되었고 이대로 시간이 멈추길 바랐다.그는 권다솔에게 이불을 덮어준 뒤 옷을 입었다. 아침을 사러 갈 생각이었다.어젯밤 두 사람은 아주 격렬하게 서로를 원했기에 권다솔이 깨어나면 분명 배고플 것이었다.아침을 먹은 후에 두 사람을 편히 잠 못 이루게 했던 문제들을 해결해볼 생각이었고 이혼도 취소할 생각이었다.그는 그렇게 호텔을 나섰다.그 모습을 마침 남태건이 목격했다. 그는 어젯밤 내내 권다솔을 찾아다니느라 잠도 자지 못했지만 찾지 못했다.조급해진 그가 경찰에 실종 신고를 하려던 때 배진호를 발견하게 된 것이다. 심지어 배진호는 호텔에서 나왔다.그렇다는 건...남태건은 이를 빠득 갈며 호텔
남자는 머리가 어질거렸다. 고개를 들자 보이는 잔뜩 화가 난 배진호의 얼굴에 그는 꼬리를 내리게 되었고 이내 배진호에게 비위를 맞추려고 했다.“깼어요, 깼어요. 이 여자는 형님한테 넘길게요. 두 사람 방해하지 않고 바로 여기서 꺼져드릴 테니까 형님은 천천히 즐기십시오!”“여자도 사람이야. 우리랑 같은 인간이라고. 물건처럼 넘기느니 마느니 할 자격 없어, 너한테.”배진호는 손을 뻗어 남자의 멱살을 잡으며 엄숙하게 경고했다.그는 방금 이곳에서 나는 소리를 들었다. 나서서 도와준 이유는 아무 잘못도 없는 여자가 괴롭힘당하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그저 한 몫 챙겨보려고 구하러 온 것이 아니었다.그의 마음속에 권다솔 외에는 누구도 들어올 수 없었다.“네, 네. 지당하신 말씀이십니다.”남자는 바닥을 기어 다니더니 빠르게 몸을 일으켜 도망쳤고 중얼거리며 배진호를 욕했다.‘어디서 허세를 부려!'‘세상에 욕망이 없는 남자가 어디에 있다고! 다들 여자를 원한다고!'배진호는 쫓아가지 않았다. 고개를 돌려 방금 남자에게 당하고 있었던 여자에게 밤늦게 술집에 왔을 땐 조심하라고 말하고 싶었다.그런데 그는 권다솔을 발견하게 되었다.“진호 씨? 내가 지금 헛것을 보고 있는 건 아니죠? 진호 씨가 왜 여기에 있어요?”권다솔은 그를 향해 한 걸음씩 다가갔다.그녀는 눈앞에 있는 남자를 보았다. 자신이 그렇게나 그리워했던 남자가 지금 바로 눈앞에 있자 땜이 무너져버린 저수지처럼 감정이 흘러나왔다.이 모든 것이 꿈만 같았다.권다솔은 속으로 자신에 말했지만, 여전히 참지 못하고 손을 뻗게 되었다. 배진호를 직접 만지며 꿈인지 현실인지 확인하고 싶었다.“나예요. 우리가 같은 목적으로 여기에 온 것 같네요.”배진호는 씁쓸하게 웃었다.방금 그는 차를 몰고 이곳으로 오면서 안에서 빛나는 불빛 보며 생각했었다. 만약 이곳에 권다솔이 있다면 분명 안으로 들어가 한잔 마셨을 것이라고.그 생각으로 이 안까지 들어온 것이다.그러나 그는 정말로 이곳에서 권다솔을 만나게
“태건 씨, 다시 말하지만 나는 도움이 필요 없어요. 빨리 돌아가세요.”권다솔의 목소리엔 이미 지친 듯한 짜증이 묻어났다.그녀가 밤늦게 클럽에 온 이유는 마음을 풀고 스트레스를 해소하기 위해서이지 남태건이 옆에서 잔소리를 늘어놓으라고 온 게 아니었다. 하지만 남태건은 그녀의 말을 듣지 않고 오히려 그녀 옆에 자리를 잡고 자신도 맥주 한 병을 땄다.“네가 술을 마시고 싶다면 내가 같이 마셔줄게. 네가 집에 가고 싶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데려다줄게.”권다솔은 한동안 대답하지 못했다.갑자기 술 마실 기분이 뚝 떨어진 그녀는 술병을 옆으로 밀어두고 춤추는 남녀들로 가득한 스테이지를 멍하니 바라봤다.‘이 순간에 배진호가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다솔아, 우리도 같이 춤출래?”남태건이 먼저 제안했다.아까 이쪽으로 오면서 그는 배진호를 봤다.그 남자는 정말로 끈질기게 권다솔의 앞에 나타났다. 아니면 둘 사이엔 정말 인연이라도 있는 걸까? 이렇게 힘들고 지칠 때 찾는 곳이 똑같다는 것 자체가.하지만 남태건은 그런 인연도 자신이 있는 한 반드시 끊어낼 거라 다짐했다.그는 배진호가 자신의 두 눈으로 확인하도록 만들고 싶었다. 권다솔과 자신이 춤을 추며 두 사람의 몸이 밀착해 있는 모습을 말이다.권다솔은 고개를 저었다.“혼자 가세요. 난 그냥 조용히 있고 싶어요.”“네가 안 간다면 나도 안 가. 나는 너하고만 있고 싶어. 다른 여자는 보지도 않을 거야.”남태건은 천천히 그녀에게 더 가까이 다가갔다.둘 사이의 거리가 한층 더 좁혀졌다.남태건이 손을 내밀어 권다솔의 손끝에 닿으려는 순간, 권다솔이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다솔아, 어디 가려고?”남태건은 그녀가 화난 줄 알고 얼른 따라가려고 몸을 일으켰다.권다솔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주스 좀 받아어려고요. 금방 올 테니까 여기 있으세요.”그제야 남태건은 안심하고 자리에 앉았다.그는 미리 준비해 둔 액세서리를 가방에서 꺼냈다. 권다솔이 돌아오면 그녀에게 선물할 생각에 미소를 지
술병이 박살 나며 바닥이 깨진 조각들로 가득 찼다.여자는 눈앞의 상황에 깜짝 놀라 화들짝 일어섰다.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배진호를 쳐다보는 그녀의 심장은 놀라서 요동쳤다."당신 지금 뭐 하는 거야?""비키라고 했잖아."배진호는 마침내 그녀를 바라보았다.그의 눈빛엔 감정이 전혀 없었다. 욕망은커녕 오히려 혐오감만 가득 차 있었다.그 순간, 여자는 철저히 무너지는 기분을 느꼈다.‘내가 그렇게 형편없나?’제 발로 찾아온 여자도 거부할 뿐만 아니라 맥주병까지 깨버리다니."알았어. 가면 되잖아. 설마 내가 당신 아니면 안 될 줄 알아?"그녀도 자존심에 화가 났다.체면을 세우고 싶었던 그녀는 독설을 날렸다."당신 같은 사람 나 말고 누가 좋아한다고 그래? 사람들한테 방해받기 싫으면 여기엔 왜 온 건데?"클럽은 남녀가 자유롭게 어울리는 곳 아닌가?자기가 순진한 남자라도 되는 줄 아는가?배진호는 그녀의 말에 아랑곳하지 않았다. 주변이 조용해진 뒤, 그는 다시 자리에 앉아 조용히 술잔을 들었다.만약 권다솔이 여기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러나 그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이루어질 수 없는 꿈일 뿐이라는 것을.그가 술잔을 집으려 고개를 숙인 순간, 남태건이 그의 옆을 지나 안쪽 자리로 향했다.권다솔이 그곳에 앉아 있었다.그녀는 자신이 쫓아낸 남자들이 몇 명인지 셀 수도 없었다. 몇몇은 버티며 소란을 피우려 했지만 그녀의 손에 든 맥주병은 그들을 봐주지 않았다.머리를 맞을 뻔한 남자들은 당연히 더 이상 그녀를 귀찮게 하지 못했다.하지만 그들 역시 쉽게 물러서지 않았다. 틈틈이 이쪽을 힐끔거리며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그때 남태건이 다가왔다.그는 권다솔의 손에 있던 술병을 순식간에 낚아챘다.“다솔아, 이게 뭐 하는 짓이야? 밤늦게 집에 안 들어가고 왜 여기서 혼자 술을 마시고 있어?”“이건 내 일이에요. 당신이랑은 아무 상관 없어요.”권다솔은 그의 말을 듣고도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권다솔은 방금 뺏긴 술병 대신 새로운 술병
클럽에는 예쁜 여자들이 많았지만 권다솔 같은 분위기의 사람은 얼마 보이지 않았다.권다솔이 들어서자마자 한 남자가 술잔을 들고 와서 말을 걸었다.“저희 이미 자리 잡았는데 오실래요? 스페이드 에이스도 깠어요. 마시러 와요.”“저 사람 따라가실 거면 그만두고 이쪽으로 오세요. 전 이 클럽 회원이에요. 마시고 싶은 술이 있으면 아무거나 불러요.”하지만 권다솔은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그들을 밀어냈다.“비켜주세요.”권다솔은 곧장 카운터로 걸어가서 테이블 석과 맥주를 한 박스 주문했다.그녀는 혼자서 자리에 앉아 기계식으로 맥주를 열고 입안으로 털어 넣었다. 곧 테이블 위에는 빈 맥주병들이 줄을 지었다.알콜로 정신을 마비시키고 싶었지만 이렇게 많은 술을 마셔도 머리는 점점 맑아지기만 했다.머릿속에는 심지어 배진호의 모습이 그려지기까지 했다.같이 일을 하던 장면들, 행복한 연애를 하던 장면들, 많은 조각들이 모여져 무릎을 꿇고 프러포즈를 하는 배진호의 모습으로 변했다.한때 그녀는 자신이 세계에서 가장 행복한 여자인 것 같았다. 크면서 한 번도 억울함을 겪은 적 없었고 일도 순조로웠다. 배진호라는 사랑하는 남자도 만났고 말이다.하지만 지금은 그저 광대가 돼버린듯한 기분이었다.“웨이터.”권다솔은 빈 술병을 한쪽에 치워두고 휘청거리며 일어섰다.“소주 몇 병 추가해 주세요.”맥주로는 아무리 마셔도 도저히 취하지 않았다.소주라도 더 마셔야 할 것 같았다.취하고 나면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아도 된다. 더 이상 슬프지도 않을 것이다.머지않은 곳 다른 테이블 석에서 배진호도 한잔 또 한잔 술을 입안에 들이붓고 있었다.잘 생기고 분위기 있는 그의 모습에 고급스러운 옷차림, 게다가 주변에는 다른 여자도 없었다.이 모든 것이 어우러져 바에 있는 여자들의 이목을 끌었다.곧 노출이 심한 복장을 항 여자 한 명이 그의 곁에 와서 앉으며 배진호의 허리를 두 손으로 감쌌다.“오빠, 혼자 왔어? 혼자 마셔도 재미없는데 나랑 게임 할까? 진 사람이 옷 하나씩 벗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