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를 바라보는 시선이 분명히 있었지만, 그 누구도 그 의미를 입 밖으로 꺼내진 않았다.연미혜는 복잡하게 얽힌 두 사람의 눈빛을 눈치채지 못했다.지금 그녀는 김태훈과 함께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누는 중이었다.식사를 거른 터라 잠시 대화를 마무리한 뒤, 사람들 틈을 빠져나와 뷔페 테이블 쪽으로 향했다.그 모습을 눈여겨보고 있던 구진원이 곧 뒤따라갔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그녀 옆에 서서 말을 걸었다.바로 옆, 같은 구역에 있던 정범규는 그 장면을 보고는 잠시 멈칫했다.그가 본 것은 단순한 대화가 아니었다.‘...씨X.’작게
연미혜가 아이리스 국제공항에 도착했을 땐 이미 밤 9시가 넘어 있었다.오늘은 그녀의 생일이었다. 휴대폰을 켜자마자 동료들과 친구들에게서 온 생일 축하 메시지가 한가득 쌓여 있었지만, 정작 경민준에게선 아무런 연락도 없었다.연미혜의 미소도 씁쓸한 표정으로 바뀌었다.저택에 도착했을 땐 벌써 10시가 넘은 늦은 밤이었다.유순자는 갑자기 나타난 그녀를 보곤 순간 멈칫했다.“사모님, 말도 없이... 어쩐 일이세요?”“민준 씨랑 솜이는요?”“대표님은 아직 안 들어오셨고 다솜 아가씨는 방에서 놀고 계세요.”연미혜는 짐을 유순자에게
밤 9시가 넘어가자, 경민준과 다솜이 집으로 돌아왔다.경다솜은 아빠의 옷자락을 꼭 움켜쥔 채 차에서 내리는 걸 한없이 미뤘다.솔직히, 엄마가 집에 있는 오늘 같은 날엔 아예 돌아오고 싶지 않았다.하지만 지유 이모가 ‘엄마는 일부러 널 보러 온 거야. 만약 집에 안 가면 엄마가 속상해할 거야.’라고 했고, 아빠도 ‘오늘 밤에 안 들어가면, 내일 엄마가 바다를 보러 가는 데 따라가겠다고 할 거야.’라고 했던 말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돌아오기로 했던 것이었다.경다솜의 얼굴에는 여전히 걱정이 남아 있었고, 이내 찝찝한 얼굴로 중얼거
경문 그룹의 수행 비서이자 비서실장인 강철우는 연미혜의 사직서를 받아 들고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그는 회사 내에서 연미혜와 경민준의 관계를 아는 몇 안 되는 사람이었고, 경민준이 단 한 번도 그녀에게 마음을 준 적 없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었다.결혼 후, 경민준은 줄곧 냉정한 태도로 그녀를 대했고, 집에도 거의 들어가지 않았다.연미혜는 남편과 가까워지기 위해 경문 그룹에 입사했고 그녀의 목표는 처음부터 명확했다. 바로 경민준의 수행 비서가 되는 것이었다.하지만 경민준은 단칼에 거절했고, 심지어 경무진이 직접 나서서 설득했음
경다솜은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며 소리쳤다.“진짜예요?!”“그럼!”“지유 이모는 왜 저한테 같이 돌아갈 거라고 말 안 했을까요?”“이제 막 결정된 일이니까. 아직 말하지 않았어.”경다솜은 한껏 들뜬 얼굴로 활짝 웃었다.“아빠, 이거 당분간 비밀로 해 주세요! 우리 서프라이즈처럼 지유 이모 앞에 나타나요. 그러면 정말 재밌을 것 같아요!”“그래.”“아빠 최고예요! 아빠 진짜 진짜 사랑해요!”전화를 끊은 뒤에도 경다솜은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하고 침대 위에서 신나게 뛰어다니며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그러다 문득 연미혜의 얼굴
김태훈과 연미혜는 이 몇 년 동안 거의 만나지 않았다. 하지만 몇 번의 짧은 만남만으로도 김태훈은 그녀가 예전처럼 당당하고 빛나던 모습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예전의 연미혜를 떠올리면, 그는 꿈에도 그녀를 보며 ‘자존감이 낮다’는 말을 떠올릴 거라곤 상상도 못 했다.김태훈은 그녀와 경민준의 결혼 생활에 대해 깊이 알지는 못했지만, 대략적인 사정은 알고 있었다.그는 속으로 짐작이 갔지만 굳이 말로 꺼내진 않았다. 대신, 진심을 담아 말했다.“잠깐 뒤처지는 건 아무 문제 아니야. 너의 실력과 재능은 웬
다음 날 아침, 경민준은 회사에 도착하자마자 연미혜와 마주쳤다.그녀는 경민준과 경다솜이 이미 귀국했다는 사실을 전혀 몰랐기에 예상치 못한 조우에 순간 발걸음을 멈췄다.경민준 역시 그녀를 보고 흠칫 놀란 기색을 보였지만, 그저 출장을 다녀온 줄로만 생각하며 별다른 표정 변화 없이, 마치 낯선 사람을 지나치듯 무심하게 그녀를 스쳐 지나가 회사 안으로 들어갔다.예전 같았으면, 갑작스러운 경민준의 귀국 소식에 깜짝 놀라며 기뻐했을 것이다. 바로 뛰어가 안길 수는 없어도 환한 미소로 그의 얼굴을 바라보며 아침 인사를 건넸을 것이다.그
연미혜의 두 동료는 임지유를 흘깃거리며 보다가, 자연스럽게 몇 걸음 물러나 벽에 바짝 붙었다.임지유 역시 연미혜를 보았지만, 곧바로 무심한 듯 시선을 돌렸다. 애초에 그녀를 신경 쓸 가치조차 없는 사람으로 여기는 듯했다.이어서 몇몇 임원들의 비위를 맞추는 웃음소리가 들려왔고 임지유는 그들 사이에서 여유롭게 엘리베이터에 올랐다.엘리베이터 문이 닫히자, 연미혜의 동료들은 마침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다시 속삭이며 수군거리기 시작했다.“방금 그 사람이 대표님 여자 친구죠? 와, 진짜 예쁘네요! 게다가 입고 있는 거 전부
서로를 바라보는 시선이 분명히 있었지만, 그 누구도 그 의미를 입 밖으로 꺼내진 않았다.연미혜는 복잡하게 얽힌 두 사람의 눈빛을 눈치채지 못했다.지금 그녀는 김태훈과 함께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누는 중이었다.식사를 거른 터라 잠시 대화를 마무리한 뒤, 사람들 틈을 빠져나와 뷔페 테이블 쪽으로 향했다.그 모습을 눈여겨보고 있던 구진원이 곧 뒤따라갔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그녀 옆에 서서 말을 걸었다.바로 옆, 같은 구역에 있던 정범규는 그 장면을 보고는 잠시 멈칫했다.그가 본 것은 단순한 대화가 아니었다.‘...씨X.’작게
하승태는 여전히 무반응이었다.그때 마침 누군가가 다가와 인사를 건넸고 상대는 연미혜와 김태훈까지 아는 사람이었다.자연스레 넷이 함께 대화를 나누게 되었고 그들 사이엔 빠르게 편안한 분위기가 형성됐다.그 곁에 서 있던 손아림은 대화에 낄 틈도 없이 방치된 채 멍하니 서 있었다.한동안 말없이 서 있던 그녀는 아무도 자신에게 시선을 주지 않는 상황에 얼굴이 점점 굳어갔다. 결국 억지웃음을 지으며 어색하게 그 자리를 빠져나갔다.그 광경을 멀리서 지켜보던 정범규가 중얼거렸다.“승태는 요즘 따라 두 사람과 더 가까워지는 것 같네.”
그동안 임씨 가문 산하의 엘리스 그룹은 핵심 기술도, 고급 인력도 없어 적자를 겨우 메우며 유지되는 상태였다.이번 출장에서도 경민준은 시간을 쪼개 해외에서 인재들을 수소문했고, 엘리스 그룹에 맞는 기술자 몇 명을 데려오는 데 성공했다.그가 손을 뻗은 이상, 엘리스 그룹은 조만간 다시 숨통이 트일지도 몰랐지만 이 모든 일은 연미혜가 몰라도 무관한 일들이었다.만약 연미혜가 아직 경민준을 마음에 남겨두고 있다면 이런 이야기들은 오히려 상처가 될 뿐이라는 걸 하승태는 잘 알고 있었다.그래서 그는 굳이 그 얘기를 꺼내지 않았다.점심
식사를 마친 뒤, 경다솜이 무심코 말을 꺼냈다.“아... 엄마, 아빠는 출장 갔대요.”그제야 연미혜는 경민준이 출장을 떠났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는 별다른 반응 없이 고개를 끄덕였을 뿐이었다.밤 아홉 시가 넘은 시각.연미혜가 샤워 중인 사이, 침대 위에 두고 온 휴대폰이 울리기 시작했다.전화를 먼저 받은 건 경다솜이었다.화면에 하승태의 이름이 뜬 것을 본 경다솜이 반가운 목소리로 말했다.“승태 삼촌, 다솜이에요!”잠시 침묵이 흐른 뒤, 하승태의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이어졌다.“다솜아... 안녕.”그때, 연미
잠시 후, 경민준이 전화를 받았다.“하원했어?”경다솜은 대답했다.“네...”“엄마 보고 싶어?”“네.”“엄마한테 전화는 안 했어?”“네.”경민준은 웃으며 말했다.“전화해 봐. 오늘은 엄마가 받을 거야.”그 말에 경다솜의 눈이 반짝였다.“정말요?”“응. 전화해 봐.”“네!”전화를 끊자마자 경다솜은 연미혜의 번호를 눌렀다.연미혜는 휴대폰에 뜬 이름을 보고 잠시 멈칫했다.병원과 고씨 가문에서 한 번씩 마주친 걸 제외하면 딸과는 벌써 한 달 넘게 얼굴을 보지 못하고 있었다.그 사실이 마음을 건드렸다.그녀는
그 뒤로 경민준은 단체 대화방에 짧은 메시지를 하나 더 남겼다.[고객 접대 중. 너희끼리 얘기해.]그러고는 더는 대화에 참여하지 않았다.하승태도 차에 올라탄 후 단톡방을 확인했지만, 굳이 이 일에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곧바로 답장을 보냈다.[나도 좀 바빠... 너희들끼리 얘기 나눠.]그러고는 카톡 창을 닫아버렸다.정범규는 말없이 점 세 개만 남겼다.그렇게 되자 임지유도 발 빠르게 응수했다.[난 식사 약속이 있어서 이만... 다음에 얘기하자.][...]대화방엔 더 이상 아무 말도 올라오지 않았다. 다들 해
월요일 아침, 연미혜가 출근한 지 얼마 되지 않아 AI 학술지에서 그녀의 논문이 정식 게재 승인되었다는 메일이 도착했다.잠시 후, 김태훈이 업무 관련해서 찾아왔다가 그 소식을 들었다.“논문 게재 승인되었어요.”“난 예상했어.”그는 별로 놀라지도 않았다.유명욱 교수가 검토하고 좋다고 한 논문이라면 당연히 통과됐을 거라 믿고 있었다.업무 이야기를 마무리하던 연미혜가 시계를 흘끗 보며 물었다.“점심 같이 드실래요?”김태훈은 관자놀이를 문지르며 고개를 살짝 저었다.“오늘은 안돼. 약속 있어.”“무슨 약속이요?”“소개팅.
연미혜는 김태훈의 말을 듣고 순간 어안이 벙벙했다.김태훈은 이력서를 다시 한번 들여다보며 물었다.“이력서는 깔끔하게 잘 만들었네. 실력은 어때?”“수준급이었어요. 인공지능 쪽에 입문한 지는 2년도 안 됐는데, 이미 대부분 박사급 개발자보다 뛰어나요.”“오... 그 정도야?”김태훈은 놀랍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진짜 타고났네. 마음에 들어?”“후보로 생각하고 있어요. 다만...”“며칠 못 가고 훌쩍 떠날까 봐 걱정이지?”“맞아요...”물론 CUAP이든 Infinite-CM이든, 구진원은 정말 흥미를 느끼고 있는 게
“봐야죠. 면접 끝까지 봐야죠.”그는 능청스레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구진원입니다. 진실의 진, 원할 원입니다. 만나서 반가워요.”연미혜는 간단히 악수를 나누며 고개를 끄덕였다.“이력서 봤어요.”연미혜는 이력서에서 눈을 떼고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그럼 이제부터 제가 구진원 씨를 면접해 보는 건가요? 아니면 계속해서 저를 테스트하실 생각인가요?”그는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전 뭐, 둘 다 괜찮습니다.”이력서에 따르면, 그는 알고리즘에 강점을 둔다고 했다.연미혜는 그가 데이터 정제, 특성 엔지니어링, 하이퍼파라미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