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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4 화

Author: 구름속
경다솜은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며 소리쳤다.

“진짜예요?!”

“그럼!”

“지유 이모는 왜 저한테 같이 돌아갈 거라고 말 안 했을까요?”

“이제 막 결정된 일이니까. 아직 말하지 않았어.”

경다솜은 한껏 들뜬 얼굴로 활짝 웃었다.

“아빠, 이거 당분간 비밀로 해 주세요! 우리 서프라이즈처럼 지유 이모 앞에 나타나요. 그러면 정말 재밌을 것 같아요!”

“그래.”

“아빠 최고예요! 아빠 진짜 진짜 사랑해요!”

전화를 끊은 뒤에도 경다솜은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하고 침대 위에서 신나게 뛰어다니며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그러다 문득 연미혜의 얼굴이 떠올랐다.

며칠 동안, 연미혜가 전화를 하지 않자 경다솜은 오히려 기분이 좋았다.

그동안 경다솜은 연미혜와의 통화를 피하려고 며칠 전부터 일부러 일찍 집을 나서거나, 휴대폰을 멀리 두기도 하며 심지어 일부러 꺼두기도 했다. 그렇게 이틀 동안 휴대폰을 꺼두다가 혹시라도 연미혜한테 들키면 혼날까 싶어 다시 휴대폰을 켰지만 놀랍게도 연미혜는 그 후로도 단 한 번도 전화를 걸어오지 않았다.

처음엔 혹시 연미혜가 자기 행동을 눈치챘을까 싶었지만 곧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엄마가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은 나야... 내가 아무리 잘못했다 하더라도...’

어린 경다솜은 엄마가 아무리 화가 났다고 해도 연락을 끊을 리 없다고 생각했다.

‘아무리 그래도 엄마가 나한테 전화도 안 할 리가 없지. 엄마는 날 제일 사랑하는데...’

그렇게 생각하니 이상하게도 엄마가 조금 보고 싶어졌다. 이건 며칠 만에 처음으로 엄마를 떠올린 순간이었다.

경다솜은 곧바로 휴대폰을 집어 들고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신호가 가는 순간, 문득 또 다른 생각이 떠올랐다.

‘엄마 성격에 내가 귀국하는 걸 알게 되면 틀림없이 지유 이모를 못 만나게 할 거야.

여기에서는 내가 원할 때마다 지유 이모를 볼 수 있었는데... 이제 그게 안 된다고?’

갑자기 기분이 확 가라앉았다. 잠시 망설이던 그녀는 결국 전화를 끊어버렸다.

그 시각, 연미혜는 깊은 잠에 빠져 있다가 벨소리에 눈을 떴다.

휴대폰을 들고 발신자는 경다솜인 것을 확인한 그녀는 거의 반사적으로 전화를 받으려 했다.

그러나 그 순간 전화가 뚝 하고 끊겼다.

연미혜는 순간 휴대폰 화면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혹시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걸까 걱정이 되어 곧장 다시 전화를 걸었다.

이번에는 경다솜이 받지 않았다.

불안해진 그녀는 망설임 없이 아이리스 저택으로 전화를 돌렸다.

그러자 유순자가 바로 받았다.

“사모님, 이 시간에 무슨 일이세요?”

“다솜이한테 전화가 왔었는데 갑자기 끊기더니 다시 안 받네요. 무슨 일 있나요?”

유순자는 다솜의 방을 떠올리며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다솜 아가씨요? 어젯밤 늦게까지 안 자더니 오늘은 늦잠을 잤어요. 방금 제가 올라갔을 땐 아직 자고 있었는데... 혹시 모르니 제가 확인해 보고 다시 연락드릴게요.”

그 말을 듣자, 연미혜는 비로소 안도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수고스럽지만 부탁드릴게요.”

아이리스 저택.

유순자가 2층으로 올라갔을 때 경다솜은 이미 욕실에서 이를 닦고 있었다.

거울을 보며 양치질하던 경다솜은 유순자의 말을 듣고 태연하게 말했다.

“그건 그냥 실수로 눌렀어요.”

입안에 치약 거품이 가득 물었지만 말투는 너무나 태연하고 자연스러웠다.

유순자는 별 의심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알겠어요.”

그리고 곧장 아래층으로 내려가 연미혜에게 다시 전화를 걸었다.

“사모님, 다솜 아가씨는 아무 문제 없어요. 그냥 잘못 눌렀다고 하네요.”

“다행이네요. 감사합니다.”

연미혜는 안심하며 전화를 끊었다.

하지만 한밤중에 한참을 깨어 있었던 탓인지, 다시 잠을 이루지 못했다.

다음 날 아침, 출근길에 나선 그녀의 얼굴에는 전날의 피로가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그 시각, 미혜가 두고 온 이혼 서류가 담긴 봉투는 여전히 서랍 속에 묻혀 있었다.

그날 임지유의 전화를 받고 나간 후로 경민준은 단 한 번도 그것을 떠올리지 않았다.

그리고 귀국하던 날, 그는 마지막 서류 한 장을 가방에 넣고 모든 준비가 끝났음을 확인한 뒤 천천히 몸을 돌려 계단을 내려섰다.

“이제 됐다. 출발하자.”

길게 뻗은 리무진이 조용히 저택을 빠져나갔고 차는 곧 공항으로 향했다.

...

경민준과 경다솜이 한국으로 돌아온다는 사실을 연미혜는 전혀 알지 못했다. 그 누구도 그녀에게 이 사실을 알리지 않았다.

어느덧 그녀가 저택을 떠나 홀로 생활한 지도 벌써 반달이 지났다.

처음엔 익숙하지 않았지만, 점점 조용하고 여유로운 이 생활에 적응해 갔고 이제는 혼자 사는 것이 오히려 편하고 좋다고 느끼게 되었다.

오늘은 주말이었다. 평소보다 조금 늦잠을 자고 느긋하게 일어나 씻고 나서 창가의 커튼을 젖히자 따뜻한 햇살이 방 안으로 스며들었다.

기지개를 켜고 집 안의 화분에 물을 주며 가벼운 일상을 보내던 중, ‘띵동’하고 벨이 울렸다.

문을 열자, 맞은편에 사는 이웃 김민지가 서 있었다.

“미혜 씨, 혹시 방해한 건 아니죠?”

연미혜는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아니에요. 이미 일어나 있었어요.”

“그럼 다행이네요!”

김민지는 환하게 웃으며 손에 들고 있던 것을 내밀었다.

“우리 집에서 아침에 갓 만든 만두랑 찐빵이에요. 한번 맛보세요.”

연미혜는 깜짝 놀라며 두 손을 내저었다.

“어머, 감사합니다. 너무 신경 써주시는 거 아니에요?”

“아니에요, 당연한 거죠! 며칠 전 미혜 씨가 우리 아연이를 구해주지 않았다면, 그 미친개한테 어떻게 물렸을지 모를 일이잖아요. 사실 그때부터 감사 인사 제대로 드리고 싶었는데... 우리 부부가 워낙 바빠서 기회를 못 잡았어요. 너무 늦게 인사드리는 것 같아 오히려 죄송하네요.”

“별일도 아닌데, 이렇게까지 신경 써주시다니... 정말 감사해요.”

짧은 대화를 나눈 뒤, 김민지는 인사를 건네고 돌아갔다.

연미혜는 집으로 들어와 따뜻한 아침 식사를 하며, 최근 연구 중인 AI 알고리즘 코드를 확인했다.

그날 오후, 휴대폰이 알림에 태안대학교 100주년 기념식 관련 뉴스가 떠 있었다. 순간 흠칫하고 날짜를 확인해 보니 오늘이 정확히 태안대학교 개교 100주년 기념일이었다.

인터넷에서 ‘#태안대학교100주년기념’이라는 해시태그를 검색하자, 여러 개의 관련 기사와 실시간 인기 게시물이 쏟아졌다.

이번 행사가 이렇게 큰 주목을 받는 이유는 단순히 국내 최고 명문대인 태안대이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첫 번째 100주년 기념행사는 태안대학교 역사상 가장 큰 축제였다. 그 덕에 이번 행사에는 국내외 각계각층의 저명한 동문들이 초청되었다. 그들은 과거 태안대를 빛낸 동문들이었고 각 산업을 대표하는 인물들이었다.

연미혜는 천천히 그 명단을 훑었다.

익숙한 얼굴들이 하나둘씩 보였다. 이젠 뉴스 화면에서나 볼 법한 사람들이었다. 그녀와 함께 대학 시절 연구하며 꿈을 키웠던 이들의 모습이 보였다.

그 순간, 손에 들고 있던 휴대폰이 살짝 흔들렸다.

‘만약 내가 결혼을 선택하지 않았다면, 오늘 저 명단 속에 내 이름도 있었을까?’

짙은 감정이 가슴 깊은 곳에서 밀려왔다.

잠시 망설이던 그녀는 곧 컴퓨터를 덮고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차 키를 들고 태안대학교로 향했다.

그녀가 태안대학교에 도착했을 땐 이미 오후가 다된 시간이었다.

초청받은 주요 인사들은 대부분 떠난 상태였지만, 캠퍼스에는 여전히 많은 인파가 남아 있었다.

그녀는 아무 목적 없이 천천히 걸었다.

‘오랜만에 밟는 익숙한 길...’

그렇게 발길이 멈춘 곳은 옛 연구실이 있던 실험동 건물 앞이었다.

그때, 등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미혜야?”

20분 후, 태안대학교 근처의 한 찻집에서 김태훈이 연미혜 앞에 차 한 잔을 내려놓으며 물었다.

“요즘 어떻게 지내?”

연미혜는 잔을 두 손에 감싸 쥐고, 잔잔한 미소를 지었다.

“잘 지냅니다. 다만... 곧 이혼할 거예요.”

예상치 못한 말에 김태훈은 순간 말을 잇지 못했다.

“미안하다. 내가 괜한 얘기를 꺼냈구나...”

“괜찮습니다.”

“그럼 앞으로는 어떻게 할 생각이야? 회사로 돌아올 생각 없어?”

“돌아갈 생각은 있습니다만...”

연미혜가 잠시 머뭇거리자, 김태훈은 정확히 무슨 고민인지 알 수 없었으나 진지한 눈빛으로 말했다.

“미혜야, 회사는 네가 필요해. 이곳은 너도 함께 만들어 온 곳이잖아. 이제 다시 돌아와서 중심을 잡아 줬으면 해.”

“저는... 그러니까...”

김태훈의 진지한 표정을 마주하니, 연미혜는 더욱 말문이 막혔다. 그녀가 망설이는 이유는 단순히 돌아가기 싫어서가 아니었다.

AI 산업은 지난 6년 동안 너무 빠르게 변화했다. 그녀는 업계를 떠난 지 오래됐고, 이제 돌아간다 해도 시대의 흐름을 따라갈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하물며, 예전처럼 업계를 선도하며 모두를 이끌어가는 것은 더더욱 자신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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