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겠어요. 앞으로 신경 쓸게요.”그녀는 허미숙 옆에 앉아 자연스럽게 어깨에 기대었다. 오랜만에 느껴지는 익숙한 온기에 조금이나마 위로를 얻었다.허미숙은 부드러운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보다가, 주방에 있는 사람들에게 말했다.“고깃국이 다 익었으니, 미혜 먼저 한 그릇 떠다 주거라. 몸 좀 녹이게.”따뜻한 국을 받아 들고 연미혜는 허미숙의 다정한 말들을 들으며 자연스레 지난 일들을 떠올렸다.순간 마음이 흔들렸지만 괜한 걱정을 끼칠까 봐 얼른 감정을 다잡고 화제를 돌렸다.“이모부랑 이모는 아직 여행에서 안 돌아오셨어요?”“여
경민준은 깊이 생각하지 않았고 연미혜가 연씨 가문으로 돌아갔을 가능성이 높다고 여겼다.욕실로 들어서려던 순간, 과거 연씨 가문에 갈 때면 항상 경다솜을 데리고 갔던 기억이 떠올랐지만, 오늘은 예외인가 싶었다.‘혹시 연씨 가문에 가지 않은 건가? 아니면 연씨 가문에 무슨 일이 생긴 걸지도 모르겠군.’머릿속에 오후에 회사에서 나설 때 정시원이 했던 말이 스치자, 그제야 확신이 들었다. 하지만 딱히 신경 쓰고 싶지는 않았다.다음 날 아침, 경민준은 아침 식사를 하며 경다솜에게 말했다.“입학 절차는 다 됐으니까 내일부터는 학교에
“알겠어.”그는 짧게 대답하고 전화를 끊었다.이번엔 경다솜도 전화 상대가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엄마였어요?”“응.”“설마 엄마도 증조할머니 댁에 가는 거예요?”“그래.”경다솜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반사적으로 눈썹을 찌푸렸다.엄마를 보고 싶지 않은 것도 그리워하지 않은 것도 아니었다.사실 따지고 보면, 엄마를 못 본 지도 꽤 오래되었고, 엄마가 이렇게 오랫동안, 무려 반달 넘게 연락을 하지 않은 적도 없었다.엄마를 언급하자 마음속 깊은 곳에서 엄마를 향한 그리움이 스멀스멀 올라왔다.하지만 그보다 먼저 떠
연미혜는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임지유와 경민준은 그녀와 경민준이 결혼한 이후에야 알게 된 사이였다.임지유는 그녀와 경민준의 관계를 분명히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임해철이 모를 리가 없었다.‘분명 알고 있을 거야.’그런데도 태연하게 임지유와 경민준을 엮으려 하고 있다면, 그 사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너무도 명확했다. 그에게 있어 연미혜는 아예 없는 존재나 마찬가지였다.경민준은 별다른 반응 없이 걱정하지 말라고 대답했다.그 후에도 몇 마디를 더 주고받은 뒤, 그는 임해철이 차에 타고 떠나는 것을 끝까지 지켜본
“이미 사직서 냈어요.”그 말에 심여정과 경민아는 동시에 멈칫했다.“곧 인수인계를 마치는 대로 퇴사할 겁니다.”순간, 노현숙의 얼굴에도 걱정이 스쳤다.“미혜야...”그때 엘리베이터에서 내려온 경다솜이 노현숙의 말을 끊었다.“엄마!”녀석은 활짝 웃으며 뛰어와 그녀의 품에 안겼다.연미혜는 순간적으로 표정이 굳었지만, 이내 조심스럽게 아이를 안아주었다.“다솜아... 먼저 와있었어?”특별한 말이 아니었지만 경다솜은 엄마가 자신을 받아준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은 듯했다.그 모습을 본 노현숙은 굳이 더 이야기를 이어가지 않고
노현숙은 답답한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그녀는 연미혜가 너무 강단이 부족하다고 생각했다. 경민준에게 지나치게 순응한 탓에 수많은 기회를 놓쳤고, 그 결과로 이렇게 오랜 시간이 흘렀어도 별다른 성과를 내지 못했다고 안타까워했다.하지만 연미혜가 자리를 옮길 필요 없다고 말한 이상, 더는 강요할 수도 없었다.식사가 시작되자 다들 담소를 나누며 식사를 즐겼다. 분위기는 제법 화기애애했지만, 연미혜는 조용히 고개를 숙이고 밥을 먹을 뿐이었다.경민준이 집에 들어온 순간부터 지금까지 벌써 십여 분이 흘렀지만 이들 부부는 서로 한마디도 나누
그렇게 나란히 앉아 있는 두 사람을 바라보며 노현숙이 흐뭇한 듯 미소를 지었다.“정말 잘 어울리는구나.”한 사람은 수려한 외모에 도도한 분위기를 풍겼고, 다른 한 사람은 차분하고도 단아한 미모를 지니고 있었다. 겉모습만 놓고 보면 그야말로 천생연분이었다.‘겉으로만 보면 그럴싸할 수도 있겠지만 그뿐이잖아.’경민아와 심여정 역시 이 광경을 못마땅해했지만, 굳이 노현숙의 기분을 망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 가만히 있었다.그날 밤, 그들은 노현숙의 뜻에 따라 본가에 머물렀다.밤 여덟 시쯤, 경민준과 노현숙이 서재에서 사업 이야기를
경민아의 목소리였다.연미혜는 소리가 난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멀찍이 서 있는 두 사람은 경민아와 경민준이었다.순간 연미혜는 발걸음을 멈췄다.경민준은 말없이 담배를 피우고 있었지만 떨어진 거리가 멀었던 데다가, 그가 등을 돌린 채 서 있었던 탓에 표정이 보이지 않았다.“사실 나도 이해는 해.”경민아가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임지유를 몇 번 본 적 있어. 들어보니 스물다섯 살에 세계 최상급 대학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고 하더라. 가문의 사업도 능숙하게 처리하는 것 같고, 예쁘고... 게다가 성격도 시원시원하고 자유분방하
연미혜도 처음에는 많이 놀랐지만 더 이상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많은 사람들이 경민준 일행 쪽으로 몰려들었다. 주위에 사람들이 너무 많았기에 경민준은 연미혜의 존재를 알아채지 못했다.연미혜가 겉으로 보기에 온화하고 얌전해 보이지만 속은 얼마나 강인하고 결단력이 있는 사람인지 김태훈은 잘 알고 있었다.전문 분야에서 그녀는 관심만 생기면 일심전력으로 몰두했고 연구 결과가 시장에서 효용성이 없더라도 결과를 기꺼이 받아들였다.시도해보기 전에는 쓸모 있는지 없는지 알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감정적인 부분에서도 연미혜는 같은 생
그들이 도착했을 때 연회장에는 이미 손님들이 많이 모여 있었다.외모가 뛰어나고 기품이 있는 연미혜가 연회장에 모습을 드러내자마자 많은 손님들의 시선을 끌었다.연회 주최자는 김태훈과 아는 사이였기에 두 사람이 들어오는 것을 보자 웃으며 맞이했다.주최자가 김태훈과 연미혜에게 인사를 하려 할 때 연회장 입구에 또 다른 손님이 도착했다.그 손님을 본 주최자는 자신의 눈을 의심하는 듯 멈칫했다.연회장에 있던 다른 손님들도 도착한 사람들을 보며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연회장 입구를 등지고 있는 연미혜와 김태훈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연미혜의 얼굴이 살짝 굳었다.“임지유? 오빠가 말한 사람이 임지유였어요? 혹시 얼마 전에 아이리스에서 돌아왔나요?”김태훈은 고개를 끄덕이며 의아한 목소리로 물었다.“맞아. 알아?”“제 이복동생이에요.”김태훈은 깜짝 놀랐다.그녀의 가정사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공교로운 줄은 몰랐다.연미혜는 눈빛이 싸늘해지더니 한마디 보탰다.“또한 경민준의 외도 상대이기도 하죠.”차가 급정거했다.김태훈이 휘둥그레진 눈으로 물었다.“뭐?”연미혜가 대답했다.“괜찮아요.”이내 무덤덤한 표정으로 말을 이어갔다.“권력
다음 날.차예련이 열이 내리고 나서야 연미혜는 집으로 돌아갔다.내일 저녁 모임에 입고 갈 드레스도 얼른 준비해야 했다.오후가 되자 그녀는 집을 나섰다.고급 드레스 숍에 도착하니 점장과 점원 몇 명이 한 드레스를 둘러싸고 분주하게 움직였다.연미혜가 가까이 다가올 때까지 그녀의 존재를 알아채지 못했다.“죄송합니다, 손님. 무엇을 도와드릴까요?”“좀 둘러볼게요.”“네.”경씨 가문에 시집와서 여태껏 모임에 참가한 적이 거의 없었다.설령 공식 석상에 얼굴을 비칠 일이 있다고 해도 경민준과 심여정은 그녀를 데려가지 않았다.
“팀장님...”연미혜가 손을 내밀었다.“그동안 감사했어요.”비록 어안이 벙벙했지만 손을 뻗어 악수했다.“별말씀을요.”잠시 후, 연미혜는 짐을 싸서 회사를 나섰다.강철우는 그녀가 떠났다는 게 아직도 믿기지 않았다.“뭐해?”정시원이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연미혜가 퇴사했어.”정시원은 흠칫 놀랐다.“진짜?”정말 회사를 떠났다고? 그게 말이 되나?이내 코웃음을 쳤다.“지금 떠났다고 해서 나중에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는 법은 없잖아. 두고 봐, 며칠 뒤에 어르신의 도움으로 복귀할 테니까.”강철우는 묵묵부답했다.이유
이때, 벨 소리가 갑자기 울렸다.우연히 고개를 돌린 연미혜는 식탁 위에 놓인 경민준의 휴대폰 화면에 뜬 ‘자기’라는 두 글자를 발견했다.사실 딱히 신경 쓰이지 않을 줄 알았다.오랫동안 사랑해온 만큼 쉽게 단념할 수 있는 건 아닌 듯싶었다.유난히 눈에 거슬리는 단어 때문에 황급히 시선을 피했다.경민준은 고개를 드는 순간 상처받은 그녀의 표정을 눈치챘지만 아무렇지 않게 전화를 받고 부드러운 말투로 입을 열었다.“왜?”경다솜도 경민준에게 주의를 빼앗겼다.아빠는 항상 지유 이모를 대할 때마다 다정한 모습을 보여주는 거로 기억
말이 끝나기 무섭게 사람들은 각기 다른 표정을 지었다.경민준이 몇 년 전에 결혼했다는 소문이 무성했지만 아내의 정체에 대해서는 아무도 몰랐다.심지어 결혼 자체를 하지 않았다는 사람도 있었다.뭐가 사실인지 알 수 없지만 감히 물어볼 엄두는 내지 못했다.그런데 경민준이 먼저 딸을 언급하자 다들 깜짝 놀랐다.물론 더 자세하게 알고 싶어도 하나같이 말을 아꼈다....저녁을 먹고 나서 경다솜은 연미혜가 집에 오기만을 오매불망 기다렸다.하지만 9시가 넘어 샤워까지 마쳤는데도 감감무소식이었다.그녀는 밖에서 나는 인기척에 모든 주
탕비실에 도착한 강철우가 이 말을 듣고 흠칫 놀랐다.사실 그는 물론 정시원도 연미혜가 진짜 회사를 떠날 리 없으며 어떻게든 남을 기회를 찾으려고 호시탐탐 노린다고 생각했다.어제 업무를 인수받을 서안나가 회사에 출근했을 때 바로 행동을 개시할 줄 알았다.그 정도 미모라면 어디 가서 뒤처질 정도는 아니었으니까.묘령의 여자가 경민준의 곁을 얼쩡거리는데 어찌 걱정하지 않겠는가?하지만 연미혜는 서안나를 인정했을뿐더러 사이좋게 지냈고, 이제 커피 만드는 방법까지 가르쳐주겠다고 했다.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연미혜는 강철우의 생각 따
오전에 전 직원 미팅이 있기에 경민준도 참석할 예정이다.회의실에 도착해서 임직원이 10분 넘게 기다리고 나서야 그는 뒤늦게 나타났다.경민준을 보자마자 서안나는 감탄을 내뱉었고, 눈을 반짝이며 시선을 떼지 못했다.잠시 후 미팅이 시작되고 비로소 정신을 차린 다음 연미혜의 소매를 잡아당겼다.“대표님 너무 잘생겼잖아요.”연미혜는 경민준이 들어올 때만 고개를 들어 힐긋 쳐다보았다.그리고 서안나의 호들갑에 눈길조차 주지 않고 대충 맞장구를 쳐주었다.경민준에게 관심이 없는 연미혜를 보고 서안나는 의아했지만 유부녀에 아이까지 있다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