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민아의 목소리였다.연미혜는 소리가 난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멀찍이 서 있는 두 사람은 경민아와 경민준이었다.순간 연미혜는 발걸음을 멈췄다.경민준은 말없이 담배를 피우고 있었지만 떨어진 거리가 멀었던 데다가, 그가 등을 돌린 채 서 있었던 탓에 표정이 보이지 않았다.“사실 나도 이해는 해.”경민아가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임지유를 몇 번 본 적 있어. 들어보니 스물다섯 살에 세계 최상급 대학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고 하더라. 가문의 사업도 능숙하게 처리하는 것 같고, 예쁘고... 게다가 성격도 시원시원하고 자유분방하
그러나 오늘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저 눈을 감아버렸다.경민준도 그녀의 변화를 느끼지 못할 리 없었다. 늘 자신을 살뜰히 챙기던 그녀가 이제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는 것을 느꼈다.하지만 그저 기분이 안 좋아서 잠깐 토라졌다고 여길 뿐이었고 그녀가 왜 그러는지조차 궁금해하지 않았다.경민준이 담담하게 말했다.“솜이 입학 절차 끝났어. 내일 아침 네가 학교까지 데려다줘.”“알겠어.”더 이상의 대화는 없었다.경민준은 무심히 옷장으로 가 옷을 꺼내고 씻으러 들어갔다.이게 바로 그가 그녀를 대하는 방식이었다.연미혜는 그의
오늘 밤 열리는 레이싱 경기를 생각하니, 멋지게 차려입은 지유 이모를 또 볼 수 있을 거란 생각에 금세 기분이 좋아졌다.옷을 갈아입은 경다솜은 휴대폰을 들어 시간을 확인하더니 이내 미간을 찌푸렸다.평소라면 메시지를 보내자마자 임지유가 곧바로 답장이 보냈을 텐데, 오늘은 씻고 준비까지 마쳤는데도 아무런 답이 없었다.‘지유 이모... 혹시 화난 거 아니야?’경다솜은 초조해진 얼굴로 다시 메시지를 보냈다.[지유 이모, 왜 그래요? 혹시 화난 거예요?][이모도 알잖아요. 나도 엄마랑 학교 가기 싫어요. 난 이모가 더 좋은데...
그녀는 무심코 메시지를 확인했고 아침부터 경다솜이 예민했던 이유를 바로 이해할 수 있었다.그녀는 천천히 대화 기록을 살펴보았다.경다솜은 매일 아침 임지유에게 먼저 메시지를 보내며 [좋은 아침]이라고 인사했다.그리고 두 사람은 꽤 오랜 시간 대화를 이어가곤 했다.그때, 엘리베이터 소리가 들려왔다.연미혜는 흠칫 놀라며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휴대폰을 원래 자리에 내려놓았다.잠시 후, 방에서 돌아온 경다솜은 휴대폰을 집어 들고 바로 화면을 확인했다.[이모가 어떻게 솜이한테 화낼 수가 있겠어. 그냥 늦잠 잤어. 답장이 늦어서
방아연은 나이에 걸맞게 사랑스럽고 귀여운 외모를 지닌 아이였다.한 번 보면 꼭 안아주고 싶고 뺨이라도 살짝 비비고 싶어질 만큼 사랑스러운 아이였다.‘못생겼다’는 말과는 거리가 먼 모습이었고, 경다솜과 마찬가지로 태어나면서부터 많은 사랑을 받으며 자라온 아이였다.태어나 처음으로 누군가에게 그런 말을 듣자, 충격에 눈물이 그렁그렁 차오르더니 결국 참지 못하고 울음을 터뜨렸다.그러고는 연미혜에게 달려가 그녀의 목을 꼭 끌어안으며 떨어질 줄 몰랐다.연미혜는 당황하며 서둘러 방아연을 감싸안고 다독였다.“아연아, 아니야. 못생기다니
그녀는 결코 소심하고 겁이 많은 아이가 아니었다.다른 친구들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도 관심이 없었다.그러다 문득 연미혜와 떨어지는 게 아쉬워서 꼭 붙잡고 놓지 않았다.“엄마.”“응?”연미혜는 그녀를 안아주었다.“왜?”“저...”엄마가 만들어준 요리를 먹어본 지 오래되어서 너무 그리웠다.하지만 저녁에 임지유의 경기를 보러 가야 한다는 생각이 떠올라 목구멍까지 차오른 말을 다시 삼켰다.이내 눈빛이 흔들리더니 연미혜를 놓아주었다.“아니에요.”집밥은 언제든지 먹을 수 있지만 지유 이모의 경기는 흔한 게 아니었다.
그제야 경다솜은 신이 나서 좋아하는 메뉴를 줄줄이 읊었다.경민준은 잠자코 듣기만 했다.경다솜이 말을 마치자 임지유는 의상에 대해 칭찬했다.“옷이 너무 예쁘네. 잘 어울려.”“정말요?”임지유가 활짝 웃었다.“당연하지.”그리고 다시 물었다.“오늘 유치원에서 어땠어? 친구들이랑 재미있게 놀았어?”두 사람이 즐겁게 수다를 떠는 동안 경민준은 묵묵히 포크와 나이프를 들고 밥을 먹는데 집중했다.영문을 모르는 종업원은 셋이 가족인 줄 알고 부러운 눈빛으로 임지유를 바라보았다.이때, 연미혜의 영상 통화가 걸려 왔다.비록 오늘
경준혁은 손을 번쩍 들고 맹세했다.“오늘 제 여신이자 아시아 최고의 여성 레이서인 CC가 귀국하고 나서 처음으로 출전하는데 절대 놓치고 싶지 않았어요. 딴짓 안 하고 경기만 보고 집에 갈게요. 약속! 그러니까 난 신경 쓰지 말고 가보셔도 돼요.”“하지만...”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앞줄에 앉은 사람들이 한껏 격앙된 모습으로 ‘CC’라고 외쳤다.“드디어 등장하나?”장내가 술렁이자 경준혁은 연미혜가 뒷전이었다. 이내 신이 나서 관중들을 따라 목놓아 소리 지르며 망원경까지 들고 출발 지점을 바라보았다.설렘과 흥분으로 물든 얼굴
경민준은 손에 들고 있던 찻잔을 내려놓으며 공손하게 말했다.“어르신과 바둑을 둘 수 있다니, 오히려 제가 영광입니다.”그는 차분한 걸음으로 다가와 이병철 맞은편에 앉으며 말했다.“한 수 가르쳐 주십시오.”이 모습을 보고 임지유와 하승태를 비롯한 몇몇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둘러앉아 바둑을 구경하기 시작했다.연미혜와 김태훈도 뒤따라왔지만, 그들은 이병철의 뒤쪽에 서서 조용히 지켜보았다.임지유와 하승태는 바둑을 둘 줄 아는 편이었다. 그런데 연미혜가 예상보다 진지한 눈빛으로 바둑판을 바라보는 것을 본 하승태가 슬쩍 다가가 물었다
잠시 후, 지관식은 다시 한번 모두에게 인사를 건넨 뒤, 복도를 따라 자신의 사적인 공간으로 들어갔다.연미혜, 김태훈, 경민준, 하승태, 그리고 임씨 가문과 손씨 가문의 사람들도 함께 그 안으로 들어섰다. 내부에 들어간 사람이 많았지만, 임씨 가문과 손씨 가문의 사람들도 함께 있었기에 전혀 어색해 보이지 않았다.정원과 긴 정자에는 손님들이 자리를 잡았고 도우미들이 다과와 차를 내왔다.지관식은 허미숙과 즐겁게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허미숙뿐만 아니라, 지관식에게는 동양화에 조예가 깊은 두 명의 친구가 더 있었다. 대화가 무르익자
임지유는 공손하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과찬입니다.”지관식은 하승태, 염성민, 그리고 지현승을 번갈아 보며 웃었다.“너희도 얼른 좋은 사람 만나야지.”그때 마침, 지철호가 연미혜와 김태훈을 데리고 이쪽으로 왔다. 그는 지관식을 향해 말했다.“아버지, 여기는 김씨 가문 어르신의 손자입니다. 현재 운영 중인 넥스 그룹이 최근 크게 성장했고 앞으로 국가 차원에서 집중적으로 지원할 핵심 기업 중 하나로 선정되었다네요.”그러고는 연미혜를 소개했다.“이쪽은 넥스 그룹의 핵심 기술 개발자 연미혜 씨입니다. 과학 기술 분야에서 귀한
“승태 오빠!”하승태가 돌아오자, 손아림이 다소 애교 섞인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하지만 하승태는 무덤덤하게 가볍게 고개만 끄덕였다.한편, 경민준이 주위를 둘러보며 누군가를 찾는 듯해지자, 손수희가 말했다.“지유는 잠깐 전화 받으러 밖에 다녀온다고...”“알겠습니다.”경민준이 대답하자마자, 전시장 안쪽에서 작은 소란이 일었다. 바로 지관식이 모습을 드러낸 것이었다. 그와 함께 지철호, 지현승 등 지씨 가문 사람들도 동행하고 있었다.많은 이들이 그의 등장을 주목했다.지관식이 앞으로 나서자, 주변이 조용해졌고, 이윽고 인사
하승태가 연미혜와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본 손아림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그녀는 놀란 기색을 감추지 못한 채, 그녀는 정범규에게 물었다.“승태 오빠가 왜 저 여자랑 얘기하고 있는 거예요?”정범규가 답하기도 전에, 손아림은 이미 발걸음을 옮기려 했다.그러나 손수희가 팔을 가볍게 붙잡으며 나직이 말했다.“그냥 사업에 관한 이야기 중일 거야.”“사업에 관한 이야기요?”손아림은 입술을 살짝 깨물더니, 콧방귀를 뀌며 한껏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었다.그래도 억지로 감정을 눌렀지만, 시선만은 계속 연미혜와 하승태 쪽을 향해 있었다.
염성민은 아까 임해철이 말한 대로, 오늘 임지유와 경민준도 올 거라는 사실을 떠올렸다.그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그래. 할아버님 이야기 끝나시면 문자 하나 남겨줘.”“알겠어.”염성민과 윤신재는 먼저 전시장 밖으로 나왔다.마침 그들이 나오는 순간, 하승태와 정범규도 도착했고, 임씨 가문과 손씨 가문 사람들이 앞다투어 다가가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하승태는 임해철과 악수를 나누었다.정범규는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민준이랑 지유는? 아직 도착 안...”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의 시선이 한곳에 고정되었다.눈앞에
연미혜는 허미숙의 팔을 꼭 붙잡았고, 허미숙은 담담하게 그녀의 손등을 토닥이며 말했다.“괜찮아.”그들이 허미숙이 올 걸 알고 있었다면 허미숙도 그들을 예상하지 못했을 리 없었다.김태훈이 말했다.“할머니, 제가 먼저 들어가서 화백님을 찾아뵙겠습니다. 미혜야, 할머니를 모시고 같이 가자.”그의 의도는 분명했다. 허미숙을 지관식에게 소개해, 그녀가 우상과 직접 이야기를 나눌 기회를 만들려는 것이었다.하지만 허미숙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이렇게 많은 작품을 한 자리에서 볼 수 있는 것만으로도 영광이야. 괜히 폐를 끼치고 싶진
‘경민준이 지유 씨를 향한 마음은 의심할 필요도 없어. 그러니 그 장면은 단순한 오해였을 가능성이 커!’...금요일 아침, 연미혜가 막 일어나자마자 허미숙의 전화가 걸려 왔고, 일요일 아침에 함께 지관식의 그림 전시회를 보러 가자고 했다.허미숙은 동양화의 거장인 지 화백, 지관식의 열렬한 팬이었다.지관식이 마지막으로 개인 전시회를 연 건 십여 년 전이었기에, 좀처럼 보기 힘든 기회였다.연미혜는 망설임 없이 답했다.“네. 일요일에 같이 가요.”전화를 막 끊자마자, 이번엔 경다솜에게서 전화가 왔다.월요일, 학교에서 열린
얼마 지나지 않아 경민준에게 한 통의 전화가 걸려 왔고, 그는 휴대폰을 확인한 뒤, 아무런 표정 변화 없이 받았다.“그래. 알겠어.”“저희가 계속 보관해 둘까요?”“아니야. 그럴 필요 없어.”상대방은 더 이상 묻지 않고 곧바로 전화를 끊었다.그와 함께 식사하던 임지유가 물었다.“민준 씨, 회사에 볼일 있어?”경민준은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으며 답했다.“아니야. 경매장에서 온 전화야.”임지유가 웃으며 무언가 말하려던 찰나, 경다솜이 끼어들었다.“경매장이 뭔데요?”경민준은 식기를 들고 고기를 잘라 한 조각 먹으며 대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