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민준은 깊이 생각하지 않았고 연미혜가 연씨 가문으로 돌아갔을 가능성이 높다고 여겼다.욕실로 들어서려던 순간, 과거 연씨 가문에 갈 때면 항상 경다솜을 데리고 갔던 기억이 떠올랐지만, 오늘은 예외인가 싶었다.‘혹시 연씨 가문에 가지 않은 건가? 아니면 연씨 가문에 무슨 일이 생긴 걸지도 모르겠군.’머릿속에 오후에 회사에서 나설 때 정시원이 했던 말이 스치자, 그제야 확신이 들었다. 하지만 딱히 신경 쓰고 싶지는 않았다.다음 날 아침, 경민준은 아침 식사를 하며 경다솜에게 말했다.“입학 절차는 다 됐으니까 내일부터는 학교에
“알겠어.”그는 짧게 대답하고 전화를 끊었다.이번엔 경다솜도 전화 상대가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엄마였어요?”“응.”“설마 엄마도 증조할머니 댁에 가는 거예요?”“그래.”경다솜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반사적으로 눈썹을 찌푸렸다.엄마를 보고 싶지 않은 것도 그리워하지 않은 것도 아니었다.사실 따지고 보면, 엄마를 못 본 지도 꽤 오래되었고, 엄마가 이렇게 오랫동안, 무려 반달 넘게 연락을 하지 않은 적도 없었다.엄마를 언급하자 마음속 깊은 곳에서 엄마를 향한 그리움이 스멀스멀 올라왔다.하지만 그보다 먼저 떠
연미혜는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임지유와 경민준은 그녀와 경민준이 결혼한 이후에야 알게 된 사이였다.임지유는 그녀와 경민준의 관계를 분명히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임해철이 모를 리가 없었다.‘분명 알고 있을 거야.’그런데도 태연하게 임지유와 경민준을 엮으려 하고 있다면, 그 사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너무도 명확했다. 그에게 있어 연미혜는 아예 없는 존재나 마찬가지였다.경민준은 별다른 반응 없이 걱정하지 말라고 대답했다.그 후에도 몇 마디를 더 주고받은 뒤, 그는 임해철이 차에 타고 떠나는 것을 끝까지 지켜본
“이미 사직서 냈어요.”그 말에 심여정과 경민아는 동시에 멈칫했다.“곧 인수인계를 마치는 대로 퇴사할 겁니다.”순간, 노현숙의 얼굴에도 걱정이 스쳤다.“미혜야...”그때 엘리베이터에서 내려온 경다솜이 노현숙의 말을 끊었다.“엄마!”녀석은 활짝 웃으며 뛰어와 그녀의 품에 안겼다.연미혜는 순간적으로 표정이 굳었지만, 이내 조심스럽게 아이를 안아주었다.“다솜아... 먼저 와있었어?”특별한 말이 아니었지만 경다솜은 엄마가 자신을 받아준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은 듯했다.그 모습을 본 노현숙은 굳이 더 이야기를 이어가지 않고
노현숙은 답답한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그녀는 연미혜가 너무 강단이 부족하다고 생각했다. 경민준에게 지나치게 순응한 탓에 수많은 기회를 놓쳤고, 그 결과로 이렇게 오랜 시간이 흘렀어도 별다른 성과를 내지 못했다고 안타까워했다.하지만 연미혜가 자리를 옮길 필요 없다고 말한 이상, 더는 강요할 수도 없었다.식사가 시작되자 다들 담소를 나누며 식사를 즐겼다. 분위기는 제법 화기애애했지만, 연미혜는 조용히 고개를 숙이고 밥을 먹을 뿐이었다.경민준이 집에 들어온 순간부터 지금까지 벌써 십여 분이 흘렀지만 이들 부부는 서로 한마디도 나누
그렇게 나란히 앉아 있는 두 사람을 바라보며 노현숙이 흐뭇한 듯 미소를 지었다.“정말 잘 어울리는구나.”한 사람은 수려한 외모에 도도한 분위기를 풍겼고, 다른 한 사람은 차분하고도 단아한 미모를 지니고 있었다. 겉모습만 놓고 보면 그야말로 천생연분이었다.‘겉으로만 보면 그럴싸할 수도 있겠지만 그뿐이잖아.’경민아와 심여정 역시 이 광경을 못마땅해했지만, 굳이 노현숙의 기분을 망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 가만히 있었다.그날 밤, 그들은 노현숙의 뜻에 따라 본가에 머물렀다.밤 여덟 시쯤, 경민준과 노현숙이 서재에서 사업 이야기를
경민아의 목소리였다.연미혜는 소리가 난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멀찍이 서 있는 두 사람은 경민아와 경민준이었다.순간 연미혜는 발걸음을 멈췄다.경민준은 말없이 담배를 피우고 있었지만 떨어진 거리가 멀었던 데다가, 그가 등을 돌린 채 서 있었던 탓에 표정이 보이지 않았다.“사실 나도 이해는 해.”경민아가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임지유를 몇 번 본 적 있어. 들어보니 스물다섯 살에 세계 최상급 대학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고 하더라. 가문의 사업도 능숙하게 처리하는 것 같고, 예쁘고... 게다가 성격도 시원시원하고 자유분방하
그러나 오늘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저 눈을 감아버렸다.경민준도 그녀의 변화를 느끼지 못할 리 없었다. 늘 자신을 살뜰히 챙기던 그녀가 이제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는 것을 느꼈다.하지만 그저 기분이 안 좋아서 잠깐 토라졌다고 여길 뿐이었고 그녀가 왜 그러는지조차 궁금해하지 않았다.경민준이 담담하게 말했다.“솜이 입학 절차 끝났어. 내일 아침 네가 학교까지 데려다줘.”“알겠어.”더 이상의 대화는 없었다.경민준은 무심히 옷장으로 가 옷을 꺼내고 씻으러 들어갔다.이게 바로 그가 그녀를 대하는 방식이었다.연미혜는 그의
서로를 바라보는 시선이 분명히 있었지만, 그 누구도 그 의미를 입 밖으로 꺼내진 않았다.연미혜는 복잡하게 얽힌 두 사람의 눈빛을 눈치채지 못했다.지금 그녀는 김태훈과 함께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누는 중이었다.식사를 거른 터라 잠시 대화를 마무리한 뒤, 사람들 틈을 빠져나와 뷔페 테이블 쪽으로 향했다.그 모습을 눈여겨보고 있던 구진원이 곧 뒤따라갔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그녀 옆에 서서 말을 걸었다.바로 옆, 같은 구역에 있던 정범규는 그 장면을 보고는 잠시 멈칫했다.그가 본 것은 단순한 대화가 아니었다.‘...씨X.’작게
하승태는 여전히 무반응이었다.그때 마침 누군가가 다가와 인사를 건넸고 상대는 연미혜와 김태훈까지 아는 사람이었다.자연스레 넷이 함께 대화를 나누게 되었고 그들 사이엔 빠르게 편안한 분위기가 형성됐다.그 곁에 서 있던 손아림은 대화에 낄 틈도 없이 방치된 채 멍하니 서 있었다.한동안 말없이 서 있던 그녀는 아무도 자신에게 시선을 주지 않는 상황에 얼굴이 점점 굳어갔다. 결국 억지웃음을 지으며 어색하게 그 자리를 빠져나갔다.그 광경을 멀리서 지켜보던 정범규가 중얼거렸다.“승태는 요즘 따라 두 사람과 더 가까워지는 것 같네.”
그동안 임씨 가문 산하의 엘리스 그룹은 핵심 기술도, 고급 인력도 없어 적자를 겨우 메우며 유지되는 상태였다.이번 출장에서도 경민준은 시간을 쪼개 해외에서 인재들을 수소문했고, 엘리스 그룹에 맞는 기술자 몇 명을 데려오는 데 성공했다.그가 손을 뻗은 이상, 엘리스 그룹은 조만간 다시 숨통이 트일지도 몰랐지만 이 모든 일은 연미혜가 몰라도 무관한 일들이었다.만약 연미혜가 아직 경민준을 마음에 남겨두고 있다면 이런 이야기들은 오히려 상처가 될 뿐이라는 걸 하승태는 잘 알고 있었다.그래서 그는 굳이 그 얘기를 꺼내지 않았다.점심
식사를 마친 뒤, 경다솜이 무심코 말을 꺼냈다.“아... 엄마, 아빠는 출장 갔대요.”그제야 연미혜는 경민준이 출장을 떠났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는 별다른 반응 없이 고개를 끄덕였을 뿐이었다.밤 아홉 시가 넘은 시각.연미혜가 샤워 중인 사이, 침대 위에 두고 온 휴대폰이 울리기 시작했다.전화를 먼저 받은 건 경다솜이었다.화면에 하승태의 이름이 뜬 것을 본 경다솜이 반가운 목소리로 말했다.“승태 삼촌, 다솜이에요!”잠시 침묵이 흐른 뒤, 하승태의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이어졌다.“다솜아... 안녕.”그때, 연미
잠시 후, 경민준이 전화를 받았다.“하원했어?”경다솜은 대답했다.“네...”“엄마 보고 싶어?”“네.”“엄마한테 전화는 안 했어?”“네.”경민준은 웃으며 말했다.“전화해 봐. 오늘은 엄마가 받을 거야.”그 말에 경다솜의 눈이 반짝였다.“정말요?”“응. 전화해 봐.”“네!”전화를 끊자마자 경다솜은 연미혜의 번호를 눌렀다.연미혜는 휴대폰에 뜬 이름을 보고 잠시 멈칫했다.병원과 고씨 가문에서 한 번씩 마주친 걸 제외하면 딸과는 벌써 한 달 넘게 얼굴을 보지 못하고 있었다.그 사실이 마음을 건드렸다.그녀는
그 뒤로 경민준은 단체 대화방에 짧은 메시지를 하나 더 남겼다.[고객 접대 중. 너희끼리 얘기해.]그러고는 더는 대화에 참여하지 않았다.하승태도 차에 올라탄 후 단톡방을 확인했지만, 굳이 이 일에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곧바로 답장을 보냈다.[나도 좀 바빠... 너희들끼리 얘기 나눠.]그러고는 카톡 창을 닫아버렸다.정범규는 말없이 점 세 개만 남겼다.그렇게 되자 임지유도 발 빠르게 응수했다.[난 식사 약속이 있어서 이만... 다음에 얘기하자.][...]대화방엔 더 이상 아무 말도 올라오지 않았다. 다들 해
월요일 아침, 연미혜가 출근한 지 얼마 되지 않아 AI 학술지에서 그녀의 논문이 정식 게재 승인되었다는 메일이 도착했다.잠시 후, 김태훈이 업무 관련해서 찾아왔다가 그 소식을 들었다.“논문 게재 승인되었어요.”“난 예상했어.”그는 별로 놀라지도 않았다.유명욱 교수가 검토하고 좋다고 한 논문이라면 당연히 통과됐을 거라 믿고 있었다.업무 이야기를 마무리하던 연미혜가 시계를 흘끗 보며 물었다.“점심 같이 드실래요?”김태훈은 관자놀이를 문지르며 고개를 살짝 저었다.“오늘은 안돼. 약속 있어.”“무슨 약속이요?”“소개팅.
연미혜는 김태훈의 말을 듣고 순간 어안이 벙벙했다.김태훈은 이력서를 다시 한번 들여다보며 물었다.“이력서는 깔끔하게 잘 만들었네. 실력은 어때?”“수준급이었어요. 인공지능 쪽에 입문한 지는 2년도 안 됐는데, 이미 대부분 박사급 개발자보다 뛰어나요.”“오... 그 정도야?”김태훈은 놀랍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진짜 타고났네. 마음에 들어?”“후보로 생각하고 있어요. 다만...”“며칠 못 가고 훌쩍 떠날까 봐 걱정이지?”“맞아요...”물론 CUAP이든 Infinite-CM이든, 구진원은 정말 흥미를 느끼고 있는 게
“봐야죠. 면접 끝까지 봐야죠.”그는 능청스레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구진원입니다. 진실의 진, 원할 원입니다. 만나서 반가워요.”연미혜는 간단히 악수를 나누며 고개를 끄덕였다.“이력서 봤어요.”연미혜는 이력서에서 눈을 떼고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그럼 이제부터 제가 구진원 씨를 면접해 보는 건가요? 아니면 계속해서 저를 테스트하실 생각인가요?”그는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전 뭐, 둘 다 괜찮습니다.”이력서에 따르면, 그는 알고리즘에 강점을 둔다고 했다.연미혜는 그가 데이터 정제, 특성 엔지니어링, 하이퍼파라미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