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범규의 곁에 있던 사람이 물었다.“왜 그래?”“익숙한 사람을 본 것 같아서...”그들은 모두 어린 시절부터 경민준과 함께 자란 친구들이었기에 연미혜가 그를 좋아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솔직히 말해 연미혜는 예쁜 편이었다. 조용하고 단아한 분위기가 있었지만, 뚜렷한 개성이 없는 타입이었다. 하지만 그런 유형은 경민준의 취향이 아니었다.경민준이 친구들과도 일정한 거리를 두는 사람이었던 만큼, 친구들 또한 연미혜에게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녀를 본 적이 많지 않았지만, 우연히 마주친다고 해도 굳이 인사까지 건네지 않았다.
연미혜는 열여덟도 되기 전에 국내 최고 대학을 졸업하고 독자적으로 IT 회사를 창립해 몇 개의 특허를 획득했다. 그 정도만 해도 경이로울 지경이었지만 경민준은 더 대단한 사람이었다.경민준은 열세 살에 이미 대학을 졸업했고, 이후 곧바로 유학을 떠났다. 그리고 돌아왔을 때는 이미 여러 회사를 창립해 모두 상장까지 시켜 놓은 상태였다. 당시 그는 아직 스무 살도 되지 않은 나이였다.그가 손을 뻗은 사업 분야는 IT, 제약, 엔터테인먼트, 관광 등 다양했고, 이후 경문 그룹까지 접수하며 단숨에 그룹의 위상을 끌어올렸다.업계 사람들은
정시원의 표정이 굳어졌다.연미혜가 대표님의 아내라는 신분을 이용해 특혜를 받으려 한다고 생각한 그는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연 비서님, 업무 태도를 좀 바로잡으시죠. 여기가 연 비서님 집입니까?”하지만 연미혜는 흔들림 없는 태도로 가방을 챙기며 차분히 답했다.“불만이 있으시면 지금 당장 저를 해고하셔도 됩니다.”“연 비서님!”정시원은 이를 악물었지만,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그는 얼마 전 경민준을 따라 아이리스에 다녀온 후, 복귀하자마자 연미혜가 사직서를 제출했다는 사실을 전해 듣게 되었다.정시원은 경민준의 신뢰
“알겠어요. 앞으로 신경 쓸게요.”그녀는 허미숙 옆에 앉아 자연스럽게 어깨에 기대었다. 오랜만에 느껴지는 익숙한 온기에 조금이나마 위로를 얻었다.허미숙은 부드러운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보다가, 주방에 있는 사람들에게 말했다.“고깃국이 다 익었으니, 미혜 먼저 한 그릇 떠다 주거라. 몸 좀 녹이게.”따뜻한 국을 받아 들고 연미혜는 허미숙의 다정한 말들을 들으며 자연스레 지난 일들을 떠올렸다.순간 마음이 흔들렸지만 괜한 걱정을 끼칠까 봐 얼른 감정을 다잡고 화제를 돌렸다.“이모부랑 이모는 아직 여행에서 안 돌아오셨어요?”“여
경민준은 깊이 생각하지 않았고 연미혜가 연씨 가문으로 돌아갔을 가능성이 높다고 여겼다.욕실로 들어서려던 순간, 과거 연씨 가문에 갈 때면 항상 경다솜을 데리고 갔던 기억이 떠올랐지만, 오늘은 예외인가 싶었다.‘혹시 연씨 가문에 가지 않은 건가? 아니면 연씨 가문에 무슨 일이 생긴 걸지도 모르겠군.’머릿속에 오후에 회사에서 나설 때 정시원이 했던 말이 스치자, 그제야 확신이 들었다. 하지만 딱히 신경 쓰고 싶지는 않았다.다음 날 아침, 경민준은 아침 식사를 하며 경다솜에게 말했다.“입학 절차는 다 됐으니까 내일부터는 학교에
“알겠어.”그는 짧게 대답하고 전화를 끊었다.이번엔 경다솜도 전화 상대가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엄마였어요?”“응.”“설마 엄마도 증조할머니 댁에 가는 거예요?”“그래.”경다솜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반사적으로 눈썹을 찌푸렸다.엄마를 보고 싶지 않은 것도 그리워하지 않은 것도 아니었다.사실 따지고 보면, 엄마를 못 본 지도 꽤 오래되었고, 엄마가 이렇게 오랫동안, 무려 반달 넘게 연락을 하지 않은 적도 없었다.엄마를 언급하자 마음속 깊은 곳에서 엄마를 향한 그리움이 스멀스멀 올라왔다.하지만 그보다 먼저 떠
연미혜는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임지유와 경민준은 그녀와 경민준이 결혼한 이후에야 알게 된 사이였다.임지유는 그녀와 경민준의 관계를 분명히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임해철이 모를 리가 없었다.‘분명 알고 있을 거야.’그런데도 태연하게 임지유와 경민준을 엮으려 하고 있다면, 그 사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너무도 명확했다. 그에게 있어 연미혜는 아예 없는 존재나 마찬가지였다.경민준은 별다른 반응 없이 걱정하지 말라고 대답했다.그 후에도 몇 마디를 더 주고받은 뒤, 그는 임해철이 차에 타고 떠나는 것을 끝까지 지켜본
“이미 사직서 냈어요.”그 말에 심여정과 경민아는 동시에 멈칫했다.“곧 인수인계를 마치는 대로 퇴사할 겁니다.”순간, 노현숙의 얼굴에도 걱정이 스쳤다.“미혜야...”그때 엘리베이터에서 내려온 경다솜이 노현숙의 말을 끊었다.“엄마!”녀석은 활짝 웃으며 뛰어와 그녀의 품에 안겼다.연미혜는 순간적으로 표정이 굳었지만, 이내 조심스럽게 아이를 안아주었다.“다솜아... 먼저 와있었어?”특별한 말이 아니었지만 경다솜은 엄마가 자신을 받아준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은 듯했다.그 모습을 본 노현숙은 굳이 더 이야기를 이어가지 않고
월요일 아침, 연미혜가 출근한 지 얼마 되지 않아 AI 학술지에서 그녀의 논문이 정식 게재 승인되었다는 메일이 도착했다.잠시 후, 김태훈이 업무 관련해서 찾아왔다가 그 소식을 들었다.“논문 게재 승인되었어요.”“난 예상했어.”그는 별로 놀라지도 않았다.유명욱 교수가 검토하고 좋다고 한 논문이라면 당연히 통과됐을 거라 믿고 있었다.업무 이야기를 마무리하던 연미혜가 시계를 흘끗 보며 물었다.“점심 같이 드실래요?”김태훈은 관자놀이를 문지르며 고개를 살짝 저었다.“오늘은 안돼. 약속 있어.”“무슨 약속이요?”“소개팅.
연미혜는 김태훈의 말을 듣고 순간 어안이 벙벙했다.김태훈은 이력서를 다시 한번 들여다보며 물었다.“이력서는 깔끔하게 잘 만들었네. 실력은 어때?”“수준급이었어요. 인공지능 쪽에 입문한 지는 2년도 안 됐는데, 이미 대부분 박사급 개발자보다 뛰어나요.”“오... 그 정도야?”김태훈은 놀랍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진짜 타고났네. 마음에 들어?”“후보로 생각하고 있어요. 다만...”“며칠 못 가고 훌쩍 떠날까 봐 걱정이지?”“맞아요...”물론 CUAP이든 Infinite-CM이든, 구진원은 정말 흥미를 느끼고 있는 게
“봐야죠. 면접 끝까지 봐야죠.”그는 능청스레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구진원입니다. 진실의 진, 원할 원입니다. 만나서 반가워요.”연미혜는 간단히 악수를 나누며 고개를 끄덕였다.“이력서 봤어요.”연미혜는 이력서에서 눈을 떼고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그럼 이제부터 제가 구진원 씨를 면접해 보는 건가요? 아니면 계속해서 저를 테스트하실 생각인가요?”그는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전 뭐, 둘 다 괜찮습니다.”이력서에 따르면, 그는 알고리즘에 강점을 둔다고 했다.연미혜는 그가 데이터 정제, 특성 엔지니어링, 하이퍼파라미터
경민준이 말을 이었다.“할머니한테 네가 직접 말씀드릴래?”연미혜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굳이 물어보지 않아도 할머니는 내가 무일푼으로 이혼하는 걸 절대로 허락하지 않으실 거야...’연미혜는 되물었다.“그러면 협의서 내용을 안 건드리면 이혼 절차는 언제쯤 마무리될 것 같아?”“올해 안엔 가능할 거야.”이제 갓 3월이 시작됐으니, 연말까지는 아직 한참 많이 남아있었다. 차분히 기다릴 수 없는 시간은 아니었다.“우리 이혼에 대해 또 궁금한 거 있어?”연미혜는 대답하지 않고 전화를 끊었다.통화를 끝낸 지 얼마 되지
배지호는 연미혜의 말에 흠칫 놀랐다.“진짜 전부 포기하실 거예요?”배지호는 한동안 침묵했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경민준이 연미혜에게 약속한 이혼 합의 재산은 그녀가 평생 써도 다 못 쓸 만큼 큰 금액이었다.그런 걸 아무렇지도 않게 내려놓겠다는 말에, 배지호는 쉽게 이해가 되지 않았다.연미혜는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네. 확실해요. 대신 조건이 하나 있어요.”사실 그녀는 애초에 그의 재산에 욕심을 낸 적이 없었다. 경민준이 뭘 주든 안 주든, 받아도 미련 없고 안 받아도 아쉬울 게 없었다.‘다만...’예전에 노현숙이 갑
연미혜, 김태훈과 전현재, 세 사람은 따로 소통하는 단체 채팅방이 있었다.오늘 벌어진 일은 워낙 충격적인 데다 화제성도 커서, 전현재는 특유의 ‘소문 레이더’ 본능을 억누르지 못한 채 가장 먼저 그 내용을 공유했다.임지유에게 대체 얼마나 많은 남자가 줄을 서 있는지, 그 남자들이 그녀를 두고 얼마나 광기를 부리는지 일일이 ‘브리핑’했다.하지만 연미혜와 김태훈은 그 얘기에 별다른 관심이 없었다.오후, 전현재는 또 새로운 이야기를 꺼냈다.“참, 아까 경 대표님 딸이 회사에 와서 임 이사님을 찾아왔었어요. 전에 임 이사님이 다솜
노현숙의 생일이 끝난 뒤, 도원시 상류층 사회는 그야말로 술렁였다.경민준이 이미 결혼한 적이 있는 데다가 여섯 살짜리 딸까지 있다는 사실이 퍼졌다. 그동안 임지유를 짝사랑하던 재벌가 자제들은 충격과 함께 안타까움에 휩싸였다.임지유가 경민준과 연인 사이라는 건 대부분이 알고 있었지만 ‘결혼 이력’과 ‘자녀 존재’까지는 처음 알려졌기 때문이었다.다음 날 아침, 여러 남성들이 세인티로 몰려들었다. 그들은 임지유를 붙잡고 이쯤에서 그만두라며 설득하려 들었다.결국 장건식 등 측근들이 나서 겨우 임지유를 그 상황에서 벗어나게 도왔다.
정범규가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연미혜의 과거를 아예 모르고 있는 거 아니야?”하승태는 그 말에 잠시 생각에 잠겼다.예전엔 많은 사람들이 연미혜와 김태훈이 사귀는 줄 알았지만,그녀가 유명욱 교수의 제자라는 걸 알고 난 후 그는 두 사람의 관계를 유심히 지켜본 적이 있었다.그리고 그들 사이엔 남녀 간의 감정 따윈 없었다고 확신했다.이미연이 그런 말을 했던 건 정말로 김태훈과 이어지길 바랐던 건지, 아니면 단순히 체면을 지키려는 소리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지금의 연미혜라면 설령 한 번 결혼했고 아이가 있다 해도, 누구와
김태훈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경다솜은 다시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삼촌 목소리도... 어디서 들어본 것 같아요.”그 순간 김태훈의 눈가가 살짝 떨렸다.설 연휴쯤, 연미혜와 스피커폰으로 몇 시간씩 업무를 논의하던 일이 떠올랐다.그때 경다솜이 바로 옆에서 레고를 조립하고 있었다.‘다솜이가 내 목소리를 기억 못할 리 없지.’하지만 그는 그저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그랬구나?”경다솜은 고개를 끄덕였다.“네.”“삼촌 목소리가 좀 흔한가 보네?”그 말을 듣고 있던 경민준은 가만히 코끝을 만지작거리며 웃음을 흘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