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날.소은정은 클라이언트와의 미팅을 앞두고 있었다.출발하려던 그때 마침 전동하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전동하는 치고 빠질 때를 잘 아는 남자였다. 저번 날 집에서 소은정을 놀라게 한 뒤로 전동하는 연락도 하지 않고 굳이 찾아오지도 않았었다.“은정 씨, 오후에 같이 쇼핑이나 할래요?”전동하의 뜬금없는 제안에 소은정이 미간을 찌푸렸다.“새로 찾은 취미예요?”그리고 다음 순간, 맑은 전동하의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저번에 악어 때문에 은정 씨가 깜짝 놀랐었잖아요. 마이크가 그 사실을 알고 많이 속상해 했어요. 쇼핑몰 하나를 통째로 사서라도 제대로 사과하라고 저한테 신신당부 하던데요?”“푸흡...!”결국 소은정도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역시 어린애들은 단순하다니까.“괜찮아요. 동심 세계를 이해하기엔 제가 너무 커버렸나 봐요. 다음 번에 만나면 제대로 사과해야겠어요.”“네, 그렇게 해요. 그래도 마이크의 부탁이니 들어주긴 해야 할 것 같은데... 언제 시간 나면 밥이라도 같이 먹어요. 쇼핑이나 영화 보기도 괜찮고요.”어차피 인사치레일 뿐이라고 생각한 소은정이 웃으며 대답했다.“네. 그래요.”통화를 마친 소은정은 캐주얼한 옷으로 갈아입고 약속장소인 골프 클럽으로 향했다. 아직 쌀쌀한 날씨였지만 맑은 공기를 맡으니 기분도 상쾌해지는 기분이었다.오늘 만나야 할 클라이언트는 몇 년 전부터 거래를 튼 40대 사업가, 장건우. 평범한 외모이긴 했지만 30대 초반으로 보이는 동안이었다.소은호 대신 나온 자리, 상대도 소은정이 나온 걸 보고는 흠칫하다 어색하게 손을 내밀었다.“소은정 씨...? 맞으시죠?”“네. 처음 뵙습니다. 장 대표님,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이때 우연준이 한 마디 덧붙였다.“SC그룹 소은정 대표님이십니다.”그제야 자신이 실례했음을 눈치챈 장건우가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아 죄송합니다. 소은정 대표님. 소 대표님이 나오시는 줄 알았으면 약속장소를 다른 곳으로 잡을 걸 그랬어요. 골프 좋아하세요?”“괜찮습니다. 잘
소은정이 바로 제안에 응하지 않을 것이라는 걸 장건우 또한 알고 있었는지라 싱긋 미소를 지었다.“그렇기 합니다만 원래 가격대로 진행한다면 저희 쪽에서 입는 손해가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그래서 말인데... 지금 SC그룹이 생산하는 의료기계 부품은 전부 그룹 내부 공장을 이용하고 계시다죠? 그쪽 업무를 저희한테 넘겨주신다면 원가를 좀 낮출 수 있을 것 같은데요?”하, 이게 진짜 목적이었어? 생각보다 욕심이 많은 스타일이네?의료기기 스마트 칩은 워낙 기술력이 필요한 부분이라 SC그룹 내부 공장에서 직접 생산, 조립하고 있었다. 그리고 공장에서 일하는 모든 직원들은 비밀유지 계약서까지 체결한 상황, 외부 업체에 넘기면 핵심 기술력을 스스로 유출하는 거나 마찬가지였다.핵심 경쟁력을 내줄 수는 없지...소은정은 묘한 미소와 함께 고개를 들었다.“장 대표님, 이렇게 하시죠. 저희가 함께 일한 지도 꽤 되었고 앞으로 계약은 5년 단위로 체결하는 게 어떨까요? 그럼 가격을 2배로 인상하겠습니다. 이 정도면 윈윈 아닐까요?”소은정도 아무 준비 없이 이 자리에 나온 게 아니었다. 원자재 값이 올랐다는 장건우의 말은 사실, 원래 가격을 유지한다면 장건우의 공장은 몇 년 못 버티고 파산을 맞게 될 것이다. 소은호 또한 일단 장건우가 원하는대로 들어주는 게 장기적으로 더 나을 것이라 분부했던 터라 자신만만하게 2배라는 가격을 제시한 것이었다.하지만 장건우의 표정에는 실망감으로 가득했다. 그가 더 관심을 가지는 건 의료기기 조립이었으니까.게다가 소은정 이 여자, 들었던 것처럼 만만하지 않은 성격이다...그래도 가격이 2배까지 올라간 건 기대 이상의 결과 장건우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좋습니다. 시원시원하시네요. 그럼 지금 바로 계약 다시 체결할까요?”장건우의 말에 고개를 든 소은정이 우연준을 바라보고 우연준이 바로 준비를 시작했다. 잠깐의 침묵이 감돌던 그때, 고개를 든 소은정의 시야에 익숙한 누군가가 들어왔다.하지만 딱히 개의치 않았다. 골프 클럽에서 비
”내가 당신을 어떻게 믿죠?”우아한 자태로 의자에 앉은 소은정이 여유로운 얼굴로 물었다.이런 일이 있을 때는 경찰을 먼저 찾는 게 당연지사, 왜 나한테 부탁하는 걸까?그런 그녀의 모습에 마음이 더 조급해진 걸까? 양예영은 부랴부랴 휴대폰에서 사진 한 장을 꺼냈다.사진 속 양예영은 스무살 남짓해 보이는 앳된 모습, 갓 태어난 아기와 함께 앉아있는 사진이었다.“이 아이예요. 올해 6살이고요. 장건우는... 어린애들을 학대하는 변태 같은 남자예요. 저 짐승 같은 자식한테 제 딸... 죽을지도 모른다고요.”그제야 소은정은 뭔가 이상한 걸 느껴졌다.“설마... 장건우 아이에요?”소은정의 질문에 흠칫하던 양예영이 입술을 깨물고 고개를 끄덕였다.“네. 데뷔한 지 얼마 안 됐을 때 장 대표가 제 스폰서였어요. 가지고 놀다 얼마 안 돼서 저는 결국 버러졌고요. 아이는 제가 장건우 몰래 낳은 거예요. 그런데 장건우 저 자식 보기엔 멀쩡해도 심각한 변태예요. 아동 학대 패티쉬가 있다고요! 평소 장 대표... 고아원으로 봉사활동도 많이 다니고 그러죠? 사실은 거기 있는 애들 괴롭히러 가는 거예요.”또다시 떨리는 손으로 휴대폰을 뒤적거리던 양예영은 장건우가 온몸이 멍투성인 아이를 안은 채 환한 미소를 짓고 있는 사진을 찾아 소은정에게 보여주었다.순간, 소은정은 장건우라는 인간이 역겹게 느껴졌다.양예영은 여전히 불안한 듯 주위를 둘러보며 말을 이어갔다.“장건우는 제 약점을 쥐고 있어요... 웬만한 경찰들도 이미 장건우한테 매수된 상태고요... 제가 믿을 사람은 은정 씨뿐이에요. 제발... 제발 제 아이 좀 구해 주세요...”절박한 양예영의 모습에 소은정은 흔들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양예영은 프로 배우, 정말 믿어도 되나 싶었다.계약서 양식을 준비해 다가오던 우연준도 양예영을 보고 당황한 듯한 표정을 지었다.“대표님, 계약서입니다. 확인해 보시죠...”잠깐 고민하던 소은정이 뭔가 결심한 듯 자리에서 일어섰다.“장건우 대표 좀 막아줘요.”갑작스러운 소은정
다음 순간, 팔에서 강력한 힘이 느껴지고 중심을 잃고 휘청거리던 소은정은 누군가의 품에 쓰러졌다.그리고 꽃병 같은 것이 깨지는 소리가 들리고 조각들이 방금 전 소은정이 서 있던 자리에 쏟아졌다.익숙하지만 낯선 향기... 고개를 든 소은정의 눈이 커다래졌다.“전 대표님?”전동하가 왜 여기 있나 하는 의문을 내뱉기도 전에 전동하는 그녀를 등 뒤로 숨긴 채 낯선 여자를 노려보았다.여자 역시 전동하 뒤에 있는 소은정을 알아봤는지 흠칫하더니 안색이 창백해졌다.그녀를 알아본 것이다.소란에 달려온 장건우 또한 난장판이 된 바닥을 보고 꽤 놀란 모양이었다.“이게 다 무슨 일이야?”다가온 여자가 고개를 숙였다.“그 미친 X이 애를 훔쳐갔어요...”여자의 말에 장건우가 흠칫했다.“두 사람이서 애 하나를 못 봐? 이런...”욕설을 내뱉으려던 그때, 그제야 다른 사람의 존재를 발견하고 멈칫하던 장건우는 전동하와 소은정의 얼굴을 확인하더니 눈이 동그래졌다.“소 대표님이 어떻게 여기에...”“저 여자가 양예영 그 X을 도와줬다고요!”낯선 여자의 말에 장건우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었다. 소은정을 바라보는 그의 눈동자에는 불만과 경계심으로 가득했다.“이유를 물어도 될까요? 저희는 협력 관계 아니었나요?”장건우의 질문에 소은정은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만약 양예영의 말이 사실이라면 아이를 구하기 위해 장건우 같은 양아치 클라이언트 쯤은 하나 잃어도 별 손해가 없을 테고 설령 양예영의 말이 거짓말이라 해도 큰 차질은 없을 것이다.그냥 오빠한테 밀어버리지 뭐...전동하의 등 뒤에서 걸어나온 소은정이 말했다.“양예영 씨 아이라고, 도와달라고 부탁해서 도와줬는데요?”덤덤한 소은정의 반응에 장건우는 화를 삭이는 듯 한숨을 푹 내쉬었다.“제 아이이기도 합니다. 양예영 그 여자가 아이를 학대한 건 알고 계세요? 전 그저 제 아이가 정상적인 삶을 살길 바랐을 뿐이에요. 제 말이 틀렸나요?”장건우의 말에 소은정의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뭐야... 두 사람 왜 말이
침묵하던 소은정이 대답했다.“저희 쪽 변호사가 급한 사정이 생겨서요. 계약서에 사인은 다음에 하시죠.”이렇게 큰일이 일어난 이상 급하게 사인만 한다고 능사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말을 마친 소은정이 단호하게 돌아서고 고개를 살짝 까딱한 전동하도 소은정의 뒤를 따랐다.“전 대표님, 누가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 같으세요?”비록 양예영이 한 말은 듣지 못했지만 아이를 안은 채 다급하게 달려오는 모습은 확인했던 전동하가 잠깐 고민하다 단호한 말투로 대답했다.“둘 다 거짓말을 하는 것 같은데요?”소은정의 의아한 눈길에 전동하가 싱긋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에 방금 전까지 긴장되던 마음이 봄비에 눈 녹 듯 사르르 녹는 기분이었다.소은정도 따라서 미소를 지었다.엘리베이터가 1층에 도착하고 기다리고 있던 우연준을 향해 소은정이 물었다.“양예영 씨는요?”“도망쳤습니다. 너무 갑작스레 일어난 일이라 잡지도 못했고요.”고맙다는 말 한 마디 없이 도망쳤다고?전동하를 힐끗 바라보던 우연준이 고개를 살짝 숙였다.“고맙습니다, 전 대표님.”의아한 소은정을 뒤로 하고 전동하가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마침 저도 비즈니스 때문에 여기 왔었거든요. 우 비서님 부탁 받고 올라갔던 거예요...”그랬구나... 두 번이나 도와줬는데 밥 약속도 거절하는 건 예의가 아닌 것 같아 소은정이 먼저 물었다.“같이 식사라도 하실래요?”“좋습니다.”레스토랑으로 향하는 길, 소은정은 소은호에게 전화를 걸어 장건우의 상황을 물었다. 하지만 소은호 역시 비즈니스적 파트너일 뿐, 사적인 정보에 대해서는 별로 아는 게 없는 눈치였다.자초지종을 들은 소은호가 말했다.“잘했어. 무슨 일인지 제대로 알아보기 전까지 계약서 체결은 보류해.”문란한 대표의 사생활 때문에 기업 전체가 무너지는 일도 흔했으니까... 게다가 연예인인 양예영과 어린 아이까지 엮인 사건이다. 그런 그룹과 괜히 함께 일했다간 SC그룹의 이미지에도 금이 갈 수도 있는 상황, 쓸데없는 리스크는 피하는 게 상책이었다.
갑작스러운 소은정의 말에 흠칫하던 신나리가 고개를 저었다.“그럴 일 없으니까 걱정하지 말아요!”그제야 안심한 듯 소은정이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는 핵심 기술을 개발 중인 연구소로 향했다.비록 보고서를 통해 이미 확인한 내용들이지만 직접 눈으로 보는 건 색다른지 전동하도 우연준도 잔뜩 집중한 모습이었다.기술 총괄인 신나리가 프로젝트 진행도에 대해 설명했다.“스마트 라이프에 대한 기술적인 연구는 스마트 가구뿐만 아니라 인테리어, 디자인 쪽으로도 발전하고 있어요. 사시사철 일정 기온과 습도를 유지할 수 있는 건 물론이고 방수, 방화 처리 그리고 사용자의 감정을 측정해 실내 분위기를 바꿀 수 있는 정도까지 이르렀죠. 그리고 최신 의료 연구 성과도 인테리어에 응용했어요. 의료용 스마트 칩을 삽입해 웬만한 병은 집안에서도 진료받을 수 있게 되었죠. 응급 상황에 대한 대응도 가능하고요.”생각보다 빠른 발전 정도에 전동하의 두 눈이 반짝 빛났다.“다들 들어가 보시죠.”전동하와 우연준이 들어간 뒤에도 밖에 서 있는 소은정을 향해 신나리가 물었다.“은정 씨는 안 들어가 볼 거예요?”“실험실에서 느끼는 것도 좋지만 정말 실생활에서 직접 느끼는 게 더 좋을 것 같아서. 저희 오피스텔에 업데이트해 주세요.”소은정의 말에 웃음을 터트리던 신나리는 유리창을 통해 전동하를 바라보았다. 훤칠한 체격에 잘생긴 옆라인, 고급스러운 분위기...신나리가 감탄했다.“전 대표님은 참 보면 볼 수록 멋있는 것 같아요. 외모도, 몸매도. 저 다리 좀 봐요...”두 눈을 반짝이며 전동하를 바라보는 신나리를 발견한 소은정이 미간을 찌푸렸다.“저... 저희 오빠도 나쁘지 않아요.”“그래도 지금 제 앞에 없잖아요!”신나리의 말에 소은정은 한숨을 내쉬었다.그러네... 할 말이 없어...이때 신나리가 팔꿈치로 소은정의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은정 씨, 저렇게 잘생긴 사람이랑 맨날 붙어있으면 막 떨리고 그렇지 않아요?”“맨날 붙어다닌 적도 없고 떨린 적도 없어요.”침착한 소은정
기술 총괄로서 그녀가 거성그룹에서 받는 연봉만 억대, 게다가 해마다 받는 보너스에 성과금까지 돈이라면 신나리도 부족할 게 없었다.하지만 신나리가 관심을 가지는 건 돈이 아닌 다른 것이었다.팔을 활짝 벌린 신나리가 큰 소리로 외쳤다.“전 이 세상에 이름을 떨치는 과학자가 되고 싶어요!”“아... 그건 좀 어려울 것 같은데요...”소은정이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었다.참관이 끝나고 신나리는 소은정을 끌고 자신의 연구실로 가더니 새로 개발한 제품들을 소개하기 시작했다.역시 천재 과학자들은 뭔가 달라도 달랐다. 평범한 여자들이 스트레스를 푸는 방법은 보통 쇼핑, 수다지만 연구실에서 새로운 연구를 진행하는 게 가장 편하다는 신나리의 말에 소은정도 입을 떡 벌렸다.하지만 연구실에만 틀어박혀 있다 보면 운동량 부족은 당연한 일일 터, 미래 올케의 몸이 걱정된 소은정은 신나리를 설득해 운동하러 나가기로 했다.전동하에게 언질을 준 뒤 두 여자는 소녀처럼 환한 미소와 함께 회사를 나섰다.“회사 근처에 새로 개업한 헬스장이 있던데. 그쪽으로 가요.”회사와 가깝다면 신나리도 더 자주 가지 않을까 싶어서 소은정도 고개를 끄덕였다.깔끔하게 된 인테리어에 고개를 끄덕이던 소은정은 광고판에 적힌 글귀를 확인하고 미간을 찌푸렸다.연 회원권100만원, 예쁜 여성분들은 무료로 사용 가능하십니다!왠지 평범한 헬스장은 아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역시나 광고판을 확인한 신나리 또한 흥미로운 듯한 표정을 짓더니 바로 지갑을 열었다.“연 회원권으로 끊어주세요.”카운터에서 졸고 있던 남자직원이 신나리의 목소리에 벌떡 일어섰다. 아름다운 두 여성의 외모에 남자 직원이 넋을 잃던 그때, 또 다른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은정 씨?”고개를 돌린 소은정이 살짝 미소를 지었다.박수혁의 친구 장학준이었다. 그녀와 채태훈이 함께 찍힌 사진이 기사로 올라왔을 때 그 남자는 박수혁이 아니라고 적극적으로 해명에 참여했던 사람이 바로 장학준이었다.그 뒤로는 얼굴을 못 본 것 같은데...
신나리의 말에 소은정은 할말을 잃고 말았다.비싼 돈 주고 한다는 운동이 겨우 명상이라니.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장학준이 열정적인 목소리로 소개를 시작했다.“좋습니다. 저희 명상 선생님은 지리산에서 도를 닦으신 분이에요. 명상 업계에서는 거의 탑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그리고 친구분께서 바로 선생님의 첫 제자가 되시는 거랍니다!”드디어 땀이 안 나는 운동을 찾은 신나리는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장학준은 다른 직원에게 안내를 부탁했고 신나리는 그들의 손에 이끌려 “명상실”로 향했다.“그럼 우리 은정 씨는 어떤 운동을 하고 싶으세요?”최고의 트레이너만 채용했다는 장학준의 말에 소은정은 생각에 잠겼다.여기까지 왔는데 나도 한번 해봐?“그럼 태권도로 할게요.”요가나 필라테스 정도를 선택할 거라 생각했던 장학준의 예상을 완벽하게 벗어난 소은정의 선택에 장학준이 흠칫했다.“아, 좋습니다. 그럼 도복으로 갈아입어 주세요. 제가 직접 대련상대가 되어 드릴게요.”탈의실로 향하는 소은정을 바라보던 장학준이 입술을 깨물었다.태권도 코치는 국가대표 출신! 혹시나 대련 중에 힘 조절에 실패해 소은정이 다치는 일이라도 생긴다면 큰일이니 직접 나설 수밖에 없었다.상위층 인사들을 타깃으로 프리미엄 서비스를 제공하는 헬스장 답게 도복 또한 깔끔하고 소재도 고급이었다.흰색 도복으로 갈아입고 머리를 깔끔하게 묶은 소은정은 평소와 다른 독특한 매력을 뿜어내고 있었다.하지만 여리여리한 것이 킥 한 번에 저 멀리 날아갈 것만 같은 모습이었다.준비운동 삼아 20분 동안 러닝을 끝내고 장학준 역시 도복으로 갈아입고 그녀의 앞에 나타났다.도복 옷깃 사이로 살짝 보이는 근육, 소은정과는 체급 자체가 달랐다.도복을 갈아입은 장학준을 발견한 코치가 고개를 갸웃했다.“사장님이 직접 하시려고요?”코치의 질문에 장학준이 고개를 끄덕였다.도자기 인형처럼 귀하신 분, 내가 직접 상대해 드려야지.“그럼 준비운동부터 하시죠?”“아니야. 진짜 실력으로 하면 저쪽에서 다칠 지도
오랜만에 만난 두 사람은 서로 부둥켜안고 눈물을 흘렸다.문준서는 그녀의 눈물을 보고 죄책감에 얼굴을 들 수 없었다.새봄이가 점차 울음이 잦아들자 그는 고개를 숙이고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었다.새봄이는 길게 심호흡하고 감정을 식혔다.준서에게는 묻고 싶은 게 정말 많았다.문준서는 울어서 빨갛게 부은 새봄이의 눈을 보고 웃으며 말했다.“커피 계속 마실 거야? 안 마실 거면 우리 집에 올래? 내가 맛있는 커피 만들어 줄게!”새봄이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준서는 소녀의 손을 잡고 핸드백을 챙긴 뒤, 밖으로 나갔다.커피숍 직원들마저 잘 어울리는 한 쌍이라고 부러운 눈빛을 보냈다.새봄이는 그와 손을 잡고 걷고 있자 저도 모르게 가슴이 설레었다.어릴 때는 항상 손을 잡고 다녔는데 지금은 어딘가 어색했다.어린 문준서는 항상 새봄이를 우선으로 생각했는데 지금도 그럴까?문준서는 소녀가 기억하는 어린 준서가 아니었다. 그의 거대한 뒷모습은 왠지 모를 안정감을 주었다.문준서가 웃으며 소녀에게 물었다.“뭘 그렇게 뚫어지게 봐?”“키 몇이야?”“192, 만족해?”새봄이는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을 느끼며 고개를 돌렸다.“내가 키 큰 사람 별로라고 하면 뼈라도 깎을 거야?”문준서는 웃으며 소녀의 손을 잡아끌었다.“응. 네가 집도해.”새봄이도 덩달아 웃었다.10여 년을 떨어져 지내다 보니 처음에는 정말 보고 싶었지만 점차 감정은 옅어져 갔다. 매번 부모님에게 준서의 안부를 물을 때면 그들은 머리만 흔들었다.그 뒤로 새봄이는 더 이상 준서를 찾지 않았다.말없이 사라진 그를 원망한 적도 있었다.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면 그가 해외에서 무사히 지냈으면 하는 바람이 더 컸던 것 같았다.문준서는 길가에 세워진 스포츠카로 다가갔다.차도 주인을 닮아 검은색으로 차분하고 화려하지 않은 디자인이었다.처음 그와 눈이 마주쳤을 때, 새봄이는 그가 문준서라는 것을 한눈에 알아보았다. 티없이 맑고 순수했던 눈동자는 어릴 때와 비교해 변한 게 전혀 없었다.하지만 소녀
새봄이가 떠난 뒤로 전동하는 한숨을 달고 살았다. 옆에서 지켜보는 소은정은 어이가 없었다.학교 생활은 생각했던 것보다 따분하지 않았다.어릴 때부터 곱게 자란 새봄이지만 거만하지 않고 성격이 활발했기에 많은 친구를 사귀었다.아이는 가끔 친구들을 집에 초대해서 파티를 벌였다.그리고 혼자 있는 시간도 충분히 즐겼다.가끔 센 강변에 가서 산책도 하고 석양을 감상하며 오리에게 먹이를 주기도 했다.그런데 가끔 혼자 있을 때면 누군가가 지켜보는 느낌이 들기도 했다.하지만 크게 걱정하지는 않았다. 주변에 수시로 경호원들이 지키고 있었기 때문이다.새봄이는 아이스크림을 들고 홀로 석양 아래에서 산책을 즐겼다. 손에는 엄마를 위해 준비한 선물인 한정판 명품백이 들려 있었다.이목구비가 화려한 동양소녀가 길을 걷고 있자 무수히 많은 시선들이 따라다녔다.하지만 프랑스의 치안은 별로 좋지 못했다.새봄이가 아이스크림을 먹는 사이 녹색 트레이닝복을 입은 남자가 소녀의 핸드백을 가로채서 사람들 틈으로 도주했다.놀란 새봄이는 다급히 남자의 뒤를 따라가며 소리쳤다.“도둑이야!”안타깝게도 유럽에서 비슷한 사건은 비일비재하게 벌어졌다.아무도 핸드백을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싶지 않아했다.새봄이는 자신이 안전하다는 것을 알기에 끝까지 남자를 쫓아갔다.수염이 덥수룩한 남자는 뒤를 돌아보며 뭐라고 욕설을 지껄이더니 골목으로 진입했다.새봄이가 쫓아갔을 때, 남자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소녀가 망연자실한 얼굴로 서 있을 때, 갑자기 옆 골목에서 사람이 튀어나왔다.남자는 바로 새봄이의 목을 노리고 달려들었지만 손이 소녀에게 닿기도 전에 누군가가 달려와서 남자를 걷어찼다.새봄이는 겁에 질린 얼굴로 뒤를 돌아보았다.훤칠하고 잘생긴 동양인 남자가 등 뒤에 서 있었다.어딘가 익숙한 느낌이 들었다.검은 정장을 입은 남자가 새봄이의 앞으로 다가갔다.그에게서 익숙한 우드향이 풍겼다.그는 천천히 소녀를 향해 손을 뻗었다. 손가락이 가늘고 예쁜 손이었다.녹색 트레이닝복을 입은 강
전동하는 그날 밤 새봄이에게 해외유학 얘기를 꺼냈다.새봄이는 고민도 해보지 않고 바로 동의했다.어디에 가고 싶냐고 물었더니 프랑스만 제외하고 아무데나 괜찮다고 했다.전동하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준서 때문에 프랑스에 가기 싫은 거야?”새봄이가 눈시울을 붉히며 말했다.“걔가 누군데? 하나도 기억 안 나! 걔 얘기하지 마!”아이는 억울함을 토로했다.줄곧 아이의 옆을 지켜주던 오빠는 어느 날 갑자기 사라졌다.마치 꿈을 꾼 것 같았다.더 이상 아이의 뒤꽁무니를 따라다니던 오빠는 없었다.아이는 준서가 보고 싶었지만 준서는 떠날 때 편지 한장 남기지 않았다.전동하는 안쓰러운 표정으로 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새봄이도 이제 컸잖아. 준서도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어. 연락이 없던 것도 그럴만한 사정이 있어서였어. 나중에 준서 만나도 너무 준서를 욕하지 마.”새봄이는 고집스럽게 고개를 돌려버렸다.부모의 사랑만 받고 자란 아이는 갑작스러운 이별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가끔 딸이 울기라도 하면 전동하는 항상 달려와서 딸을 위로해 주었다.태어날 때부터 다이아수저를 물고 태어난 아이는 누구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었다.그런데 어느 날 오빠가 보고 싶었던 아이가 준서에게 전화를 걸었을 때, 없는 번호라고 나왔다.아이는 버려진 느낌을 받았다.출국이 결정되었으니 전동하는 아이가 다닐 학교를 알아보았다.결국 새봄이는 유럽을 선택했다.마치 누군가가 거기서 자신을 기다리는 것처럼.떠나기 전, 아이는 일곱 남자친구와 작별인사를 나누었다.아이가 출국하는 날, 온가족이 나와서 새봄이를 배웅햇다.새봄이는 딱히 슬프거나 아쉬운 티를 내지 않았다. 마치 부모님 손을 잡고 해외여행을 가는 것처럼 자연스러웠다.아이는 활짝 웃으면서 가족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전동하와 소은정은 영지까지 데리고 같이 프랑스로 출국하기로 했다.일가족이 탑승수속을 마치고 돌아서는데 뒤에서 급박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새봄아!”고개를 돌리자 하얗게 질린 얼굴로 허겁지겁 이쪽
눈 깜짝할 사이에 새봄이는 어엿한 숙녀로 자라났다.고등학교에 들어가자마자 그녀에게는 남자친구가 생겼다.새봄이는 집으로 돌아와서 이 소식을 소은정에게 알렸다.소은정은 딱히 말리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어렸을 때 이런저런 경험을 다 해보는 게 아이에게 좋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그리고 새봄이가 진심일 거라고 생각하지도 않았다.하지만 이 사실을 알게 된 전동하는 밤새 잠을 이룰 수 없었다.그는 아이와 대화를 나눠봐야겠다고 마음먹었다.새봄이의 반응은 시큰둥했다.“친구들이 다들 남자친구를 사귀는데 나만 솔로면 유행에 뒤떨어지잖아. 그래서 만나보기로 했어. 그리고 너무 이른 나이도 아니잖아! 중학교 때부터 연애하는 애들도 많다고!”전동하는 인내심 있게 아이를 타일렀다.“그래도 넌 아직 너무 어려. 밖으로 나가 사람들과 더 많이 접촉해 보면 알게 될 거야. 남자는 다 믿을 놈이 못 돼….”“그럼 엄마가 아빠를 만난 것도 사랑에 눈이 멀어서 만난 거겠네?”어릴 때부터 말싸움에는 절대 지지 않던 새봄이는 미소가 소은정을 닮은 예쁘고 사랑스러운 소녀로 성장했다.그리고 총기 있는 눈동자와 말빨, 그리고 큰 키는 전동하를 많이 닮았다.소은정은 어디 하나 빠지지 않는 딸이 나중에 남자 여럿을 울릴 거라는 것을 알기에 아이에게는 사랑을 하면 꼭 아빠랑 엄마처럼 서로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라고 강조했다.새봄이는 전동하가 말이 없자 달려가서 그의 팔짱을 꼈다.“아빠, 걱정하지 마. 그냥 연애는 어떤 느낌인가 궁금해서 해보는 거야.”“그래서 그 남자친구는… 어떤 사람이야?”“어느 남자친구를 말하는 거야?”전동하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물었다.“몇이나 사귀었는데?”“다른 애들은 다 한명하고만 사귀는데 난 다른 애들 따라하기 싫어. 그래서 하루에 한 명, 일주일에 일곱 명이야! 주일을 정해서 따로 만나!”새봄이가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전동하는 입을 뻐금거리며 한참을 말을 잇지 못했다.그래도 다행인 건 사랑에 깊이 빠지는 스타일은 아니라는 점이랄까.
다른 CCTV에서 정황이 포착되었다. 직원이 그쪽으로 다가가다가 발을 헛디디며 하마터면 술잔을 쏟을 뻔한 정황이었는데 그때 잔을 안쪽으로 옮기며 위치가 바뀐 것 같았다.독극물 검사결과도 나왔다.청산가리였다.심청하의 몸에서 나온 독극물과 약병에 있던 독극물 성분이 일치했다.살인을 계획했던 심청하가 제 꾀에 당한 상황이었다.아마 그녀는 죽을 때까지 어디서 문제가 생겼는지 몰랐을 것이다.형사들은 밤을 새워 CCTV를 확인하면서 이 약병의 출처가 남유주의 큰어머니라는 사실을 밝혀냈다.그렇게 큰어머니가 경찰에 소환되었다.큰어머니는 숨김없이 사건의 경과를 진술했는데 심청하에게 협박을 당했다는 내용이었다.하지만 사람을 해치고 싶지 않아서 넘어지는 틈을 타 약병을 바닥에 버렸다고 했다.심청하가 포기를 못하고 스스로 행동에 옮기다가 제 꾀에 당했다는 말도 했다.형사가 인상을 찌푸리며 그녀에게 물었다.“그랬다는 증거 있나요?”“당연히 있죠.”큰어머니는 딸인 남연을 호출했다.“형사님이 묻는 대로 사실을 대답해! 떨지 말고!”남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핸드폰을 꺼냈다.그리고 차 안에서 심청하와 대화했던 녹음을 재생했다.“그 여자가 아빠랑 엄마를 죽이겠다며 협박했어요. 그 파티 초대장은 제가 거금을 주고 산 거예요. 우린 태한그룹 사모님과 친척관계에요. 평소에 왕래는 하지 않지만 사람을 죽이고 싶지는 않았다고요!”남연은 울음을 터뜨리며 말했다.“형사님, 제가 아는 건 다 얘기했어요.”형사는 그녀의 진술에서 이상한 점을 포착했다.“전에 남유주 씨를 해하려 한 적이 있죠?”“그래! 너도 직접 남유주를 죽이려고 했잖아? 그건 왜 쏙 빼고 말해?”녹음본에 담겼던 심청하의 목소리였다.의심을 사지 않기 위해 파일은 편집을 거치지 않았다.남연은 고개를 푹 숙이고 사실을 털어놓았다.“그것도 심청하가 협박해서 했어요. 하지만 언니 앞에서 이미 잘못을 인정했고 사과도 했어요. 언니는 저를 용서했고요.”형사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이건 박수혁 대표와
심청하는 한참 침묵하더니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무슨 방법을 쓰든 그 사람들과 걔를 만나게 해. 안 그러면 이 약은 네 부모님 배 속으로 들어갈 거야!”남연은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고개를 떨어뜨렸다.“알겠어요.”결국 그녀는 겁에 질린 얼굴로 명령을 받아들였다.며칠 뒤, 마침 좋은 기회가 찾아왔다.오늘은 자선회가 열리는 날이었는데 박수혁은 남유주의 기분을 풀어주기 위해 그녀와 함께 자선회에 참석했다.그리고 자선회에서 많은 보석과 골동품을 구매하며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다.자선회가 끝나고 파티가 이어졌다.남연의 부모는 힘겹게 초대장을 입수했다.심청하는 파티홀에서 이어질 장면을 기대하고 있었다.하지만 남연의 부모는 뒤늦게 파티에 참석했고 그들이 현장에 도착했을 때는 파티가 다 끝난 뒤였다.심청하는 분노를 주체할 수 없었다.이번 기회를 놓치면 다음에는 언제가 될지 장담할 수 없었다.SC그룹에서는 지분 사건으로 그들을 물고늘어질 것이다.본사에서 움직이기 전에 남유주를 제거해야 했다.잠시 후, 남유주의 큰어머니는 사람이 없는 곳에 숨어들었다.그리고 약을 꺼내 술병에 쏟아넣으려고 했다.마침 취객이 그녀의 어깨를 부딪히고 지나가며 그녀가 바닥에 쓰러졌다.남유주 큰어머니가 고통에 신음을 흘리자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되었다.약병은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구석진 곳으로 굴러갔다.심청하는 싸늘한 눈빛으로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정말 뭐 하나 일을 제대로 하는 게 없는 일가족이었다.남유주의 큰아버지는 얼굴이 하얗게 질려 다급히 다가가서 아내의 손을 잡고 구급차를 호출했다.호텔에 미리 대기하고 있던 의료진이 달려왔고 큰어머니를 들것에 실어 병원으로 호송했다.심청하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사람들이 모두 흩어지고 그녀는 구석진 곳으로 가서 아무도 안 보는 틈을 타 약병을 손에 쥐었다.그리고 기회를 봐서 약을 와인에 쏟고 흔들었다.모든 게 끝난 뒤, 심청하는 손에 난 땀을 닦았다.이미 살인을 하기로 마음먹은 그녀였지만 직접 모든 일을 끝내고 나니
남유주는 미소를 지으며 소은정과 박수혁 사이를 스스럼없이 얘기했다.남유주는 지나간 둘의 과거를 신경 쓰지 않았다.박수혁은 소은정에게 다른 마음이 없었고 그들은 각자 다른 사람과 행복한 삶을 살기로 했다.소은정은 미소를 지으며 남유주가 건넨 상자를 열었다.안에는 팔찌가 있었다, 반짝이며 아름다운 화려한 목걸이의 모든 보석은 정교하게 다듬어져 있었고 본연의 미와 섬세함의 아름다움을 결합하는 느낌이 들게 했다.그녀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몇 년 동안 이런 것을 모으기를 좋아했는데... 고마워요, 진짜 마음에 들어요." 남유주는 화해의 의미로 소은정에게 팔찌를 건넸다.소은정은 미소를 지으며 팔찌를 착용했다."과거는 과거일 뿐이니 우린 서로 용서하는 게 어때요?"소은정은 머리를 끄덕였다. 그녀의 눈가에 눈물이 고였다."안타깝게도 난 어떤 선물도 준비하지 못했네요…"그녀는 가방에서 계약서를 꺼내고 남유주에게 건넸다.남유주는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서류 내용을 살펴보았다."이게 뭐예요?""원래는 소찬학의 주식이었지만 몇 년 전에 회사 소유로 되었어요. 아빠가 나이도 있고 해서 주식 대신 배당금을 주기로 했었어요, 근데 더는 그 사람의 것이 아니니까, 아빠가 유주 씨한테 넘기고 싶다고 하더라고요. 우리가 주는 작은 선물이니까 받아줬으면 좋겠어요." 얼굴이 굳었던 남유주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그녀는 계약서를 다시 내밀었다."전 받지 않을래요.""유주 씨, 이게 얼마나 큰 돈인지 몰라요? 술집을 사려고 했던 거 아니었어요? 이 돈으로 그 건물 같은 거 열 개는 살 수 있어요."소은정은 인내심을 가지고 설명했다.남유주는 웃음을 참고 머리를 흔들었다."이걸 받으면 소찬학이 내 생부라는 것을 인정하는 거잖아요, 끊을 수 없는 혈연관계를 받아들여야 하고, 내가 관여하지 않은 과거의 강탈과 억압을 직면해야 해요. 태어난 이래로 부모가 없는 존재로 살아왔고, 아직 그것을 원하지 않아요. 나의 아버지로 인정하고 싶지도 않고 소씨 가문과 혈연적인 관계가
거침없이 내뱉는 심청하의 태도에 소찬식이 얼굴이 어둡게 변했다.옆에서 듣고 있던 소은정이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소씨 가문의 주식은 애초에 저희 집안 거에요. 그리고 둘째 삼촌이 직접 주식을 그룹 소유로 돌리겠다고 서명까지 했어요. 자기는 주식 배당만 챙기겠다고, 회사를 떠난 지금 삼촌한테 배당금을 주는 것만으로도 감사하게 여겨야죠. 이모가 한 계산은 너무 터무니없어요. 이 주식들은 재산 분할과 관련이 없어요. 설령 분할을 한다 해도, 먼저 그룹의 이익을 보호하는 게 우리의 원칙이고요."심청하는 얼굴이 이상하게 변했다."저는 어떻게 해요? 그이가 감옥에 가고, 우리는 손가락 빨면서 굶어 죽으라는 거예요? 주식을 전부 넘겨주세요, 그럼 더는 따지지 않을게요!" 그녀는 무례한 태도로 단호하게 앉아 있었다.소찬식의 표정이 음울하게 어두워졌다, 그는 복잡한 눈빛으로 그녀를 한번 쳐다보았다."그만 돌아가세요, 돌아가서 경찰 소식 기다리세요. 찬식이 회사 자금을 자기 돈처럼 써버렸고 수억 달러를 횡령했어요. 그럼에도 그룹이 이 돈에 대해 따지지 않는 것만으로도 고맙게 생각하세요. 어떻게 돈을, 주식을 요구할 수 있어요?" "나는 찬식 씨가 아니에요, 다른 사람들 사정은 모르겠고, 누가 날 어떻게 생각하든 관심없어요."그는 말을 마친 뒤 옆에 서 있는 집사에게 눈짓했다."손님을 내보내.""네."집사의 대답에, 심청하는 일어서서 조급하게 말했다. "아주버님, 그렇게 말씀하시지 마세요. 형제들끼리 어떻게 이렇게 매정하게 굴어요? 이 일을 언론에 알리면 어떻게 될지 저도 기대되네요, 아마 언론도 이 일에 엄청난 관심을 둘 것 같거든요!"소찬식의 표정은 신경질적으로 굳어졌다, 눈빛이 차갑고 어둡게 변했다.공기 안에는 침묵이 깔렸다.소은정은 갑작스럽게 직감했다. 심청하가 예전과는 분위기가 많이 달라진 것을 눈치챘다.하지만 그들은 타협할 수 없었다. 한 푼이라도 더 주면, 그녀는 주제 파악을 못 하고 더 달라고 요구할 것이다.그녀는 절대로 이번 한
심청하의 얼굴이 새파랗게 변했다."다 해봐야죠, 우선 믿을 만한 변호사를 찾아서 형량부터 줄여줘요."옆에서 듣고 있던 소은정이 참지 못하고 가볍게 웃으며 소리를 냈다.소은정이 입을 열었다."마침 잘 오셨어요, 우리도 지금 삼촌을 어떻게 구할지 토론하고 있었거든요!"심청하는 의아한 눈빛으로 소은정을 쳐다보았다. "그러면... 어떤 방법을 논의했는데?"전동하는 멋도 모르고 웃었다. 그는 소은정의 대답을 기다렸다.소은정은 청량한 목소리로 한숨을 쉬었다."사실 우리가 변호사를 찾아서 물어봤어요. 판결이 심하게 나면, 사형이 나올 수도 있다고 하더라고요, 어쨌든 두 사람을 죽인 거니까.그래도 방법이 있어요, 둘째 삼촌은 그때 혼인 상태였잖아요?법정에 나서서 전부 둘째 삼촌이 한 게 아니라고 증언하면 돼요. 삼촌은 줄곧 숙모랑 함께 있었고, 그런 일을 꾸밀 시간적 여유도 없었다고!"심청하는 갑자기 얼굴이 하얗게 질리더니 충격을 받은 표정으로 일어섰다."너... 나보고 거짓 증언을 하라는 거야, 말이 되니? 그거야말로 불법이야!"소은정은 차가운 눈빛으로 비웃었다."불법이라는 것도 알고 계셨네요? 근데 왜 저희 아버지한테 당당하게 그런 짓을 요구하는 거예요?"심청하는 그제야 자신이 소은정에게 당했다는 것을 깨달았다.화가 난 그녀의 얼굴이 붉어졌다."은정아, 너 말 이상하게 하는 구나, 내가 마음이 너무 급해서 나온 말을 꼬투리 잡는 거니? 그리고 너희 삼촌 아직 유죄 판결도 나지 않았어. 그러니까 우리가 조금 더 노력하면 돼."소은정은 눈썹을 찌푸렸다."그럼 혼자 잘 해보세요! 우린 응원이나 하고 있을게요!""너 지금 뭐하자는 거니?" 심청하는 화를 내며 소찬식을 바라보았다."진짜 이렇게 내버려두실 거예요?"소찬식의 눈빛이 어둡게 깔렸다."자기가 한 일에 대가를 치러야 하겠죠, 저희는 아무런 상관도 하지 않을 겁니다. 그러니 제수씨도 저희를 그만 찾아오세요."심청하는 소찬식의 태도가 이렇게 차갑고 딱딱할 줄은 몰랐다.그녀는 잠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