웃음을 겨우 참는 듯한 표정의 코치가 장학준을 부축해 링에서 내려왔다.“의사 선생님 바로 오실 거니까 기다리세요.”말을 마친 코치는 휴대폰을 돌려주고는 링 위로 올라갔다.역시 국제대회 우승자는 뭐가 달라도 달랐다. 코치는 소은정의 공격을 자연스럽게 받아주면서도 전혀 밀리지 않는 모습이었다.프로 대 프로의 경기를 멍하니 바라보는 장학준의 눈에는 저도 모르게 눈물이 맺혔다.아, 아파... 소은정 저 여자... 삐쩍 말라서는 싸움은 왜 저렇게 잘해?고통을 참으며 장학준은 방금 전 코치가 촬영한 영상을 확인했다.링 위를 거의 날아다니다시피 움직이고 날카롭고 깔끔한 공격만을 날리는 소은정의 모습은 걸크러쉬 그 자체였다. 청순한 외모와 다른 반전 실력이 그녀를 더 매력적으로 만들어주고 있었다.헬스장 홍보도 할겸, 장학준은 영상을 SNS에 올렸다.얼마 지나지 않아 박수혁 또한 그 영상을 확인하게 되었다. 영상속 소은정의 모습을 한참 동안 바라보던 박수혁은 바로 장학준에게 전화를 걸었다.한편, 전화를 받은 장학준은 익숙한 전화번호에 팔이 뽑힌 고통마저 사라지는 기분이었다. 설레는 마음을 겨우 억누르고 장학준은 떨리는 손으로 전화를 받았다.“박 대표님...”얼마 전까지 수혁이 형이라고 편하게 부르는 사이였지만 장학준은 나름 주제를 아는 남자였다.박수혁에게 찍힌 이상 괜히 더 친한 척을 했다간 이 코딱지만한 헬스장마저 폐업을 면치 못할 것이다.“영상... 네가 찍은 거야?”차가운 박수혁의 목소리에 장학준이 흠칫했다.“네...”“아직도 거기 있어?”“네...”장학준은 대련에 집중 중인 소은정을 힐끗 바라보았다.“주소 당장 찍어보내고 영상은 바로 삭제해.”말을 마친 박수혁은 바로 전화를 끊어버렸다.이렇게 아름다운 모습은 그녀 혼자만 보는 걸로 족했으니까.한편 장학준은 부랴부랴 주소를 보낸 뒤에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번 일로 박수혁이 그를 조금이나마 더 좋게 봐주길 바랄 뿐이었다.약 30분 뒤, 박수혁이 헬스장에 도착하고 소은정도 땀
전동하의 등장에 박수혁의 표정이 급격하게 어두워졌다. 새카만 눈동자로 전동하를 노려보는 박수혁의 모습은 영역을 침범당한 맹수 그 자체였다.박수혁을 발견한 전동하 역시 흠칫 놀란 듯했지만 곧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박 대표님도 계신 줄은 몰랐네요?”저번 인터넷에서 모함 사건이 벌어진 뒤로 두 사람이 직접 만난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두 남자 사이의 묘한 기싸움을 관찰하던 소은정은 의문에 잠겼다.전동하는 왜 또 여기 나타난 거야.이때 복도 끝에서 천천히 걸어오던 신나리가 그녀를 향해 손을 저었다.“전 대표님 도착하셨어요? 아까 전화로 어딘지 물으시던데...”아, 신나리가 알려준 거였나...예상치 못한 전동하의 등장에 장학준은 뭐 마려운 강아지마냥 안절부절 못하는 표정이었다.괜히 박수혁한테 더 밉보이는 거 아니야?한편, 박수혁은 전동하를 죽일 듯이 노려보는 중이었다.전동하, 이 씹어먹어도 시원치 않은 자식...어색한 침묵을 깨트린 건 바로 소은정의 목소리였다.“전 대표님, 안 가셨어요?”“아, 은정 씨랑 저녁이라도 같이 먹을까 하고요.”대답과 함께 전동하는 자연스럽게 소은정의 핸드백을 받아들었다.누가 봐도 다정한 커플의 모습에 박수혁은 호흡마저 거칠어졌다.뭐야? 두 사람 벌써 이렇게까지 친해진 거야?핸드백까지 뺏긴 소은정은 이대로 전동하의 제안을 거절하면 상대의 입장이 난처해질 게 분명하니 결국 고개를 끄덕이는 수밖에 없었다.소은정이 자리를 뜨려던 그때, 누군가 그녀의 손목을 덥썩 잡았다.분노가 그대로 느껴질 정도로 강력한 파워에 소은정이 불쾌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바다처럼 깊은 박수혁의 눈동자는 폭풍우를 앞둔 듯 이상하리만치 고요했다.“두 사람... 무슨 사이야?”뜬금없는 질문에 자리에 있는 모든 사람의 눈동자가 휘둥그레졌다.전동하를 바라보는 박수혁은 말 그대로 피가 거꾸로 솟는 기분이었다. 소은정의 입에서 나온 답이 그의 일말의 희망마저 잘라버릴까 두려웠지만 이대로 찜찜하게 두 사람을 보낼 수는 없었다.반면
소은정이 수건을 받으려던 그때, 전동하가 앞으로 다가왔다.“내가 닦아줄게요.”전동하의 얼굴에는 평소와 똑같은 부드럽고 따뜻한 미소가 걸려있었지만 왠지 그 미소에서 그 어떤 온도도 느껴지지 않았다.소은정이 본능적으로 고개를 피하고 신나리가 눈치껏 끼어들었다.“제가 할게요. 여자 머리는 잘 안 만져보셨잖아요!”10분 뒤, 머리가 대충 마른 뒤 장학준이 다시 헬스장으로 들어왔다.“가실려고요? 다음에 다시 와주세요...”“그럼 앞으로 제 친구 잘 부탁드릴게요.”“그럼요. 은정 씨 친구인데 VVIP급으로 대접해 드려야죠.”탈골된 팔에서 느껴지는 통증으로 얼굴이 식은땀 범벅임에도 아부의 미소를 잃지 않는 장학준의 모습에 소은정은 몰래 혀를 내둘렀다.“아, 그리고 병원 꼭 가봐요. 팔 한번 빠진 거 그대로 내버려두면 또 빠지니까.”소은정의 말에 방금 전 치욕적인 대결을 떠올린 장학준이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헬스장을 나서고 소은정의 표정을 살피던 전동하가 그녀를 위해 차문을 열어주었다.살짝 망설이던 소은정이 입을 열었다.“전 나리 씨 회사까지 데려다줄 거예요. 대표님은 바쁘시면 먼저 가보세요.”소은정의 말에 전동하도 당황한 듯 흠칫했다. 예리한 전동하는 의도적으로 그를 밀어내는 소은정의 태도를 바로 눈치챘다.신나리 또한 소은정의 말에 따라 쪼르르 조수석에 탔다.고개를 푹 숙인 채 감정을 정리하던 전동하가 애써 침착한 목소리로 물었다.“혹시 화났어요?”화냤냐고? 내가? 내가 왜? 전동하의 말 때문에? 아니야. 오히려 전동하한테 고마워해야지. 이번 기회에 박수혁을 완전히 떨궈낼 수도 있으니까. 그런데 왜... 왜 기분이 안 좋은 거지?하지만 소은정은 싱긋 미소를 지었다.“왜 그렇게 생각해요? 제가 왜 화를 내야 하죠?”“제가 저희 두 사람 관계를 오해하도록 대답했으니까요.”전동하의 솔직한 대답에 소은정도 당황하기 시작했다.뭐야? 설마 내가 아직도 박수혁한테 미련이 남았다고 생각하는 거야? 그래서 전동하의 말에 화를 내고 있다고? 그럴
소은정의 차.소은정이 차에 타자 마침 통화 중이던 나리가 물었다.“임 대표님 회사로 들어오셨데요. 저녁 식사 같이 하자시는데 다음으로 미룰까요?”신나리의 질문에 소은정이 고개를 저었다.“아니요. 마침 임 대표님한테 부탁할 것도 있고 같이 먹자고 해요.”“응. 시간 괜찮데. 대표님한테 부탁할 것도 있다는데?”회사 대표와 너무 편한 말투로 말하는 신나리의 모습에 소은정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뭐지? 거성그룹은 사내 분위기가 좀 프리한 스타일인가?잠깐 망설이던 소은정이 시험조로 물었다.“거성그룹에서 지낼만 해요? 우리 회사 옮기는 건 어때요?”“에이, 아니에요. 회사에 정이 워낙 많이 들어서. 사실 임 대표도 우리 연구팀 일원이었어요. 뭐 결국 실력 부족으로 경영 쪽으로 방향을 틀긴 했지만 뭐 결론적으로 정확한 선택이었죠?”싱긋 미소를 짓는 신나리의 모습에 소은정은 고개를 끄덕였다.아, 다들 창립 멤버였구나.그제야 돈 보기를 돌 보듯 하고 임춘식과 허물없이 지내는 신나리의 모습이 이해가 가는 소은정이었다.잠시 후, 차량은 거성그룹 건물 앞에 도착하고 신나리가 다시 임춘식에게 전화를 걸며 뒷좌석으로 자리를 옮겼다.통화를 마치고 5분도 채 되지 않아 임춘식이 부랴부랴 건물에서 달려나왔다. 부쩍 수척해진 그의 모습에 소은정이 걱정스러운 듯 물었다.“많이 피곤하신 것 같은데 식사 괜찮으시겠어요?”소은정의 질문에 손바닥으로 얼굴을 한번 쓸어내린 임춘식이 대답했다.“아무리 바빠도 밥은 먹어야죠.”임춘식 역시 뒷좌석에 타고 피식 웃던 소은정이 시동을 걸려던 그때 조수석 문이 다시 열렸다.잔뜩 굳은 표정의 박수혁이 그녀의 차량 조수석에 털썩 주저앉았다.뭐야? 간 거 아니었어? 지금쯤 태한그룹 사무실로 돌아가 잡히는 물건을 전부 부수고 있을 줄 알았는데...소은정의 의아한 표정에 임춘식이 어색하게 미소를 지었다.“아, 그게... 마침 우연히 문 앞에서 만나서요. 식사 같이해도 괜찮죠?”물론 우연히 만났다는 건 거짓말이었다. 출장 때문에
소은정이 술을 한 모금 마시고 임춘식은 술을 아예 원샷했다.한편 소은정의 옆에 앉은 박수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소은정을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그 뜨거운 눈빛에 불편해진 소은정 역시 고개를 돌릴 수밖에 없었다.뭘 그렇게 보는 거야.“왜 그렇게 뚫어져라 봐?”타이 없이 셔츠 첫 번째 단추를 풀어헤친 박수혁은 평소보다 훨씬 캐주얼한 모습이었다. 셔츠 사이로 깔끔한 쇄골 라인이 드러나 박수혁의 차가운 분위기에 섹시함을 더해주고 있었다.소은정의 질문에 박수혁의 눈동자가 일렁였다.“네가 먼저 본 거 아니었나?”날 봤으니까 내가 널 보고 있다는 걸 눈치챈 거겠지.차가운 목소리로 억지를 부리는 박수혁의 모습에 소은정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하, 말을 말자, 말을.소은정이 말없이 눈을 흘긴 뒤 임춘식을 향해 미소를 지었다.“자율주행 프로젝트는 어떻게 진행되고 있어요?”소은정의 질문에 임춘식은 바로 흥분한 듯 눈을 반짝였다.“비록 저희가 가장 먼저 시작한 기술 분야는 아니지만 핵심 기술은 이미 세계 최고 레벨에 달했다고 장담할 수 있습니다.”“테스트도 진행한 건가요?”소은정이 흥미로운 듯 눈썹을 치켜세우자 임춘식이 고개를 끄덕였다.“네. 스마트 칩에 센서 시스템을 추가했는데 엔진과 브레이크와 연동이 가능해요. 해외 자동차 개발센터를 돌아다니며 현재 기술 상태에 대해 알아봤는데 현재 자율주행 센서 기술은 자동차 앞에 있는 장애물에 따라 가속과 감속을 결정하죠. 하지만 저희는 달라요. 스마트 칩 덕분에 시속 180km까지 달릴 때도 3초만에 브레이크가 가능해요. 안정성이 추가된 거죠.”임춘식의 깔끔한 설명은 다단계처럼 알 수 없는 흡입력을 가지고 있었고 신나리도 소은정도 푹 빠져들고 말았다.뛰어난 성과에 싱긋 미소를 짓던 소은정이 임춘식의 빈 술잔에 술을 채워주었다.“수고 많으셨어요.”“아닙니다.”임춘식이 손을 내저었다.화기애애한 분위기속, 술잔을 돌리던 박수혁이 불쑥 끼어들었다.“레이싱카의 브레이크 원리를 일반 차량에 적용시키는
신나리의 설명에 소은정과 박수혁 모두 놀란 표정을 지었다.특히 항상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는 박수혁의 눈동자에도 놀라움이 스쳤다.생각지도 못한 성과이긴 했다. 현재 기술의 국한서을 뚫고 말 그대로 혁신을 이루어냈으니 아마 세계 최초 타이틀이 붙는다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깜짝 놀란 듯한 두 사람의 모습에 그제야 임춘식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사실... 이 소식은 조금 있다가 발표하려고 했는데 나리가 먼저 언급했으니까 저도 숨기지 않을게요. 비록 설명에는 성공했지만 공중에서 비행하는 자동차라... 윤리적으로도 그렇고 교통법 관련해서도 그렇고 아직 넘어야 할 산이 많아요.”솔직한 임춘식의 말에 소은정이 미소를 지었다.“아니요. 이 정도 혁신을 이루었다는 자체가 기적이에요. 절차적인 문제는 차차 해결하면 되는 거죠.”“그렇죠. 자, 한 잔 하시죠.”소은정이 술잔을 들고 박수혁도 이례적으로 술잔을 들었다. 술잔이 부딪히는 맑은 소리가 들리고 임춘식은 술잔을 깨끗하게 비웠다.식사 자리가 무르익고 임춘식은 기분이 좋은지 연거푸 술을 마셨고 신나리는 사진을 찍어 연락조차 닿지 않은 소은찬에게 문자를 보냈다.오고가는 술잔에 역시 몇 잔을 비운 소은정은 술기운이 올라오는 건지 머리가 어지럽고 배도 싸르르 아파오기 시작했다.살짝 비틀거리며 복도 끝쪽에 있는 화장실로 향한 소은정은 정신이 번쩍 드는 기분이었다.뭐야! 생리 터졌잖아!뭐지? 왜 며칠이나 빨리 온 거지? 술을 마셔서 배가 아픈 건가 했더니 생리통이었어?게다가 설상가상으로 오늘 소은정은 흰 스커트를 입은 상태였다. 스커트는 어느새 붉게 물들어 레스토랑 밖으로 나가는 것도 불가능했고 휴대폰은 룸 안에 있어 다른 누군가에게 연락을 하는 것도 불가능했다.대충 엉덩이 부분을 가릴 가디건 조차 없는 상태...일단 비틀거리며 화장실칸에서 나온 소은정은 세면대 거울 속 비친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았다.헬스를 마치고 샤워까지 끝낸 터라 화장기 하나 없는 얼굴이었지만 생얼도 완벽한 모습이었다.이런 내
소은정이 두 손을 올려 박수혁의 어깨를 밀어냈지만 이 정도 힘은 박수혁에게 간지러움을 태우는 거나 마찬가지였다.욕이라도 하고 싶었지만 괜히 입을 벌려 박수혁의 혀까지 소은정의 입속을 헤집기 시작했다. 짙은 와인 냄새에 소은정까지 취하는 기분이었다.소은정이 짜증스럽게 주먹으로 소은정의 가슴을 내리쳤지만 돌아온 건 더 강렬한 키스뿐이었다.박수혁의 머릿속에는 소은정을 그의 것으로 만들고 싶은 마음뿐이었다.사실 어제까지만 해도 박수혁은 언제까지고 기다릴 수 있다고 생각했었다. 이렇게 꾸준히 그녀를 향한 마음을 보여준다면 언젠가 소은정도 흔들릴 것이라 생각했으니까.하지만 오후, 헬스장에서 함께 있는 소은정과 전동하를 본 순간 그의 알량한 희망조차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다.왜? 왜 저딴 남자한테 웃어주는 거야!박수혁의 뼛속까지 자리잡은 소유욕이 봇물 터지듯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문득 박대한의 말도 틀리지 않다는 생각이 들 지경이었다.소은정을 가질 수 있다면 정당하지 않은 방법이라도 사용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박수혁은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하며 임춘식을 시켜 소은정을 불러냈었다. 만약 소은정이 자리에 나오지 않았다면 어쩌면 정말 다른 추잡한 수작을 썼을지도 모른다.하지만 다행히 소은정은 약속에 응했고 덕분에 비겁한 짓은 하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에 박수혁은 다행이라고 생각했다.한편, 소은정은 질식할 것 같은 기분에 박수혁의 혀를 꽉 깨물었다. 순식간에 피비린내가 입안에 확 퍼졌다.어때? 이래도 안 비킬 거야?하지만 1초간 잠깐 흠칫하던 박수혁은 다시 더 거칠게 밀고 들어왔다. 게다가 소은정을 번쩍 안아들어 세면대에 앉히기까지 했다.드디어 소은정과 박수혁의 눈이 마주치고 박수혁의 거친 숨결이 소은정의 얼굴을 간지럽혔다. 결국 소은정은 손을 뻗어 박수혁의 머리채를 잡아당기기 시작했다. 순간 욕망으로 가득하던 박수혁의 눈동자가 흔들리고 결국 자연스레 고개가 뒤로 꺾이고 말았다.겨우 박수혁에게서 벗어난 소은정이 소리쳤다.“정신 좀 차려!”소은정의 말
당황하던 박수혁은 공주님 안기로 소은정을 번쩍 안아들었다.이, 이렇게 안으면 더 흐른다고!!박수혁의 품에 안긴 소은정이 짜증스레 소리쳤다.“재킷이나 내놔! 내가 알아서 걸을 테니까!”하지만 곧이어 박수혁의 단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안 돼. 나도 추워!”사실 춥다는 건 거짓말이고 이렇게 좋은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은 마음이 컸다.한편 소은정은 이대로 기절이라도 하고 싶은 기분이었다. 이게 무슨 망신이야, 정말.하지만 더 이상 욕할 힘도 발버둥칠 힘도 남아있지 않아 이를 꽉 개물고 고개를 돌려버렸다.소은정을 안아든 박수혁의 입가에 묘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박수혁은 룸으로 다시 돌아가지 않고 바로 차로 향했다.여전히 욱신거리는 생리통에 소은정의 얼굴은 핏기 하나 없이 창백해진 상태였다.평소였다면 미리 진통제라도 준비했을 테지만 예상일보다 며칠이나 일찍 온 생리 때문에 미처 준비도 하지 못한 상태다.정신이 흐릿해진 소은정의 눈앞에 어딘가 조급해 보이는 박수혁의 얼굴이 드리웠다.하, 연기는...곧 차량이 움직이고 소은정은 두 눈을 감았다.레스토랑에서 그녀의 본가까지는 약 20분 정도 거리, 하지만 체감상 10여 분을 달렸을 뿐인데 차는 멈춰서고 말았다.그리고 누군가 다시 그녀를 끌어안아 엘리베이터에 탔다.박수혁의 집은 아니었지만 왠지 익숙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박수혁의 수많은 부동산 중 하나겠거니 하는 생각과 함께 소은정은 다시 눈을 감았다.잠시 후, 집에 도착해 소파에 소은정을 내려놓은 박수혁은 그녀의 이마를 짚어보기 시작했다.박수혁의 행동에 겨우 눈을 뜬 소은정이 그를 노려보았다.“열 나는 거 아니야. 휴대폰이나 좀 줘. 데리러 오라고 하게.”하지만 그런 그녀의 말을 들었는지 말았는지 박수혁은 말없이 집을 나가버렸다.혼자 남은 소은정은 정신을 차리려 애썼다.커다란 집은 심플하지만 우아한 그레이톤으로 인테리어가 되어 있었다. 깔끔하게 정리된 걸로 봐서는 정기적으로 청소를 해주는 사람이 있는 듯 싶었다.깊은 숨을 들
오랜만에 만난 두 사람은 서로 부둥켜안고 눈물을 흘렸다.문준서는 그녀의 눈물을 보고 죄책감에 얼굴을 들 수 없었다.새봄이가 점차 울음이 잦아들자 그는 고개를 숙이고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었다.새봄이는 길게 심호흡하고 감정을 식혔다.준서에게는 묻고 싶은 게 정말 많았다.문준서는 울어서 빨갛게 부은 새봄이의 눈을 보고 웃으며 말했다.“커피 계속 마실 거야? 안 마실 거면 우리 집에 올래? 내가 맛있는 커피 만들어 줄게!”새봄이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준서는 소녀의 손을 잡고 핸드백을 챙긴 뒤, 밖으로 나갔다.커피숍 직원들마저 잘 어울리는 한 쌍이라고 부러운 눈빛을 보냈다.새봄이는 그와 손을 잡고 걷고 있자 저도 모르게 가슴이 설레었다.어릴 때는 항상 손을 잡고 다녔는데 지금은 어딘가 어색했다.어린 문준서는 항상 새봄이를 우선으로 생각했는데 지금도 그럴까?문준서는 소녀가 기억하는 어린 준서가 아니었다. 그의 거대한 뒷모습은 왠지 모를 안정감을 주었다.문준서가 웃으며 소녀에게 물었다.“뭘 그렇게 뚫어지게 봐?”“키 몇이야?”“192, 만족해?”새봄이는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을 느끼며 고개를 돌렸다.“내가 키 큰 사람 별로라고 하면 뼈라도 깎을 거야?”문준서는 웃으며 소녀의 손을 잡아끌었다.“응. 네가 집도해.”새봄이도 덩달아 웃었다.10여 년을 떨어져 지내다 보니 처음에는 정말 보고 싶었지만 점차 감정은 옅어져 갔다. 매번 부모님에게 준서의 안부를 물을 때면 그들은 머리만 흔들었다.그 뒤로 새봄이는 더 이상 준서를 찾지 않았다.말없이 사라진 그를 원망한 적도 있었다.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면 그가 해외에서 무사히 지냈으면 하는 바람이 더 컸던 것 같았다.문준서는 길가에 세워진 스포츠카로 다가갔다.차도 주인을 닮아 검은색으로 차분하고 화려하지 않은 디자인이었다.처음 그와 눈이 마주쳤을 때, 새봄이는 그가 문준서라는 것을 한눈에 알아보았다. 티없이 맑고 순수했던 눈동자는 어릴 때와 비교해 변한 게 전혀 없었다.하지만 소녀
새봄이가 떠난 뒤로 전동하는 한숨을 달고 살았다. 옆에서 지켜보는 소은정은 어이가 없었다.학교 생활은 생각했던 것보다 따분하지 않았다.어릴 때부터 곱게 자란 새봄이지만 거만하지 않고 성격이 활발했기에 많은 친구를 사귀었다.아이는 가끔 친구들을 집에 초대해서 파티를 벌였다.그리고 혼자 있는 시간도 충분히 즐겼다.가끔 센 강변에 가서 산책도 하고 석양을 감상하며 오리에게 먹이를 주기도 했다.그런데 가끔 혼자 있을 때면 누군가가 지켜보는 느낌이 들기도 했다.하지만 크게 걱정하지는 않았다. 주변에 수시로 경호원들이 지키고 있었기 때문이다.새봄이는 아이스크림을 들고 홀로 석양 아래에서 산책을 즐겼다. 손에는 엄마를 위해 준비한 선물인 한정판 명품백이 들려 있었다.이목구비가 화려한 동양소녀가 길을 걷고 있자 무수히 많은 시선들이 따라다녔다.하지만 프랑스의 치안은 별로 좋지 못했다.새봄이가 아이스크림을 먹는 사이 녹색 트레이닝복을 입은 남자가 소녀의 핸드백을 가로채서 사람들 틈으로 도주했다.놀란 새봄이는 다급히 남자의 뒤를 따라가며 소리쳤다.“도둑이야!”안타깝게도 유럽에서 비슷한 사건은 비일비재하게 벌어졌다.아무도 핸드백을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싶지 않아했다.새봄이는 자신이 안전하다는 것을 알기에 끝까지 남자를 쫓아갔다.수염이 덥수룩한 남자는 뒤를 돌아보며 뭐라고 욕설을 지껄이더니 골목으로 진입했다.새봄이가 쫓아갔을 때, 남자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소녀가 망연자실한 얼굴로 서 있을 때, 갑자기 옆 골목에서 사람이 튀어나왔다.남자는 바로 새봄이의 목을 노리고 달려들었지만 손이 소녀에게 닿기도 전에 누군가가 달려와서 남자를 걷어찼다.새봄이는 겁에 질린 얼굴로 뒤를 돌아보았다.훤칠하고 잘생긴 동양인 남자가 등 뒤에 서 있었다.어딘가 익숙한 느낌이 들었다.검은 정장을 입은 남자가 새봄이의 앞으로 다가갔다.그에게서 익숙한 우드향이 풍겼다.그는 천천히 소녀를 향해 손을 뻗었다. 손가락이 가늘고 예쁜 손이었다.녹색 트레이닝복을 입은 강
전동하는 그날 밤 새봄이에게 해외유학 얘기를 꺼냈다.새봄이는 고민도 해보지 않고 바로 동의했다.어디에 가고 싶냐고 물었더니 프랑스만 제외하고 아무데나 괜찮다고 했다.전동하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준서 때문에 프랑스에 가기 싫은 거야?”새봄이가 눈시울을 붉히며 말했다.“걔가 누군데? 하나도 기억 안 나! 걔 얘기하지 마!”아이는 억울함을 토로했다.줄곧 아이의 옆을 지켜주던 오빠는 어느 날 갑자기 사라졌다.마치 꿈을 꾼 것 같았다.더 이상 아이의 뒤꽁무니를 따라다니던 오빠는 없었다.아이는 준서가 보고 싶었지만 준서는 떠날 때 편지 한장 남기지 않았다.전동하는 안쓰러운 표정으로 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새봄이도 이제 컸잖아. 준서도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어. 연락이 없던 것도 그럴만한 사정이 있어서였어. 나중에 준서 만나도 너무 준서를 욕하지 마.”새봄이는 고집스럽게 고개를 돌려버렸다.부모의 사랑만 받고 자란 아이는 갑작스러운 이별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가끔 딸이 울기라도 하면 전동하는 항상 달려와서 딸을 위로해 주었다.태어날 때부터 다이아수저를 물고 태어난 아이는 누구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었다.그런데 어느 날 오빠가 보고 싶었던 아이가 준서에게 전화를 걸었을 때, 없는 번호라고 나왔다.아이는 버려진 느낌을 받았다.출국이 결정되었으니 전동하는 아이가 다닐 학교를 알아보았다.결국 새봄이는 유럽을 선택했다.마치 누군가가 거기서 자신을 기다리는 것처럼.떠나기 전, 아이는 일곱 남자친구와 작별인사를 나누었다.아이가 출국하는 날, 온가족이 나와서 새봄이를 배웅햇다.새봄이는 딱히 슬프거나 아쉬운 티를 내지 않았다. 마치 부모님 손을 잡고 해외여행을 가는 것처럼 자연스러웠다.아이는 활짝 웃으면서 가족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전동하와 소은정은 영지까지 데리고 같이 프랑스로 출국하기로 했다.일가족이 탑승수속을 마치고 돌아서는데 뒤에서 급박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새봄아!”고개를 돌리자 하얗게 질린 얼굴로 허겁지겁 이쪽
눈 깜짝할 사이에 새봄이는 어엿한 숙녀로 자라났다.고등학교에 들어가자마자 그녀에게는 남자친구가 생겼다.새봄이는 집으로 돌아와서 이 소식을 소은정에게 알렸다.소은정은 딱히 말리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어렸을 때 이런저런 경험을 다 해보는 게 아이에게 좋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그리고 새봄이가 진심일 거라고 생각하지도 않았다.하지만 이 사실을 알게 된 전동하는 밤새 잠을 이룰 수 없었다.그는 아이와 대화를 나눠봐야겠다고 마음먹었다.새봄이의 반응은 시큰둥했다.“친구들이 다들 남자친구를 사귀는데 나만 솔로면 유행에 뒤떨어지잖아. 그래서 만나보기로 했어. 그리고 너무 이른 나이도 아니잖아! 중학교 때부터 연애하는 애들도 많다고!”전동하는 인내심 있게 아이를 타일렀다.“그래도 넌 아직 너무 어려. 밖으로 나가 사람들과 더 많이 접촉해 보면 알게 될 거야. 남자는 다 믿을 놈이 못 돼….”“그럼 엄마가 아빠를 만난 것도 사랑에 눈이 멀어서 만난 거겠네?”어릴 때부터 말싸움에는 절대 지지 않던 새봄이는 미소가 소은정을 닮은 예쁘고 사랑스러운 소녀로 성장했다.그리고 총기 있는 눈동자와 말빨, 그리고 큰 키는 전동하를 많이 닮았다.소은정은 어디 하나 빠지지 않는 딸이 나중에 남자 여럿을 울릴 거라는 것을 알기에 아이에게는 사랑을 하면 꼭 아빠랑 엄마처럼 서로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라고 강조했다.새봄이는 전동하가 말이 없자 달려가서 그의 팔짱을 꼈다.“아빠, 걱정하지 마. 그냥 연애는 어떤 느낌인가 궁금해서 해보는 거야.”“그래서 그 남자친구는… 어떤 사람이야?”“어느 남자친구를 말하는 거야?”전동하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물었다.“몇이나 사귀었는데?”“다른 애들은 다 한명하고만 사귀는데 난 다른 애들 따라하기 싫어. 그래서 하루에 한 명, 일주일에 일곱 명이야! 주일을 정해서 따로 만나!”새봄이가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전동하는 입을 뻐금거리며 한참을 말을 잇지 못했다.그래도 다행인 건 사랑에 깊이 빠지는 스타일은 아니라는 점이랄까.
다른 CCTV에서 정황이 포착되었다. 직원이 그쪽으로 다가가다가 발을 헛디디며 하마터면 술잔을 쏟을 뻔한 정황이었는데 그때 잔을 안쪽으로 옮기며 위치가 바뀐 것 같았다.독극물 검사결과도 나왔다.청산가리였다.심청하의 몸에서 나온 독극물과 약병에 있던 독극물 성분이 일치했다.살인을 계획했던 심청하가 제 꾀에 당한 상황이었다.아마 그녀는 죽을 때까지 어디서 문제가 생겼는지 몰랐을 것이다.형사들은 밤을 새워 CCTV를 확인하면서 이 약병의 출처가 남유주의 큰어머니라는 사실을 밝혀냈다.그렇게 큰어머니가 경찰에 소환되었다.큰어머니는 숨김없이 사건의 경과를 진술했는데 심청하에게 협박을 당했다는 내용이었다.하지만 사람을 해치고 싶지 않아서 넘어지는 틈을 타 약병을 바닥에 버렸다고 했다.심청하가 포기를 못하고 스스로 행동에 옮기다가 제 꾀에 당했다는 말도 했다.형사가 인상을 찌푸리며 그녀에게 물었다.“그랬다는 증거 있나요?”“당연히 있죠.”큰어머니는 딸인 남연을 호출했다.“형사님이 묻는 대로 사실을 대답해! 떨지 말고!”남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핸드폰을 꺼냈다.그리고 차 안에서 심청하와 대화했던 녹음을 재생했다.“그 여자가 아빠랑 엄마를 죽이겠다며 협박했어요. 그 파티 초대장은 제가 거금을 주고 산 거예요. 우린 태한그룹 사모님과 친척관계에요. 평소에 왕래는 하지 않지만 사람을 죽이고 싶지는 않았다고요!”남연은 울음을 터뜨리며 말했다.“형사님, 제가 아는 건 다 얘기했어요.”형사는 그녀의 진술에서 이상한 점을 포착했다.“전에 남유주 씨를 해하려 한 적이 있죠?”“그래! 너도 직접 남유주를 죽이려고 했잖아? 그건 왜 쏙 빼고 말해?”녹음본에 담겼던 심청하의 목소리였다.의심을 사지 않기 위해 파일은 편집을 거치지 않았다.남연은 고개를 푹 숙이고 사실을 털어놓았다.“그것도 심청하가 협박해서 했어요. 하지만 언니 앞에서 이미 잘못을 인정했고 사과도 했어요. 언니는 저를 용서했고요.”형사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이건 박수혁 대표와
심청하는 한참 침묵하더니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무슨 방법을 쓰든 그 사람들과 걔를 만나게 해. 안 그러면 이 약은 네 부모님 배 속으로 들어갈 거야!”남연은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고개를 떨어뜨렸다.“알겠어요.”결국 그녀는 겁에 질린 얼굴로 명령을 받아들였다.며칠 뒤, 마침 좋은 기회가 찾아왔다.오늘은 자선회가 열리는 날이었는데 박수혁은 남유주의 기분을 풀어주기 위해 그녀와 함께 자선회에 참석했다.그리고 자선회에서 많은 보석과 골동품을 구매하며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다.자선회가 끝나고 파티가 이어졌다.남연의 부모는 힘겹게 초대장을 입수했다.심청하는 파티홀에서 이어질 장면을 기대하고 있었다.하지만 남연의 부모는 뒤늦게 파티에 참석했고 그들이 현장에 도착했을 때는 파티가 다 끝난 뒤였다.심청하는 분노를 주체할 수 없었다.이번 기회를 놓치면 다음에는 언제가 될지 장담할 수 없었다.SC그룹에서는 지분 사건으로 그들을 물고늘어질 것이다.본사에서 움직이기 전에 남유주를 제거해야 했다.잠시 후, 남유주의 큰어머니는 사람이 없는 곳에 숨어들었다.그리고 약을 꺼내 술병에 쏟아넣으려고 했다.마침 취객이 그녀의 어깨를 부딪히고 지나가며 그녀가 바닥에 쓰러졌다.남유주 큰어머니가 고통에 신음을 흘리자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되었다.약병은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구석진 곳으로 굴러갔다.심청하는 싸늘한 눈빛으로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정말 뭐 하나 일을 제대로 하는 게 없는 일가족이었다.남유주의 큰아버지는 얼굴이 하얗게 질려 다급히 다가가서 아내의 손을 잡고 구급차를 호출했다.호텔에 미리 대기하고 있던 의료진이 달려왔고 큰어머니를 들것에 실어 병원으로 호송했다.심청하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사람들이 모두 흩어지고 그녀는 구석진 곳으로 가서 아무도 안 보는 틈을 타 약병을 손에 쥐었다.그리고 기회를 봐서 약을 와인에 쏟고 흔들었다.모든 게 끝난 뒤, 심청하는 손에 난 땀을 닦았다.이미 살인을 하기로 마음먹은 그녀였지만 직접 모든 일을 끝내고 나니
남유주는 미소를 지으며 소은정과 박수혁 사이를 스스럼없이 얘기했다.남유주는 지나간 둘의 과거를 신경 쓰지 않았다.박수혁은 소은정에게 다른 마음이 없었고 그들은 각자 다른 사람과 행복한 삶을 살기로 했다.소은정은 미소를 지으며 남유주가 건넨 상자를 열었다.안에는 팔찌가 있었다, 반짝이며 아름다운 화려한 목걸이의 모든 보석은 정교하게 다듬어져 있었고 본연의 미와 섬세함의 아름다움을 결합하는 느낌이 들게 했다.그녀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몇 년 동안 이런 것을 모으기를 좋아했는데... 고마워요, 진짜 마음에 들어요." 남유주는 화해의 의미로 소은정에게 팔찌를 건넸다.소은정은 미소를 지으며 팔찌를 착용했다."과거는 과거일 뿐이니 우린 서로 용서하는 게 어때요?"소은정은 머리를 끄덕였다. 그녀의 눈가에 눈물이 고였다."안타깝게도 난 어떤 선물도 준비하지 못했네요…"그녀는 가방에서 계약서를 꺼내고 남유주에게 건넸다.남유주는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서류 내용을 살펴보았다."이게 뭐예요?""원래는 소찬학의 주식이었지만 몇 년 전에 회사 소유로 되었어요. 아빠가 나이도 있고 해서 주식 대신 배당금을 주기로 했었어요, 근데 더는 그 사람의 것이 아니니까, 아빠가 유주 씨한테 넘기고 싶다고 하더라고요. 우리가 주는 작은 선물이니까 받아줬으면 좋겠어요." 얼굴이 굳었던 남유주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그녀는 계약서를 다시 내밀었다."전 받지 않을래요.""유주 씨, 이게 얼마나 큰 돈인지 몰라요? 술집을 사려고 했던 거 아니었어요? 이 돈으로 그 건물 같은 거 열 개는 살 수 있어요."소은정은 인내심을 가지고 설명했다.남유주는 웃음을 참고 머리를 흔들었다."이걸 받으면 소찬학이 내 생부라는 것을 인정하는 거잖아요, 끊을 수 없는 혈연관계를 받아들여야 하고, 내가 관여하지 않은 과거의 강탈과 억압을 직면해야 해요. 태어난 이래로 부모가 없는 존재로 살아왔고, 아직 그것을 원하지 않아요. 나의 아버지로 인정하고 싶지도 않고 소씨 가문과 혈연적인 관계가
거침없이 내뱉는 심청하의 태도에 소찬식이 얼굴이 어둡게 변했다.옆에서 듣고 있던 소은정이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소씨 가문의 주식은 애초에 저희 집안 거에요. 그리고 둘째 삼촌이 직접 주식을 그룹 소유로 돌리겠다고 서명까지 했어요. 자기는 주식 배당만 챙기겠다고, 회사를 떠난 지금 삼촌한테 배당금을 주는 것만으로도 감사하게 여겨야죠. 이모가 한 계산은 너무 터무니없어요. 이 주식들은 재산 분할과 관련이 없어요. 설령 분할을 한다 해도, 먼저 그룹의 이익을 보호하는 게 우리의 원칙이고요."심청하는 얼굴이 이상하게 변했다."저는 어떻게 해요? 그이가 감옥에 가고, 우리는 손가락 빨면서 굶어 죽으라는 거예요? 주식을 전부 넘겨주세요, 그럼 더는 따지지 않을게요!" 그녀는 무례한 태도로 단호하게 앉아 있었다.소찬식의 표정이 음울하게 어두워졌다, 그는 복잡한 눈빛으로 그녀를 한번 쳐다보았다."그만 돌아가세요, 돌아가서 경찰 소식 기다리세요. 찬식이 회사 자금을 자기 돈처럼 써버렸고 수억 달러를 횡령했어요. 그럼에도 그룹이 이 돈에 대해 따지지 않는 것만으로도 고맙게 생각하세요. 어떻게 돈을, 주식을 요구할 수 있어요?" "나는 찬식 씨가 아니에요, 다른 사람들 사정은 모르겠고, 누가 날 어떻게 생각하든 관심없어요."그는 말을 마친 뒤 옆에 서 있는 집사에게 눈짓했다."손님을 내보내.""네."집사의 대답에, 심청하는 일어서서 조급하게 말했다. "아주버님, 그렇게 말씀하시지 마세요. 형제들끼리 어떻게 이렇게 매정하게 굴어요? 이 일을 언론에 알리면 어떻게 될지 저도 기대되네요, 아마 언론도 이 일에 엄청난 관심을 둘 것 같거든요!"소찬식의 표정은 신경질적으로 굳어졌다, 눈빛이 차갑고 어둡게 변했다.공기 안에는 침묵이 깔렸다.소은정은 갑작스럽게 직감했다. 심청하가 예전과는 분위기가 많이 달라진 것을 눈치챘다.하지만 그들은 타협할 수 없었다. 한 푼이라도 더 주면, 그녀는 주제 파악을 못 하고 더 달라고 요구할 것이다.그녀는 절대로 이번 한
심청하의 얼굴이 새파랗게 변했다."다 해봐야죠, 우선 믿을 만한 변호사를 찾아서 형량부터 줄여줘요."옆에서 듣고 있던 소은정이 참지 못하고 가볍게 웃으며 소리를 냈다.소은정이 입을 열었다."마침 잘 오셨어요, 우리도 지금 삼촌을 어떻게 구할지 토론하고 있었거든요!"심청하는 의아한 눈빛으로 소은정을 쳐다보았다. "그러면... 어떤 방법을 논의했는데?"전동하는 멋도 모르고 웃었다. 그는 소은정의 대답을 기다렸다.소은정은 청량한 목소리로 한숨을 쉬었다."사실 우리가 변호사를 찾아서 물어봤어요. 판결이 심하게 나면, 사형이 나올 수도 있다고 하더라고요, 어쨌든 두 사람을 죽인 거니까.그래도 방법이 있어요, 둘째 삼촌은 그때 혼인 상태였잖아요?법정에 나서서 전부 둘째 삼촌이 한 게 아니라고 증언하면 돼요. 삼촌은 줄곧 숙모랑 함께 있었고, 그런 일을 꾸밀 시간적 여유도 없었다고!"심청하는 갑자기 얼굴이 하얗게 질리더니 충격을 받은 표정으로 일어섰다."너... 나보고 거짓 증언을 하라는 거야, 말이 되니? 그거야말로 불법이야!"소은정은 차가운 눈빛으로 비웃었다."불법이라는 것도 알고 계셨네요? 근데 왜 저희 아버지한테 당당하게 그런 짓을 요구하는 거예요?"심청하는 그제야 자신이 소은정에게 당했다는 것을 깨달았다.화가 난 그녀의 얼굴이 붉어졌다."은정아, 너 말 이상하게 하는 구나, 내가 마음이 너무 급해서 나온 말을 꼬투리 잡는 거니? 그리고 너희 삼촌 아직 유죄 판결도 나지 않았어. 그러니까 우리가 조금 더 노력하면 돼."소은정은 눈썹을 찌푸렸다."그럼 혼자 잘 해보세요! 우린 응원이나 하고 있을게요!""너 지금 뭐하자는 거니?" 심청하는 화를 내며 소찬식을 바라보았다."진짜 이렇게 내버려두실 거예요?"소찬식의 눈빛이 어둡게 깔렸다."자기가 한 일에 대가를 치러야 하겠죠, 저희는 아무런 상관도 하지 않을 겁니다. 그러니 제수씨도 저희를 그만 찾아오세요."심청하는 소찬식의 태도가 이렇게 차갑고 딱딱할 줄은 몰랐다.그녀는 잠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