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편, 박수혁은 소은정과 함께 누워있는 이 순간이 너무나 소중해 제대로 눈도 붙이지 못한 상태였다.어떻게 얻은 기회인데 놓칠 수야 없지.소은정이 눈을 뜨자 박수혁의 눈동자에 웃음기가 실렸다.“굿모닝 자기야.”순간 흠칫하던 소은정이 샤샤샥 뒤로 물러났다.뭐야? 꿈이 아니었어?“자기는 개뿔!”벌떡 일어선 소은정이 바로 욕설을 내뱉었다.그래. 꿈일 리가 없지. 내가 이딴 꿈을 꿀 리가 없으니까. 내가 박수혁이랑 한 침대에서 밤을 보냈다고?한편, 팔베게를 해주던 박수혁은 허전해진 자신의 품을 아쉽다는 눈빛으로 내려다 보았다.소은정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비록 술을 마시긴 했지만 분명 필름이 끊기진 않았었다. 집으로 들어와 약도 챙겨먹고 샤워까지 하고 잘 때까지만 해도 박수혁은 없었는데... 도대체 언제 나타난 거야!“어... 어떻게 여기 있는 거야?”소은정의 굳은 얼굴에 박수혁이 차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약 사가지고 왔더니 안 보이더라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찾았는데 여기 있더라...”박수혁이 소은정의 팔을 잡으려는 듯 손을 뻗었지만 소은정은 질색하며 뒤로 몸을 뺐다.“여긴 내 오피스텔이잖아. 당신이 어떻게 들어온 거야!”소은정이 경계심 가득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 와중에 옷차림을 확인한 소은정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소은정에게 박수혁은 잊어야만 하는 남자일 뿐, 두 사람에게 함께 맞는 아름다운 아침 같은 건 존재하면 안 되는 상황이었다.소은정의 반응에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던 박수혁이 해명을 시작했다.“문 안 닫았었어, 너.”순간 할말을 잃은 소은정이었다.어제 문을 안 닫았었나? 순간, 머리끝까지 차오른 분노가 조금 식는 느낌이었지만 소은정은 질타를 이어나갔다.“정상적인 남자라면 그런 상황에서 조용히 문을 닫고 나갔을 거야. 이건 상식이라고.”소은정의 말에 박수혁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길 가는 사람 아무나 잡고 물어봐. 좋아하는 여자가 아파하고 있는데 그대로 가버릴 남자가 몇 명이나 되나.”하, 입만 살아서는.
”3년”, 소은정 입에서 “3년”이라는 단어가 나올 때마다 박수혁은 숨이 턱 막히는 기분이었다.그가 아무리 잘해줘도 그 단어만 나오면 모든 게 수포로 돌아가는 기분이었으니까.3년 동안 소은정에게 그가 어떤 존재였는지 지금의 박수혁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녀에게 사랑 한번 준 적 없다는 것 역시 잘 알고 있었다.부질없는 상상이라는 걸 알면서도 가끔씩 박수혁은 이런 생각을 하곤 했다. 만약 억지로 헌혈을 시키지 않았더라면. 한번이라도 소은정의 마음을 보듬어줬더라면 이런 결말은 아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 말이다.박수혁의 잘생긴 얼굴에 씁쓸한 미소가 피어올랐다.“나한테 상처주는 말만 골라서 하는 거야? 내가 그렇게 하지 않을 거라는 거 알면서.”한발 앞으로 다가선 박수혁은 깊은 눈동자로 소은정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네가 싫어하는 일은 절대 하지 않아.”부담스러운 눈빛에 한발 뒤로 물러선 소은정이 팔짱을 낀 채 비아냥댔다.“어떡하지? 당신이 하는 일이라면 난 다 싫은데?”단호하게 돌아선 소은정은 서랍장에서 돈뭉치를 꺼냈다.“자, 어쨌든 함께 하룻밤을 보냈으니까... 값은 치러야겠지?”억지로 박수혁의 주머니에 돈다발을 넣어준 소은정은 주방으로 향했다.순간 박수혁의 얼굴이 차갑게 굳었다.뭐야 이 돈은? 내가 호스트도 아니고!처음 느끼는 모욕감에 숨까지 가빠졌지만 그 상대가 소은정이라 딱히 화를 낼 수조차 없었다.부엌에서 물을 마시고 있는 소은정을 힐끗 바라보던 박수혁은 분노를 꾹꾹 누르며 다가갔다.“뭘 이렇게 많이 줘. 나 그렇게 비싼 남자 아닌데?”소은정의 입가에 장난스러운 미소가 피어올랐다.“나도 알아. 남은 건 팁이니까 받아둬.”하, 진정하자, 박수혁...이때 거실에 놓인 전화기가 울리고 소은정이 다가갔다.“여보세요?”“나예요.”익숙한 목소리에 소은정이 흠칫했다.“전동하 대표님?”전동하 대표가 이 번호는 어떻게 안 거지?한편, 전동하라는 이름에 박수혁의 표정이 다시 일그러졌다.머릿속에 무시무시하고 추잡한 온갖
하지만 곧 다시 아무렇지 않다는 표정을 지어보였다.“친구로서 그 정도는 물을 수 있잖아? 아, 혹시 어젯밤에 우리 두 사람 사이에 아무 일도 없었다고 남자친구한테 해명이라도 해줘야 하나?”박수혁의 말에 소은정은 오히려 당황스러웠다.그녀가 아는 박수혁이라면 지금쯤 문을 박차고 나가거나 그녀를 향해 욕이라도 퍼부어줬을 텐데.이상해, 이상하단 말이야... 사람이 너무 많이 변하면 죽는다던데...“아니, 그럴 필요 없어.”박수혁은 이를 악물었다.침착, 침착해야 해...겨우 이성을 유지하며 박수혁은 차분한 표정으로 말을 이어갔다.“난 네 모든 선택을 존중해. 하지만 난 네가 더 행복했으면 좋겠어. 뭐, 일단은 두 사람 사귄다니까 축복은 해주겠지만... 내가 언제나 기다리고 있다는 것만 기억해 줬으면 좋겠어.”숨도 쉬지 않고 말을 내뱉는 박수혁을 멍하니 바라보는 소은정이 고개를 갸웃했다.이 말투... 왠지 익숙한데?이때 박수혁이 말을 이어갔다.“너랑 나, 사적으로는 아무 사이도 아니지만 공적으로는 얽혀있는 일들이 많잖아. 남자친구가 괜찮대?”말끝마다 남자친구, 남자친구. 귀에 거슬렸지만 굳이 수정해 주고 싶진 않았다.차라리 이대로 오해를 하는 게 그녀에게도 박수혁에게도 나을지도.지끈거리는 머리를 꾹꾹 누르던 소은정은 그제야 방금 전 묘한 기시감의 정체를 깨달았다.박우혁!방금 전 박수혁이 했던 말들 쫑파티에서 박우혁이 했던 말과 거의 비슷했으니까.소은정이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당신이랑 우혁이... 가족이긴 하네. 닮았어.”뜬금없는 말에 의아하던 박수혁은 곧 그 말에 숨은 뜻을 눈치챘다.뭐야? 지금 날 우혁이 그 자식이랑 비교하는 거야? 내 연기가 부족했나? 충분히 제대로 했다고 생각했는데.“그 양아치랑 비교하지 말아줄래?말을 마친 박수혁이 발걸음을 옮겼다.“난 바로 회사로 갈 거야. 데려다줄까?”“아니, 괜찮아.”고개를 끄덕인 박수혁이 소은정의 집을 나서고 거실은 드디어 조용해졌다.혼자 남은 소은정은 바로 기사에게 전화를
박수혁의 질문에 잔뜩 흥분한 이한석의 목소리가 살짝 수그러들었다.“아직 사인은 안 하셨지만 동의는 하셨습니다.”저번 사건을 통해 박수혁은 태한그룹을 완전히 통제하는 데 성공했다. 앞으로 그 어느 주주도 감히 박수혁의 자리를 위협하지 못할 것이다.하지만 그 대가 역시 참혹했다. 지금 박수혁은 박씨 가문이라는 거대한 뒷배를 잃은 상태.그렇게 손주를 아끼던 회장님이셨는데 어쩌다...제삼자인 이한석마저 이 상황이 안타깝게 느껴질 따름이었다.그를 이 자리에 앉힌 장본인이 다시 그 자리에서 끌어내려고 하는 기분이 어떨지 이한석은 상상조차 가지 않았다.비록 다른 사람이 보기엔 박수혁은 가족에게까지 가차없는 냉혈한 그 자체일 테지만 오랫 동안 박수혁을 모셔온 이한석은 알고 있었다. 박수혁은 단 한 순간도 박대한을 진심으로 적으로 생각한 적이 없다는 걸.박수혁은 그저 박대한이 더 이상 태한그룹의 남은 세력을 이용해 소은정에게 상처를 주는 게 싫었을 뿐이었다.하지만 박대한은 달랐다.박대한은 태한그룹의 지분을 생판 남에게 넘겨주려고 했었다. 지분이 집안 사람에게 남아있는 한, 언젠가 박수혁에게 돌아갈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으니까.뭐, 결과적으로 박대한의 계획은 완벽하게 실패했지만.“대표님.”이한석이 우물쭈물하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말해.”“저희 쪽에서 먼저 굽히고 들어가는 게 어떨까요?”이한석의 말에 박수혁의 표정이 급격하게 어두워졌다. 비수처럼 꽂히는 박수혁의 차가운 시선을 견뎌내며 이한석이 침묵을 이어갔다.“어쨌든 한 가족이시잖아요. 회장님도 지금 당장은 화가 너무 나셔서 그러시는 걸 거예요. 다른 가족분들도 겉으로는 뭐라고 못하시지만 뒤에서는 다들 대표님 욕을 하실 겁니다.”그 이유가 어찌 되었든 박수혁은 자신을 직접 기른 스승이자 어른의 등에 칼을 꽂은 모양새가 되어버렸다. 지금은 승승장구하고 있지만 언젠가 박수혁이 위기에 빠진다면 유일하게 힘이 되어줄 수 있는 가족들 중 그의 편을 들어줄 사람은 한 명도 없을 것이다.가족들 사이에는
SC그룹.이른 아침 초대장을 받은 소은정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최근 큰 피바람이 불었던 태한그룹에서 갑자기 파티라니...게다가 금박이 박힌 초대장을 보아하니 창립 기념일보다 더 성대하게 준비한 듯 싶었다.뭐지?어딘가 이상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어디가 이상하다고 콕 집어 말할 수는 없었다.소은정이 망설이던 그때, 아버지 소찬식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네 오빠 여자친구랑 같이 집에 왔어. 오늘 일찍 퇴근해.”엥? 이렇게 빨리? 아직 휴가는 며칠 남았을 텐데.뭐, 소은정에게는 좋은 소식이었다. 회사를 혼자 이끌어나가야 한다는 부담감에 며칠 동안 잠까지 설친 소은정이었으니까.“네. 지금 바로 갈게요.”그 부담감에서 해방된 기분에 소은정은 날아갈 듯했다.그러고 보니, 한시연도 같이 왔다고 했지? 두 사람 정말... 결혼이라도 하려는 건가?친구인 한유라 생각에 마음이 편치 않았지만 인연이라는 게 본디 사람 마음대로 되지 않는 법. 소은정으로서는 소은호, 한시연 커플을 축복하는 수밖에 없었다.소은정이 집에 도착하고 차에서 내리기도 전에 집사가 싱글벙글 웃으며 그녀를 맞이했다.“오늘 오랜만에 집이 북적북적 하네요. 은호 도련님이 처음 여자친구를 집으로 데리고 오셔서 회장님께서 많이 기쁘신가 봅니다.”“아저씨도 기뻐 보이시는데요?”“그럼요. 제가 어렸을 때부터 봐왔던 분이니까요. 이대로 혼자 사시는 건 아닌가 걱정했었는데 다행입니다.”살짝 상기된 집사 아저씨의 표정에 소은정이 웃음을 터트렸다.집으로 들어간 소은정의 시야에 소찬식과 화기애애하게 대화를 나누는 소은호, 한시연의 모습이 들어왔다.연애란, 사랑이란 참으로 신기한 것이다.항상 차갑기만 하던 소은호를 저렇게 웃게 만들다니.“아빠, 저 왔어요. 오빠, 선배, 재밌게 놀았어?”“이리 와. 자, 네 미래의 새언니가 준비한 선물 좀 봐봐.”소은호의 옆구리를 쿡 찌르던 한시연이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사실 너희 오빠가 그 동안 너 수고했다고 특별히 고른 거니까 부담갖지 말고 가져.
”크흠.”이때 소찬식이 헛기침과 함께 본론으로 들어갔다.“시연아, 너랑 은호 아주 오랫 동안 알고 지내던 사이라 들었어. 우리 은호가 좋아하는 아이니 인품이니 다른 건 걱정되지 않아.”소은정, 소은해가 고개를 끄덕였다.“좋게 봐주셔서 고맙습니다. 아버님.”“그런데 해외에서 사업체를 운영하고 있다면서? 두 사람 결혼하면 신혼 생활은 어디서 할 생각이야?”소찬식이 가장 신경 쓰이는 문제기도 했다.한시연이 과거에 소은호를 찼고 그 사실이 소은호에게 깊은 상처를 남겼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이미 지나간 일, 괜히 트집 잡고 싶지 않았지만 앞으로의 일은 제대로 짚고 넘어가고 싶었다.게다가 소은호는 소찬식에게 또 다른 의미로 각별한 자식이었다.첫 아이이자 장남.처음 해보는 아버지 노릇에 장남이라는 이유로 소은호는 유난히 엄하게 키웠었다. 물론 소은호는 그런 그의 기대를 져버리지 않고 훌륭하게 커주었지만 왠지 그 사실이 소찬식은 마음에 걸렸다.비록 이상할만치 화목하지만 소씨 집안은 대한민국 최고의 재벌가, 쉽게 사람을 들이지 않을 것이라는 걸 알고 있는 한시연이 이해한다는 듯 싱긋 미소를 지었다.“은호 씨랑 다시 만나기로 한 뒤로 해외 회사는 정리하기 시작했어요. 지금 대부분 업무는 이미 국내로 시장을 옮긴 상태입니다. 물론 결혼 때문에 제 커리어를 포기할 생각은 없어요. 하지만 저 나름대로 가정에 충실할 생각이에요.”한시연의 대답에 만족한 듯 소찬식의 얼굴에 미소가 걸렸다.“그래. 나도 그렇게 꽉 막힌 사람은 아니야. 재벌가 며느리라고 사회생활은 전부 그만두고 남편 뒷바라지만 시키는 건 구시대적인 편견이라고 생각해. 그리고 은호는 워낙 혼자서도 잘하는 애니까.”“네. 은호 씨도 은정 아가씨 능력에 대해 항상 칭찬하던 걸요. 강단있는 성격이라고요.”한시연의 말에 소찬식이 껄껄 웃었다. “하하, 강단은. 그저 애들 장난이지 뭐.”말은 그렇게 해도 얼굴에는 자랑스러움으로 가득했다.한편, 한시연의 말에 소은정이 의아한 표정으로 소은정을 힐끗 바라
”평소에 태한그룹에서 파티를 열 때면 항상 이한석 비서가 먼저 연락했거든? 그런데 이번에는 이름도 처음 듣는 팀장이었어.”소은정이 왠지 이상함을 느끼는 이유이기도 했다.소은정이 말을 마치자마자 바로 휴대폰 벨소리가 울렸다.전동하가 보낸 문자 알림 메시지였다.“내일 오후 태한그룹에서 주최하는 파티가 열리잖아요. 파트너가 필요한데 같이 갈래요?”전동하의 말에 소은정이 눈썹을 치켜세웠다. 태한그룹 파티에 전동하를 초대했다고?이상하다는 느낌이 더 강력해질 수밖에 없었다.사실 전동하 정도의 유명 투자자가 그룹 파티에 초대를 받는 건 별로 이상한 일이 아니다. 하지만 전동하를 철천지 원수 보듯 하는 박수혁이 전동하를 초대했을 리가 없다.그러니 이 파티는 박수혁이 기획한 게 아닐 가능성이 크다는 소리.“알겠어요.”일단 가보면 무슨 상황인지 알 수 있겠지. 웬지 흥미로운 일이 벌어질 것만 같은 느낌에 기대감이 점점 더 부풀어 올랐다.소은정의 묘한 미소에 소은호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이미 가기로 한 것 같은데 내가 같이 가줄까?”“됐어. 파트너도 찾았고 요즘 출근도 안 하겠다 언니랑 같이 좋은 시간 보내.”싱긋 미소를 짓던 소은정이 한 마디 덧붙였다.“아, 회사 근처에 있는 그 오피스텔, 나 팔고 싶어.”외출할 때마다 박수혁 그 인간의 얼굴을 보고 싶지는 않으니까.소은정의 말에 소은호가 장난스레 물었다.“왜? 돈 부족해?”“그건 아니고. 그냥 좀 싫증나서.”“그럼 그냥 다른 곳으로 옮겨. 어차피 네 명의로 된 부동산이 거기 하나도 아니고. 아무데나 골라서 살면 되잖아.”돈이 부족하지도 않은데 왜 부동산을 처분하려 하는 거지?동생이 이해가 가지 않는 소은호였다.에휴, 오빠가 뭘 알아. 평생 일만 한 사람이.하지만 자세한 상황을 설명하고 싶지 않아 소은정은 어깨를 으쓱한 뒤 자연스레 화제를 돌렸다.“두 사람 결혼은 언제 할 거야?”“내일 파트너는 누구로 정했어?”서로에게 질문을 한 소은호, 소은정은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이른
하지만 박수혁의 타박에 주눅 들 강서진이 아니었다.“그럼 얼른 차에서 내려. 파트너로서 같이 들어가야 할 거 아니야.”이 형 좀 봐라? 지금 탐욕스러운 눈빛으로 소은정을 바라보는 저 늑대 같은 남자들이 안 보이는 거야?강서진의 말에 잠깐 망설이던 박수혁이 차에서 내리던 그때, 강서진이 그의 팔을 잡더니 갑자기 말을 바꾸었다.“아니다. 오늘은 날이 아닌 것 같아. 그냥 내 옆에 있어.”짜증스러운 표정으로 팔을 뿌리친 박수혁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밖으로 향했다.그리고 나란히 선 채 환한 미소를 짓고 있는 전동하, 소은정 두 사람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선남선녀라는 단어가 두 사람을 위해 만들어진 게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아름다운 모습이었다.순간, 박수혁의 표정이 차갑게 굳었다.전동하 저 자식까지 초대한 거야? 하, 할아버지... 이렇게까지 하셔야겠어요?박대한이 소은정을 초대한 것까지는 어느 정도 예상했던 일이었다.오늘 이 파티는 박수혁을 망가트리기 위한 박대한의 마지막 발악일 터, 자신이 사랑하는 여자 앞에서 무너지는 모습을 보인다면 그의 자존심을 완벽하게 짓밟을 수 있다고 생각했겠지.하지만... 박대한은 박수혁의 생각보다 훨씬 더 독하고 교활했다.사랑의 라이벌인 전동하 앞에서 무너진다면 그것이야말로 박수혁에게는 사형 선고이겠지...역시, 박대한은 박수혁을 가장 잘 아는 사람답게 완벽하게 박수혁의 상처에 소금을 뿌려대고 있었다.한편, 강서진도 이 상황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아무리 사이가 틀어졌다지만 친손자에게 이렇게까지 할 수 있나라는 생각에 욕이라도 하려다 힘줄이 튀어나올 정도로 주먹을 꽉 쥐고 있는 박수혁의 상태를 확인하고 한숨을 푹 내쉬었다.휴, 됐다...결국 강서진, 박수혁은 소은정과 전동하가 팔짱을 낀 채 들어가는 걸 멍허나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됐어. 우리도 이만 내리자.”강서진 역시 이번 파티의 정확한 목적은 알 수 없지만 박수혁에게 좋은 상황은 아니라는 예감이 들었다. 물론 박수혁의 친구로서 무슨 일이 있
오랜만에 만난 두 사람은 서로 부둥켜안고 눈물을 흘렸다.문준서는 그녀의 눈물을 보고 죄책감에 얼굴을 들 수 없었다.새봄이가 점차 울음이 잦아들자 그는 고개를 숙이고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었다.새봄이는 길게 심호흡하고 감정을 식혔다.준서에게는 묻고 싶은 게 정말 많았다.문준서는 울어서 빨갛게 부은 새봄이의 눈을 보고 웃으며 말했다.“커피 계속 마실 거야? 안 마실 거면 우리 집에 올래? 내가 맛있는 커피 만들어 줄게!”새봄이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준서는 소녀의 손을 잡고 핸드백을 챙긴 뒤, 밖으로 나갔다.커피숍 직원들마저 잘 어울리는 한 쌍이라고 부러운 눈빛을 보냈다.새봄이는 그와 손을 잡고 걷고 있자 저도 모르게 가슴이 설레었다.어릴 때는 항상 손을 잡고 다녔는데 지금은 어딘가 어색했다.어린 문준서는 항상 새봄이를 우선으로 생각했는데 지금도 그럴까?문준서는 소녀가 기억하는 어린 준서가 아니었다. 그의 거대한 뒷모습은 왠지 모를 안정감을 주었다.문준서가 웃으며 소녀에게 물었다.“뭘 그렇게 뚫어지게 봐?”“키 몇이야?”“192, 만족해?”새봄이는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을 느끼며 고개를 돌렸다.“내가 키 큰 사람 별로라고 하면 뼈라도 깎을 거야?”문준서는 웃으며 소녀의 손을 잡아끌었다.“응. 네가 집도해.”새봄이도 덩달아 웃었다.10여 년을 떨어져 지내다 보니 처음에는 정말 보고 싶었지만 점차 감정은 옅어져 갔다. 매번 부모님에게 준서의 안부를 물을 때면 그들은 머리만 흔들었다.그 뒤로 새봄이는 더 이상 준서를 찾지 않았다.말없이 사라진 그를 원망한 적도 있었다.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면 그가 해외에서 무사히 지냈으면 하는 바람이 더 컸던 것 같았다.문준서는 길가에 세워진 스포츠카로 다가갔다.차도 주인을 닮아 검은색으로 차분하고 화려하지 않은 디자인이었다.처음 그와 눈이 마주쳤을 때, 새봄이는 그가 문준서라는 것을 한눈에 알아보았다. 티없이 맑고 순수했던 눈동자는 어릴 때와 비교해 변한 게 전혀 없었다.하지만 소녀
새봄이가 떠난 뒤로 전동하는 한숨을 달고 살았다. 옆에서 지켜보는 소은정은 어이가 없었다.학교 생활은 생각했던 것보다 따분하지 않았다.어릴 때부터 곱게 자란 새봄이지만 거만하지 않고 성격이 활발했기에 많은 친구를 사귀었다.아이는 가끔 친구들을 집에 초대해서 파티를 벌였다.그리고 혼자 있는 시간도 충분히 즐겼다.가끔 센 강변에 가서 산책도 하고 석양을 감상하며 오리에게 먹이를 주기도 했다.그런데 가끔 혼자 있을 때면 누군가가 지켜보는 느낌이 들기도 했다.하지만 크게 걱정하지는 않았다. 주변에 수시로 경호원들이 지키고 있었기 때문이다.새봄이는 아이스크림을 들고 홀로 석양 아래에서 산책을 즐겼다. 손에는 엄마를 위해 준비한 선물인 한정판 명품백이 들려 있었다.이목구비가 화려한 동양소녀가 길을 걷고 있자 무수히 많은 시선들이 따라다녔다.하지만 프랑스의 치안은 별로 좋지 못했다.새봄이가 아이스크림을 먹는 사이 녹색 트레이닝복을 입은 남자가 소녀의 핸드백을 가로채서 사람들 틈으로 도주했다.놀란 새봄이는 다급히 남자의 뒤를 따라가며 소리쳤다.“도둑이야!”안타깝게도 유럽에서 비슷한 사건은 비일비재하게 벌어졌다.아무도 핸드백을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싶지 않아했다.새봄이는 자신이 안전하다는 것을 알기에 끝까지 남자를 쫓아갔다.수염이 덥수룩한 남자는 뒤를 돌아보며 뭐라고 욕설을 지껄이더니 골목으로 진입했다.새봄이가 쫓아갔을 때, 남자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소녀가 망연자실한 얼굴로 서 있을 때, 갑자기 옆 골목에서 사람이 튀어나왔다.남자는 바로 새봄이의 목을 노리고 달려들었지만 손이 소녀에게 닿기도 전에 누군가가 달려와서 남자를 걷어찼다.새봄이는 겁에 질린 얼굴로 뒤를 돌아보았다.훤칠하고 잘생긴 동양인 남자가 등 뒤에 서 있었다.어딘가 익숙한 느낌이 들었다.검은 정장을 입은 남자가 새봄이의 앞으로 다가갔다.그에게서 익숙한 우드향이 풍겼다.그는 천천히 소녀를 향해 손을 뻗었다. 손가락이 가늘고 예쁜 손이었다.녹색 트레이닝복을 입은 강
전동하는 그날 밤 새봄이에게 해외유학 얘기를 꺼냈다.새봄이는 고민도 해보지 않고 바로 동의했다.어디에 가고 싶냐고 물었더니 프랑스만 제외하고 아무데나 괜찮다고 했다.전동하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준서 때문에 프랑스에 가기 싫은 거야?”새봄이가 눈시울을 붉히며 말했다.“걔가 누군데? 하나도 기억 안 나! 걔 얘기하지 마!”아이는 억울함을 토로했다.줄곧 아이의 옆을 지켜주던 오빠는 어느 날 갑자기 사라졌다.마치 꿈을 꾼 것 같았다.더 이상 아이의 뒤꽁무니를 따라다니던 오빠는 없었다.아이는 준서가 보고 싶었지만 준서는 떠날 때 편지 한장 남기지 않았다.전동하는 안쓰러운 표정으로 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새봄이도 이제 컸잖아. 준서도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어. 연락이 없던 것도 그럴만한 사정이 있어서였어. 나중에 준서 만나도 너무 준서를 욕하지 마.”새봄이는 고집스럽게 고개를 돌려버렸다.부모의 사랑만 받고 자란 아이는 갑작스러운 이별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가끔 딸이 울기라도 하면 전동하는 항상 달려와서 딸을 위로해 주었다.태어날 때부터 다이아수저를 물고 태어난 아이는 누구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었다.그런데 어느 날 오빠가 보고 싶었던 아이가 준서에게 전화를 걸었을 때, 없는 번호라고 나왔다.아이는 버려진 느낌을 받았다.출국이 결정되었으니 전동하는 아이가 다닐 학교를 알아보았다.결국 새봄이는 유럽을 선택했다.마치 누군가가 거기서 자신을 기다리는 것처럼.떠나기 전, 아이는 일곱 남자친구와 작별인사를 나누었다.아이가 출국하는 날, 온가족이 나와서 새봄이를 배웅햇다.새봄이는 딱히 슬프거나 아쉬운 티를 내지 않았다. 마치 부모님 손을 잡고 해외여행을 가는 것처럼 자연스러웠다.아이는 활짝 웃으면서 가족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전동하와 소은정은 영지까지 데리고 같이 프랑스로 출국하기로 했다.일가족이 탑승수속을 마치고 돌아서는데 뒤에서 급박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새봄아!”고개를 돌리자 하얗게 질린 얼굴로 허겁지겁 이쪽
눈 깜짝할 사이에 새봄이는 어엿한 숙녀로 자라났다.고등학교에 들어가자마자 그녀에게는 남자친구가 생겼다.새봄이는 집으로 돌아와서 이 소식을 소은정에게 알렸다.소은정은 딱히 말리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어렸을 때 이런저런 경험을 다 해보는 게 아이에게 좋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그리고 새봄이가 진심일 거라고 생각하지도 않았다.하지만 이 사실을 알게 된 전동하는 밤새 잠을 이룰 수 없었다.그는 아이와 대화를 나눠봐야겠다고 마음먹었다.새봄이의 반응은 시큰둥했다.“친구들이 다들 남자친구를 사귀는데 나만 솔로면 유행에 뒤떨어지잖아. 그래서 만나보기로 했어. 그리고 너무 이른 나이도 아니잖아! 중학교 때부터 연애하는 애들도 많다고!”전동하는 인내심 있게 아이를 타일렀다.“그래도 넌 아직 너무 어려. 밖으로 나가 사람들과 더 많이 접촉해 보면 알게 될 거야. 남자는 다 믿을 놈이 못 돼….”“그럼 엄마가 아빠를 만난 것도 사랑에 눈이 멀어서 만난 거겠네?”어릴 때부터 말싸움에는 절대 지지 않던 새봄이는 미소가 소은정을 닮은 예쁘고 사랑스러운 소녀로 성장했다.그리고 총기 있는 눈동자와 말빨, 그리고 큰 키는 전동하를 많이 닮았다.소은정은 어디 하나 빠지지 않는 딸이 나중에 남자 여럿을 울릴 거라는 것을 알기에 아이에게는 사랑을 하면 꼭 아빠랑 엄마처럼 서로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라고 강조했다.새봄이는 전동하가 말이 없자 달려가서 그의 팔짱을 꼈다.“아빠, 걱정하지 마. 그냥 연애는 어떤 느낌인가 궁금해서 해보는 거야.”“그래서 그 남자친구는… 어떤 사람이야?”“어느 남자친구를 말하는 거야?”전동하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물었다.“몇이나 사귀었는데?”“다른 애들은 다 한명하고만 사귀는데 난 다른 애들 따라하기 싫어. 그래서 하루에 한 명, 일주일에 일곱 명이야! 주일을 정해서 따로 만나!”새봄이가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전동하는 입을 뻐금거리며 한참을 말을 잇지 못했다.그래도 다행인 건 사랑에 깊이 빠지는 스타일은 아니라는 점이랄까.
다른 CCTV에서 정황이 포착되었다. 직원이 그쪽으로 다가가다가 발을 헛디디며 하마터면 술잔을 쏟을 뻔한 정황이었는데 그때 잔을 안쪽으로 옮기며 위치가 바뀐 것 같았다.독극물 검사결과도 나왔다.청산가리였다.심청하의 몸에서 나온 독극물과 약병에 있던 독극물 성분이 일치했다.살인을 계획했던 심청하가 제 꾀에 당한 상황이었다.아마 그녀는 죽을 때까지 어디서 문제가 생겼는지 몰랐을 것이다.형사들은 밤을 새워 CCTV를 확인하면서 이 약병의 출처가 남유주의 큰어머니라는 사실을 밝혀냈다.그렇게 큰어머니가 경찰에 소환되었다.큰어머니는 숨김없이 사건의 경과를 진술했는데 심청하에게 협박을 당했다는 내용이었다.하지만 사람을 해치고 싶지 않아서 넘어지는 틈을 타 약병을 바닥에 버렸다고 했다.심청하가 포기를 못하고 스스로 행동에 옮기다가 제 꾀에 당했다는 말도 했다.형사가 인상을 찌푸리며 그녀에게 물었다.“그랬다는 증거 있나요?”“당연히 있죠.”큰어머니는 딸인 남연을 호출했다.“형사님이 묻는 대로 사실을 대답해! 떨지 말고!”남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핸드폰을 꺼냈다.그리고 차 안에서 심청하와 대화했던 녹음을 재생했다.“그 여자가 아빠랑 엄마를 죽이겠다며 협박했어요. 그 파티 초대장은 제가 거금을 주고 산 거예요. 우린 태한그룹 사모님과 친척관계에요. 평소에 왕래는 하지 않지만 사람을 죽이고 싶지는 않았다고요!”남연은 울음을 터뜨리며 말했다.“형사님, 제가 아는 건 다 얘기했어요.”형사는 그녀의 진술에서 이상한 점을 포착했다.“전에 남유주 씨를 해하려 한 적이 있죠?”“그래! 너도 직접 남유주를 죽이려고 했잖아? 그건 왜 쏙 빼고 말해?”녹음본에 담겼던 심청하의 목소리였다.의심을 사지 않기 위해 파일은 편집을 거치지 않았다.남연은 고개를 푹 숙이고 사실을 털어놓았다.“그것도 심청하가 협박해서 했어요. 하지만 언니 앞에서 이미 잘못을 인정했고 사과도 했어요. 언니는 저를 용서했고요.”형사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이건 박수혁 대표와
심청하는 한참 침묵하더니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무슨 방법을 쓰든 그 사람들과 걔를 만나게 해. 안 그러면 이 약은 네 부모님 배 속으로 들어갈 거야!”남연은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고개를 떨어뜨렸다.“알겠어요.”결국 그녀는 겁에 질린 얼굴로 명령을 받아들였다.며칠 뒤, 마침 좋은 기회가 찾아왔다.오늘은 자선회가 열리는 날이었는데 박수혁은 남유주의 기분을 풀어주기 위해 그녀와 함께 자선회에 참석했다.그리고 자선회에서 많은 보석과 골동품을 구매하며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다.자선회가 끝나고 파티가 이어졌다.남연의 부모는 힘겹게 초대장을 입수했다.심청하는 파티홀에서 이어질 장면을 기대하고 있었다.하지만 남연의 부모는 뒤늦게 파티에 참석했고 그들이 현장에 도착했을 때는 파티가 다 끝난 뒤였다.심청하는 분노를 주체할 수 없었다.이번 기회를 놓치면 다음에는 언제가 될지 장담할 수 없었다.SC그룹에서는 지분 사건으로 그들을 물고늘어질 것이다.본사에서 움직이기 전에 남유주를 제거해야 했다.잠시 후, 남유주의 큰어머니는 사람이 없는 곳에 숨어들었다.그리고 약을 꺼내 술병에 쏟아넣으려고 했다.마침 취객이 그녀의 어깨를 부딪히고 지나가며 그녀가 바닥에 쓰러졌다.남유주 큰어머니가 고통에 신음을 흘리자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되었다.약병은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구석진 곳으로 굴러갔다.심청하는 싸늘한 눈빛으로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정말 뭐 하나 일을 제대로 하는 게 없는 일가족이었다.남유주의 큰아버지는 얼굴이 하얗게 질려 다급히 다가가서 아내의 손을 잡고 구급차를 호출했다.호텔에 미리 대기하고 있던 의료진이 달려왔고 큰어머니를 들것에 실어 병원으로 호송했다.심청하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사람들이 모두 흩어지고 그녀는 구석진 곳으로 가서 아무도 안 보는 틈을 타 약병을 손에 쥐었다.그리고 기회를 봐서 약을 와인에 쏟고 흔들었다.모든 게 끝난 뒤, 심청하는 손에 난 땀을 닦았다.이미 살인을 하기로 마음먹은 그녀였지만 직접 모든 일을 끝내고 나니
남유주는 미소를 지으며 소은정과 박수혁 사이를 스스럼없이 얘기했다.남유주는 지나간 둘의 과거를 신경 쓰지 않았다.박수혁은 소은정에게 다른 마음이 없었고 그들은 각자 다른 사람과 행복한 삶을 살기로 했다.소은정은 미소를 지으며 남유주가 건넨 상자를 열었다.안에는 팔찌가 있었다, 반짝이며 아름다운 화려한 목걸이의 모든 보석은 정교하게 다듬어져 있었고 본연의 미와 섬세함의 아름다움을 결합하는 느낌이 들게 했다.그녀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몇 년 동안 이런 것을 모으기를 좋아했는데... 고마워요, 진짜 마음에 들어요." 남유주는 화해의 의미로 소은정에게 팔찌를 건넸다.소은정은 미소를 지으며 팔찌를 착용했다."과거는 과거일 뿐이니 우린 서로 용서하는 게 어때요?"소은정은 머리를 끄덕였다. 그녀의 눈가에 눈물이 고였다."안타깝게도 난 어떤 선물도 준비하지 못했네요…"그녀는 가방에서 계약서를 꺼내고 남유주에게 건넸다.남유주는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서류 내용을 살펴보았다."이게 뭐예요?""원래는 소찬학의 주식이었지만 몇 년 전에 회사 소유로 되었어요. 아빠가 나이도 있고 해서 주식 대신 배당금을 주기로 했었어요, 근데 더는 그 사람의 것이 아니니까, 아빠가 유주 씨한테 넘기고 싶다고 하더라고요. 우리가 주는 작은 선물이니까 받아줬으면 좋겠어요." 얼굴이 굳었던 남유주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그녀는 계약서를 다시 내밀었다."전 받지 않을래요.""유주 씨, 이게 얼마나 큰 돈인지 몰라요? 술집을 사려고 했던 거 아니었어요? 이 돈으로 그 건물 같은 거 열 개는 살 수 있어요."소은정은 인내심을 가지고 설명했다.남유주는 웃음을 참고 머리를 흔들었다."이걸 받으면 소찬학이 내 생부라는 것을 인정하는 거잖아요, 끊을 수 없는 혈연관계를 받아들여야 하고, 내가 관여하지 않은 과거의 강탈과 억압을 직면해야 해요. 태어난 이래로 부모가 없는 존재로 살아왔고, 아직 그것을 원하지 않아요. 나의 아버지로 인정하고 싶지도 않고 소씨 가문과 혈연적인 관계가
거침없이 내뱉는 심청하의 태도에 소찬식이 얼굴이 어둡게 변했다.옆에서 듣고 있던 소은정이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소씨 가문의 주식은 애초에 저희 집안 거에요. 그리고 둘째 삼촌이 직접 주식을 그룹 소유로 돌리겠다고 서명까지 했어요. 자기는 주식 배당만 챙기겠다고, 회사를 떠난 지금 삼촌한테 배당금을 주는 것만으로도 감사하게 여겨야죠. 이모가 한 계산은 너무 터무니없어요. 이 주식들은 재산 분할과 관련이 없어요. 설령 분할을 한다 해도, 먼저 그룹의 이익을 보호하는 게 우리의 원칙이고요."심청하는 얼굴이 이상하게 변했다."저는 어떻게 해요? 그이가 감옥에 가고, 우리는 손가락 빨면서 굶어 죽으라는 거예요? 주식을 전부 넘겨주세요, 그럼 더는 따지지 않을게요!" 그녀는 무례한 태도로 단호하게 앉아 있었다.소찬식의 표정이 음울하게 어두워졌다, 그는 복잡한 눈빛으로 그녀를 한번 쳐다보았다."그만 돌아가세요, 돌아가서 경찰 소식 기다리세요. 찬식이 회사 자금을 자기 돈처럼 써버렸고 수억 달러를 횡령했어요. 그럼에도 그룹이 이 돈에 대해 따지지 않는 것만으로도 고맙게 생각하세요. 어떻게 돈을, 주식을 요구할 수 있어요?" "나는 찬식 씨가 아니에요, 다른 사람들 사정은 모르겠고, 누가 날 어떻게 생각하든 관심없어요."그는 말을 마친 뒤 옆에 서 있는 집사에게 눈짓했다."손님을 내보내.""네."집사의 대답에, 심청하는 일어서서 조급하게 말했다. "아주버님, 그렇게 말씀하시지 마세요. 형제들끼리 어떻게 이렇게 매정하게 굴어요? 이 일을 언론에 알리면 어떻게 될지 저도 기대되네요, 아마 언론도 이 일에 엄청난 관심을 둘 것 같거든요!"소찬식의 표정은 신경질적으로 굳어졌다, 눈빛이 차갑고 어둡게 변했다.공기 안에는 침묵이 깔렸다.소은정은 갑작스럽게 직감했다. 심청하가 예전과는 분위기가 많이 달라진 것을 눈치챘다.하지만 그들은 타협할 수 없었다. 한 푼이라도 더 주면, 그녀는 주제 파악을 못 하고 더 달라고 요구할 것이다.그녀는 절대로 이번 한
심청하의 얼굴이 새파랗게 변했다."다 해봐야죠, 우선 믿을 만한 변호사를 찾아서 형량부터 줄여줘요."옆에서 듣고 있던 소은정이 참지 못하고 가볍게 웃으며 소리를 냈다.소은정이 입을 열었다."마침 잘 오셨어요, 우리도 지금 삼촌을 어떻게 구할지 토론하고 있었거든요!"심청하는 의아한 눈빛으로 소은정을 쳐다보았다. "그러면... 어떤 방법을 논의했는데?"전동하는 멋도 모르고 웃었다. 그는 소은정의 대답을 기다렸다.소은정은 청량한 목소리로 한숨을 쉬었다."사실 우리가 변호사를 찾아서 물어봤어요. 판결이 심하게 나면, 사형이 나올 수도 있다고 하더라고요, 어쨌든 두 사람을 죽인 거니까.그래도 방법이 있어요, 둘째 삼촌은 그때 혼인 상태였잖아요?법정에 나서서 전부 둘째 삼촌이 한 게 아니라고 증언하면 돼요. 삼촌은 줄곧 숙모랑 함께 있었고, 그런 일을 꾸밀 시간적 여유도 없었다고!"심청하는 갑자기 얼굴이 하얗게 질리더니 충격을 받은 표정으로 일어섰다."너... 나보고 거짓 증언을 하라는 거야, 말이 되니? 그거야말로 불법이야!"소은정은 차가운 눈빛으로 비웃었다."불법이라는 것도 알고 계셨네요? 근데 왜 저희 아버지한테 당당하게 그런 짓을 요구하는 거예요?"심청하는 그제야 자신이 소은정에게 당했다는 것을 깨달았다.화가 난 그녀의 얼굴이 붉어졌다."은정아, 너 말 이상하게 하는 구나, 내가 마음이 너무 급해서 나온 말을 꼬투리 잡는 거니? 그리고 너희 삼촌 아직 유죄 판결도 나지 않았어. 그러니까 우리가 조금 더 노력하면 돼."소은정은 눈썹을 찌푸렸다."그럼 혼자 잘 해보세요! 우린 응원이나 하고 있을게요!""너 지금 뭐하자는 거니?" 심청하는 화를 내며 소찬식을 바라보았다."진짜 이렇게 내버려두실 거예요?"소찬식의 눈빛이 어둡게 깔렸다."자기가 한 일에 대가를 치러야 하겠죠, 저희는 아무런 상관도 하지 않을 겁니다. 그러니 제수씨도 저희를 그만 찾아오세요."심청하는 소찬식의 태도가 이렇게 차갑고 딱딱할 줄은 몰랐다.그녀는 잠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