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은정은 바로 근처에 주차되어 있는 차를 가리켰다.“아니. 기사가 기다리고 있어. 먼저 갈게.”한유라의 운 얼굴이 들킬까 소은정은 잽싸게 고개를 돌렸다.한편 박수혁의 온 신경은 소은정에게만 쏠려있다 보니 한유라의 상태에 대해서는 전혀 눈치채지 못한 상태였다.차에 탄 소은정이 문을 닫으려던 그때, 커다란 손이 그녀의 손목을 덥썩 잡았다.피아니스트의 손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길고 아름다운 손이었다.어둠속에 얼굴을 숨긴 박수혁은 한참을 망설이다 겨우 입을 열었다.“은정아. 내가 자꾸 이렇게 나타나는 게 싫어? 난 그냥... 어떻게든 너 한번이라도 더 보고 싶어서 그랬어... 귀찮게 할 생각은 없었어...”박수혁의 말투에 담긴 조심스러움에 소은정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뭐야? 박수혁 맞아? 이런 말도 할 줄 아는 남자였나?어색한 침묵이 이어지고 운전석에 앉은 기사는 물론 한유라까지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기 시작했다.온몸에 소름이 돋긴 했지만 박수혁은 이를 악물었다.세게 나가서 안 통한다면 이런 전략을 사용해 볼 수밖에...아무 대답도 없는 소은정의 모습에 이것도 아닌가 싶어 손에 힘을 풀려던 그때, 드디어 소은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뭐 잘못 먹었어?”예상치 못한 질문에 박수혁이 흠칫하던 순간, 그의 손을 뿌리친 소은정이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어서 출발해요.”어느새 멀어져가는 차량을 멍하니 바라보던 박수혁의 표정에 다시 평소와 같은 자신감 넘치는 미소가 피어올랐다.하여간 예측할 수 없는 여자라니까.비록 이번 전략도 결국 실패로 돌아갔지만 절대 포기할 수 없다고 박수혁은 다시 마음을 다잡았다.이때 휴대폰이 눈치없이 울리기 시작했다.이한석이었다.“말해.”“회장님께서 해외에서 그분을 불러들이셨습니다. 뭔가를 또 꾸미고 계시는 것 같은데요.”소은정과의 만남 뒤로 박대한은 며칠간 조용한 듯하다 또다시 뭔가를 꾸미기 시작했다. 물론 박수혁은 그의 움직임 하나하나를 지켜보고 있었지만 말이다.하지만 해외에서 “그”를 다시 불러들인다는
말을 마친 한유라는 절망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와이너리에서 비싼 와인을 꺼내 식탁 위에 올려두었다.“인생이 어디 우리 맘대로 되니.”소은정이 한숨을 내쉬었다.그녀의 말에 침묵하던 한유라는 갑자기 손을 들어 자신의 뺨을 세게 때렸다.짝!그 소리에 놀란 소은정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유라야...”평소 털털한 성격에 항상 쿨해 보이던 한유라가 이렇게 약한 모습을 보이는 건 처음이었다. 꽁공 숨겨오던 비밀이 풀리니 감정이 봇물처럼 터져나오는 모양이었다. 민하준과 키스하는 모습을 들킨 순간, 소은호의 눈동자에서 순간 스쳐지나가는 혐오를 캐치한 순간, 한유라는 세상이 무너지는 기분이었다.소은호와는 영원히 잘 될 수 없을 것이란 예감이 들어서였다.소은정의 친구가 아니었다면 그녀의 이름마저 기억하지 못했을 거란 생각에 가슴이 쓰려왔다.와인잔에 붉은 와인을 가득 따른 한유라는 꿀꺽꿀꺽 술을 들이켰다.“은정아, 오늘 일 누구한테도 말하지 마. 다른 사람들까지 아는 거 싫어.”이런 치욕을 다른 사람과 공유하고 싶지 않은 한유라였다.“그럼 당연하지...”걱정스러운 얼굴로 한유라의 표정을 살피던 소은정이 조심스럽게 물었다.“왜... 오빠한테 고백 한번 못 안 했던 거야?”소은정의 질문에 한유라가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그거 알아? 난 시연 언니한테 안돼. 난 시연 언니를 따라하는 짝퉁일 뿐이니까. 시연 언니 대학교 1학년 때부터 은호 오빠랑 사귀었어. 그러다 3학년 때 부도 때문에 해외로 도망치 듯 떠났었지. 그렇게 해외에서 알바를 병행하며 학업까지 마치고 다시 창업에 성공한 모양이더라. 그런데 오늘 보니까... 그 동안 언니를 어줍잖게 따라하려 했던 내가 너무 우스워졌어. 언니의 그 맑고 깨끗한 눈동자... 고등학교 때 처음 만났던 그때와 똑같았으니까. 이 세상과 타협한 더러운 나와는 차원이 다른 사람이야.”7, 8년만에 만났음에도 예전과 똑같은 마음인 것 같은 두 사람의 모습에 한유라는 부러우면서도 질투가 앞섰다.말도 없
한유라다운 해결 방식에 미간을 찌푸리던 소은정이 싱긋 미소를 지었다.역시 유라야. 솔직하고 시원시원하네.“어제 게임도 지고 계약도 물 건너 간 것 같고 해서 기분이 더 안 좋았나 봐. 너라도 있어서 다행이었어. 안 그랬으면 정말 제대로 쪽팔릴 뻔했다니까.”괜시리 더 가벼운 말투로 그녀를 안심시키는 한유라의 모습이 괜시리 더 안쓰러워 소은정은 친구를 꼭 안아주었다.“내가 더 좋은 남자 소개시켜줄게. 이 세상에 반이 남자인데 우리 오빠보다 더 좋은 남자 한 명 없겠어? 그리고... 남자보다는 돈이 훨씬 더 좋아...”하, 소은정답네. 뭐 일리가 있는 것 같기도?아무리 괜찮은 척해도 실연은 실연, 소은정은 한유라에게 혼자 있을 시간을 주기 위해 먼저 회사로 떠났다.회사에 예비용으로 보관해 둔 옷으로 갈아입고 화장까지 고친 소은정은 어제 밤새 술을 마신 사람으로 보이지 않을 정도로 상쾌해 보였다.잠시 후 우연준이 사무실로 들어와 브리핑을 시작했다.“...그리고 태한그룹 세력구조에 큰 움직임이 있을 것으로 예상됩니다. 대주주들이 벌써 움직이기 시작했어요.”예상 중인 일인지라 소은정은 눈썹을 치켜세운 뒤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그 영감탱이가 가만히 있을 리가 없지.“오빠는요?”문득 떠오른 한유라 생각에 소은정이 물었다.“보름 동안 휴가 내셨습니다. 그 동안 회사 업무는 대표님께서 전부 처리하셔야 할 것 같아요.”뭐? 보름?소은정이 눈을 커다랗게 떴다.“저한테는 아무 말도 없었는데요?”“솔직하게 말씀드리면 반대할게 뻔하다고...”하, 그래서 이 난장판을 전부 나한테 떠넘기고 가시겠다?평소 쓸데없는 말은 하지 않는 우연준이지만 오늘만큼은 왠지 들뜬 표정이었다.“해외로 가신다던데요? 여자친구분을 도와 업무를 처리하신다고는 하는데... 제가 볼 때는 휴가를 가신 것 같습니다.”우연준의 말에 소은정이 한숨을 내쉬었다.휴, 그래. 오빠도 지금까지 일만 하느라 얼마나 힘들겠어. 나까지 피곤하게 하지 말자. 오빠 인생도 중요하잖아.“알겠어요
회의실에 적막이 감돌고 그 누구도 먼저 입을 열지 않았다.자리에 앉은 사람들의 수만 보면 분명 박수혁이 밀리는 상황이었지만 박수혁의 얼굴에서는 그 어떤 당황스러움도 엿볼 수 없었다.먼저 입을 여는 쪽이 기싸움에서 지는 것이 국룰, 박수혁은 충분히 인내심을 발휘하고 있었다.눈을 가늘게 뜬 채 손자를 바라보던 박대한이 먼저 입을 열었다. 세상만사를 온전히 겪어낸 혼탁한 눈동자가 날카롭게 빛났다.“수혁아, 그 동안 네가 많이 성장하긴 했지만 아직 부족해. 주주들과 상의해 봤는데 아직 대표 자리를 맡기엔 많이 미숙한 것 같구나. 그래서 주주총회를 소집한 거야. 오늘 이 자리에서 대표이사를 교체할 거다.”박대한은 별다른 핑계 없이 바로 본심을 드러냈다.오늘 그가 여기까지 온 이유는 대표이사를 바꾸기 위함이라는 선전포고나 마찬가지였다.박대한의 말에 옆에 있던 집안 어른이자 대주주 중 한 명은 이 무거운 분위기를 조금이나마 풀고 싶었는지 어색하게 웃으며 말을 이어갔다.“수혁아, 회장님 뜻은 이래. 그동안 일만 하면서 지내면서 고생 많았잖니? 머리도 식힐겸 해외로 유학을 떠나는 건 어떻겠냐? 학업을 마치고 나서 태한그룹으로 다시 돌아오는 것도 괜찮고.”하지만 “물론 다시 돌아온다면 신입 사원으로 들어와야 할 테지만...”라는 말은 차마 내뱉지 못했다. 순간 박수혁의 눈동자에 차가운 빛이 스쳐지났다. 태한그룹 말고도 이 수많은 기업을 거느리고 있는 그였다. 솔직히 태한그룹 대표이사 자리에서 물러난다 해도 그가 앞으로 살아가는 데는 큰 어려움이 없을 것이다.하지만, 이렇게 쫓겨나듯 물러나는 건 용납할 수 없었다.고개를 든 박수혁이 여유롭게 입을 열었다.“할아버지, 그럼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시죠? 사람도 이렇게 많이 부르시고. 준비 많이 하신 것 같은데...”태한그룹의 지분 중 60%는 박수혁 소유다. 그런 그를 밀어내기 위해 박대한이 어떤 수를 준비했는지 궁금한 박수혁이었다.“네가 가지고 있는 지분 중 10%는 내가 너에게 위탁 관리를 부탁한 것이지
출국했던 이민혜와 박예리가 모습을 드러내고 주주들의 얼굴에 놀라움이 스쳤다.이민혜는 박대한을 보자마자 눈물을 흘리며 쪼르르 달려왔다.“아버님, 저 너무 억울해요. 수혁이가 저한테 어떻게 했는지 보셨죠? 쟤 눈에는 회사는 물론이고 가족도 없어요. 소은정 그 여우 같은 계집애한테 빠져서는 눈에 뵈는 게 없다니까요? 제 배 아파 낳은 아이지만 이렇게는 못 살겠어요!”박수혁의 생모인 이민혜까지 박수혁을 질타하니 주주들의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했다.이런 상황이라면 천하의 박수혁이라도 고비를 넘지 못할 것 같다는 게 모두의 생각이었다.그 동안 당한 게 많아서일까 가만히 서 있기만 하는 박예리와 달리 이번 기회에 아들의 기를 눌러버리리라 마음 먹은 이민혜는 눈물바람으로 다른 주주들을 향해 말했다.“저희 남편에게도 태한그룹의 지분이 어느 정도 있는 걸로 알고 있어요. 제 남편을 대표해 이 자리에서 저희의 의견을 밝히겠습니다. 저희는 회장님의 결정을 따르겠어요!”쿠궁!이민혜의 말과 함께 회의실이 술렁거리기 시작했다.“이제 확실해진 것 같네.”“천하의 박수혁이 정말 이렇게 쫓겨나는 건가?”“그럼 우리는 어떻게 되는 거야...”이민혜의 등장과 함께 박씨 가문에서 박수혁의 편을 드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는 것이 입증되고 주주들은 급격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하지만 극도로 불리한 듯한 상황임에도 박수혁은 여유로운 미소를 지었다. 물론 그 미소를 바라보는 주주들은 온몸에 소름이 돋는 기분이었지만.박수혁이 손을 들자 이한석이 바로 파일 하나를 건넸다.파일을 받은 박수혁은 내용을 확인도 하지 않고 책상 위로 휙 던져버렸다.쿵 소리와 함께 넥타이를 살짝 푼 박수혁이 차가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다들 잘 보세요. 이건 제 아버지가 직접 사인한 지분 양도 계약서입니다. 그런데 무슨 자격으로 아버지의 지분을 행사하겠다는 거죠?”순간 이민혜의 표정이 변하고 커다란 눈으로 계약서를 바라보았다.수많은 글씨들 중 가장 선명하게 보이는 건 남편인 박봉원의 사인이었다.
한편, 회의실에 남은 주주들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박대한과 함께 일할 때는 아직 여러 체계들이 확실하게 정해지지 않았던 때. 허위 계약서를 통해 뒷주머니를 채우는 건 어찌 보면 업계의 관례나 마찬가지였고 정과 의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박대한도 그저 못 본 척 이를 용인했었다.하지만 박수혁이 대표이사로 취임한 뒤로는 모든 게 달라졌다. 비록 과거의 잘못을 추궁하진 않았지만 적어도 허위 계약으로 더 이상 돈을 횡령할 수는 없게 된 것이었다. 그렇게 돈줄과 실권을 잃은 몇몇 주주들의 불만은 점점 더 커져만 갔고 그로 인해 박대한의 편에 서기로 결정한 것이기도 했다.그런데 그때의 증거들을 박수혁이 가지고 있을 줄이야.공금 횡령은 징역살이를 해야 할 정도로 큰 문제, 주주들의 얼굴에 식은땀이 줄줄 흐르기 시작했다.털어서 먼지 없는 사람은 없다지만 뭇 주주들이 그 동안 저지른 비리는 셀 수도 없을 정도, 자리보전도 힘들어진 상황에서 줄 타기는 더 이상 의미가 없어진 것이다.그제야 주주들은 모든 걸 깨달았다. 왜 박수혁이 수세에 몰린 상황에서도 그토록 담담했는지 말이다.박수혁 이 자식, 우리 약점을 전부 붙잡고 있었던 거였어!박수혁이 회의실을 나서자 마음이 급해진 주주들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박 대표가 그 증거들을 가지고 있을 줄이야.”“회장님, 이 사실들 진짜로 파기 시작하면 회장님도 책임을 피하기 힘들어집니다. 그냥 여기서 없던 일로 하시는 게...”“그러니까요. 저희 나이도 있고 이제 그만 편하게 살고 싶습니다.”“됐습니다. 전 따로 약속이 있어서 이만 가봐야겠습니다.”박수혁, 박대한의 싸움 때문에 괜한 피해를 입게 될까 걱정된 주주들은 하나둘씩 회의실을 나섰다.아무리 친척이라지만 방계이니 한 다리 건너 친척이나 마찬가지. 괜히 욕심내다 가지고 있는 걸 모두 잃을 수 있다는 생각에 어떤 이들은 해명을 하기 위해 박수혁의 사무실로 가기도 했지만 만남 요청은 전부 거절당하고 말았다.한편 회의실.박대한은 시벌개진 얼굴로 자리를 지키고 있
이한석은 침착한 목소리로 설명을 마쳤다.몇 초 동안 침묵하던 박대한이 이한석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만약 내가 사인을 안 한다면 어떻게 되겠어?”박 회장의 질문에 이한석이 싱긋 미소를 지었다.“증거는 바로 검찰로 넘어가게 될 테고 회장님이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시는 박씨 가문과 태한그룹의 기둥이 흔들리게 되겠죠.”최후통첩과도 같은 박수혁의 결정에 한참을 고개를 숙이고 있던 박대한은 결국 천천히 펜을 들었다.이 사퇴서에 사인을 하지 않아 정말 검찰 조사로 이어진다면 그를 지지했던 주주들의 호의는 화가 되어 다시 그에게 돌아올 것이다.박수혁, 정말 호랑이가 되었구나......대표 사무실, 박수혁이 굳은 표정으로 창밖을 보고 있다. 아침내내 하늘을 어둡게 만들던 먹구름이 걷히고 찬란한 햇살이 그의 차가운 얼굴을 비추었다.잠시 후, 이한석이 노크와 함께 회의실로 들어오더니 사인을 마친 사퇴서를 책상 위에 올려두었다.“대표님, 사인 마치셨습니다. 그런데 조건이 있으시다더군요. 주주들에 관한 증거들 원본 파일로 넘겨달라십니다.”“그래. 전부 드려. 내가 지시한 일은? 끝냈어?”예상했다는 듯 박수혁의 표정에는 변함이 없었다.이대로 파일을 넘긴다면 증거가 파괴될 게 분명했지만 박수혁은 전혀 걱정되지 않았다. 그의 목적은 다른 곳에 있었으니까.“네, 계획대로 진행되고 있습니다.”그제야 박수혁이 다시 고개를 돌렸다.“그래. 다른 사람들이 눈치채지 않도록 조심해서 움직여.”“아, 그리고... 사모님과 아가씨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대표님을 만나고 싶으시다는데...”“아니. 안 만날 거니까 그렇게 전해.”이한석의 말을 끊은 박수혁이 미간을 찌푸린 채 차가운 목소리로 대답했다.회의실에서 있었던 일을 다시 떠올린 박수혁은 다시 마음이 착잡해졌다. 평범한 가족과 같은 화목함은 바라지도 않았지만 그나마 남아있던 정마저 떨어지는 기분이었다.아들을 끌어내기 위해 거짓말까지 불사하지 않는 어머니라니... 이런 가족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의 곁을 지키는
어느새 하늘이 어두워졌다.소은정의 저택.소은해가 김하늘과 소은정을 위해 사과를 깎아주고 김하늘과 소은정은 소파에 앉아 뉴스를 확인하고 있었다.그리고 주방에서 소찬식은 오늘 낚은 물고기들을 조리하고 있었다.평화로운 분위기가 이어지던 그때, 인터넷을 뒤적거리던 소은정의 표정이 살짝 변했다.역시나 기사를 확인한 김하늘도 입을 열었다.“며칠 전까지 태한그룹 주인이 바뀌는 거 아닌가 말이 많더니 박 회장이 사퇴했네?”비록 한 마디 말로 깔끔하게 결론만 정리된 기사였지만 그 한 마디가 이루어질 때까지 얼마나 처참한 전쟁이 있었는지 충분히 예측 가능했다.한편 소은정은 박예리 사건이 일단락된 후 박대한의 사주였음이 밝혀지고 나서 이 일의 책임은 끝까지 추궁하겠다고 했던 박수혁의 말을 떠올렸다.그때까지만 해도 가족인 박대한에게 뭘 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에 딱히 개의치 않았었다. 그리고 오늘, 기사를 확인한 순간, 소은정은 알 수 있었다. 이 기사가 바로 박수혁이 그녀를 위해 준비한 선물임을.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기분이 들었다.반면 소은해는 별거 아니라는 듯 콧방귀를 뀌었다.“어차피 태한그룹 실세는 박수혁이었잖아? 어쩔 수 없이 물러난 거겠지 뭐.”그의 말에 김하늘도 고개를 끄덕였다.“소문에 박수혁이 운영하는 회사가 태한그룹뿐이 아니라는 소문도 있어요. 보통 사람은 아니라는 거죠.”두 사람의 대화에 소찬식도 소파에 앉았지만 소은정은 별말없이 아빠한테 차를 건넸다.“사실 그 영감탱이 난 진작부터 마음에 안 들었어. 박수혁도 마음에 안 들지만 이번만큼은 잘했네.”소찬식이 쌤통이라는 표정을 짓더니 말을 이어갔다.“듣기론 이사회에서 박수혁 엄마에 여동생까지 나서서 박수혁을 끌어내리려고 했다던데... 참 그렇게 보면 박수혁 그 자식도 불쌍한 사람이라니까...”아버지의 말에 소은해가 대답했다.“그러게요. 박수혁은 가족한테도 가차없는 사람이잖아요. 다들 겉으로는 대표님 대표님 하면서 모셔도 뒤에서는 온갖 욕 다한다고 하더라고요...”쓸데없는 가식
오랜만에 만난 두 사람은 서로 부둥켜안고 눈물을 흘렸다.문준서는 그녀의 눈물을 보고 죄책감에 얼굴을 들 수 없었다.새봄이가 점차 울음이 잦아들자 그는 고개를 숙이고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었다.새봄이는 길게 심호흡하고 감정을 식혔다.준서에게는 묻고 싶은 게 정말 많았다.문준서는 울어서 빨갛게 부은 새봄이의 눈을 보고 웃으며 말했다.“커피 계속 마실 거야? 안 마실 거면 우리 집에 올래? 내가 맛있는 커피 만들어 줄게!”새봄이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준서는 소녀의 손을 잡고 핸드백을 챙긴 뒤, 밖으로 나갔다.커피숍 직원들마저 잘 어울리는 한 쌍이라고 부러운 눈빛을 보냈다.새봄이는 그와 손을 잡고 걷고 있자 저도 모르게 가슴이 설레었다.어릴 때는 항상 손을 잡고 다녔는데 지금은 어딘가 어색했다.어린 문준서는 항상 새봄이를 우선으로 생각했는데 지금도 그럴까?문준서는 소녀가 기억하는 어린 준서가 아니었다. 그의 거대한 뒷모습은 왠지 모를 안정감을 주었다.문준서가 웃으며 소녀에게 물었다.“뭘 그렇게 뚫어지게 봐?”“키 몇이야?”“192, 만족해?”새봄이는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을 느끼며 고개를 돌렸다.“내가 키 큰 사람 별로라고 하면 뼈라도 깎을 거야?”문준서는 웃으며 소녀의 손을 잡아끌었다.“응. 네가 집도해.”새봄이도 덩달아 웃었다.10여 년을 떨어져 지내다 보니 처음에는 정말 보고 싶었지만 점차 감정은 옅어져 갔다. 매번 부모님에게 준서의 안부를 물을 때면 그들은 머리만 흔들었다.그 뒤로 새봄이는 더 이상 준서를 찾지 않았다.말없이 사라진 그를 원망한 적도 있었다.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면 그가 해외에서 무사히 지냈으면 하는 바람이 더 컸던 것 같았다.문준서는 길가에 세워진 스포츠카로 다가갔다.차도 주인을 닮아 검은색으로 차분하고 화려하지 않은 디자인이었다.처음 그와 눈이 마주쳤을 때, 새봄이는 그가 문준서라는 것을 한눈에 알아보았다. 티없이 맑고 순수했던 눈동자는 어릴 때와 비교해 변한 게 전혀 없었다.하지만 소녀
새봄이가 떠난 뒤로 전동하는 한숨을 달고 살았다. 옆에서 지켜보는 소은정은 어이가 없었다.학교 생활은 생각했던 것보다 따분하지 않았다.어릴 때부터 곱게 자란 새봄이지만 거만하지 않고 성격이 활발했기에 많은 친구를 사귀었다.아이는 가끔 친구들을 집에 초대해서 파티를 벌였다.그리고 혼자 있는 시간도 충분히 즐겼다.가끔 센 강변에 가서 산책도 하고 석양을 감상하며 오리에게 먹이를 주기도 했다.그런데 가끔 혼자 있을 때면 누군가가 지켜보는 느낌이 들기도 했다.하지만 크게 걱정하지는 않았다. 주변에 수시로 경호원들이 지키고 있었기 때문이다.새봄이는 아이스크림을 들고 홀로 석양 아래에서 산책을 즐겼다. 손에는 엄마를 위해 준비한 선물인 한정판 명품백이 들려 있었다.이목구비가 화려한 동양소녀가 길을 걷고 있자 무수히 많은 시선들이 따라다녔다.하지만 프랑스의 치안은 별로 좋지 못했다.새봄이가 아이스크림을 먹는 사이 녹색 트레이닝복을 입은 남자가 소녀의 핸드백을 가로채서 사람들 틈으로 도주했다.놀란 새봄이는 다급히 남자의 뒤를 따라가며 소리쳤다.“도둑이야!”안타깝게도 유럽에서 비슷한 사건은 비일비재하게 벌어졌다.아무도 핸드백을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싶지 않아했다.새봄이는 자신이 안전하다는 것을 알기에 끝까지 남자를 쫓아갔다.수염이 덥수룩한 남자는 뒤를 돌아보며 뭐라고 욕설을 지껄이더니 골목으로 진입했다.새봄이가 쫓아갔을 때, 남자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소녀가 망연자실한 얼굴로 서 있을 때, 갑자기 옆 골목에서 사람이 튀어나왔다.남자는 바로 새봄이의 목을 노리고 달려들었지만 손이 소녀에게 닿기도 전에 누군가가 달려와서 남자를 걷어찼다.새봄이는 겁에 질린 얼굴로 뒤를 돌아보았다.훤칠하고 잘생긴 동양인 남자가 등 뒤에 서 있었다.어딘가 익숙한 느낌이 들었다.검은 정장을 입은 남자가 새봄이의 앞으로 다가갔다.그에게서 익숙한 우드향이 풍겼다.그는 천천히 소녀를 향해 손을 뻗었다. 손가락이 가늘고 예쁜 손이었다.녹색 트레이닝복을 입은 강
전동하는 그날 밤 새봄이에게 해외유학 얘기를 꺼냈다.새봄이는 고민도 해보지 않고 바로 동의했다.어디에 가고 싶냐고 물었더니 프랑스만 제외하고 아무데나 괜찮다고 했다.전동하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준서 때문에 프랑스에 가기 싫은 거야?”새봄이가 눈시울을 붉히며 말했다.“걔가 누군데? 하나도 기억 안 나! 걔 얘기하지 마!”아이는 억울함을 토로했다.줄곧 아이의 옆을 지켜주던 오빠는 어느 날 갑자기 사라졌다.마치 꿈을 꾼 것 같았다.더 이상 아이의 뒤꽁무니를 따라다니던 오빠는 없었다.아이는 준서가 보고 싶었지만 준서는 떠날 때 편지 한장 남기지 않았다.전동하는 안쓰러운 표정으로 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새봄이도 이제 컸잖아. 준서도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어. 연락이 없던 것도 그럴만한 사정이 있어서였어. 나중에 준서 만나도 너무 준서를 욕하지 마.”새봄이는 고집스럽게 고개를 돌려버렸다.부모의 사랑만 받고 자란 아이는 갑작스러운 이별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가끔 딸이 울기라도 하면 전동하는 항상 달려와서 딸을 위로해 주었다.태어날 때부터 다이아수저를 물고 태어난 아이는 누구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었다.그런데 어느 날 오빠가 보고 싶었던 아이가 준서에게 전화를 걸었을 때, 없는 번호라고 나왔다.아이는 버려진 느낌을 받았다.출국이 결정되었으니 전동하는 아이가 다닐 학교를 알아보았다.결국 새봄이는 유럽을 선택했다.마치 누군가가 거기서 자신을 기다리는 것처럼.떠나기 전, 아이는 일곱 남자친구와 작별인사를 나누었다.아이가 출국하는 날, 온가족이 나와서 새봄이를 배웅햇다.새봄이는 딱히 슬프거나 아쉬운 티를 내지 않았다. 마치 부모님 손을 잡고 해외여행을 가는 것처럼 자연스러웠다.아이는 활짝 웃으면서 가족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전동하와 소은정은 영지까지 데리고 같이 프랑스로 출국하기로 했다.일가족이 탑승수속을 마치고 돌아서는데 뒤에서 급박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새봄아!”고개를 돌리자 하얗게 질린 얼굴로 허겁지겁 이쪽
눈 깜짝할 사이에 새봄이는 어엿한 숙녀로 자라났다.고등학교에 들어가자마자 그녀에게는 남자친구가 생겼다.새봄이는 집으로 돌아와서 이 소식을 소은정에게 알렸다.소은정은 딱히 말리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어렸을 때 이런저런 경험을 다 해보는 게 아이에게 좋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그리고 새봄이가 진심일 거라고 생각하지도 않았다.하지만 이 사실을 알게 된 전동하는 밤새 잠을 이룰 수 없었다.그는 아이와 대화를 나눠봐야겠다고 마음먹었다.새봄이의 반응은 시큰둥했다.“친구들이 다들 남자친구를 사귀는데 나만 솔로면 유행에 뒤떨어지잖아. 그래서 만나보기로 했어. 그리고 너무 이른 나이도 아니잖아! 중학교 때부터 연애하는 애들도 많다고!”전동하는 인내심 있게 아이를 타일렀다.“그래도 넌 아직 너무 어려. 밖으로 나가 사람들과 더 많이 접촉해 보면 알게 될 거야. 남자는 다 믿을 놈이 못 돼….”“그럼 엄마가 아빠를 만난 것도 사랑에 눈이 멀어서 만난 거겠네?”어릴 때부터 말싸움에는 절대 지지 않던 새봄이는 미소가 소은정을 닮은 예쁘고 사랑스러운 소녀로 성장했다.그리고 총기 있는 눈동자와 말빨, 그리고 큰 키는 전동하를 많이 닮았다.소은정은 어디 하나 빠지지 않는 딸이 나중에 남자 여럿을 울릴 거라는 것을 알기에 아이에게는 사랑을 하면 꼭 아빠랑 엄마처럼 서로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라고 강조했다.새봄이는 전동하가 말이 없자 달려가서 그의 팔짱을 꼈다.“아빠, 걱정하지 마. 그냥 연애는 어떤 느낌인가 궁금해서 해보는 거야.”“그래서 그 남자친구는… 어떤 사람이야?”“어느 남자친구를 말하는 거야?”전동하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물었다.“몇이나 사귀었는데?”“다른 애들은 다 한명하고만 사귀는데 난 다른 애들 따라하기 싫어. 그래서 하루에 한 명, 일주일에 일곱 명이야! 주일을 정해서 따로 만나!”새봄이가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전동하는 입을 뻐금거리며 한참을 말을 잇지 못했다.그래도 다행인 건 사랑에 깊이 빠지는 스타일은 아니라는 점이랄까.
다른 CCTV에서 정황이 포착되었다. 직원이 그쪽으로 다가가다가 발을 헛디디며 하마터면 술잔을 쏟을 뻔한 정황이었는데 그때 잔을 안쪽으로 옮기며 위치가 바뀐 것 같았다.독극물 검사결과도 나왔다.청산가리였다.심청하의 몸에서 나온 독극물과 약병에 있던 독극물 성분이 일치했다.살인을 계획했던 심청하가 제 꾀에 당한 상황이었다.아마 그녀는 죽을 때까지 어디서 문제가 생겼는지 몰랐을 것이다.형사들은 밤을 새워 CCTV를 확인하면서 이 약병의 출처가 남유주의 큰어머니라는 사실을 밝혀냈다.그렇게 큰어머니가 경찰에 소환되었다.큰어머니는 숨김없이 사건의 경과를 진술했는데 심청하에게 협박을 당했다는 내용이었다.하지만 사람을 해치고 싶지 않아서 넘어지는 틈을 타 약병을 바닥에 버렸다고 했다.심청하가 포기를 못하고 스스로 행동에 옮기다가 제 꾀에 당했다는 말도 했다.형사가 인상을 찌푸리며 그녀에게 물었다.“그랬다는 증거 있나요?”“당연히 있죠.”큰어머니는 딸인 남연을 호출했다.“형사님이 묻는 대로 사실을 대답해! 떨지 말고!”남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핸드폰을 꺼냈다.그리고 차 안에서 심청하와 대화했던 녹음을 재생했다.“그 여자가 아빠랑 엄마를 죽이겠다며 협박했어요. 그 파티 초대장은 제가 거금을 주고 산 거예요. 우린 태한그룹 사모님과 친척관계에요. 평소에 왕래는 하지 않지만 사람을 죽이고 싶지는 않았다고요!”남연은 울음을 터뜨리며 말했다.“형사님, 제가 아는 건 다 얘기했어요.”형사는 그녀의 진술에서 이상한 점을 포착했다.“전에 남유주 씨를 해하려 한 적이 있죠?”“그래! 너도 직접 남유주를 죽이려고 했잖아? 그건 왜 쏙 빼고 말해?”녹음본에 담겼던 심청하의 목소리였다.의심을 사지 않기 위해 파일은 편집을 거치지 않았다.남연은 고개를 푹 숙이고 사실을 털어놓았다.“그것도 심청하가 협박해서 했어요. 하지만 언니 앞에서 이미 잘못을 인정했고 사과도 했어요. 언니는 저를 용서했고요.”형사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이건 박수혁 대표와
심청하는 한참 침묵하더니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무슨 방법을 쓰든 그 사람들과 걔를 만나게 해. 안 그러면 이 약은 네 부모님 배 속으로 들어갈 거야!”남연은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고개를 떨어뜨렸다.“알겠어요.”결국 그녀는 겁에 질린 얼굴로 명령을 받아들였다.며칠 뒤, 마침 좋은 기회가 찾아왔다.오늘은 자선회가 열리는 날이었는데 박수혁은 남유주의 기분을 풀어주기 위해 그녀와 함께 자선회에 참석했다.그리고 자선회에서 많은 보석과 골동품을 구매하며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다.자선회가 끝나고 파티가 이어졌다.남연의 부모는 힘겹게 초대장을 입수했다.심청하는 파티홀에서 이어질 장면을 기대하고 있었다.하지만 남연의 부모는 뒤늦게 파티에 참석했고 그들이 현장에 도착했을 때는 파티가 다 끝난 뒤였다.심청하는 분노를 주체할 수 없었다.이번 기회를 놓치면 다음에는 언제가 될지 장담할 수 없었다.SC그룹에서는 지분 사건으로 그들을 물고늘어질 것이다.본사에서 움직이기 전에 남유주를 제거해야 했다.잠시 후, 남유주의 큰어머니는 사람이 없는 곳에 숨어들었다.그리고 약을 꺼내 술병에 쏟아넣으려고 했다.마침 취객이 그녀의 어깨를 부딪히고 지나가며 그녀가 바닥에 쓰러졌다.남유주 큰어머니가 고통에 신음을 흘리자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되었다.약병은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구석진 곳으로 굴러갔다.심청하는 싸늘한 눈빛으로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정말 뭐 하나 일을 제대로 하는 게 없는 일가족이었다.남유주의 큰아버지는 얼굴이 하얗게 질려 다급히 다가가서 아내의 손을 잡고 구급차를 호출했다.호텔에 미리 대기하고 있던 의료진이 달려왔고 큰어머니를 들것에 실어 병원으로 호송했다.심청하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사람들이 모두 흩어지고 그녀는 구석진 곳으로 가서 아무도 안 보는 틈을 타 약병을 손에 쥐었다.그리고 기회를 봐서 약을 와인에 쏟고 흔들었다.모든 게 끝난 뒤, 심청하는 손에 난 땀을 닦았다.이미 살인을 하기로 마음먹은 그녀였지만 직접 모든 일을 끝내고 나니
남유주는 미소를 지으며 소은정과 박수혁 사이를 스스럼없이 얘기했다.남유주는 지나간 둘의 과거를 신경 쓰지 않았다.박수혁은 소은정에게 다른 마음이 없었고 그들은 각자 다른 사람과 행복한 삶을 살기로 했다.소은정은 미소를 지으며 남유주가 건넨 상자를 열었다.안에는 팔찌가 있었다, 반짝이며 아름다운 화려한 목걸이의 모든 보석은 정교하게 다듬어져 있었고 본연의 미와 섬세함의 아름다움을 결합하는 느낌이 들게 했다.그녀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몇 년 동안 이런 것을 모으기를 좋아했는데... 고마워요, 진짜 마음에 들어요." 남유주는 화해의 의미로 소은정에게 팔찌를 건넸다.소은정은 미소를 지으며 팔찌를 착용했다."과거는 과거일 뿐이니 우린 서로 용서하는 게 어때요?"소은정은 머리를 끄덕였다. 그녀의 눈가에 눈물이 고였다."안타깝게도 난 어떤 선물도 준비하지 못했네요…"그녀는 가방에서 계약서를 꺼내고 남유주에게 건넸다.남유주는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서류 내용을 살펴보았다."이게 뭐예요?""원래는 소찬학의 주식이었지만 몇 년 전에 회사 소유로 되었어요. 아빠가 나이도 있고 해서 주식 대신 배당금을 주기로 했었어요, 근데 더는 그 사람의 것이 아니니까, 아빠가 유주 씨한테 넘기고 싶다고 하더라고요. 우리가 주는 작은 선물이니까 받아줬으면 좋겠어요." 얼굴이 굳었던 남유주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그녀는 계약서를 다시 내밀었다."전 받지 않을래요.""유주 씨, 이게 얼마나 큰 돈인지 몰라요? 술집을 사려고 했던 거 아니었어요? 이 돈으로 그 건물 같은 거 열 개는 살 수 있어요."소은정은 인내심을 가지고 설명했다.남유주는 웃음을 참고 머리를 흔들었다."이걸 받으면 소찬학이 내 생부라는 것을 인정하는 거잖아요, 끊을 수 없는 혈연관계를 받아들여야 하고, 내가 관여하지 않은 과거의 강탈과 억압을 직면해야 해요. 태어난 이래로 부모가 없는 존재로 살아왔고, 아직 그것을 원하지 않아요. 나의 아버지로 인정하고 싶지도 않고 소씨 가문과 혈연적인 관계가
거침없이 내뱉는 심청하의 태도에 소찬식이 얼굴이 어둡게 변했다.옆에서 듣고 있던 소은정이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소씨 가문의 주식은 애초에 저희 집안 거에요. 그리고 둘째 삼촌이 직접 주식을 그룹 소유로 돌리겠다고 서명까지 했어요. 자기는 주식 배당만 챙기겠다고, 회사를 떠난 지금 삼촌한테 배당금을 주는 것만으로도 감사하게 여겨야죠. 이모가 한 계산은 너무 터무니없어요. 이 주식들은 재산 분할과 관련이 없어요. 설령 분할을 한다 해도, 먼저 그룹의 이익을 보호하는 게 우리의 원칙이고요."심청하는 얼굴이 이상하게 변했다."저는 어떻게 해요? 그이가 감옥에 가고, 우리는 손가락 빨면서 굶어 죽으라는 거예요? 주식을 전부 넘겨주세요, 그럼 더는 따지지 않을게요!" 그녀는 무례한 태도로 단호하게 앉아 있었다.소찬식의 표정이 음울하게 어두워졌다, 그는 복잡한 눈빛으로 그녀를 한번 쳐다보았다."그만 돌아가세요, 돌아가서 경찰 소식 기다리세요. 찬식이 회사 자금을 자기 돈처럼 써버렸고 수억 달러를 횡령했어요. 그럼에도 그룹이 이 돈에 대해 따지지 않는 것만으로도 고맙게 생각하세요. 어떻게 돈을, 주식을 요구할 수 있어요?" "나는 찬식 씨가 아니에요, 다른 사람들 사정은 모르겠고, 누가 날 어떻게 생각하든 관심없어요."그는 말을 마친 뒤 옆에 서 있는 집사에게 눈짓했다."손님을 내보내.""네."집사의 대답에, 심청하는 일어서서 조급하게 말했다. "아주버님, 그렇게 말씀하시지 마세요. 형제들끼리 어떻게 이렇게 매정하게 굴어요? 이 일을 언론에 알리면 어떻게 될지 저도 기대되네요, 아마 언론도 이 일에 엄청난 관심을 둘 것 같거든요!"소찬식의 표정은 신경질적으로 굳어졌다, 눈빛이 차갑고 어둡게 변했다.공기 안에는 침묵이 깔렸다.소은정은 갑작스럽게 직감했다. 심청하가 예전과는 분위기가 많이 달라진 것을 눈치챘다.하지만 그들은 타협할 수 없었다. 한 푼이라도 더 주면, 그녀는 주제 파악을 못 하고 더 달라고 요구할 것이다.그녀는 절대로 이번 한
심청하의 얼굴이 새파랗게 변했다."다 해봐야죠, 우선 믿을 만한 변호사를 찾아서 형량부터 줄여줘요."옆에서 듣고 있던 소은정이 참지 못하고 가볍게 웃으며 소리를 냈다.소은정이 입을 열었다."마침 잘 오셨어요, 우리도 지금 삼촌을 어떻게 구할지 토론하고 있었거든요!"심청하는 의아한 눈빛으로 소은정을 쳐다보았다. "그러면... 어떤 방법을 논의했는데?"전동하는 멋도 모르고 웃었다. 그는 소은정의 대답을 기다렸다.소은정은 청량한 목소리로 한숨을 쉬었다."사실 우리가 변호사를 찾아서 물어봤어요. 판결이 심하게 나면, 사형이 나올 수도 있다고 하더라고요, 어쨌든 두 사람을 죽인 거니까.그래도 방법이 있어요, 둘째 삼촌은 그때 혼인 상태였잖아요?법정에 나서서 전부 둘째 삼촌이 한 게 아니라고 증언하면 돼요. 삼촌은 줄곧 숙모랑 함께 있었고, 그런 일을 꾸밀 시간적 여유도 없었다고!"심청하는 갑자기 얼굴이 하얗게 질리더니 충격을 받은 표정으로 일어섰다."너... 나보고 거짓 증언을 하라는 거야, 말이 되니? 그거야말로 불법이야!"소은정은 차가운 눈빛으로 비웃었다."불법이라는 것도 알고 계셨네요? 근데 왜 저희 아버지한테 당당하게 그런 짓을 요구하는 거예요?"심청하는 그제야 자신이 소은정에게 당했다는 것을 깨달았다.화가 난 그녀의 얼굴이 붉어졌다."은정아, 너 말 이상하게 하는 구나, 내가 마음이 너무 급해서 나온 말을 꼬투리 잡는 거니? 그리고 너희 삼촌 아직 유죄 판결도 나지 않았어. 그러니까 우리가 조금 더 노력하면 돼."소은정은 눈썹을 찌푸렸다."그럼 혼자 잘 해보세요! 우린 응원이나 하고 있을게요!""너 지금 뭐하자는 거니?" 심청하는 화를 내며 소찬식을 바라보았다."진짜 이렇게 내버려두실 거예요?"소찬식의 눈빛이 어둡게 깔렸다."자기가 한 일에 대가를 치러야 하겠죠, 저희는 아무런 상관도 하지 않을 겁니다. 그러니 제수씨도 저희를 그만 찾아오세요."심청하는 소찬식의 태도가 이렇게 차갑고 딱딱할 줄은 몰랐다.그녀는 잠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