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유라가 민하준의 뒤를 따라나가고 문이 닫히기도 전에 민하준이 그녀의 허리를 끌어안았다.“유라 씨, 이제 여긴 구경꾼들도 없는데. 좀 더 적극적으로 나와볼래요?”민하준의 품에 안긴 한유라는 낯선 민트향에 미간을 찌푸렸다.사실 민하준은 성격을 비롯해 어딜 봐도 한유라가 좋아하는 스타일은 아니었지만 가까이에서 보니 웬만한 신인 아이돌들은 얼굴도 못 내밀 정도로 잘생긴 외모에 눈을 질끈 감았다.그래, 이건 일이야, 일. 눈 딱 감고 넘어가자.“민 대표님께서 먼저 적극적으로 나오셔야죠. 혹시 모솔은 아니죠?”한유라가 매력적인 미소를 지었다.게임에서는 졌지만 기세가 밀릴 수는 없는 법! 자존심 좀 긁어볼까?한유라의 말에 민하준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다음 순간, 한유라가 그의 얼굴로 돌진했다.하지만 한유라가 “스킬”을 발휘하기도 전에 민하준의 혀가 그녀의 입속을 헤집기 시작했다.화려한 스킬에 숨이 턱 막히고 머리가 점점 혼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젠장, 뭐야. 이 남자 키스 왜 이렇게 잘해?한편 룸 안에 있던 소은정은 술에 취한 한유라가 무슨 짓을 당할지 걱정돼 그녀를 막는 손들을 전부 뿌리치고 문을 벌컥 열었다.그리고 문을 연 순간 소은정의 표정이 묘하게 굳었다.열정적으로 키스를 나누는 두 남녀 때문이 아니었다. 두 사람의 뒤로 익숙한 얼굴이 보였기 때문이다.“은호 오빠?”소은정의 목소리에 한유라는 귀신이라도 본 듯 소스라치게 놀라며 민하준을 밀쳐버리고 입을 벅벅 닦아냈다.그 모습에 미간을 찌푸리던 민하준도 고개를 돌려 소은호와 시선을 마주했다. 잘생긴 외모였지만 고고하고 차가운 분위기에 차마 다가갈 수조차 없는 그런 남자였다.소은호는 방금 전까지 입술을 나누던 두 사람을 지나쳐 소은정에게 물었다.“다리 다 나았다고 막 나가네? 술 마시러 나왔으면서 왜 오빠한테 말 안 했어?”소은정이 해명하려던 그때 한유라가 달려와 고개를 숙였다.“오빠, 죄송해요. 제가 은정이를 부른 거예요. 그게...”평소라면 괜찮다고 머리라도 헝클었을 소은호
민하준의 출현에 소은정의 경계심은 극에 달했다.뭐야? 이 남자, 우리 유라한테 무슨 짓을 하려고...!한편 한유라 또한 점점 인내심이 바닥을 치기 시작했다. 계약건은 이제 물 건너 간 것 같고... 그렇다면 더 이상 민하준의 비위를 맞춰줄 이유도 사라진 거나 마찬가지였다.“아니에요. 오늘은 다들 많이 마셨으니까 각자 집으로 돌아가죠.”말을 마친 한유라는 소은정의 팔짱을 끼고 다시 룸으로 들어가 비서에게 뒤처리를 맡긴 뒤 먼저 가서 미안하다는 말과 함께 물건을 챙겨 밖으로 나왔다.하지만 펍 밖으로 나온 뒤에도 한유라의 안색은 여전히 창백하기만 했다. 도대체 어디가 안 좋은 거냐고 소은정이 물으려던 그때, 소은호가 나타났다.미소와 함께 앞으로 나아가려던 한유라의 발걸음이 멈칫했다.소은호의 뒤에 또 다른 여자 한 명이 서 있었기 때문이었다.아름다운 얼굴, 여리여리한 몸매, 부드러운 분위기, 누가 봐도 미인인 여자였다.“선배님...?”한유라가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무표정한 얼굴로 계단을 내려오던 소은호가 고개를 돌려 낯선 여자를 향해 환하게 웃어 보였다. 그리고 그녀를 부축해 천천히 계단을 내려오기 시작했다. 서로를 향해 미소를 짓는 두 사람의 모습은 누가 봐도 선남선녀 그 자체, 차마 방해할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웠다.방금 전까지 창백하던 한유라의 표정이 더 일그러지기 시작했다.한편, 소은정은 미간을 찌푸리고 여자의 얼굴을 관찰하기 시작했다.저 여자... 어디서 봤더라?소은호 역시 한유라를 발견하고 흠칫하다 고개를 돌려 소은정에게 물었다.“은정아, 얘 기억해?”소은정은 솔직하게 고개를 저었고 침묵하던 한유라가 대신 대답했다.“우리 고등학교 최고의 여신님이잖아. 우리보다 2년 선배인 한시연 언니, 몰라?”한시연... 그런 사람이 있었던 것 같긴 한데. 얼굴이 기억이 안 나네...그 모습에 소은호는 어이가 없다는 듯 동생을 흘겨보았다.“기억력은 너보다 유라가 훨씬 더 낫네.”수수한 들꽃 같으면서도 눈을 떼지 못하게 만드는 묘
비록 그 누구도 대놓고 말하진 않았지만 눈치빠른 소은정이 한유라의 짝사랑을 모를 리가 없었다. 그저 한유라가 먼저 말하지 않으니 모르는 척 해줄뿐.그 동안 소은호도 한유라에게 항상 친절하게 대해 주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그녀가 소은정의 친구였기 때문, 김하늘을 비롯한 다른 친구들과 다를 바가 없었다.수많은 여자들의 유혹에도 돌부처처럼 차갑기만 한 오빠의 모습에 평생 결혼도 안 하고 사는 거 아닌가 싶었는데 오늘 보니 그런 소은호에게도 예외는 있는 것 같았다.그 상대가 한유라가 아니라 한시연이라는 게 슬펐지만.주먹을 꽉 쥐고 있던 한유라는 결국 그 자리에 쭈그리고 앉고 말았다. 살짝 떨리는 어깨만 봐도 알고 있었다.지금 그녀가 울고 있었다는 걸.얼마나 슬프면 소리 하나 못 내고 이렇게 서럽게 울까...소은정의 입장에서야 분명 한유라를 응원하고 싶었지만 그렇다고 소은호의 감정을 강요할 수는 없었다.지금 소은정이 할 수 있는 건 한유라의 옆에 역시 쭈그리고 앉아 말없이 함께해 주는 것뿐이었다.서럽게 우는 한유라의 모습을 보니 소은정의 눈시울도 따라서 시큰해지기 시작했다.사랑이 게임이라면 먼저 사랑에 빠지고 더 많이 사랑하는 쪽이 지기 마련, 저런 절망감을 소은정도 느껴본 적이 있기에 더 마음이 아팠다.3년 전, 사랑을 위해 가족과 의절까지 하며 용기를 냈었지만 결국 그녀를 기다리는 건 끝없는 비굴과 수모뿐이었으니까.그 어느 때보다 적극적으로 아니, 비굴하게 그녀의 마음을 보여주었지만 상대는 그런 그녀를 봐주지 않았다.아니지. 어쩌면 보고 싶지 않았을지도.이때, 누군가 두 사람의 앞으로 다가왔다. 거대한 그림자가 드리우고 시야갸 어두워졌다.붉어진 눈시울로 고개를 든 소은정의 눈동자가 살짝 흔들렸다.“누가 울린 거야?”완벽한 이목구비, 매력적인 목소리...박수혁이었다.왜 하필, 이 남자는 그녀의 마음이 가장 약해져있을 때 나타나는 걸까? 그 누구에게도 보여주고 싶지 않은 모습을 왜 이 남자한테는 항상 들키게 되는 걸까?한편, 빨개진
소은정은 바로 근처에 주차되어 있는 차를 가리켰다.“아니. 기사가 기다리고 있어. 먼저 갈게.”한유라의 운 얼굴이 들킬까 소은정은 잽싸게 고개를 돌렸다.한편 박수혁의 온 신경은 소은정에게만 쏠려있다 보니 한유라의 상태에 대해서는 전혀 눈치채지 못한 상태였다.차에 탄 소은정이 문을 닫으려던 그때, 커다란 손이 그녀의 손목을 덥썩 잡았다.피아니스트의 손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길고 아름다운 손이었다.어둠속에 얼굴을 숨긴 박수혁은 한참을 망설이다 겨우 입을 열었다.“은정아. 내가 자꾸 이렇게 나타나는 게 싫어? 난 그냥... 어떻게든 너 한번이라도 더 보고 싶어서 그랬어... 귀찮게 할 생각은 없었어...”박수혁의 말투에 담긴 조심스러움에 소은정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뭐야? 박수혁 맞아? 이런 말도 할 줄 아는 남자였나?어색한 침묵이 이어지고 운전석에 앉은 기사는 물론 한유라까지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기 시작했다.온몸에 소름이 돋긴 했지만 박수혁은 이를 악물었다.세게 나가서 안 통한다면 이런 전략을 사용해 볼 수밖에...아무 대답도 없는 소은정의 모습에 이것도 아닌가 싶어 손에 힘을 풀려던 그때, 드디어 소은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뭐 잘못 먹었어?”예상치 못한 질문에 박수혁이 흠칫하던 순간, 그의 손을 뿌리친 소은정이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어서 출발해요.”어느새 멀어져가는 차량을 멍하니 바라보던 박수혁의 표정에 다시 평소와 같은 자신감 넘치는 미소가 피어올랐다.하여간 예측할 수 없는 여자라니까.비록 이번 전략도 결국 실패로 돌아갔지만 절대 포기할 수 없다고 박수혁은 다시 마음을 다잡았다.이때 휴대폰이 눈치없이 울리기 시작했다.이한석이었다.“말해.”“회장님께서 해외에서 그분을 불러들이셨습니다. 뭔가를 또 꾸미고 계시는 것 같은데요.”소은정과의 만남 뒤로 박대한은 며칠간 조용한 듯하다 또다시 뭔가를 꾸미기 시작했다. 물론 박수혁은 그의 움직임 하나하나를 지켜보고 있었지만 말이다.하지만 해외에서 “그”를 다시 불러들인다는
말을 마친 한유라는 절망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와이너리에서 비싼 와인을 꺼내 식탁 위에 올려두었다.“인생이 어디 우리 맘대로 되니.”소은정이 한숨을 내쉬었다.그녀의 말에 침묵하던 한유라는 갑자기 손을 들어 자신의 뺨을 세게 때렸다.짝!그 소리에 놀란 소은정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유라야...”평소 털털한 성격에 항상 쿨해 보이던 한유라가 이렇게 약한 모습을 보이는 건 처음이었다. 꽁공 숨겨오던 비밀이 풀리니 감정이 봇물처럼 터져나오는 모양이었다. 민하준과 키스하는 모습을 들킨 순간, 소은호의 눈동자에서 순간 스쳐지나가는 혐오를 캐치한 순간, 한유라는 세상이 무너지는 기분이었다.소은호와는 영원히 잘 될 수 없을 것이란 예감이 들어서였다.소은정의 친구가 아니었다면 그녀의 이름마저 기억하지 못했을 거란 생각에 가슴이 쓰려왔다.와인잔에 붉은 와인을 가득 따른 한유라는 꿀꺽꿀꺽 술을 들이켰다.“은정아, 오늘 일 누구한테도 말하지 마. 다른 사람들까지 아는 거 싫어.”이런 치욕을 다른 사람과 공유하고 싶지 않은 한유라였다.“그럼 당연하지...”걱정스러운 얼굴로 한유라의 표정을 살피던 소은정이 조심스럽게 물었다.“왜... 오빠한테 고백 한번 못 안 했던 거야?”소은정의 질문에 한유라가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그거 알아? 난 시연 언니한테 안돼. 난 시연 언니를 따라하는 짝퉁일 뿐이니까. 시연 언니 대학교 1학년 때부터 은호 오빠랑 사귀었어. 그러다 3학년 때 부도 때문에 해외로 도망치 듯 떠났었지. 그렇게 해외에서 알바를 병행하며 학업까지 마치고 다시 창업에 성공한 모양이더라. 그런데 오늘 보니까... 그 동안 언니를 어줍잖게 따라하려 했던 내가 너무 우스워졌어. 언니의 그 맑고 깨끗한 눈동자... 고등학교 때 처음 만났던 그때와 똑같았으니까. 이 세상과 타협한 더러운 나와는 차원이 다른 사람이야.”7, 8년만에 만났음에도 예전과 똑같은 마음인 것 같은 두 사람의 모습에 한유라는 부러우면서도 질투가 앞섰다.말도 없
한유라다운 해결 방식에 미간을 찌푸리던 소은정이 싱긋 미소를 지었다.역시 유라야. 솔직하고 시원시원하네.“어제 게임도 지고 계약도 물 건너 간 것 같고 해서 기분이 더 안 좋았나 봐. 너라도 있어서 다행이었어. 안 그랬으면 정말 제대로 쪽팔릴 뻔했다니까.”괜시리 더 가벼운 말투로 그녀를 안심시키는 한유라의 모습이 괜시리 더 안쓰러워 소은정은 친구를 꼭 안아주었다.“내가 더 좋은 남자 소개시켜줄게. 이 세상에 반이 남자인데 우리 오빠보다 더 좋은 남자 한 명 없겠어? 그리고... 남자보다는 돈이 훨씬 더 좋아...”하, 소은정답네. 뭐 일리가 있는 것 같기도?아무리 괜찮은 척해도 실연은 실연, 소은정은 한유라에게 혼자 있을 시간을 주기 위해 먼저 회사로 떠났다.회사에 예비용으로 보관해 둔 옷으로 갈아입고 화장까지 고친 소은정은 어제 밤새 술을 마신 사람으로 보이지 않을 정도로 상쾌해 보였다.잠시 후 우연준이 사무실로 들어와 브리핑을 시작했다.“...그리고 태한그룹 세력구조에 큰 움직임이 있을 것으로 예상됩니다. 대주주들이 벌써 움직이기 시작했어요.”예상 중인 일인지라 소은정은 눈썹을 치켜세운 뒤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그 영감탱이가 가만히 있을 리가 없지.“오빠는요?”문득 떠오른 한유라 생각에 소은정이 물었다.“보름 동안 휴가 내셨습니다. 그 동안 회사 업무는 대표님께서 전부 처리하셔야 할 것 같아요.”뭐? 보름?소은정이 눈을 커다랗게 떴다.“저한테는 아무 말도 없었는데요?”“솔직하게 말씀드리면 반대할게 뻔하다고...”하, 그래서 이 난장판을 전부 나한테 떠넘기고 가시겠다?평소 쓸데없는 말은 하지 않는 우연준이지만 오늘만큼은 왠지 들뜬 표정이었다.“해외로 가신다던데요? 여자친구분을 도와 업무를 처리하신다고는 하는데... 제가 볼 때는 휴가를 가신 것 같습니다.”우연준의 말에 소은정이 한숨을 내쉬었다.휴, 그래. 오빠도 지금까지 일만 하느라 얼마나 힘들겠어. 나까지 피곤하게 하지 말자. 오빠 인생도 중요하잖아.“알겠어요
회의실에 적막이 감돌고 그 누구도 먼저 입을 열지 않았다.자리에 앉은 사람들의 수만 보면 분명 박수혁이 밀리는 상황이었지만 박수혁의 얼굴에서는 그 어떤 당황스러움도 엿볼 수 없었다.먼저 입을 여는 쪽이 기싸움에서 지는 것이 국룰, 박수혁은 충분히 인내심을 발휘하고 있었다.눈을 가늘게 뜬 채 손자를 바라보던 박대한이 먼저 입을 열었다. 세상만사를 온전히 겪어낸 혼탁한 눈동자가 날카롭게 빛났다.“수혁아, 그 동안 네가 많이 성장하긴 했지만 아직 부족해. 주주들과 상의해 봤는데 아직 대표 자리를 맡기엔 많이 미숙한 것 같구나. 그래서 주주총회를 소집한 거야. 오늘 이 자리에서 대표이사를 교체할 거다.”박대한은 별다른 핑계 없이 바로 본심을 드러냈다.오늘 그가 여기까지 온 이유는 대표이사를 바꾸기 위함이라는 선전포고나 마찬가지였다.박대한의 말에 옆에 있던 집안 어른이자 대주주 중 한 명은 이 무거운 분위기를 조금이나마 풀고 싶었는지 어색하게 웃으며 말을 이어갔다.“수혁아, 회장님 뜻은 이래. 그동안 일만 하면서 지내면서 고생 많았잖니? 머리도 식힐겸 해외로 유학을 떠나는 건 어떻겠냐? 학업을 마치고 나서 태한그룹으로 다시 돌아오는 것도 괜찮고.”하지만 “물론 다시 돌아온다면 신입 사원으로 들어와야 할 테지만...”라는 말은 차마 내뱉지 못했다. 순간 박수혁의 눈동자에 차가운 빛이 스쳐지났다. 태한그룹 말고도 이 수많은 기업을 거느리고 있는 그였다. 솔직히 태한그룹 대표이사 자리에서 물러난다 해도 그가 앞으로 살아가는 데는 큰 어려움이 없을 것이다.하지만, 이렇게 쫓겨나듯 물러나는 건 용납할 수 없었다.고개를 든 박수혁이 여유롭게 입을 열었다.“할아버지, 그럼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시죠? 사람도 이렇게 많이 부르시고. 준비 많이 하신 것 같은데...”태한그룹의 지분 중 60%는 박수혁 소유다. 그런 그를 밀어내기 위해 박대한이 어떤 수를 준비했는지 궁금한 박수혁이었다.“네가 가지고 있는 지분 중 10%는 내가 너에게 위탁 관리를 부탁한 것이지
출국했던 이민혜와 박예리가 모습을 드러내고 주주들의 얼굴에 놀라움이 스쳤다.이민혜는 박대한을 보자마자 눈물을 흘리며 쪼르르 달려왔다.“아버님, 저 너무 억울해요. 수혁이가 저한테 어떻게 했는지 보셨죠? 쟤 눈에는 회사는 물론이고 가족도 없어요. 소은정 그 여우 같은 계집애한테 빠져서는 눈에 뵈는 게 없다니까요? 제 배 아파 낳은 아이지만 이렇게는 못 살겠어요!”박수혁의 생모인 이민혜까지 박수혁을 질타하니 주주들의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했다.이런 상황이라면 천하의 박수혁이라도 고비를 넘지 못할 것 같다는 게 모두의 생각이었다.그 동안 당한 게 많아서일까 가만히 서 있기만 하는 박예리와 달리 이번 기회에 아들의 기를 눌러버리리라 마음 먹은 이민혜는 눈물바람으로 다른 주주들을 향해 말했다.“저희 남편에게도 태한그룹의 지분이 어느 정도 있는 걸로 알고 있어요. 제 남편을 대표해 이 자리에서 저희의 의견을 밝히겠습니다. 저희는 회장님의 결정을 따르겠어요!”쿠궁!이민혜의 말과 함께 회의실이 술렁거리기 시작했다.“이제 확실해진 것 같네.”“천하의 박수혁이 정말 이렇게 쫓겨나는 건가?”“그럼 우리는 어떻게 되는 거야...”이민혜의 등장과 함께 박씨 가문에서 박수혁의 편을 드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는 것이 입증되고 주주들은 급격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하지만 극도로 불리한 듯한 상황임에도 박수혁은 여유로운 미소를 지었다. 물론 그 미소를 바라보는 주주들은 온몸에 소름이 돋는 기분이었지만.박수혁이 손을 들자 이한석이 바로 파일 하나를 건넸다.파일을 받은 박수혁은 내용을 확인도 하지 않고 책상 위로 휙 던져버렸다.쿵 소리와 함께 넥타이를 살짝 푼 박수혁이 차가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다들 잘 보세요. 이건 제 아버지가 직접 사인한 지분 양도 계약서입니다. 그런데 무슨 자격으로 아버지의 지분을 행사하겠다는 거죠?”순간 이민혜의 표정이 변하고 커다란 눈으로 계약서를 바라보았다.수많은 글씨들 중 가장 선명하게 보이는 건 남편인 박봉원의 사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