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깥바람이 따뜻하게 불어 들어오자,차안의 침향목 냄새가 옅어졌다.차는 안정적이고 편하게 달렸다.차 안의 남자는 날카롭고 엄숙한 얼굴로 누군가와 통화를 하고 있었다.아무도 주의하지 못했다.바로 옆 차선에서 검은색 벤틀리의 왼쪽 뒤편 차가 보였다.원망으로 가득 찬 시뻘건 핏발이 선 눈동자가 검은 벤틀리를 죽일 듯이 노려보고 있었다.그녀는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전 대표님, 때가 되었어요. 사람은요?”전화기에서 희미한 전류 소리가 들려오더니 이내 부드럽고 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성미려 씨 차 뒤편의 세 번째 빨간색 일반 승용차를 따라가세요. 일이 성사되고 보는 시선이 없을 때 차에 오르면 기사가 모셔다 드릴 겁니다.”그 말에 성미려는 백미러를 바라보았다.말 그대로 세 번째 차가 바로 빨간 차였다.그녀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그래요.”성미려는 만족스러운 듯 전화를 끊었다.그녀는 박수혁과 함께 죽으려 했으나 죽기 싫었다. 그러니 박수혁이 혼자 죽는 모습을 지켜볼 생각이다!그녀의 실력으로 인터넷에서 박수혁을 깎아내리긴 힘들었다. 박수혁은 너무 쉽게 자본을 장악할 수 있다.하여 그녀는 가장 어리석지만 효과적인 방법을 사용하려고 한다.그때에도 잔인하게 그의 몸에 칼을 찔렀다.여기까지 생각한 성미려는 긴장감이 사라지고, 순간 의욕으로 가득 찼다.햇빛이 쨍쨍 내리쬐는 바람에 그녀는 저도 몰래 눈을 감았고, 그 사이 갑자기 앞길이 막혀버렸다.하얀색 차 한 대가 갑자기 그녀의 앞으로 끼어들려고 했다.이렇게 되면 그녀는 검은색 벤틀리를 볼 수 없게 된다.그녀는 불만스럽게 경적을 울렸다.하얀 차도 물러서지 않고 여러 번 경적을 울렸다.당황한 성미려는 분노가 싹 가셨고, 경적 소리에 박수혁이 눈치라도 챌까 봐 걱정되었다.그녀는 다급히 양쪽의 차창을 올리고 약간 뒤로 차를 후진시켰다.하얀 차는 완전히 성미려 차 앞으로 끼어들었다.차주는 남자였는데 갑자기 차창을 내리더니 가운뎃 손가락을 치켜들고 도발했다.화가 난 성미려는 안색이 새파
박수혁이 말하고 있는 도중, 갑자기 경찰이 뛰어왔다.경찰은 흥분된 어조로 말했다.“서장님, 한 용감한 시민이 현장에서 성미려를 데려갔다고 합니다. 왠지 수상하다고 생각되어 데려왔다는데, 일이 너무 쉽게 풀리게 됐습니다.”서장은 멈칫하더니 정신을 번쩍 차리고 물었다.“사람은?”“밖에 있습니다. 팀원이 데리고 오는 중입니다……”이때 두 경찰은 성미려를 제압해 수갑을 채운 채 데려왔다.비록 머리가 어지럽지만 여기가 어딘지는 충분히 알 수 있다.성미려는 힘껏 몸부림쳤다.“이거 놔, 당신들이 뭔데 날 연행해?”하지만 아무리 울부짖어도 소용이 없었다.그녀는 서러움이 몰려왔다.‘왜 하늘은 이렇게 불공평한 거야? 결국 잡혔어. 어떻게 된 거지? 그 기사가? 아니면 전동하가? 대체 어디서부터 문제가 생긴 걸까?’성미려는 혼란스러웠다.하지만 끝까지 인정하지 않는다면, 그저 보통 사고에 지나치지 않는다……피해자의 죽음은 트럭 기사와 관련 있고, 그녀는 이미 트럭 기사를 매수했었다.그녀는 경찰의 제압에서 벗어나려고 안간힘을 쓰다가 힘이 풀려 넘어지고 말았다.고통에 몸부림치던 그녀는 번쩍 정신을 차렸다.그 나른한 기운도 순간 사라졌다.이때 누군가 뒤에서 큰 소리로 외쳤다.“당장 제압해! 이 여자는 강력한 범죄 용의자야!”경찰은 강경하게 그녀를 잡아당겼다.몸을 일으키던 그녀는, 멀지 않은 곳에 서 있는 남자를 발견했다.그녀는 순간 얼어붙었다.‘죽은 거 아니었어? 대체 어떻게? 분명 벤틀리에 타고 있는 거 확인했는데. 내 두 눈으로 직접 트럭이 들이받는 걸 보았는데. 젠장.’하지만 박수혁은 멀쩡하게 서 있었다. 그의 차갑고 담담한 시선은 성미려를 향했다.그녀의 계획은 완전한 실패라고 알려주는 듯 했다.그런 오만한 냉담함에 성미려는 무력감과 두려움을 느꼈다.마치 누군가 그녀의 목을 조이고 있는 듯이 점점 정신이 혼미해졌다.그녀는 살을 에는 듯한 추위를 느꼈고,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박수혁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심지어 옆에 있는 기사
와인바.낮에는 비교적 조용한 편이지만, 이미 날이 어둑해지기 시작했다.와인바는 영업을 준비하기 시작했다.“남 사장은요?”박수혁이 물었다.웨이터는 위층을 가리켰고 박수혁은 고개를 끄덕였다.남유주는 저녁 장사를 위해 방에서 휴식하고 있었다.박수혁은 조용히 다가갔고, 남유주는 그가 올 것을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하지만 그녀는 별 반응이 없었고 그저 한 번 쳐다보고는 다시 돌아누웠다.“어쩐 일이에요?”그녀는 나른한 목소리로 물었다.박수혁은 그녀에게 다가가 외투를 벗더니 이불을 사이에 두고 그녀를 껴안았다.이 순간, 텅 비었던 마음이 한순간에 꽉 채워졌다.박수혁은 눈을 감고 익숙한 그녀의 향기를 느꼈다.그 기분은 다시 그녀를 가진 기분보다 더 애틋했다.남유주는 직감적으로 박수혁에게 무슨 일이 생겼을 거라는 걸 느꼈지만, 굳이 묻기 싫었다.그녀는 박수혁을 더 깊게 알기 싫었다.기대가 크면 실망도 커지는 법이니 말이다.박수혁은 몇 분 동안 침묵을 지키다가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유주야, 나 오늘……”박수혁은 오늘 발생한 일을 그녀에게 알려주고 싶었다.‘날 걱정해 주겠지? 말은 거칠어도 마음은 약한 여자니까. 아마도 내가 대처를 잘했다고 칭찬할지도 몰라.’하지만 박수혁이 입을 열기도 전에 남유주가 먼저 말했다.“수혁 씨, 나 오늘 피곤해요. 이따가 일어나서 일도 계속해야 하니까. 잠시만 조용히 있어 봐요. 나중에 얘기해요.”그녀는 눈도 못 뜰 지경으로 졸렸다.중얼거리는 그녀의 말에 박수혁의 표정은 그대로 굳어져 버렸고, 목구멍까지 올라왔던 말들을 삼켜버리고 그녀를 껴안고 있는 두 팔에 힘을 뺐다.“그래, 그러자. 빨리 자.”박수혁은 남유주의 머리를 쓰다듬고 옆에 조용히 누워있었다.얼마나 지났을까, 남유주는 아래층에서 들려오는 드럼 소리에 눈을 떴다.위층은 비록 방음이 좋지만,그녀는 이미 습관이 되었던지라 작은 소리에도 예민하게 반응한다.몸을 일으킨 그녀는 옆에서 조용히 잠든 박수혁을 바라보았다.차갑고 날카로운 턱선, 그
남유주는 환히 웃는 박수혁의 얼굴을 보았다. 웃고 있었지만 여전히 한기가 느껴졌고 다가가기 힘든 얼굴이었다. 그녀는 영원히 박수혁 마음속의 제일 중요한 존재로 남을수 없었다.박수혁은 부드러운 말투로 그녀를 탓하지 않는다고 했지만, 사실 그 말은 남유주의 가슴을 제대로 찔렀다.박수혁은 그녀 마음속 어두운 곳까지 훤히 들여다보는 듯했다.남유주는 멈칫하더니 벌떡 일어나 앞으로 두 걸음 걸어갔다. 그러고는 애써 정서를 조절하고 고개를 돌려 쌀쌀맞게 말했다.“포장할 필요 없어요. 주제넘었다는 말이 하고 싶은 거 아닌가요? 사과도 했고 다신 안 그러겠다고 했어요. 그런데 굳이 이렇게 모욕을 줘야겠어요?”박수혁은 안색이 살짝 변하더니 눈빛이 어두워졌다.“모욕할 생각은 없어. 난 당신과 진지하게 대화했을 뿐이야. 그러니 복잡하게 생각하지 마.”“정상적인 사람이라면 다들 복잡하게 생각했을 거예요. 그래요, 메시지 봤어요. 그래서요? 두 사람 대화에 사업 기밀이 있었어요? 그렇다면 왜 나한테 보여줬어요? 아니라면 못 볼 건 또 뭐 있어요?왜요, 결혼할 수 없다고 해서 여자친구로서 이런 권리도 주어지지 않는 건가요?아니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여자친구가 천유희로 바뀌기라도 했나요?”남유주는 깊은 심호흡을 했다. 오랫동안 참아왔던 말을 드디어 내뱉었다.그녀는 참고 또 참는 사람이 아니다.좋으면 만나고, 싫으면 헤어지면 그만이다.이렇게 복잡하게 일을 만들다니, 그녀도 기분이 상당히 불쾌하다.방안은 한순간에 침묵으로 뒤덮였다.박수혁의 눈빛은 이내 평온해졌고, 쌀쌀해졌다.그는 그녀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비록 아무런 표정이 없었지만, 팽팽한 입가는 그의 기분을 충분히 표현했다.침묵, 그리고 냉담.남유주가 불만을 다 토로하자 그제야 박수혁은 자리에 앉아 턱을 들어 그녀와 시선을 마주쳤다.“결혼 문제도 설명했고, 천유희의 일도 설명했는데 왜 자꾸 지난 얘기를 꺼내는 거야?내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면 그때 말했어야지. 왜 이제 와서 또 따지는 건데?남유
만약 이 기회에 화풀이할 수 있다면 기분이 아주 상쾌할 것이다.남유주는 꿈에서도 두 사람이 이렇게 서로 독한 말을 내뱉을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다.누구를 원망해야 할지 그녀도 알 수 없었다.화가 난 박수혁은 이마에 핏줄이 솟은 채 주먹을 불끈 쥐고 감정을 억누르고 있었다.그녀의 말은 불꽃이 되어 그의 마음속에 불을 질렀다.어쩌면 그는 자기의 어두운 면을 이미 알아차렸을지도 모르지만, 안타깝게 아무도 그에게 이런 얘기를 해주지 않았다.하지만 남유주는 거침없다.남유주는 팔짱을 끼고 박수혁을 비웃었다.“정곡을 찔렀어요? 수혁 씨, 그만 인정해요. 이젠 당신이 누구를 좋아하든 상관없어요. 난 그저 내가 당신의 숨겨진 여자가 되는 게 싫을 뿐이에요!”그녀의 말투는 차갑고 직설적이어서 한치의 여지도 느껴지지 않는다.“얘기 끝났어? 넌 오늘 나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묻지도 않고, 고작 메시지 하나 때문에 날 이렇게 자극하는 거야?여자친구로서 너도 제대로 한 거 없어!”박수혁은 당장이라도 터질 것 같았다. 갑자기 그는 손을 뻗어 그녀를 터치하려고 했지만 이내 공중에서 멈추더니 주먹을 꽉 쥐었다.이때, 남유주의 얼굴이 굳어버렸다.이 행동은 마치 박수혁이 그녀의 뺨을 때리려고 하다가 멈춘 것으로 보였다.남유주는 박수혁의 손을 내치며 쌀쌀맞게 말했다.“때리려고요?”남유주는 쌀쌀하게 웃었다. 그녀는 남자의 행동에 눌랄 이유가 없다.이형욱에게 가정폭력을 당하면서 그녀의 마음속에는 남자는 언제든지 폭력을 행사할 수 있다는 고정관념이 형성되었다.하지만 지금은 참을 필요가 없다.그녀는 화가 치밀어 올라 박수혁의 뺨을 때렸다.“짝!”소리는 아주 높았다.경쾌하고 무거웠다.박수혁의 고개가 살짝 돌아갔다. 그는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차가운 말투로 말했다.“남유주, 너 미쳤어? 그동안 내가 너무 잘해줬지? 연인 사이를 떠나서 내가 얼마나 널 많이 도와줬는데 아직도 부족해?너와 이형욱 어떻게 마무리 지었는데? 살인미수 사건도 내가
한수근이 물었다.“사장님, 무슨 일이세요? 벌써 10시가 다 되어 가는데도 안 내려와서 와봤어요. 박 대표님과 나간 줄 알았잖아요.”남유주는 아주 평온한 얼굴로 눈물 한 방울도 흘리지 않았다.보기엔 별일 없어 보이지만 넋이 나간 상태로 앉아 있으니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그녀는 멈칫하더니 서서히 시선을 옮겨 한수근을 바라보았다.“우리 헤어졌어요.”한수근은 잠시 멈칫하더니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잘됐네요. 전 사장님 응원해요.”“응원한다고요? 그 사람 꼭 잡으라 그러지 않았어요?”한수근은 눈썹을 치켜올리며 웃었다.“그건 두 사람이 서로 좋아한다는 전제하에, 사장님이 지난 결혼에서 벗어날 수 있길 바라는 마음으로 말한 거였어요.하지만 지금 보니 인터넷에 박 대표님과 그 여자에 관한 댓글이 봇물 터지듯 쏟아지는데 아무런 해명도 하지 않았다니. 이건 스캔들이 퍼지길 바라는 거 아닌가요?그렇다면 더는 할 말도 없어요.이렇게 사장님에게 상처를 주는 사람을 왜 만나요? 어디다 쓰게요?”그 말에 남유주의 두 눈이 반짝이더니 갑자기 빙그레 웃었다.“수근 씨는 정말 연애 전문가 같아요. 수근 씨가 만약 여자를 좋아한다면 인기 완전 많을 텐데.”한수근은 진지하게 말했다.“만약은 없어요. 전 취향이 확고해요. 전 제 애인한테 완전 충성이에요.”남유주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바닥에서 일어났다.“가요, 일하러.”한수근은 그녀의 어깨를 누르며 한숨을 내쉬었다.“됐어요. 하루 쉬게 해줄게요. 그러니까 여기서 쉬어요. 아래층은 제가 보고 있을게요.”“진짜요?”“전 우리 사장님과 달리 양심적인 자본가라고요.”한수근은 그녀에게 한 소리하더니 이내 도망가 버렸다.한수근의 덕분에 그녀는 기분이 많이 좋아졌다.창밖은 아주 조용했다.마침 창문에 내려앉은 나뭇가지들의 그림자는 보기 좋게 아른거렸다.조용한 밤이 이렇게 아름답다는 것을 오늘 처음 알았다.방음 효과 때문에 와인바의 음악 소리는 거의 그녀를 방해할 수 없었다.……며칠 뒤.성미려 사건은 형사사
박수혁은 커피를 들고 사무실로 돌아갔다.여자는 기쁨에 찬 얼굴로 이한석을 바라보았다. 이한석은 미소를 지으며 손을 흔들어 주고는 박수혁을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그의 손에는 결재를 기다리는 서류가 들려 있었다.“대표님, 오후에 프로젝트 관련 회의가 있고 이사회가 있을 예정입니다. 직접 가실 건가요?”박수혁은 고개를 들고 쌀쌀맞은 말투로 대꾸했다.“내가 참석할 필요가 없는 회의라고 말하고 싶은 거야?”“물론 아니죠.”이한석이 당황하며 말했다.“일정이 있으시면 나중으로 미루겠습니다.”박수혁은 입을 꾹 다물고 잠시 고민하다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그 여자는 한 번도 날 안 찾아왔단 말이지?”이한석은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아직도 남유주 씨 일을 신경 쓰고 계시는구나.’박수혁의 눈빛이 차갑게 식었다.그에게서 위험한 기운이 풍겼다.이대로 정말 끝인 걸까?참 포기가 빠른 여자였다.이한석은 입술을 질끈 깨물고 조심스럽게 물었다.“후회되시면 직접 찾아가시면 되잖아요.”“후회? 내가? 왜 그렇게 생각하지?”박수혁은 신경질적으로 대꾸하며 이한석을 쏘아보았다.이한석은 얌전히 입을 다물었다.잠시 침묵이 흘렀다.박수혁은 서류를 던지듯 책상에 내려놓았다.예민한 성격을 가진 그가 여태 참은 것만해도 대단한 인내심을 발휘한 결과였다.정말 너무하지 않은가.그녀는 정녕 자신이 뱉은 말이 상대에게 어떤 상처를 줄지 생각을 안 해봤을까?그는 여자에게 뭔가를 양보할수록 더 기고만장해질 거라 생각했기에 그녀를 찾지 않았다.하지만 며칠이 지나도 그녀에게서는 연락 한번 없었다.그녀가 먼저 숙이고 들어오면 그는 없던 일로 해줄 생각이었다.매번 남자가 타협할 수는 없지 않은가?하지만 그녀는 전혀 그럴 생각이 없어 보였다.그녀에게 줬던 카드 역시 퀵으로 보내왔다.얼굴도 마주하기 싫다는 의미일까.박수혁은 화를 내고 싶어도 상대가 없으니 일에만 몰두했다.이한석은 바닥에 떨어진 서류를 집어들며 그에게 말했다.“대표님, 이거 기회 아닌가
남유주는 이런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그녀는 다급히 쫓아가서 선망의 눈빛으로 손호영을 바라보며 말했다.“혹시 사인 좀 부탁드려도 될까요?”손호영은 환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볼펜을 꺼냈다.남유주는 그제야 노트를 챙기지 않은 것을 후회하며 자신의 하얀 치마를 내려다보았다.“여기 해주세요. 가지고 가서 잘 소장해야겠어요!”손호영은 예의 바르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녀의 치마에 자신의 이름을 사인했다.남유주는 그제야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손호영이 웃으며 돌아섰다.“다음에 만나요. 연락처는 하늘 씨한테 받아서 있어요. 이번에 드라마 촬영 들어가는데 엑스트라로 초대하고 싶어요.”“저를요? 정말 영광이에요!”남유주는 좋아하는 스타와 같은 드라마에 출연할 수 있다는 말에 가슴이 벅차올랐다.손호영은 웃으며 엘리베이터로 들어섰다.남유주가 그쪽으로 시선을 돌려 보니 엘리베이터 안에 한 남자가 싸늘하게 식은 눈빛으로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그는 그냥 그곳에 서 있는 것뿐인데도 강렬한 압박감을 풍기고 있었다.박수혁은 항상 그런 존재였다.존재 자체만으로도 숨막히게 하는 사람.처음에 그와 함께할 때는 그 모든 불편함을 감수했지만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헤어진지 3개월, 그녀는 생각보다 잘 지내고 있었다.설렘을 잃었지만 자유를 얻었다.박수혁의 등 뒤에는 네 명의 경호원이 서 있었다.손호영이 엘리베이터에 오르자 경호원들이 그를 구석쪽으로 밀며 박수혁을 위해 길을 내주었다.박수혁은 무표정한 얼굴로 엘리베이터를 나와 남유주를 싸늘하게 힐끗 바라보고는 회의실로 향했다.남유주는 표정을 수습하고 손호영을 바라보았다.손호영은 개의치 않는 듯, 그녀를 향해 손을 흔들어 주었다.엘리베이터에 누가 있는지 확인하지 않고 탄 게 잘못이라면 잘못이었다.남자의 뒷모습이 어딘가 익숙했다.엘리베이터 문이 닫히고 남유주는 아쉬운 표정으로 회의실로 향했다.박수혁은 들어가지 않고 문앞에서 통화를 하고 있었다.그의 무심한 시선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