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유주는 환히 웃는 박수혁의 얼굴을 보았다. 웃고 있었지만 여전히 한기가 느껴졌고 다가가기 힘든 얼굴이었다. 그녀는 영원히 박수혁 마음속의 제일 중요한 존재로 남을수 없었다.박수혁은 부드러운 말투로 그녀를 탓하지 않는다고 했지만, 사실 그 말은 남유주의 가슴을 제대로 찔렀다.박수혁은 그녀 마음속 어두운 곳까지 훤히 들여다보는 듯했다.남유주는 멈칫하더니 벌떡 일어나 앞으로 두 걸음 걸어갔다. 그러고는 애써 정서를 조절하고 고개를 돌려 쌀쌀맞게 말했다.“포장할 필요 없어요. 주제넘었다는 말이 하고 싶은 거 아닌가요? 사과도 했고 다신 안 그러겠다고 했어요. 그런데 굳이 이렇게 모욕을 줘야겠어요?”박수혁은 안색이 살짝 변하더니 눈빛이 어두워졌다.“모욕할 생각은 없어. 난 당신과 진지하게 대화했을 뿐이야. 그러니 복잡하게 생각하지 마.”“정상적인 사람이라면 다들 복잡하게 생각했을 거예요. 그래요, 메시지 봤어요. 그래서요? 두 사람 대화에 사업 기밀이 있었어요? 그렇다면 왜 나한테 보여줬어요? 아니라면 못 볼 건 또 뭐 있어요?왜요, 결혼할 수 없다고 해서 여자친구로서 이런 권리도 주어지지 않는 건가요?아니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여자친구가 천유희로 바뀌기라도 했나요?”남유주는 깊은 심호흡을 했다. 오랫동안 참아왔던 말을 드디어 내뱉었다.그녀는 참고 또 참는 사람이 아니다.좋으면 만나고, 싫으면 헤어지면 그만이다.이렇게 복잡하게 일을 만들다니, 그녀도 기분이 상당히 불쾌하다.방안은 한순간에 침묵으로 뒤덮였다.박수혁의 눈빛은 이내 평온해졌고, 쌀쌀해졌다.그는 그녀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비록 아무런 표정이 없었지만, 팽팽한 입가는 그의 기분을 충분히 표현했다.침묵, 그리고 냉담.남유주가 불만을 다 토로하자 그제야 박수혁은 자리에 앉아 턱을 들어 그녀와 시선을 마주쳤다.“결혼 문제도 설명했고, 천유희의 일도 설명했는데 왜 자꾸 지난 얘기를 꺼내는 거야?내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면 그때 말했어야지. 왜 이제 와서 또 따지는 건데?남유
만약 이 기회에 화풀이할 수 있다면 기분이 아주 상쾌할 것이다.남유주는 꿈에서도 두 사람이 이렇게 서로 독한 말을 내뱉을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다.누구를 원망해야 할지 그녀도 알 수 없었다.화가 난 박수혁은 이마에 핏줄이 솟은 채 주먹을 불끈 쥐고 감정을 억누르고 있었다.그녀의 말은 불꽃이 되어 그의 마음속에 불을 질렀다.어쩌면 그는 자기의 어두운 면을 이미 알아차렸을지도 모르지만, 안타깝게 아무도 그에게 이런 얘기를 해주지 않았다.하지만 남유주는 거침없다.남유주는 팔짱을 끼고 박수혁을 비웃었다.“정곡을 찔렀어요? 수혁 씨, 그만 인정해요. 이젠 당신이 누구를 좋아하든 상관없어요. 난 그저 내가 당신의 숨겨진 여자가 되는 게 싫을 뿐이에요!”그녀의 말투는 차갑고 직설적이어서 한치의 여지도 느껴지지 않는다.“얘기 끝났어? 넌 오늘 나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묻지도 않고, 고작 메시지 하나 때문에 날 이렇게 자극하는 거야?여자친구로서 너도 제대로 한 거 없어!”박수혁은 당장이라도 터질 것 같았다. 갑자기 그는 손을 뻗어 그녀를 터치하려고 했지만 이내 공중에서 멈추더니 주먹을 꽉 쥐었다.이때, 남유주의 얼굴이 굳어버렸다.이 행동은 마치 박수혁이 그녀의 뺨을 때리려고 하다가 멈춘 것으로 보였다.남유주는 박수혁의 손을 내치며 쌀쌀맞게 말했다.“때리려고요?”남유주는 쌀쌀하게 웃었다. 그녀는 남자의 행동에 눌랄 이유가 없다.이형욱에게 가정폭력을 당하면서 그녀의 마음속에는 남자는 언제든지 폭력을 행사할 수 있다는 고정관념이 형성되었다.하지만 지금은 참을 필요가 없다.그녀는 화가 치밀어 올라 박수혁의 뺨을 때렸다.“짝!”소리는 아주 높았다.경쾌하고 무거웠다.박수혁의 고개가 살짝 돌아갔다. 그는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차가운 말투로 말했다.“남유주, 너 미쳤어? 그동안 내가 너무 잘해줬지? 연인 사이를 떠나서 내가 얼마나 널 많이 도와줬는데 아직도 부족해?너와 이형욱 어떻게 마무리 지었는데? 살인미수 사건도 내가
한수근이 물었다.“사장님, 무슨 일이세요? 벌써 10시가 다 되어 가는데도 안 내려와서 와봤어요. 박 대표님과 나간 줄 알았잖아요.”남유주는 아주 평온한 얼굴로 눈물 한 방울도 흘리지 않았다.보기엔 별일 없어 보이지만 넋이 나간 상태로 앉아 있으니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그녀는 멈칫하더니 서서히 시선을 옮겨 한수근을 바라보았다.“우리 헤어졌어요.”한수근은 잠시 멈칫하더니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잘됐네요. 전 사장님 응원해요.”“응원한다고요? 그 사람 꼭 잡으라 그러지 않았어요?”한수근은 눈썹을 치켜올리며 웃었다.“그건 두 사람이 서로 좋아한다는 전제하에, 사장님이 지난 결혼에서 벗어날 수 있길 바라는 마음으로 말한 거였어요.하지만 지금 보니 인터넷에 박 대표님과 그 여자에 관한 댓글이 봇물 터지듯 쏟아지는데 아무런 해명도 하지 않았다니. 이건 스캔들이 퍼지길 바라는 거 아닌가요?그렇다면 더는 할 말도 없어요.이렇게 사장님에게 상처를 주는 사람을 왜 만나요? 어디다 쓰게요?”그 말에 남유주의 두 눈이 반짝이더니 갑자기 빙그레 웃었다.“수근 씨는 정말 연애 전문가 같아요. 수근 씨가 만약 여자를 좋아한다면 인기 완전 많을 텐데.”한수근은 진지하게 말했다.“만약은 없어요. 전 취향이 확고해요. 전 제 애인한테 완전 충성이에요.”남유주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바닥에서 일어났다.“가요, 일하러.”한수근은 그녀의 어깨를 누르며 한숨을 내쉬었다.“됐어요. 하루 쉬게 해줄게요. 그러니까 여기서 쉬어요. 아래층은 제가 보고 있을게요.”“진짜요?”“전 우리 사장님과 달리 양심적인 자본가라고요.”한수근은 그녀에게 한 소리하더니 이내 도망가 버렸다.한수근의 덕분에 그녀는 기분이 많이 좋아졌다.창밖은 아주 조용했다.마침 창문에 내려앉은 나뭇가지들의 그림자는 보기 좋게 아른거렸다.조용한 밤이 이렇게 아름답다는 것을 오늘 처음 알았다.방음 효과 때문에 와인바의 음악 소리는 거의 그녀를 방해할 수 없었다.……며칠 뒤.성미려 사건은 형사사
박수혁은 커피를 들고 사무실로 돌아갔다.여자는 기쁨에 찬 얼굴로 이한석을 바라보았다. 이한석은 미소를 지으며 손을 흔들어 주고는 박수혁을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그의 손에는 결재를 기다리는 서류가 들려 있었다.“대표님, 오후에 프로젝트 관련 회의가 있고 이사회가 있을 예정입니다. 직접 가실 건가요?”박수혁은 고개를 들고 쌀쌀맞은 말투로 대꾸했다.“내가 참석할 필요가 없는 회의라고 말하고 싶은 거야?”“물론 아니죠.”이한석이 당황하며 말했다.“일정이 있으시면 나중으로 미루겠습니다.”박수혁은 입을 꾹 다물고 잠시 고민하다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그 여자는 한 번도 날 안 찾아왔단 말이지?”이한석은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아직도 남유주 씨 일을 신경 쓰고 계시는구나.’박수혁의 눈빛이 차갑게 식었다.그에게서 위험한 기운이 풍겼다.이대로 정말 끝인 걸까?참 포기가 빠른 여자였다.이한석은 입술을 질끈 깨물고 조심스럽게 물었다.“후회되시면 직접 찾아가시면 되잖아요.”“후회? 내가? 왜 그렇게 생각하지?”박수혁은 신경질적으로 대꾸하며 이한석을 쏘아보았다.이한석은 얌전히 입을 다물었다.잠시 침묵이 흘렀다.박수혁은 서류를 던지듯 책상에 내려놓았다.예민한 성격을 가진 그가 여태 참은 것만해도 대단한 인내심을 발휘한 결과였다.정말 너무하지 않은가.그녀는 정녕 자신이 뱉은 말이 상대에게 어떤 상처를 줄지 생각을 안 해봤을까?그는 여자에게 뭔가를 양보할수록 더 기고만장해질 거라 생각했기에 그녀를 찾지 않았다.하지만 며칠이 지나도 그녀에게서는 연락 한번 없었다.그녀가 먼저 숙이고 들어오면 그는 없던 일로 해줄 생각이었다.매번 남자가 타협할 수는 없지 않은가?하지만 그녀는 전혀 그럴 생각이 없어 보였다.그녀에게 줬던 카드 역시 퀵으로 보내왔다.얼굴도 마주하기 싫다는 의미일까.박수혁은 화를 내고 싶어도 상대가 없으니 일에만 몰두했다.이한석은 바닥에 떨어진 서류를 집어들며 그에게 말했다.“대표님, 이거 기회 아닌가
남유주는 이런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그녀는 다급히 쫓아가서 선망의 눈빛으로 손호영을 바라보며 말했다.“혹시 사인 좀 부탁드려도 될까요?”손호영은 환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볼펜을 꺼냈다.남유주는 그제야 노트를 챙기지 않은 것을 후회하며 자신의 하얀 치마를 내려다보았다.“여기 해주세요. 가지고 가서 잘 소장해야겠어요!”손호영은 예의 바르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녀의 치마에 자신의 이름을 사인했다.남유주는 그제야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손호영이 웃으며 돌아섰다.“다음에 만나요. 연락처는 하늘 씨한테 받아서 있어요. 이번에 드라마 촬영 들어가는데 엑스트라로 초대하고 싶어요.”“저를요? 정말 영광이에요!”남유주는 좋아하는 스타와 같은 드라마에 출연할 수 있다는 말에 가슴이 벅차올랐다.손호영은 웃으며 엘리베이터로 들어섰다.남유주가 그쪽으로 시선을 돌려 보니 엘리베이터 안에 한 남자가 싸늘하게 식은 눈빛으로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그는 그냥 그곳에 서 있는 것뿐인데도 강렬한 압박감을 풍기고 있었다.박수혁은 항상 그런 존재였다.존재 자체만으로도 숨막히게 하는 사람.처음에 그와 함께할 때는 그 모든 불편함을 감수했지만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헤어진지 3개월, 그녀는 생각보다 잘 지내고 있었다.설렘을 잃었지만 자유를 얻었다.박수혁의 등 뒤에는 네 명의 경호원이 서 있었다.손호영이 엘리베이터에 오르자 경호원들이 그를 구석쪽으로 밀며 박수혁을 위해 길을 내주었다.박수혁은 무표정한 얼굴로 엘리베이터를 나와 남유주를 싸늘하게 힐끗 바라보고는 회의실로 향했다.남유주는 표정을 수습하고 손호영을 바라보았다.손호영은 개의치 않는 듯, 그녀를 향해 손을 흔들어 주었다.엘리베이터에 누가 있는지 확인하지 않고 탄 게 잘못이라면 잘못이었다.남자의 뒷모습이 어딘가 익숙했다.엘리베이터 문이 닫히고 남유주는 아쉬운 표정으로 회의실로 향했다.박수혁은 들어가지 않고 문앞에서 통화를 하고 있었다.그의 무심한 시선이
직원은 불안한 눈빛으로 박수혁의 눈치를 살폈다.박수혁의 표정은 싸늘했다.3개월 안 본 사이에 그녀는 완전히 마음에서 그를 내려놓은 것 같았다.누군가가 심장을 움켜쥔 것처럼 쓰리고 아팠다.잠시 침묵이 흐르고 옆 가게 사장이 입을 열었다.“혹시 그 제안 저에게도 해당되나요? 저는 신도시에 입점하고 싶습니다.”직원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두 가게의 위치는 얼마 차이나지 않지만 면적과 인테리어 스타일이 달라요. 사장님의 가게는 저희 프로젝트와 적합하지 않다고 판단했습니다. 하지만 위치를 생각해서 1억 정도 보상금을 추가로 드릴 수는 있습니다. 이 정도 금액이면 새로운 가게를 찾는데 어려움이 없을 겁니다.”여 사장은 못내 아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하지만 남유주의 가게 규모가 그녀보다 훨씬 컸기에 수긍할 수 있는 범위였다.추가로 지급하는 1억도 없는 것보다는 나았다.박수혁은 여전히 한마디도 없이 남유주만 노려보고 있었다.협상 담당 직원이 계약서를 여 사장에게 건네며 말했다.“조건이 만족스러우시다면 여기 사인해 주세요. 하지만 이건 비밀에 부치셔야 합니다. 모든 업주분들이 사장님처럼 추가로 1억이나 더 받아갈 수 있는 건 아니거든요.”“여성분 혼자 가게하시는 게 안타까워서 더 챙겨드리는 거예요. 다른 분들에게는 이렇게까지 해드릴 생각 없습니다.”여 사장은 멍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그러고 계약서에 사인하고 밖으로 나갔다.다른 업주들도 계약을 완료했다.결국 회의실에는 남유주와 박수혁 두 사람만 남았다.박수혁은 여전히 싸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그는 줄곧 이런 사람이었다. 주변 사람들 눈치 보지 않고 온몸으로 다가오지 말라는 아우라를 풍기고 있었다.남유주는 한참을 기다렸지만 담당 직원은 나타나지 않았다.그녀는 약간 짜증이 치밀어서 핸드폰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밖으로 나가려는데 줄곧 말이 없던 남자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6억으로 비슷한 조건의 가게를 구하는 건 쉽지 않을 텐데 차라리 두 번째 방안을 선택하지 그래?”이
손호영은 영화의 황제라는 호칭으로까지 불렸던 인물이었다.이제 역경을 딛고 일어선 그는 원하는 배역은 뭐든지 따낼 수 있는 탑배우가 되었다. 그는 충분히 자신이 경험한 것들을 연기에 녹여낼 수 있는 배우였다.촬영팀 멤버들은 대부분이 아주 친절했다.남유주는 연예계에 입문할 생각이 없었기에 사람들이 나누는 이야기를 듣고만 있었다.어차피 그녀는 대본을 읽은 적도 없기에 그들의 대화에 낄 수 없다는 것을 느끼고 주변을 둘러보기로 했다.골프장은 굉장히 넓었는데 주변이 산이라 공기도 좋고 서빙 직원이 수시로 간식과 음료수를 날라다 주고 있었다.고개를 들자 한 무리의 사람들이 이쪽으로 다가오는 게 보였다.남유주는 눈을 가늘게 떴다.맨 앞에서 모두에게 떠받들려 이쪽으로 다가오는 남자는 바로 박수혁이었다.겉만 번지르르한 속 좁은 녀석!그녀는 속으로 욕설을 내뱉었다.뒤에 있던 감독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더니 그녀를 제치고 박수혁에게 달려갔다.“박 대표님, 안녕하세요. 저희 오늘 촬영 들어가는데 관심 있으시면 따로 얘기를 좀 나눌까요?”그는 다가가서 열정적으로 박수혁에게 악수를 청했다.박수혁의 뒤를 따르던 사람 중 한 명이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곽 감독은 참 운이 좋은 건지, 의도한 건지… 오늘 어렵게 박 대표님과 약속을 잡았는데 마침 여기서 촬영하고 있었네?”곽 감독이 쑥스럽게 웃으며 답했다.“우연이죠. 평소에는 보기 힘든 분이라서 제가 좀 흥분했나 봐요.”박수혁은 연예계에도 꽤 많은 투자를 했지만 연예계의 분위기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다른 투자자들에 비하면 그리 투자를 많이 한 것도 아니었다.하지만 그럼에도 그는 이 업계 사람들에게 선망의 대상이었다.박수혁이 투자했다는 소문이 돌면 안 될 영화도 빵 떠버리는 효과가 있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박수혁은 무표정한 얼굴로 주변을 둘러보다가 남유주를 발견하고 인상을 찌푸렸다.“저 사람들이 이번 드라마의 배우들입니까?”“당연하죠. 손호영 씨는 연기 실력이 보장되는 배우고 강지민 씨는 팬들의 연
잠시 후, 강지민이 웃으며 그들에게 다가왔다.“호영 씨가 참 인내심 있게 잘 가르치네요. 나도 좀 가르쳐 줄래요?”손호영이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선배님도 골프 칠 줄 몰라요?”강지민이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몰라요. 평소에는 남자들이 치는 걸 보고만 있었거든요.”손호영은 조심스럽게 남유주의 눈치를 살폈다. 그녀는 전혀 불편해하는 기색 없이 웃으며 말했다.“저는 감을 좀 잡은 것 같아요. 혼자 연습하고 있을게요. 호영 씨는 지민님을 먼저 가르치고 있을래요?”손호영이 대답하기도 전에 강지민이 먼저 가까이 다가왔다.“채는 어떻게 잡아야 해요? 이렇게요?”그녀는 그렇게 손쉽게 손호영의 주의를 남유주에게서 자신에게로 가져왔다.손호영은 어쩔 수 없이 그녀에게 다가갔다.강지민은 골프채를 든 채로 손호영에게 계속 말을 걸었고 어느새 남유주의 존재감은 서서히 잊혀졌다.손호영이 남유주에게 다가가려 할 때마다 강지민이 그를 불러세웠다.아무리 눈치 없는 사람이더라도 이상함을 눈치챌 정도였다.처음 만났을 때 친절한 언니 같은 사람이었는데 그녀의 다른 모습을 알게 된 기분이었다.남유주는 자신이 예민반응을 보인 건 아니라고 생각했다.설마 손호영을 마음에 두고 있는 걸까?하지만 나이로 따지면 강지민이 다섯 살이나 많았다.남유주는 골프채를 내려놓고 벤치로 가서 앉았다.생수를 반 병 정도 마셨는데 감독과 박수혁이 다른 투자자들과 함께 손호영에게로 다가가는 모습이 보였다.강지민은 그들의 대화에 낄 수도 없었다. 네티즌들은 그녀에게 호감을 보였지만 자본가는 그녀를 안중에도 두지 않았다.아무도 자신을 신경 써 주지 않자 그녀도 벤치로 다가와서 앉았다.강지민은 웃으며 남유주에게 인사를 건네고는 한숨을 쉬었다.“나 참 바보 같죠? 쉬운 것 하나 제대로 배우지 못하고.”남유주는 예의 바른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그럴 리가요. 서툴기는 제가 더 서툰걸요!”‘이 나이에 꼭 이러고 싶을까.’여우를 상대하는 방법은 상대보다 더 심한 여우짓을 하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