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대는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더니 말했다.“선배, 같이 수업도 들었는데 나 누군지 모르겠어?”남유주는 흠칫하며 남자의 얼굴을 자세히 살폈다.흐릿한 기억 속에 갑자기 떠오르는 인물이 있었다.그녀를 2년이나 끈질기게 쫓아다녔던 대학교 후배였다.그때는 이형욱과 결혼하라는 청천벽력이 떨어졌을 때라 주변 눈치를 보며 살아가던 때였다.그녀의 할아버지는 그녀가 또래의 남자와 가까이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눈앞의 위풍당당한 소방관이 그때 그 꼬맹이 주희철이라고?남유주는 갑자기 마음이 착잡해졌다.주희철의 외모는 예전과 많이 달라져 있었다.예전에는 그냥 철 모르는 어린애였는데 지금 보니 꽃미남으로 훌륭하게 성장했다.남유주는 조금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안전통로 점검을 끝낸 주희철은 소화전을 살펴보겠다고 했다.그런데 그가 심각한 얼굴로 소화전을 내려보았다.“소화전이 규격에 맞지 않네요. 내일도 영업 정지예요.”남유주가 화들짝 놀라며 물었다.“왜? 이거 새로 산 건데?”주희철은 서류에 꼼꼼히 기입한 뒤, 그녀를 향해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선배, 설마 내가 과거 일로 시비를 건다고 생각하는 거 아니지? 나 공사는 분명한 사람이야.”남유주가 입술을 깨물며 물었다.“과거에 우리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지? 내 생각엔 별일 없었는데?”남자가 눈을 깜빡이며 말했다.“그래도 기억은 해주네?”남유주가 웃으며 대답했다.“잊었을 리가 없잖아.”그녀는 손으로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쓸어 넘긴 뒤,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그에게 물었다.“그래서 새로 산 소화전이 왜 규격에 안 맞는다는 거야? 따지려는 건 아니고 정말 모르겠어서 그래.”주희철이 빙그레 웃으며 설명했다.“선배가 구매한 액상형 소화기는 불이 났을 때, 표면에만 뿌려지게 되는데 수용성 가연물질에 취약해. 가게에 술도 많으니 액상형 소화전은 거의 힘을 못 쓸 거야. 화재가 발생한다면 아무 쓸모도 없어.”남유주가 웃으며 대답했다.“난 전혀 못 알아듣겠네. 네가 전문가니까 추천해줄래?
주희철이 짧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상사가 오라는데 가야지. 거절했다가 또 무슨 봉변을 당하라고.”남유주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녀가 가방을 챙겨 그쪽으로 가려는데 주희철이 그녀의 손을 잡더니 사악한 미소를 머금으며 물었다.“선배, 박수혁이랑 무슨 사이야?”“그냥 아는 사이.”주희철은 그제야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그러네. 일반인이 그러 사람이랑 알고 지내는 것만 해도 대단한 거지. 저 사람 아직 솔로라던데 여자를 만나도 학력이 최소 박사가 되어야 한다며?”남유주는 그 말을 듣고 어쩐지 마음이 불편했다.주희철이 웃으며 말했다.“그래도 우리 선배가 아깝지. 선배의 미모는 아무나 못 따라오는 것이니까.”남유주는 그제야 안 좋았던 기분이 싹 사라지고 당연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두 사람이 룸으로 가자 박수혁과 진 서장 옆자리에 각각 하나씩 자리가 남아 있었다.남유주는 박수혁의 옆에 앉기 싫어서 웃으며 진 서장에게 말을 건넸다.“진 서장님….”박수혁이 음침한 얼굴로 헛기침을 했다.진 서장은 재빨리 눈치를 채고 주희철에게 말했다.“희철아, 여기 와서 앉아.”주희철은 남유주를 힐끗 보고는 무표정한 얼굴로 다가가서 앉았다.눈앞에 여러 명의 거물들이 자리를 잡고 있었지만 그는 전혀 긴장한 기색이 아니었다.다른 사람들도 그들에게 인사를 건넸다.이곳에서 남유주가 아는 사람이라곤 박수혁뿐이었다.그녀가 자리에 앉자 박수혁은 사람들에게 그녀를 소개했다.진 서장 외에도 유명 IT기업 사장 마윤석이 있었는데 평소 취미가 바다낚시라고 했다.실제로 뉴스에 자주 등장하는 사진도 바닷가에서 낚시를 하며 찍은 사진이 많았다.그리고 금융업계 종사자도 있었고 정부기관 관료도 있었다.남유주는 처음으로 박수혁은 참 바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다행히 높으신 분들이 성격은 나쁘지 않아서 유쾌한 분위기가 이어졌다.가장 이 자리가 불편한 사람은 주희철이었다.박수혁은 틈만 나면 주희철을 관찰했다.젊고 잘생긴 남자, 첫인상은 그게 전부였다.박수
“하! 그쪽한테 기대한 적 없거든요? 오늘 밤 거기서 한가한 소리나 듣고 있던 내가 다 한심하네요. 희철이랑 둘이 오붓하게 식사했으면 이미 해결했을지도 모르는 일을!”남유주는 자신이 손해를 봤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물론 높으신 분들과의 식사자리가 매번 주어지는 건 아니지만 결국 클럽 문제는 해결된 게 없었다.그 자리에서 그녀가 얻은 건 아무것도 없었다.박수혁은 불쾌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걔가 가게 문제 해결해 준대요? 웃기네….”남유주는 고집스럽게 고개를 돌렸다.가는 내내 유지된 팽팽한 분위기에 운전기사는 몰래 식은땀을 훔쳤다.박수혁이 집까지 데려다주는데 상대 여자가 이렇게까지 앙칼지게 나온 건 남유주가 처음이었다.그런데도 박수혁은 그녀를 차에서 내쫓거나 하지는 않았다.그게 더 이상했다.가게 앞에 도착하자 남유주는 인사도 없이 휑하니 차에서 내려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베르가 요즘 단속에 몸살을 앓으면서 주변에서 별로 인기가 없던 다른 술집은 점점 장사가 잘되고 있었다.남유주가 짜증이 난 것도 바로 이런 점 때문이었다.박수혁은 그녀가 차에서 내리기 전에 제대로 얘기를 해보려 했으나 그녀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가버렸다.그의 잘생긴 얼굴이 얼음장처럼 차갑게 식었다.운전기사가 조심스럽게 물었다.“대표님, 돌아갈까요?”박수혁은 한참이 지난 뒤에야 고개를 끄덕였다.운전기사는 그제야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다음 날.상부에서 남유주에게 영업정지가 풀렸다는 좋은 소식을 전했다.남유주는 잠깐 놀랐지만 기쁨이 더 컸다.그녀는 기쁜 마음에 휴가를 주었던 직원들을 다시 가게로 소환했다.단골손님들도 소문을 듣고 찾아왔다.오픈을 축하하기 위해 남유주는 자비로 화환을 사서 입구에 놓았다.롤러코스터를 탄 느낌이었지만 어쨌든 일이 잘 해결돼서 다행이었다.한수근은 예전처럼 손님들을 접대했고 남유주는 무대에서 노래를 한곡 부른 뒤, 위층으로 올라갔다.“사장님, 예전에 비슷한 상황을 겪은 가게들은 2주 정도 지나서 영업정지가 풀
남유주는 아침도 먹기 전이었다.이한석은 다짜고짜 그녀를 차에 태웠다.“남유주 씨, 아침은 저택에 가서 들어요. 먹고 싶은 게 있으면 아줌마한테 말씀하시면 돼요.”남유주가 물었다.“내가 간다는 거 박수혁 씨는 알아요? 설마 또 이상한 착각하는 거 아니겠죠?”그녀는 지난번처럼 기회만 되면 들이대는 헤픈 여자가 되고 싶지 않았다.그건 너무 굴욕적이었다.이한석이 입술을 질끈 깨물더니 묘한 표정으로 말했다.“사실 남유주 씨한테 이런 부탁을 드리는 게 실례라는 건 알지만 정말 믿을만한 사람이 없어요.”박수혁은 원래 친구도 별로 없는 사람이었다.그렇다고 남자인 이한석이 간병을 할 수도 없었다.“잘 이해가 안 되는데요.”남유주가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이한석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사실 대표님은 병 난 게 아니라 부상을 당했어요. 게다가 큰 부상이라 밖에 알려지면 안 돼요. 회사 근간이 흔들리게 될 테니까요. 집에서 일하는 고용인도 완전히 신뢰할 수 없어요. 그래서 남유주 씨한테 부탁드리는 거예요.”“가서 아무것도 할 필요 없어요. 대표님만 잘 보살펴 주시고 비밀만 지켜주시면 돼요. 대표님이 의식을 회복할 때까지만요.”남유주는 한참을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부상이요? 그러니까 그 인간 지금 혼수상태라는 거예요?”“언제요? 며칠 전에도 같이 밥을 먹었는데….”그녀는 혼란스러웠다.왠지 모르게 가슴이 답답하고 마음이 무거웠다.“어제 인근도시 건설 현장에 고찰을 나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접촉사고가 있었어요. 대표님은 위경련 때문에 차에 계셨고 저와 운전기사는 내려서 차를 수리했죠. 그 틈을 타서 범인이 차에 올라 대표님의 가슴을 칼로 찔렀어요.”그는 차분한 목소리로 경과를 설명했지만 남유주에게는 큰 충격이었다.가슴에 칼을 맞고 혼수상태라니….얼마나 위급한 상황이었을지 상상도 가지 않았다.며칠 전에 태한그룹에서 돈밖에 모르는 자본가라고 그에게 비난을 퍼부었던 게 생각났다.그런데 지금 생각해 보면 부자도 부자의 고충이 있었다.평범한 그녀
다른 사람들의 주의를 끌지 않기 위해 이한석과 조용우는 일찌감치 저택을 나섰다.방에는 남유주와 박시준만 남게 되었다.아이는 그녀와 같이 있을 수 있어서 기분이 아주 좋아 보였다.“이모, 걱정하지 마세요. 아빠 깨시면 제가 잘 설명할게요. 아빠는 부자니까 어쩌면 이번 일로 보상을 톡톡히 해주실 수도 있어요. 제가 그렇게 설득할게요.”남유주는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와서 아이의 볼을 살짝 꼬집었다.“네 아빠 같은 짠돌이가 나한테 보상을? 됐어. 이제 기대도 안 해.”박시준은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가 이내 활짝 웃으며 말했다.“아빠가 안 해주면 제가 드릴게요.”“그래. 시준이 착하지.”남유주는 미소를 짓고는 주변을 둘러보았다.원목으로 제작된 진열장에는 이름도 모르는 각종 명품 술이 진열되어 있었다.정말 사치란 사치는 다 누리고 사는 사람이다 싶었다.주변에는 도자기 장식품들도 많았는데 특별한 건 없었지만 아마 경매에 나오면 그 가치가 어마어마할 것으로 추정되었다.정말 돈을 쓸 곳이 없었구나!남유주가 탄식하듯 고개를 흔드는데 밖에서 미세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박시준은 당황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남유주도 인상을 쓰며 밖으로 나가 보았다.침실과 거실 사이에는 문이 두 개가 있었다.침실 바로 밖에는 거실과 연결하는 문이 있고 그곳은 박수혁이 업무를 처리하는 용도로 쓰이는 공간이었다.복도까지는 이중문으로 된 구조인데 방음설비도 완벽했다. 바깥 문이 열려 있었기에 발소리가 들렸던 것이다.남유주는 발걸음 소리가 거실과 가까워지기 전에 밖으로 나갔다.바깥에 있던 고용인이 화들짝 놀라며 그녀의 눈치를 살폈다.남유주가 싸늘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에게 물었다.“무슨 일이죠?”고용인이 긴장한 목소리로 대답했다.“남유주 씨는 저택에 첫 방문이라 뭐 필요한 거라도 있나 여쭤보려고 올라왔어요. 점심은 뭐 드시고 싶어요?”남유주는 웃지 않고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있으면 아주 차가운 인상이었다.그리고 그녀는 지금 상황에서 웃음이 나올 수 없었
남유주는 약간 취기가 올라왔지만 잠시 휴식을 취하자 금세 가라앉았다. 어느덧 석양이 지고 있었다.베란다에서 밖을 내다보니 한 고용인은 화분에 물을 주고 있었고 한 사람은 잔디를 깎고 있었다.오렌지색의 석양이 창문을 통해 비쳐 들어오자 삭막한 분위기의 침실에도 아늑함이 찾아왔다.평소였다면 가게에서 한창 오픈 준비를 할 시간이었다.남유주는 은근히 가게가 잘 돌아가고 있을지 걱정됐다.그녀는 어이없는 표정으로 침대에 누운 남자를 힘껏 노려보았다. 그는 여전히 눈을 감은 채, 미동도 하지 않고 있었다.그가 이렇게 약한 모습을 보인 것은 처음이었다.‘나한테 늦잠 잔다고 뭐라 하더니 아주 잘만 자고 계시네?’남유주는 입을 삐죽이며 속으로 불만을 터뜨렸다.고용인의 요리 솜씨는 아주 괜찮았다. 그녀도 입맛이 까다로운 편이었으나 전혀 흠잡을데 없는 요리였다.식사를 마치고 쉬고 있는데 이한석이 서류를 들고 찾아왔다.“남유주 씨, 대표님 안에 계시죠? 대표님 사인이 필요한 서류가 있어서요.”남유주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그래요. 올라와요.”모든 게 고용인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연기였다.그들은 더 이상 박수혁이 하루종일 방에만 있다는 사실에 주목하지 않았다.어차피 평소에도 아침에 일찍 나가 자정이 넘어 들어오거나 하루종일 서재에 틀어박혀 있는 일이 많았기에 고용주와 마주칠 일은 거의 없었다.위층으로 올라온 이한석이 한숨을 쉬며 그녀에게 물었다.“아직도 저 상태네요?”“이제 고작 하루가 지났잖아요. 죽지 않고 살아 있는 것만으로도 다행이죠. 열도 나지 않았으니까 점점 좋아질 거예요.”“그렇긴 하죠. 남유주 씨는 어때요? 오늘이 첫날인데 많이 답답하시죠?”“그럭저럭 견딜만해요. 여기는 살기가 참 좋네요. 말동무가 없다는 건 좀 답답하지만 괜찮아요. 그런데 시준이는 언제 집에 와요?”남유주는 혼자 있기보다 박시준과 함께하는 시간이 더 좋았다.이한석이 말했다.“저녁에는 학원에 가야 해서 아홉 시가 넘어야 집에 와요. 기다릴 필요 없이
박수혁은 눈을 감고 짜증을 억눌렀다.잠깐 잠든 사이에 방이 어떻게 이 모양 이 꼴로 변할 수 있지?박시준은 사고 치다 들킨 아이처럼 고개를 푹 숙이고 침대에 떨어진 감자칩을 주섬주섬 봉지에 담고 있었다.침대가 좀 깨끗해진 뒤에야 아이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아빠, 몸은 좀 괜찮아요?”앳된 목소리가 귓가에 들리자 그는 눈을 가늘게 뜨고 아이를 바라보았다.“이게 다 어떻게 된 거지?”박시준은 다급히 남유주가 이곳에 나타난 이유를 설명했다.“이 비서님이 이모한테 아빠를 부탁했어요.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아빠 사고를 사주했다고 판단했거든요. 회사 운영에 차질이 생길까 봐 대외적으로는 비밀로 해야 해서 유주 이모를 불렀어요. 이모는 가게도 포기하고 여기까지 달려와 주셨어요. 유주 이모는 정말 착한 사람이에요!”박시준은 박수혁이 남유주를 오해하는 게 싫었기에 최선을 다해 남유주를 변호했다.물론 박수혁은 이미 스스로 결론을 내렸기에 아이의 말을 마음에 두지 않았다.통화를 마친 남유주는 생글생글 웃으며 다가와서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시준이는 정말 착한 아이구나.”박시준도 활짝 웃으며 그녀를 바라보았다.박수혁은 사이가 너무나 좋은 이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자니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하지만 그런 감정도 얼마 못 가 사라져 버렸다.그는 인상을 쓰며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설마 여기서 나 죽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유산이나 챙기려는 속셈이었어요?”남유주는 억울했지만 아까 오해 받을 행동을 했기에 웃음이 나왔다.“그래서 박수혁 씨 유서에는 내 이름이 있나요?”박수혁은 순간 할 말을 잃었다.지금 빨리 죽으라고 저주하는 건가?남유주는 박수혁이 불쾌해하건 말건, 그의 머리를 찰싹 때리며 말했다.“걱정하지 마세요, 박 대표님. 돈 때문에 여기 온 건 아니니까요. 이렇게 보면 대표님의 삶도 참 기구하네요. 출장 한번 갔다가 목숨을 잃을 뻔하다니. 좀 안됐어요. 돈을 많이 벌면 뭐 해요? 다 못 쓰고 죽을 수도 없는데!”박수혁의 얼굴이 점점 싸늘
이한석은 길게 심호흡한 뒤, 보고를 이어갔다.“대표님, 범인은 범행을 하기 전 공사현장에서 일하던 노동자였어요. 하필 그 건설현장에 투자한 기업이 성안그룹이었죠. 저는 성안그룹에서 프로젝트를 포기하기 싫어서 일부러 스파이를 파견했다고 생각합니다.범인은 전과자예요. 가족도 없고 계좌도 조사해 봤는데 깨끗했어요.”그게 가장 골치 아픈 문제였다.금전적인 거래가 없으니 성안그룹과의 직접적인 관계를 증명할 수 없었다.박수혁의 얼굴이 싸늘하게 식었다.잠시 침묵이 흐르고 밖에서 노크소리가 들렸다.이한석이 가서 문을 열었다.“남유주 씨, 수고 많으셨어요.”남유주가 웃으며 말했다.“수고는요. 어쨌든 제 임무도 완성했으니까 이제 그만 가볼게요. 가게를 비운지도 오래됐고….”이한석이 그녀를 바래다주려던 순간, 뒤에서 듣고 있던 박수혁이 차가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들어와요.”이한석이 자리를 비키자 남유주는 무표정한 얼굴로 안으로 들어갔다.“박 대표님, 말투를 들어보니 화가 많이 나 있으시네요. 이제 제가 할 일도 끝났으니 그만 돌아가 보겠습니다.”박수혁은 싸늘한 표정으로 그녀를 응시하더니 말했다.“할 일이 끝났다고요? 일은 제대로 한 게 없으면서 양심은 있어요?”“뭐라고요?”남유주가 물었다.“제가 뭘 제대로 안 했다는 거죠? 팔다리 멀쩡하고 열이 나서 대뇌가 손상된 것도 아니고. 여기서 뭘 더 어떻게 해요?”이한석도 상사가 이번에는 좀 너무한 게 아닌가 하고 생각했다.남유주는 팔짱을 끼고 불만을 터뜨렸다.“이럴 줄 알았으면 깨어나지 말라고 저주를 퍼부을 걸 그랬어요. 어차피 당신 같은 사람은 세상에서 사라지는 게 더 나을지도 몰라요!”이한석은 빨리 이 방에서 나가고 싶었다.‘유주 씨, 대표님이랑 싸울 때는 내가 없는 장소에서 싸우면 안 될까요? 나도 죽겠다고요!’박수혁이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몸에서 똥내가 나는데 이게 환자를 대하는 간병인의 태도예요?”남유주가 황당하다는 듯이 그를 흘기며 말했다.“내가 왜 그쪽 간병인이에요? 몸
오랜만에 만난 두 사람은 서로 부둥켜안고 눈물을 흘렸다.문준서는 그녀의 눈물을 보고 죄책감에 얼굴을 들 수 없었다.새봄이가 점차 울음이 잦아들자 그는 고개를 숙이고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었다.새봄이는 길게 심호흡하고 감정을 식혔다.준서에게는 묻고 싶은 게 정말 많았다.문준서는 울어서 빨갛게 부은 새봄이의 눈을 보고 웃으며 말했다.“커피 계속 마실 거야? 안 마실 거면 우리 집에 올래? 내가 맛있는 커피 만들어 줄게!”새봄이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준서는 소녀의 손을 잡고 핸드백을 챙긴 뒤, 밖으로 나갔다.커피숍 직원들마저 잘 어울리는 한 쌍이라고 부러운 눈빛을 보냈다.새봄이는 그와 손을 잡고 걷고 있자 저도 모르게 가슴이 설레었다.어릴 때는 항상 손을 잡고 다녔는데 지금은 어딘가 어색했다.어린 문준서는 항상 새봄이를 우선으로 생각했는데 지금도 그럴까?문준서는 소녀가 기억하는 어린 준서가 아니었다. 그의 거대한 뒷모습은 왠지 모를 안정감을 주었다.문준서가 웃으며 소녀에게 물었다.“뭘 그렇게 뚫어지게 봐?”“키 몇이야?”“192, 만족해?”새봄이는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을 느끼며 고개를 돌렸다.“내가 키 큰 사람 별로라고 하면 뼈라도 깎을 거야?”문준서는 웃으며 소녀의 손을 잡아끌었다.“응. 네가 집도해.”새봄이도 덩달아 웃었다.10여 년을 떨어져 지내다 보니 처음에는 정말 보고 싶었지만 점차 감정은 옅어져 갔다. 매번 부모님에게 준서의 안부를 물을 때면 그들은 머리만 흔들었다.그 뒤로 새봄이는 더 이상 준서를 찾지 않았다.말없이 사라진 그를 원망한 적도 있었다.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면 그가 해외에서 무사히 지냈으면 하는 바람이 더 컸던 것 같았다.문준서는 길가에 세워진 스포츠카로 다가갔다.차도 주인을 닮아 검은색으로 차분하고 화려하지 않은 디자인이었다.처음 그와 눈이 마주쳤을 때, 새봄이는 그가 문준서라는 것을 한눈에 알아보았다. 티없이 맑고 순수했던 눈동자는 어릴 때와 비교해 변한 게 전혀 없었다.하지만 소녀
새봄이가 떠난 뒤로 전동하는 한숨을 달고 살았다. 옆에서 지켜보는 소은정은 어이가 없었다.학교 생활은 생각했던 것보다 따분하지 않았다.어릴 때부터 곱게 자란 새봄이지만 거만하지 않고 성격이 활발했기에 많은 친구를 사귀었다.아이는 가끔 친구들을 집에 초대해서 파티를 벌였다.그리고 혼자 있는 시간도 충분히 즐겼다.가끔 센 강변에 가서 산책도 하고 석양을 감상하며 오리에게 먹이를 주기도 했다.그런데 가끔 혼자 있을 때면 누군가가 지켜보는 느낌이 들기도 했다.하지만 크게 걱정하지는 않았다. 주변에 수시로 경호원들이 지키고 있었기 때문이다.새봄이는 아이스크림을 들고 홀로 석양 아래에서 산책을 즐겼다. 손에는 엄마를 위해 준비한 선물인 한정판 명품백이 들려 있었다.이목구비가 화려한 동양소녀가 길을 걷고 있자 무수히 많은 시선들이 따라다녔다.하지만 프랑스의 치안은 별로 좋지 못했다.새봄이가 아이스크림을 먹는 사이 녹색 트레이닝복을 입은 남자가 소녀의 핸드백을 가로채서 사람들 틈으로 도주했다.놀란 새봄이는 다급히 남자의 뒤를 따라가며 소리쳤다.“도둑이야!”안타깝게도 유럽에서 비슷한 사건은 비일비재하게 벌어졌다.아무도 핸드백을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싶지 않아했다.새봄이는 자신이 안전하다는 것을 알기에 끝까지 남자를 쫓아갔다.수염이 덥수룩한 남자는 뒤를 돌아보며 뭐라고 욕설을 지껄이더니 골목으로 진입했다.새봄이가 쫓아갔을 때, 남자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소녀가 망연자실한 얼굴로 서 있을 때, 갑자기 옆 골목에서 사람이 튀어나왔다.남자는 바로 새봄이의 목을 노리고 달려들었지만 손이 소녀에게 닿기도 전에 누군가가 달려와서 남자를 걷어찼다.새봄이는 겁에 질린 얼굴로 뒤를 돌아보았다.훤칠하고 잘생긴 동양인 남자가 등 뒤에 서 있었다.어딘가 익숙한 느낌이 들었다.검은 정장을 입은 남자가 새봄이의 앞으로 다가갔다.그에게서 익숙한 우드향이 풍겼다.그는 천천히 소녀를 향해 손을 뻗었다. 손가락이 가늘고 예쁜 손이었다.녹색 트레이닝복을 입은 강
전동하는 그날 밤 새봄이에게 해외유학 얘기를 꺼냈다.새봄이는 고민도 해보지 않고 바로 동의했다.어디에 가고 싶냐고 물었더니 프랑스만 제외하고 아무데나 괜찮다고 했다.전동하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준서 때문에 프랑스에 가기 싫은 거야?”새봄이가 눈시울을 붉히며 말했다.“걔가 누군데? 하나도 기억 안 나! 걔 얘기하지 마!”아이는 억울함을 토로했다.줄곧 아이의 옆을 지켜주던 오빠는 어느 날 갑자기 사라졌다.마치 꿈을 꾼 것 같았다.더 이상 아이의 뒤꽁무니를 따라다니던 오빠는 없었다.아이는 준서가 보고 싶었지만 준서는 떠날 때 편지 한장 남기지 않았다.전동하는 안쓰러운 표정으로 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새봄이도 이제 컸잖아. 준서도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어. 연락이 없던 것도 그럴만한 사정이 있어서였어. 나중에 준서 만나도 너무 준서를 욕하지 마.”새봄이는 고집스럽게 고개를 돌려버렸다.부모의 사랑만 받고 자란 아이는 갑작스러운 이별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가끔 딸이 울기라도 하면 전동하는 항상 달려와서 딸을 위로해 주었다.태어날 때부터 다이아수저를 물고 태어난 아이는 누구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었다.그런데 어느 날 오빠가 보고 싶었던 아이가 준서에게 전화를 걸었을 때, 없는 번호라고 나왔다.아이는 버려진 느낌을 받았다.출국이 결정되었으니 전동하는 아이가 다닐 학교를 알아보았다.결국 새봄이는 유럽을 선택했다.마치 누군가가 거기서 자신을 기다리는 것처럼.떠나기 전, 아이는 일곱 남자친구와 작별인사를 나누었다.아이가 출국하는 날, 온가족이 나와서 새봄이를 배웅햇다.새봄이는 딱히 슬프거나 아쉬운 티를 내지 않았다. 마치 부모님 손을 잡고 해외여행을 가는 것처럼 자연스러웠다.아이는 활짝 웃으면서 가족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전동하와 소은정은 영지까지 데리고 같이 프랑스로 출국하기로 했다.일가족이 탑승수속을 마치고 돌아서는데 뒤에서 급박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새봄아!”고개를 돌리자 하얗게 질린 얼굴로 허겁지겁 이쪽
눈 깜짝할 사이에 새봄이는 어엿한 숙녀로 자라났다.고등학교에 들어가자마자 그녀에게는 남자친구가 생겼다.새봄이는 집으로 돌아와서 이 소식을 소은정에게 알렸다.소은정은 딱히 말리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어렸을 때 이런저런 경험을 다 해보는 게 아이에게 좋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그리고 새봄이가 진심일 거라고 생각하지도 않았다.하지만 이 사실을 알게 된 전동하는 밤새 잠을 이룰 수 없었다.그는 아이와 대화를 나눠봐야겠다고 마음먹었다.새봄이의 반응은 시큰둥했다.“친구들이 다들 남자친구를 사귀는데 나만 솔로면 유행에 뒤떨어지잖아. 그래서 만나보기로 했어. 그리고 너무 이른 나이도 아니잖아! 중학교 때부터 연애하는 애들도 많다고!”전동하는 인내심 있게 아이를 타일렀다.“그래도 넌 아직 너무 어려. 밖으로 나가 사람들과 더 많이 접촉해 보면 알게 될 거야. 남자는 다 믿을 놈이 못 돼….”“그럼 엄마가 아빠를 만난 것도 사랑에 눈이 멀어서 만난 거겠네?”어릴 때부터 말싸움에는 절대 지지 않던 새봄이는 미소가 소은정을 닮은 예쁘고 사랑스러운 소녀로 성장했다.그리고 총기 있는 눈동자와 말빨, 그리고 큰 키는 전동하를 많이 닮았다.소은정은 어디 하나 빠지지 않는 딸이 나중에 남자 여럿을 울릴 거라는 것을 알기에 아이에게는 사랑을 하면 꼭 아빠랑 엄마처럼 서로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라고 강조했다.새봄이는 전동하가 말이 없자 달려가서 그의 팔짱을 꼈다.“아빠, 걱정하지 마. 그냥 연애는 어떤 느낌인가 궁금해서 해보는 거야.”“그래서 그 남자친구는… 어떤 사람이야?”“어느 남자친구를 말하는 거야?”전동하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물었다.“몇이나 사귀었는데?”“다른 애들은 다 한명하고만 사귀는데 난 다른 애들 따라하기 싫어. 그래서 하루에 한 명, 일주일에 일곱 명이야! 주일을 정해서 따로 만나!”새봄이가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전동하는 입을 뻐금거리며 한참을 말을 잇지 못했다.그래도 다행인 건 사랑에 깊이 빠지는 스타일은 아니라는 점이랄까.
다른 CCTV에서 정황이 포착되었다. 직원이 그쪽으로 다가가다가 발을 헛디디며 하마터면 술잔을 쏟을 뻔한 정황이었는데 그때 잔을 안쪽으로 옮기며 위치가 바뀐 것 같았다.독극물 검사결과도 나왔다.청산가리였다.심청하의 몸에서 나온 독극물과 약병에 있던 독극물 성분이 일치했다.살인을 계획했던 심청하가 제 꾀에 당한 상황이었다.아마 그녀는 죽을 때까지 어디서 문제가 생겼는지 몰랐을 것이다.형사들은 밤을 새워 CCTV를 확인하면서 이 약병의 출처가 남유주의 큰어머니라는 사실을 밝혀냈다.그렇게 큰어머니가 경찰에 소환되었다.큰어머니는 숨김없이 사건의 경과를 진술했는데 심청하에게 협박을 당했다는 내용이었다.하지만 사람을 해치고 싶지 않아서 넘어지는 틈을 타 약병을 바닥에 버렸다고 했다.심청하가 포기를 못하고 스스로 행동에 옮기다가 제 꾀에 당했다는 말도 했다.형사가 인상을 찌푸리며 그녀에게 물었다.“그랬다는 증거 있나요?”“당연히 있죠.”큰어머니는 딸인 남연을 호출했다.“형사님이 묻는 대로 사실을 대답해! 떨지 말고!”남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핸드폰을 꺼냈다.그리고 차 안에서 심청하와 대화했던 녹음을 재생했다.“그 여자가 아빠랑 엄마를 죽이겠다며 협박했어요. 그 파티 초대장은 제가 거금을 주고 산 거예요. 우린 태한그룹 사모님과 친척관계에요. 평소에 왕래는 하지 않지만 사람을 죽이고 싶지는 않았다고요!”남연은 울음을 터뜨리며 말했다.“형사님, 제가 아는 건 다 얘기했어요.”형사는 그녀의 진술에서 이상한 점을 포착했다.“전에 남유주 씨를 해하려 한 적이 있죠?”“그래! 너도 직접 남유주를 죽이려고 했잖아? 그건 왜 쏙 빼고 말해?”녹음본에 담겼던 심청하의 목소리였다.의심을 사지 않기 위해 파일은 편집을 거치지 않았다.남연은 고개를 푹 숙이고 사실을 털어놓았다.“그것도 심청하가 협박해서 했어요. 하지만 언니 앞에서 이미 잘못을 인정했고 사과도 했어요. 언니는 저를 용서했고요.”형사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이건 박수혁 대표와
심청하는 한참 침묵하더니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무슨 방법을 쓰든 그 사람들과 걔를 만나게 해. 안 그러면 이 약은 네 부모님 배 속으로 들어갈 거야!”남연은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고개를 떨어뜨렸다.“알겠어요.”결국 그녀는 겁에 질린 얼굴로 명령을 받아들였다.며칠 뒤, 마침 좋은 기회가 찾아왔다.오늘은 자선회가 열리는 날이었는데 박수혁은 남유주의 기분을 풀어주기 위해 그녀와 함께 자선회에 참석했다.그리고 자선회에서 많은 보석과 골동품을 구매하며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다.자선회가 끝나고 파티가 이어졌다.남연의 부모는 힘겹게 초대장을 입수했다.심청하는 파티홀에서 이어질 장면을 기대하고 있었다.하지만 남연의 부모는 뒤늦게 파티에 참석했고 그들이 현장에 도착했을 때는 파티가 다 끝난 뒤였다.심청하는 분노를 주체할 수 없었다.이번 기회를 놓치면 다음에는 언제가 될지 장담할 수 없었다.SC그룹에서는 지분 사건으로 그들을 물고늘어질 것이다.본사에서 움직이기 전에 남유주를 제거해야 했다.잠시 후, 남유주의 큰어머니는 사람이 없는 곳에 숨어들었다.그리고 약을 꺼내 술병에 쏟아넣으려고 했다.마침 취객이 그녀의 어깨를 부딪히고 지나가며 그녀가 바닥에 쓰러졌다.남유주 큰어머니가 고통에 신음을 흘리자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되었다.약병은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구석진 곳으로 굴러갔다.심청하는 싸늘한 눈빛으로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정말 뭐 하나 일을 제대로 하는 게 없는 일가족이었다.남유주의 큰아버지는 얼굴이 하얗게 질려 다급히 다가가서 아내의 손을 잡고 구급차를 호출했다.호텔에 미리 대기하고 있던 의료진이 달려왔고 큰어머니를 들것에 실어 병원으로 호송했다.심청하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사람들이 모두 흩어지고 그녀는 구석진 곳으로 가서 아무도 안 보는 틈을 타 약병을 손에 쥐었다.그리고 기회를 봐서 약을 와인에 쏟고 흔들었다.모든 게 끝난 뒤, 심청하는 손에 난 땀을 닦았다.이미 살인을 하기로 마음먹은 그녀였지만 직접 모든 일을 끝내고 나니
남유주는 미소를 지으며 소은정과 박수혁 사이를 스스럼없이 얘기했다.남유주는 지나간 둘의 과거를 신경 쓰지 않았다.박수혁은 소은정에게 다른 마음이 없었고 그들은 각자 다른 사람과 행복한 삶을 살기로 했다.소은정은 미소를 지으며 남유주가 건넨 상자를 열었다.안에는 팔찌가 있었다, 반짝이며 아름다운 화려한 목걸이의 모든 보석은 정교하게 다듬어져 있었고 본연의 미와 섬세함의 아름다움을 결합하는 느낌이 들게 했다.그녀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몇 년 동안 이런 것을 모으기를 좋아했는데... 고마워요, 진짜 마음에 들어요." 남유주는 화해의 의미로 소은정에게 팔찌를 건넸다.소은정은 미소를 지으며 팔찌를 착용했다."과거는 과거일 뿐이니 우린 서로 용서하는 게 어때요?"소은정은 머리를 끄덕였다. 그녀의 눈가에 눈물이 고였다."안타깝게도 난 어떤 선물도 준비하지 못했네요…"그녀는 가방에서 계약서를 꺼내고 남유주에게 건넸다.남유주는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서류 내용을 살펴보았다."이게 뭐예요?""원래는 소찬학의 주식이었지만 몇 년 전에 회사 소유로 되었어요. 아빠가 나이도 있고 해서 주식 대신 배당금을 주기로 했었어요, 근데 더는 그 사람의 것이 아니니까, 아빠가 유주 씨한테 넘기고 싶다고 하더라고요. 우리가 주는 작은 선물이니까 받아줬으면 좋겠어요." 얼굴이 굳었던 남유주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그녀는 계약서를 다시 내밀었다."전 받지 않을래요.""유주 씨, 이게 얼마나 큰 돈인지 몰라요? 술집을 사려고 했던 거 아니었어요? 이 돈으로 그 건물 같은 거 열 개는 살 수 있어요."소은정은 인내심을 가지고 설명했다.남유주는 웃음을 참고 머리를 흔들었다."이걸 받으면 소찬학이 내 생부라는 것을 인정하는 거잖아요, 끊을 수 없는 혈연관계를 받아들여야 하고, 내가 관여하지 않은 과거의 강탈과 억압을 직면해야 해요. 태어난 이래로 부모가 없는 존재로 살아왔고, 아직 그것을 원하지 않아요. 나의 아버지로 인정하고 싶지도 않고 소씨 가문과 혈연적인 관계가
거침없이 내뱉는 심청하의 태도에 소찬식이 얼굴이 어둡게 변했다.옆에서 듣고 있던 소은정이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소씨 가문의 주식은 애초에 저희 집안 거에요. 그리고 둘째 삼촌이 직접 주식을 그룹 소유로 돌리겠다고 서명까지 했어요. 자기는 주식 배당만 챙기겠다고, 회사를 떠난 지금 삼촌한테 배당금을 주는 것만으로도 감사하게 여겨야죠. 이모가 한 계산은 너무 터무니없어요. 이 주식들은 재산 분할과 관련이 없어요. 설령 분할을 한다 해도, 먼저 그룹의 이익을 보호하는 게 우리의 원칙이고요."심청하는 얼굴이 이상하게 변했다."저는 어떻게 해요? 그이가 감옥에 가고, 우리는 손가락 빨면서 굶어 죽으라는 거예요? 주식을 전부 넘겨주세요, 그럼 더는 따지지 않을게요!" 그녀는 무례한 태도로 단호하게 앉아 있었다.소찬식의 표정이 음울하게 어두워졌다, 그는 복잡한 눈빛으로 그녀를 한번 쳐다보았다."그만 돌아가세요, 돌아가서 경찰 소식 기다리세요. 찬식이 회사 자금을 자기 돈처럼 써버렸고 수억 달러를 횡령했어요. 그럼에도 그룹이 이 돈에 대해 따지지 않는 것만으로도 고맙게 생각하세요. 어떻게 돈을, 주식을 요구할 수 있어요?" "나는 찬식 씨가 아니에요, 다른 사람들 사정은 모르겠고, 누가 날 어떻게 생각하든 관심없어요."그는 말을 마친 뒤 옆에 서 있는 집사에게 눈짓했다."손님을 내보내.""네."집사의 대답에, 심청하는 일어서서 조급하게 말했다. "아주버님, 그렇게 말씀하시지 마세요. 형제들끼리 어떻게 이렇게 매정하게 굴어요? 이 일을 언론에 알리면 어떻게 될지 저도 기대되네요, 아마 언론도 이 일에 엄청난 관심을 둘 것 같거든요!"소찬식의 표정은 신경질적으로 굳어졌다, 눈빛이 차갑고 어둡게 변했다.공기 안에는 침묵이 깔렸다.소은정은 갑작스럽게 직감했다. 심청하가 예전과는 분위기가 많이 달라진 것을 눈치챘다.하지만 그들은 타협할 수 없었다. 한 푼이라도 더 주면, 그녀는 주제 파악을 못 하고 더 달라고 요구할 것이다.그녀는 절대로 이번 한
심청하의 얼굴이 새파랗게 변했다."다 해봐야죠, 우선 믿을 만한 변호사를 찾아서 형량부터 줄여줘요."옆에서 듣고 있던 소은정이 참지 못하고 가볍게 웃으며 소리를 냈다.소은정이 입을 열었다."마침 잘 오셨어요, 우리도 지금 삼촌을 어떻게 구할지 토론하고 있었거든요!"심청하는 의아한 눈빛으로 소은정을 쳐다보았다. "그러면... 어떤 방법을 논의했는데?"전동하는 멋도 모르고 웃었다. 그는 소은정의 대답을 기다렸다.소은정은 청량한 목소리로 한숨을 쉬었다."사실 우리가 변호사를 찾아서 물어봤어요. 판결이 심하게 나면, 사형이 나올 수도 있다고 하더라고요, 어쨌든 두 사람을 죽인 거니까.그래도 방법이 있어요, 둘째 삼촌은 그때 혼인 상태였잖아요?법정에 나서서 전부 둘째 삼촌이 한 게 아니라고 증언하면 돼요. 삼촌은 줄곧 숙모랑 함께 있었고, 그런 일을 꾸밀 시간적 여유도 없었다고!"심청하는 갑자기 얼굴이 하얗게 질리더니 충격을 받은 표정으로 일어섰다."너... 나보고 거짓 증언을 하라는 거야, 말이 되니? 그거야말로 불법이야!"소은정은 차가운 눈빛으로 비웃었다."불법이라는 것도 알고 계셨네요? 근데 왜 저희 아버지한테 당당하게 그런 짓을 요구하는 거예요?"심청하는 그제야 자신이 소은정에게 당했다는 것을 깨달았다.화가 난 그녀의 얼굴이 붉어졌다."은정아, 너 말 이상하게 하는 구나, 내가 마음이 너무 급해서 나온 말을 꼬투리 잡는 거니? 그리고 너희 삼촌 아직 유죄 판결도 나지 않았어. 그러니까 우리가 조금 더 노력하면 돼."소은정은 눈썹을 찌푸렸다."그럼 혼자 잘 해보세요! 우린 응원이나 하고 있을게요!""너 지금 뭐하자는 거니?" 심청하는 화를 내며 소찬식을 바라보았다."진짜 이렇게 내버려두실 거예요?"소찬식의 눈빛이 어둡게 깔렸다."자기가 한 일에 대가를 치러야 하겠죠, 저희는 아무런 상관도 하지 않을 겁니다. 그러니 제수씨도 저희를 그만 찾아오세요."심청하는 소찬식의 태도가 이렇게 차갑고 딱딱할 줄은 몰랐다.그녀는 잠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