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다 못한 박수혁이 그녀에게서 전화를 돌려받아 통화를 이어갔다."알겠습니다. 위치 찍어서 보내주시고 최대한 빨리 돌아오세요."그는 전화를 끊은 박수혁이 불안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괜찮아? 무슨 일이야?"소은정은 갑자기 심해진 두통에 얼굴을 찡그렸다.고통에 허우적대면서도 어떤 행동도 취하지 못하는 무기력한 자기가 한심하기 그지없었다.제니퍼와 전동하 모습이 환영처럼 눈앞에서 아른거렸다. 그녀가 바라는 사람은 전동하였다.'동하 씨가 맞았을까? 아직 살아있다면 왜 나를 찾으러 오지 않는 걸까? 내가 이렇게 힘들어하는데...'그녀는 예전에 제니퍼를 본 적이 있었다. 그는 전동하가 아니었다. '들키지 않기 위해 쁘띠 성형 수술이라도 한 걸까? 요즘 기술로는 짧은 시간으로도 쁘띠 성형이 충분히 가능해.'마음속 의심이라는 불씨가 점점 커졌다.박수혁이 자기를 애타게 부르고 있는데도 그녀는 공상에 빠져 있었다.그녀가 초점 없는 눈빛으로 그를 응시했다.박수혁이 침울한 표정으로 말했다."위치는 받았고 이제 당신을 돕는다던 그 지인한테 연락해야 되는 거 아니야?"그녀는 우왕좌왕하다가 본능적으로 문선의 번호를 찾아 전화를 걸었다.호텔을 나설 때 그녀는 배웅해 주겠다는 박수혁의 호의를 단호하게 거절했다.그녀는 홀로 차에 앉아 창밖의 번쩍이는 풍경들을 바라보았다. 잔잔한 풍경과 다르게 그녀의 마음은 타들어 가고 있었다.'제니퍼의 특이한 Rh 식 혈액형은 진짜 그가 동하 씨라는 걸 확신시켜 주는 증거일까? 하지만 그냥 우연의 일치면 어떡하지?'Rh 식 혈액형은 흔한 혈액형은 아니지만 결코 그 수가 적지는 않았다. '단순한 우연인 걸까?'그녀는 마치 찬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오한이 들었다.그녀는 이 우연의 일치를 온 마음을 다해 부정했다. 오히려 제니퍼가 전동하라고 믿고 싶었다. 어떻게 그녀를 속일 수 있었던 건지 그녀는 의문이 들었다.놀이공원에서의 만남부터 박수혁이 얘기한 차이나타운에서의 스토킹까지, 어쩌면 박수혁의 말이 사실일 수 있었
그 환자도 소은정과 마찬가지로 아무렇지 않은 척 평소처럼 웃으며 사람들과 어울렸다. 정상적인 일상생활이 가능한 것처럼 보이는 그녀의 팔에는 자해 자국으로 가득했다.어쩌면 괜찮은 척, 정상적인 척 연기를 하고 있었을지도 몰랐다.소은정도 그런 류의 사람일까 봐 걱정이 되어 밤중에 다급히 연락을 해온 것이었다.환자가 자기 상태를 숨기고 연기를 하기 시작했다는 건 스스로 마음을 닫은 것과 같았기 때문이다.이런 환자는 언제든지 위험에 노출될 수 있었고 누구보다 위험한 선택을 많이 할 것이기에, 항상 옆에서 주시해야 했다.소은정의 목소리가 계속 들려오지 않자 정신과 의사는 당황했다."환자분, 듣고 있어요?"소은정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부드럽게 말했다. "죄송해요, 처리할 업무가 남아서 집중을 못 했네요. 제 걱정은 하지 마세요. 귀국하면 바로 연락할 게요." 혹시라도 자기를 속이는 것일까 봐 한참 동안 고민하던 의사는 우선 그녀를 믿기로 했다.적극적으로 치료에 임하고자 하는 그녀의 태도로 한결 안심이 된 의사가 말했다."알았어요, 하지만 전에 이상함을 느끼면 즉시 저에게 말해야 해요. 환자분과 나눴던 얘기는 전부 기밀 유지가 돼요. 그러니 안심하고 전문의한테 맡기세요."소은정은 담담하게 대꾸했다."네, 저도 선생님 믿어요."전화를 끊고 나서 그녀는 멍한 표정으로 창밖을 응시했다. 녹색 덩굴이 벽을 가득 채워 생기가 넘쳤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영롱하게 반짝이는 호수가 보였다.의사가 한 말을 떠올리며 그녀는 자기 팔을 만졌다.이내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화장실로 가서 얼굴을 씻었다. 다시 아래층으로 내려가 새봄이와 문준서와 시간을 보낸 그녀는 잠자리에 들었다.어두컴컴한 밤 9시, 도시 전체가 고요한 침묵에 빠졌다.최성문이 소은정을 부두로 데려다줬다.궁금할 법만도 한 상황에서 최성문은 묵묵히 그녀를 따랐다.부두도 여느 때처럼 조용했다.바다는 당장이라도 깨어나 세상에 모든 것을 집어삼킬 준비를 하고 있었다
소은정이 부드럽게 악수하며 미소를 지었다. 사무엘의 외국어 실력은 아주 의외였다. 발음이며 말투며 내국인과 다를 바가 없었다. "천만에요,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에요.""은정 씨의 친구가 아직 거기서 벗어 나오지 못했다고 들었는데 도와주신 것에 대한 보답의 의미로 성세를 체포하고 나서 실험실을 파괴하는 동안 친구를 데리고 나올게요. 이름이 뭔지 알려주세요."소은정이 눈을 살짝 내리깔고 입술을 오므리며 몇 초동안 침묵했다."제니퍼요. 몸이 불편한 사람이니 신경 좀 써줘요.""알겠습니다."사무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무엘은 그녀의 옆에 있는 최성문을 힐끗 쳐다보더니 말을 이어갔다. "은정 씨도 몸조심 하세요." "제 걱정은 안 해도 돼요. 그 사람만 찾아줘요."사무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문예성이 나와서 사무엘의 어깨를 두드렸다."시작할까요?""좋아요, 여긴 당신이 맡으세요. 은정 씨가 여기 와본 적 있다고 했으니까 저랑 안에 들아가서 얘기하면 어떨까요?""그러죠."소은정이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여기까지 왔으니 최선을 다해 도와주어야 했다.첫 번째 방을 제외하고 이곳은 연회장이었다. 널찍한 연회장은 고급스럽게 꾸며졌다.반면 위층은 조금 더 아늑했다.간단히 구경만 했던 곳이라 자세히 살펴보지는 않았지만 어느 정도 위치는 파악할 수 있었다."은정 씨가 말했던 엘리베이터는 어디에 있어요?"사무엘이 물었다. 소은정이 기억을 따라 그곳으로 걸어갔다.하지만 아무리 걸어도 그 엘리베이터는 보이지 않았다. 두세번 반복해서 왔다 갔다 해도 여전히 보이지 않았다. 그녀의 얼굴이 점점 창백해졌다."정말 귀신이 곡할 노릇이네요."사무엘도 뭔가 심상치 않음을 느꼈다. "은정 씨, 혹시 기억을 잘못하고 계신 거 아닌가요?"소은정이 고개를 저었다."아니요. 분명히 여기 있을 거예요."그녀는 엘리베이터에서 내려오는 곳이 연회장의 옆문에 있다고 그녀는 확신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녀 앞에는 엘리베이터 대신 벽이 있었다. 누
사무엘이 경멸의 눈빛으로 썩은 미소를 지었다. "남의 업적을 훔치고, 남의 인맥을 훔치고, 이젠 디자인까지 똑같은 연구실을 만들어?"소은정이 의아한 눈빛으로 사무엘을 바라보았다. 문예성이 황급히 설명했다."이 연구실은 저희 연구실과 구조부터 시작해 연회장까지, 하나부터 열까지 똑같아요."소은정이 충격에 얼어붙었다."그럼 내부에 대해 잘 알고 있지 않나요?""물론이죠, 눈 감고도 몇 바퀴 돌 수 있어요. 왠지 오늘 작전은 순조로울 것 같아요."사무엘이 눈썹을 치켜들고 표정이 한결 가벼워졌다.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 한 사람이 다가와 문예성에게 말을 건넸고 문예성이 고개를 끄덕이며 사무엘을 바라보았다."다 왔어요. 들어갑시다."사무엘이 소은정을 흘끗 쳐다보았다."은정 씨, 들어가시죠?"소은정이 웃으며 일어나 최성문을 바라보았다. 최성문은 그녀의 뒤를 따랐다. 그들은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엘리베이터 내부는 건장한 사람 서른 명 가까이는 족히 들어갈 수 있는 크기였다.엘리베이터 내부에 들어선 사무엘은 기관 구조를 살펴보았다.하지만 그가 버튼을 잘못 눌렀는지 엘리베이터 안의 감시 카메라 방향이 갑자기 작동을 멈췄다.엘리베이터가 계속 내려가면서 무중력 상태에 도달했다. 바깥의 해저가 너무 깊고 어두워 숨을 쉴 수 없는 밀폐된 공간이 된 엘리베이터였다.소은정이 약간 불편한 듯 눈을 감았다. 최성문이 조심스럽게 주위를 둘러보았다.엘리베이터가 도착하자 다른 사람들이 먼저 빠져나왔다.문예성, 사무엘, 소은정이 맨 마지막에 남았다.최성문은 그녀가 조금 나아진 것을 보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사무엘이 고개를 돌려 엘리베이터와 눈앞에 있는 유리 더미를 바라보며 고개를 저었다."단순하게 계산해도 8년에서 10년 정도 걸릴 것 같은 대공사인데, 5년 전에 회사를 떠난 성세가 5년이라는 짧은 시간 안에 이걸 완성했을 리는 없고, 훨씬 전부터 이미 준비하고 있었던 모양이네요."문예성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이곳은 외부인이 들어오기도 힘
"지금 뭘 찾고 있는데요?""사람 찾아요."소은정은 잠시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제가 찾는 사람이 여기 있든 없든 간에 모든 길과 방은 따로 분리된 게 아니라 서로 통하는 게 좋아요. 출입 가능한 통로가 하나쯤은 있어야 해요. 그럼 밖에서 찾는 것보다 훨씬 안전하잖아요."사무엘이 가기 전에 그녀에게 한 말이었다.여기부터 찾기 시작한다면 아주 빠르게 그들과 만날 수 있을 것이다.최성문은 고개를 끄덕이며 경계를 강화했다.소은정은 빛 반사가 되는 곳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유리 재질의 벽 같았지만 두께로 보아 실제 벽은 아닌 것 같았다.벽 앞에 서서 손을 뻗은 그녀는 긴장되어 침을 꼴깍 삼켰다.안으로 벽을 힘껏 밀자 벽은 서서히 안으로 밀려 들어갔다.사방이 고요했다.바다 심연의 울림마저 무수히 증폭되어 들려왔다.휴게실 같은 공간이 드러났다. 그곳엔 아무도 없었다.소은정은 안을 둘러보며 눈썹을 찡그렸다.최성문이 물었다."저희가 잘못 찾아온 건 아니겠죠? 사무실부터 찾아보는 건 어때요?"'여긴 첫 번째 장소야, 어떤 기술적인 시스템도 보이지 않아. 그 사람이 어떻게 여기에 있는 거지?'그녀는 익숙한 느낌을 지워버릴 수 없었다. 결국 안으로 걸음을 옮긴 그녀는 방 안을 둘러보았다.방 안에서만 보이는 유리창 너머로 물고기가 헤엄쳐 다니고 있었다.검푸른 빛깔의 텅 빈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칠흑 같은 바닷속에서 희미한 빛이 비쳤고 쓸쓸한 분위기를 한층 더 자아냈다.소은정은 혹시나 더 있을 방을 찾아 벽에 손을 대고 밀었다.'안에 있는 건가?'그녀는 헤엄치고 있는 물고기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이상한 느낌이 든 그녀는 투명한 유리 옆에서 손을 불쑥 내밀었다.최성문은 그녀의 이해할 수 없는 행동에 난감해 보였다.순간, 손에 힘을 주자 유리가 천천히 밀려들어 갔다.그들의 눈앞에 어두운 터널 공간이 하나 나타났다."은정 씨..."이미 끝까지 도착한 줄 알았던 그들은 눈앞에 벌어진 광경에 흠칫 놀랐다.소은정의 두 손이 가늘게 떨리
침착함을 되찾은 제니퍼가 차가운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이미 거절했을 텐데요. 아무런 시도도 안 해보고 수술실에서 허망하게 죽고 싶지 않아요."눈가에 눈물이 가득 고인 소은정은 그를 애타게 바라보았다. 답답함과 애절함으로 뒤엉킨 그녀는 애처로운 눈빛으로 제니퍼를 오래도록 응시했다."띠링"제니퍼는 휴대폰을 꺼내 받았다.성세의 당황한 목소리가 그녀에게까지 전해졌다."큰일 났어요. 누군가 따라 들어왔어요. 사무엘이 보낸 사람 같은데 지금 날 잡기 위해 사방을 들쑤시고 다니고 있어요. 도와줘요, 잡히면 내 사업도 끝나고 인류의 역사도 끝난다고요!"성세는 위험에서 벗어나기 위해 제니퍼에게 연락했다.성세가 연구실 구조를 위층과 아래층 전부 똑같게 설계한 바람에 그의 위치가 더욱 쉽게 노출되었다.제니퍼는 심연처럼 빨려 들어갈 것 같은 눈빛으로 소은정을 지그시 바라보다가 침착하게 말했다."저도 어쩔 방법이 없네요. 성 대표님, 명복을 빕니다!""어떻게 이 중요한 순간에 날 버릴 수 있어요? 내 연구를 누구보다 지지하던 당신이 어떻게 나를 배신할 수 있어요? 곧 세계를 놀라게 할 연구 결과를 선보일 수 있어요. 당신 다리도 치료해 멀쩡하게 사람들 앞에 나설 수 있게 만들 수 있다고요! 우린 최고의 파트너라고요!"성세는 제니퍼에게 치료를 빌미로 자기 목숨을 구걸하고 있었다.옆에서 듣고 있던 소은정은 웃음이 터졌다.제니퍼는 소은정을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패배를 인정하는 건 어떤가요?""어떻게 제가 패배를 인정할 수 있겠어요? 날 충분히 꺼내줄 수 있잖아요! 날 도와주기만 하면 나가서 재기할 수 있어요. 그러니 제발 도와줘요!""당신이 프로젝트 성과를 훔쳐 올 줄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어요. 배신감을 느끼는 건 오히려 나예요."제니퍼의 말에 성세는 어떤 대꾸도 하지 못했다.'어떻게 안 거지?'성세는 모든 진실을 알고 있는 제니퍼의 말에 당황한 눈치였다.휴대폰으로 시끄러운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그게 어때서요? 지금 당신을 구할 수 있
아이언의 태도는 안에서와 정반대였다.설령 성세가 무너지더라도 아이언은 제니퍼의 편에 서지 않았을 것이다.그는 어떤 정보도 알려지지 않은 제니퍼 보다 성세가 훨씬 믿음직스러웠다.게다가 바깥 상황에 대해 알 수 없는 지금 그는 더욱 불안할 수밖에 없었다.소은정과 최성문이 성세의 계획을 망치기 위해 온 걸 눈치챈 아이언은 결정을 내릴 필요가 있었다.소은정은 아이언이 총을 쏠까 봐 꼼짝할 수 없었다.아이언과 성세는 이미 해외에서 인명피해를 입힌 전적이 있었다. 그런 사람들에게 그녀는 감히 배짱 넘치게 행동할 수 없었다.최성문이 움직이려 하자 그녀는 급히 최성문에게 눈짓했다.의아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던 최성문의 시선은 아이언에게 옮겨갔다.서늘한 눈빛으로 경계 태세를 갖춘 최성문이었다.아이언과 가까이에 있던 제니퍼는 움직일 수 없는 처지인지라 그녀를 구출할 수 없었다.이것을 잘 알고 있는 아이언은 더 당당하게 행동했다.밖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누군가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아이언은 굳은 얼굴로 총구를 소은정의 머리에 조준했다.누군가 방문을 열었고 아이언은 흔들리는 눈빛으로 문을 바라보았다.순간 유리가 와장창 깨졌다.휠체어에 앉은 제니퍼의 손에 총 한 자루가 들려있었다.총에 소음기까지 장착한 탓에 아이언이 눈치채지 못했다.아이언의 가슴은 피로 물들고 있었다.얼굴을 찡그린 아이언은 피로 물들고 있는 자기 가슴을 바라보았다.정작 총을 쏜 제니퍼는 덤덤한 표정으로 아이언을 싸늘하게 바라보았다.소은정을 겨냥하고 있던 총이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아이언은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입가로 검붉은 피가 흐르고 있었다.아이언은 흔들리는 눈빛으로 제니퍼를 바라보았다.제니퍼를 따라다니는 동안 그는 제니퍼가 총을 챙겼다는 사실조차 인지 못 했다.최성문은 소은정을 자기 뒤로 끌어당긴 뒤 총을 아이언에게 조준했다.아이언이 돌발행동을 하는 걸 막기 위해서였다.소은정은 침착하게 서 있었다.어수선한 소리가 바깥에서 들려왔다.파도가 당장
연구실에는 시스템 파괴 장치도 함께 있었다.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성과를 빼앗기지 않기 위해 만든 폭파 장치였다.하지만 이 장치는 전쟁이 아닌 이상 가동하지 않기로 합의가 되어 있었다.성세가 이 시스템까지 표절할 줄 몰랐던 사무엘은 인상을 구겼다.성세는 연구실의 하나하나를 그대로 카피했다.성세가 노리는 건 모든 증거물의 인멸이었다.모든 게 사라진다면 아무도 이곳을 찾지 못할 것이고 그가 벌인 추악한 진실도 수면 아래로 사라질 것이다.사무엘이 그의 뒤를 따라 안으로 뛰어갔다.성세는 창백한 얼굴로 비릿한 웃음을 지었다."한 발짝만 더 오면 다 같이 죽을 줄 알아!"성세의 발아래에는 아이언이 누워 있었다.아이언의 붉게 물든 가슴은 유난히 도드라져 보였다.장치를 작동시키면 도망갈 틈이 생긴다는 걸 알아차린 성세는 잠시 고민에 잠겼다.'여기서 죽는 게 사무엘한테 끌려 나가 재판받고 모욕을 당하는 것보다 나을 거야. 저 멍청이들은 절대 인류를 위해 공헌한 나를 이해하지 못해.'성세는 광기에 어린 표정으로 사람들을 노려보았다."이런 임상실험에 적대적으로 대하는 한 200년이 지나도 인류는 어떤 발전도 이룩하지 못할 거야! 인류를 위해 공헌한 나를 감히 이렇게 대해? 두고 봐, 절대 가만두지 않을 거야!" 고함을 지르던 그는 갑자기 말을 뚝 멈췄다.똑딱똑딱 카운트다운 소리가 들려왔다.그의 눈빛이 어둡게 변했다.사무엘은 얼굴을 구겼다. 일단 장치가 가동되기 시작하면 절대 정지시키거나 종료시킬 수 없었기 때문이다.사무엘은 바깥에 있는 사람들을 향해 소리쳤다."어서 배로 돌아가요! 얼른 출발하세요! 카운트다운이 시작됐어요! 1분 뒤면 여긴 폭발할 겁니다! 얼른 도망쳐요!"사무엘의 외침에 사람들은 웅성거렸다.전예성은 당황한 눈빛으로 아래층에서 수색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달려갔다."어서, 어서 도망쳐야 해요!"두려움과 불안함으로 가득 찬 장내는 소란스럽기 그지없었다.최성문은 소은정의 손을 와락 잡아당겼다. "어서 가야.."소은정은 이리저리
오랜만에 만난 두 사람은 서로 부둥켜안고 눈물을 흘렸다.문준서는 그녀의 눈물을 보고 죄책감에 얼굴을 들 수 없었다.새봄이가 점차 울음이 잦아들자 그는 고개를 숙이고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었다.새봄이는 길게 심호흡하고 감정을 식혔다.준서에게는 묻고 싶은 게 정말 많았다.문준서는 울어서 빨갛게 부은 새봄이의 눈을 보고 웃으며 말했다.“커피 계속 마실 거야? 안 마실 거면 우리 집에 올래? 내가 맛있는 커피 만들어 줄게!”새봄이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준서는 소녀의 손을 잡고 핸드백을 챙긴 뒤, 밖으로 나갔다.커피숍 직원들마저 잘 어울리는 한 쌍이라고 부러운 눈빛을 보냈다.새봄이는 그와 손을 잡고 걷고 있자 저도 모르게 가슴이 설레었다.어릴 때는 항상 손을 잡고 다녔는데 지금은 어딘가 어색했다.어린 문준서는 항상 새봄이를 우선으로 생각했는데 지금도 그럴까?문준서는 소녀가 기억하는 어린 준서가 아니었다. 그의 거대한 뒷모습은 왠지 모를 안정감을 주었다.문준서가 웃으며 소녀에게 물었다.“뭘 그렇게 뚫어지게 봐?”“키 몇이야?”“192, 만족해?”새봄이는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을 느끼며 고개를 돌렸다.“내가 키 큰 사람 별로라고 하면 뼈라도 깎을 거야?”문준서는 웃으며 소녀의 손을 잡아끌었다.“응. 네가 집도해.”새봄이도 덩달아 웃었다.10여 년을 떨어져 지내다 보니 처음에는 정말 보고 싶었지만 점차 감정은 옅어져 갔다. 매번 부모님에게 준서의 안부를 물을 때면 그들은 머리만 흔들었다.그 뒤로 새봄이는 더 이상 준서를 찾지 않았다.말없이 사라진 그를 원망한 적도 있었다.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면 그가 해외에서 무사히 지냈으면 하는 바람이 더 컸던 것 같았다.문준서는 길가에 세워진 스포츠카로 다가갔다.차도 주인을 닮아 검은색으로 차분하고 화려하지 않은 디자인이었다.처음 그와 눈이 마주쳤을 때, 새봄이는 그가 문준서라는 것을 한눈에 알아보았다. 티없이 맑고 순수했던 눈동자는 어릴 때와 비교해 변한 게 전혀 없었다.하지만 소녀
새봄이가 떠난 뒤로 전동하는 한숨을 달고 살았다. 옆에서 지켜보는 소은정은 어이가 없었다.학교 생활은 생각했던 것보다 따분하지 않았다.어릴 때부터 곱게 자란 새봄이지만 거만하지 않고 성격이 활발했기에 많은 친구를 사귀었다.아이는 가끔 친구들을 집에 초대해서 파티를 벌였다.그리고 혼자 있는 시간도 충분히 즐겼다.가끔 센 강변에 가서 산책도 하고 석양을 감상하며 오리에게 먹이를 주기도 했다.그런데 가끔 혼자 있을 때면 누군가가 지켜보는 느낌이 들기도 했다.하지만 크게 걱정하지는 않았다. 주변에 수시로 경호원들이 지키고 있었기 때문이다.새봄이는 아이스크림을 들고 홀로 석양 아래에서 산책을 즐겼다. 손에는 엄마를 위해 준비한 선물인 한정판 명품백이 들려 있었다.이목구비가 화려한 동양소녀가 길을 걷고 있자 무수히 많은 시선들이 따라다녔다.하지만 프랑스의 치안은 별로 좋지 못했다.새봄이가 아이스크림을 먹는 사이 녹색 트레이닝복을 입은 남자가 소녀의 핸드백을 가로채서 사람들 틈으로 도주했다.놀란 새봄이는 다급히 남자의 뒤를 따라가며 소리쳤다.“도둑이야!”안타깝게도 유럽에서 비슷한 사건은 비일비재하게 벌어졌다.아무도 핸드백을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싶지 않아했다.새봄이는 자신이 안전하다는 것을 알기에 끝까지 남자를 쫓아갔다.수염이 덥수룩한 남자는 뒤를 돌아보며 뭐라고 욕설을 지껄이더니 골목으로 진입했다.새봄이가 쫓아갔을 때, 남자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소녀가 망연자실한 얼굴로 서 있을 때, 갑자기 옆 골목에서 사람이 튀어나왔다.남자는 바로 새봄이의 목을 노리고 달려들었지만 손이 소녀에게 닿기도 전에 누군가가 달려와서 남자를 걷어찼다.새봄이는 겁에 질린 얼굴로 뒤를 돌아보았다.훤칠하고 잘생긴 동양인 남자가 등 뒤에 서 있었다.어딘가 익숙한 느낌이 들었다.검은 정장을 입은 남자가 새봄이의 앞으로 다가갔다.그에게서 익숙한 우드향이 풍겼다.그는 천천히 소녀를 향해 손을 뻗었다. 손가락이 가늘고 예쁜 손이었다.녹색 트레이닝복을 입은 강
전동하는 그날 밤 새봄이에게 해외유학 얘기를 꺼냈다.새봄이는 고민도 해보지 않고 바로 동의했다.어디에 가고 싶냐고 물었더니 프랑스만 제외하고 아무데나 괜찮다고 했다.전동하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준서 때문에 프랑스에 가기 싫은 거야?”새봄이가 눈시울을 붉히며 말했다.“걔가 누군데? 하나도 기억 안 나! 걔 얘기하지 마!”아이는 억울함을 토로했다.줄곧 아이의 옆을 지켜주던 오빠는 어느 날 갑자기 사라졌다.마치 꿈을 꾼 것 같았다.더 이상 아이의 뒤꽁무니를 따라다니던 오빠는 없었다.아이는 준서가 보고 싶었지만 준서는 떠날 때 편지 한장 남기지 않았다.전동하는 안쓰러운 표정으로 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새봄이도 이제 컸잖아. 준서도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어. 연락이 없던 것도 그럴만한 사정이 있어서였어. 나중에 준서 만나도 너무 준서를 욕하지 마.”새봄이는 고집스럽게 고개를 돌려버렸다.부모의 사랑만 받고 자란 아이는 갑작스러운 이별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가끔 딸이 울기라도 하면 전동하는 항상 달려와서 딸을 위로해 주었다.태어날 때부터 다이아수저를 물고 태어난 아이는 누구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었다.그런데 어느 날 오빠가 보고 싶었던 아이가 준서에게 전화를 걸었을 때, 없는 번호라고 나왔다.아이는 버려진 느낌을 받았다.출국이 결정되었으니 전동하는 아이가 다닐 학교를 알아보았다.결국 새봄이는 유럽을 선택했다.마치 누군가가 거기서 자신을 기다리는 것처럼.떠나기 전, 아이는 일곱 남자친구와 작별인사를 나누었다.아이가 출국하는 날, 온가족이 나와서 새봄이를 배웅햇다.새봄이는 딱히 슬프거나 아쉬운 티를 내지 않았다. 마치 부모님 손을 잡고 해외여행을 가는 것처럼 자연스러웠다.아이는 활짝 웃으면서 가족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전동하와 소은정은 영지까지 데리고 같이 프랑스로 출국하기로 했다.일가족이 탑승수속을 마치고 돌아서는데 뒤에서 급박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새봄아!”고개를 돌리자 하얗게 질린 얼굴로 허겁지겁 이쪽
눈 깜짝할 사이에 새봄이는 어엿한 숙녀로 자라났다.고등학교에 들어가자마자 그녀에게는 남자친구가 생겼다.새봄이는 집으로 돌아와서 이 소식을 소은정에게 알렸다.소은정은 딱히 말리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어렸을 때 이런저런 경험을 다 해보는 게 아이에게 좋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그리고 새봄이가 진심일 거라고 생각하지도 않았다.하지만 이 사실을 알게 된 전동하는 밤새 잠을 이룰 수 없었다.그는 아이와 대화를 나눠봐야겠다고 마음먹었다.새봄이의 반응은 시큰둥했다.“친구들이 다들 남자친구를 사귀는데 나만 솔로면 유행에 뒤떨어지잖아. 그래서 만나보기로 했어. 그리고 너무 이른 나이도 아니잖아! 중학교 때부터 연애하는 애들도 많다고!”전동하는 인내심 있게 아이를 타일렀다.“그래도 넌 아직 너무 어려. 밖으로 나가 사람들과 더 많이 접촉해 보면 알게 될 거야. 남자는 다 믿을 놈이 못 돼….”“그럼 엄마가 아빠를 만난 것도 사랑에 눈이 멀어서 만난 거겠네?”어릴 때부터 말싸움에는 절대 지지 않던 새봄이는 미소가 소은정을 닮은 예쁘고 사랑스러운 소녀로 성장했다.그리고 총기 있는 눈동자와 말빨, 그리고 큰 키는 전동하를 많이 닮았다.소은정은 어디 하나 빠지지 않는 딸이 나중에 남자 여럿을 울릴 거라는 것을 알기에 아이에게는 사랑을 하면 꼭 아빠랑 엄마처럼 서로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라고 강조했다.새봄이는 전동하가 말이 없자 달려가서 그의 팔짱을 꼈다.“아빠, 걱정하지 마. 그냥 연애는 어떤 느낌인가 궁금해서 해보는 거야.”“그래서 그 남자친구는… 어떤 사람이야?”“어느 남자친구를 말하는 거야?”전동하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물었다.“몇이나 사귀었는데?”“다른 애들은 다 한명하고만 사귀는데 난 다른 애들 따라하기 싫어. 그래서 하루에 한 명, 일주일에 일곱 명이야! 주일을 정해서 따로 만나!”새봄이가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전동하는 입을 뻐금거리며 한참을 말을 잇지 못했다.그래도 다행인 건 사랑에 깊이 빠지는 스타일은 아니라는 점이랄까.
다른 CCTV에서 정황이 포착되었다. 직원이 그쪽으로 다가가다가 발을 헛디디며 하마터면 술잔을 쏟을 뻔한 정황이었는데 그때 잔을 안쪽으로 옮기며 위치가 바뀐 것 같았다.독극물 검사결과도 나왔다.청산가리였다.심청하의 몸에서 나온 독극물과 약병에 있던 독극물 성분이 일치했다.살인을 계획했던 심청하가 제 꾀에 당한 상황이었다.아마 그녀는 죽을 때까지 어디서 문제가 생겼는지 몰랐을 것이다.형사들은 밤을 새워 CCTV를 확인하면서 이 약병의 출처가 남유주의 큰어머니라는 사실을 밝혀냈다.그렇게 큰어머니가 경찰에 소환되었다.큰어머니는 숨김없이 사건의 경과를 진술했는데 심청하에게 협박을 당했다는 내용이었다.하지만 사람을 해치고 싶지 않아서 넘어지는 틈을 타 약병을 바닥에 버렸다고 했다.심청하가 포기를 못하고 스스로 행동에 옮기다가 제 꾀에 당했다는 말도 했다.형사가 인상을 찌푸리며 그녀에게 물었다.“그랬다는 증거 있나요?”“당연히 있죠.”큰어머니는 딸인 남연을 호출했다.“형사님이 묻는 대로 사실을 대답해! 떨지 말고!”남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핸드폰을 꺼냈다.그리고 차 안에서 심청하와 대화했던 녹음을 재생했다.“그 여자가 아빠랑 엄마를 죽이겠다며 협박했어요. 그 파티 초대장은 제가 거금을 주고 산 거예요. 우린 태한그룹 사모님과 친척관계에요. 평소에 왕래는 하지 않지만 사람을 죽이고 싶지는 않았다고요!”남연은 울음을 터뜨리며 말했다.“형사님, 제가 아는 건 다 얘기했어요.”형사는 그녀의 진술에서 이상한 점을 포착했다.“전에 남유주 씨를 해하려 한 적이 있죠?”“그래! 너도 직접 남유주를 죽이려고 했잖아? 그건 왜 쏙 빼고 말해?”녹음본에 담겼던 심청하의 목소리였다.의심을 사지 않기 위해 파일은 편집을 거치지 않았다.남연은 고개를 푹 숙이고 사실을 털어놓았다.“그것도 심청하가 협박해서 했어요. 하지만 언니 앞에서 이미 잘못을 인정했고 사과도 했어요. 언니는 저를 용서했고요.”형사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이건 박수혁 대표와
심청하는 한참 침묵하더니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무슨 방법을 쓰든 그 사람들과 걔를 만나게 해. 안 그러면 이 약은 네 부모님 배 속으로 들어갈 거야!”남연은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고개를 떨어뜨렸다.“알겠어요.”결국 그녀는 겁에 질린 얼굴로 명령을 받아들였다.며칠 뒤, 마침 좋은 기회가 찾아왔다.오늘은 자선회가 열리는 날이었는데 박수혁은 남유주의 기분을 풀어주기 위해 그녀와 함께 자선회에 참석했다.그리고 자선회에서 많은 보석과 골동품을 구매하며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다.자선회가 끝나고 파티가 이어졌다.남연의 부모는 힘겹게 초대장을 입수했다.심청하는 파티홀에서 이어질 장면을 기대하고 있었다.하지만 남연의 부모는 뒤늦게 파티에 참석했고 그들이 현장에 도착했을 때는 파티가 다 끝난 뒤였다.심청하는 분노를 주체할 수 없었다.이번 기회를 놓치면 다음에는 언제가 될지 장담할 수 없었다.SC그룹에서는 지분 사건으로 그들을 물고늘어질 것이다.본사에서 움직이기 전에 남유주를 제거해야 했다.잠시 후, 남유주의 큰어머니는 사람이 없는 곳에 숨어들었다.그리고 약을 꺼내 술병에 쏟아넣으려고 했다.마침 취객이 그녀의 어깨를 부딪히고 지나가며 그녀가 바닥에 쓰러졌다.남유주 큰어머니가 고통에 신음을 흘리자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되었다.약병은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구석진 곳으로 굴러갔다.심청하는 싸늘한 눈빛으로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정말 뭐 하나 일을 제대로 하는 게 없는 일가족이었다.남유주의 큰아버지는 얼굴이 하얗게 질려 다급히 다가가서 아내의 손을 잡고 구급차를 호출했다.호텔에 미리 대기하고 있던 의료진이 달려왔고 큰어머니를 들것에 실어 병원으로 호송했다.심청하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사람들이 모두 흩어지고 그녀는 구석진 곳으로 가서 아무도 안 보는 틈을 타 약병을 손에 쥐었다.그리고 기회를 봐서 약을 와인에 쏟고 흔들었다.모든 게 끝난 뒤, 심청하는 손에 난 땀을 닦았다.이미 살인을 하기로 마음먹은 그녀였지만 직접 모든 일을 끝내고 나니
남유주는 미소를 지으며 소은정과 박수혁 사이를 스스럼없이 얘기했다.남유주는 지나간 둘의 과거를 신경 쓰지 않았다.박수혁은 소은정에게 다른 마음이 없었고 그들은 각자 다른 사람과 행복한 삶을 살기로 했다.소은정은 미소를 지으며 남유주가 건넨 상자를 열었다.안에는 팔찌가 있었다, 반짝이며 아름다운 화려한 목걸이의 모든 보석은 정교하게 다듬어져 있었고 본연의 미와 섬세함의 아름다움을 결합하는 느낌이 들게 했다.그녀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몇 년 동안 이런 것을 모으기를 좋아했는데... 고마워요, 진짜 마음에 들어요." 남유주는 화해의 의미로 소은정에게 팔찌를 건넸다.소은정은 미소를 지으며 팔찌를 착용했다."과거는 과거일 뿐이니 우린 서로 용서하는 게 어때요?"소은정은 머리를 끄덕였다. 그녀의 눈가에 눈물이 고였다."안타깝게도 난 어떤 선물도 준비하지 못했네요…"그녀는 가방에서 계약서를 꺼내고 남유주에게 건넸다.남유주는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서류 내용을 살펴보았다."이게 뭐예요?""원래는 소찬학의 주식이었지만 몇 년 전에 회사 소유로 되었어요. 아빠가 나이도 있고 해서 주식 대신 배당금을 주기로 했었어요, 근데 더는 그 사람의 것이 아니니까, 아빠가 유주 씨한테 넘기고 싶다고 하더라고요. 우리가 주는 작은 선물이니까 받아줬으면 좋겠어요." 얼굴이 굳었던 남유주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그녀는 계약서를 다시 내밀었다."전 받지 않을래요.""유주 씨, 이게 얼마나 큰 돈인지 몰라요? 술집을 사려고 했던 거 아니었어요? 이 돈으로 그 건물 같은 거 열 개는 살 수 있어요."소은정은 인내심을 가지고 설명했다.남유주는 웃음을 참고 머리를 흔들었다."이걸 받으면 소찬학이 내 생부라는 것을 인정하는 거잖아요, 끊을 수 없는 혈연관계를 받아들여야 하고, 내가 관여하지 않은 과거의 강탈과 억압을 직면해야 해요. 태어난 이래로 부모가 없는 존재로 살아왔고, 아직 그것을 원하지 않아요. 나의 아버지로 인정하고 싶지도 않고 소씨 가문과 혈연적인 관계가
거침없이 내뱉는 심청하의 태도에 소찬식이 얼굴이 어둡게 변했다.옆에서 듣고 있던 소은정이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소씨 가문의 주식은 애초에 저희 집안 거에요. 그리고 둘째 삼촌이 직접 주식을 그룹 소유로 돌리겠다고 서명까지 했어요. 자기는 주식 배당만 챙기겠다고, 회사를 떠난 지금 삼촌한테 배당금을 주는 것만으로도 감사하게 여겨야죠. 이모가 한 계산은 너무 터무니없어요. 이 주식들은 재산 분할과 관련이 없어요. 설령 분할을 한다 해도, 먼저 그룹의 이익을 보호하는 게 우리의 원칙이고요."심청하는 얼굴이 이상하게 변했다."저는 어떻게 해요? 그이가 감옥에 가고, 우리는 손가락 빨면서 굶어 죽으라는 거예요? 주식을 전부 넘겨주세요, 그럼 더는 따지지 않을게요!" 그녀는 무례한 태도로 단호하게 앉아 있었다.소찬식의 표정이 음울하게 어두워졌다, 그는 복잡한 눈빛으로 그녀를 한번 쳐다보았다."그만 돌아가세요, 돌아가서 경찰 소식 기다리세요. 찬식이 회사 자금을 자기 돈처럼 써버렸고 수억 달러를 횡령했어요. 그럼에도 그룹이 이 돈에 대해 따지지 않는 것만으로도 고맙게 생각하세요. 어떻게 돈을, 주식을 요구할 수 있어요?" "나는 찬식 씨가 아니에요, 다른 사람들 사정은 모르겠고, 누가 날 어떻게 생각하든 관심없어요."그는 말을 마친 뒤 옆에 서 있는 집사에게 눈짓했다."손님을 내보내.""네."집사의 대답에, 심청하는 일어서서 조급하게 말했다. "아주버님, 그렇게 말씀하시지 마세요. 형제들끼리 어떻게 이렇게 매정하게 굴어요? 이 일을 언론에 알리면 어떻게 될지 저도 기대되네요, 아마 언론도 이 일에 엄청난 관심을 둘 것 같거든요!"소찬식의 표정은 신경질적으로 굳어졌다, 눈빛이 차갑고 어둡게 변했다.공기 안에는 침묵이 깔렸다.소은정은 갑작스럽게 직감했다. 심청하가 예전과는 분위기가 많이 달라진 것을 눈치챘다.하지만 그들은 타협할 수 없었다. 한 푼이라도 더 주면, 그녀는 주제 파악을 못 하고 더 달라고 요구할 것이다.그녀는 절대로 이번 한
심청하의 얼굴이 새파랗게 변했다."다 해봐야죠, 우선 믿을 만한 변호사를 찾아서 형량부터 줄여줘요."옆에서 듣고 있던 소은정이 참지 못하고 가볍게 웃으며 소리를 냈다.소은정이 입을 열었다."마침 잘 오셨어요, 우리도 지금 삼촌을 어떻게 구할지 토론하고 있었거든요!"심청하는 의아한 눈빛으로 소은정을 쳐다보았다. "그러면... 어떤 방법을 논의했는데?"전동하는 멋도 모르고 웃었다. 그는 소은정의 대답을 기다렸다.소은정은 청량한 목소리로 한숨을 쉬었다."사실 우리가 변호사를 찾아서 물어봤어요. 판결이 심하게 나면, 사형이 나올 수도 있다고 하더라고요, 어쨌든 두 사람을 죽인 거니까.그래도 방법이 있어요, 둘째 삼촌은 그때 혼인 상태였잖아요?법정에 나서서 전부 둘째 삼촌이 한 게 아니라고 증언하면 돼요. 삼촌은 줄곧 숙모랑 함께 있었고, 그런 일을 꾸밀 시간적 여유도 없었다고!"심청하는 갑자기 얼굴이 하얗게 질리더니 충격을 받은 표정으로 일어섰다."너... 나보고 거짓 증언을 하라는 거야, 말이 되니? 그거야말로 불법이야!"소은정은 차가운 눈빛으로 비웃었다."불법이라는 것도 알고 계셨네요? 근데 왜 저희 아버지한테 당당하게 그런 짓을 요구하는 거예요?"심청하는 그제야 자신이 소은정에게 당했다는 것을 깨달았다.화가 난 그녀의 얼굴이 붉어졌다."은정아, 너 말 이상하게 하는 구나, 내가 마음이 너무 급해서 나온 말을 꼬투리 잡는 거니? 그리고 너희 삼촌 아직 유죄 판결도 나지 않았어. 그러니까 우리가 조금 더 노력하면 돼."소은정은 눈썹을 찌푸렸다."그럼 혼자 잘 해보세요! 우린 응원이나 하고 있을게요!""너 지금 뭐하자는 거니?" 심청하는 화를 내며 소찬식을 바라보았다."진짜 이렇게 내버려두실 거예요?"소찬식의 눈빛이 어둡게 깔렸다."자기가 한 일에 대가를 치러야 하겠죠, 저희는 아무런 상관도 하지 않을 겁니다. 그러니 제수씨도 저희를 그만 찾아오세요."심청하는 소찬식의 태도가 이렇게 차갑고 딱딱할 줄은 몰랐다.그녀는 잠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