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도 이한석의 위치가 예전과 많이 달라졌다는 것을 알기에 정중하고 예의바르게 그를 맞아주었다.이한석은 여전히 미소를 띠고 있었지만 전보다는 확연히 다른 카리스마를 뿜어내고 있었다.그는 대범하게 자리에 앉은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었다.소은정과 전동하에게 인사할 차례가 되자 그는 부담스럽지 않은 부드러운 말투로 그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마치 오래된 친구를 다시 만난 것 같은 느낌이었다.소은정과 전동하도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를 받았다.임춘식이 웃으며 그에게 물었다.“이 대표, 요즘 회사가 많이 바빠요? 몇 번이나 만나자고 문자했는데 매몰차게 거절했잖아요. 좀 너무한 거 아니에요?”이한석은 예의 바른 미소를 지으며 질문에 대답했다.“임 대표님, 저도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어요. 워낙 바쁘기도 했고 임 대표님이 밥 먹자고 부르면 당연히 나가야죠. 그런데 솔직히 해외 여행을 같이 가자는 건 좀 아니잖아요.”말문이 막힌 임춘식은 어색한 미소를 지었고 이렇게 박수혁에 관한 주제는 자연스럽게 묻히게 되었다.심강열 옆에 앉은 한유라는 원래 가만히 못 있는 성격이라 엉덩이를 움찔거렸지만 그럴 때마다 심강열이 힘으로 그녀를 다시 자리에 앉혔다.“사고 치지 말고 가만히 있어.”경고 섞인 말투였다.그는 한유라에 대해 가장 잘 아는 사람이었다. 너무 진지한 자리가 아니었기에 누군가를 골려 주기에는 이만한 자리가 없었다.한유라는 몇 번이나 시도해도 소용이 없자 얌전히 그의 옆을 지켰다.하지만 그것도 얼마 못 가 그녀는 짜증이 치밀었다.다시 의자에서 엉덩이를 떼려는데 심강열이 그녀의 팔목을 잡아당겼다.‘옆통수에 눈이라도 달렸나?’한유라는 이를 갈며 그의 귓가에 대고 말했다.“사고 안 칠 테니까 이거 좀 놔주면 안 돼? 은정이랑 대화 좀 하고 올게.”심강열은 그녀를 힐끗 바라보고는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은정 씨는 지금 전 대표랑 같이 있잖아. 은정 씨가 당신처럼 장난꾸러기인 줄 알아? 이상한 핑계 대지 마.”한유라의 말을 전혀 믿지 않는다는 태도였다
소은정은 그녀의 불만을 눈치채고 입을 다물었다.한유라가 심강열의 비서로 취직한 건 업무적인 능력을 증명하기 위해서라는 건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심해그룹에서 인정받지 못해도 한유라는 돌아갈 곳이 있었다.하지만 심강열이 적당한 인사발령을 내주지 않으니 다시 가문으로 돌아가 가업을 물려받을 수도 없었다.심해그룹에서 한동안 비서로 근무하다가 가문에서 운영하는 유한그룹으로 돌아가서 대표가 된다?유한그룹 직원들이 그걸 어떻게 받아들일지도 문제였다.그리고 한유라의 부모님을 설득하기엔 설득력도 부족했다.소은정은 잠시 고민하다가 말했다.“그러면 강열 씨한테 너 혼자 프로젝트를 진행해 보고 싶다고 말하는 건 어때?”어차피 업계에서는 잘나가는 회사의 대표가 여자친구를 띄워주기 위해 여자친구에게 프로젝트를 맡기고 뒤에서 도와주는 일도 비일비재했다.한유라는 잠시 그녀를 바라보다가 말했다.“됐어. 내가 알아서 할게. 돌아가서 다시 잘 얘기해 보지 뭐!”그녀는 고집스러운 표정으로 잔을 내려놓고 아무렇지 않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그래.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 얘기해.”한유라는 더 기다리고 싶지 않았다. 더 기다리다가 자신이 미쳐버릴 것 같았다.조금 전 심강열이 임신 얘기를 꺼냈을 때도 불편했다.그와 아이를 가지는 게 불편한 건 아니었다.그녀는 소은정과 상황이 조금 달랐다. 회사에서 그녀의 발언권은 별로 많지 않았다.김현숙과 심강열은 그녀가 임신하면 바로 직장생활 그만하라고 할 것이 뻔했다.그녀는 하고 싶은 일이 있고 아이 때문에 일을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소은정은 그녀와 잠시 이야기를 나누다가 나가서 전화를 받고 화장실로 향했다.그들이 대여한 대형 룸을 나와 화장실을 찾는데 옆방 문이 조금 열려 있었다. 문틈으로 익숙한 뒷모습이 보였다. 소은정은 살짝 미간을 찌푸리고 걸음을 재촉해서 그곳을 빠져 나왔다.‘어디서 본 것 같은 사람인데?’소은정이 지나간 뒤, 열려 있던 문이 닫혔다.이한석은 공손한 자세로 자신을 등지고 선 남자의 눈치를
박수혁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가 다시 폈다.조금 전 문틈을 통해 어렴풋이 보았던 그녀의 뒷모습이 떠올랐다. 평생 잊을 수 없는 사람이지만 이제는 남이 되어버린 사람.그만을 향해 웃어주던 여자가 이제는 다른 사람의 여자가 되었다.그리고 그에게는 만류할 기회도 주어지지 않았다.그는 남들이 잠든 밤에 몰래 그녀를 그리워하면서 행복했던 과거를 회상할 수밖에 없었다.그건 오로지 그에게 속한 시간이었다.한편, 미팅은 저녁 때가 되어서 끝이 났다.사람들은 서로 인사를 나눈 뒤, 줄을 지어 와인바를 나섰다.전동하는 임춘식과 인수건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느라 마지막까지 자리에 남았고 소은정은 옆에서 조용히 그들을 기다렸다.기다리다 지친 그녀는 졸음이 몰려왔다.정신이 몽롱해진 사이 누군가가 그녀의 어깨에 외투를 걸쳐주는 것이 느껴졌다.그녀는 눈을 뜨고 자신을 향해 부드러운 미소를 짓는 남자를 올려다보았다.“이제 갈까요? 돌아가서 쉬어요.”소은정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자리에서 일어섰다.“드디어 끝났네요.”사실 그녀는 얼굴만 내밀었고 업무 관련 담화는 전부 전동하가 진행했다.그녀가 관심 있어하는 프로젝트 얘기가 나오면 그녀가 일부러 언질을 줄 필요도 없이 전동하에게 눈길만 보내면 그가 알아서 적극적으로 대화에 끼어들었고 이 부분에 대해 이견을 제기하는 사람은 없었다.전동하가 다가와서 부드럽게 어깨를 감싸자 소은정은 자연스럽게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밖으로 나가자 전동하가 차 문을 열어주었다.“이제 출발할게요.”소은정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녀가 많이 피곤할 것을 알기에 전동하도 말없이 차에 시동을 걸고 출발했다.한참이 지난 뒤에야 구석진 곳에서 한 남자가 걸어 나왔다.어딘가 쓸쓸해 보이는 뒷모습이었지만 어둠이 짙게 내려앉아서 표정을 읽을 수 없었다.그를 따라 밖으로 나온 이한석은 외투를 그에게 건네며 말했다.“대표님, 비행기 시간이 곧 다가오는데 바로 공항으로 출발하실 거죠?”박수혁은 멀어지는 차의 뒷모습을 잠시 바라보다가 한참이
정신을 차린 심강열은 미간을 마사지하며 말했다.“기분 좀 나아졌어?”한유라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따뜻한 물에 샤워를 하고 오랜만에 공들여서 피부관리를 했더니 아까보다는 기분이 훨씬 좋아졌다.하지만 굳이 야심한 밤에 대화를 나누고 싶지는 않았다.그녀가 뒤돌아서는데 심강열이 그녀의 손목을 잡아 자신의 무릎에 앉혔다.한유라가 눈썹을 치켜올리며 물었다.“당신은 피곤하지도 않아?”심강열은 못 말린다는 표정으로 그녀의 턱을 살짝 치켜올리며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책임질 자신 없으면 자극하지 마.”한유라는 입술을 질끈 깨물며 물었다.“나랑 무슨 대화를 하고 싶은 거야?”심강열은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그녀를 힐끗 바라보고는 그녀의 옆구리를 살짝 꼬집었다.“오늘 기분 나쁜 일 있었어?”한유라는 눈을 깜빡이며 천연덕스럽게 말했다.“아니. 그런 거 없는데?”“거짓말하지 마. 우리 사이에 숨기는 거 없기로 했잖아. 할 얘기 있으면 솔직하게 얘기해.”말은 그렇게 했지만 화가 난 말투는 아니었다.많이 피곤하지만 빨리 문제를 해결하고 싶은 그의 마음이 느껴졌다.한유라는 시선을 떨구고 잠시 침묵하다가 진지한 눈빛으로 그와 시선을 맞췄다.“조희찬 씨도 본사를 떠났는데 나는 언제 본사에서 내보내 줄 거야?”그 말에 심강열이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그는 약간 미간을 찌푸리고 그녀를 바라보며 물었다.“어디로 가고 싶은데?”한유라는 그의 무릎에서 일어나 그의 맞은편으로 가서 앉았다. 그리고 담담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심해그룹 안주인이 평생 당신 비서로 살 수는 없잖아? 본사에 출근하기로 결정한 것도 일개 비서에 만족하려고 온 게 아니야. 어떻게 생각해?”심강열은 잠시 침묵하며 그녀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그녀의 생각을 조금은 알 것 같았다.“비서 일이 지겨워?”“지겨운 건 아니야. 그냥 지금 위치에서 내가 배울 수 있는 게 한정되어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 그리고 내가 이 자리에서 배운 경험으로 내가 유한그룹을 물려받기에는 부족해. 당
심강열은 턱을 쓰다듬으며 피식 웃은 뒤, 어깨를 으쓱했다.“뭐라 반박할 수가 없네. 알았어. 내가 좀 소홀했네. 당신이 그렇게까지 이 문제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는 줄은 몰랐어. 당신이 나보다 낫네.”한유라는 저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밝은 미소를 지었다.심강열은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물었다.“그럼 어떤 위치가 당신에게 적합하다고 생각해?”가장 중요한 문제였다.한유라는 잠시 주저하다가 솔직하게 입을 열었다.“기획본부장이나 이사장 정도?”그녀는 기대에 찬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심강열은 별로 놀라거나 싫은 티를 내지 않았다. 오히려 평소보다 더 침착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렵게 용기를 냈던 한유라에게는 다행이었다.그가 그녀의 요구를 너무 지나치다고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뜻이었으니.그는 한참 고민하다가 다시 고개를 들었다.“프로젝트를 직접 맡아서 진행하고 싶어?”별로 내키지 않은 말투였다.그녀가 과거 유한그룹에서 맡았던 프로젝트는 부모님 도움을 받았거나 큰 성과를 내지 못한 게 더 많았다. 실질적으로 큰 프로젝트를 맡기에는 능력이 아직 부족하다는 뜻이기도 했다.하지만 한유라는 억울했다.남자가 자신을 얕보는 것 같아서 불쾌하기도 했다.한유라는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물었다.“안 돼?”심강열은 착잡한 표정으로 대답했다.“안 된다는 건 아니지만….”그는 한참 고민하다가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그렇게 하자. 마침 기획실에 꼴 보기 싫은 놈 한 명이 있었는데 나도 참을 만큼 참았거든. 당신은 기획실장으로 취임해. 내일 임원회의에서 발표하도록 할게.”한유라는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이렇게 쉬운 일이었다고?이렇게 쉽게 동의한다고?그녀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멀뚱멀뚱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그냥 찔러본 말이었는데 바로 기획실장으로 취임하라고?”사실 그녀도 자신의 능력이 거기까지 미치지는 못한다는 것을 알았기에 일부러 과장해서 말한 부분이 있었다.유한그룹에서 기획실장을 맡으라고 했다면 어차피 부모님
심강열은 의아한 표정으로 일어나서 방 안을 둘러보았지만 그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평소에는 몇 번이나 불러도 일어나지 않던 한유라가 이 시간에 어디로 간 걸까?놀란 그는 재빨리 씻고 옷을 갈아입은 뒤, 거실로 나갔지만 집 안 어디에도 그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이상하네?’그녀에게 전화를 걸어보았는데 그녀는 뭔가 바쁜 일이 있는지 말투에 짜증이 묻어 있었다.“오늘은 나 혼자 출근할게. 당신은 천천히 와. 지각하지 말고.”말을 마친 그녀는 전화를 끊어버렸다.심강열은 당황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다물지 못했다.해가 서쪽에서 뜬 건가?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간단하게 아침을 먹고 나온 그는 평소처럼 꾸물거리던 그녀가 없으니 약간 허전함을 느꼈다.그래도 평소와 같은 시간에 회사에 도착했다.지나가던 직원들은 그에게 고개 숙여 인사 했다.심강열은 그들에게 고개를 끄덕여 주고는 곧장 엘리베이터로 향했다.사무실로 올라가자 서류를 정리하던 남자 비서가 그를 보고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심강열은 미간을 찌푸리며 그에게 말했다.“할 말 있으면 해.”오늘따라 꾸물거리는 비서의 태도에 짜증이 났다.어제 한유라를 대하던 때와는 확연히 다른 태도였다.남자 비서는 입술을 질끈 깨물며 그에게 말했다.“대표님, 한유라 씨… 그러니까 사모님께서 아침부터 오셔서 짐을 챙겨서 나가더라고요. 여기서 더는 일 안 한다면서요.”한유라가 여기 입사한지 얼마 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비서실 직원들과는 사이가 꽤 좋은 편이었다.처음에는 약간 갈등도 있었지만 어쨌든 지금은 오해가 잘 해결되었고 한유라도 그들에게 종종 밥을 사주거나 간식을 사주는 일이 있었기에 대부분 비서들이 그녀를 좋게 바라보고 있었다.돈도 많고 직원들에게 통이 큰 사모님을 누가 싫어할까?그래서 한유라가 아침부터 부산스럽게 짐을 싸는 것을 보고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사전에 인사이동이 있을 거라는 얘기도 없었고 갑자기 벌어진 일이라 당황스러웠다.심강열은 여전히 인상을 쓰고 있었지만 조금 전보다는
질문세례를 받은 이 비서는 아까 사무실에서 봤던 장면을 떠올리고 멍한 표정으로 고개를 흔들었다.“저도 몰라요!”사람들이 수군거리면서 회의실 분위기가 어수선해졌다.회의도 너무 갑작스러웠기에 사람들은 도대체 무슨 일로 회의를 소집했는지 궁금했다.심강열이 안으로 들어서자 그들은 바로 입을 다물었다.하지만 한유라가 그를 따라 안으로 들어서자 모두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회의에 참석한 인원들은 대부분 두 사람의 결혼식에 참석했었기에 한유라의 신분에 대해 알고 있었다.그녀가 임원회의에 참석한다고 문제가 될 건 없었다.하지만 이번 회의를 기점으로 한유라가 경영에 직접 개입하게 될지 사람들의 관심이 쏠렸다.그들의 생각을 모르는 심강열은 자리에 앉자 마자 입을 열었다.“유 실장님, 저번에 보니까 장부에 돈이 좀 비던데 다 채워 넣었어요?”그 말을 들은 모두가 놀라서 입을 다물지 못했다.유 실장이라는 사람의 얼굴은 흙빛이 되었고 말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저기… 대표님….”옆에 있던 다른 임원이 책상을 치며 추궁했다.“이게 어떻게 된 일입니까? 돈이 빈다니요?”심강열이 공개적으로 이 사건을 거론했다는 건 액수가 그만큼 크다는 것을 의미하고 회사에 그만큼 큰 손실을 안겼다는 것을 의미했다.그러니 절대 쉽게 넘어갈 수 없었다.게다가 기획실 유 실장과 사이가 안 좋은 사람도 꽤 있었다.“장부에서 돈이 새어 나갔다는 건가요?”“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겁니까?”한유라는 자리에 앉아 조용히 그들의 말을 들으며 사람들의 반응을 살폈다.사람들이 이 사건에 분노할수록 그녀는 자연스럽게 자신이 원하던 위치로 갈 수 있었다.그녀는 심강열을 못내 감탄했다. 만약 그녀가 다른 일을 해보고 싶다고 조르지 않았다면 유 실장이라는 사람을 그가 얼마나 더 지켜볼지 알 수 없었다. 물론 그가 너그러운 사람이라서가 아니라 여우 목을 자를 적당한 때를 노리고 있다는 게 정확했다.이렇게 갑자기 공개해 버리면 유 실장에게 오히려 잘된 일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유 실장의
유 실장은 흙빛이 된 얼굴로 온몸을 부들부들 떨며 말했다.“이미 가진 돈은 다 잃었고 더는 방법이 없더라고요. 그쪽 담당자가 저한테 괜찮은 투자 항목이 있다면서 10일 이내로 두 배 이상의 수익을 보장해 준다고 했어요.”한 주주가 어이가 없어 한마디 했다.“유 실장 이미 2주가 지났어. 애도 아니고 그런 말에 속아? 당신 합격시킨 면접관이 누구야? 도대체 이런 멍청한 자식이 어떻게 이 회사에 들어왔지? 쓰레기 같은 놈!”유 실장은 여전히 간절한 표정으로 심강열에게 애원했다.“대표님, 제발 경찰에 신고만은 하지 말아주세요. 제가 무슨 수를 써서든 돈을 돌려놓을 테니 선처해 주세요.”심강열은 담담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유 실장님 정말 순진하시네요. 400억이라는 돈이 도박장에 흘러 들어갔는데 무슨 수로 돌려받아요? 아, 물론 돌려받을 수는 있죠. 하지만 유 실장은 그 돈을 돌려받지 못할 겁니다.”그는 목청을 가다듬고 차가운 표정으로 유 실장을 쏘아보며 말을 이었다.“이따가 형사들이 올 거예요. 조사에 협조하길 바라죠. 돈을 순조롭게 돌려받으면 유 실장님이 회사를 위해 2년이나 일한 정을 봐서 손해배상은 청구하지 않을 생각이에요. 어떻게 생각하세요?”협상의 여지가 전혀 없는 질문이었다. 차갑고 단호한 표정과 말투가 그걸 말해주고 있었다.그래도 회사 입장에서는 많이 봐준 셈이었다.유 실장이 벌인 짓에 비하면 굉장한 은혜를 베풀었다고 볼 수 있었다.회사에서 그를 상대로 손해배상청구 소송이라도 진행한다면 고작 몇 억으로 합의를 볼 수 없는 사건임은 분명했다.이미 빈털터리가 된 유 실장이 무슨 돈으로 합의금을 지불한단 말인가. 게다가 그는 이미 아내와 이혼소송을 진행 중이었다. 만약 그가 빚을 떠안은 상태로 이혼 소송까지 진행한다면 유 실장 혼자만의 문제가 아니었다.심강열이 조금 단호해 보여도 사실 그의 입장에서는 꽤 관대하게 처리한 거라 볼 수 있었다.한유라는 턱을 괴고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유 실장은 울며 겨자 먹기로 심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