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 됐다.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심강열의 입가에 자조적인 미소가 실렸다.한편, 한유라는 그 자리에서 꿈쩍도 하지 않은 채 심강열의 뒷모습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떡 벌어진 등판이, 든든한 뒷모습이 오늘만큼은 왠지 쓸슬하게 다가왔다.‘내가 잘못한 거잖아. 왜 네가 사과를 해...’한유라의 머릿속에 지난 시간들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났다.반강제로 한 결혼이었지만 생각 외로 잘 맞는 사람이었다. 심지어 육체적인 관계에서조차 왜 이제야 만났을까 싶을 정도로, 정말 이 사람이 내 영혼의 반쪽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잘 맞았었다.그렇게 조심스럽게 서로를 향해 다가가던 두 사람이었는데 오늘 그녀의 행동 때문에 다시 거리가 십만 리쯤은 다시 멀어진 기분이었다.‘화났겠지? 당연하겠지. 세상 어느 남자가 자기 와이프가 그렇게 노는 모습을 보고 가만히 있겠어...’ 하지만 화난 와중에도 넘어진 그녀를 잡아주고 세게 나간 말 한마디에 그녀가 상처받을까 바로 사과하는 심강열의 마음이 고맙고 미안했다.‘이대로 보내면... 다신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을 거야.’다시 마음을 다잡은 한유라가 다급하게 달려갔다.금방이라도 떠나려는 심강열의 차를 붙잡을 수 있는 방법은 단 하나,한유라가 눈을 질끈 감고 그 앞을 막아섰다.“끼익!”귀청이 째질 듯한 브레이크 소리와 함께 심강열의 목소리가 늦은 밤거리에 울려퍼졌다.“너 미쳤어?”차에 뛰어든 그녀보다 더 두렵고 놀란 것 같은 표정이었다.그 모습에 움찔하던 한유라가 또각또각 걸어가 자연스레 조수석에 탑승했다.떠나려는 차 앞을 막아서더니 이게 다짜고짜 무슨 짓인가 싶어 심강열의 눈이 휘둥그레졌다.“출발해. 집에 가야지.”아무 일도 없었던 듯 차분한 그녀의 목소리에 기가 차오른 심강열은 한참 입을 벙긋거리다 결국 차에 시동을 걸었다.집으로 가는 내내, 흔한 음악 하나 틀지 않은 차안에서 그 누구도 목소리를 내지 않았다.잠시 후, 두 사람의 집 앞.목적지에 도착했음에도 그 누구도 먼저 내리지 않았다.‘백
평소 설령 잘못을 저질러도 당당하기만 하던 한유라가 이렇게까지 나오는데 심강열도 이번 한번만은 넘어가리라 다짐했다.남녀관계란 밀당이 기본, 이번에는 한유라가 먼저 당겼으니 모름지기 넘어가는 모습도 보여줘야 관계가 지속될 것이다.‘적어도 이 일로 이혼할 건 아니니까.’정말 마음이 풀린 건지 심강열은 미소까지 보여주었다.“영광이네. 탕자였던 한유라 씨를 내가 돌려놓은 거나 마찬가지니까.”그토록 사랑했던 민하준에게도 이런 약속은 하지 않았을 거란 생각에 찌질하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입꼬리는 자꾸만 들썩거렸다.방금 전까지 막연하게만 느껴졌던 결혼생활에 아직 희망의 불씨가 남아있음을 확신하는 순간이었다.훨씬 누그러든 심강열의 목소리에 한유라는 더 환하게 웃으며 눈을 찡긋거렸다.“그럼 우리... 집에 올라가서 다시 얘기할까?”하지만 다음 순간, 심강열의 긴 팔이 쑥 들어오더니 그녀를 조수석에서 들어 무릎 위에 앉혔다.서로의 숨결이 그대로 느껴지는 거리, 한유라의 온몸에서 느껴지는 독하지만 달콤한 술향기가 심강열마저 취하게 만들었다.당황한 한유라를 보며 심강열이 싱긋 웃었다.“집에 올라갈 시간... 없을 것 같은데.”이 말을 마지막으로 심강열의 입술이 다시 내려앉았다.역시나 그의 생각대로 달콤한 맛이 혓속을 오랫동안 맴돌았다....한편 전동하의 전화를 받고 소은정은 약을 어디에 뒀었더라는 생각과 함께 걸음을 재촉했다.바로 그때, 시야에 강렬한 빛이 흘러들어오고 소은정이 급하게 브레이크를 밟았다.워낙 늦은 밤, 러시아워 때의 모습은 온데간데 없는 넓은 거리는 왠지 스산하게 느껴졌지만 자극적인 브레이크 소리는 띄엄띄엄 보이는 행인들의 시선을 끌기에 충분했다.한편, 운전석에 앉은 소은정은 순간 뒷덜미가 서늘해지는 기분이 들었다.‘아니야. 당황하지 마. 여긴 내 구역이야. 저번처럼 허무하게 당하는 일은 없어.’거리에서의 짧은 대치 끝에 검은 차에서 누군가 내렸다.그리고 다음 순간, 또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은색 SUV가 빠르게 달려오더
최성문이 소은정의 차 곁으로 다가가려는 안진의 앞을 막아섰다.이에 안진이 고개를 돌려 소은정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이 세상에 남은 미련 하나 없어 보이는 절망적인 눈빛.그 눈빛에 흔들린 걸까? 소은정은 망설이다 결국 차에서 내렸다.비록 그녀의 납치사건에 안진은 아주 중요한 인물이었지만 납치 사건 자체를 그녀가 계획한 것이 아닌 거라는만큼은 확실했다.만약 그녀를 처리하고 싶었다면 A시에 있는 동안 백번은 넘게 시도할 수 있었겠지만 그러지 않았으니까.찬 바람이 소은정의 머리카락을 스치고 지나고 그 바람보다 더 차가운 목소리가 울렸다.“왜? 나한테 뭐 할 말이라도 있어?”“오늘 밤 비행기로 떠날 거야. 우리 오빠는 죽었고 오빠 밑에 부하들 중에 아직 남은 사람들은 내가 돌아가길 기다리고 있으니까. 아마 한국은... 다시 오지 못하겠지.”바람에 흩어지지 않을까 낮은 목소리였지만 소은정의 귀에는 이상하리만치 뚜렷하게 들렸다.“그래, 잘가.”‘뭐 이 상황에 배웅이라도 해달라고 온 건 아닐 테고... 왜 여기까지 온 걸까?’한참을 망설이던 안진이 어렵게 다시 입을 열었다.“마지막으로 네 얼굴 보고 사과하고 싶었어. 우리 오빠가 심했어. 미안해.”사과?마지막으로 깽판이라도 치고 갈 줄 알았는데 뜬금없는 사과에 소은정은 당황스러웠다.하지만 안진의 입가에 걸린 씁쓸한 미소가 그녀의 사과가 진심임을 말해 주고 있었다.“나 때문에... 납치당한 거니까... 하지만 내가 시킨 건 아니야. 그래도 내 책임이 없다고는 말할 수 없겠지. 어쨌든 나 때문에 겪지 않아도 될 일을 겪었잖아. 미안해, 진심이야.”하지만 소은정은 여전히 의심스러운 표정이었다.“겨우 그 말 하려고 여기까지 왔다고? 난 뭐 한바탕 엎고 가려는 줄 알았네?”“그래, 겨우 사과하려고 온 거야. 나라고 이러고 싶었겠어? 그런데... 수혁이한테서 연락이 왔어. 우리 오빠가 저지른 일들... 그 책임을 묻지 않는 대신 너한테 진심으로 사과하라더라.”‘그럼 그렇지...’소은정이 미간을 찌
처음 만났을 때의 모습이 기억나지 않을 정도로 초췌한 모습에 소은정은 왠지 기분이 착잡해졌다.군수 밀수기업 회장의 딸로 태어난 안진, 아마 자라는 내내 피가 튀기는 전쟁 같은 삶을 지내왔을 것이다.그래서 자연스레 차갑고 타인을 해침에 있어 그 어떤 죄책감도 느끼지 못하는 괴물이 되어버렸다.그런데... 그런 그녀의 마음을 녹인 사람이 더 차가운 박수혁이라니.인생이란 참 아이러니하지 않을 수 없었다.의미심장한 눈빛으로 안진을 바라본 소은정이 다시 차에 올라탔다.최성문 역시 잡고 있던 남자의 목덜미를 놓아주었다.다른 경호원들에게 SUV에 타라고 분부한 최성문이 자연스레 소은정의 차에 몸을 실었다.별 소란없이 끝나긴 했지만 소은정이 안전하게 집에 들어가는 모습을 봐야 마음이 놓일 것 같아서였다.소은정의 차는 코너를 돌아 순식간에 모두의 시야에서 사라졌다.착잡한 그녀의 마음을 말해 주듯 돌아가는 거리에는 차 한 대 없이 조용하기만 했다.한참 뒤에야 소은정이 입을 열었다.“안진 쪽에 사람 좀 붙여주세요. 정말 떠난 게 맞는지 확인해야겠으니까요.”“알겠습니다.”고개를 끄덕인 최성문이 바로 휴대폰을 들었다.안진이 떠남으로서 모두를 들썩이게 만든 납치사건이 무사히 막을 내린 듯했지만 소은정은 여전히 어딘가 찝찝했다.‘왜... 왜 그런 표정을 지었던 걸까?’그리고 동시에 씁쓸한 미소와 함께 배를 어루만지던 안진의 행동이 자꾸 눈앞에 아른거렸다.‘아니야. 괜한 생각하지 마. 그냥 앞으로 안진이 정말 나한테 아무런 위협도 되지 않을 건지... 그걸 확인하는 게 중요한 거야.’잠시 후, 오피스텔에 도착한 소은정은 엘리베이터에 탔다.그리고 문이 열린 순간, 전동하의 환한 미소가 그녀를 맞이했다.“은정 씨 데리러 가려던 참이었는데 어떻게 지금 와요? 텔레파시가 통했나?”동시에 전동하가 그녀를 향해 팔을 벌렸다.그 아늑한 품에 안긴 소은정은 익숙한 상쾌한 향기를 탐욕스럽게 들이마셨다.곧 그녀의 허리를 어루만지던 전동하의 손길이 에로틱하게 변하더니
마스크팩을 붙이고 있는 소은정은 발신인을 확인하고 스피커폰을 켰다.“어, 오빠. 무슨 일이야?”동시에 마스크팩이 떨어지지 않도록 손가락을 꾹꾹 누르는 것도 잊지 않았다.“아빠가 밥 먹으러 오래. 물고기 좋은 거 잡으졌다고.”이에 소은정이 여전히 주방에서 돌아치는 전동하를 힐끗 바라보았다.“저녁에 갈게. 우리 지금 밥 먹는 중이거든.”“오케이. 그럼 다 내가 다 먹어야지~”기다렸다는 듯 대답한 소은해가 전화를 뚝 끊어버렸다.“뭐야, 싱겁게...”다시 마스크팩에 집중하던 소은정이 벌떡 일어섰다.“설마 탕수어는 아니겠지?!”소은정이 잔뜩 흥분한 표정으로 마스크팩을 거칠게 걷어냈다.워낙 가리지 않고 잘 먹긴 하지만 소은해를 이렇게까지 들뜨게 만드는 음식이라면 아마...그와 소은정이 가장 좋아하는 탕수어뿐이었다.한편, 그녀의 목소리에 깜짝 놀라 주방에서 나온 전동하는 15분에서 1분도 모자라면 안 된다는 말과 달리 이미 떼어버린 마스크팩을 발견하고 더 놀란 표정을 지었다.“탕수어요? 마스크팩은 왜 뗀 거예요?”“지금 피부 관리나 할 기분이 아니에요. 일단 우리끼리 밥 먹어요. 아저씨가 탕수어를 만드셨나 봐요. 소은해... 먹을 복도 좋지.”“탕수어? 그런 요리는 처음 들어보는데. 그렇게 맛있어요?”“당연하죠. 은해 오빠랑 탕수어랑 바꿀래 라고 누군가 물어보면 망설이지 않고 네라고 대답할 정도랄까요? 워낙 번거로워서 자주 하진 않으시지만요...”잔뜩 실망한 소은정의 표정이 전동하에게는 사랑스럽게 다가왔다.“이렇게까지 화내는 거 보면 진짜 맛있긴 한가 보네요. 나도 먹어보고 싶다.”“오늘 저녁! 무조건 오늘 저녁에 먹어야겠어요.”말을 마친 소은정이 바로 집사에게 문자를 보냈다.전동하도 함께 돌아갈 거란 말에 집사는 번거로움을 무릅쓰고 저녁에도 한번 더 만들어주겠다고 약속했고 그제야 소은정의 입가에 미소가 피어올랐다.잠시 후, 국을 한술 떠먹은 전동하가 물었다.“조금 있다가... 나랑 쇼핑 갈래요?”이에 소은정이 눈썹을 치켜세웠
이에 소은정이 눈썹을 치켜세웠다.“오늘 내가 출근할 거라는 건 어떻게 알았대요?”“며칠 전부터 연락주셨습니다. 대표님께서 돌아오시면 바로 연락달라고 하시더군요.”책상 앞에 쌓인 파일을 대충 훑어보던 소은정이 가벼운 말투로 말했다.“태한그룹과 관련된 프로젝트 모두 오빠한테 넘겨요. 그 대신 지금 바로 처리해야 할 업무는 저한테로 돌리시고요.”그녀의 말에 흠칫하던 우연준이 곧 그 의미를 알아채고 고개를 끄덕였다.“태한그룹 쪽은...”임춘식과 박수혁은 평범한 비즈니스 파트너가 아닌 친구에 가까운 사이, 게다가 그 동안 거성그룹 명의로 소은정과 만남을 가진 적도 한두번이 아니었음으로 경계심이 드는 게 당연했다.‘임춘식을 이용해서 내 마음을 떠보시겠다? 그렇다면 확실하게 말해 줘야지. 앞으로 일을 빌미로 날 만날 기회도 없을 거야. 이대로 우린 끝인 거야.’생각을 마친 소은정이 홀가분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네, 앞으로 박수혁과 관련된 프로젝트는 저한테 보고하지 말아주세요.”“알겠습니다.”대답을 마친 우연준이 사무실을 나선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소은호가 문을 벌컥 열고들어왔다.굳은 표정에 피곤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에 소은정이 미간을 찌푸렸다.“얼굴이 왜 그래? 제대로 못 잤어?”소파에 털썩 주저앉은 소은호가 미간 사이를 꾹꾹 눌렀다.“네 새언니 임신하더니 입맛만 점점 더 까다로워지는 거 있지? 한밤중에 오뎅이 먹고 싶다고 해서 가게란 가게는 다 뒤져서 사왔는데 그 사이에 좀 식었다고 펑펑 울지 뭐야? 그거 달래주느라고 혼났다...”힘이 쏙 빠진 목소리에 소은정이 웃음을 터트렸다.“원래 임신하면 호르몬이 요동친대. 우리 집안 첫 아이니까 더 신경 써. 그리고... 임신할 때 먹고 싶은 거 못 먹으면 그 서러움이 평생 간다더라.”“지금도 충분히 열심히 하고 있어.”소은호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최근 1주일간, 소은호는 스스로에 대한 인지를 다시 쓰는 수밖에 없었다.손바닥 뒤집 듯 변하는 한시연의 변덕에도 짜증 한번 나지 않는 자신의
순간 소은정은 스스로의 귀를 의심했다.“누구?”“소은해, 네 셋째 오빠 소은해.”‘얘가 나이도 어린 게 왜 벌써 가는 귀가 먹었대.’소은정이 눈이 커다래졌다.“오빠가 그렇게 하겠대? 곱게 회사로 들어가서 일이나 배우라고 아빠가 회초리까지 드셨는데 배우한 사람이야. 이제 와서 다시 회사로 들어오겠어?”하지만 소은호는 그딴 건 별문제가 아니라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어쩔 수 없지 뭐. 내가 지금 맡고 있는 일 다 너한테 넘기면 너 과로사할지도 몰라. 게다가 연극 공연도 끝났겠다 딱히 새 작품 들어갈 생각도 없는 것 같고. 놀면 뭐해. 다 집안 일인데 어떻게든 도와야지.”“뭐 오빠가 알아서 설득하는 거지?”사실 점잖게 사무실에 앉아있는 소은해의 모습도 상상이 가지 않았고 소은호가 정말 설득에 성공할까 반신반의의 마음이었지만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오케이. 뭐 인턴 비슷한 거라고 생각하고 마음껏 부려먹어. 제대로 못하면 해고해도 상관없고.”‘슈퍼 알바도 그렇게 쉽게 안 자르겠다... 아니지, 어쩌면 본인은 잘리길 원할지도 모르겠네?’피식 웃다 커피를 한 모금 마신 소은정이 뭔가 생각난 듯 고개를 들었다.“아, 나 요즘 생각하고 있는 게 하나 있어. 재단 하나를 세우고 싶어. 유괴, 실종된 아이들, 그리고 그 아이들을 찾는 부모님들을 물심양면으로 후원할 수 있는 그런 재단 말이야.”나 오늘 밥 먹을래라고 말하 듯 가벼운 말투에 소은호가 미간을 찌푸렸다.뭐든 말로 하는 것과 실제로 행동에 옮기는 건 차원이 다른 문제니까.“말처럼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야. 유괴된 아이들이 꼭 한국에 있다는 법도 없고... 해외로까지 영향력을 펼치려면 막대한 자본력이 필요할 거야. 게다가 각 나라 외교 문제도 끼어있고... 꽤 골치 아플 텐데 정말 괜찮겠어?”다른 나라가 끼어들면 필연적으로 정치, 외교 문제가 생기기 마련, 게다가 이런 문제는 돈으로 해결할 수 없는 것들이 대부분이니 걱정이 앞설 수밖에 없었다.“오빠가 말한 문제들 나도 다 고민해 봤어. 물론
“고마워, 오빠. 내 마음 알아줘서.”환하게 웃는 소은정의 눈이 반짝였다.“내일 3시, 은해가 회사로 올 거야. 웬만한 잡무는 은해한테 넘겨. 항상 네 몸부터 챙기고.”말을 마친 소은호가 그녀의 머리를 톡 두드리곤 사무실을 나섰다.마음속에 품고만 있던 생각을 입 밖에 내고 또 그것이 생각보다 쉽게 현실로 이루어지자 소은정의 마음도 훨씬 더 홀가분해졌다.그날 저녁, 계획대로 전동하와 함께 본가로 돌아가 만족스러운 식사를 마치고 저택을 나서려던 그때, 소은해에게서 전화가 끊임없이 걸려왔다.하지만 무슨 말을 할지 알고 있었던 소은정이 아무렇지 않은 척 거절 버튼을 기계적으로 눌러댔다.“야, 소은호 진짜 미친 거 아니야? 나더러 출근하래. 악마도 이런 악마가 없어. ““그리고 더 최악은 뭔지 알아? 글쎄 내 카드를 막아버렸지 뭐야?”“야, 내가 무슨 고딩도 아니고. 그거 다 내가 추운 날에 벗는 촬영, 더운 날에 푹푹 찌는 사극 촬영해 가면서 차곡차곡 모은 돈인데 자기가 뭐라고...”“하, 난 안 해! 차라리 매일 CF를 열편씩 찍지 난 절대 출근 못해!”“야, 소은정. 씹냐? 너라도 내 편 좀 들어줘. 너까지 모른 척하면 나 진짜 너랑 의절할 거야.”쏟아지는 문자들은 소은해의 분노를 고스란히 담고 있었다.전화를 거절했음에도 그 목소리가 고스란히 들리는 듯했으니까.‘오빠도 불쌍하지만 일단 나부터 살자. 나도 과로사는 싫어.’“나도 오빠 무서워. 알아서 해결해.”“아, 몰라! 임신은 자기 와이프가 했는데 왜 지가 더 유세야? 와이프는 없어도 나도 애인은 있고 나도 나름 전문직에 대한민국에서 최고로 잘 나가. 나도 바쁙다고.”“연극 공연도 끝났고 딱히 보고 있는 대본도 없다면서... 하늘이도 지금 출장 중이고...”“하, 매니저 납셨네. 너지. 네가 형하네 다 일러바친 거지? 소은해가 하릴없이 빈둥빈둥 놀고 있다. 어떻게든 부려먹어라! 이렇게 이른 거 아니냐고!”“오해야. 나 정말 아무것도 몰랐어.”문자로 부족한지 다시 전화를 걸어와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