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물로 들어가니 새로운 별천지가 펼쳐졌다.현대의 모던함과 옛것의 멋스러움이 자연스럽게 어우러진 이 집은 무시무시한 군수물자 상인이 사는 곳이라곤 믿기지 않을 정도로 아늑했고 우아했다.남자의 정체를 몰랐다면 은퇴하고 귀농한 대학교 교수나 학자의 집처럼 보일 정도였으니까.이때 늘씬한 몸매의 여자가 다가오고 은은한 향기가 소은정의 코끝을 자극했다.꽤 예쁘장하게 생긴 동남아 스타일의 미인이었다.“자기야, 왔어? 내가 얼마나 기다렸는 줄 알아?”여자가 요염한 미소와 함께 남자의 품에 안기고 자연스럽게 그녀의 엉덩이를 두드린 남자가 여자와 기나긴 키스를 나누었다.진한 스킨십을 마친 여자는 남자와 한몸이라도 되려는 듯 그의 허리를 꼭 끌어안았다.한편, 갑작스러운 두 사람의 애정행각에 소은정은 어색하게 고개를 돌렸다.‘하, 지금 멀쩡한 사람 납치해 놓고 지들은 물고 빨고 난리 부르스를 치고 있고만...’남자와 여자는 그 뒤에도 한참을 서로에게 집중한 뒤에야 소은정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그만 훔쳐보지?”남자의 비아냥거리는 말투에 소은정은 기가 막힐 따름이었다.“날 죽이고 싶은 거였으면 굳이 그 개고생 하면서 여기까지 끌고 올 필요까진 없었을 테고... 어쨌든 뭔가 원하는 게 있다는 건데... 그럼 말해 봐. 조건이 뭔지. 내가 어떻게 하면 돌아갈 수 있는지.”눈앞의 남자가 정말 안진의 아버지 도혁이 맞는지는 여전히 100% 확신할 수 없었지만 이것 하나는 확실했다.그들의 진짜 타깃은 그녀가 아닌 박수혁이라는 걸 말이다.게다가 괜히 한국에서 먼저 협박 전화를 걸었다가 출국을 못하는 상황이라도 생길까 걱정이 돼서인지 그 사이 어떤 조건도 제시하지 않았다.‘짜증 나게 치밀한 놈들...’소은정의 질문에 남자는 대답 대신 휴대폰을 꺼내 누군가의 번호를 클릭했다.약 5초간의 정적 후 여전히 매력적이지만 어딘가 피곤함이 묻어있는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여보세요?”목소를 듣는 순간, 다리에 힘이 풀린 소은정이 비틀거렸다.‘박수혁? 역시 박수혁 그
차가운 눈으로 소은정을 노려본 남자가 드디어 박수혁 앞에 존재감을 드러냈다.“박 대표, 아주 기분 좋은 만남이 될 수도 있었는데 그쪽이 다 망쳤습니다. 어때요? 좀 후회되십니까?”‘그러게 고분고분 우리 안진이랑 약혼식 올렸으면 지금쯤 사이좋게 식사를 하고 있을 텐데 말이야...’“도혁... 원하는 게 뭐야. 말해.”이에 남자가 다시 소은정을 힐끗 바라보았다.“우리 진이한테서 들은 거랑 많이 다른데요? 진이 말로는 박 대표가 피도 눈물도 없는 매정한 사람이라고 하던데... 소은정 이 여자한테만큼은 끔찍한 걸 보니.”도혁의 도발에도 박수혁은 화를 꾹꾹 누를 수밖에 없었다.‘저 자식이 은정이를 인질로 잡고 있어. 참아... 참아야 해.’“그 여자 털끝 하나 건드리지 마. 조금이라도 다치면... 당신 딸 시체 조차 찾을 수 없을 정도로 갈기갈기 찢어버릴 테니까.”하지만 박수혁의 분노는 일말의 이성 따위로 누를 수 있는 게 아니었고 입 밖으로 나온 말은 여전히 날카롭기만 했다.박수혁의 말에 남자의 표정도 확 어두워졌다.“감히 그렇게 할 수 있겠어요?”그저 통화일 뿐인데도 두 사람의 기싸움은 그야말로 용호상박이었다.스피커폰으로 이 모든 걸 듣고 있는 소은정이 고개를 저었다.‘이 자식이... 지금 당장 무릎이라도 꿇어도 모자랄 판에 도발을 하고 있어?’하지만 남자는 자신이 유리한 상황이라는 걸 인지한 듯 곧 여유로운 미소를 지었다.“뭐, 기다리고 있겠습니다.”말을 마친 남자가 다시 휴대폰을 소은정에게 건넸다.“마지막으로 한 마디 해.”다시 휴대폰을 받은 소은정은 혹시 눈물이라도 터져나올까 이를 악물었다.“은정아, 걱정하지 마. 내가 곧 갈 테니까.”평소와 다른 따뜻한 목소리에 울지 않겠다는 소은정의 노력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하지만 지금 이 순간, 그녀의 머릿속에 떠오른 건 다른 사람이었다.“박수혁...”지금껏 참아온 눈물이 결국 주르륵 내려왔다.“응.”“동하 씨한테 전해.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나 괜찮다고.”소은정도 알고
이에 이한석이 미간을 찌푸렸다.“설마... 소은정 대표님이 지금 거기에...”박수혁이 무거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그쪽 가족들한테도 전해. 무사하니까 걱정하지 말라고. 내가 안전하게 데리고 오겠다고.”소은정이 무사하다는 소식에 이한석의 얼굴에도 보기 드물게 미소가 피어올랐다.“무사하시다니 정말 다행이네요.”하지만 잠깐 망설이던 이한석이 말을 이어갔다.“그런데... 정말 직접 가실 겁니까? 거긴 도혁의 아지트나 마찬가지입니다. 대표님께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고요.”서랍에서 다른 휴대폰을 꺼낸 박수혁이 무덤덤한 목소리로 말했다.“내 조수는 내가 알아서 찾을 거야. 그리고 국정원 측에 연락해. 안진 그 여자 데리고 오라고.”“하지만... 정말 이대로 보내면 저희 계획이 전부 수포가 되는 거 아닙니까? 그리고... 국정원 쪽에서 저희 말대로 할 거란 보장도 없습니다.”하지만 박수혁의 목소리는 단호했다.“아니. 무조건 협조할 거야. 진짜 도혁을 만나러 갈 거거든.”순간 표정이 굳은 이한석이 결국 고개를 끄덕이고 사무실을 나섰다.그날 오후, 부랴부랴 공향에 도착한 박수혁의 눈에 익숙하지만 낯선 그림자가 스쳤다.피곤한 기색이 역력한 전동하가 그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은정 씨한테서 연락 온 겁니까?”피곤함 때문인지 목소리까지 잠겨있었지만 눈만은 반짝이고 있었다.상대편에서 박수혁에게 먼저 접선했다는 소식을 듣는 순간 전동하는 하느님의 구원이 있다면 이런 기분일까 싶을 정도로 은혜로운 기분이었다.‘다행이야... 은정 씨가 무사해서.’하지만 전동하를 마주한 박수혁의 표정은 무겁기만 했다.목숨이 위급한 순간 남긴 마지막 말이 전동하를 향한 것이라는 걸 생각하니 가슴이 다시 답답해졌다.‘인정하고 싶지 않아... 너 따위가 뭔데 은정이를...’고집스레 고개를 돌린 박수혁이 어색하게 한 마디를 남겼다.“그쪽이랑 상관없는 일입니다.”‘나랑 은정이는 훨씬 더 복잡하게 얽힌 사이야. 우리는 아주 오래전부터 인연이었던 사이라고. 갑자기 끼어
처음에는 소은정이 실종됐다는 사실에만 집중하다 보니 우왕좌왕했지만 시간이 길어질수록 다시 이성을 되찾은 전동하 역시 이번 사건이 애초에 소은정을 타깃으로 삼은 게 아님을 눈치챘다.‘박수혁... 처음부터 박수혁이 타깃이었어.’그래서 전동하는 부하들에게 박수혁 쪽의 움직임을 주시하라고 지시했고 바로 오늘 아침 동남아 소재의 번호로 박수혁에게 전화가 들어왔다는 걸 알게 되었다.‘하, 어떻게든 살아보겠다고 배웠던 해킹 기술을 이렇게 써먹게 될 줄은... 사람 일은 한치앞도 모른다더니...’소은호도 박수혁에게서 받은 소식을 그에게 전하지 않았고 도혁이 사용한 전화번호도 위치추적이 불가하도록 특수처리를 거친 것이었지만 전동하도 아무 쓸모없는 허수아비는 아니었다. 그리고 박수혁의 약혼식날 무슨 일이 있었는지도 이미 알아냈다.뭐 박수혁에게 별 좋은 감정은 없었지만 이번 계획이 완벽했다는 것만은 확실했다.‘안진... 그런 사람이 가장 두려워하는 게 국정원일 테니까.’‘하지만 지금 국정원에 잡힌 사람은 진짜 도혁이 아닐 거야. 그리고 안진이 도혁의 딸이라는 것도 아마 루머일 가능성이 커. 내가 알아낸 바에 따르면 도혁의 나이는 이제 겨우 30대 중반 정도였으니까. 그럼 부녀가 아니라 남매관계였나...’전동하는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가장 빠른 항공편으로 동남아로 날아갔다....한편, 소은정은 어떻게든 가족들에게 그녀가 무사하다는 소식을 전했다는 생각에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조건을 제시해서 다행이야. 적어도 그전까진 살려둘 거란 얘기니까.’하지만 아무리 긍정 회로를 굴려봐도 상황은 결코 나아지지 않았다.도혁은 구석 방에 그녀를 처박아놓고 자리를 떴고 시시때때로 그 앞을 지나는 그의 부하들이 탐욕으로 혼탁해진 눈으로 그녀를 훑어보는 통에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도망칠 엄두 조차 내지 못하고 의자에 멍하니 앉아있던 그때, 문이 벌컥 열렸다.초원에 내던져진 초식동물처럼 화들짝 놀란 그녀 앞으로 방금 전 도혁과 진한 스킨십을 나누던 여자가 다가왔다. 의자에
소은정은 여자의 얼굴을 다시 살펴보기 시작했다.섹시한 몸매에 매력적인 어두운 피부톤, 그리고 사랑을 속삭이는 듯한 유혹적인 눈빛. 웬만한 남자라면 눈길 한 번에 무너질 것 같은 아름다운 여자였다.“그쪽이 그 남자 여자친구예요?”여자가 우아한 손놀림으로 찰랑이는 머릿결을 넘겼다.“맞기도 하고 아니기도 해. 나 같은 여자친구가 여러 명이거든. 이번 주는 내 차례라서 온 거야. 우리 자기 좋다는 여자가 한둘인 줄 알아?”‘하하, 이해해 보려 했던 내가 병신이지.’소은정이 고개를 돌렸다.이때 아에 다른 의자에 털썩 주저앉은 여자가 이번에는 소은정의 얼굴을 자세히 훑어보기 시작했다.“너도 예쁜데? 우리 자기가 너랑은 안 잤어?”웬만하면 질투를 할 법도 한데 여자의 눈은 오직 순수한 호기심으로 반짝이고 있었다.하지만 여자의 질문에 소은정은 기겁하며 반박했다.“그럴 리가요. 난 인질이에요. 내 이용가치를 다하기 전까진 내 몸에 손 하나 댈 수 없을걸요?”당당한 척 얘기했지만 소은정의 가슴이 다시 불안감으로 벌렁였다.불행인지 다행인지 도혁은 납치를 벌일 정도로 막 나가는 사람이었지만 또 어떻게 보면 나름 젠틀하기도 했다.‘정말 더러운 작자들을 만났다면 여기까지 오는 동안 무슨 짓이든 백번은 더 당했겠지.’“그래. 뭐, 아니면 말고. 그럼 옷 갈아입어.”소은정은 의자에 던져진 옷을 힐끗 바라보았다.눈이 아플 정도로 화려한 붉은색 드레스, 소은정이 미간을 찌푸렸다.“됐어요. 그냥 내 옷이 더 편해서요.”어깨까지 노출이 되어 있는 옷... 괜히 입었다가 저 밖에서 눈을 부라리는 짐승들의 인내심에 도전할 생각은 티끌만큼도 없었다.“뭐, 맘대로 해.”어깨를 으쓱이던 여자가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다시 고개를 돌렸다.“밖에 나가고 싶지 않아?”“정말... 그래도 돼요?”소은정이 벅차오르는 표정을 애써 감추며 물었다.“그럼. 방 밖에 나오지 말라는 말은 없었잖아. 그리고 어차피 이 집에서 나갈 수도 없어.”여자도, 도혁도 그녀가 이 집에서 탈
잠깐 망설이던 소은정도 그 뒤를 따랐다.‘어차피 지금 도망치는 건 불가능해. 아무리 빨리 달린다 해도 총알보다 더 빠를 순 없을 테니까.’여유롭게 다가온 도혁의 날카로운 시선이 소은정에게 꽂혔다.“방 밖으로 데리고 나온 거야?”이에 여자가 고개를 끄덕였다.“응. 그렇게 방에만 가둬두면 겁 먹고 죽어버릴지도 몰라. 나와서 바람이라도 쐬는 게 낫지 않겠어?”여자의 말에 도혁이 차갑게 웃었다.“착하네.”도혁이 손에 든 총을 빙글빙글 돌렸다.“그러다 도망이라도 치면 어쩌려고?”확 굳은 도혁의 표정에 소은정은 그녀의 생각을 들킨 것만 같아 가슴이 콩닥거렸다.하지만 여자 역시 가슴팍에서 총을 꺼내더니 싱긋 웃었다.“그렇게 까불면 이걸로 확 쏴버리면 되지.”방금 전까지 그나마 친절하게 느껴지던 여자의 잔인한 말에 소은정의 얼굴이 창백해졌다.살인을 당연하다는 듯 말하는 여자의 웃는 얼굴이 순간 도혁보다 더 공포스럽게 느껴졌다.‘헉, 가만히 있길 잘했어.’여자의 대답이 마음에 든 듯 도혁이 호탕하게 웃음을 터트렸다.이때, 갑자기 웃음을 멈춘 도혁이 소은정을 노려보았다.“그쪽도 나름 싸움 한다면서? 총 쏠 줄은 알아?”무의식적으로 고개를 저으려던 소은정의 머릿속이 순간 번뜩였다.‘만약 내 손에 무기가 들어온다면... 상황을 바꿀 수 있을지도 몰라.’이런 생각 끝에 소은정이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그러자 도혁이 여자가 들고 있던 총을 소은정에게 던져주곤 훈련장으로 보이는 곳을 가리켰다.“그럼 한번 쏴볼래?”겉보기보다 무거운 총의 무게에 소은정의 손이 살짝 떨려왔다. 하지만 잠깐의 긴장이 지나니 다시 마음이 차분해졌다.‘절호의 기회야. 떨지 마. 정신 똑바로 차려.’이때 도혁의 휴대폰이 울리고 발신인을 확인한 그가 미간을 살짝 찌푸리더니 자리를 피해 전화를 받았다.“여보세요? 물건은 도착했어?”이때 여자가 소은정 곁으로 다가왔다.“해봐. 다치지 말고...”여자는 의미심장한 윙크를 날려준 뒤 그대로 자리를 떠버렸다.깊
남자의 질문에 다른 이들도 웃음을 터트렸다.“지면 네 몸으로 갚는 건 어때?”“야, 그건 저쪽이 너무 손해잖아.”“인질 주제에 뭘 바라...”...‘참자... 소은정 참아... 와신상담이라는 말도 있잖아. 지금은 일단 사는 게 중요해.’한편 그들을 흘겨본 소은정이 과녁 앞에 섰다.그녀는 소은해, 성강희와 사격장에 갔던 경험을 다시 떠올렸다.‘실전 경험은 없지만 사격장에서는 나름 내 실력도 괜찮았어.’천천히 숨을 내쉰 소은정이 총을 들어 과녁을 겨누었다.그녀의 실력에 관심조차 없는 듯한 남자들을 힐끗 바라본 소은정이 순간 손목의 방향을 바꾸었다.‘상대는 세 명, 대문까지 남은 거리는 50m... 어차피 여긴 사격장이라 총소리가 나도 별 이상하다 생각 안 할 거야. 그리고 바로 전속력으로 달리면 20초... 할 수 있어... 누구 한 명이 다치면 그쪽에 시선이 쏠릴 테니까...’그렇게 모든 시물레이션을 돌린 소은정이 계획을 실행하려던 그때, 등 뒤에 누군가의 기운이 느껴졌다. 순간 당황한 소은정의 몸이 움찔거리고 창백하게 흰 손이 그녀의 손목을 꽉 잡았다.그리고 그 힘을 못 이기고 소은정의 손에 결국 힘이 풀리고 남자는 떨어지는 총을 다른 손으로 받아냈다.순간 얼굴이 창백하게 질린 소은정이 주변 분위기를 살폈다.방금 전 총구가 향한 곳이 과녁이 아닌 그들이었다는 걸 눈치챈 남자들의 표정도 급격이 어두워졌다.‘젠장...’소은정은 반항할 마음 따위 없다는 듯 온몸에 힘을 풀고 숨막힐 듯한 압박감이 드디어 천천히 사라졌다.남자들이 일그러진 얼굴로 다가오려던 그때, 도혁이 손을 들어 그들을 제지했다.한편, 이미 엎질러진 물, 소은정은 차가운 얼굴로 도혁을 돌아봤다.‘그래. 도망치려고 했어. 어쩔 건데?’웃고 있는 입과 달리 여전히 서늘한 눈으로 총을 바라보던 도혁이 입을 열었다.“이렇게 나오면 곤란하지.”“그냥 장난 좀 친 건데?”소은정이 배째라 식으로 나오자 도혁이 코웃음을 쳤다.“장난?”그리고 눈 깜박할 사이에 총구는
소은정은 가슴에 박힌 주사기를 멍하니 바라보았다.바늘에 찔린 따끔함이 사라지고 곧 몸 절반이 마비되는 듯한 묘한 기분에 휩싸였다.경악, 공포, 그리고 그 와중에 느껴지는 살았다는 다행스러움까지...‘진짜 총이 아니었어. 마취총이었던 거야.’자신의 계획이 얼마나 무모했던 것인지 인지한 소은정의 온몸에 소름이 쫙 퍼졌다.‘소은정... 미쳤어. 여긴 무기밀매상의 아지트야. 어쩌려고 그렇게 무모한 결정을 한 거야...’한편, 그런 그녀의 반응을 흥미롭다는 미소로 지켜보던 도혁의 얼굴이 싸늘하게 굳었다.“내가 너무 친절하게 대했나? 소은정, 그냥 다른 곳으로 옮기는 게 좋겠어.”말을 마친 도혁이 그녀의 곁을 스쳐지나고... 주사기가 꽂힌 가슴을 중심으로 마취약이 천천히 퍼지기 시작하고 다음 순간 눈앞이 새카매졌다.그리고 다시 눈을 떴을 때 소은정은 그녀의 방이 바뀌었음을 바로 인지했다.‘앞으로는 이 방을 나설 수 없겠지...’후회가 밀려들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를 악문 소은정이 주위를 둘러보았고 생각보다 열악한 환경에 곧 눈이 커다래졌다.창문 하나 없는 방을 비추는 것이라곤 누런 조명뿐이었다. 밀폐된 공간에 동남아 특유의 후덥지근한 날씨가 더해져 숨이 턱턱 막혀왔다.하지만 그녀를 놀라게 만든 건 그게 아니었다.다른 한쪽 구석에 쭈그리고 있는 십 여명의 여자들...그녀들을 발견한 순간 도저히 놀라움을 감출 수 없었다.초등학교 6학년처럼 보이는 여자아이부터 20대 중반으로 보이는 예쁘장한 소녀까지...소은정을 바라보는 그녀들의 눈동자에는 공포, 동정... 그리고 무기력함이 그대로 일렁이고 있었다.‘설마...’미간을 찌푸린 소은정이 손가락을 움찔거려 보았다. 여전히 온몸이 저릿저릿했지만 겨우 일어날 정도로는 회복한 상태였다.‘창문이 없으니 낮인지 밤인지도 모르겠네...’“여긴...”소은정이 조심스레 질문을 해보려던 그때 문이 벌컥 열렸다.바로 도혁에게 안겨있던 그 여자였다.구석에 모여있는 여자들을 벌레 보듯 쳐다본 여자가 희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