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유라는 민하준과 죽도록 싸웠던 나날들, 민하준의 끔찍한 사기극에 절망했던 시간들을 떠올렸다.그럼에도 그녀가 민하준의 곁을 떠나지 않았던 건, 아니 떠나지 못했던 건 황당하지만 사랑 때문이었다.그런데 지금은 아니었다.콕 집어 이유를 말할 순 없었지만 언제부터인가 한유라는 왠지 이 관계에 환멸을 느끼기 시작했고 민하준에 대한 그 어떤 소식도 듣고 싶지 않았다.그리고 생일 파티를 나가는 순간, 한유라는 확신했다.아, 이제 이 관계도 끝이구나. 내 사랑은 이미 모두 불태웠구나.사랑이라는 필터가 걷히고 이성을 되찾고 나니 모든 게 뚜렷해졌다.그녀가 저지른 멍청한 짓 때문에 한유라는 체면도 잃었고 온몸은 상처투성이가 되어버렸다.내가 왜 남자 때문에 내 모든 걸 버려야 해? 싫어. 이건 한유라답지 않아. 이 모든 게 민하준 그 남자 때문이라면 그 부분만 잘라내면 그만이야.대화를 나누던 소은정과 한유라가 자연스럽게 집안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안으로 들어가면 갈수록 이상한 냄새가 코를 찌르기 시작했다.하지만 불안한 예감과 달리 가까이 가보니 식탁에는 나름 풍성한 한끼가 차려져있었다.“뭐야? 너 요리는 언제 배운 거야?”소은정의 눈이 커다래졌다.요리는커녕 평생 라면 한 번 자기 손으로 끓여본 적 없는 애가...그녀의 질문에 한유라가 턱을 살짝 치켜세웠다.“뭐 타고난 재능이랄까? 주방만 들어오면 마음이 편해져.”피식 웃음을 터트린 소은정이 반짝이는 눈빛으로 식탁을 바라보던 그때 전동하가 간식과 와인을 챙겨든 채 들어왔다.“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어머, 전 대표님. 오늘 두 사람 뜨밤 보내야 하는데 제가 방해된 거 맞죠? 그래도 저 너무 미워하진 말아주세요.”한유라의 농담에 전동하도 웃음을 터트렸다.“그럴 리가요. 유라 씨는 은정 씨 절친이잖아요. 제 험담이나 하지 말아주세요. 저 진짜 차일 수도 있으니까.”“와... 은정아, 난 진짜 모르겠다. 저렇게 착한 사람이 이 세상에 있긴 해? 뭐 더 이상한 결함 같은 거 있는 건 아니겠지?”
비록 요리 실력은 바닥이 드러났지만 비싼 레스토랑에 특별히 배달 서비스까지 부탁하느라 나름 거금을 치른 한유라는 전혀 부끄럽지 않다는 표정이었고 소은정도, 전동하도 지옥에서 온 요리보다 검증 받은 맛있는 요리를 먹는 게 백 배 더 낫다고 생각했으므로 더 이상 따지지 않았다.화기애애한 분위기속에서 식사가 끝나고 와인을 몇 잔 들이킨 한유라는 이미 얼굴에 홍조가 피어오른 모습이었다.식탁 정리를 마친 전동하가 레스토랑 측에 전화를 걸고 아까 함께 챙겨온 간식들을 테이블 위에 올려두었다.밥을 이미 잔뜩 먹었음에도 뭐가 허한지 바로 과자를 우걱우걱 먹는 한유라를 안쓰럽다는 듯 바라보던 소은정이 조용히 전동하에게 눈치를 주었고 바로 그 뜻을 캐치한 전동하는 아쉽지만 발걸음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오늘은 나 혼자 자야겠구만...술기운 때문인지 눈물을 참는 건지 한유라의 눈동자가 빨갛게 부어오르고 소은정은 말없이 따뜻한 물수건을 건넸다.“그 사람... 어제는 전화 한 통도 안 하더니 오늘은 백 통 넘게 하는 거 있지? 진짜 웃기지 않아? 뭐, 내가 오늘쯤엔 또 속없이 실실거리며 다시 다가갈 줄 알았나? 미친 자식.”한유라의 입가에 자조적인 미소가 실렸다.그런 그녀에게 따뜻한 꿀물을 건넨 소은정이 말했다.“이미 마음 정한 거면 더 이상 망설이지 마. 너도 할 만큼 했잖아. 그럼 아쉬움도 미련도 없는 거 아니야?”“알아. 나도 아는데... 그래도 왠지 억울해. 내가 그 자식한테 들인 시간이랑 정성만 생각하면... 진짜 내 인생을 갈아넣은 남자였거든? 그런데... 바뀐 게 하나도 없어. 왜 그러는 걸까? 내가 너무 좋아하는 티가 많이 났던 걸까? 그래서 마음대로 해도 된다고 생각했나? 그날 그 사람이 내 뒤를 쫓아서 함께 나왔더라면... 아니. 그날 연락이라도 해서 사과를 했더라면 마음은 식었어도 이렇게 허무하진 않았을 것 같아. 그 사람의 침묵이 날 천하에 웃긴 여자로 만들었어.”너무나 지쳐보이는 한유라의 모습에 소은정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사랑은 가끔씩
슬픔과 절박함, 초조함... 여러 표정이 담긴 민하준의 표정에도 소은정은 싱긋 미소만 지었다.“민 대표님, 무슨 소리를 하시는지 모르겠네요. 유라랑 무슨 일이 있으셨는지는 모르겠지만 우리 집엔 없어요.”말을 마친 그녀는 돌아서서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려 했지만 이대로 물러설 민하준이 아니었다.분노 때문일까? 그 뒤를 바짝 쫓은 민하준의 이마 힘줄이 불끈 치솟았다.“나 유라랑 만나야 한다고요!”“그럼 전화하세요. 왜 저한테 이러시죠?”“내 전화는 안 받으니까요.”“전화를 안 받는다는 건 두 가지 가능성이 있어요. 하나는 당신이 직접 와서 사과하길 바란다는 것. 다른 한 가지 가능성은 이만 포기하고 꺼지라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유라 어디 있는지 모르시죠? 알려주지도 않았고요. 그럼 답은 하나네요. 두 번째 가능성.”마지막 희망까지 잃어버린 듯 절망스러운 민하준의 모습이 소은정은 웃기기만 했다.이때 역시 출근 중이던 우연준이 엘리베이터 앞에 펼쳐진 대치 상황을 발견하고 바로 경호원들을 호출했다.그리고 소은정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대표님, 좋은 아침입니다.”“네, 우 비서님, 좋은 아침이에요.”소은정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화사하게 웃어 보였다.경호원들에게 끌려가는 순간에도 민하준은 그녀를 향해 절박한 시선을 보내고 있었지만 그녀는 냉정하게 고개를 돌렸다.안타깝네... 유라는 모든 걸 버리고 당신과 함께 하고 싶어 했는데... 이런 일로 마지막 믿음이 깨져버렸어...잠시 후, 소은정이 아침 조회를 마치고 회의실에서 나온 그때, 우연준이 그녀를 맞이했다.“대표님, 민 대표님이 계속 버티고 계시네요. 경호원들이 아무리 막아도 어떻게든 뚫고 들어오고 있다는데...”우연준이 말끝을 흐렸다.“잠시만요.”고개를 끄덕인 소은정이 한유라에게 문자를 보냈다.“민하준이 우리 회사로 찾아왔어.”“내가 어디 있는지 말하지 마.”“그래.”유라... 진짜 실망이 컸나 보네. 마지막 이별의 말도 하고 싶지 않을만큼...다른 사람이 볼 땐 그저
소은정의 말에 민하준의 굳은 표정이 더 무시무시하게 변했다.분노를 억누르는 건지 민하준의 주먹에 힘이 더 들어갔다.“유라가 말해 준 겁니까?”“아니요. 우리끼린 그런 얘기 안 해요. 그렇다고 내가 모르라는 법 있나요? 내가 그냥 허수아비 대표처럼 보여요?”한유라에게서 들은 게 아니라는 소은정의 말에 민하준의 표정이 조금 풀어졌다.“난... 난 그냥 유라한테 제대로 해명하고 싶은 것뿐입니다.”“이제 와서요? 그날 유라 뒤를 따라서 나간 건 나랑 하늘이었어요. 그쪽은 그 흔한 전화 한 통 없었죠. 그땐 유라한테 관심도 없어 보이더니. 이제 와서 마음이 급해졌나 보죠?”소은정의 여유로운 미소에 민하준의 얼굴에 난처한 표정이 스쳤다....그 뒤로는 숨 막힐 듯한 적막이 이어졌다.나랑 이런 얘기하는 게 불편하겠지. 나도 싫어, 이 자식아.손가락으로 테이블을 톡톡 두드리던 소은정이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돌아가요. 유라가 당신을 만나고 싶다면 언제든지 만날 수 있을 거예요. 그전엔 나한테 무슨 짓을 해도 아무 소용없을 테니까 그건 알아두고요.”고개를 든 민하준의 새카만 눈동자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무겁기만 했다.유라가 마음을 정하고 답을 줄 때까지 기다려... 두 사람 사이에 끼고 싶은 생각 없으니까.민하준, 그렇게 차가운 눈빛으로 노려봐도 난 하나도 안 무서워. 위태위태한 민연그룹 상황에 네가 나한테 무슨 짓을 할 수 있겠어. 감히...네가 정말 유라를 위해 모든 걸 버릴 수 있을 만큼 미친 듯이 유라를 사랑하면 몰라. 그런데 넌 아니잖아.소은정이 이런 생각을 하던 그때, 민하준이 말없이 일어서 사무실을 나섰다.그것 봐. 넌 유라 그렇게 안 사랑한다니까.민하준이 사라진 사무실 문을 한참 동안 바라보던 소은정은 다시 일에 집중했다.점심쯤, 우연준이 다가왔다.“오후에는 중요한 스케줄도 없으니 퇴근하셔도 될 것 같습니다. 식사는 레스토랑에서 하시겠습니까? 지금 예약할까요?”“아, 아니요. 구내식당에서 먹으면 될 것 같네요.”말을 마
소은정의 품에 안긴 마이크가 고개를 끄덕였다.“아파요... 너무 아파요.”소은정이 마이크의 말랑말랑한 볼을 어루만졌다.“괜찮아. 누나랑 집에 가자. 몸에 좋은 거 많이 먹으면 곧 나을 거야. 응?”고개를 끄덕인 마이크는 코를 들이킨 뒤 다시 고분고분 진료 의자에 앉았다.그 뒤를 따라온 선생님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마이크... 저런 상태로는 학교 생활도 많이 불편할 텐데 집에서 어른들이 보살펴 주는 게 어떨까요?”마침 소은정도 그러려던 참이었던지라 고개를 끄덕였다.“네.”선생님이 뭔가 더 말하려던 그때, 마이크가 고개를 돌렸다.“아빠는요?”“아빠 해외 출장가셨어. 지금 비행기에 계실걸?”말을 마친 소은정은 마이크가 괜히 오해할까 싶어 다급하게 해명을 이어갔다.“아, 걱정하지 마. 내가 아빠한테 잘 얘기해서 우리 마이크 혼날 일 없게 할게. 그리고 아빠도 일 때문에 출장 가시느라 휴대폰 꺼두셔서 연락 못 받은 거야. 마이크한테 관심 없는 거 아니니까 오해하지 말고.”하지만 소은정의 해명에도 마이크의 표정은 여전히 어둡다.“내 실수로 넘어진 거 아니에요. 누가 뒤에서 날 밀었다고요. 선생님도 보셨잖아요.”마이크의 한 마디에 진료실 전체가 적막에 잠겼다.예민한 얘기가 오가자 빠르게 깁스를 마친 의사가 부랴부랴 자리를 떴다.“마이크 말이 사실인가요?”소은정이 차가운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아, 아닙니다. 축구 같은 운동은 부딪히고 다치기 마련이잖아요. 그리고 솔직히 말씀드리면 저도 마이크가 어떻게 넘어졌는지는 모르겠어요. 제가 발견했을 때 마이크는 이미 넘어졌었고 바로 병원으로 데리고 온 거고요...”당황한 표정이긴 했지만 선생님의 변명에는 딱히 빈틈이 없었다.아무리 선생님이라도 수십 명의 아이들을 24시간 들여다 볼 수는 없는 법.소은정은 그제야 풀어진 표정으로 마이크에게 선생님이 일부러 그런 게 아니라고 해명하려 했지만 마이크가 맑은 눈동자로 선생님을 올려다 보았다.“보셨잖아요. 주위에 있던 친구들도 봤거든요. 지훈이
그제야 돌아선 소은정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선생님, 전 교장선생님께 단순히 이 사실을 고자질하려는 게 아니에요. 전 교장선생님께 조사를 부탁하려는 겁니다. 지훈 학생이 마이크를 일부러 민 게 맞는지. 마이크를 협박한 적이 있는지. 이게 사실이라면 엄연히 학폭 아니겠어요? 만약 선생님께서 결백하시다면 조사에 두려워하실 필요가 없을 테고 만약 고의적으로 이런 짓을 저지르신 거라면 당신은 선생님에 어울리는 사람이 아닙니다. 교육자는 아무나 하는 게 아니니까요.”소은정의 조리있는 설명에 선생님의 안색이 더 창백해졌다.“제가 왜 당신의 직장 하나 지켜내기 위해 우리 마이크를 억울하게 만들어야죠?”선생님의 눈동자에 당황스러움이 가득 들어찼다.“소 대표님...”이런... 그냥 대충 넘어갈 수도 있었던 일이었는데 마이크가 다 말해 버리는 바람에...이때 소은정의 손을 꼭 잡은 마이크가 말했다.“지훈이 형이 직접 와서 사과하고 앞으로 나한테 이런 짓 안 하겠다고 하면 용서할 수 있어요.”“왜 용서를 하는데? 이 정도는 누나가 알아서 처리할 수 있어.”소은정이 눈썹을 치켜세웠다.“선생님은 좋은 선생님이에요. 저 때문에 누군가 직장을 잃는 건 싫어요. 하지만 선생님이 나쁜 학생을 감싸는 건 더 싫어요.”말을 마친 마이크가 다시 고개를 숙였다.“들으셨죠? 제가 교장선생님을 찾아가든, 그 아이 그리고 그 부모가 함께 절 찾아오든 둘 중 하나입니다. 선택하세요.”난처한 표정을 짓던 선생님이 결국 고개를 끄덕이더니 다른 쪽으로 다가가 통화를 시작했다.대충 옆에 앉은 소은정이 마이크의 팔을 살폈다.“아직도 아파?”마이크가 고개를 끄덕였다.“아프긴 한데 아빠가 말했어요. 사나이가 아프다고 우는 건 되게 창피한 일이라고. 그래서 절대 안 울 거예요!”주먹까지 꽉 쥐며 화이팅 제스처를 해 보이는 모습에 소은정이 웃음을 터트렸지만 곧 진지한 얼굴로 말을 이어갔다.“누나가 자주 못 보러가서 미안해. 내가 좀 더 일찍 널 만나러 갔다면 네가 괴롭힘을 받고
약 20여 분을 기다렸을까? 온몸에 휘황찬란한 보석을 두른 통통한 몸매의 중년 여성이 튼실하게 생긴 남자아이와 함께 모습을 드러냈다.“야, 넌 지훈이 이모에 한 학교 선생님이라는 애가 이 정도 일도 해결 못 해? 내가 애들 싸움 때문에 직접 여기까지 와야겠어? 다쳤으면 치료비 배상하면 될 거 아니야. 뭐 돈 한 푼이라도 더 떼어먹으려는 심보 내가 모를 줄 알아?”강지훈 학생의 어머니로 되어 보이는 중년 여자는 다짜고짜 까랑까랑한 목소리로 선생님을 혼내기 시작했다.그녀의 목젖이 움직일 때마다 목에 걸린 금목걸이가 언뜻언뜻 빛을 반사했고 통통한 손목에는 팔찌만 4-5개가 걸려있었다.부자인 것 같긴 한데... 졸부인 것 같네. 파티 같은 데서 본 적도 없고.한편, 선생님은 끊임없이 언니에게 눈치를 주었다.언니, 제발 좀 닥쳐. 상황 파악 좀 하라고.하지만 선생을 흘겨보던 여자는 아이의 손목을 끌어당겨 소은정의 앞으로 다가왔다.그녀의 얼굴을 확인한 여자가 흠칫하더니 바로 미간을 찌푸렸다.“아니. 얼굴도 예쁜 아가씨가 꼭 이렇게 쪼잔하게 굴어야겠어요? 아님 돈이 부족한가?”여자의 말에 선생님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죄송합니다. 저희 언니가 평소 티비를 잘 안 봐서요...”하지만 선생님이 말을 마치기도 전에 중년 여인이 먼저 입을 열었다.“티비? 오, 그러고 보니 좀 낯이 익은 것 같기도? 뭐 배우인가? 하, 당신들 같은 삼류 연예인 내가 많이 봤어. 돈 때문에 그런 거 맞지? 이 아이는... 딱 봐도 어렸을 때 사고쳐서 몰래 낳은 아이네. 이봐요. 그쪽도 나름 공인이니 이 사실이 밝혀지는 건 싫겠죠? 그러니까 대충 먹고 떨어져요. 삼류 연예인 생활도 못하게 되기 전에.”혼자 북치고 장구치는 모습에 소은정은 그저 담담한 미소를 지을 뿐이고 선생님의 얼굴은 점점 핏기를 잃어갔다.“언니, 지금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야. 저분이 누군지 정말 몰라?”“누구면 뭐! 넌 왜 이렇게 잔뜩 쫄아있어? 너 선생이야! 저 여자가 이번 일로 꼬투리 잡으면 저
여자가 코웃음을 쳤다.“그래요. 어쨌든 여기까지 왔으니 얘기해 봅시다. 애들은 싸우면서 크는 거라고 하죠? 치료비가 얼마가 나오든 제가 부담하겠습니다.”“지훈이한테 사과하라고 해.”하지만 선생님이 한 마디 덧붙이자 중년 여자는 바로 발끈했다.“뭐? 사과? 애가 뭘 안다고 사과를 시켜? 지훈이가 뭘 잘못했는데!”“지훈이 잘못 맞아. 시험칠 때 답 보여달라고 했다잖아. 그런데 마이크가 거절했고 그걸로 앙심을 품고 넘어트렸어. 이게 아무것도 모르는 애가 할 짓이야?”선생님은 아예 사건의 모든 진상을 밝혔지만 여자는 별 개의치 않는다는 듯 헛웃음을 지었다.“우리 아들이 저 꼬맹이한테 답을 보여달라고 했다고? 딱 봐도 또래보다 어려 보이는데 우리 지훈이랑 어떻게 한 학년이지? 뭐 백이라도 쓴 거야?”자리에서 일어선 중년 여자가 팔짱을 낀 채 또각또각 걸어갔다.“사과는 꿈 깨요. 애초에 우리 아들이 쟤 답을 왜 베껴요? 그래도... 어린 애가 나이 많은 애들 사이에서 치이는 게 안쓰러우니까 치료비 두 배로 배상할게요.”여자의 말에 분위기는 다시 차갑게 가라앉았다.아직도 상황 파악을 못하고 돈 자랑이나 해대는 언니의 모습을 바라보는 선생님은 속이 타들어갈 따름이었다.치료비의 2배? 지금 흥정이라도 하려는 거야. 게다가 국제학교 다니는 애들은 다들 나름 괜찮은 집안 자제들일 텐데 왜 이렇게 돈 자랑을 하는 거지?위험한 기운을 내뿜으며 눈을 가늘게 뜨던 소은정이 뭔가 말하려던 그때 간호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마이크 환자 약 받아가세요.”이에 흠칫하던 소은정이 마이크의 머리를 쓰다듬었다.“마이크, 스스로 약 받아올 수 있지?”“네...”왜 어린이인데다 환자인 그더러 직접 약을 받아오라는 건지 이해할 순 없었지만 예쁜 누나의 말이라면 뭐든 들어야 한다는 생각에 고개를 끄덕였다.쪼그만 뒷모습이 사라질 때에야 고개를 돌린 소은정이 차가운 눈동자로 여자를 바라보았다.“저도 일을 크게 만들고 싶진 않았습니다. 선생님께서 한 번만 기회를 달라고 하시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