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층.한유라는 테이블 가득 펼쳐진 간식을 바라보며 혀를 끌끌 찼다.“소은정 대표님이 대단하긴 해? 허, 이 간식 좀 봐. 이 정도며 거의 왕족 아니야?”케이크를 한입 베어문 소은정이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내가 좋아하는 가게에서 사왔네. 여기까지 온 보람이 있어.’“왕족 좋아하네. 그건 그렇고 심강열 대표랑 무슨 얘기한 거야?”소은정의 날카로운 질문에 한유라의 눈이 휘둥그레졌다.‘귀신 같은 계집애... 그건 또 어떻게 안 거래?’“너... 그걸 어떻게 알았어?”“그걸 뭘 봐야 아니?”소은정이 눈을 흘겼다.“이렇게까지 참는 모습은 처음 보는 것 같은데... 우리 유라 성격 많이 죽었다?”이에 한유라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나라고 성질 죽이고 사는 게 쉽겠어? 뭐 별로 대단한 일도 아니고... 일일이 따지는 것도 유치할 것 같기도 하고...”한유라의 변명에 소은정이 이를 악물었다.“야, 정신차려. 도 비서라고 했나? 그 여자가 한 짓이잖아. 그렇게 티나는 여우짓을 왜 두고 보고만 있어. 큰일로 번지기 전에 네가 알아서 끊어내. 그냥 오냐오냐 한다고 해결될 일 아니야.”소은정의 말에 한유라의 큰 눈이 더 동그래졌다.“뭐야? 너 깡이랑 잤어? 어떻게 둘이 똑같은 말을 하냐.”“하, 그래도 양심은 있네. 이 일 대충 넘어가려고 했으면 내가 진짜 화냈을 거야. 정신차려. 너희 두 사람 부부야. 너 평생 속앓이 하면서 살 거야?”커피 한잔을 탄 한유라가 그녀 옆에 앉았다.“내가 그 정도로 바보는 아니다. 지금 와신상담 중이거든. 이제 결혼식 올리면 내가 심강열 와이프라는 거 이 세상 사람들이 다 알게 될 거잖아? 그전까진 그냥 신입 비서로서 살고 싶어. 내 진짜 정체를 알면 다들 얼마나 후회될까? 다들 나한테 아부하려고 들겠지?”“하이고, 그런 사람들 아부 받아서 참 좋으시겠어.”소은정의 비아냥거림에도 한유라는 깔깔 웃을 뿐이었다.“솔직히... 강열 씨 회사에서 일하면서 많이 배웠어. 엄마 회사에서 일할 때랑 비교도 안될 정도로
한유라가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그러게...”“네가 모를만도 해. 지금까지 네가 이런 일을 겪을 필요 자체가 없었으니까. 좋은 기업이니 당연하게 훌륭한 직원을 뽑았을 테고 당연히 일도 열심히 잘 하겠지? 그러니까 굳이 네가 손 볼 필요가 없었던 거야. 너 스스로 모든 걸 다 할 수 있으면 그냥 1인 기업하고 말지 수백, 수천 명의 직원을 고용할 필요가 있을까?”‘하긴.’소은정의 위로에 한유라가 활짝 웃었다.그리고 잠시 고민하던 소은정이 다시 입을 열었다.“그리고 굳이 그 사람들이랑 친하게 지낼 필요도 없어. 사적으로 사이가 너무 좋으면 일할 때 오히려 힘들 거든. 혼내야 할 때도 평소 친분 때문에 입이 안 떨어질 때도 있으니까. 그것도 은근 스트레스다, 너?”세게 고개를 끄덕인 한유라가 두 눈을 반짝였다.“은정아, 나 그냥 너네 회사에서 일하면 안 돼? 깡한테서 배우는 것보다 훨씬 더 나을 것 같은데?”이에 소은정이 웃음을 터트렸다.“난 상관없어. 근데 심 대표가 널 놓아줄까?”“아니야. 깡이 그러라고 해도 엄마가 절대 안 된다고 펄쩍 뛰실걸? 이번 일도 그래. 일을 제대로 배워오라는 건 어디까지나 명분이고 나랑 깡이 친해지길 바라는 게 진짜 목적일 거야.”한유라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그럼 그냥 심해그룹에 있어. 심강열 대표... 능력 하나는 뛰어난 사람이니까 분명 배울 수 있는 게 있을 거야. 다른 사람들이 뭐라고 하든 신경 쓰지 마. 회사 대표 사모님이 된 이상 네가 신경 써야 할 인간관계는 클라이언트뿐이야.”소은정이 몇 년간 쌓은 노하우, 다른 사람이었다면 절대 알려주지 않았겠지만 처음 사회에 나온 천둥벌거숭이 같은 한유라를 그저 두고볼 수만은 없었다.말을 마친 소은정이 케이크를 한입 더 베어물었다.입속에 은은한 달콤함이 확 퍼지며 이 시간이 아름답게 느껴졌다.‘흐음, 좋다...’한편 고개를 돌리니 방금 전 그녀가 한 말을 진지한 표정으로 노트에 옮겨적는 한유라의 모습이 보인다.‘참나, 평소엔 그렇게 똘똘한 애가 왜
탄탄한 가슴이 부딪힌 이마를 문지르던 한유라는 심강열을 노려보다 마지못해 대답했다.“괜... 괜찮습니다, 대표님.”심강열은 한유라의 뒤에 서 있는 소은정을 향해 싱긋 웃었다.“같이 내려가시죠?”“그럼 부탁드릴게요.”‘하이고, 그 새를 못 참고 또 올라왔구만.’이런 생각과 함께 소은정이 피식 웃었다.한편, 뭔가 큰일이 벌어질 거라 확신하며 손에 땀까지 쥐고 기다리던 직원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예고편은 초특급 블럭버스터였는데 본편은 로맨스 코미디인 듯, 왠지 김이 팍 새버렸다.세 사람이 자리를 뜨고 직원들은 바로 수군대기 시작했다.“우리 대표님, 한 비서님 좋아하는 게 분명해. 다른 건 몰라도 저 눈빛은 찐이라고.”“내가 생각해도 그런 것 같아.”다른 직원들도 앞다투어 고개를 끄덕였다.수다를 떨면서도 직원들은 다들 의미심장한 표정이었다.심강열의 비서였던 도지아가 회사를 떠났고 인사팀에서는 그 이유가 무엇인지도 말해주지 않고 있다.게다가 도지아 본인도 회사 동료들의 연락처를 전부 차단해 연락조차 할 수 없는 상황.다들 그저 수석 비서 자리를 노리던 도지아가 갑작스러운 한유라의 등장으로 위기감을 느끼고 결국 먼저 퇴사를 선택한 것이 아닐까 짐작만 할 뿐이었다.뭐, 평소 과묵한 성격이었던 도지아가 그런 야망을 숨기고 있는 여자였다는 게 꽤 놀랍긴 했지만 말이다.한편, 소은정 일행이 회사 로비로 내려오고 한유라는 고개를 돌려 심강열을 향해 손을 저었다.“얼른 올라가서 일해. 집에서 봐.”그녀의 말에 심강열이 피식 웃었다.“나도 오늘 정시 퇴근할 거야.”이에 한유라의 눈이 동그래졌다.“허, 맨날 일밖에 모르던 사람이 무슨 바람이 불었대?”‘정말 내 마음 몰라서 그래?’정말 눈치가 없는 건지 아니면 그저 심강열의 신경을 자극하는 건지 복장이 터질 지경이었다.“응, 오늘은 좀 쉬고 싶어서.”“하긴. 워낙 일만 했으니까 피곤할만도 하지. 그럼 일찍 집에 가서 쉬어.”“굳이 집에 가야 해? 난 다른 데 가면 안 돼?”심강열의 뾰
한편, 차에 탄 소은정은 웃음을 참으며 방금 전 상황을 그대로 전동하에게 전했다.“두 사람 혼인신고부터 해서 다행이네요.”“왜요?”“그냥 약혼만 했으면 파혼을 해도 백 번은 더 했을 것 같은데요...”“최 팀장님, 조금만 더 빨리 가주실래요?”최성문을 독촉한 한유라는 뭐가 그렇게 웃긴지 휴대폰을 들여다보며 씰룩대는 소은정을 흘겨보았다.“어차피 매일 보는 사이인데 뭐가 그렇게 재밌어?”“동하 씨랑 얘기하는 것 자체가 재밌는데?”소은정의 천연덕스러운 대답에 한유라는 구토하는 제스처를 취했다.“아, 아침에 내가 했던 말... 신경 쓰지 마, 알겠지?”이에 소은정이 얼굴에 피어오른 미소를 지우고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응, 걱정하지 마. 어차피 걘 나 못 찾아.”지금 그녀의 스케줄은 완전히 대외비인데다 항상 경호원이 그녀의 주위를 지키고 있으니 자신만만한 소은정이었다.잠시 후, 두 사람을 태운 차량이 사운드 클럽 앞에 멈춰 섰다.“왜 여기로 왔어?”소은정이 미간을 찌푸렸다.하지만 한유라는 대답대신 소은정의 팔을 잡아당겼다.“넌 무슨 질문이 그렇게 많아. 내가 깜짝 선물 준비했지!”두 사람이 뛰다시피 클럽으로 들어가고 주차를 마친 최성문이 그 뒤를 바싹 따랐다.어두워지는 밤하늘과 달리 클럽의 분위기는 점점 뜨거워지고 사람들의 목소리, 빵빵한 음악소리가 공간을 가득 채웠다.그곳에서 가장 은밀하지만 전망이 가장 좋은 룸, 이곳이 바로 오늘 그들의 모임 장소이다.테이블에는 술병이 쫙 깔려있고 성강희는 웬 상자 하나를 보물이라도 되는 듯 꼭 끌어안은 채 스테이지를 내려다 보고 있었다.룸에 입장한 한유라가 바로 성강희를 덮치고 그는 기겁하며 상자를 위로 높이 들었다.“어허! 이거 우리 집 가보야. 손대지 마.”“하, 웃기시네. 그딴 돌덩이 난 관심도 없어. 그냥 네 멍청함을 좀 비웃고 싶은 거랄까?”“야! 그냥 돌덩이 아니거든! 이건 고려 때 일본으로 흘러갔다가 다시 영국까지 갔던 국보라고! 내가 여기에 부은 돈이 얼만데. 우리
‘소은정 저 계집애, 지금 저딴 걸 위로라고.’성강희가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을 짓고 소은정은 그의 어깨를 토닥이며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골동품이라면 우리 아빠가 또 전문가시지. 잘 아는 감정가 소개해 줄 테니까 내일 가보지 그래?”“안 돼! 내일은 안 돼! 지금 당장 감정받아야겠어! 난 우리 애기가 가품이라는 누명 쓰는 꼴 절대 못 봐!”이런 허접한 사기에 당했을 리가 없다고 스스로를 다독여 보아도 왠지 가시처럼 콕 박힌 가품이라는 단어에 성강희의 마음은 점점 더 초조해져만 갔다.“그냥 가게 둬. 안 그럼 쟤 오늘 잠도 제대로 못 잘 거니까.”김하늘이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 성강희는 전 재산을 잃은 사람처럼 공허한 표정과 함께 비틀비틀 룸을 나섰다.“쯧쯧, 멍청한 자식. 뭐야, 아직 파티 시작도 안 했는데 벌써 한 명 빠지면 어떡해!”“해외에 있는 친구들한테서 들었는데... 요즘 해외에서 뜨고 있는 사기수법이래. 부자들은 워낙 골동품을 좋아하기도 하고... 국보급 물건이 해외에 흘러갔다는 말을 들으면 없던 애국심까지 솟는다나 뭐라나... 그 심리를 이용해서 사기를 친다던데... 아무래도 강희가 당한 것 같아.”김하늘의 진지한 말에 방금 전까지 실실거리던 한유라, 소은정의 표정도 살짝 굳었다.‘헐, 정말 사기당한 거였어? 우리 강희 불쌍해서 어떡해...’분위기가 왠지 숙연해진 그때, 룸 밖에서 뜨거운 환호성이 울려 퍼지고 그 소리에 이끌린 세 사람이 역시 동시에 환호성을 질렀다.모두를 흥분의 도가니에 빠트린 정체는 바로 크레이지 밴드!미리 예고 없이 게릴라 콘서트를 하는 게 취미인 크레이지 밴드를 이 자리에서 보게 되다니.소은정 일행은 물론이고 평범한 손님들에겐 거의 로또 1등에 버금가는 이벤트였으므로 흥분하는 게 당연했다.소은정 일행은 무대 아래의 수많은 팬들처럼 소리를 지르고 손을 흔들며 자신의 팬심을 과감없이 표현했다.여전한 비주얼과 실력, 무대매너, 모든 사람들의 영혼속에 깃든 록 스피릿을 끌어내는 무대에 모두가 열광
크레이지 밴드는 그저 에피타이저일 뿐, 진짜 본편은 이제 겨우 시작인데 소은정 혼자 슬그머니 빠져나가려 하니 꽤 심통이 난 한유라가 입을 삐죽 내밀었다.소지품을 핸드백에 넣던 소은정의 손이 멈칫했다.“아까 심 대표한테는 여자들이랑 놀지 말라면서. 넌 남자들이랑 술이나 마시겠다고? 아주 잘하는 짓이다.”이에 한유라가 어색하게 그녀의 시선을 피했다.“큼, 그냥 술 한잔 하면서 노는 거야. 누가 뭐 다른 거 한대? 너도 알겠지만 이건 날이면 날마다 오는 기회가 아니야. 사장님이 특별히 우릴 위해 준비해 주신 건데 성의는 받아야지.”한유라의 궤변에 소은정이 눈을 흘겼다.‘아직 자기가 유부녀라는 자각 자체가 없구만. 으이구, 됐다. 사람이 어디 한순간에 변하나... 게다가 결혼생활에 생각보다 꽤 만족하고 있는 것 같으니까... 심 대표 실망시킬 짓은 안 하겠지.’한편 한유라는 김하늘의 목을 끌어안으며 설득을 이어갔다.“그리고 너랑 하늘이 있잖아. 내가 막 나가도 너희 두 사람이 브레이크 걸어줄 거잖아. 맞지?”“아, 됐고. 나 진짜 들어가봐야 해. 동하 씨 혼자 집에 있는 게 맘에 걸리네.”소은정이 어깨를 으쓱하고 한유라는 기가 막히다는 표정을 내비쳤다.“야, 소은정. 너 진짜 많이 변했다. 지금 술자리를 마다하고 남친 병수발이나 들겠다고?”“동하 씨는 나 때문에 다친 거잖아. 그런 사람 버려두고 나 혼자 놀아제끼면 내 맘이 편하겠니?”이 말을 마지막으로 소은정이 단호하게 룸을 나서고 한유라, 김하늘은 할 말을 잃은 듯 멍하니 문쪽을 바라보았다.먼저 침묵을 깬 건 김하늘이었다.“야, 간 사람은 그냥 쿨하게 보내주고 남자들 들어오라고 해. 나도 궁금하단 말이야.”이에 한유라가 응큼한 미소와 함께 김하늘의 볼을 쿡 찔렀다.“김하늘, 너도 변했어. 그렇게 얌전하던 애가. 은해 오빠 하나로 부족하다 이거냐?”“누가 뭐 한대? 나도 그냥 보기만 한다고 보기만.”김하늘이 입을 삐죽 내밀었다.“오케이, 바로 올라오라고 할게. 우리끼리 놀지 뭐.”
당장 솔로가수로 데뷔해도 될 것 같은 뛰어난 노래 실력에 한유라는 마치 자기 소속 가수를 지켜보는 사장처럼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그리고 이에 질세라 다른 남자도 손을 번쩍 들었다.“한 대표님, 전 폴댄스 보여드리겠습니다!”“폴댄스?”한유라의 눈이 동그래졌다.남자가 폴댄스라... 한유라가 과거 회상에 빠졌다.남자가 폴댄스를 추는 건 결코 흔한 광경은 아니었지만 한유라는 이번에 처음 보는 게 아니었다. 그녀에게 신대륙을 보여주었던 장소는 바로 김현숙과 함께 나갔던 접대장소였다.반반하게 생긴 남자들이 몸매가 전부 망가진 부잣집 사모님들의 눈에 어떻게든 들기 위해 있는 장기, 없는 장기 다 보여주던 그날의 모습이 여전히 눈앞에 선했다.그리고 그런 남자들을 사냥감 바라보 듯 탐욕스레 바라보는 사모님의 눈빛까지...그런 광경에 한유라가 눈살을 찌푸리자 김현숙은 사업하다 보면 이보다 훨씬 더 못 볼 꼴도 보게 될 테니 익숙해져야 한다고 말할 뿐이었다.그래, 받아들이자.이렇게 생각하니 경멸이 자연스레 걷히고 그 자리에 묘한 쾌감이 자리잡았다.‘그래, 남자만 여자 끼고 놀라는 법 있어?’그때부터였을까? 한유라는 클럽에 갈 때마다 자연스레 낯선 남자들과 어울리게 되었다.그리고 다시 지금. 현실로 돌아온 한유라가 너무나 단정한 인상의 남자를 다시 훑어보았다.‘저 얼굴로 폴댄스라...’“그래요. 보여주세요.”남자가 무대쪽으로 걸어가고 다른 직원들은 눈치껏 한유라, 김하늘 옆에 앉아 술을 따르고 과일을 건네는 등 수발을 시작했다.룸 밖에서 울리는 터질 듯한 음악소리와 비교되는 청아한 노래가 흘러나오고 두 남자는 노래와 폴댄스를 시작했다.전혀 추잡하게 느껴지지 않고 정말 아트 그 자체인 몸놀림은 순식간에 클럽을 현대 무용 공연장으로 만들었다.‘사장님이 신경 많이 써주셨네...’하지만 다음 순간, 한유라는 자연스레 김하늘의 눈치를 살폈고 역시 고개를 돌린 김하늘과 바로 시선이 마주쳤다.아무리 아무렇지 않은 척해도 마음속에서 피어오르는 죄책감에 도저
그녀의 웃음과 함께 룸 분위기는 다시 후끈 달아올랐다.김하늘도 함께 놀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지만 술 기운에 몸을 일으키는 것조차 힘들어 그저 애써 눈을 뜰 뿐이었다.폴댄스를 보여줬던 남자는 말투도 자상하고 나긋나긋한 것이 도저히 마음이 흔들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아, 누나. 나 너무 많이 마셨나 봐. 화장실 좀 다녀와야겠어.”어느새 친해진 남자가 말을 놓았다.“응, 얼른 갔다 와.”손을 저은 한유라가 소파에 기댔다.빨갛게 달아오른 그녀의 볼은 마침 어둠속에서 혼자 빛을 내는 정령과도 같았다.한유라의 옆자리가 비자 방금 전 노래를 부르던 남자가 슬그머니 다가와 술잔을 들었다.“누나, 나랑도 한 잔 해야지?”한유라가 자연스레 잔을 부딪히려던 그때 남자는 생각지 못한 행동을 해왔다. 손에 들고 있던 술잔을 한유라의 입가로 가져다댔던 것이다.‘허, 뭐야? 지금 나 먹여주려는 거야?’여유로운 척하지만 술잔을 든 살짝 떨리는 두 손이 이런 경험이 처음임을 말해 주고 있었고 그래서 왠지 더 귀엽게 느껴졌다. ‘이런 짓도 처음인 것 같은데... 나름 데뷔 무대는 제대로 치르게 해줘야지.’그렇게 술잔에 담긴 술을 마신 한유라가 다시 고개를 든 순간, 그녀는 얼굴에 띤 미소를 지울 수밖에 없었다.쥐구멍이라도 있으면 들어가고 싶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실감나는 순간이었다.그리고 술기운 탓일까?한유라는 그 말을 그대로 실천하고야 말았다.벌떡 일어선 한유라는 바로 숨을 곳을 찾기 시작했다.‘어디에 숨지? 소파 밑? 테이블 밑? 안돼 공간이 너무 좁아.’방금 전까지 술을 마시던 사람이 갑자기 사색이 되어선 이리저리 둘러보기 시작하니 남자들도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그리고 몇 초후, 룸 유리문에 잔뜩 굳은 남자의 얼굴이 나타났다.당황한 한유라의 모습을 본 순간, 심강열은 방금 전까지 치밀던 분노의 불길이 그나마 조금 사그라드는 기분이었다.‘숨을 곳을 찾는다? 그래도 자기가 잘못한 건 아나 보지?’흥미롭다는 눈으로 그 모습을 지켜보던 심강열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