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차피 이 자리에서 밝힐 생각은 없었지만 칼자루는 그녀가 쥐고 있으니 두려울 게 없었다.점점 더 험악해지는 분위기에 사람들이 바로 상황을 수습하기 시작했다.“아이고, 전 대표님 많이 취하셨네. 우리 나가서 바람이라도 좀 쐴까요?”“은정아, 너 화장실 간다면서. 내가 같이 가줄까?”“대표님, 너무 화내지 마세요. 그냥 하는 말일 거예요. 술은 저희랑 마시시죠.”누군가 또다시 술 얘기를 꺼내고 전기섭이 어금니를 까득 깨물었다.다시 테이블에 놓인 술잔을 든 전기섭이 소은정을 향해 걸어갔다.“좋습니다. 이 술 다 마시면 아까 있었던 일은 없었던 걸로 하죠...”하, 뭐야? 이 봐준다는 듯한 말투는... 주제도 모르고.소은정은 헛웃음을 짓더니 팔짱을 끼고 전기섭의 이글거리는 눈동자를 마주했다.커다란 룸이 다시 침묵에 잠긴 그때.술에 취해 꾸벅꾸벅 졸고 있던 한유라가 뭔가 이상함을 느끼고 눈을 번쩍 떴다.미간을 찌푸린 그녀가 사람들을 밀치며 소은정에게 다가갔다.“은정아, 너 성격 많이 죽었다? 저런 협박에 겁 먹은 건 아니지?”한유라의 말에 사람들의 얼굴에 두려움이 서렸다.SC그룹의 위상이 대단한 것도 있었지만 아직 경영수업 중인 대부분 재벌 2세들과 달리 소은정은 제대로 된 대표이자 최대 주주였다.전기섭 주위에 섰던 남자들마저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났다.술에 취해 졸고 있다 이제야 다가온 한유라를 흘겨본 소은정이 말했다.“뭐 기본적인 예의는 지켜야지.”“그래서? 더 지킬 의미가 있는 것 같아?”“아니.”옆사람은 안중에도 없다는 듯한 두 사람의 대화에 전기섭은 불안한 예감에 휩싸였다.오늘 점심 윤시라에게 거침없이 물을 끼얹던 소은정의 모습이 떠올랐다.어차피 윤시라 정도야 이 바닥에서 아무것도 아니었으니 별 이상하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었지만 어느새 그에게서 멀어지는 사람들의 모습에 전기섭의 눈동자가 흔들리기 시작했다.무슨 짓을 하...전기섭이 생각을 마치기도 전에 잔을 들고 있던 손이 가벼워지고 위스키가 그의 얼굴을 타고 흘러내
그리고 지금은 이미 바닥까지 추락한 자존심을 다시 되찾는 게 중요했다.거칠게 문이 닫히는 소리에 소은정이 고개를 돌리려던 그때 거대한 힘이 그녀를 뒤로 잡아당겼다.벽에 제압당한 소은정이 미간을 찌푸렸다.전기섭이 숨을 쉴 때마다 느껴지는 술 내음에 속이 울렁거렸다.“네가 뭔데 그딴 표정으로 날 바라봐. 사과해. 사과 안 하면 여기서 한 발자국도 못 나갈 줄 알아.”하, 이젠 협박까지? 제대로 막 나가네. 망나니 같은 자식.소은정은 기가 막힐 따름이었다.“야, 너 그거 안 놔!”한유라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다음 순간, 소은정이 전기섭의 팔을 잡아 뒤로 비틀었다.뚝!관절이 어긋나는 소리와 함께 소은정이 하이힐로 전기섭의 배를 걷어찼다.벽에 등을 부딪힌 전기섭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순식간에 상황이 뒤집히고 또각또각 걸어간 소은정이 비아냥거렸다.“난 또... 다짜고짜 덤비길래 뭐라도 되는 줄 알았네.”마지막 일격을 날리려던 그때, 맞은 편 룸 문이 벌컥 열렸다.그리고 그곳에서 나오는 사람의 얼굴을 확인한 순간 소은정도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동하 씨?”오늘 저녁 약속 있다고 했었잖아? 설마 약속 장소가 여기였어?전동하 역시 소은정이 여기 있을 줄은 모르고 그저 소란스러워 문을 연 것뿐이었다.하지만 놀람도 잠시 바로 걱정스러운 얼굴로 다가온 그가 소은정의 이곳저곳을 살폈다.“괜찮아요? 어디 다친 건 아니죠?”소은정이 고개를 젓고 다시 고개를 돌린 전동하의 얼굴이 순식간에 차갑게 굳었다.“전기섭?”전동하, 전기섭 두 사람 사이에서 풍기는 묘한 화학 냄새에 소은정도 왠지 긴장되기 시작했다.워낙 전동하를 싫어하긴 했지만 시궁창 같은 곳에서 며칠 동안이나 갇혀있었던 전기섭의 증오는 이미 한계치를 넘어선 상태였다.당장이라도 뼈까지 씹어먹고 싶었지만 더 이상 한국에서 사고를 치지 말라는 전인국의 분부가 있었기에 겨우 참고 있었는데 이런 곳에서 만나다니.그것도 이렇게 비참한 꼴로...전기섭이 고통을 무릅쓰고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비명소리와 신음소리 욕설과 고통에 몸부림치는 소리가 한데 어우러지며 옆 사람들이 보기에 잔인하다 느껴질 정도의 폭력이 이어졌다.처음에는 흥미진진한 표정을 짓던 한유라도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뭐야. 저 남자 더럽게 못 싸우네. 그런데 뭘 믿고 그렇게 나댄 거래?”이 바닥에서 재벌 2세들은 어렸을 때 납치 등 위험에 노출될 가능성이 있다 보니 어느 정도 스스로 몸을 지킬 수 있게 태권도나 유도 같은 무술을 배우는 게 국룰이나 마찬가지였다.“전기섭은 어렸을 때부터 전문 경호원이 밀착 경호를 했거든. 그래서 필요없었던 거겠지.”“아... 그래서 지금 저렇게 맞기만 하는구나?”한유라가 피식 웃었다. 한편 소은정은 전기섭의 몸을 가로탄 채 주먹을 날리는 전동하를 가만히 지켜보았다.평소 부드럽고 젠틀하던 모습은 온데 간데 없고 마치 오랫 동안 몸을 웅크리고 있던 맹수가 사냥감을 유린하 듯 포악했다.살기로 번뜩이는 눈동자에서는 그 어떤 감정의 동요도 느껴지지 않았다.이러한 전동하의 모습은 낯설면서도 그녀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분명 같은 집에서 자랐는데 온실의 화초처럼 연약한 전기섭과 별다른 초식이 없는 말 그대로 길바닥 스타일의 싸움을 보여주고 있는 전동하...무엇이 저 두 사람의 차이를 만들어냈는지 알고 있기에 가슴이 저려왔다.짜증 나... 동하 씨가 이기고 있는데도...얼마 지나지 않아 전기섭은 반항할 힘도 없는지 바닥에 축 늘어졌지만 전동하는 기계적인 움직임을 멈추지 않았다.“그만해요...”조용히 다가간 그녀의 목소리에 전동하가 드디어 행동을 멈추었다.고개를 든 전동하의 새카만 눈동자에 점차 빛이 들어왔다.그의 주먹을 잡아 어루만지던 소은정의 눈에 눈물빛이 서렸다.“됐어요. 이제 그만 가요.”자리에서 일어난 전동하가 조심스레 그녀의 표정을 살폈다.“놀랐어요?”이 와중에 그녀를 걱정하는 전동하를 향해 소은정은 최선을 다해 웃어주었다.“아니요. 손 아프죠? 집 가서 내가 약 발라줄게요.”그제야 전동하의 입가에 늘 보이던 익숙한
”주위에 지키는 사람 하나 없는데 미련하게 거기 갇혀있어? 대문은 잠겼어도 2층 창문에서 뛰어내리면 되잖아. 사내 새끼가 그것도 못 뛰어내려? 아무리 곱게 자랐어도 그렇지.”돌아온 그를 바라보던 전인권이 처음으로 한 말이었다.도망칠 기회가 수없이 있었음에도 고집스럽게 곰팡이 핀 빵을 먹으며 구조를 기다렸다니...한심하다는 듯한 전인권의 눈빛에 전기섭이 느낀 건 끝없는 치욕이었다.주위에 보디가드를 둘 필요도 없다고 생각했을 전동하의 오만함이 그를 미치게 만들었다.전인권은 동네 창피하다며 복수는 생각도 하지 말라 했지만...바닥에 엎드린 전기섭이 몰래 주먹을 쥐었다.언젠가... 내 바지가랑이를 잡고 차라리 죽여달라 애원하게 만들어주겠어, 전동하...한편, 오피스텔 앞에서 전동하와 소은정은 누가 먼저 돌아서냐로 한동안 실랑이를 벌였다.이걸로 한참 동안 고민할 일인가 싶어 두 사람 모두 웃음을 터트렸다.결국 전동하가 먼저 그녀의 등을 들이밀었다.“얼른 가요. 오늘은 푹 쉬어요.”“알겠어요. 내가 먼저 들어갈게요. 오피스텔 안에서 동하 씨가 가는 거 보면 되잖아요.”소은정의 고집에 피식 웃던 전동하가 그녀의 손을 잡았다.“그냥 같이 올라갈래요?”“됐어요.”소은정이 손을 쏙 빼냈다.싱긋 미소 짓던 전동하가 다시 소은정의 손을 만지작거리다 손목을 확 당겨 그녀를 품에 안았다.두 팔로 허리를 안으니 전동하의 따뜻한 체온이 그대로 느껴지고 소은정도 왠지 마음이 착 가라앉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언제면... 동하 씨가 상처를 모두 지워낼 수 있을까? 나와의 즐거운 추억으로 그 힘들었던 시간들이 흔적도 없이 덮였으면 좋겠다...한참 뒤에야 전동하는 품에서 그녀를 풀어주었다.“들어가요.”안겨있던 그녀도 왠지 달라진 전동하의 신체 변화를 느끼고 도망치듯 오피스텔 안으로 사라졌다.문에 기댄 소은정이 긴 한숨을 내쉬었다.솔직히 어른 대 어른으로 사귀는 마당에 너무 내숭을 버리는 것도 웃기고 소은정도 어느 정도 다음 단계 스킨쉽에 대해 마음의 준비
동하는 분명 돈도 있고 재능도 있지만 우리 가문의 지지 없이는 그저 자수성가한 젊은이에 불과해. 그런 수준으로 소은정 대표와 결혼을 할 수 있을 리가 없지.이미 결혼을 경험해 본 전인권이었기에 더 확신이 갔다.그제야 전기섭의 표정이 조금 풀리긴 했지만 아직도 속이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건 여전했다.“그러니까 더 기회를 잡으려고 노력해야지. 지금 문제는 소은정 그 계집애가 날 싫어한다는 건데... 어쨌든 동하랑 계속 만나는 꼴은 난 못 봐.”“조급해 한다고 될 일이 아니야. 문전박대나 당하는 주제에. 넌 도대체 밖에서 어떻게 하고 다니는 거니?”전인권도 어느새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어렸을 때는 나름 영리한 아이였는데 전인그룹 대표로 취임하면서 점점 더 성격이 안하무인으로 변하는 게 마음에 안 들었다.얼굴이 살짝 일그러진 전기섭이 복잡한 시선으로 전인권을 바라보았다.“형, 지금 동하가 형 아들이라고 두둔하는 거야? 어차피 동하랑 소은정이 결혼해도 전씨 일가에 얻는 건 마찬가지니까 누구든 상관없다 이거야?”형이라고 부르는 전기섭의 턱에 힘이 들어갔다.“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야?”전인권의 눈동자에도 어느새 분노가 피어올랐다.그 동안 내가 너한테 어떻게 했는데... 동생 밖에 모르는 멍청한 놈이라는 소리를 들으면서도 네 편을 들었어. 그런데 네가...!하지만 무작정 전동하에게 덤벼드는 전기섭의 행동에 실망한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전기섭이 광기 어린 눈으로 전인권을 노려보았다.“어찌 어찌 해도 자기 핏줄이라 이거야? 게다가 친손주인 마이크까지 키워주고 있으니까 왜 마음이 흔들려? 다시 우리 집안 가족으로 받아들이고 싶어?”전인권의 침묵을 묵인으로 받아들인 전기섭은 더 화가 치밀었다.“동하도 밖에서 나름 잘 나가니까 왜 애초에 내친 게 후회라도 돼? 내가 아니라 동하한테 회사 물려줄 걸 후회라도 하는 거냐고!”“전기섭, 그만해!”고개를 든 전인권이 소리쳤다.다른 건 몰라도 형까지 전동하 그 자식한테 빼앗기면 난 정말 미쳐버릴지도 몰라.
여느 때처럼 박수혁과 함께인 이한석이 조용하게 그의 곁을 지켰다.올 때까지만 해도 기분 나쁘지 않으셨는데... 그런 얘기는 제발 집에서 하라고...이한석이 두 눈을 질끈 감았다.이때 비서가 부랴부랴 달려왔다.“죄송합니다. 대표님. 오래 기다리셨죠. 들어오세요...”역시 프로라 그런지 방금 전까지 무시무시한 표정을 짓고 있던 박수혁이 아무렇지 않다는 듯 전인권의 사무실로 들어갔다.전인권이 소파에서 일어서며 그를 맞이했다.“죄송합니다. 박 대표님, 오래 기다리셨죠... 갑자기 회사에 급한 일이 생겨서. 실례 많았습니다.”무표정한 얼굴로 다가온 박수혁이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아닙니다. 전기섭 대표가 풀려났으니 걱정거리가 없으시겠어요. 요즘 바쁘게 지내고 있죠?”“아닙니다. 기섭이가 아직 철이 덜 들어서 진중한 멋이 없어요. 아직 배우고 있는 단계입니다.”“말씀드린 건 다 준비하셨나요?”박수혁이 무표정한 얼굴로 묻고 전인권이 부랴부랴 고개를 끄덕였다.“네. 전인그룹은 A시에 첫 한국지사를 지을 예정입니다. 착공식도 이미 진행했고요. 태한그룹과의 계약서는 이미 작성했으니 확인해 보세요.”비록 나이로 보나 경력으로 보나 전인권이 훨씬 더 우위였지만 워낙 다가기 어려운 박수혁의 포스에 왠지 기가 죽는 전인권이었다.게다가 전기섭을 찾아주는 조건으로 진행된 계약이라 일단 한수 접고 들어가는 수밖에 없었다.계약서를 확인하던 박수혁이 미간을 찌푸렸다.생각이 바뀌었어. 전인그룹... 그냥 버리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어.결심을 내린 박수혁이 고개를 들었다.“계약이야 뭐... 언제든지 사인만 하면 되는 거니까요. 전인그룹이 한국에 자리를 잡으면 그때 다시 얘기하시죠.”전기섭이 잔뜩 흥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네. 모든 게 예정대로 잘 진행되고 있습니다. 반 년안에 새 건물로 옮길 수 있을 것 같네요. 준공식에 박 대표님도 꼭 와주세요.”“아, 저까지 갈 필요가 있나요.”피식 웃던 박수혁이 자리에서 일어섰다.“시간이 많이 늦었네요. 전
한편 태한그룹.사무실로 돌아온 이한석은 의아할 따름이었다. 분명 전인그룹에 계약 체결 문제로 가신 건데 왜 갑자기 생각이 바뀌신 걸까? 설마 그 대화를 듣고...? 그리고 전기섭 그 사람도 소은정 대표님을 노리고 있을 줄이야... 앞으로 관계가 묘해지겠는데?의자에 앉은 박수혁의 표정은 여전히 차가웠다.“전인그룹... 지사 설립으로 절차 받고 있지?”“네. 아마 반년 안에 허가를 받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준비를 꽤 많이 하고 있는 것 같더군요.”고개를 끄덕인 이한석의 설명에 박수혁이 코웃음을 쳤다.“흥, 준비? 쓸모없는 발악을 하는군.”고개를 든 이한석이 조심스럽게 물었다.“대표님, 전인그룹과는 계약하지 않으실 생각인 겁니까?”“그래. 어차피 한국 지사 설립도 쉽게 진행되지 않을 거야. 내가 순조롭게 진행되게 두지 않을 거니까.”박수혁의 차가운 표정에 이한석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아이고... 화가 단단히 나셨나 보네. 그러니까 말을 조심해야 한다니까...“그럼 관련 부서에 미리 언질을 주는 게 좋을까요?”고개를 살짝 끄덕인 박수혁이 입을 열었다.“너무 타이트하게 잡진 말고... 될 것 같은 희망을 줘야 더 깊숙히 들어올 테니까.”함정을 파시겠다는 건가?박수혁의 뜻을 눈치챈 이한석이 고개를 끄덕였다.한편 SC그룹.회의를 마친 소은정과 소은호가 회의실을 나섰다.사무실로 올라가려던 그때, 소은호가 그녀를 불러세웠다.“은정아, 내 사무실로 와.”흠칫하던 소은정이 고개를 끄덕였다.오랜만에 들어온 소은호의 사무실을 둘러보던 소은정이 고개를 살짝 저었다.왠지 취향이 점점 아빠랑 비슷해지는 것 같은데...한편, 의자에 앉은 소은호가 서랍장에서 봉투를 하나 꺼넸다.“자.”봉투 안에 든 건 파티 초대장이었고 초대자의 이름은 천한강이었다.천한강은 윤시라 생부잖아?소은정이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내 쪽으로 오긴 했지만 저쪽에서 널 지명했어. 천 회장은 아버지랑도 사이가 좋으니까 얼굴이라도 비춰. 어르신 기분 상하게 하지 말
흠칫하던 소은호가 고개를 저었다.“나 오늘 시연이랑 데이트하기로 했단 말이야.”“...”잠시 후 다시 진지한 표정으로 돌아온 소은호가 말했다.“전인그룹은 A시에 지사를 세울 예정이야. 어쩔 수 없이 고객들을 빼앗기게 될지도 몰라. 그러니까 경계심을 늦추지 마. 아, 저번에 전기섭이랑 좀 사건이 있었다면서? 무슨 일 있었어?”소은정이 눈썹을 치켜세웠다.“사건까지는 아니고. 내가 혼 좀 내줬어.”“조심해. 뭐 일방적으로 참아줄 필요는 없고.”어깨를 으쓱하던 소은정이 대답했다.“내가 참을 성격이야? 참나... 나 간다.”소은정이 돌아서려던 그때 뭔가 생각난 듯한 소은호가 그녀를 불러 세우더니 서랍장에서 코발트 블루 상자를 꺼냈다.“자.”의아한 눈빛으로 상자를 연 소은정의 눈동자가 반짝였다.와, 이쁘다. 루비 팔찌네.소은정의 담담한 얼굴에 미소가 피어올랐다.“고마워, 오빠. 내가 많이 사랑하는 거 알지?”“별말씀을.”“그런데 갑자기 웬 선물이야?”“시연이가 출장 갔다가 사온 거야. 스위스 경매장에서 낙찰받은 거라나? 네 스타일인 것 같아서 가지고 온 거래. 음... 오늘 건투를 빈다.”하, 새언니가 사온 거였어? 그러면서 뻔뻔하게 고맙다는 인사는 넙죽 받은 거야?만족스러운 눈빛으로 팔찌를 바라보던 소은호가 말했다.“새언니한테 고맙다고 전해 줘. 그리고 이런 선물은 앞으로도 환영이라는 말도 전하고.”어이가 없다는 듯한 시선으로 여동생을 흘겨보던 소은호가 말했다.“나가.”“그래.”다시 사무실로 돌아온 소은정은 자세히 팔찌를 살펴보기 시작했다.티끌 하나 없는 맑은 보석을 바라보니 가고 싶지 않은 파티에 참석해야 한다는 부담감도 조금 가벼워지는 듯했다.역시... 기분이 안 좋을 때는 금융치료가 최고라니까.잠시 후, 소은정이 한유라에게 문자를 보냈다.“오늘 저녁에 시간 돼?”“뭐 재밌는 일이라면 언제든지.”다른 의미로 그녀만을 위한 파티니 초라하게 갈 수는 없다는 생각에 소은정은 일찍 퇴근하고 한유라와 함께 편집샵으로 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