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은정의 질문에 한유라가 피식 웃었다.“걔야 내가 파혼하길 원하지. 자기랑 결혼하자고 말했는데... 내가 싫다고 했어. 불륜으로 시작했다가 결혼에 골인했다는 소문에 평생 시달리면서 살고 싶지 않아. 어차피 결혼까지 갈 것 같지도 않고. 만나다 질리면 헤어지면 되는 거지. 결혼 같은 거에 억매이고 싶지 않아.”항상 밝은 척해도 유라도 속이 말이 아니겠네. 그래도 어쩌겠어. 자기가 선택한 길인데... 내가 옆에서 뭐라 해도 딱히 들을 애도 아니고.깊은 한숨을 내쉰 소은정이 한유라의 팔짱을 꼈다.“됐어. 오늘은 아무 생각도 하지 말고 마음에 드는 거 다 사. 이 언니가 쏜다.”소은정의 화통한 제안에 한유라가 눈을 반짝였다.“정말?”“당연하지. 내가 뭐 그런 걸로 거짓말하는 애니?”유라 기분이 좋아진다면 이 정도쯤이야...한유라가 잔뜩 신난 얼굴로 그녀의 팔을 끌더니 밖으로 나갔다.“그럼 진짜 마음껏 고른다.”잠시 후, 고급 주얼리 가게 들어온 두 사람은 본격적인 쇼핑을 시작했다.화려하게 반짝이는 보석들을 바라보던 한유라가 침을 꿀꺽 삼켰다.“은정아, 뭐가 괜찮을 것 같아? 오늘 파티에 입을 드레스랑 어울리면 좋겠는데.”“어차피 드레스는 집에 있고... 마음에 드는 거 다 사자. 천천히 매치해 보지 뭐.”“헐, 이걸 다?”소은정이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오늘 파티도 같이 가주기로 했잖아. 뭐 출연료라고 생각해.”소은정의 목을 확 끌어안은 한유라가 냅다 뽀뽀를 날렸다.“은정아, 우리 평생 친구하는 거다? 절대 나 버리면 안 돼!”“얘가, 징그럽게 왜 그래?”소은정이 미간을 찌푸리며 그녀를 밀어냈다.한편, 직원은 오랜만의 횡재에 싱글벙글 웃으며 제품들을 포장하기 시작했다.소은정이 자연스럽게 지갑에서 카드를 꺼내고 잠시 후 결제를 마친 직원이 카드를 그녀에게 돌려주었다.“15억 3000만원 결제되었습니다. 카드 돌려드릴게요.”이때 다른 보석을 훑어보던 한유라가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돌리더니 물었다.“어? 오늘은
카드를 다시 받은 소은정이 복잡미묘한 표정을 지었다.동하 씨 카드면 안 쓰는 건데... 돌려주면 괜히 더 이상하게 보이려나?“두 분 조심해서 나가세요...”한유라가 소은정이 선후로 가게를 나서고 직원들이 바로 수군대기 시작했다.“부럽다. 도대체 전생에 나라를 몇 번이나 구하면 SC 집안 딸로 태어날 수 있을까? 15억을 한 번에 긁네... 부럽다.”“그러게...”가게를 나선 소은정은 바로 전동하에게 전화를 걸었다.바로 전화를 받은 전동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자기야...”옆에서 휴대폰에 귀를 착 붙이고 있던 한유라가 깔깔대며 웃기 시작했다.“하하하하하하, 자기야래. 동하 씨 진짜 사랑꾼이시네요...”한유라도 옆에 있을 거라곤 생각지 못했는지 수화기 저편에서 끝없는 침묵이 이어졌다.소은정도 부끄러워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은 마음이었다.아니, 이 남자 요즘따라 정말 왜 이래? 자기라니... 나 혼자 있을 때면 몰라. 하필 유라도 있을 때...결국 소은정이 먼저 어색한 헛기침으로 침묵을 깨트렸다.“동하 씨.”“아, 네.”전동하가 바로 대답했다.아직도 눈치없이 웃고 있는 한유라를 흘겨보던 소은정이 물었다.“지갑에 동하 씨 카드 넣었어요?”당황한 듯한 전동하의 모습에 소은정이 설명을 이어갔다.“아, 유라랑 쇼핑 나왔는데 결제하고 보니까 처음 보는 카드더라고요. 카드 뒤편에 적힌 이름 보니까 동하 씨 이름이던데.”이에 전동하가 쿡쿡 웃었다.“네. 내 카드 맞으니까 마음껏 써요. 한도 같은 것도 없으니까.”“그런 말 아닌 거 알잖아요. 나한테 카드를 왜 줘요? 나도 돈 있어요.”“누가 은정 씨 돈 많은 거 몰라요? 그냥 내가 주는 용돈? 뇌물? 같은 거라고 생각해요. 내 돈이라도 써야 마음이 편할 것 같으니까.”이때 옆에서 듣고 있던 한유라가 다시 끼어들었다.“에이, 동하 씨도 참. 연인사의 신뢰가 돈으로 쌓을 수 있는 건가요 뭐... 그런데 어떡하죠? 아까 결제된 그 돈... 은정이가 나한테 선물 쏘면서 쓴 거거든요. 혹시
잔뜩 억울한 표정의 윤시라는 방금 전에 울고 나온 듯 눈시울이 빨개진 모습이었다.그 모습에 왠지 웃음이 튀어나왔지만 딱히 먼저 아는 척을 하진 않았다.우리 사이에 서로 안부나 물을 사이는 아니지.천한강도 반가운 표정으로 두 사람을 맞이했다.“은정아, 왔구나. 유라는 정말 오랜만에 보네. 평생 철부지 소녀일 것 같더니 이제 숙녀가 다 됐네.”한유라는 어려서부터 함께 자라온 친구라 천한강과도 안면이 있는 사이였으므로 허물없이 농담을 건넸다.“아저씨, 저희가 요즘 얼마나 바쁜데요. 얼굴 보려면 미리 예약하셔야 하는 거 알죠?”살짝 우쭐하는 한유라의 표정에 천한강이 껄껄 웃었다.“그래. 이제는 너희 젊은이들이 일할 차례지. 워낙 바쁘니까 서로 얼굴 볼 시간도 없을 것 같아서 아저씨가 특별히 자리 마련했다.”천한강의 장남 천진수가 넉살좋게 말을 건넸다.“은정아, 유라야. 앉아. 음식은 우리가 알아서 주문하긴 했는데 입맛에 맞을지 모르겠네. 더 먹고 싶은 거 있으면 시켜.”“아니에요, 오빠. 맛있어 보이는데요 뭐.”소은정이 싱긋 웃었다.전체적인 화목한 분위기와 달리 우중충한 표정의 윤시라는 누가 봐도 어우리지 못하는 모습이었다.화기애애한 대화를 나누다 잠깐 정적이 감돌던 그때,갑자기 윤시라가 훌쩍이기 시작했다. 쟤가 눈치없이 울긴 왜 울어.천진아가 여동생을 흘겨보았다.천한강과 윤시라를 번갈아 훑어보던 천진수도 살짝 고개를 저었다.윤시라는 천씨 일가에게 결코 자랑스러운 존재가 아니었다. 게다가 온갖 사고까지 친 탓에 천진수, 천진아에게 갑자기 나타난 여동생은 골칫거리 그 자체였다.뭐, 천한강은 여전히 윤시라에게 죄책감을 가지고 있는 모양이었지만 말이다.잠시 침묵이 흐르고 난처한 표정의 천한강이 술잔을 들더니 소은정을 향해 말했다.“은정아, 아저씨가 말 한 마디 할게. 우리 시라 30년만에 되찾은 딸인 건 이미 알고 있을 테고. 그 동안 혼자 억척같이 살면서 안 좋은 것도 많이 겪은 모양이야. 그 동안 너한테도 SC그룹에게도 폐를 많이
하지만 그녀의 예상과 달리 천한강이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그래. 시라야, 사과해. 네가 잘못한 거니까 네가 감당해야지.”또다시 침묵이 이어지고 소은정은 무덤덤한 표정으로 와인잔을 바라보았다.샹들리에 불빛이 술을 비추어 찬란한 빛을 내뿜고 있었다.한편, 소은정을 제외한 모두의 시선이 윤시라에게 꽂히고 이 자리에 앉아있는 그녀는 말 그대로 가시방석이었다.한때 회사에서 처세술로 지사장 후보까지 올랐던 윤시라는 지금으로서 최선의 방법이 사과라는 걸 물론 알고 있었다.비록 자존심은 좀 상하겠지만 자존심보다 더 중요한 건 이 바닥에서 생존하는 것이었으니까.지금 그녀가 소은정과 척을 졌다는 소문이 일파만파 퍼지고 웬만한 재벌 2세들은 그녀와 연락은커녕 얼굴을 보면 피하기에 바빴다.천한그룹에 출근하는 건 욕심많은 오빠, 언니는 물론이고 아버지까지 막고 있었고 재벌집 딸씩이나 되어서 다른 회사에 직원이 되는 것도 자존심에 내키지 않았다.진퇴양난인 그녀의 입장에서 조금이나마 아버지의 사랑을 되찾을 수 있는 방법은 사과뿐인데...하지만 이 모든 걸 알고 있음에도 도저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며칠 전 신호민이 파혼을 하겠다며 그녀의 집에까지 와서 깽판을 치고 갔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했다.그런데 내가 왜? 난 이미 벌을 받을 만큼 받았어. 그런데 내가 왜 또 소은정의 눈치를 살펴야 해?어색한 침묵이 이어지고 천한강은 물론 두 남매의 표정마저 점점 더 어두워져만 갔다.이렇게 좋은 기회를 이대로 놓치겠다고? 도대체 뭘 망설이는 거야...잠시 후, 입꼬리를 씩 웃은 소은정이 담담한 목소리로 먼저 입을 열었다.“됐어요. 하기 싫은 사과 억지로 받는 게 무슨 의미가 있나요. 그리고 제가 이 정도까지 물러서는 건 어디까지나 아저씨 체면을 봐서지 윤시라 씨 본인과는 상관없습니다. 하지만... 다음에 또 이런 일이 생긴다면 그때는 누가 와도 안 통할 테니까 알아두세요.”친절한 듯하지만 단호한 그녀의 말에 윤시라가 붉어진 눈시울로 고개를 들었다.“소 대
소은정의 말에 현장 분위기가 차갑게 가라앉았다.솔직히 분위기를 이렇게 어색하게 만들 생각은 없었지만 윤시라가 먼저 선을 넘어온 이상 굳이 고상한 척 앉아있을 필요가 있나 싶었다.천한강이 신경 써서 만든 자리일 텐데... 마지막 기회를 차버린 것도 윤시라 스스로의 선택이니까.소은정이 싱긋 웃더니 미안하다는 표정으로 천한강을 바라보았다.“아저씨, 이런 분위기에서 식사는 힘들 것 같네요. 뭐 아저씨 마음은 충분히 이해했어요. 오랜만에 언니, 오빠 얼굴 봐서 좋았고요. 잊지 않을게요.”말을 마친 소은정이 자리에서 일어섰다.한숨을 내쉰 천한강도 십 년은 더 늙은 얼굴로 일어섰다.“은정아, 고맙다.”적어도 그룹이나 천진수, 천진아에게는 화가 미치지 않을 것이라는 뜻으로 말한 것임을 눈치챈 천한강이 진심어린 감사 인사를 건넸다.어차피 식사 한 번으로 윤시라와의 악연이 풀릴 거란 기대는 하지도 않았고 이렇게 끝내는 게 어쩌면 최상의 결과일지도.소은정은 창백한 얼굴로 앉아있는 윤시라를 힐끗 바라본 뒤 단호하게 돌아섰다.어휴, 속이 다 시원하네.그녀의 뒤를 따라나온 한유라가 웃음을 터트렸다.“알고는 있었지만 너도 참 막 나간다. 아저씨 표정 봤지?”“아저씨가 어떤 마음으로 이 자리를 마련했는지는 나도 알고 있지. 기회를 놓친 건 윤시라 탓이잖아?”소은정이 피식 웃었다.“다 자기가 자초한 거지 뭐. 여전히 자기가 뭐라도 되는 줄 아나 봐. 아저씨만 아니었으면 평생 우리랑 같은 테이블에서 밥도 같이 못 먹는 레벨이면서...”소은정은 어느새 어둑어둑해진 하늘을 힐끗 올려다 본 뒤 한숨을 내쉬었다.“집에 가자. 피곤하다.”“그래.”한유라도 고개를 끄덕였다.한편, 소은정과 한유라가 떠난 레스토랑.남은 사람들의 표정은 여전히 싸늘했다.그중에서 안색이 가장 안 좋은 건 천한강이었다.소은정이 윤시라의 추접한 과거를 폭로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의 마음을 가장 무겁게 만드는 건 그녀의 말이 전부 사실이라는 것이었다.평소 그의 앞에서는 착한 척, 고분
무릇 재벌가에서 자식은 적으면 적을 수록 좋은 법.그나마 천진 남매는 어려서부터 우애가 좋기도 했고 천한강의 재산 역시 절반으로 나눠갖기로 오래 전부터 합의를 본 터라 딱히 부딪힐 일이 없었다.그런데 윤시라가 갑자기 나타나며 그 아슬아슬한 밸런스가 맥없이 무너지고 말았다.괜히 어렸을 때 보살펴주지 못했다는 죄책감 때문에 그녀에게 더 많은 재산을 나눠주면 어떡하나 불안했으니 얼굴도 잘 기억나지 않는 여동생의 존재가 결코 반갑지 않았다.이미 존재 자체로도 눈엣가시인 윤시라가 연이어 사고까지 쳐대니 천진수에게는 말 그대로 “시한폭탄”처럼 느껴질 수밖에.우리가 평범한 집안이었어 봐. 저렇게 고분고분 우리 집으로 들어왔을까?남매고 뭐고 그녀를 내칠 것 같은 천진수의 말투에 윤시라는 당황하기 시작했다.“아빠, 내 말이 틀렸어요? 쟤 한 명 때문에 우리 집안 전부 불구덩이로 뛰어들 수는 없잖아요. 은정이는 뭐 괜찮다고 했지만 그쪽 집안이랑 나쁘게 엮인 거 소문 다 퍼져서 나랑 누나 입장이 얼마나 난처해진 줄 알아요? 거의 왕따나 마찬가지라고요.”천진수의 말에 천진아도 고개를 끄덕였다.“맞아요, 아빠. 진지하게 고민해 보세요. 뭐 외국으로 유학 보내는 것도 나쁘지 않죠. 여기서 괜히 미움 받고 사는 것보단 낫잖아요?”“싫어요. 오빠, 언니, 나한테 도대체 왜 이래요? 언니, 오빠 말대로 회사에도 안 나가고 있는데 이젠 아예 한국을 뜨라고요?”윤시라가 다급하게 말했다.지금 이 상황에서 그녀가 한국을 뜬다면 말 그대로 천씨 일가의 내놓은 자식이 될지도 모른다.내가 어떻게 손에 넣은 건데. 절대 빼앗길 순 없어.한편, 여전히 침묵하고 있는 천한강의 표정이 점점 더 일그러졌다.자식들의 목소리가 점점 더 높아지자 참다 못한 천한강이 테이블을 쾅 내리쳤다.“그만들 해!”깊은 한숨을 내쉰 천한강이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지팽이를 짚고 천천히 룸을 나섰다.그녀를 해외로 내보낸다는 말에 딱히 반대를 하지 않는 아버지의 모습에 윤시라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기분이
어떻게든 아버지 얼굴을 뵙고 직접 사과드려야 해.당황한 얼굴의 윤시라가 허둥지둥 집안으로 쳐들어가려고 했으나 집사가 그런 그녀의 손목을 꽉 잡았다.“시라 아가씨, 그만하세요. 회장님의 결정은 바뀌지 않으실 겁니다.”울먹이던 윤시라가 한이 맺힌 듯 절규했다.“왜? 어렸을 때 한 번 버린 것도 모자라서 이제 와서 또 날 버린다고?”바로 코앞에 보이는 호화로운 저택을 바라보는 윤시라의 눈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아버지를 직접 뵙고 말씀드려야겠어요. 어떻게...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어요? 미안하다면서. 그 마음의 빚 살면서 천천히 갚아나가겠다면서... 이제 와서 날 버린다고요?”이성을 잃은 윤시라의 모습에 집사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시라 아가씨, 회장님께 자식은 아가씨 한 명뿐이 아닙니다. 진수 도련님과 진아 아가씨는 우애도 좋으시고 지금까지 회장님을 실망시킨 적 한 번도 없으세요... 그에 반해 아가씨는... 그 동안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는 아가씨 본인이 더 잘 아시겠죠. 아가씨가 저지른 잘못이 회장님의 체면은 물론 다른 두 자식의 앞길까지 망쳐놓으려고 하고 있어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셨을 겁니다.”온몸이 경직된 채 부들부들 떨던 윤시라가 집사를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내가 두 사람 앞길을 망쳐놔요? 그 두 사람은 몰라요. 내가 그 동안 얼마나 힘들게 살아왔는지! 평생 호의호식 하면서 살아온 사람들이 뭘 알겠어? 나도 살고 싶어서 그런 거예요! 살고 싶어서!”가슴 속 응어리를 풀어내려는 듯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던 윤시라가 거칠게 집사의 손을 뿌리치더니 눈물을 쓱쓱 닦아냈다.“오늘 무슨 일이 있어도 아버지 얼굴 뵙고 갈 거예요. 안 그럼 여기서 한 발자국도 안 움직일 거니까 그렇게 아세요.”잃어버린 가족을 찾은 건 그녀의 인생에 있어 로또나 마찬가지였다.그 꿈 같은 사실을 제대로 즐겨보지도 못하고 이렇게 쫓겨날 순 없었다.이제 겨우 다른 사람들 눈치를 살피지 않으면서 살게 됐는데... 안 돼...모르면 몰라도 재벌가 자제들
2억, 누군가에겐 평생 만져보지 못할 돈이지만 재벌가 사람들에겐 쇼핑 한 번 정도에 쉽게 쓸 수 있는 돈이다.지켜주겠다고 할 때는 언제고 껌값이나 다름없는 돈 몇 푼 쥐어주고 쫓겨나는 신세가 기막혔지만 이 돈이라도 챙기는 게 이득이라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입술을 깨문 채 한참을 망설이던 그녀가 빼앗 듯 수표를 낚아채고 돌아섰다.윤시라의 뒷모습이 사라질 때쯤 다시 휴대폰을 든 집사가 천한강에게 전화를 걸었다.“돈 받고 떠나셨습니다.”집사의 말에 흠칫하던 천한강의 얼굴에 실망감이 피어오른다.솔직히 남아서 어떻게든 혼자 살아보겠다고 했다면 몰래 도와줬을 것이다. 결국 눈앞의 돈을 선택했구나... 그래. 이것도 그 아이 팔자라면 팔자겠지.“그래. 정말 떠난 게 맞는지 지켜봐.”“네.”어젯밤 천한강 역시 밤새 잠을 이루지 못했다.동이 틀 때까지 고민한 끝에 그가 내린 결정이 바로 이것이었다.다른 가족과 평생 일궈온 사업을 지키기 위해 포기할 건 포기하고 내칠 건 내치자.말 그래도 두 번 자식을 버리게 된 것 같아 죄책감이 밀려왔지만 윤시라가 지금까지 보여준 모습이 워낙 실망스럽기도 했고 잠깐의 죄책감보다는 가지고 있는 걸 잃게 될 거란 두려움이 더 컸으니까.생각외로 부모 자식간의 정이라는 것도 시간을 들여 키워가야 하는 것이다. 생각보다 죄책감의 무게는 가벼웠고 어느새 그 자리에 남은 건 실망감뿐이었다.그래. 지금까지 시라가 없어도 잘 살아왔잖아. 이 나이에 자식 때문에 골치 아프고 싶지 않아. 이게 최선이야...한편, SC그룹.한유라의 전화를 받은 소은정이 고개를 갸웃했다.“너 일 안 하니? 요즘 아줌마 회사로 출근 안 하시나 봐?”그녀가 알고 있는 한유라의 어머니라면 출근 시간에 친구와 전화로 수다나 떨고 있는 걸 보면 분명 된통 혼내실 게 분명했으니까.소은정의 말에 푸흡 웃음을 터트린 한유라가 말을 이어갔다.“빅뉴스 알려주려고 전화한 건데 이럴래? 아저씨가 결국 윤시라 그 여자를 내쳤대. 오늘 바로 해외로 출국했다던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