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깐 고민하며 생각을 정리한 소은정이 전화를 받았다.“여보세요?”“은정아, 하늘이랑 은해 오빠랑 정말 사귀는 거야?”한유라의 가벼운 목소리에 소은정도 괜히 웃음이 났다.“그래. 나도 설마 했는데 아까 전화해서 확인했더니 사실이래.”“다행이다. 두 사람 분명 서로 사랑하는데 바라만 보고 있는 건 너무 슬프잖아. 스스로 사랑의 장애물을 설치하는 건 자학 행위야.”“그러는 넌?”소은정이 무거운 목소리로 물었다.“뭐?”다른 사람이었다면 누구랑 사귀든 만나든 관심 조차 없었을 테지만 상대가 한유라이니 평소처럼 대화를 나눌 수가 없었다.‘유라가 다시 상처받는 건 싫어. 사람들의 유언비어 때문에 유라도 상처투성이가 되어버릴 거야.’“사랑의 장애물... 너도 치워버리려는 거냐고.”그제야 소은정이 묻는 바가 무엇인지 눈치챈 한유라가 한참을 침묵했다.“어떻게 알았어?”“하, 민하준 그 사람 떡하니 차까지 끌고 왔던데 내가 어떻게 몰라.”소은정의 말에 한유라는 다시 침묵했다.수화기를 통해서도 그녀의 착잡함과 긴장감이 그대로 느껴질 정도였으니까.“나도 알아. 내가 지금 얼마나 말도 안 되는 짓을 하고 있는지. 그런데... 내 마음이 내 마음대로 안 돼... 그 사람을 보면 화가 치미는데 눈앞에 안 보이면 또 미치도록 보고 싶어. 민하준 그 자식이 죽도록 미운데 나한테 잘해줬던 게 자꾸 생각나. 은정아, 나 진짜 미쳤나 봐.”연애에서 항상 주도권을 잡던 한유라가 이번에는 민하준이라는 소용돌이에 제대로 빠져버린 듯 싶었다.한유라의 진심어린 목소리에 소은정은 한참 동안 입을 열지 못했다.‘내가 무슨 자격으로 유라의 마음을 평가하겠어. 게다가... 정말 사랑한다잖아.’소은정은 과거 자신의 모습을 다시 떠올렸다.약 1년 전, 박수혁을 떠나기로 마음 먹었을 때 비록 정이란 정은 다 떨어지고 박수혁이라는 인간에게 진심으로 실망했음에도 오다가다 마주칠 때 한 번 더 돌아보려는 마음만은 막지 못했다.지금의 한유라는 그때의 소은정과 똑같은 상태였다.하지만
‘이해관계와 상관없이 감정에 따라서만 움직인다라... 두 사람 참 다 이기적이다. 하지만 이 세상에 이기적이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어?’잠깐 고민하던 소은정이 한숨을 내쉬었다.“그래. 다 성인이고 두 사람 사이의 연애에 제3자인 내가 왈가왈부할 건 아닌 것 같아. 뭐가 됐든 너만 행복하면 됐어.”그나마 다행인 건 한유라가 소은호에 대한 집념에서 완전히 벗어났다는 것이었다.소은호에 대한 한유라의 감정은 어린 시절 좋아했던 오빠에 대한 동경과 이루어지지 못한 사랑에 대한 아쉬움이 더 컸다.그래서 소은호의 행복을 위해 보잘 것 없는 자신의 감정을 꾹꾹 눌러 온 것이겠지.하지만 그녀에게 민하준은 마약 같은 존재였다. 처음 만난 순간 오고 가는 시선 사이에 불꽃이 튀기는. 진정한 남녀 사이의 관계.그러니 모든 걸 감수하면서도 민하준과 함께 하려던 것이겠지...소은정과의 통화를 마친 한유라는 베란다로 향했다.불어오는 바람을 맞이하는 그녀의 표정은 그 언제보다 더 가벼웠다.‘다행이다... 이제 숨기는 것도 거의 한계였는데 이젠 좀 더 편해지겠어.’만족스러운 얼굴로 돌아선 한유라의 시야에 잔뜩 굳은 얼굴의 민하준이 들어왔다.검은 눈동자에 스치는 수많은 복잡한 감정들을 읽어낸 한유라는 왠지 당황스러웠지만 아무렇지 않은 척 다가갔다.“다 씻었어?”민하준의 바디워시 향이 그녀의 코끝을 자극했다.하지만 그녀의 손목을 낚아챈 민하준의 표정은 여전히 어둡기만 했다. 단단히 화가 났는지 호흡마저 더 거칠어졌다.“누구랑 통화한 거야?”“은정이.”한유라가 그를 향해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무슨 대화 나눴는데?”민하준의 뜨거운 시선에 얼굴이 뚫릴 것 같았지만 그 시선을 조용히 마주하던 그녀가 다시 피식 웃었다.화사한 미소에 왠지 모를 자조가 섞여있었다.“다 들었으면서 뭘 물어?”그녀의 손목을 잡은 민하준의 팔목에 핏줄이 꿈틀거리고 눈동자에 담긴 감정도 쏟아질 듯 일렁거렸다.“결혼은 안 할 거라고? 그게 네 마지노선이라고? 지금까지 그렇게 생각하고
그런데 단 한 번도 결혼 생각은 안 했다고?사실 민하준은 결혼 여부에 딱히 의미를 두는 사람이 아니었다. 정말 그런 것에 신경을 썼다면 인생의 유일한 기회를 거래의 조건으로 이용하지도 않았을 것이다.하지만 한유라는 그런 것에 신경을 쓰는 사람이었고 그래서 이혼을 결심했다.그런데... 쪽팔려서 결혼을 안 하겠다니?내가... 내가 도대체 뭘 더 어떻게 하면 되는 걸까?실망 가득한 그의 모습에 한유라는 싱긋 미소를 짓더니 갸느다란 팔로 그의 목을 휘감았다.반짝이는 그녀의 눈빛은 마치 인간의 것이 아닌 남자의 마음을 현혹하는 요괴 같기도 했다.민하준의 품에 얼굴을 기댄 한유라가 주문을 걸 듯 속삭였다.“아니, 당신이 할 수 있는 건 다 했어. 당신이 날 위해 한 모든 것... 영원히 기억할게. 하지만 우리... 결혼이라는 형식적인 법적 관계에 얽매이지 말자. 결혼했다가 이혼하는 사람들도 얼마나 많아. 하지만 우린... 지금 이대로 영원히 사랑할 수 있는 거잖아.”그녀의 말에 민하준의 가슴이 욱신거렸다.분명 한유라의 동작 하나하나는 그의 가슴을 쿵쾅거리게 만들었지만 그 입에서 나오는 말은 글자 하나하나마다 그의 숨통을 틀어막 듯 치명적이었다.이 세상에 명분을 원하지 않는 사람이 있을까?그런데 그 명분이 한유라는 싫단다.애초에 그가 유부남이라는 사실을 속여 신뢰를 잃었다는 걸 알고 있음에도 왠지... 마음 속 한 구석이 불편했다.한유라를 품속에서 떼어낸 민하준이 그녀의 표정 하나하나를 뚫어져라 살펴보았다.“유라야, 난 언젠가 다시 결혼을 해야 할지도 몰라... 너도 알겠지만...”어쩌면 언젠가 평범한 가족이 가지고 싶어질지도 모르니까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차갑게 식어가는 한유라의 표정을 보는 순간 목구멍이 꽉 막힌 듯 뒷말은 꺼낼 수 없었다.단호하게 그의 팔을 풀어낸 한유라가 팔짱을 꼈다.매혹적이던 눈동자는 날카롭게 변하고 사랑을 읊던 빨간 입술은 차가운 미소를 짓고 있다.“그럼 헤어지면 되는 거지 뭐. 걱정하지 마. 구질구질하게 매달리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아진 한유라가 홱 돌아섰다.결혼을 원하는 거면 다른 사람한테로 가봐. 난 그 로망 영원히 이루어줄 수 없을 테니까...한유라는 민하준을 사랑했지만 그 사랑만큼 민하준이 밉기도 했다.그러니까 우리 두 사람은 영원히 안 돼...엄마의 기대를 져버리고 친구들의 실망까지 감수하며 그를 만나는 것, 그녀가 민하준을 위해 해줄 수 있는 최대한이었다.한유라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소파에 앉아 티비를 보았지만 사실 아무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왠지 모를 답답함에 속이 뒤집어질 것만 같았지만 민하준 앞에서는 침착함을 유지할 수밖에 없었다.그런 그녀를 뚫어져라 바라보던 민하준이 결국 성큼성큼 문을 나섰다.쾅!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고 그제야 한유라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그래, 차라리 잘됐어. 괜한 기대하는 것보다 미리 실망하는 게 나으니까.몇 분 뒤, 감정을 추스른 듯한 민하준이 다시 돌아왔지만 여전히 그녀와는 아무런 말도 섞지 않은 채 바로 안방으로 향했다.안방 문이 닫히고 그제야 고개를 숙인 한유라가 피식 웃었다.그녀도 알고 있었다.깨진 그릇을 아무리 붙여도 그 자국을 지울 수 없듯이 아무렇지 않은 척해도 두 사람은 다시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을 것이며 언젠가 민하준이 결혼을 한다 해도 그 상대는 그녀가 아니라는 것을.천천히 한숨을 내쉰 한유라가 천천히 미소를 지었다.그래. 어쨌든 다시 돌아왔으니까 내가 먼저 달래야지 뭐.티비를 끈 한유라가 사뿐사뿐 안방으로 걸어갔다.돌아누운 채 괜히 자는 척하는 남자를 바라보던 그녀가 천천히 옷을 벗었다...한편, 인터넷은 여전히 김하늘과 소은해의 열애설로 뜨겁게 불타고 있었다.다음 날, 도준호 대표의 압박에 못 이겨 소은해는 결국 대중들에게 자신의 열애설에 대해 설명을 하기로 결정했다.사실 평소 소은해는 아무리 공인이라도 사생활까지 전부 밝혀야 하는 건가라고 생각하는 사람이긴 했고 연예인이 아닌 김하늘이 괜히 상처를 받을까 봐 걱정이 앞섰다.게다가 며칠 전 바로
그리고 하루종일 마음속 한 구석에 드리웠던 먹구름이 걷히는 기분이 들었다.그래. 공인인 오빠도 저렇게 당당한데 내가 뭐라고 시무룩해 있었던 걸까?은정이가 걱정하지 말라고 했을 때는 딱히 실감이 안 났었는데 이제 알겠네. 나랑 오빠 사이의 장애는 사실 내가 상상으로 만들어냈던 거란 걸......별 하나 보이지 않는 어두운 밤.소은정은 굉장히 내키지 않는 표정으로 파티장 앞에 나타났다.성강희가 와달라고 조르지 않았더라면 전동하와의 약속을 미루면서까지 올 이유가 없는 파티였다.차에서 내린 소은정이 눈부신 조명에 눈을 살짝 찌푸리고 문앞에서 추위에 덜덜 떨던 성강희가 성큼성큼 다가왔다.“야, 너 20분이나 늦은 거 알아?”성강희의 불만섞인 목소리에도 소은정은 어깨를 으쓱했다.“그러게 오기 싫다고 했잖아. 여기까지 온 것만 해도 네 체면 세워준 거니까 징징대지 마.”순간 성강희는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다른 여자였다면 5분이라도 늦으면 바로 손절했겠지만 소은정은 달랐다.어려서부터 그녀에게 양보하는 게 익숙해져서일까? 소은정 앞에서만큼은 왠지 작아지는 성강희였다.“그런데 무슨 파티인데?”비즈니스 파티면 그녀가 모를 리가 없을 텐데 의아했다.“심강열 생일 파티. 나도 심 대표랑 안면 튼지는 얼마 안 됐는데... 그래도 얼굴은 비춰야 할 것 같아서.”순간 발걸음을 멈춘 소은정이 얼굴을 찡그렸다.“왜 그걸 이제야 말해?”“왜 갑자기 정색을 하고 그래?”성강희가 오히려 의아하다는 표정이었다.“야, 아무리 그래도 유라 약혼남이잖아. 한유라... 정략결혼이라곤 하지만 약혼남 생일에 얼굴도 안 비추는 건 정말 너무하지 않냐? 그러니까 친구인 우리라도 참석해야지.”소은정의 마음이 착잡해졌다.‘아... 괜히 왔다. 성강희 이 바보 멍청이! 유라가 왜 안 왔겠어? 정말 아직도 모르겠냐고!’속으로 성강희를 향한 욕설을 쏟아내고 있을 때 사람들 사이에 둘러싸인 심강열이 모습을 드러냈다.소은정을 발견한 그 역시 흠칫하더니 형식적인 미소와 함께 다가왔다
박수혁의 뼛속 깊은 곳에 자리잡은 소유욕이 활화산처럼 터지고 있었다.성강희가 온다는 소식을 듣고 혹시나 해서 참석한 파티에서 정말 소은정을 만나게 되다니.꾹꾹 눌러담았던 그리움이 통제할 수 없이 흘러나왔다.“해외 지사에 출장갔다가 네 선물도 샀었어. 회사로 보냈었는데 왜 안 받았어?”박수혁은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물었다.그녀의 취향에 따라 고르고 또 고른 선물인데... 왜? 마음에 안 들었나?박수혁의 질문에 소은정이 피식 웃었다.“아무 이유도 없이 선물 주고 받을 사이는 아니잖아?”차가운 목소리로 선을 긋는 소은정의 모습에 그의 눈동자가 살짝 흔들렸다.“전동하 대표 아들은... 괜찮아?”“응.”고개를 끄덕이는 소은정의 눈빛에서는 그 어떤 고마움도 느껴지지 않았다. 설마 은정이도 나와 전기섭 사이에 뭔가 있다고 의심하는 건가?우연한 만남에 부풀어 올랐던 마음이 무겁게 가라앉았다.“전동하 대표... 복잡한 가정에서 태어난 사람이야. 너무 믿지 마.”“충고 고마워.”기가 막힌 박수혁이 뭔가 더 말하려던 그때 낯선 누군가가 다가왔다.“박수혁 대표님? 아이고, 오랜만이네요. 어, 사모님도 함께 오셨네요?”서산시에서 작은 중소기업을 운영하는 김 대표였다.3년 전 쯤에 태한그룹에서 하청을 맡았던 덕에 박수혁 대표와도 안면이 있었고 그의 부인이었던 소은정도 물론 알고 있었다.사모님이라는 단어에 소은정도 박수혁도 미간을 찌푸렸다.“누구신지...”“대표님, 3년 전에 만나고 오늘 다시 뵙네요. 그때 계획서를 드리려고 태한그룹 본사까지 갔었는데 휴게실에서 사모님을 만났죠. 사모님, 그때 기획서는 사모님께서 전해드릴 테니 놓고 가라고 하셨잖아요. 기억하십니까?”그때까지만 해도 김 대표는 왜 사모님이라는 사람이 일반 손님들과 함께 기다리는 건가 의아했지만 전해 주겠다는 기획서가 퇴짜를 맞고 오고 가는 소문을 듣고 나서야 소은정이 허울뿐인 와이프라는 걸 알게 되었다.이런 상황이 일어날 거라곤 예상치 못한 박수혁은 살짝 당황스러웠지만 아무렇지
박수혁의 주위에 차가운 아우라가 피어올랐다.차가운 눈빛으로 소은정의 허리에 감긴 손을 바라보던 박수혁이 이를 악물었다.할 수만 있다면 저 손을 잘라버리고 싶었다.한편, 갑작스러운 전동하의 등장에 가장 놀란 건 바로 김 대표였다.“사모님이 아니라고요? 제... 제가 잘못 봤을 리가...”김 대표는 소은정의 얼굴을 다시 훑어보았다.비록 분위기가 살짝 바뀌긴 했지만 저런 아름다운 얼굴은 흔히 볼 수 있는 게 아니었다.잘못 봤을 리가 없는데...싱긋 웃은 전동하가 차가운 목소리로 해명을 이어갔다.“지금은 제 여자친구입니다. 박수혁 대표님과는 아무 상관없는 사람이죠.”박수혁을 힐끗 바라보던 전동하가 소은정의 손을 잡았다.“친구도 왔던데 인사 안 해도 되겠어요?”전동하의 턱끝이 가리키는 쪽을 돌아본 소은정은 그녀를 향해 손을 젓고 있는 추하나를 발견했다.한시라도 이곳을 벗어나고 싶은 그녀에게는 나이스 찬스였다.“인사해야죠. 얼른 가요.”박수혁과 김 대표를 향해 고개를 까딱한 소은정이 돌아섰다.혼자 덩그러니 남겨진 성강희가 혀를 찼다.하, 두 사람 언제 저렇게 가까워진 거야? 갓 사귈 때만 해도 곧 헤어질 것 같더라니...김 대표 또한 여전히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정말 내가 잘못 본 건가?그가 난처한 표정으로 물었다.“제... 제가 정말 잘못 본 겁니까?”차가운 시선으로 소은정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박수혁이 자꾸 고개를 내미는 짜증을 애써 누르며 침착한 목소리로 대답했다.“아니요. 제대로 보신 거 맞습니다.”말을 마친 박수혁이 쿨하게 돌아섰다.어차피 소은정 얼굴도 봤겠다 더 이상 이곳에 남아있을 이유가 없었다.전동하... 이제 아예 대놓고 이런 식으로 나오시겠다? 내가 정말 네가 이뻐서 가만히 내버려 두는 줄 알아? 이제 움직일 때가 된 것 같네...드디어 혼자 남겨진 김 대표는 여전히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으로 눈을 껌벅이고 있었다.박수혁 대표 와이프가 다른 남자의 여자친구라니... 내가 도대체 무슨 소리를 들은 거지?.
전동하가 자리를 뜨고 그 모습을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바라보던 추하나가 소은정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축하해요.”“고마워요. 그런데 우혁이는요?”아직 열애 사실을 공개한 건 아니지만 이런 자리에 추하나를 혼자 보낼 성격이 아닐 텐데...“우혁이 요즘 새 프로그램 기획 중이거든요. 아까 그냥 얼굴만 잠깐 비추고 바로 갔어요.”다행이네. 두 사람 여전히 좋아보여서.잠시 후, 다시 돌아온 전동하가 그녀를 힐끗 바라보고 바로 그 눈빛에 담긴 뜻을 눈치챈 소은정이 일어섰다.“하나 씨, 그럼 저도 이만 가볼게요. 만나서 반가웠어요.”“그래요. 이제 또 봐요.”호스트인 심강열에게도 인사를 한 뒤 파티장을 나선 두 사람은 자연스레 전동하의 차에 탑승했다.왠지 숨막히는 분위기에 소은정이 살짝 창문을 열었지만 전동하가 다시 창문을 닫아버렸다.“아직 밤바람이 차요. 옷도 이렇게 얇게 입었으면서 감기라도 걸리면 어쩌려고요?”꾸짖는 듯한 말투였지만 그 속에 감춰진 걱정은 감출 수 없었다.“화 다 풀린 거예요?”소은정의 질문에 전동하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어차피 은정 씨가 날 달래줄 리도 없으니까 알아서 풀어야줘.”전동하의 말에 소은정은 죄책감이 밀려들면서도 왠지 의아했다.달래달라니. 애도 아니고...곁눈질로 그녀를 힐끗 바라보던 전동하가 물었다.“왜 처음부터 해명 안 했던 거예요?”아... 아직도 그 사모님이라는 단어가 신경 쓰이는 거구나.“사실 처음엔 그 사람이 누군지도 몰라서... 해명하려던 참에 동하 씨가 온 거고요...”잠깐 망설이던 소은정이 전동하의 소매를 살짝 잡아당겼다.“그럼 어떻게 달래줄까요?”두 사람의 연애에 더 적극적인 건 항상 전동하였고 소은정도 어느새 그의 사랑을 마음껏 즐기고 있는 상태였다.하지만 순간 이런 관계가 전동하에겐 불공평하다는 기분이 들었다.소은정의 진지한 눈빛에 전동하의 가슴이 콩닥거렸다.안정적으로 운전을 하던 그도 가슴이 뜨거워지는 기분에 당장이라도 브레이크를 밟고 싶었으니까.그제야 살짝 굳었던
오랜만에 만난 두 사람은 서로 부둥켜안고 눈물을 흘렸다.문준서는 그녀의 눈물을 보고 죄책감에 얼굴을 들 수 없었다.새봄이가 점차 울음이 잦아들자 그는 고개를 숙이고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었다.새봄이는 길게 심호흡하고 감정을 식혔다.준서에게는 묻고 싶은 게 정말 많았다.문준서는 울어서 빨갛게 부은 새봄이의 눈을 보고 웃으며 말했다.“커피 계속 마실 거야? 안 마실 거면 우리 집에 올래? 내가 맛있는 커피 만들어 줄게!”새봄이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준서는 소녀의 손을 잡고 핸드백을 챙긴 뒤, 밖으로 나갔다.커피숍 직원들마저 잘 어울리는 한 쌍이라고 부러운 눈빛을 보냈다.새봄이는 그와 손을 잡고 걷고 있자 저도 모르게 가슴이 설레었다.어릴 때는 항상 손을 잡고 다녔는데 지금은 어딘가 어색했다.어린 문준서는 항상 새봄이를 우선으로 생각했는데 지금도 그럴까?문준서는 소녀가 기억하는 어린 준서가 아니었다. 그의 거대한 뒷모습은 왠지 모를 안정감을 주었다.문준서가 웃으며 소녀에게 물었다.“뭘 그렇게 뚫어지게 봐?”“키 몇이야?”“192, 만족해?”새봄이는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을 느끼며 고개를 돌렸다.“내가 키 큰 사람 별로라고 하면 뼈라도 깎을 거야?”문준서는 웃으며 소녀의 손을 잡아끌었다.“응. 네가 집도해.”새봄이도 덩달아 웃었다.10여 년을 떨어져 지내다 보니 처음에는 정말 보고 싶었지만 점차 감정은 옅어져 갔다. 매번 부모님에게 준서의 안부를 물을 때면 그들은 머리만 흔들었다.그 뒤로 새봄이는 더 이상 준서를 찾지 않았다.말없이 사라진 그를 원망한 적도 있었다.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면 그가 해외에서 무사히 지냈으면 하는 바람이 더 컸던 것 같았다.문준서는 길가에 세워진 스포츠카로 다가갔다.차도 주인을 닮아 검은색으로 차분하고 화려하지 않은 디자인이었다.처음 그와 눈이 마주쳤을 때, 새봄이는 그가 문준서라는 것을 한눈에 알아보았다. 티없이 맑고 순수했던 눈동자는 어릴 때와 비교해 변한 게 전혀 없었다.하지만 소녀
새봄이가 떠난 뒤로 전동하는 한숨을 달고 살았다. 옆에서 지켜보는 소은정은 어이가 없었다.학교 생활은 생각했던 것보다 따분하지 않았다.어릴 때부터 곱게 자란 새봄이지만 거만하지 않고 성격이 활발했기에 많은 친구를 사귀었다.아이는 가끔 친구들을 집에 초대해서 파티를 벌였다.그리고 혼자 있는 시간도 충분히 즐겼다.가끔 센 강변에 가서 산책도 하고 석양을 감상하며 오리에게 먹이를 주기도 했다.그런데 가끔 혼자 있을 때면 누군가가 지켜보는 느낌이 들기도 했다.하지만 크게 걱정하지는 않았다. 주변에 수시로 경호원들이 지키고 있었기 때문이다.새봄이는 아이스크림을 들고 홀로 석양 아래에서 산책을 즐겼다. 손에는 엄마를 위해 준비한 선물인 한정판 명품백이 들려 있었다.이목구비가 화려한 동양소녀가 길을 걷고 있자 무수히 많은 시선들이 따라다녔다.하지만 프랑스의 치안은 별로 좋지 못했다.새봄이가 아이스크림을 먹는 사이 녹색 트레이닝복을 입은 남자가 소녀의 핸드백을 가로채서 사람들 틈으로 도주했다.놀란 새봄이는 다급히 남자의 뒤를 따라가며 소리쳤다.“도둑이야!”안타깝게도 유럽에서 비슷한 사건은 비일비재하게 벌어졌다.아무도 핸드백을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싶지 않아했다.새봄이는 자신이 안전하다는 것을 알기에 끝까지 남자를 쫓아갔다.수염이 덥수룩한 남자는 뒤를 돌아보며 뭐라고 욕설을 지껄이더니 골목으로 진입했다.새봄이가 쫓아갔을 때, 남자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소녀가 망연자실한 얼굴로 서 있을 때, 갑자기 옆 골목에서 사람이 튀어나왔다.남자는 바로 새봄이의 목을 노리고 달려들었지만 손이 소녀에게 닿기도 전에 누군가가 달려와서 남자를 걷어찼다.새봄이는 겁에 질린 얼굴로 뒤를 돌아보았다.훤칠하고 잘생긴 동양인 남자가 등 뒤에 서 있었다.어딘가 익숙한 느낌이 들었다.검은 정장을 입은 남자가 새봄이의 앞으로 다가갔다.그에게서 익숙한 우드향이 풍겼다.그는 천천히 소녀를 향해 손을 뻗었다. 손가락이 가늘고 예쁜 손이었다.녹색 트레이닝복을 입은 강
전동하는 그날 밤 새봄이에게 해외유학 얘기를 꺼냈다.새봄이는 고민도 해보지 않고 바로 동의했다.어디에 가고 싶냐고 물었더니 프랑스만 제외하고 아무데나 괜찮다고 했다.전동하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준서 때문에 프랑스에 가기 싫은 거야?”새봄이가 눈시울을 붉히며 말했다.“걔가 누군데? 하나도 기억 안 나! 걔 얘기하지 마!”아이는 억울함을 토로했다.줄곧 아이의 옆을 지켜주던 오빠는 어느 날 갑자기 사라졌다.마치 꿈을 꾼 것 같았다.더 이상 아이의 뒤꽁무니를 따라다니던 오빠는 없었다.아이는 준서가 보고 싶었지만 준서는 떠날 때 편지 한장 남기지 않았다.전동하는 안쓰러운 표정으로 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새봄이도 이제 컸잖아. 준서도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어. 연락이 없던 것도 그럴만한 사정이 있어서였어. 나중에 준서 만나도 너무 준서를 욕하지 마.”새봄이는 고집스럽게 고개를 돌려버렸다.부모의 사랑만 받고 자란 아이는 갑작스러운 이별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가끔 딸이 울기라도 하면 전동하는 항상 달려와서 딸을 위로해 주었다.태어날 때부터 다이아수저를 물고 태어난 아이는 누구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었다.그런데 어느 날 오빠가 보고 싶었던 아이가 준서에게 전화를 걸었을 때, 없는 번호라고 나왔다.아이는 버려진 느낌을 받았다.출국이 결정되었으니 전동하는 아이가 다닐 학교를 알아보았다.결국 새봄이는 유럽을 선택했다.마치 누군가가 거기서 자신을 기다리는 것처럼.떠나기 전, 아이는 일곱 남자친구와 작별인사를 나누었다.아이가 출국하는 날, 온가족이 나와서 새봄이를 배웅햇다.새봄이는 딱히 슬프거나 아쉬운 티를 내지 않았다. 마치 부모님 손을 잡고 해외여행을 가는 것처럼 자연스러웠다.아이는 활짝 웃으면서 가족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전동하와 소은정은 영지까지 데리고 같이 프랑스로 출국하기로 했다.일가족이 탑승수속을 마치고 돌아서는데 뒤에서 급박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새봄아!”고개를 돌리자 하얗게 질린 얼굴로 허겁지겁 이쪽
눈 깜짝할 사이에 새봄이는 어엿한 숙녀로 자라났다.고등학교에 들어가자마자 그녀에게는 남자친구가 생겼다.새봄이는 집으로 돌아와서 이 소식을 소은정에게 알렸다.소은정은 딱히 말리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어렸을 때 이런저런 경험을 다 해보는 게 아이에게 좋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그리고 새봄이가 진심일 거라고 생각하지도 않았다.하지만 이 사실을 알게 된 전동하는 밤새 잠을 이룰 수 없었다.그는 아이와 대화를 나눠봐야겠다고 마음먹었다.새봄이의 반응은 시큰둥했다.“친구들이 다들 남자친구를 사귀는데 나만 솔로면 유행에 뒤떨어지잖아. 그래서 만나보기로 했어. 그리고 너무 이른 나이도 아니잖아! 중학교 때부터 연애하는 애들도 많다고!”전동하는 인내심 있게 아이를 타일렀다.“그래도 넌 아직 너무 어려. 밖으로 나가 사람들과 더 많이 접촉해 보면 알게 될 거야. 남자는 다 믿을 놈이 못 돼….”“그럼 엄마가 아빠를 만난 것도 사랑에 눈이 멀어서 만난 거겠네?”어릴 때부터 말싸움에는 절대 지지 않던 새봄이는 미소가 소은정을 닮은 예쁘고 사랑스러운 소녀로 성장했다.그리고 총기 있는 눈동자와 말빨, 그리고 큰 키는 전동하를 많이 닮았다.소은정은 어디 하나 빠지지 않는 딸이 나중에 남자 여럿을 울릴 거라는 것을 알기에 아이에게는 사랑을 하면 꼭 아빠랑 엄마처럼 서로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라고 강조했다.새봄이는 전동하가 말이 없자 달려가서 그의 팔짱을 꼈다.“아빠, 걱정하지 마. 그냥 연애는 어떤 느낌인가 궁금해서 해보는 거야.”“그래서 그 남자친구는… 어떤 사람이야?”“어느 남자친구를 말하는 거야?”전동하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물었다.“몇이나 사귀었는데?”“다른 애들은 다 한명하고만 사귀는데 난 다른 애들 따라하기 싫어. 그래서 하루에 한 명, 일주일에 일곱 명이야! 주일을 정해서 따로 만나!”새봄이가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전동하는 입을 뻐금거리며 한참을 말을 잇지 못했다.그래도 다행인 건 사랑에 깊이 빠지는 스타일은 아니라는 점이랄까.
다른 CCTV에서 정황이 포착되었다. 직원이 그쪽으로 다가가다가 발을 헛디디며 하마터면 술잔을 쏟을 뻔한 정황이었는데 그때 잔을 안쪽으로 옮기며 위치가 바뀐 것 같았다.독극물 검사결과도 나왔다.청산가리였다.심청하의 몸에서 나온 독극물과 약병에 있던 독극물 성분이 일치했다.살인을 계획했던 심청하가 제 꾀에 당한 상황이었다.아마 그녀는 죽을 때까지 어디서 문제가 생겼는지 몰랐을 것이다.형사들은 밤을 새워 CCTV를 확인하면서 이 약병의 출처가 남유주의 큰어머니라는 사실을 밝혀냈다.그렇게 큰어머니가 경찰에 소환되었다.큰어머니는 숨김없이 사건의 경과를 진술했는데 심청하에게 협박을 당했다는 내용이었다.하지만 사람을 해치고 싶지 않아서 넘어지는 틈을 타 약병을 바닥에 버렸다고 했다.심청하가 포기를 못하고 스스로 행동에 옮기다가 제 꾀에 당했다는 말도 했다.형사가 인상을 찌푸리며 그녀에게 물었다.“그랬다는 증거 있나요?”“당연히 있죠.”큰어머니는 딸인 남연을 호출했다.“형사님이 묻는 대로 사실을 대답해! 떨지 말고!”남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핸드폰을 꺼냈다.그리고 차 안에서 심청하와 대화했던 녹음을 재생했다.“그 여자가 아빠랑 엄마를 죽이겠다며 협박했어요. 그 파티 초대장은 제가 거금을 주고 산 거예요. 우린 태한그룹 사모님과 친척관계에요. 평소에 왕래는 하지 않지만 사람을 죽이고 싶지는 않았다고요!”남연은 울음을 터뜨리며 말했다.“형사님, 제가 아는 건 다 얘기했어요.”형사는 그녀의 진술에서 이상한 점을 포착했다.“전에 남유주 씨를 해하려 한 적이 있죠?”“그래! 너도 직접 남유주를 죽이려고 했잖아? 그건 왜 쏙 빼고 말해?”녹음본에 담겼던 심청하의 목소리였다.의심을 사지 않기 위해 파일은 편집을 거치지 않았다.남연은 고개를 푹 숙이고 사실을 털어놓았다.“그것도 심청하가 협박해서 했어요. 하지만 언니 앞에서 이미 잘못을 인정했고 사과도 했어요. 언니는 저를 용서했고요.”형사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이건 박수혁 대표와
심청하는 한참 침묵하더니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무슨 방법을 쓰든 그 사람들과 걔를 만나게 해. 안 그러면 이 약은 네 부모님 배 속으로 들어갈 거야!”남연은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고개를 떨어뜨렸다.“알겠어요.”결국 그녀는 겁에 질린 얼굴로 명령을 받아들였다.며칠 뒤, 마침 좋은 기회가 찾아왔다.오늘은 자선회가 열리는 날이었는데 박수혁은 남유주의 기분을 풀어주기 위해 그녀와 함께 자선회에 참석했다.그리고 자선회에서 많은 보석과 골동품을 구매하며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다.자선회가 끝나고 파티가 이어졌다.남연의 부모는 힘겹게 초대장을 입수했다.심청하는 파티홀에서 이어질 장면을 기대하고 있었다.하지만 남연의 부모는 뒤늦게 파티에 참석했고 그들이 현장에 도착했을 때는 파티가 다 끝난 뒤였다.심청하는 분노를 주체할 수 없었다.이번 기회를 놓치면 다음에는 언제가 될지 장담할 수 없었다.SC그룹에서는 지분 사건으로 그들을 물고늘어질 것이다.본사에서 움직이기 전에 남유주를 제거해야 했다.잠시 후, 남유주의 큰어머니는 사람이 없는 곳에 숨어들었다.그리고 약을 꺼내 술병에 쏟아넣으려고 했다.마침 취객이 그녀의 어깨를 부딪히고 지나가며 그녀가 바닥에 쓰러졌다.남유주 큰어머니가 고통에 신음을 흘리자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되었다.약병은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구석진 곳으로 굴러갔다.심청하는 싸늘한 눈빛으로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정말 뭐 하나 일을 제대로 하는 게 없는 일가족이었다.남유주의 큰아버지는 얼굴이 하얗게 질려 다급히 다가가서 아내의 손을 잡고 구급차를 호출했다.호텔에 미리 대기하고 있던 의료진이 달려왔고 큰어머니를 들것에 실어 병원으로 호송했다.심청하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사람들이 모두 흩어지고 그녀는 구석진 곳으로 가서 아무도 안 보는 틈을 타 약병을 손에 쥐었다.그리고 기회를 봐서 약을 와인에 쏟고 흔들었다.모든 게 끝난 뒤, 심청하는 손에 난 땀을 닦았다.이미 살인을 하기로 마음먹은 그녀였지만 직접 모든 일을 끝내고 나니
남유주는 미소를 지으며 소은정과 박수혁 사이를 스스럼없이 얘기했다.남유주는 지나간 둘의 과거를 신경 쓰지 않았다.박수혁은 소은정에게 다른 마음이 없었고 그들은 각자 다른 사람과 행복한 삶을 살기로 했다.소은정은 미소를 지으며 남유주가 건넨 상자를 열었다.안에는 팔찌가 있었다, 반짝이며 아름다운 화려한 목걸이의 모든 보석은 정교하게 다듬어져 있었고 본연의 미와 섬세함의 아름다움을 결합하는 느낌이 들게 했다.그녀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몇 년 동안 이런 것을 모으기를 좋아했는데... 고마워요, 진짜 마음에 들어요." 남유주는 화해의 의미로 소은정에게 팔찌를 건넸다.소은정은 미소를 지으며 팔찌를 착용했다."과거는 과거일 뿐이니 우린 서로 용서하는 게 어때요?"소은정은 머리를 끄덕였다. 그녀의 눈가에 눈물이 고였다."안타깝게도 난 어떤 선물도 준비하지 못했네요…"그녀는 가방에서 계약서를 꺼내고 남유주에게 건넸다.남유주는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서류 내용을 살펴보았다."이게 뭐예요?""원래는 소찬학의 주식이었지만 몇 년 전에 회사 소유로 되었어요. 아빠가 나이도 있고 해서 주식 대신 배당금을 주기로 했었어요, 근데 더는 그 사람의 것이 아니니까, 아빠가 유주 씨한테 넘기고 싶다고 하더라고요. 우리가 주는 작은 선물이니까 받아줬으면 좋겠어요." 얼굴이 굳었던 남유주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그녀는 계약서를 다시 내밀었다."전 받지 않을래요.""유주 씨, 이게 얼마나 큰 돈인지 몰라요? 술집을 사려고 했던 거 아니었어요? 이 돈으로 그 건물 같은 거 열 개는 살 수 있어요."소은정은 인내심을 가지고 설명했다.남유주는 웃음을 참고 머리를 흔들었다."이걸 받으면 소찬학이 내 생부라는 것을 인정하는 거잖아요, 끊을 수 없는 혈연관계를 받아들여야 하고, 내가 관여하지 않은 과거의 강탈과 억압을 직면해야 해요. 태어난 이래로 부모가 없는 존재로 살아왔고, 아직 그것을 원하지 않아요. 나의 아버지로 인정하고 싶지도 않고 소씨 가문과 혈연적인 관계가
거침없이 내뱉는 심청하의 태도에 소찬식이 얼굴이 어둡게 변했다.옆에서 듣고 있던 소은정이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소씨 가문의 주식은 애초에 저희 집안 거에요. 그리고 둘째 삼촌이 직접 주식을 그룹 소유로 돌리겠다고 서명까지 했어요. 자기는 주식 배당만 챙기겠다고, 회사를 떠난 지금 삼촌한테 배당금을 주는 것만으로도 감사하게 여겨야죠. 이모가 한 계산은 너무 터무니없어요. 이 주식들은 재산 분할과 관련이 없어요. 설령 분할을 한다 해도, 먼저 그룹의 이익을 보호하는 게 우리의 원칙이고요."심청하는 얼굴이 이상하게 변했다."저는 어떻게 해요? 그이가 감옥에 가고, 우리는 손가락 빨면서 굶어 죽으라는 거예요? 주식을 전부 넘겨주세요, 그럼 더는 따지지 않을게요!" 그녀는 무례한 태도로 단호하게 앉아 있었다.소찬식의 표정이 음울하게 어두워졌다, 그는 복잡한 눈빛으로 그녀를 한번 쳐다보았다."그만 돌아가세요, 돌아가서 경찰 소식 기다리세요. 찬식이 회사 자금을 자기 돈처럼 써버렸고 수억 달러를 횡령했어요. 그럼에도 그룹이 이 돈에 대해 따지지 않는 것만으로도 고맙게 생각하세요. 어떻게 돈을, 주식을 요구할 수 있어요?" "나는 찬식 씨가 아니에요, 다른 사람들 사정은 모르겠고, 누가 날 어떻게 생각하든 관심없어요."그는 말을 마친 뒤 옆에 서 있는 집사에게 눈짓했다."손님을 내보내.""네."집사의 대답에, 심청하는 일어서서 조급하게 말했다. "아주버님, 그렇게 말씀하시지 마세요. 형제들끼리 어떻게 이렇게 매정하게 굴어요? 이 일을 언론에 알리면 어떻게 될지 저도 기대되네요, 아마 언론도 이 일에 엄청난 관심을 둘 것 같거든요!"소찬식의 표정은 신경질적으로 굳어졌다, 눈빛이 차갑고 어둡게 변했다.공기 안에는 침묵이 깔렸다.소은정은 갑작스럽게 직감했다. 심청하가 예전과는 분위기가 많이 달라진 것을 눈치챘다.하지만 그들은 타협할 수 없었다. 한 푼이라도 더 주면, 그녀는 주제 파악을 못 하고 더 달라고 요구할 것이다.그녀는 절대로 이번 한
심청하의 얼굴이 새파랗게 변했다."다 해봐야죠, 우선 믿을 만한 변호사를 찾아서 형량부터 줄여줘요."옆에서 듣고 있던 소은정이 참지 못하고 가볍게 웃으며 소리를 냈다.소은정이 입을 열었다."마침 잘 오셨어요, 우리도 지금 삼촌을 어떻게 구할지 토론하고 있었거든요!"심청하는 의아한 눈빛으로 소은정을 쳐다보았다. "그러면... 어떤 방법을 논의했는데?"전동하는 멋도 모르고 웃었다. 그는 소은정의 대답을 기다렸다.소은정은 청량한 목소리로 한숨을 쉬었다."사실 우리가 변호사를 찾아서 물어봤어요. 판결이 심하게 나면, 사형이 나올 수도 있다고 하더라고요, 어쨌든 두 사람을 죽인 거니까.그래도 방법이 있어요, 둘째 삼촌은 그때 혼인 상태였잖아요?법정에 나서서 전부 둘째 삼촌이 한 게 아니라고 증언하면 돼요. 삼촌은 줄곧 숙모랑 함께 있었고, 그런 일을 꾸밀 시간적 여유도 없었다고!"심청하는 갑자기 얼굴이 하얗게 질리더니 충격을 받은 표정으로 일어섰다."너... 나보고 거짓 증언을 하라는 거야, 말이 되니? 그거야말로 불법이야!"소은정은 차가운 눈빛으로 비웃었다."불법이라는 것도 알고 계셨네요? 근데 왜 저희 아버지한테 당당하게 그런 짓을 요구하는 거예요?"심청하는 그제야 자신이 소은정에게 당했다는 것을 깨달았다.화가 난 그녀의 얼굴이 붉어졌다."은정아, 너 말 이상하게 하는 구나, 내가 마음이 너무 급해서 나온 말을 꼬투리 잡는 거니? 그리고 너희 삼촌 아직 유죄 판결도 나지 않았어. 그러니까 우리가 조금 더 노력하면 돼."소은정은 눈썹을 찌푸렸다."그럼 혼자 잘 해보세요! 우린 응원이나 하고 있을게요!""너 지금 뭐하자는 거니?" 심청하는 화를 내며 소찬식을 바라보았다."진짜 이렇게 내버려두실 거예요?"소찬식의 눈빛이 어둡게 깔렸다."자기가 한 일에 대가를 치러야 하겠죠, 저희는 아무런 상관도 하지 않을 겁니다. 그러니 제수씨도 저희를 그만 찾아오세요."심청하는 소찬식의 태도가 이렇게 차갑고 딱딱할 줄은 몰랐다.그녀는 잠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