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충 메이크업도 지우고 캐주얼한 옷으로 갈아입은 두 사람이 본가로 향했다.집으로 들어가 보니 소찬식은 여전히 화가 잔뜩 난 표정이었다. 게다가 소은정은 돌아오지 않는 걸 보고 표정이 더 일그러졌다.집사가 조심스럽게 두 사람을 맞이했다.“은해 도련님께서는 하늘 씨한테 가셨습니다. 지금 회장님 기분이 많이 언짢으세요.”한숨과 함께 고개를 끄덕인 소은호가 한시연과 함께 거실로 향했다.“왜 너희들뿐이야?”“왜요? 싫으세요? 그럼 갈까요?”망설임없이 한시연의 손을 잡고 밖으로 나가려는 아들의 모습에 소찬식은 코웃음을 치다 풀어진 눈빛으로 한시연을 바라보았다.“아가, 너한테 화내는 거 아니다. 오늘 밤, 너무 많은 일이 있었어... 이렇게 좋은 날 내가 많이 미안해.”“아니에요. 그런 말씀 마세요, 아버님. 그냥 약혼식일 뿐이고 저도 이제 이 집안 가족이잖아요. 무슨 일 생기면 함께 이겨내는 게 맞죠.”한시연이 다급하게 고개를 저었다.“그래. 너희들 결혼 선물로는 내가 소유하고 있는 섬들 중 하나를 줄 테니 아무거나 골라...”소찬식의 덤덤한 말에 한시연의 미소가 어색하게 굳었다.소씨 일가가 재벌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였나 싶어 살짝 당황스러웠다.아가씨도 섬 모으는 걸 좋아한다더니 아버님한테서 배운 건가?멍하니 서 있는 한시연의 모습에 소은호가 다가가 그녀의 어깨를 툭 건드렸다.“얼른 아빠한테 고맙다고 해야지.”“감사합니다. 아버님.”앞으로도 이런 상황에 익숙해져야 하나...한시연이 소찬식의 재력에 감탄하고 있을 무렵, 소찬식은 소은호를 노려보았다.“은정이는 왜 안 왔어?”“전동하 대표 만나러 갔습니다.”아들의 덤덤하지만 솔직한 대답에 소찬식의 얼굴이 일그러졌다.“뭐? 그 살인자한테 가는 걸 그냥 두고 봤다고? 네가 그러고도 오빠야!”지금 당장이라도 소은정에게 달려갈 것 같은 기세에 소은호가 단호한 말투로 말했다.“아빠, 3년 전에도 지금과 비슷한 일이 있었죠. 그때 억지로 은정이를 말렸다가 무슨 일이 일어났었는지 잊
3월 중순이었지만 아직 날씨는 쌀쌀했다.게다가 밤이 되니 한기가 얇디얇은 드레스 차림의 소은정의 뼛속까지 스며드는 듯했다.다행히 차에 예비용으로 보관해 둔 양털 재킷이라도 있어도 다행이었다.급한대로 걸친 옷이었지만 드레스와도 어울리고 그녀의 가녀린 몸매를 더 부각시켜주었다.잠시 후, 빠르게 달려 호텔 앞에 도착한 소은정은 빠른 걸음으로 엘리베이터에 탑승해 전기섭이 묵고 있는 17층에 도착했다.하지만 17층 호텔 복도에 1m마다 보디가드들이 줄을 지어 서 있는 모습에 소은정은 단호한 발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이때 그녀와 가장 가까이 서 있던 경호원이 다가와 팔을 뻗었다.“이층은 들어오시면 안 됩니다.”“전 대표님한테 전하세요. 소은정이 만나고 싶어 한다고.”무슨 말인가 싶어 소은정을 내쫓으려던 경호원었지만 옷도 화려하고 포스도 남다른 모습이 차라리 대표님께 보고드리는 게 낫겠다 싶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그 사이 소은정은 호텔을 둘러보았다.상황을 보아하니 17층 전체를 렌트한 듯 싶었다.얼마나 적이 많으면 이렇게까지 한대...잠시 후, 경호원이 방금 전보다 훨씬 더 공손한 태도로 고개를 숙였다.“소은정 대표님, 안으로 모시겠습니다.”고개를 끄덕인 소은정은 경호원의 안내를 받아 드디어 전기섭의 방 앞에 도착했다.경호원이 노크하고 바로 누군가 문을 열었다.방금 전 샤워를 마쳤는지 전기섭은 가운 차림에 머리도 젖어있고 얼굴도 살짝 달아오른 모습이었다.곧 40을 바라보는 나이임에도 완벽한 피부와 헐렁한 가운 사이로 보이는 쭉 뻗은 쇄골과 완벽한 복근...다른 남자였다면 감탄했을지 모르지만 왠지 이 순간 소은정은 전기섭이 더 역겹게 느껴질 뿐이었다.경호원이 눈치껏 자리를 뜨고 전기섭이 미소를 지었다.“아, 죄송합니다. 샤워 중이라 차림이 변변치 않네요.”“아니에요. 제가 쉬시는 데 방해한 건데 제가 더 죄송하죠.”소은정은 억지 미소라도 짓기 위해 입꼬리를 올렸다.비록 호텔방으로 발을 들이고 싶지 않았지만 복도에 서 있는 경호원
눈썹을 치켜세운 소은정은 침묵을 지켰다.당연하지. 아무 희생없이 어디서 먹튀를 하려고.전기섭, 당신한테 그럴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해?잠시 후, 꼰 다리 위에 손을 포개 올려놓은 전기섭이 뜬금없이 물었다.“동하가 소은정 대표님을 좋아한다 들었는데. 그 마음 받아주셨습니까?”“갑자기 그건 왜 물으시죠?”소은정이 눈썹을 치켜세웠다.“그냥 단순한 호기심이랄까요. 미국에 있었지만 소은정 대표님의 미모와 뛰어난 능력에 대해서는 익히 들어 알고 있습니다. 동하도 평소에는 나름 번듯한 모습으로 연기하고 있잖아요. 그 모습에 대표님이 속지는 않았을까... 궁금해서요.”흥미롭다는 전기섭의 표정에 고개를 살짝 숙인 소은정이 미소를 지었다.“대표님, 제가 연인이라 부르는 사람은 아주 많답니다. 그 중에 90%는 배우죠.”지금까지 수많은 남자들과 스캔들이 났었던 그녀다.지금 이 상황에서 그녀와 전동하의 관계가 밝혀진다면 전기섭이 어떻게 나올지 모르니 일단은 숨기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소은정의 애매모호한 대답에 전기섭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얼굴도 몸매도 나쁘지 않고... 고고한 분위기가 인상적이었는데. 사생활은 문란한 여자였나?전동하... 너도 여자 보는 눈은 꽝이구나.순간 전기섭의 미소가 더 환해졌다.“나름 그쪽으로는 고수셨군요. 동하한테 안 넘어가신 걸 보면.”“저도 궁금한 게 하나 있습니다. 오늘 식장에 온 하객들은 전부 저희 CCTV 영상 범위 안에서 움직였어요. 하지만 대표님과 전동하 대표의 아들인 마이크만은 CCTV는 물론이고 현장에 도착한 그 누구도 발견하지 못했죠. 그 이유를 알 수 있을까요?”전기섭의 표정에서 뭔가라도 잡아내기 위해 소은정이 눈에 힘을 주었다.하지만 전기섭은 깜짝 놀란 듯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네? 마이크도 갔었나요? 올 때도 갈 때도 급하게 움직이다 보니 마이크는 저도 못 본 것 같은데요.”순간 소은정의 표정이 어두워졌다.거짓말... 눈은 재밌다는 미소를 짓고 있으면서 입은 놀라는 척하는 걸 보면 분명
소은정의 말에 전기섭의 표정이 살짝 어두워졌다.“동하 아들한테 왜 그렇게까지 신경 쓰시는 겁니까?”“그건 내 맘입니다. 그 이유까지 설명해야 하나요?”소은정이 고고한 눈빛으로 전동하를 내려다보고 그 차가운 표정을 바라보던 전기섭이 피식 웃었다.재밌네... 귀하게 자란 부잣집 아가씨다워. 저렇게 당당한 걸 보니 전동하와는 아무 사이가 아닌 게 분명하고... 마이크 그 자식은 워낙 아양을 잘 떠니까 신경이 쓰일 수도... 그런데 그런 애송이한테 푹 빠질 정도면 듣던 것처럼 그렇게 똑똑한 건 아닌가 봐?전동하가 미소를 지으며 양팔을 벌리자 가운이 살짝 풀리며 가슴 근육이 더 많이 드러났다.나름 매혹적인 눈빛으로 소은정을 훑어보던 전기섭이 말했다.“제가 괜한 소리를 했네요. 도움이 필요하면 제가 도와드릴 수도 있습니다.”“아니요. 서로 말이 안 통하는 것 같으니 이만 가보겠습니다.”윽, 느끼해.소은정이 단호하게 고개를 돌렸다.“잠깐만요. 제 방에 들어온 이상 마음대로 나가실 수 없을 겁니다.”“그게 무슨 소리죠?”“제게 더 좋은 제안이 있습니다. 더 큰 이익을 도모할 수 있는 제안이요.”전기섭의 눈동자가 차갑게 빛났다.“뭔데요?”벌떡 일어난 전기섭이 나른한 목소리로 대답했다.“저와 결혼하신다면 전인그룹 전체가 은정씨께 되는 겁니다. 이 작은 대한민국을 벗어나 미국에서도 마음껏 움직일 수 있을 거예요.”뭐야? 농담하는 건 같지 않고 무슨 꿍꿍이지.소은정이 미간을 찌푸리자 전기섭이 의기양양한 미소를 지었다.“아시겠지만 전 저희 가문 후계자입니다. 이제 곧 전인그룹 전체가 제 게 된다는 뜻이죠. 미국 재계는 물론이고 정계까지 진출할 수 있는 아주 좋은 기회죠.”“지금 뭐 좀 오해하시는 것 같은데... 전 그쪽한테 관심없는데요?”소은정이 헛웃음을 터트렸다.“물론 그러시겠죠. 하지만 이건 정략결혼 아닙니까? 결혼이라는 법적 관계로 이어진 또 다른 형태의 비즈니스죠. 결혼 뒤에는 서로 하고 싶은 대로 살면 되는 겁니다. 수많은 여자들이
여자에게 이렇게까지 무시당한 건 처음이라 전기섭은 오기가 차오르기 시작했다.이를 꽉 깨문 전기섭이 이를 악물더니 차갑게 웃었다.“그래요? 조심 안 하면 어떻게 되는지 어디 한 번 볼까요...”전기섭이 그녀의 얼굴을 향해 손을 뻗었지만 소은정이 차갑게 그 손을 쳐냈다.매서운 눈초리로 전기섭을 노려보던 소은정이 그의 따귀를 날리려던 그때...나름 호신술 같은 걸 배웠는지 전기섭 역시 그녀의 손을 쳐내더니 바로 그녀의 왼쪽 어깨를 제압하려 했다.하지만 소은정이 살짝 몸을 비틀면서 허탕을 친 전기섭의 얼굴이 점점 일그러지더니 바로 다시 그녀에게로 덮쳐들었다.하지만 소은정의 손목이 잡히려던 순간, 그녀가 또다시 민첩하게 몸을 피하고 중심을 잃고 비틀거리는 전기섭의 정강이를 거세게 걷어찼다.몰아치는 고통에 전기섭이 테이블 위로 넘어지고 화병이 바닥으로 떨어지며 쨍그랑 소리를 냈다.소은정은 전기섭이 넘어진 틈을 타 업어치기라도 하기 위해 앞으로 다가갔지만 밖에서 소란이 일었다.뭐야? 경호원들이 소리를 듣고 쳐들어 오려는 건가?테이블 모서리에 가슴을 부딪히고 화병 조각에 머리까지 긁힌 전기섭은 비명 소리를 지를 기운마저 나지 않았다.“소은정 씨, 내가 당신을 과소평가 했나 보군요. 두고 봐요...”하지만 그가 말을 마치기 전에 문이 벌컥 열렸다.고개를 돌린 소은정이 빠르게 전기섭 쪽으로 살짝 몸을 비틀었다.경호원들이 들어온 거라면 전기섭을 인질로 잡아야 무사히 벗어날 수 있을 테니까.하지만 안으로 들어온건 경호원이 아니라 전동하였다.눈도 벌겋게 충혈되고 얼굴이 일그러진 전동하의 깔끔하던 셔츠가 거칠게 흐트러져 있었다.방안에 펼쳐진 광경에 전동하의 표정이 차갑게 굳었다.“저 자식이... 무슨 짓이라도 한 겁니까?”“아니요. 지금 해결 중이에요.”소은정이 담담한 목소리로 대답했다.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전동하가 눈앞에 나타난 순간 조금이나 불안했던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전동하의 등장에 전기섭 또한 당황하기 시작했다.“하, 잡종 새
깜짝 놀란 소은정이 움찔했지만 전동하의 목소리는 아닌 것 같아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한편, 스위트룸.전동하는 전기섭을 바닥에 제압한 채, 한손으로는 그의 멱살을 잡고 다른 한손으로는 그의 얼굴을 세게 내리쳤다.몇 번의 강타가 이어지고 전기섭의 얼굴은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피투성이로 되어 버렸다.피가 코와 입으로 흘러내리고 전기섭은 살려달라는 애원도, 네까짓 게 감히 날 때리냐는 욕설도 내뱉지 못했다.거침없이 내리치는 주먹에 전기섭이 거의 의식을 잃어갈 때쯤에야 전동하는 그의 멱살을 풀어주었다.바로 전기섭의 옆에 쭈그리고 앉은 전동하가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내 아들 어디에 숨겼어?”지옥에서 도망친 듯한 악귀와도 같은 무시무시한 목소리였다.죽은 듯 꼼짝도 하지 않던 전기섭이 기괴한 웃음소리를 내뱉었다. 비록 겨우 숨만 붙어있는 지경이었지만 인질이 있는 이상 승산은 있다고 생각했으니까.미친 사람처럼 웃는 삼촌을 전기섭은 조용히 내려다 보았다.잔뜩 부은 눈을 천천히 뜬 전기섭이 가소롭다는 듯 웃었다.“누가 보면 그 자식이 정말 네 아들이라도 되는 줄 알겠어? 설령 그 아이가 전씨 성을 따른다 해도 너처럼 영원히 우리 가문의 일원으로 인정받지 못할 거야. 큭큭...”껄껄 웃는 전기섭의 피 섞인 침이 그대로 흘러내렸다.이때 확 다가선 전동하가 매서운 시선으로 다시 전기섭을 노려보았다.“그깟 가문 돌아오라고 애원해도 안 돌아갈 거니까 걱정하지 마. 마이크를 데리고 집을 떠난 건 내 마지막 타협이었어. 다들 잘 살 수 있었잖아. 그런데 또 이렇게 약속을 어겨?”전동하의 눈동자에 핏빛 살기가 서렸다.“잘 살아?”전동하가 코웃음을 쳤다.“네가 운영하고 있는 ZH 투자의 규모가 우리 전인그룹을 넘어서고 있어. 다들 네가 떠난 게 아쉽다는 것처럼 말하더라? 내가 네 것이었던 자리를 빼앗은 것처럼? 너 따위가 감히...”죽일 듯 전동하를 노려보는 전기섭의 눈에는 질투로 가득했다.“마이크 그 잡종을 데리고 한국으로 와서 소은정에게 접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전동하가 전광석화의 속도로 그의 오른쪽 얼굴을 강타했다.뚫린 입이라고 함부로 말하지 마...전동하가 차가운 얼굴로 일어나더니 잔뜩 찡그린 얼굴로 손을 털어냈다.또 한 방 맞은 전기섭 역시 맥없이 축 늘어져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네가 무슨 자격으로 은정 씨에 대해 함부로 말해! 전기섭, 네가 어떤 인간인지는 내가 아주 잘 알아. 내 아들 털끝 하나라도 건드리면 그땐 정말 죽여버릴 거니까 알아서 해.”단호하게 돌아서 방문을 연 전동하가 소은정과 시선을 마주쳤다.하지만 전동하는 곧 고개를 돌려 경호원들에게 말했다.“끌고 나가.”마이크를 찾기 전까진... 차라리 죽여달라고 애원할 정도로 괴롭혀 주겠어.고개를 끄덕인 경호원이 시신처럼 축 늘어진 전기섭을 끌고 나왔다.이미 완벽하게 제압당한 전기섭의 경호원들은 반항 한 번 못하고 주인이 끌려나가는 걸 멀뚱멀뚱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소은정의 곁으로 다가간 전동하가 드디어 익숙한 부드러운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이만 가죠?”소은정의 코트 밑자락 아래로 드레스가 살짝 보였다.식장에서 옷도 못 갈아입고 바로 나왔나 보네...하지만 다시 고개를 든 소은정의 얼굴은 차갑기만 했다.“동하 씨, 당신에 과거에 대한 일 나한테 평생 숨길 셈이었죠?”때가 되면? 그 때가 언제인데? 가능만 하다면 평생 비밀로 했을 거야.방금 전, 복도에서 잠깐씩 흘러나오는 목소리와 비명소리를 들으며 소은정은 왠지 모르게 힘이 쭉 빠지는 기분이 들었다.소은정의 맑은 눈동자가 전동하의 얼굴 구석구석을 스쳤다.처음 만났을 때도 전동하는 이런 모습이었다. 단정하고 친절하고 항상 그녀만 바라볼 것만 같은 그런 사람.오늘 그의 어두운 면을 확인한 순간, 숨이 턱 막히는 기분이 들었다.그녀가 지금까지 봐왔던 전동하가 진짜 그의 모습이 맞긴 한 걸까? 연기로 만들어낸 모습일까? 아마 평생 그의 어두운 과거와 비밀에 닿을 수 없다는 생각에 기분이 바닥끝까지 가라앉았다.“마이크를 찾는 건 저
호텔을 나서고 뒷좌석 문을 거칠게 연 전동하가 소은정을 안으로 밀어넣더니 바로 그녀의 옆에 앉았다.깜짝 놀란 소은정이 다급하게 안쪽으로 자리를 옮겼다.갑작스러운 변화에 소은정이 당황하던 그때 전동하의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출발하죠.”차량이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지만 전동하는 여전히 그녀의 손을 꼭 잡고 있었다.잠시 후, 두 사람 모두 감정을 추스르고 소은정이 살짝 손을 빼내려 했지만 전동하가 다시 힘을 꽉 주었다.고개를 돌린 전동하의 부드러운 눈동자에는 억울함과 초조함으로 가득했다.“은정 씨, 뭐가 궁금해요? 내가 다 알려줄게요. 네?”“아니요. 이젠 궁금하지 않아요.”어쩌면 전기섭이 이야기에 뼈와 살을 붙여 더 심각하게 말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걸 감안한다 해도 이 모든 사건에 전동하가 아무런 연관도 없다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그녀를 만나기 전 20여 년의 시간에 대한 이해가 백지장인 상태에서 그녀를 향한 미소만 바라보고 바보처럼 고개를 끄덕일 수는 없었다.고개를 푹 떨군 전동하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헤어질 마음이 들었다 해도 변명할 기회 한 번쯤은 줄 수 있는 거잖아요? 그리고 전기섭 그 자식이 한 말 사실이 아니에요!”전동하가 먼저 전기섭에 대해 언급한 건 이번이 처음이었기에 소은정이 입술을 꽉 깨물었다.방금 전 충동적이긴 했지만 내 입장에서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해. 하지만 지금은 일단 마이크를 찾는 게 가장 중요해. 다른 생각은 하지 말자.소은정이 안심하라는 듯 살짝 웃어 보였다.“그래요. 어쨌든 일단 마이크부터 찾아요. 그때 변명이든 해명이든 할 기회를 줄 테니까요.”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쉰 전동하가 그녀의 손을 살짝 풀어주었다.빨갛게 손자국이 남은 그녀의 손을 어루만지던 전동하가 말했다.“은정 씨, 난 이렇게 끝낼 수 없어요. 내 과거에 대해 전부 듣고나서 은정 씨가 받아들일 수 없다면 그땐 기꺼이 떠날게요.”입에 올리기조차 싶지 않을 정도로 엉망인 과거에 전동하의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