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썹을 치켜세운 소은정은 침묵을 지켰다.당연하지. 아무 희생없이 어디서 먹튀를 하려고.전기섭, 당신한테 그럴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해?잠시 후, 꼰 다리 위에 손을 포개 올려놓은 전기섭이 뜬금없이 물었다.“동하가 소은정 대표님을 좋아한다 들었는데. 그 마음 받아주셨습니까?”“갑자기 그건 왜 물으시죠?”소은정이 눈썹을 치켜세웠다.“그냥 단순한 호기심이랄까요. 미국에 있었지만 소은정 대표님의 미모와 뛰어난 능력에 대해서는 익히 들어 알고 있습니다. 동하도 평소에는 나름 번듯한 모습으로 연기하고 있잖아요. 그 모습에 대표님이 속지는 않았을까... 궁금해서요.”흥미롭다는 전기섭의 표정에 고개를 살짝 숙인 소은정이 미소를 지었다.“대표님, 제가 연인이라 부르는 사람은 아주 많답니다. 그 중에 90%는 배우죠.”지금까지 수많은 남자들과 스캔들이 났었던 그녀다.지금 이 상황에서 그녀와 전동하의 관계가 밝혀진다면 전기섭이 어떻게 나올지 모르니 일단은 숨기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소은정의 애매모호한 대답에 전기섭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얼굴도 몸매도 나쁘지 않고... 고고한 분위기가 인상적이었는데. 사생활은 문란한 여자였나?전동하... 너도 여자 보는 눈은 꽝이구나.순간 전기섭의 미소가 더 환해졌다.“나름 그쪽으로는 고수셨군요. 동하한테 안 넘어가신 걸 보면.”“저도 궁금한 게 하나 있습니다. 오늘 식장에 온 하객들은 전부 저희 CCTV 영상 범위 안에서 움직였어요. 하지만 대표님과 전동하 대표의 아들인 마이크만은 CCTV는 물론이고 현장에 도착한 그 누구도 발견하지 못했죠. 그 이유를 알 수 있을까요?”전기섭의 표정에서 뭔가라도 잡아내기 위해 소은정이 눈에 힘을 주었다.하지만 전기섭은 깜짝 놀란 듯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네? 마이크도 갔었나요? 올 때도 갈 때도 급하게 움직이다 보니 마이크는 저도 못 본 것 같은데요.”순간 소은정의 표정이 어두워졌다.거짓말... 눈은 재밌다는 미소를 짓고 있으면서 입은 놀라는 척하는 걸 보면 분명
소은정의 말에 전기섭의 표정이 살짝 어두워졌다.“동하 아들한테 왜 그렇게까지 신경 쓰시는 겁니까?”“그건 내 맘입니다. 그 이유까지 설명해야 하나요?”소은정이 고고한 눈빛으로 전동하를 내려다보고 그 차가운 표정을 바라보던 전기섭이 피식 웃었다.재밌네... 귀하게 자란 부잣집 아가씨다워. 저렇게 당당한 걸 보니 전동하와는 아무 사이가 아닌 게 분명하고... 마이크 그 자식은 워낙 아양을 잘 떠니까 신경이 쓰일 수도... 그런데 그런 애송이한테 푹 빠질 정도면 듣던 것처럼 그렇게 똑똑한 건 아닌가 봐?전동하가 미소를 지으며 양팔을 벌리자 가운이 살짝 풀리며 가슴 근육이 더 많이 드러났다.나름 매혹적인 눈빛으로 소은정을 훑어보던 전기섭이 말했다.“제가 괜한 소리를 했네요. 도움이 필요하면 제가 도와드릴 수도 있습니다.”“아니요. 서로 말이 안 통하는 것 같으니 이만 가보겠습니다.”윽, 느끼해.소은정이 단호하게 고개를 돌렸다.“잠깐만요. 제 방에 들어온 이상 마음대로 나가실 수 없을 겁니다.”“그게 무슨 소리죠?”“제게 더 좋은 제안이 있습니다. 더 큰 이익을 도모할 수 있는 제안이요.”전기섭의 눈동자가 차갑게 빛났다.“뭔데요?”벌떡 일어난 전기섭이 나른한 목소리로 대답했다.“저와 결혼하신다면 전인그룹 전체가 은정씨께 되는 겁니다. 이 작은 대한민국을 벗어나 미국에서도 마음껏 움직일 수 있을 거예요.”뭐야? 농담하는 건 같지 않고 무슨 꿍꿍이지.소은정이 미간을 찌푸리자 전기섭이 의기양양한 미소를 지었다.“아시겠지만 전 저희 가문 후계자입니다. 이제 곧 전인그룹 전체가 제 게 된다는 뜻이죠. 미국 재계는 물론이고 정계까지 진출할 수 있는 아주 좋은 기회죠.”“지금 뭐 좀 오해하시는 것 같은데... 전 그쪽한테 관심없는데요?”소은정이 헛웃음을 터트렸다.“물론 그러시겠죠. 하지만 이건 정략결혼 아닙니까? 결혼이라는 법적 관계로 이어진 또 다른 형태의 비즈니스죠. 결혼 뒤에는 서로 하고 싶은 대로 살면 되는 겁니다. 수많은 여자들이
여자에게 이렇게까지 무시당한 건 처음이라 전기섭은 오기가 차오르기 시작했다.이를 꽉 깨문 전기섭이 이를 악물더니 차갑게 웃었다.“그래요? 조심 안 하면 어떻게 되는지 어디 한 번 볼까요...”전기섭이 그녀의 얼굴을 향해 손을 뻗었지만 소은정이 차갑게 그 손을 쳐냈다.매서운 눈초리로 전기섭을 노려보던 소은정이 그의 따귀를 날리려던 그때...나름 호신술 같은 걸 배웠는지 전기섭 역시 그녀의 손을 쳐내더니 바로 그녀의 왼쪽 어깨를 제압하려 했다.하지만 소은정이 살짝 몸을 비틀면서 허탕을 친 전기섭의 얼굴이 점점 일그러지더니 바로 다시 그녀에게로 덮쳐들었다.하지만 소은정의 손목이 잡히려던 순간, 그녀가 또다시 민첩하게 몸을 피하고 중심을 잃고 비틀거리는 전기섭의 정강이를 거세게 걷어찼다.몰아치는 고통에 전기섭이 테이블 위로 넘어지고 화병이 바닥으로 떨어지며 쨍그랑 소리를 냈다.소은정은 전기섭이 넘어진 틈을 타 업어치기라도 하기 위해 앞으로 다가갔지만 밖에서 소란이 일었다.뭐야? 경호원들이 소리를 듣고 쳐들어 오려는 건가?테이블 모서리에 가슴을 부딪히고 화병 조각에 머리까지 긁힌 전기섭은 비명 소리를 지를 기운마저 나지 않았다.“소은정 씨, 내가 당신을 과소평가 했나 보군요. 두고 봐요...”하지만 그가 말을 마치기 전에 문이 벌컥 열렸다.고개를 돌린 소은정이 빠르게 전기섭 쪽으로 살짝 몸을 비틀었다.경호원들이 들어온 거라면 전기섭을 인질로 잡아야 무사히 벗어날 수 있을 테니까.하지만 안으로 들어온건 경호원이 아니라 전동하였다.눈도 벌겋게 충혈되고 얼굴이 일그러진 전동하의 깔끔하던 셔츠가 거칠게 흐트러져 있었다.방안에 펼쳐진 광경에 전동하의 표정이 차갑게 굳었다.“저 자식이... 무슨 짓이라도 한 겁니까?”“아니요. 지금 해결 중이에요.”소은정이 담담한 목소리로 대답했다.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전동하가 눈앞에 나타난 순간 조금이나 불안했던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전동하의 등장에 전기섭 또한 당황하기 시작했다.“하, 잡종 새
깜짝 놀란 소은정이 움찔했지만 전동하의 목소리는 아닌 것 같아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한편, 스위트룸.전동하는 전기섭을 바닥에 제압한 채, 한손으로는 그의 멱살을 잡고 다른 한손으로는 그의 얼굴을 세게 내리쳤다.몇 번의 강타가 이어지고 전기섭의 얼굴은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피투성이로 되어 버렸다.피가 코와 입으로 흘러내리고 전기섭은 살려달라는 애원도, 네까짓 게 감히 날 때리냐는 욕설도 내뱉지 못했다.거침없이 내리치는 주먹에 전기섭이 거의 의식을 잃어갈 때쯤에야 전동하는 그의 멱살을 풀어주었다.바로 전기섭의 옆에 쭈그리고 앉은 전동하가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내 아들 어디에 숨겼어?”지옥에서 도망친 듯한 악귀와도 같은 무시무시한 목소리였다.죽은 듯 꼼짝도 하지 않던 전기섭이 기괴한 웃음소리를 내뱉었다. 비록 겨우 숨만 붙어있는 지경이었지만 인질이 있는 이상 승산은 있다고 생각했으니까.미친 사람처럼 웃는 삼촌을 전기섭은 조용히 내려다 보았다.잔뜩 부은 눈을 천천히 뜬 전기섭이 가소롭다는 듯 웃었다.“누가 보면 그 자식이 정말 네 아들이라도 되는 줄 알겠어? 설령 그 아이가 전씨 성을 따른다 해도 너처럼 영원히 우리 가문의 일원으로 인정받지 못할 거야. 큭큭...”껄껄 웃는 전기섭의 피 섞인 침이 그대로 흘러내렸다.이때 확 다가선 전동하가 매서운 시선으로 다시 전기섭을 노려보았다.“그깟 가문 돌아오라고 애원해도 안 돌아갈 거니까 걱정하지 마. 마이크를 데리고 집을 떠난 건 내 마지막 타협이었어. 다들 잘 살 수 있었잖아. 그런데 또 이렇게 약속을 어겨?”전동하의 눈동자에 핏빛 살기가 서렸다.“잘 살아?”전동하가 코웃음을 쳤다.“네가 운영하고 있는 ZH 투자의 규모가 우리 전인그룹을 넘어서고 있어. 다들 네가 떠난 게 아쉽다는 것처럼 말하더라? 내가 네 것이었던 자리를 빼앗은 것처럼? 너 따위가 감히...”죽일 듯 전동하를 노려보는 전기섭의 눈에는 질투로 가득했다.“마이크 그 잡종을 데리고 한국으로 와서 소은정에게 접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전동하가 전광석화의 속도로 그의 오른쪽 얼굴을 강타했다.뚫린 입이라고 함부로 말하지 마...전동하가 차가운 얼굴로 일어나더니 잔뜩 찡그린 얼굴로 손을 털어냈다.또 한 방 맞은 전기섭 역시 맥없이 축 늘어져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네가 무슨 자격으로 은정 씨에 대해 함부로 말해! 전기섭, 네가 어떤 인간인지는 내가 아주 잘 알아. 내 아들 털끝 하나라도 건드리면 그땐 정말 죽여버릴 거니까 알아서 해.”단호하게 돌아서 방문을 연 전동하가 소은정과 시선을 마주쳤다.하지만 전동하는 곧 고개를 돌려 경호원들에게 말했다.“끌고 나가.”마이크를 찾기 전까진... 차라리 죽여달라고 애원할 정도로 괴롭혀 주겠어.고개를 끄덕인 경호원이 시신처럼 축 늘어진 전기섭을 끌고 나왔다.이미 완벽하게 제압당한 전기섭의 경호원들은 반항 한 번 못하고 주인이 끌려나가는 걸 멀뚱멀뚱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소은정의 곁으로 다가간 전동하가 드디어 익숙한 부드러운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이만 가죠?”소은정의 코트 밑자락 아래로 드레스가 살짝 보였다.식장에서 옷도 못 갈아입고 바로 나왔나 보네...하지만 다시 고개를 든 소은정의 얼굴은 차갑기만 했다.“동하 씨, 당신에 과거에 대한 일 나한테 평생 숨길 셈이었죠?”때가 되면? 그 때가 언제인데? 가능만 하다면 평생 비밀로 했을 거야.방금 전, 복도에서 잠깐씩 흘러나오는 목소리와 비명소리를 들으며 소은정은 왠지 모르게 힘이 쭉 빠지는 기분이 들었다.소은정의 맑은 눈동자가 전동하의 얼굴 구석구석을 스쳤다.처음 만났을 때도 전동하는 이런 모습이었다. 단정하고 친절하고 항상 그녀만 바라볼 것만 같은 그런 사람.오늘 그의 어두운 면을 확인한 순간, 숨이 턱 막히는 기분이 들었다.그녀가 지금까지 봐왔던 전동하가 진짜 그의 모습이 맞긴 한 걸까? 연기로 만들어낸 모습일까? 아마 평생 그의 어두운 과거와 비밀에 닿을 수 없다는 생각에 기분이 바닥끝까지 가라앉았다.“마이크를 찾는 건 저
호텔을 나서고 뒷좌석 문을 거칠게 연 전동하가 소은정을 안으로 밀어넣더니 바로 그녀의 옆에 앉았다.깜짝 놀란 소은정이 다급하게 안쪽으로 자리를 옮겼다.갑작스러운 변화에 소은정이 당황하던 그때 전동하의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출발하죠.”차량이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지만 전동하는 여전히 그녀의 손을 꼭 잡고 있었다.잠시 후, 두 사람 모두 감정을 추스르고 소은정이 살짝 손을 빼내려 했지만 전동하가 다시 힘을 꽉 주었다.고개를 돌린 전동하의 부드러운 눈동자에는 억울함과 초조함으로 가득했다.“은정 씨, 뭐가 궁금해요? 내가 다 알려줄게요. 네?”“아니요. 이젠 궁금하지 않아요.”어쩌면 전기섭이 이야기에 뼈와 살을 붙여 더 심각하게 말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걸 감안한다 해도 이 모든 사건에 전동하가 아무런 연관도 없다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그녀를 만나기 전 20여 년의 시간에 대한 이해가 백지장인 상태에서 그녀를 향한 미소만 바라보고 바보처럼 고개를 끄덕일 수는 없었다.고개를 푹 떨군 전동하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헤어질 마음이 들었다 해도 변명할 기회 한 번쯤은 줄 수 있는 거잖아요? 그리고 전기섭 그 자식이 한 말 사실이 아니에요!”전동하가 먼저 전기섭에 대해 언급한 건 이번이 처음이었기에 소은정이 입술을 꽉 깨물었다.방금 전 충동적이긴 했지만 내 입장에서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해. 하지만 지금은 일단 마이크를 찾는 게 가장 중요해. 다른 생각은 하지 말자.소은정이 안심하라는 듯 살짝 웃어 보였다.“그래요. 어쨌든 일단 마이크부터 찾아요. 그때 변명이든 해명이든 할 기회를 줄 테니까요.”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쉰 전동하가 그녀의 손을 살짝 풀어주었다.빨갛게 손자국이 남은 그녀의 손을 어루만지던 전동하가 말했다.“은정 씨, 난 이렇게 끝낼 수 없어요. 내 과거에 대해 전부 듣고나서 은정 씨가 받아들일 수 없다면 그땐 기꺼이 떠날게요.”입에 올리기조차 싶지 않을 정도로 엉망인 과거에 전동하의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헉, 내가 언제 잠들었지?그녀를 향해 싱긋 미소 짓던 전동하가 차문을 닫고 운전석에 탔다.“집에 데려다줄게요. 마이크는... 아마 곧 찾을 수 있을 거예요.”소은정은 별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마이크가 걱정되긴 했지만 일단 씻고 옷을 갈아입는 게 나을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잠시 후, 오피스텔 앞에 도착한 소은정은 비틀거리며 엘리베이터에 탔다.비몽사몽한 상태로 욕조에 몸을 담그니 조금 정신이 맑아지는 듯했다.참, 어제 박수혁도 왔었지? 설마... 이 일에 박수혁도 연루되어 있는 걸까? 전화라도 해봐야겠어.소은정이 욕조에서 일어나려던 그때 거실에서 인기척이 들려왔다.누구지?소은정이 잔뜩 경계하던 그때, 전동하의 목소리가 욕실로 흘러들었다.“은정 씨, 내 목소리 들려요?”어? 동하 씨? 아직도 안 갔나?아까는 너무 졸려 뒤에 사람이 들어오는지도 몰랐던 소은정이었다.“네.”소은정의 대답에 전동하가 말을 이어갔다.“살다 보니까 정말 잊고 싶지만 영원히 잊을 수 없는 일도 생기더라고요. 전기섭이 한국에 온 건... 아마 내가 영원히 고통속에서 살아가길 바랐기 때문이었겠죠. 그런 의미에서 전기섭은 완벽하게 성공했어요.”부드럽던 전동하의 목소리가 조금 쉬어있었다.밤샘으로 피곤함 때문인지 끔찍한 과거에 대한 회상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다.이때 전동하가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은정 씨한테 말하지 않은 건... 은정 씨가 겁 먹고 도망갈까 봐 무서웠어요. 언젠가 은정 씨가 정말 나를 사랑하게 된다면 그때 말해 주려고 했어요. 그럼 적어도 바로 날 떠나진 않을 테니까.”전동하는 솔직하게 자신의 사심을 밝혔다.사랑으로 그녀를 묶어두는 게 전동하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었으니까.전동하가 거실 벽에 몸을 기댔다.굳이 이때 과거 이야기를 하는 이유도 단순했다. 이 이야기를 들었을 때 소은정이 충격을 먹거나 그를 혐오하게 될까 봐 두려웠다.그 눈빛을 바라보는 건 아마... 죽음보다 더 고통스러울 테니까.“엄마는 처음에 아버지가 유부남인 줄
전동하의 입가에 슬픈 미소가 걸렸다.끼익.문이 열리는 소리에 전동하가 고개를 들었다.머리가 잔뜩 젖은 채 목욕 가운을 걸치고 있는 소은정이 그의 앞에 서 있었다.조용히 그를 바라보는 소은정의 눈동자에는 안쓰러움으로 가득했다.왜 굳이 과거를 알고 싶다고 말했을까...소은정은 뒤늦게 죄책감이 밀려왔다.나 때문에... 그 고통스러운 기억들을 다시 꺼내게 만들었다.사뿐사뿐 전동하의 앞까지 걸어간 소은정이 손을 뻗어 그의 뺨을 만지작거렸다.“미안해요. 정말 잊고 싶은 기억이었을 텐데... 나 때문에 괜히.”진실은 본디 잔인한 법이야. 하지만 이렇게 불행했을 것이라곤 미처 예상치 못했어.붉은 눈시울로 소은정을 바라보던 전동하가 그녀를 와락 품에 끌어안았다.규칙적으로 들리는 심장소리마저 슬프게 느껴지고 소은정의 눈물이 뺨을 적셨다.“어떻게 이렇게 잘 자랐어요?”물질적으로 유복한 집안에서 사랑받고 자라지 못한 사생아가 엇나가는 건 너무나 쉬운 일이다. 그 주위에는 아이가 타락하길 바라는 못된 어른들로 가득할 테니까.하지만 전동하는 탈선하지도 가문의 권세에 의지하지도 않았다.힘들지만 자기 힘으로 모든 걸 이뤄냈고 마이크에게도 누구보다 좋은 아버지가 되고 있다.얼마나 강하면 이렇게 자랄 수 있을까?소은정의 어깨에 머리를 묻은 전동하가 소은정의 말을 되새겼다.그러게, 내가 어떻게 여기까지 왔더라 기억도 나지 않네...“어쩌면 당신한테 어울리는 사람이 되기 위해 그 동안 그렇게 열심히 살아왔는지 모르겠어요.”소은정의 존재는 그의 모든 인내와 노력에 의미를 부여해 주었다.이 세상의 더러운 것들과 어울리지 않는 순수하고 깨끗한 사람이었으니까.벌레들이 밝은 빛에 꼬이 듯 전동하도 그런 고결한 빛에 이끌려 소은정에게 다가갔을지도 모른다.살짝 훌쩍이던 소은정이 전동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그럼 이렇게 내 옆에 있어요. 영원히.”아마 전동하가 지금까지 보여준 친절함은 전부 가식이었다고 말했어도 소은정은 기꺼이 용서했을 것이다.그 정도 가면 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