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혁의 소개에 하연은 다급하게 인사했다.“아, 안녕하세요.”하연의 인사를 받은 성준은 싱긋 웃으며 상혁에게 말했다.“짜식, 능력 있네. 그런데 네 상처는 아무렇지도 않아 처치 좀 하면 끝날 일이야. 누가 보면 네가 큰 병 걸린 줄 알겠다?”“괜찮다니 다행이네요. 고마워요.”상혁이 괜찮니 그제야 안심이 됐다.그때, 성준이 거즈와 요오드를 들고 와 상혁의 상처를 치료하기 시작했다.“별거 아니에요. 다음번에는 안 다치게 조심해요.”이윽고 치료를 마치고 나니 하연을 보며 말했다.“됐어요. 치료 다 끝났으니 치료비는 저쪽 창구에서 지불하세요.”“네.”하연은 이내 대답하며 밖으로 걸어 나갔다.그때 성준이 하연의 뒷모습을 보며 농담조로 말했다.“부상혁, 내 기억이 맞다면 너 지금껏 최하연 씨 한 번도 잊지 못했지?”그 목소리는 마치 재밌는 일이라도 생긴 듯 흥분에 차 있었다.“너 연애 경험이 없어서 아직 여자 어떻게 꼬셔야 하는지 모르지? 연애는 이렇게 하는 게 아니야.”“혹시 좋은 방법이라도 있어?”상혁은 헛기침하며 조심스럽게 물었다.상혁이 이토록 겸손한 건 좀처럼 보기 힘든 모습이라 성준은 믿기 힘들다는 듯 말했다.“이거 이거, 내가 아는 그 대단하신 부상혁 도련님 맞아?”성준은 입꼬리를 비틀어 올리며 재밌다는 듯 웃어댔다.“괜찮아. 내가 있잖아. 내가 가르쳐 줄게. 연애는 말이지, 진심이 전달되어야 해. 물론 여자의 동정심도 이용해 주면 좋고. 그런데 내가 볼 때 하연 씨도 너 엄청 신경 쓰는 것 같던데. 힘내 봐. 그래야 나도 네 결혼 축하주 마시러 가지.”“...”병원에서 나온 상혁의 팔에는 붕대가 칭칭 감겨 있었다.분명 작은 상처였지만 성준은 작은 상처는 효과 없다며 기어코 붕대까지 감아줬다.상혁은 그게 오버라며 당장 풀려고 했지만 하연이 나서서 제지했다.“오빠, 상처 소독 이제 막 끝났는데 마구 움직이지 마요. 집에 가서 물에 닿지 않게 조심하고, 도움 필요한 일 있으면 비서 꼭 불러요.”그 순간 상혁은 동작을
“이미 FL 그룹과 협력하기로 했어. 초기에는 내가 직접 따라붙어야 할 것 같아.”“그럼 저도 함께 갈까요?”“그래. 준비하고 있어. 나중에 FL 그룹과 주요 팀원들도 함께 갈 거니까.”“네, 사장님. 바로 준비하겠습니다.”일 처리를 마친 뒤 하연은 상혁에게 문자를 보냈다. 그런데 그때, 미처 반응할 새도 없이 손에 쥐고 있던 핸드폰이 울리기 갑자기 울렸다.액정에서 번쩍이는 번호를 본 순간, 하연의 표정은 이내 굳어 버렸다.“최하연, 너 FL 그룹과 제휴를 맺었다며?”귓가에 서준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하연은 눈을 들어 창밖을 내다보았다.“소식 참 빠르네.”“정말 나 대신 그 자식을 선택하는 거야? HT 그룹과 협력하면 성공할 가능성이 더 크잖아. 안 그래?”“이제 돌이킬 수도 없는데 쓸데없는 말은 왜 해?”서준은 결과를 순순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명색이 한서준이 누구한테 이렇게 져본 적 있겠는가?“D시 프로젝트는 보기와 달라. 그렇게 쉬운 게 아니야. 만약 D시에 간다면 무조건 조심해야 해. 필요하면 HT 그룹이...”“필요 없어. DS 그룹에 가장 필요 없는 게 HT 그룹의 도움이야. 그럴 시간이 있으면 차라리 집안일이나 신경 써. 그러다 또 화를 당하지 말고. 안 그래?”하연이 뭘 말하는지 서준이 모를 리 없다.“걱정하지 마. 너를 해친 사람은 단 한 명도 그냥 놔두지 않을 테니까.”서준이 사뭇 진지한 말투로 말했지만 하연은 그저 피식 웃었다.“한씨 가문 일을 나한테 보고할 거 없어. 네 잡담 들어줄 흥미 없으니까.”말을 마친 하연은 곧바로 전화를 끊어버렸다.전화 건너편에 있던 서준은 핸드폰을 꽉 쥔 채 눈이 어두워졌다. 심지어 얼굴은 이미 잿빛이 되었다.그때 때마침 혜경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서준 씨, 괜찮아?”“나가!”싸늘한 표정으로 무섭게 내뱉은 한마디에 혜경은 흠칫 놀랐다.하지만 일부러 모른 체하며 애교 섞인 모습으로 다가왔다.“서준 씨, 무슨 일 있어? 나한테 말해. 내가 들어 줄게.”서준은 눈을 들
으리으리한 호텔 안에서 남녀의 신음 소리가 한참 동안 흘러나왔다.그렇게 한바탕 몸을 섞은 혜경은 침대 머리맡에 기대 담배 한 대를 입에 물었다.그러자 나체 상태의 도지환이 혜경을 품에 와락 끌어안으며 부드럽게 말했다.“한동안 못 봤더니 많이 죽었네? 감옥 생활이 고됐나 봐?”혜경은 담배 연기를 후 내뿜었다.“실없긴. 오늘 중요한 일이 있어 부른 거야.”“하하, 알지! 방금 건 중요한 일 아니야?”혜경은 어두운 눈으로 담배를 눌러 껐다.“한서준이 나를 의심하기 시작했어. 물론 아직은 아무런 증거도 찾지 못했지만.”지환은 혜경의 몸을 쓱 문지르며 입을 열었다.“증거도 없는데 겁낼 거 뭐 있어? 조심하면 되지.”혜경은 그런 지환의 손을 탁 쳐내더니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뭐가 됐든, 난 한씨 가문 사모님이 꼭 돼야겠어. 안 되더라도 최하연을 꼭 감옥에 처넣고 말 거야.”지환은 입꼬리를 씩 올리며 미소 짓더니 혜경의 턱을 들어 올렸다.“내 곁에 누워서 다른 놈을 생각하다니. 너무한 거 아니야? 애초에 그렇게 애썼는데도 한서준과 결혼하지 못했으면서, 아직 기회가 있다고 생각해?”그것만 생각하면 혜경은 화가 치밀었다.그렇게 애를 썼는데 서준의 마음을 얻기는커녕 오히려 자기 가문을 끌어들였으니.심지어 혜경의 할아버지는 아직도 빚을 갚으려고 일하고 있다.그 죄책감 때문에 혜경은 출소했으면서 가족을 만나러 가지 못하고 있고.“내가 인생 역전하려면 한서준과 결혼하는 방법밖에 없어.”“하하. 그럼 축하해.”너털웃음을 지을 뿐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는 지환을 보자, 혜경은 지환의 팔을 잡아당기며 애교 부렸다.“나 안 도와줄 거야?”“내가 어떻게 도와? 남녀 간의 일은 제삼자가 끼어들 수 없어.”“도와주지 못하는 거야? 도와주기 싫은 거야?”혜경은 직설적으로 되물었다. 지환이 어떤 사람인지 혜경이 모를 리 없다. 이에 바싹 자가가 지환의 뺨에 입을 맞췄다.“걱정하지 마. 난 한 사모님 신분만 필요한 거니까. 내 몸은 여전히 자기 거야.”
희망이 보이자 혜경은 눈을 반짝였다.“말해 봐. 혹시 무슨 좋은 수가 떠오른 거야?”지환은 그런 혜경을 제 아래에 가두더니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알고 싶으면 나 만족시켜 봐.”그 말이 떨어지기 바쁘게 실내에서 또다시 야릇한 소리가 흘러나왔다....다음 날.하연이 짐을 챙겨 출발하려 할 때, 하민에게서 연락이 왔다.“하연아, 너 D시에 간다면서?”‘역시 오빠한테는 뭐든 비밀로 할 수 없다니까.’하연은 속으로 중얼거리며 대답했다.“네, 상혁 오빠랑 같이 가요.”“D시에 내 친구가 있으니 무슨 일이 있으면 걔한테 도움받아.”“네, 알았어요. 저 어린애 아니에요. 걱정하지 마요.”그건 맞지만 하민은 여전히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정 실장도 같이 가?”“네, 회사 직원들은 따로 출발해서 아마 내일에야 만날 수 있을 거예요.”하민은 그제야 안심했다. 태훈과 상혁이 함께라면 너무 걱정할 필요는 없었으니까.하지만 여전히 당부하는 걸 잊지 않았다.“넌 어릴 때부터 독립심이 강하고 주관도 또렷하니 내가 간섭하지는 않겠는데, 밖에 나가면 첫째도 안전, 둘째도 안전이야. D시 치안이 좋지 않으니 내가 경호원 더 붙여 줄게, 꼭 안전에 주의해.”“알았어요.”하연은 말하면서 눈을 들어 멀지 않은 곳에서 저를 기다리는 상혁을 흘긋거렸다.“걱정하지 마세요. 상혁 오빠도 있으니 괜찮을 거예요. 이만 끊을게요.”전화를 끊은 하연은 이내 성큼성큼 상혁에게 다가갔다.“상혁 오빠!”상혁은 하연의 짐을 받아 비서에게 넘겨주고는 하연의 손을 잡고 전용기에 올라탔다.이윽고 5시간의 비행 끝에 두 사람은 무사히 D시 공항에 도착했다. 협력사 측에서 파견한 사람은 이미 현지 공항에서 두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다.때문에 VIP 게이트를 통해 나오자마자 두 사람은 사람들 속에서 [최 사장님, 부 대표님 D시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라는 팻말을 들고 있는 사람을 발견했다.하연은 얼른 다가가 유창한 영어로 상대와 인사했다.“안녕하세요, 혹시 HY 그룹에서 왔나요?
안나는 하연에게 싱긋 웃으며 인사하더니 이내 모든 신경을 상혁에게 쏟아부었다.“부 대표님이 여기까지 친히 오실 줄은 몰랐네요. 환영해요. 먼 길 오셔서 피곤할 텐데 호텔로 안내할게요.” 상혁은 상대의 태도에 눈이 어두워지더니 딱딱한 말투로 대답했다.“그럼 부탁드릴게요.”눈앞에 세워진 두 대의 밴을 보자 안나는 이내 하연을 그중 하나로 안내했다.“최 사장님, 타세요.”하연은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차에 올라탔다. 그러자 상혁이 이내 그 뒤를 따라 하연의 옆자리에 앉으며 안나에게 말했다.“이사님, 저는 최 사장님과 함께 탈게요.”안나는 순간 화가 치밀었지만 감정을 억제했다.“네. 그럼 저희가 뒤에서 따르겠습니다.”차 문이 닫히고 차가 출발하자마자 하연은 입을 삐죽거리며 시큰둥해서 말했다.“상혁 오빠, 안나 이사님이 오빠랑 같은 차 타려고 하는데 이렇게 대놓고 미녀의 체면을 깎아도 돼요?”상혁은 고개를 돌려 하연을 힐끗 보더니 머리를 쓰다듬었다.“자그마한 머리통으로 대체 뭔 생각을 하는 거야? 쓸데없는 생각 하지 마.”이토록 심각한 표정의 상혁은 처음 보는지라 하연은 애써 웃음을 참더니 농담조로 말했다.“알았어요. 그런데 안나 이사님이 저렇게 예쁜데 정말 안 설레요?”“별 감흥 없어.”무뚝뚝한 상혁의 대답에 하연은 기분이 다시 좋아졌다.그 때문인지 얼굴을 덮쳐오는 바람도 아까보다 한결 부드러워진 것 같았다.하지만 호텔에 도착하자 하연은 그 웃음을 유지할 수 없었다. 호텔 인테리어는 7, 8년 정도 된 데다 한눈에 봐도 낡아 보였다.그때 안나가 차에서 내려 두 사람에게 다가왔다.“부 대표님, 최 사장님, 들어갑시다.”로마에 오면 로마법을 따라야 한다고 하니 하연은 트집을 잡지는 않았다. 하지만 곧 이어지는 안나의 말에 큰 충격을 받고 말았다.“이곳은 이 부근에서 가장 좋은 호텔이예요. 며칠 동안 편안하게 묵었으면 좋겠어요.”‘가장 좋은 호텔?’‘이게?’‘와, 현타 오네.’상혁은 그런 하연의 마음을 알아차리기라도 한 듯 한
“그래서 하나는 부 대표님께 드리는 겁니다.”가방에서 카드키를 꺼내 든 안나는 매력적인 눈으로 상혁의 얼굴을 바라보더니 카드키를 쥐어 주며 윙크를 날렸다.“제 방은 바로 옆방이니 언제든지 환영해요. 깊이 있는 교류를 해도 좋고요.”이윽고 말을 마치자마자 상혁의 대답은 듣지도 않고 엉덩이를 흔들며 떠나갔다.상혁은 카드키를 힐끗 보더니 망설임 없이 쓰레기통으로 던져버리고는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이윽고 하연에게 전화하려 할 때, 하연이 캐리어를 끌며 다가오더니 상혁을 보자마자 그대로 내팽개치고는 상혁의 품에 폭 안기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상혁 오빠, 쥐... 엄청 큰 쥐가 있어요.”어찌나 놀랐는지 얼굴이 창백해지고 몸도 떨고 있었다.놀란 고양이처럼 바들바들 떨고 있는 하연을 보자 상혁은 끝내 웃음을 참지 못했다.“마침 잘됐네, 그럼 여기서 지내.”하연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쥐가 뭐라고, 괜찮아.”상혁의 위로에도 하연은 흐느끼며 고개를 저었다.“엄청 큰 쥐였어요.”말하면서 상혁의 품에서 떨어진 하연은 그제야 상혁의 방이 제 방과 천지 차이라는 걸 발견했다.그 순간 울고 싶은 마음마저 생겨났다.“이건 차별이 너무 심한 거 아니에요?”“됐어. 안방은 네가 써, 난 소파에서 잘게.”하연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고 문을 닫았고, 상혁은 하연에게 슬리퍼를 챙겨주고 캐리어를 안으로 옮겨 주었다.방에 들어오자마자 하연은 이내 침대로 향했다. 커다란 침대에 몸을 맡기니 긴장이 풀리면서 몸이 나른해졌다.“와, 침대 너무 넓고 편하다!”몸을 돌려 옆에 있는 베개를 품에 꼭 안으니 한시도 침대 밖으로 나가고 싶지 않았다.이에 하연은 한참 누워 있다가 느릿느릿 잠옷을 챙겨 욕실로 들어갔다.샤워를 마치고 나니 졸음이 쏟아져 하연은 하품을 하며 헤어드라이기를 챙겨 나왔다. 그 시각, 상혁은 노트북을 끌어안고 업무를 보고 있었다.그러다 하연을 보자 이내 노트북을 덮고 헤어드라이기를 받아 들었다. 졸려서 눈꺼풀과 싸우고 있는 하
이 방에 저와 상혁 두 사람뿐이라는 걸 떠올리자 하연은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답은 깊이 생각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상혁 오빠가 나를 방까지 안아갔나 보네.’“아! 최하연, 정말 미쳤어!”하연은 쪽팔리고 화가 나서 중얼거리더니 상혁을 화장실에서 쫓아냈다.하연의 속내를 알 리 없는 상혁은 어리둥절해서 밀려 나가더니 못 말린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하연이 씻고 나서 화장실에서 나왔을 때, 상혁은 이미 방에 없었다. 그제야 히연은 숨을 푹 내쉬고 식탁에 앉아 아침을 먹기 시작했다.그리고 한참 뒤, 식사를 반쯤 끝냈을 때 밖에서 초인종 소리가 울렸다.당연히 상혁이 돌아왔다고 생각한 하연은 자리에서 일어나 망설임 없이 문을 열었다.“오빠, 카드키 안 챙겼어요?”하지만 말소리는 이내 뚝 끊겼다.그도 그럴 게, 하연의 눈에 들어온 사람은 상혁이 아니라 놀란 표정을 한 안나였으니까.안나는 하연을 삿대질하며 분노를 얼굴에 드러냈다.“설... 설마 어제 여기 있었어요?”“무슨 문제 있나요?”천진무구한 표정으로 되묻는 하연의 모습에 안나는 화가 치밀었다.“부 대표님은 어디 있죠?”하연은 어깨를 으쓱거리며 대답했다.“여기 없어요. 혹시 무슨 일 있나요?”“이제 곧 출발해야 하니 사람 오래 기다리게 하지 마세요.”가시 돋친 말투로 말한 안나는 상대방의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문을 쾅 닫고 떠나버렸다. 그 뒤에 혼자 남겨진 하연은 어리둥절해서 커다란 눈을 깜빡거렸다.하연이 아래층에 도착하자 일행은 이미 기다리고 있었다.그중에서 태훈이 제일 먼저 다가와 공손하게 인사했다.“최 사장님, 잘 주무셨어요?”“응. 다 도착했네?”하연은 고개를 살짝 끄덕이더니 이내 상혁을 돌아봤다. 이윽고 어제 일은 완전히 잊은 듯 뻔뻔하게 손을 흔들었다.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안나의 얼굴은 매우 어두웠지만 상혁 앞에서 체면을 지켜야 했기에 아까처럼 하연에게 화를 내지 않았다.“부 대표님, 오늘 오전 회의가 잡혀 있어 회의하고 나서 오후에 현지 조사를 진행할
“우연의 일치일 거예요. 성만 같겠죠.”“나도 그렇게 생각해. 그리고 최 사장이 어딜 봐서 명문가 아가씨 같아 보여?”안나는 내친김에 하연을 보며 지아의 의견에 맞장구쳤다.“됐어, 오늘 목표는 최 사장이 아니야.”지아는 그 의미를 모를 리 없다.“걱정하지 마세요. 이사님 목표는 부 대표님이잖아요.”“맞아.”안나가 순순히 인정하자 지아가 말을 이었다.“부 대표님 꼭 낚아채세요. 이렇게 훌륭한 남자를 어디 가서 만나요? 저런 남자를 낚아채면 그야말로 사는 세상이 달라진다고요.”안나는 으쓱한 표정을 지었다.“당연하지. 남자는 가끔 청순한 걸 좋아하지만 결국에는 섹시한 걸 못 거절해. 그러니 부 대표도 무조건 나한테 넘어오게 돼 있어.”말을 마친 안나는 자신만만하게 사람들 뒤를 따랐다.일행을 실은 차는 곧바로 HY 그룹으로 향했다. D시 최고의 기업인 HY 그룹은 인테리어부터 매우 웅장하고 화려했다.심지어 대문 앞에는 [최 사장님과 부 대표님을 환영합니다]라는 현수막이 드리워 있었다.모든 사람이 차에서 내리자 현장에는 열렬한 박수 소리와 환호성이 울려 퍼졌고, 직원들이 하연과 상혁을 둘러싼 채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부 대표님, 회의실은 22층입니다. 이쪽으로 오세요.”안나가 상혁한테 살갑게 말하는 사이, 하연이 뒤따라 엘리베이터에 오르려고 했으나 지아가 막아섰다.“최 사장님, 우리는 다음 걸 탑시다.”하연은 그 말에 언짢은 듯 눈살을 찌푸렸다.상혁 역시 문이 닫히고 나서야 하연이 아직 오르지 않았다는 걸 발견하고 태훈에게 물었다.“최 사장은 안 탔어요?”“최 사장님은 미처 못 오른 것 같습니다. 제가 내려가서 확인할까요?”태훈이 대답하자 옆에 있던 안나가 다급하게 끼어들었다.“이제 더는 못 타요. 괜찮아요. 제 비서도 못 탔는걸요. 이따가 최 사장님을 위층으로 안내할 거예요.”안나의 말에 상혁은 더 이상 말하지 않고 일행과 함께 22층으로 향했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마자 미리 기다리고 있던 HY 그룹 대표가 상혁 일행을
이 질문에 송혜선은 눈을 반짝이며 부동건을 바라봤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이젠 나를 당당히 소개해 줄 때가 됐겠지.’ 오늘 이 자리에서, 그녀는 부동건의 정식 아내로서 인정받기를 바라고 있었다. “회장님, 말씀 좀 해보세요?” 조금은 성급한 목소리로 말을 꺼내자, 주변의 시선도 하나둘 송혜선과 부동건을 향했다. 모두 속으로는 뻔히 알고 있었다. 부동건이 과연 예전 애인을 진짜로 정실로 앉혔는지, 눈으로 확인하고 싶어 했다. 부동건은 미소를 지었다. 그는 숨기거나 피할 생각은 없어 보였다. 담백하게 말했다. “오 회장님, 이 사람은 제 딸의 어머니입니다.” 순간, 송혜선은 그대로 굳어버렸다. ‘딸의... 어머니?’ 손에 들고 있던 와인 잔이 살짝 흔들렸다. 금세 넘칠 듯한 와인, 애써 잡고 있는 감정. ‘지금... 이게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지?’ 그리고 가슴 속 깊은 곳에서 억울함이 툭 하고 솟구쳤다. 심지어 손에 힘이 들어가며 하얗게 질린 손등이 떨렸다. 오병지는 단번에 눈치챘고, 싱긋 웃으며 더는 묻지 않았고, 대신 가볍게 말을 건넸다. “축하드립니다. 부 회장님, 여전히 복이 많으시네요.” 부동건은 공손하게 웃으며 송혜선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그 손길엔 무언의 위로가 담겨 있었다. “아닙니다.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나중에 저와 이 사람의 결혼식엔 꼭 오셔서 축배 들어주세요.” 그 말에 송혜선의 눈이 번쩍 뜨였다. ‘결혼식...?’ 순간, 가슴이 쿵 하고 울렸다. 이어서 고개를 들며 수줍게 웃었다. “회장님...” 부동건은 말없이 그녀를 더 가까이 끌어안았다. 더 이상의 말은 없었지만, 그 행동으로 모든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주변의 사람들 시선이 바뀌었다. 예전에는 송혜선을 무시하거나 조롱하던 눈빛이, 지금은 선망과 부러움으로 가득했다. 결국, ‘부동건의 아내’라는 타이틀은 그 자체로 막대한 부와 권력을 상징하는 이름이었다.송혜선은 온
부지윤의 ‘한 달 잔치’는 그야말로 성대한 수준의 파티였다. 초대받은 인사들만 봐도, 그 위세가 느껴졌다. F국 재계의 실력자들, 정재계의 핵심 인물, 이름만 대면 아는 명문가 자제들이 대거 초청됐고, 심지어 부씨 가문 어른들에게도 한 사람도 빠짐없이 직접 청첩장을 보냈다. 이 정도면, 사실상 이 아이를 공식적으로 가문에 편입시키겠다는 의지나 다름없었다. 부동건이 이 아이에게 얼마나 애정을 집착하듯 쏟고 있는지, 이날 행사 하나로 증명되고 있었다. 모든 사람이 지켜보는 가운데, 부동건은 스스로의 체면과 명예를 걸고, 딸을 세상에 내보이고 있었다. ...잔치 당일, 연회장은 유난히 붐볐다. 샹들리에의 조명이 화사하게 반짝였고, 고급스러움이 풍겨 나는 악단의 선율이 분위기를 감싸고 있었다. 송혜선은 산후조리를 마친 직후였지만, 여전히 그만의 풍채와 여유를 잃지 않았다. 예전보다 조금 살이 오른 듯했지만, 그 덕에 오히려 분위기가 더 너그러워 보였다. 그녀가 행사장에 들어서자, 평소 자주 어울리던 재벌가 부인들이 앞다투어 다가왔다. “혜선씨는 진짜 복이 많은 사람이에요. 그 고생 끝에 드디어 볕뜰날이 왔네요.” “부 회장님이 이렇게까지 챙기시는 거 보니까, 이제 정말 한 자리 하시겠어요.” “정말 이러다 조만간 ‘겹경사’ 나는 거 아니예요? 우리라도 미리 축하해줘야 하는 거야?” 송혜선은 그 소리에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얄미울 정도로 여유롭게 미소 지었다. ‘역시 사람은 자리가 높아야 대접 받는 거야.’ “지윤이는 회장님의 첫 딸이잖아요. 그러니까 귀하지 않겠어요? 그리고 회장님이 우리 모녀를 절대 가볍게 보지 않으신다는 건, 여기 있는 분들도 느끼셨을 테고요.” 그 말에 다들 박수까지 치며 웃었다. “이제 우리도 호칭 바꿔야지, 사모님!” 누군가 먼저 그렇게 불렀고, 뒤이어 몇몇이 장난처럼 따라 불렀다. 송혜선은 그 말에 딱히 제지하지 않았다. 오히려 턱을 살짝 들며, 그 호칭이 제법 익숙
진윤은 입술을 꾹 다물었다가, 마침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부남준은 법을 무시하고, 사람을 죽였어요. 부씨 가문이 이 일에 개입한다면... 여론은 가만있지 않을 겁니다. 감싸려 들면 들수록, 결국은 함께 나락으로 떨어지겠죠.” ‘이건 단순한 사건이 아니라, 가문의 존망이 걸린 문제야.’ 맞은편 소파에 앉은 상혁은 다리를 꼬고, 한쪽 손으로 턱을 괸 채 조용히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남자의 눈빛엔 어떤 감정도 떠오르지 않았다. 마치 세속의 먼지 따윈 전혀 묻지 않은 사람처럼. 진윤의 말이 끝났지만, 상혁의 표정엔 미동 하나 없었다. 잠시 침묵이 흐른 뒤, 그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부씨 가문은 항상 법의 테두리 안에서 움직여왔습니다. 그건 변하지 않습니다, 여사님.” 그는 손짓으로 테이블 위를 가리켰다. 거기엔 작은 검은색 USB 하나가 놓여 있었다. “이 안에... 고나희 씨가 남긴 게 있습니다. 여사님께 드리라고 하더군요.” 순간, 진윤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숨이 턱 막히는 듯한 표정으로, USB를 바라봤다. “지금... 뭐라고 하셨죠?” 그녀의 목소리가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나희가... 뭔가를 남겼다고...?’ 사고는 너무도 갑작스러웠다. 딸의 마지막을 함께할 시간조차 없이, 그녀는 세상을 떠났고, 어떤 유언도, 한마디 말도 남기지 못한 줄 알았다. “나희... 그 애가... 무슨 말을 남겼다는 거예요...” 진윤은 입을 틀어막았다. 눈물은 이미 참을 수 없다는 듯 쏟아지려 하고 있었다. 상혁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의 어깨를 부드럽게 감쌌다. “사람이 떠난 건 바꿀 수 없습니다. 하지만 남겨진 마음은, 누군가가 반드시 전해야죠.” 그는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무거운 공기를 뒤로한 채, 조용히 방을 나섰다. 잠시 후.룸 안에서 낮고, 억눌렀던 울음이 터져 나왔다. “나희야...” 진윤은 USB를 손에 쥐고, 세상이 무너진 듯한 표정으로 울고 있
진윤은 송혜선이 내민 공백 수표를 내려다보며 손끝까지 떨렸다. 종이 한 장. 하지만 그 안에 담긴 의미는, 그녀의 심장을 조용히 갉아먹었다. ‘돈이란 게... 사람을 어디까지 비참하게 만들 수 있는 건지.’ 그녀는 허탈하게 웃었다. “돈, 참 좋은 거죠. 수많은 집이 그거 하나 때문에 무너지고, 사람 목숨도 스스럼없이 거래되고.” 그녀의 눈빛이 서서히 날카로워졌다. “고경수도 그랬어요. 결국 돈 때문에 스스로 감방에 들어갔고, 지금 당신은 그 돈으로 내 아이의 죽음을 사겠다는 거죠.” 진윤의 시선이 천천히 송혜선을 꿰뚫었다. “송 여사님의 눈엔... 돈이면 뭐든 다 해결돼요?” 송혜선은 대답하지 않았다. 진윤은 고개를 들었다. 쭉 뻗은 어깨, 흐트러지지 않은 눈빛으로 조용히 말했다. “근데, 저에게 그딴 건... 아무 의미 없어요.” 테이블 위의 수표는 그녀 눈엔 그저 휴짓조각에 불과한 쓰레기였다. ‘내 아이 이름 위에 적힌 숫자가 많을수록, 그 애는 더 억울해지는 거야.’ 그런 진윤의 단호함에, 송혜선도 이내 표정을 굳혔다. “정말 고집 세시네요, 여사님.” 그녀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조용히 진윤 쪽으로 다가섰다. 10센티미터도 채 되지 않는 거리에서, 송혜선은 하찮다는 듯이 고개를 숙여 내려다보며 진윤에게 시선을 내리꽂았다. “그 자존심, 얼마나 오래 버틸 수 있을지 볼까요?” 그 말투엔 이젠 더 이상 숨길 필요 없는 위협이 담겨 있었다. “당신에게는 지금, 아무것도 없어요. 남편은 감옥, 딸은... 하늘에 있어. 그런데도 이렇게 버티겠다고? 부씨 가문이 마음만 먹으면, 당신 같은 사람 하나쯤 사라지게 만드는 건 일도 아니에요.” 진윤은 순간 움찔했지만, 눈동자는 미동도 없이 그대로 송혜선을 바라봤다. 송혜선은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마지막 일격을 날렸다. “참, 고경수 씨 말인데요. 그 사람, 아직 당신한테 마음 있더라. 감방에서 계속 당신 얘기만 했대요.”
“그저... 살아남기 위한 선택이었을 뿐이에요. 여사님. 같은 여자로서, 제 처지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이해해주시리라 믿어요.” 진윤은 피식, 코웃음을 쳤다. 커피잔을 천천히 들어올리더니, 마치 비웃기라도 하듯 천천히 한 모금 머금었다. “이해? 아니요. 전 그런 거 몰라요.” 단칼처럼 냉정하게 잘라버린 말이었다. 그 한 마디에 송혜선의 입술이 경직되며 굳어버렸다. ‘이런, 내 말이 통하지 않을 것 같아...’ 하지만 그녀는 물러서지 않았다. 송혜선은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진윤의 손등을 잡았다. “여사님... 따님 일에 대해서는, 정말...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진윤이 빠르게 손을 뿌리쳤다. 그리고 이내 터져나온 감정. “사과? 한 아이가 죽었는데, 고작 한 마디 사과로 끝내겠다고요?” “아니면... 송 여사님의 눈엔 제 딸 목숨이 그깟 아무렇게나 다뤄도 되는 값싼 거였어요?” 그 목소리는 카페 전체를 울릴 만큼 컸고, 송혜선은 순간 움찔하며 고개를 푹 숙였다. 진윤의 눈을 마주할 용기가 없었다. “죄송합니다... 여사님. 흥분하지 마세요... 결국... 이 모든 건 우리 부씨 집안이... 정말 죄송합니다.” 진윤은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그 웃음 속에서, 참았던 눈물이 터졌다. 결국 끌어 오르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웃으면서 울었다. 그 모습은 너무 아프고, 너무 무너져 있었다. 진윤은 눈물을 닦으려 했지만, 멈추지 않았다. 그 모습을 본 송혜선은 주섬주섬 가방에서 티슈를 꺼내 조심스럽게 내밀었다. 하지만 진윤은 그것조차 거부했다. “됐어요. 그런 거, 필요 없으니까.” “송 여사님, 솔직히 말해봐요 오늘 여기서 만나자고 한 것도 당신 아들 부남준이 꼬투리 잡혀서, 지금 당장 날 만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니까 이렇게 만나자고 한 거잖아요.” “그게 아니라...” “아니긴 뭐가 아니야. 그 애 죽고, 그동안 단 한 번이라도 날
“닥쳐!!” 송혜선이 낮게 내뱉었다. “그 비밀, 평생 당신 뱃속에 묻어둬.”“아니면... 다시는 당신 딸 얼굴 못 볼 줄 알아.” 조봉규는 그제야 자신이 입을 잘못 놀렸다는 걸 깨달았다. 급히 손바닥으로 자기 입을 철썩 때리며 말했다. “화내지 마, 혜선아. 나도 그냥... 기분 좋아서, 그만...” “앞으로 이 집에서 그 얘긴 두 번 다시 꺼내지 않을게. 약속해.” 조봉규의 간절한 다짐에도, 송혜선은 날카로운 눈초리로 그를 한번 쏘아봤다. 곧이어, 목소리를 낮추며 화제를 돌렸다. “부동건, 딸한테 명분은 준다더니, 정작 혼인신고 얘긴 입도 안 뗐어. ‘이러다 또 마음 변하는 거 아니야?’” 그녀의 눈썹이 살짝 찌푸려졌다. ‘안 돼. 남준이 일은 어떻게 해서라도 반드시 준비해야 해.’ 그 말엔 조봉규도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알아봤는데, 유가족 쪽에서 합의서만 받아낼 수 있으면, 그 사건도 다시 볼 여지가 있대.” 혜선의 눈이 번쩍 뜨였다. “진짜야?” “응. 듣자 하니까 고경수 와이프, 진윤... 아직 F국에 있다더라. 기회만 되면 한번 만나봐. 그쪽에서 합의서를 써주기만 하면, 다시 기회는 생길 거야.” “근데 지금 당신 산후조리 중이잖아. 몸이 먼저야. 너무 무리하지는 말고...” 하지만 혜선은 그럴 여유가 없었다. ‘남준이가 내 인생의 마지막 희망이야. 기회가 있다면... 어떤 수라도 써야 해.’ 며칠 후, 송혜선은 드디어 고경수의 아내 진윤과 연락이 닿았다. 하지만 의외로, 진윤은 단 한 마디 망설임 없이 만남을 받아들였다. 두 사람은 평일 오전, 한산한 분위기의 카페에서 만나기로 했다. 커피 향이 은은하게 퍼진 실내엔 손님이 드문드문 앉아 있었고, 송혜선은 긴 트렌치코트에 머리까지 스카프로 단단히 감싸고 있었다. 밖에서는 누구도 그녀를 쉽게 알아볼 수 없게끔. 카페 입구에 들어선 그녀는 안쪽을 빠르게 훑었다. 한눈에 알아봤다. 구석 창가에 앉은, 수척한 얼굴의
조봉규의 말은 하나하나 송혜선의 마음을 쳤다. “정 안 되면, 우리도 그냥 확 뒤엎어. 어차피 잃을 게 없는 사람들이잖아. 신발 신은 놈들이야 겁낼 게 많겠지만, 우린 맨발이야.”‘맞아... 지금이라도 안 붙잡으면, 우린 끝장이야.’송혜선의 눈빛이 점점 확고해졌다. 그렇게 마음을 굳힌 채로, 그녀는 곧장 부동건을 찾아갔다.하지만 부동건은 송혜선의 말에 귀를 기울일 틈조차 없었다. 부남준의 사건이 악화로 치닫고 있었다. 갓 들어온 정보에 따르면, 결정적 증거들이 줄줄이 쏟아지고 있었고, 경찰 쪽 수사도 속도를 내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건... 덮을 수 있는 일이 아니야. 법 앞에선 아무리 부동건이라도 무력하군.’무거운 책임감과 죄책감이 부동건의 어깨를 짓눌렀다. ‘자식 교육을 제대로 못한 죄, 그건 부모의 몫이야...’그저 무기력하게, 결과를 기다릴 수밖에 없는 상황. 송혜선의 말은 부동건의 귀에 닿지도 않았다.그는 오히려 조용히 갓 인큐베이터에서 나온 막내딸을 품에 안았다. 부드러운 솜털이 보일 정도로 작고 여린 얼굴. 손가락 하나만 잡혀도 녹아버릴 듯한 느낌이었다.‘이 아이는... 내 마지막 기적일지도 몰라.’부동건은 딸을 안고 있을 때만큼은 세상의 복잡한 모든 것이 잠시 잊히는 듯했다. 그리고 눈가가 부드러워졌다.“딸아, 네 엄마랑 진짜 많이 닮았네. 크면 예쁘겠다... 아주.”그는 미소를 머금으며 속삭였다.“지윤이라고 이름 지었어. 복 많은 아이라고 하더라. 부씨 가문 첫 딸, 제대로 키울 거야. 우리 지윤이는, 아빠의 제일 소중한 딸이 될 거야.”‘그래... 남준이는 못 지켜도, 이 아이만큼은...’부동건의 얼굴은 어느새 기쁨으로 가득했다.하지만 그 모습을 바라보는 송혜선의 속은 서늘했다.‘정작 내가 말하려던 건, 이게 아닌데...’그녀는 조용히 손을 뻗어 아이를 부동건의 품에서 안아올렸다.“조심해요, 아직 작아서... 그렇게 막 들면 안 돼요.”부동건은 걱정스러운 말투로 송혜선을 바라보며 말했다.“이
부동건의 얼굴빛이 어두워졌다. 밝은색으로 혈기가 도는가 싶더니 이내 새파랗게 질리더니, 순식간에 붉어졌다.‘이게 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건가...’조진숙은 그런 부동건의 반응엔 전혀 개의치 않았다. 차갑고 단호한 말투로 말을 던지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돌아섰다.“당신 입으로 한 말, 잊지 마.”철컥-곧이어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조진숙은 완전히 그의 시야에서 사라졌다.남겨진 부동건은 깊은숨을 내쉬었다.‘딱 한 발, 그 한 걸음이 이렇게까지 망가뜨릴 줄은 몰랐네...’하지만 그는 여전히 조진숙의 마지막 말이 담고 있던 진짜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냥 평소처럼, 그저 ‘조심하라는 경고’ 정도로 여긴 것이다.그 후 부동건은 지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형사 전문 변호사를 찾았고, 부남준의 사건을 맡겼다. 그것뿐, 그 이상의 움직임은 없었다.소식을 들은 송혜선은 더 이상 산후조리고 뭐고 할 틈이 없었다. 벌떡 몸을 일으키며 날카로운 눈빛으로 외쳤다.“남준이는 부동건 당신 아들이란 말이야. 그런데도 이 상황에서 이 사람이 저렇게 손 놓고 있는다고?”그녀에게 있어 부동건은 F국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가진 재벌이었다. 사람 하나 죽었든, 법을 어겼든, 그 모든 걸 덮는 것쯤은 그에게 있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그 정도 힘도 못 쓰는 사람이었으면, 애초에 내가 그 옆에 왜 있었겠어?’그런데도 부동건은 변호사 하나 붙인 걸로 끝이라니. 송혜선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안 돼. 내가 직접 가서 말해야겠어.”그녀가 일어나려는 순간, 조봉규가 급히 다가와 그녀를 막아섰다. 그리고 조심스러운 어조로 송혜선을 다독였다.“혜선아, 지금은 당신 몸이 먼저야. 다른 건 잠시 내려놔.”하지만 송혜선은 남자의 손을 거칠게 뿌리쳤다.“남준이 내 아들이야. 내가 안 나서면 누가 나서? 그 애랑 나, 이 지경이 되도록 얼마나 참고 견뎠는지 몰라? 이제 와서 그냥 두라고?”송혜선은 황급히 신발을 신고, 나갈 채비를 했다. 그 옆에서 어쩔 수
“지금 그 말, 무슨 뜻이야?”불길한 예감이 부동건의 마음 한켠에서 스멀스멀 피어오른다. 그는 조진숙을 매섭게 응시하며, 진실을 쫓아가려 했다.“빚은 갚아야 하고, 사람을 죽였으면 그에 대한 대가는 받아야지. 이번엔, 저승사자라도 그 애를 못 구해.”조진숙은 단도직입적으로 진실을 꺼내놓았다.“당신이 그 귀하디귀한 막내아들이, 고경수 딸을 죽였어. 그 교통사고, 전부 부남준이 계획한 일이야.”“지금은 모든 증거가 경찰 손에 들어갔고, 고경수 집안도 전부 알아버렸어. 딸을 먼저 보낸 부모가, 가만히 있겠어? 반드시 그 애한테서 정의의 심판을 받아내겠지.”부동건의 몸이 비틀거렸다. 얼굴엔 믿을 수 없다는 충격이 가득했다.“그럴 리가 없어... 말도 안 돼!”남준에 대한 부동건의 인식은 그저 ‘야망이 좀 있는 아들’일 뿐이었다. 부동건이 동남아시아 사업권을 남준에게 통째로 넘겨준 것도, 송혜선과 남준의 관계를 정식으로 인정해주려 했던 것도, 다 막내아들을 위해서였다. ‘내가 뭘 놓친 거지? 어떻게 그런 짓을...?’“그뿐만이 아냐. 약혼식 당일에 하연이를 납치했다는 사실도 몰랐지? 상혁이가 제때 도착하지 않았으면, 최씨 가문의 사람들 앞에서 얼마나 망신당했을지 그건 알고 있어?”조진숙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부동건의 표정이 무너졌다. ‘이건... 너무 심각해.’ 그 어떤 상황도 예측하지 못했던 부동건에게는 그야말로 청천벽력이었다.“미친 자식...!”부동건은 책상을 향해 발길질을 했다. 흔들리는 가슴과 거칠어진 숨결은 그가 얼마나 분노했는지 그대로 말해주고 있었다.하지만 조진숙은 그런 전남편을 보면서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그저 담담하게, 냉정하게 말을 이었다.“형사사건이야. 증거도 확실하고, 죄도 여러 개. 법대로라면, 당신이 제일 잘 알잖아? 당신의 막내아들 부남준이가 어떤 판결을 받게 될지...”부동건은 몇 걸음 뒷걸음치더니, 털썩 의자에 주저앉았다. 그리고 얼굴엔 절망과 피로가 교차하고 있었다. ‘이건...